<BGM Two Feet - Her Life>
신은 요상하다. 사람에게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슴 안에 넣어 놓고서, 사랑하는 마음을 강제로 끊을 수 있게는 만들어 놓지 않았다. 대신 넣어놓은 게 미워하는 마음일까. 지민은 그 진리를 중학교 1학년에 깨우쳤다. 등교 첫날 첫교복을 입고, 첫수업시간을 맞아 담임선생이 처음 인사한 날이었다. 같은 반 맨 앞줄 여자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단발머리에 눈이 토끼처럼 동글동글한 여자아이는 꺄르르 웃고 있었다. 같은 초등학교에서 올라온 건지 시끌벅적한 여자아이들 무리 사이에서 그 여자아이만 빛이 났다. 명찰 위에 새긴 이름을 봤다. 유지은. 모든 게 처음인 그날 사랑까지 처음 시작됐다.
지은은 활달했다. 거침없이 남자아이들과 어울려 창문을 깨부수는 자잘한 사건사고를 일으켰고, 나서서 반 분위기를 주도했다. 단발머리의 예쁜 여자아이는 뒤에서 좋아하는 남자아이들 역시 많이 달고 다녔다. 소심한 지민은 그 무리 중 하나였다. 반장투표에서도 당당하게 후보로 나와 시원하게 웃는 지은에게 한 표를 던졌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사건은 으레 그렇듯 축복인지 저주인지 모르게 갑작스레 찾아온다. 담임의 추천으로 부반장의 역할이 지민에게 왔다. 지민은 처음으로 지은과 가장 가까운 거리, 약 20센치를 남긴 거리를 유지하고 단상 위에 같이 올라 박수를 받았다. 지은이 먼저 손을 내밀어 인사했다. 안녕? 너 맨날 조용하게 앉아있던 박지민이지? 우리 잘해보자. 하얗고 예쁜 손을 잡는데 심장이 쿵쾅거렸다.
풋사랑은 익어갔다. 2학년과 3학년때 같은 반이 되고, 고등학교까지 같은 학교로 배정 받으며 친근해지는 속도와 함께 마음은 점점 묵직해졌다. 시간이 흘러 소년과 소녀도 컸다. 소심하기만하던 지민은 친구들 사이에서 환하게 웃으며 사람들 앞에 자연스럽게 나설 수 있는 용기를 길렀고, 동네 골목대장처럼 활달하던 지은은 머리를 길렀으며, 입에 달고 살던 욕을 끊고 부드럽게 미소 짓는 법을 알았다. 고등학교 1학년였다. 지민이 소중히 길러온 사랑은 와장창 흩어져버렸다. 지민아 나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어. 고백을 들어줘 사귀게 됐다며 수줍게 지은이 말했다. 앞에서 축하의 박수를 친 멋진 우정을 가진 친구 박지민은 집에 돌아와 방에 처박혀 울었다.
지은은 그 뒤로도 총 4번의 연애를 더했다. 헤어지고 울 때 달려가 눈물을 닦아준 건 지민이었으며, 다시 새로운 사랑이 찾아왔다 마음을 고백할 때 자기 일처럼 좋아해준 사람 역시 박지민이었다. 지민아 너는 연애 안해? 너도 해. 언젠가 지은이 지나가는 말로 툭 던졌다. 나는, 글쎄. 공부하려고. 멋진 친구 박지민은 익숙하게 제 마음을 숨기는 방법을 배웠다. 연애에 울고불고 모든 걸 받친 것 같던 지은은 지민을 따라 고등학교 3학년 때부터 공부하기 시작했다. 다행이라 해야할지 지긋지긋하다며 욕을 해야할지. 끝날 것 같지 않은 수험생활이 끝나고 지민과 지은은 또 떡하니 같은 대학교에 붙어버렸다.
"지민아, 인사해. 여긴 내 남자친구. 내가 말해서 알지?"
"응. 얘기 많이 들었어요 정국씨. 지은이가 얼마나 자랑을 하는지. 박지민이라고 합니다."
"저도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말 편하게 하세요. 선배님이시잖아요."
"그럴까."
토끼같이 순한 눈망울로 정국이 웃었다. 지민은 정국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은 아마 휴학생이거나, 자퇴생이거나, 그도 아니면 대학교에서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거나. 너무나도 유명한 잘생긴 신입생은 경영학과를 술렁이게 만들었다. 살다 보니 그런 경우도 있나 보다. 단순한 조건, 오직 얼굴이 심각하게 잘생겨 유명해지는 그런 경우가. 지민은 겪어보지 못한 경험을 바로 앞 전정국이라는 새내기는 만들어내고 있었다. 지은이 대단해 보였다. 이미 열 손가락이 넘어가는 사람이 눈에 불을 키고 노리고 있는 전정국을 자기 손아귀에 넣어 놓았다.
"둘이 잘 있어. 나 강의 다녀올 테니까. 싸우지 말고."
"잘 다녀와요 누나. 졸지 말구요."
"어머, 졸긴? 지민아 너가 말해줘라. 내가 중학교때부터 얼마나 모범적인 학생이었는지."
"근데 지은아 예술관까지 가는데 오래 걸리지 않아? 지금 15분 남았는데."
"아 출석 처음에 부르는데. 나 간다! 정국아 끝나면 전화할게!"
지은이 시계를 보고 힐을 신은 발로 뛰었다. 지민은 어색하게 웃으며 사라지는 모습을 보다 한마디 남겼다. 지은이가 원래 좀 덜렁거려요. 중학교때부터 많이 뭔가 빼먹어서 자주 챙겨주긴 했어요. 아 이런 얘기했다고 하면 지은이한테 혼나려나? 눈웃음을 유지한 채 정국 쪽으로 시선을 틀었다. 사라지는 사랑스러운 여자친구를 보고 있을 거란 예상과 달리 정국은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갈까요?"
"지은이 강의 끝나고 올 때까지 있어야 하니까…밥 안 먹었으면 밥 먹을까?"
"저 밥 좋아해요. 선배님 먹고 싶은 거 있어요?"
"나? 어…감자탕 먹을래? 잘하는 집 아는데."
정국은 흔쾌히 동의했다. 여기 지은이랑도 자주 가는 곳이거든. 맛있어. 이모님두 친절하시구. 덧붙이며 지민은 걸음을 옮겼다. 못내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은근히 정국을 훑어봤다. 얼굴은 말할 것도 없고 탄탄한 허벅지며 균형 잡힌 몸매까지 완벽했다. 점점 후회가 된다. 지민아 한번 봐줘. 원래 같은 남자끼리보면 괜찮은 사람인지 아닌지 더 잘 알잖아. 내가 이런 부탁할 수 있는 친구 너밖에 없는 거 알지?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은 속이 없는 거 같다. 뒷말에 홀려 또 홀랑 나와버렸다. 별 수 없긴 하다. 애초 박지민은 한번도 지은이 해온 부탁을 거절한 적이 없었다. 감자탕 집에 도착해 신발을 벗고 마주앉았다.
"선배님 누나랑 중학교때부터 친한 사이라면서요?"
"응 같은 반 반장 부반장이었어."
아무래도 연하 남자친구는 여자친구의 이야기가 궁금한 모양이다. 당연하겠지. 권태기가 온 커플도 아니고 이제 막 사랑을 시작한 커플이다. 지민은 정국이 쏟아낼 애정 어린 질문을 기다렸다.
"진짜 오래되셨구나. 그런데 선배님 중간고사는 잘 보셨어요? 저 이번에 큰일났어요. 선배님한테 팁 좀 얻어가려구요. 경영학개론 어떻게 하면 점수 잘 따요?"
"나도 이번에 중간고사 망했어."
"에이, 우리과 과탑 선배잖아요. 팀플도 한다면서요. 팀플 빡세게 시켜요?"
"아아 생각난다. 팀플 처음이지? 믿는 종교 있어? 종교 있으면 아무거나 하나 챙겨가. 성경책이나 염불이나. 그거 가지고 만약 내가 이 전공책으로 쟤 대가리를 찍고 싶다, 할 때마다 만지면서 참아."
"아 큰일 났다. 종교는 없고 주먹만 잘 쓰는데."
정국이 손을 탈탈 터는 시늉을 한다. 정국은 구김없이 웃고 예의도 까먹지 않았다. 아 밥 나왔다. 선배님 제가 떠드릴게요. 국자를 쥐고 탕을 휘젓는데 은근슬쩍 팔근육도 보인다. 신기하게도 정국은 지은과 관련된 이야기를 나서서 묻지 않았다. 과 후배와 약속을 자발적으로 잡은 건지, 아니면 친한 친구의 남자친구 됨됨이를 보기 위해 만난 건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물 흐르듯 흘러가는 대화 속에서 지민은 정신을 차리고 큼큼 헛기침을 하며 운을 뗐다.
"뭐 지은이 궁금한 거 있어? 내가 살아있는 유지은 자서전이니까 다 물어봐도 돼. 안 좋은 거 빼고 알려줄게."
"아 그래요?"
생각보다는 시큰둥한 반응이다. 숟가락을 물고 인상을 쓰며 질문을 고민한다. 보통 연애초기에는 술술 나와야 하는 거 아닌가.
"지금까지 몇 명 사귀어 봤어요?"
"뭘 그런걸 물어. 질투할라구?"
"아 질문 좀 그런가? 그럼 선배님은요?"
"난 없어."
첫사랑이 옆에 붙어있다 보니 다른 곳에 눈길이 가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의무적으로 안 사귀기도 했다. 첫사랑이 옆에 있는데, 이미 마음은 다른 곳에 주었다 확신을 하고 스스로를 고립시켰다. 그러는 넌 몇 명 사귀어 봤는데. 정국은 어어, 고민하더니 미간을 찡그렸다. 손가락까지 동원해 수를 꼽아본다. 지민은 황당했다. 지금 이 자리가 대충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는 정국도 알 것이다. 상식적으로 없는 거짓말도 만들어가며 잘 보여야하는 게 기본 행동이다. 화려한 여성편력을 자랑하는 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
"사실 제가 좀 오는 사람 안 막고 가는 사람 안 막거든요."
"아…그래?"
"네."
정국이 하하 웃는다. 잘생기고 순진하고 성격도 좋은데…후배로는 괜찮은 거 같은데…. 지민이 할말을 찾지 못하고 눈알만 데굴데굴 굴렸다. 벨소리가 울렸다. 정국의 핸드폰이었다. 흘긋 불이 환하게 들어온 핸드폰의 화면을 살폈다. 지은누나. 사귀는 사이치고는 극히 담백한 호칭이었다. 잠시 받을게요. 정국은 물을 한잔 마시고 천천히 통화버튼을 눌렀다.
"어 누나. 응 지금 선배님이랑 같이 밥 먹으러 왔어. 일찍 끝내주셨네. 응. 아 진짜?"
아리송하다. 여태 정국은 지민이 만나본 지은이 사귀었던 남자들 중 가장 괜찮은 첫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오히려 거짓말로 과장된 애정을 표현했던 지은의 세번째 애인보다 진실된 느낌이 괜찮았다. 그런데 뭔가 좀. 설명할 수 없는 미묘한 괴리감이 들었다. 그래? 꼭 가야하는 거래? 안됐네. 누나 보고 싶은데. 어쩔 수 없지 뭐. 아냐, 미안해 하지마. 다정하게 전화를 받고 마무리하며 정국이 끊었다.
"누나 교수님이 갑자기 부르셔서 오늘 못 올 거 같대요."
"그러게 내가 그렇게 지각하지 말라고 했는데. 유지은, 어휴."
"다음에 또 반드시 만나야겠네요, 우리."
순간적으로 정국의 눈망울이 반짝 빛나 보인다. 신난 표정을 감추지 않고 찡긋 광대를 올려가며 웃는다. 여자친구가 못 온다는 말을 들은 애인이 나타낼 반응과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았다. 지민은 가만 정국을 지켜보다 물었다.
"지은이 좋아해?"
"네?"
정국이 잘생긴 얼굴로 시원하게 웃는다.
"그러니까 만나죠."
"…음, 그렇지?"
"네. 선배님 우리 이대로 헤어지긴 아쉬우니까 다른 곳 갈까요? 저 술 사주세요."
정국은 붙임성 좋게 눈꼬리를 접었다. 그럴까? 순한 지민은 감자탕값까지 계산하고 술집까지 찾아갔다. 한잔 두잔 잔이 차고 비고 술병이 쌓여갔다. 뒤로는 무난한 대화의 연속이었다. 같은 과 다정한 선후배사이처럼. 훈훈하게 술잔을 주고 받고 학교에 관련된 이야기를 이어갔으며, 종종 웃긴 이야기가 있으면 같이 와르르 웃음을 쏟아냈다. 찰랑이는 술잔처럼 정신도 찰랑이는 단계까지 지민은 취하고 말았다. 눈꼬리를 휘어접으며 같이 웃음을 터뜨릴 때마다 정국의 어깨를 아프지 않은 손길로 콩콩 치기도 했다.
"정국아 너 되게 괜찮다…나는 막, 너가 엄청 우리 과에서 소문이 많길래 까탈스러울 줄 알았거드은…."
"나한테 소문이 있어요?"
"응 너 잘생겼잖아. 경영과 훈남."
"선배도 유명하잖아요."
"으응? 나?"
지민이 취한 눈으로 깜빡거렸다. 학점 높아서 그른가…공부를 열심히 하긴 했지. 웅얼거리며 한잔을 더 마시는데, 정국은 알 듯 말듯한 미소를 지었다. 술집은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온 학생들로 붐볐다. 가게에서 틀어놓은 최신 힙합가요와 함께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전쟁터보다 시끄러웠다. 정국은 낮게 흘리듯 한 마디를 풀어놨다.
"경영과 호구로."
술잔을 넘기던 지민이 미간을 얕게 찡그렸다.
"으응? 뭐라구? 못 들었어."
"아니에요. 당연히 과탑인데 유명하죠. 선배님 한 병 더 시켜도 돼요?"
"시켜, 시켜. 다 시켜도 돼."
알딸딸한 취기에 기분이 좋아 지민은 발갛게 달아오른 볼로 헤실헤실 웃었다. 술잔이 더 쌓인다. 평소 술자리에서는 취할 때까지 마시지 않는 편이었다. 지은과 있는 자리라면 지은을 챙겨야했고, 과모임에서는 추한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자제했다. 이상하게 오늘 정국과 처음 만난 자리임에도 경계심이 풀렸다. 듬직해보여서 그런가. 아니면 성격이 꽤 맞아서 그런가. 느슨하게 풀린 얼굴로 헤헤거리던 지민은 테이블에 얼굴을 박고 말았다.
"선배님 많이 취하신 거 같은데."
"그냥 좀 어지러워서…."
"이만 일어날까요?"
"그럴까…아, 으우…."
"아 죄송합니다. 조심하세요 선배님. 제가 부축 해드릴게요."
비틀거리다 옆 테이블에 치일 뻔한 지민을 정국이 건져냈다. 한 팔로 지민을 부축한 정국은 남은 손에 무리없이 가방 두개까지 들었다. 미련없이 제 카드를 내고 술집을 빠져나왔다. 선배님 집 어디에요? 지민은 그날따라 유난히 더 골이 뱅뱅 돌았다. 밤하늘이 파란색으로 보이고 아스팔트 바닥이 진흙탕처럼 울렁이고. 정국이 하는 말도 희끄무리하게 들렸다.
"집이…집? 음…내 집이…나 집 없는데. 이 비싼 서울땅에 내집마련을 아직 못했어."
정국은 옹알거리는 지민을 보고 작게 웃었다. 아 귀엽네.
"그럼 제 집 갈까요? 하루는 괜찮아요. 자취해서."
지민은 열렬히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데나 가서 어서 눕고 싶었다. 일어서니 술기운이 감당하지 못할 만큼 훅 올라온다. 일생 일대로 가장 많은 주량을 돌파한 날이었다. 일사천리로 자취방에 입성했다. 정국은 지민을 내려놓고 가방을 구석에 던졌다. 바닥에 눕자 핑글핑글 돌던 머리가 조금 나아진다. 죽을 것 같은 단계에서 꿈과 현실을 구분 못하는 단계까지는 왔다. 정국이 무어라 더 말을 던졌으나, 웅웅거리는 머리는 받아들이지를 못했다.
"선배님?"
누군가가 다가온다. 누군가는 제 머리 아래에 손을 넣고 들어올려 베개를 밀어 넣어주었다. 흐릿한 시야로 커다란 눈이 보인다. 동글동글하고 커다랗고 맑은 눈. 자연스럽게 익을 대로 익은 사랑의 이름이 생각났다.
"지은아…."
손이 멈칫한다.
"선배님 저 전정국이에요."
"내가 너 진짜 좋아했는데…."
"……."
"모르냐 왜…."
지민과 가까운 거리에 붙은 정국이 순간적으로 입매를 비틀었다. 술기운이 푹푹 새어나오는 숨소리를 들으면서도 멀쩡했던 미간이 짜증 난다는 듯 모였다.
"걔 알아요."
"…으응…."
잘 들리지 않는다. 이건 꿈이다. 지민은 팔을 뻗어 눈앞에 보이는 형체의 목에 팔을 둘렀다. 그리고 끌어당겼다. 따뜻하니 기분이 좋았다. 아 시발. 작은 목소리가 귓가에서 울려퍼진다. 선배님, 지민아. 누가 제 이름을 부른다. 듣기 좋은 울림이라 응, 응 꼬박꼬박 맞춰 대답했다. 다른 말은 나오질 않고 알았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거리기만 하고 있으니, 입술에 부드럽고 따뜻한 게 붙어왔다. 감촉이 좋았다.
그날, 지민은 인생에서 또 다른 처음을 겪었다. 전정국과 둘이.
* * *
지민은 입술을 달달 씹었다. 폰을 들었다 내려놓았다 화면을 껐다 켰다를 반복했다. 비상사태였다. 미쳤지. 앞날이 막막했다. 무슨 낯으로 지은을 보고, 일을 저질러버린 정국을 볼지 판단이 안 섰다. 소설에도 안 나올 이야기였다. 짝사랑하는 여자의 애인과 술 마시고 발정난 길고양이들처럼 붙어먹었다는 막장 이야기는. 말그대로 미친 섹스였다. 짤막한 대화 몇 개가 머릿속을 후벼팠다가 떠났다.
아, 으, 천, 천히 흐….
선배님, 아 시발, 너무 좋아요. 선배님 지금 진짜, 하, 야해.
갈 거, 흣, 갈 거 같은, 아!
나도요. 나도, 지민아.
질척거리는 물소리가 났다. 문란한 비디오 한편은 지민이 여태 마주한 어느 것보다 가장 외설적이었다. 생명줄처럼 정국의 어깨에 팔을 감고, 마지막에 다리는 허리에 감았다. 정국은 몇 번이나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 호칭도 마구 뒤바꾸며 원해는 대로. 선배님, 지민아, 지민이 형. 더는 되새길 용기가 없다. 지민은 상황을 정리했다. 정국에게 전화번호를 알려주지 않았으니 연락은 오지 않을 터였다. 하나는 통과고, 다른 하나는. 붕 진동이 온다. 지은이었다. 지민은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어 지은아."
[뭐야 너 왜이렇게 목소리가 안 좋아?]
"방금 좀 자다 일어나서…."
[수상한데…아무튼 어때? 정국이 괜찮아? 내가 만나고 가면서 전화해달라고 했더니 너 3일째 연락 안 하더라.]
"미안."
지민은 죄책감으로 심장이 바짝 조여왔다. 끝나고 집에 가질 못했다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없었다. 그래, 가긴 갔다. 정국과 절정으로 몇 번이나. 입안이 바짝 말라온다. 지은은 서운하다는 이야기와 그 자리에 빠져 아쉽다는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다음에 셋이 만나자. 결국 다음이라는 약속까지 나온다. 가만 들어주던 지민은 차분히 입을 열었다. 근데 지은아, 하고.
"걔랑 헤어지는 게 좋을 거 같아."
[뭐?]
"제일, 제일 안 좋은 사람이야. 너한테."
[…왜?]
"느낌이 그냥."
[정국이가 실수라도 했어? 그럴 애가 아닌데.]
선배님, 하 저 더 빨리 움직여도 돼요? 포박하듯 꽉 끌어안고 속삭이던 목소리가 다시 머릿속을 댕댕 울렸다. 섹시하게 찡그려지던 눈가를 애써 지워냈다. 지민은 단호하게 말했다.
"나한테 봐달라고 한 거잖아. 걔는 아니야. 헤어져."
[…나 좀 지금 당황스럽다? 처음인데? 박지민이 내 애인 보고 헤어지라고 하는 건.]
"헤어지고 아예 연락도 하지마. 번호도 바꿔."
[아우씨 말투 엄청 차갑네. 여보세요? 박지민 폰 맞나요? 야 너 이렇게 사람 싫어하는 거 처음 본다.]
"지은아 내 말 들어."
장난을 쳐봐도 튕겨나왔다. 지민은 한없이 진지하게 경고했다. 아마 지민이 이렇게 진지한 건 지은이 정신 못 차리고 고등학교 2학년 내신까지 말아먹었을 때 이후로 처음이었다. 수화기 너머 지은은 잠시 침묵했다. 마찬가지로 당황한 듯했다. 그럴 만도 하다. 사람 싫다는 소리 잘 못하는 박지민이, 바보스러울만큼 순둥이 박지민은 남 싫다는 소리 한번 안하고 살아왔었다. 지민이 지은을 잘 아는 만큼 지은도 지민의 무른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일단 너 말은 알겠어. 근데 내가 좀 갑작스러워서 그런가 받아들이기 힘들다. 다음에 다시 통화하고 나 지금 과사 가봐야 되거든.]
"…그래."
[내일 공강 있지? 그때 보자.]
"응."
지민은 전화를 끊고 침대에 무너지듯 엎어졌다. 눈을 뜨고 같이 옷을 벗고 누워있는 사람이 전정국이라는 사실을 안 아침. 발끝 아래로 떨어진 심장을 줍기도 전에 바닥에 널부러진 옷을 꿰어 입고 도망갔다. 도무지 이 비극을 해결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휴학할까. 이미 휴학을 한번 했고 또 하기에 집에 받칠 명분이 부족하다. 지민은 어떤 방식으로든 정국을 다시 만나지 않기로 결심했다. 감자탕집에서 정국이 보여준 시간표를 기억에서 더듬었다. 전체 학년이 같이 들을 수 있는 전공과목 하나만이 겹친다. 컴퓨터를 켰다. 학점포기신청 버튼을 눌렀다.
지민은 죽은 듯 학과 생활을 보냈다. 원래도 과모임에 잘 얼굴을 비추는 편은 아니었지만, 더더욱 뒤로 숨어버렸다. 워낙 파묻혀 지내다 보니 정국을 만나는 일은 없었다. 지은은 지민에게 정국을 다시 만나보라는 부탁을 해왔다. 지민아, 처음 봐서 그래. 다시 한번 봐봐. 실수한 거도 없다며. 근데 왜 무작정 헤어지라고 하는 건데. 이유를 들려줘야 나도 납득을 하지. 그러지 말고 우리 셋이 한번 다같이 보자. 처음으로 지민은 지은의 부탁을 거절했다. 살짝 당황하는 지은을 보고 흔들려야 할 마음이 둘도 없이 굳건했다. 정국을 다시 만나느니 바다에 빠져 죽는 선택을 할 것이라 이미 마음 먹었다.
지은은 피곤한 안색이 늘었다. 핸드폰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어두운 안색에서는 한숨이 푹푹 줄기차게 터져 나왔다. 지민은 쉽게 눈치챘다. 정국과의 애정전선에 문제가 생긴 게 확실했다. 다른 때라면 득달같이 상담했겠지만, 이미 지민이 정국과 헤어지라 단칼에 못을 박아놓은 터라 혼자만 앓고 있었다. 종종 아 너무 힘들다, 요즘 좀 많이 힘들다 하는 말을 필두로 운을 띄우기도 했지만 지민은 모르는 척했다. 정국의 이름을 듣기만해도 현장을 걸린 도둑처럼 심장이 쿵쾅거렸다. 정국을 처음 만난 비극이 시작된 그날로부터 2주가 지난 때였다. 해가 떨어지고도 도서관에서 레포트를 작성하고 있었다. 폰이 붕 울리고 문자가 왔다. 모르는 번호였다.
[선배님]
지민은 도서관이라는 사실도 잊고 비명을 터뜨릴 뻔했다. 저절로 숨이 흡 멈췄다. 흔한 호칭에 그 얼굴만 생각났다. 연이어 문자가 왔다.
[저 참을성 없는데. 계속 숨으실 거예요?]
번호는 어떻게 안 거야. 지민은 자동적으로 누가 볼세라 폰을 쥐고 몸을 웅크렸다.
[둘이 만나기 싫어요?]
볼 것도 없이 번호 차단을 누르기 직전이었다.
[셋이 만날 자신은 있어요?]
[지은 누나가 그냥 선배님 공강시간에 찾아가자던데 내가 안 갔어요]
[그땐 그랬는데 근데 이제 선배님이 너무 보고 싶어서 못 참겠어요]
없던 욕도 울컥 올라왔다. 도망은 끝났다. 타임머신을 사서 과거를 뜯어고치지 않는 한 부딪혀야 할 문제였다. 지민은 답장을 보냈다. 약속 잡아. 곧바로 또 정국으로부터 문자가 온다.
[둘만?(하트)]
미친놈인가 봐…. 지민은 마지못해 답장했다.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