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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28 01:52

[뷔민] 1%의 미묘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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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PROLETER DON'T MEAN A THING>
















#1



 사랑은 고통스럽다. 신물나게 썼으며 외로웠다. 누가 사랑이 달콤하다 했던가. 지민은 제 앞에서 그 말을 쏟는 인물이 있다면 기꺼이 머리를 한대 갈겨줄 수 있었다. 커피샤워도 괜찮았다. 아니면 이를 득득 갈며 팔을 물어버린다던가.

 아 사랑. 오오 사랑. 그 이름도 찬란한 사랑. 지민은 어디선가 읽은 소설의 문구를 떠올렸다. 그렇다. 사랑이다. 이것은 사랑이다. 아니라면 이럴 리 없다. 보고만 있어도 입꼬리가 스물스물 하늘로 향하고, 눈이 저도 모르게 졸졸 그 사람을 따라가고, 다른 사람에게 그 사람이 관심이라도 보일라치면 속이 미친 듯 꼬인다. 작은 웃음마저 자기 전 머릿속에 동동 떠다닌다. 지민은 이 감정을 사랑이라 확신했다. 인생 스물넷을 살아오며 처음 느끼는 감정이었다.

 제 사랑은 완벽했다. 나이는 스물둘. 저보다 두 살 어리지만 괜찮았다. 배려와 적절한 유머센스는 나이를 막론하고 어디를 가나 예쁨 받았다. 외모도 빼어났다. 지민은 카페 문을 열고 처음 제 사랑이 들어온 순간 카페가 영화 세트장으로 바뀌는 줄 알았다. 세상에. 우리 가게에 실수로 천사가 날아든 거 같아. 남들 다 똑같이 입는 두꺼운 파카를 그리 잘 소화하는 사람은 연예인 화보밖에 보지 못했다. 눈을 툭툭 터는 동작도 너무나도 멋져서, 지민은 얼어 멍청하게 사랑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카페 사장님이 한참을 목소리 높여 부를 때가 되어서야 정신이 깨어났다. 어디 정신을 그렇게 빼놓고 있냐 사장님이 꾸지람을 늘어놨을 때는, 흥미롭게 바라보고 있던 영화가 끊긴 것처럼 방해를 받은 기분이었다. 월급을 주는 위치만 아니었다면 짜증을 냈을지도 모른다. 참았다. 아 저 어제 잠을 늦게 자서, 헤헤. 사장님께 어설픈 미소를 지으며 변명을 둘러댔다. 그리고 참는 자에게 복이 오나니. 짜증은 엎드려 절하고 싶은 감사함으로 바뀌었다. 지민아, 새로 온 알바생이니까 너가 잘 좀 가르쳐줘.

 사랑의 이름은 전정국이었다. 지민은 하루종일 정국의 생각만 했다. 별을 찍어 눌러놓은 것만 같은 까만 눈동자. 웃을 때는 기가 막히게 휜다. 형, 형 하고 부르는 입술. 취향이란 형광등이 정국을 보자마자 부리나케 깜빡거렸다. 깜빡거리다 못해 과부하로 터질 지경이었다. 그러나 지민의 사랑은 딱 일주일간만 완벽했다. 어느 날 카페로 들어온 구두소리는 모든 것을 망쳐놓았다. 붉은 립스틱을 짙게 바른 여성은 정국을 찾았다. 카페모카를 만들던 정국이 여성의 테이블로 반가운 듯 뛰었다. 웃음꽃이 테이블에 피어났고, 여성은 정국을 꽉 끌어안으며 볼에 뽀뽀를 남기고 사라졌다. 정국은 빼지 않았다. 정국의 볼에 남은 립스틱 자국을 본 순간 깨달았다. 망했다. 제 사랑은 망해버린 것이다. 달콤하고 꿀 떨어지는 로맨스는 끝이고 장르는 호러로 바뀌었다.



“그래서 네가 날 도와줘야 한다 이 말이지!”

“여자친구 있다며.”

“야! 아니라고!”



 지민이 씩씩거리며 성질을 냈다. 그러다 아차, 하고는 카운터 쪽을 흘깃거리며 눈치를 봤다. 정국이 미소를 띄우며 손님의 카드를 긁고 있었다. 여성 손님은 메뉴판이 아니라 정국만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볼에 핀 홍조는 덤이었다. 지민이 이를 부득 갈았다. 태형은 눈치 없이 지민의 속을 박박 긁었다.



“인기 많네. 한 다섯다리 정도 걸칠 클라스인데.”

“이렇게 된 이상, 빨리 실행해야겠어.”

“뭘.”

“오늘부터 우리는 1일이야.”

“너 요즘 허락도 없이 비밀연애 시작하냐. 너무 비밀이라서 사귀는 상대도 모르는?”

“누가 정국이랑 사귄대?”



 그럼 좋겠지만. 덧붙이며 지민이 눈을 카운터 쪽으로 흘깃거렸다. 여성 손님이 이번에는 폰을 정국에게 들이밀고 있다. 저 망할 것이. 절로 의자에서 엉덩이가 떼어지려 움찔거리는데, 정국이 웃는 얼굴로 손을 설레설레 흔든다. 지민은 잠시 기분이 좋아졌다가 이내 푹 식었다. 안 되는데. 여자친구한테 저렇게 지조가 높으면 안 되는데. 지민은 카운터 쪽만 바라보며 말했다.



“너랑 나랑 사귄다고.”



 태형이 먹던 딸기스무디를 뿜었다. 테이블 위로 스무디가 튀다 못해 지민의 얼굴까지 튀었다. 악 더러워. 지민이 비명처럼 외치며 냅다 냅킨을 들고 얼굴을 닦았다. 불쾌하다는 듯 벅벅 닦고 테이블을 수놓은 딸기스무디에 인상을 팍 썼다.



“너 이거 누가 닦는지 알지? 다 내가 닦아야 된다고.”

“박지민, 너…미쳤냐?”

“잘 들어. 김태형. 너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야.”

“그럼 뭔데.”

“나랑 좀 짜고 치자는 거지.”

“쉽게 말해.”

“사귀는 척 하자는 거야.”



 태형이 이해 안 가는 표정을 지었다. 테이블을 다 닦은 지민이 결연하게 내뱉었다.



“질투 유발 뭐 그런 거지.”











#2



 연애는 지민의 주장으로 시작되었다. 태형은 지민을 비웃었다. 야 그건 말이야. 쟤가 너를 좋아해야 통하는 거지. 지민은 태형의 반박을 박살냈다. 지민은 일말의 희망을 품고 있었다. 정국은 종종 자신에게 의미 모를 말들을 던졌다. 형이랑 하는 알바시간 더 늘리고 싶어요. 형은 손이 되게 귀엽네요. 살풋 웃음을 머금고 가볍게 테니스공 치듯 던지는 말들은 핵폭탄이 되어 제 심장을 터뜨렸다. 태형이 중간중간 나도 너한테 그런 얘기 했는데, 하고 방해했어도 지민은 꿋꿋이 믿었다. 나에게도 조금 마음이 있는 게 분명해. 지민은 의견을 관철했고, 말하는 지민을 가만 쳐다보던 태형은 승낙했다. 대가는 카페 무료 사용권과 무조건 다 들어줘야만 하는 소원 하나였다.



“서명해.”



 지민이 가져온 종이의 제목을 태형이 읽었다.



“박…지민과 김태형의 계약연애.”



 태형이 그 아래를 뒤이어 읽었다.



“갑을 김태형이라 칭하고 을을 박지민이라 칭한다. 아래와 같은 계약조건을 지키지 않을 시 계약은 그 즉시 중단되고, 카페이용권과 소원은 없던 일이 된다…그래 뭐 얼마나 잘 써왔나 보자. 제 1항. 연애는 정국이 있는 장소에서만 철저하게 연기한다. 갑은 주 3회 카페를 방문할 것. 제 2항. 연기는 절대 어색하지 않아야 한다. 부족하면 연습을 해올 것. 제 3항. 갑은 을이 전화를 걸면 무조건 받아야 한다. 제 4항. 을은 갑과 애칭을 정해 부른다. 제 5항. 계약연애도중 다른 호감이 생기는 대상과의 관계는 일절 금한다.”

“자 여기다 싸인 해.”



 지민이 종이 아래 빈공간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잠깐 나도 추가할 거 있어.”



 태형이 펜을 들었다. 지민은 몸을 긴장시켰다. 어릴 때부터 태형은 어디로 튈지 예측 못하는 공이었다. 굳게 진실한 사랑이 찾아오면 사귈 거라 믿는 지민과 달리, 태형은 오는 여자, 남자 구분 안하고 가는 것도 상관 안 했다. 하나부터 열까지 달랐다. 맞는 것이라곤 나이를 가리키는 숫자 하나뿐인 것만 같았다. 지민이 태형의 글씨를 따라 읽었다.



“제 6항. 연습은 따로 만나서 한다…? 이게 뭐야.”

“아우씨 야 오글거려서 어떻게 혼자 연기 연습하냐.”

“일주일에 세 번이나 만나는데 또 만나자고?”



 지민이 미간을 찡그렸다.



“안돼, 정국이 만나야 돼.”

“너 걔랑 밖에서 만난 적 없잖아.”

“…혹시라도 잡힐 수 있잖아. 약속.”

“…넌 만약보다 내가 못하냐?”

“아니 그건 아닌데….”



 지민이 말꼬리를 흐렸다.



“정국이가 백이라면, 너는 한….”

“한?”



 태형이 눈을 반짝 떴다.



“일정도?”



 지민이 인심 썼다는 듯 크게 불렀다. 태형이 곧장 팍 인상을 쓰고 펜을 던졌다.



“안 해. 귀찮아. 엎어.”



 태형이 발랑 뒤로 누웠다. 지민이 자취방까지 달려와 깨운 보람도 없이 침대로 쏙 기어들어간다. 다시 꿈속으로 빠져들어갈 기세였다. 지민이 다급하게 태형을 붙잡았다.



“알았어, 알았어. 하면 되잖아!”



 강제로 일어난 태형이 종이에 낙서하듯 싸인을 갈겨 썼다. 명확하게 심기가 불편한 얼굴이다. 정확히는 조금 삐진 쪽에 가까웠다. 속 좁은 놈. 속으로 중얼거리며 지민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일이면 엄청 많이 쳐준 건데.












#3



 계약연애는 삐걱삐걱 잘 굴러갔다. 태형은 연기를 잘했다. 마치 진심으로 사랑하는 연인처럼 굴었다. 반대로 지민은 어색함이 정점을 찍었다. 자기야. 아무렇지 않게 태형이 부를 때마다 흠칫거리는 어깨를 내리누르는 데에도 시간이 필요했고, 태형이 처음 허리에 팔을 감아왔을 때는 흐악 하는 이상한 비명소리까지 냈다. 이상했다. 일부러 태형을 택한 보람이 없었다. 초중고 시절을 같이 보낸 만큼 괜찮을 줄 알았다. 태형의 자취방에서 침대를 같이 썼을 때에도, 목욕탕에 홀딱 벗고 들어갔을 때에도 괜찮았다. 그런데 귓가에 바람을 훅 불거나, 손가락을 엮어 장난치는 만큼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지난 번엔 태형이 뒤에서 놀래 켰다가 새된 신음을 토하며 태형의 품에 쏟아지고 말았다. 능숙하게 허리를 감아오며 귓가에 자기 많이 놀랐네, 속삭이는 목소리에는 척추뼈마저 놀라 꿈틀거렸다. 연애하는 척을 해달라 부탁한 건 자신이건만, 영 적응하지 못했다. 딱 죽겠다 싶었다. 시킨건 저인데 성희롱을 당하는 것만 같았다. 스킨쉽은 자제하라며 태형에게 말을 해봐도, 태형은 알았다고만 할 뿐 스킨쉽은 줄지 않았다. 손을 잡고 뚫어져라 눈을 마주봐올 때면 차라리 물리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백기를 들지 않은 것은 정국 탓이었다. 놀랍게도 정국이 반응을 보였다. 태형이 카페에 오는 순간이면 미묘하게 인상이 굳어졌다. 항상 맑게 웃는 정국의 웃음이 유일하게 멎는 시간이라, 눈치가 없는 사람이라도 알 수 있을 만치 티가 났다. 지민이 걸고 있는 희망이 얼추 이루어졌다. 곧 정국이 헤어졌다 말해올 것 같았다. 그때까지만 참자. 지민은 스스로를 다독이며 계약의 끝을 바라보고 있었다.











#4



 연습이라는 명목 하에 가진 만남은 말이 연습이지 데이트나 마찬가지였다. 평소처럼 노는 거랑 같겠지. 태연하게 생각하며 처음 만났을 때에는 기겁했다. 츄리닝에 슬리퍼만 질질 끌고 나오는 동네친구 김태형이 아니었다. 캐주얼한 옷을 쫙 빼입고 머리를 다듬은 미남 김태형이었다. 중고등학교 시절은 물론 대학교에서도 외모 만으로 과 전체에 널리 소문을 퍼뜨린 그 김태형이었다. 지민은 만나자마자 허리에 손부터 올려오는 태형에 기겁했다. 이게 무슨 짓이냐며 손을 쳐내자마자 태형은 능글거리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왜 그래 자기, 우리 더한 곳도 아는 사이인데. 엉덩이를 주물럭거려오는 손길은 장난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지민은 깨달았다. 얘 진짜 장난 아니구나.

 태형은 이렇게 계약조건을 충실히 지킬 필요 없다며 적당히 하라는 지민의 말도 무시했다. 지민을 끌고 돌아다니며 데이트 코스란 코스는 다 섭렵한 사람처럼 끊임없이 일정을 준비했다. 당당히 커플석으로 끊어온 티켓을 제시할 때가 그나마 나았다. 놀이공원 커플 머리띠. 커플 반지. 커플 마사지샵. 온갖 커플이란 커플 티는 다 내고 다녔다. 지민은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그래, 내가 다 벌인 일인 것을.








#5



 연애란 참으로 오묘했다. 거짓이라도 진실인척 연기하다 보니 익숙해져 갔다. 아침마다 지민아, 하고 전화를 거는 목소리도. 자기 전에 잘자, 하는 목소리도 익숙해졌다. 허리를 낚아채는 손쯤이야 그러려니 하고 넘기게 됐다.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가도 태형이 올 시간을 정확히 짚어냈다. 이상하게 카페에만 오면 정국에게 집중됐던 시선이, 태형이 오는 시간만큼은 태형에게 돌아갔다.

 지민은 간혹 가다 헷갈렸다. 진짜로 연애를 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김태형과.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징글맞게 붙어 다닌 김태형과.



“태형아 나 졸려.”

“업어줄까?”

“사내놈 둘이서 업으면 엄청 이상하게 볼걸.”

“뭐 어때.”

“너처럼 시선 무관심하지 않아서 난 차마 그렇게 못하겠다.”



 지민이 푸스스 웃었다. 데이트의 마지막 코스는 한강이었다. 밤이라는 명목으로 태형은 공원에 도착하자마자 손부터 낚아챘다. 깍지를 끼며 얽어오는 손이 퍽 나쁘지 않았다. 서서히 서늘해진 가을바람을 타고 마주 닿은 온기는 오히려 마음에 드는 편이었다. 김태형 손이 이렇게 따뜻했었나. 지민은 엮인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태형의 손을 주물렀다. 태형이 꼼질거리는 지민의 손을 콱 힘주어 쥐었다.



“안 졸린 거 같은데. 겁도 없이 이러는 거 보면.”

“아닌데? 졸린데?”

“박지민씨 취하셨네요. 겁 없음 지수 플러스 오백 드립니다.”

“아니야. 안 취했어.”



 은근히 발음이 샜다. 마지막 레스토랑에서 서비스로 준 와인을 혼자 들이킨 것까지는 좋았다. 술을 마시지 못하는 태형을 대신해 한잔 두잔 하던 것이 어느덧 한 병이 될 줄은 몰랐다. 지민이 묘하게 꼬인 스텝으로 비틀거렸다.



“이거 봐. 취했어, 너.”

“아니라니까.”

“맞아.”

“아니야.”

“맞아.”

“아씨, 아니라니까.”



 지민이 툴툴거렸다. 지민은 나름 의식이 있었다. 인사불성으로 태형의 얼굴이 두 개로 보이고, 길이 울렁이는 수준까지는 가지 않았다. 태형은 몸에 반쯤은 기댄 채 걸어가는 지민을 붙잡고 말싸움했다. 맞아. 아니야. 맞다니까. 아니라니까. 투닥이던 말싸움은 평소와 같았다. 기분만 구름을 밟는 것처럼 좋았다. 태형과 잡은 손이 좋고, 머리를 살랑거리는 바람이 좋고, 어깨를 붙잡아 넘어지지 않게 해주는 태형의 배려가 좋았다.

 태형이 농담인 듯 던졌다.



“안 취했으면 키스해봐.”



 조금은 오기였고, 조금은 충동적이었다. 한강 산책길 가로등 아래로 빛나는 태형의 눈이 예뻤다. 한강 다리를 밝히는 수십 개의 전구들보다 눈에 꽉 차게 들어왔다. 술이 없었다면 그런 일을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지민이 발을 멈췄다. 박지민? 태형이 의아한 듯 돌아선 순간 지민은 태형의 멱살을 잡고 제 키에 맞게 내렸다. 쪽 입술이 붙었다 떨어졌다.



“헤에…봐, 안 취했지?”



 지민이 눈꼬리를 접어가며 웃었다. 여전히 기분이 좋았다. 태형의 눈이 놀라 커졌다. 사고를 친 지민이 앞서 한 발자국 내민 순간, 태형이 지민의 어깨를 붙잡아 돌렸다.



“지민아.”

“…….”

“내가 취한 거 같아.”



 입술이 맞붙었다. 혀가 건너왔다. 첫 키스였다.









#6



 강에 작은 돌을 던지면 바다는 아무 일이 없다. 그러나 거대한 바위로 댐을 무너뜨리면 강은 흘러 넘친다. 지민은 가능하다면 돌로 제 머리를 찍고 싶었다. 미쳤지, 미쳤어. 태형과 키스했다. 손을 잡는 것과 허리를 팔로 감싸는 것과는 달랐다. 허리는 고등학생 때도 만지며 장난치고 놀았고, 손은 수도 없이 잡아봤다. 키스는 차원이 다른 종류였다. 다리에 힘이 풀리고, 나른한 숨이 나오는 것은 둘째치고 명백히 선을 넘은 것이었다. 계약연애라는 타이틀이 지민은 이제 부담스러웠다. 헷갈리기 시작했다. 분명 정국이 전부다. 카페에 갔을 때 반겨주는 정국을 보면 여전히 행복했다. 정국을 향해 추파를 던지는 이성은 갈아 마셔도 시원치 않았다. 이것은 사랑이다. 지민은 최면을 걸 듯 다짐했다.

 태형의 연락을 모조리 씹었다. 카페로 찾아오면 재료실에 숨어 머리꼭지도 내비치지 않았다. 정국이 싸웠냐 물어보기까지 했다. 아니라 답했지만 지민도 알고 있었다. 멍청이가 아니라면 알아챌 거짓말이다. 지민은 큰 한숨을 내쉬었다. 김태형. 너랑 난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7



 피하지마. 너 엄청 티나는 거 모르지. 문자에 선명히 뜬 문장에 지민은 뜨끔했다. 지민도 알고 있었다. 이대로 피하기만 하면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이 계약은 이만 끝낼 때가 됐다. 후회가 됐다. 이딴 짓 하지 말걸. 사랑을 얻자고 태형을 잃었다. 어릴 적부터 함께한 추억들이 몽땅 쓰레기통에 처박히게 생겼다.

 태형과 떨어진 지 5일. 지민은 그때 깨달았다. 모든 기억의 순간에 태형이 박혀있었다. 중학교 시절 일본 수학여행 때 여권을 잃어버려 안절부절 했을 때 찾아준 것은 태형이었다. 일정까지 이탈하며 여권을 들고 씨익 웃는 얼굴에 감동이 물밀 듯 밀려들어 울음까지 터져 나왔다. 체육대회 때 넘어진 순간에도 어디선가 튀어나온 태형이 업고 달렸다. 불량배들에게 걸려 돈이 뜯겼을 때도 태형이 찾아다 주었다. 싸웠을 때에도 늘 태형이 먼저 사과해왔다. 태형은 무던히도 자신을 챙겼다. 태형을 잃을 순 없다. 그래, 이렇게 죽도 밥도 안 되느니. 지민은 사과를 하기 위해 태형을 불렀다. 원래대로 돌아가야만 했다.



“형 저 할말 있어요.”



 문 벨소리가 울리길 기다리는 지민을 정국이 붙들었다. 지민은 가능한 긴장한 내색을 숨겼다. 태형이 온다 생각하니 쿵쿵거리는 심장을 다스리기 힘들었다.



“왜, 정국아.”

“형 그 형이랑 헤어지려고 부르는 거죠?”

“어…?”

“형 얼굴에 다 티나요.”



 지민은 말을 할 수 없었다. 정국은 눈치가 좋은 아이였다. 지민은 쉽게 수긍할 수 없었다. 헤어지기는 하는 건가. 정상적인 연애가 아니다. 연기였고, 정국에겐 일종의 사기였다. 답지 않게 정국이 채근했다.



“헤어지는 거예요?”



 사랑이 기다린다. 지민은 어물어물 답했다. 계약이 깨지는 거면 헤어지는 거니까.



“으, 응.”



 사건은 언제나 예상 못한 곳에서 터진다. 복잡한 지민의 머릿속에 정국은 거대한 폭탄을 터뜨렸다. 엄청나게 거대해서 다른 생각은 모두 사라지게끔.



“저 형 좋아해요.”



 그 순간만큼은 태형이 생각나지 않았다. 아니, 정지했다. 생각이 정지했다는 것이 옳았다. 좋아해. 좋아해. 단어를 되새기며 지민은 얼빠진 얼굴로 물었다.



“뭐, 뭐라고 정국아…?”

“형이 그 형이랑 사이 안 좋은 거 알고 너무 설렜어요. 이런 말 죄송하지만 형이 깨졌으면 좋겠다고 뒤에서 많이 생각도 했었어요.”

“너, 너, 너 여자친구 있, 있잖…!”

“여자친구요?”



 정국이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지민이 크게 손동작을 그리며 외쳤다.



“그 지난 번에 카페 오신 분!”

“아 우리 친척누나요?”



 탄식이 터져 나왔다. 안심이라는 마음보다 놀랍게도 진득한 후회가 밀려들었다. 멍청하게 혼자 삽질한 거였다. 삽질로 태형과 이렇게 되었다. 멋대로 오해하고, 멋대로 일을 벌리고, 멋대로 태형과의 관계를 망쳤다. 그 순간, 문에 매단 종소리가 땡 울렸다. 지민이 문 쪽을 돌아봤을 때 사람은 뒷모습만 잠깐 보이고 쏜살같이 멀어졌다. 소화하기 어려운 자몽색 머리카락. 십 년이 넘게 보아온 뒷모습을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발이 절로 움직였다. 그러나 발은 팔목을 붙잡은 정국에 막혀버리고 말았다.



“형 가지 마요.”

“…….”

“어차피 헤어질 거잖아요.”



 내 고백, 답은 천천히 해줘도 좋아요. 정국이 덧붙였다. 지민은 한 박자 늦게 깨우쳤다. 맞다. 정국에게 고백 받았다. 그렇게나 원하던 고백을 받고야 말았다. 꿈에서라도 받게 해달라 빌었던 과거가 무색하게, 현실로 이루어졌다. 분명 지금 기뻐 날뛰어야만 했다. 심장은 터질 만큼 귓가를 울려야만 했으며, 눈은 정국만을 쫓아야 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심장은 쿵쿵거리며 문에 매단 종소리에 반응했다. 눈이 자꾸 놓쳐버린 발걸음 쪽으로 돌아갔다. 지민은 스스로 이 상황이 너무나도 이상해 헷갈릴 지경이었다. 마음에 일부터 백까지 숫자를 붙인다면 정국은 확실히 구십구를 가지고 있었다. 태형은 일이었다. 일. 일이다. 그런데, 그런데.



“정국아 나 나갔다 올게.”

“형? 형!”



 지민은 일을 쫓았다. 그 미묘함이, 일이 주는 감정의 까끌거림과 미묘함이 구십구가 보이지 않게 만들었다. 일은, 하나뿐이다. 태형은 하나뿐이었다. 한참 뛴 끝에 자몽색 머리카락이 보였다. 터덜거리는 발걸음은 기운이 빠져있었다.



“야! 김태형!”



 김태형이 마음의 일 순위에 앉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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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2016.09.04 22:56
    아 이런 전개 너무 좋아해요.. 뜻하지 않게 조금씩 감정이 스며드는 것 같은거요ㅠㅠ 태형이는 원래부터 지민이를 좋아했던 걸까요 아니면 지민이처럼 조금씩 마음이 생겼던 걸까요. 뭐가 됐든 진짜 취향저격이에요ㅠㅠ 지민이가 태형이를 쫓아나간 뒤에 무슨 말을 했을지, 태형이는 따라 나온 지민이를 보고 무슨 생각을 할지 뒤의 상황이 궁금해지네요. 재밌게 잘 보고 가요!
  • ?
    유네 2016.09.14 02:42
    아 세상에ㅠㅜㅜㅠ 이런 좋은글 보게해주셔서 감사해요 존잘님 제가 왜 이렇게 설레는 글을 이제야 발견하고 뒤늦게 앓는지 모르겠어요 이어지는 내용이 있는거겠죠?? 뷔민해주셔서 감사드리고 글 정말 예쁘게 잘 쓰세요ㅠㅜㅜㅜ 표현력도 좋으시고 몰입도 확 되서 과장하자면 눈 한번 깜빡안하고 읽었어요ㅠㅜㅜㅜ 둘이 키스할때 너무 좋아서 발도 구르고 막.. 아아 잘 읽었습니다ㅠ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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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N 2017.01.11 01:03 SECRET

    "비밀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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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뽐지민 2017.01.26 20:04 SECRET

    "비밀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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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unoia 2017.02.25 16:51
    진짜 글 하나하나 읽을때마다 느끼는건데 그 상황에 정말로 몰입하게 되는것 같아요ㅠㅠ 오늘도 설레이고 갑니다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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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브모드 2017.04.24 12:06
    와 단편이고 오픈엔딩인데도 너무 간질간질 다음이 그려지고ㅠ 1프로가 유일무이한 하나가 됐다라는게 너무 좋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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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cean4 2017.05.07 10:24
    토페님 정말 글 써주셔서 감사합니다ㅠㅠㅠㅠㅠㅜㅜㅜㅜ 왜 이제야 알게 되서ㅠㅠㅠㅠㅠㅠ 증말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 태형이는 지민이 원래 좋아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맞나요..? 쏘스윗한 사람,, 지민이가 그래도 태형이 좋아하게 되어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고 뭔가 지민이를 좋아하는 정국이는 엄청하게 슬플 것 같기도 하고.. 모르겠네요 토페님 사랑함미다ㅠㅠㅜㅜㅜ♡ㅠㅠ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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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테리아 2017.05.13 16:36
    와..뷔민 너무 좋네요...ㅠㅠㅠㅠㅠㅜㅠㅜ와중에 국민도 조금 끼어있고ㅠㅜㅠㅡ딱 제 취향입니다ㅠㅜㅜㅜ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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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페님무대를디집어노으셔따 2017.08.03 17:18
    아ㅏ 현실적임니다ㅠㅠ 현실적인거 갱장히 좋아해요.. 드라마에선 질투유발후 정구기와의 연애에 골ㄹ인 했겠지만ㅋ 진짜.. 100에 비해 1밖에 안됬던 태태가ㅠㅠ 1위가되느뉴ㅠ 스윗하뉴ㅠㅠ 사랑해요ㅠㅠ마니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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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dgd 2018.07.29 23:18 SECRET

    "비밀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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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기솝침 2018.08.03 00:17 SECRET

    "비밀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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