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 너드커넥션 - 사랑을 닮은 이유로>
과거 민윤기와 박지민의 데이트 코스 중 하나는 다 쓰러져가는 슈퍼였다. 집에서 제일 가까운 게 그 슈퍼라 잘 들리곤 했다. 그 자리로 익숙하게 걸어 올라온 윤기가 허망하게 간판을 올려다봤다. 다 쓰러져가던 슈퍼 대신 번쩍번쩍한 간판의 편의점이 들어와 있었다.
“여기 망했어?”
“바뀐 지 꽤 됐어요.”
지민은 익숙하게 후드를 폭 뒤집어 쓴 채 안으로 들어갔다. 윤기는 뒷목을 긁적였다. 할머니가 운영하시는 슈퍼였는데, 지민은 꽤나 친하게 지냈었다. 아이구 우리 손주랑 비슷하게 생겼네그려. 이것도 하나 더 가지고 가라. 지민을 유달리 귀여워하며 더 챙겨주곤 했다. 지민 역시 말랑한 눈웃음을 건 채 잘 따랐다. 할머니 오래오래 건강하게 사셔야 돼요. 그래. 시간이 꽤 지나긴 했지. 윤기가 편의점 안으로 뒤따라 들어갔다. 그리고 보이는 건.
“지민이 형! 저 이거 봐요. 요새 운동했는데 근육 장난 아니죠.”
계산대에 선 웬 남자애가 호감 가득한 얼굴로 지민을 붙잡고 있었다. 지민을 보고 신이 나서 주절주절 떠든다.
“왜 요새 자주 안 왔어요. 저 진짜 열심히 노력했다니까요. 운동장도 하루에 10바퀴씩 뛰고 운동부 애들 운동하는데 껴서 같이 해요. 거기 쌤이 저보고 좀만 더 하면 특기생으로 대학 가겠다고 할 정도라니까요. 형형, 근데 형이 저 운동하면 더 멋있어질 거 같다고 했잖아요. 어때요? 이제 그렇게 어리게 안 보이지 않아요?”
“우와 노력 많이 했네. 진짜 많이 컸는데?”
“그죠.”
남자애는 지민의 칭찬을 듣고 기분이 좋은지 더욱 들뜬 표정이 됐다. 주인한테 칭찬 받아 기분 좋아진 대형견 같았다.
“그런데 형 뭐 사러 왔어요.”
“아 별 건 아니고 간식거리나….”
“많이 친하네.”
“아, 어서 오세요.”
끼어든 윤기에 소년이 이제야 알아차리고 꾸벅 인사한다. 지민과 있을 때 말랑하게 풀려있던 표정이 지금은 무표정하다. 으레 평균이라면 쫄아서 피했을 민윤기의 시선을 소년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깜빡거리며 마주했다. 뭐지…? 왜 갑자기 오한이 서리는 거 같지…? 지민은 윤기의 팔을 붙잡아 이끌었다.
“간식 먹고 싶은 거 골라요.”
“넌.”
“아무거나 괜찮아요.”
“어, 간식 사는 거예요? 요새 신상 많이 들어왔는데. 추천 해드릴까요? 지민이 형이 좋아할 거 같아서 빼둔 거 있는데!”
소년은 추천메뉴가 있다며 아예 계산대 밖으로 나와 지민을 이끌고 장을 대신 봤다. 이것도 맛있고, 이것도. 아! 이것도 형이 좋아할 거예요. 맛있겠네. 고마워. 윤기가 뒤에서 가만히 그 모습만 눈으로 좇는다. 지민은 어느덧 가득 찬 장바구니를 들고 윤기의 옆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고개를 갸웃했다. 남이 보면 모르지만 박지민은 알 수 있다. 이 형은 왜 심기가 뒤틀렸대. 그러나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계산 부탁해.”
“네! 근데 이 분은 형이랑 아는 분이신 거예요? 처음 보시는 분 같은데.”
편의점 소년은 해맑게 바코드를 찍는다. 지민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수롭지 않게 흘리듯 말했다.
“응. 그냥 조금 아는 형이야.”
윤기는 지민을 흘끔 본다. 그리고는 소년에게 악수를 청하듯 손을 내밀었다.
“반가워요. 전남친 민윤기입니다.”
삑삑거리며 찍히던 바코드 기계음이 뚝 멎는다. 지민이 경악하며 윤기를 돌아본다. 이 미친. 소년이 지민과 윤기를 번갈아 쳐다보며 말을 잇질 못했다. 그 미칠듯한 침묵 속에서 윤기는 홀로 태연했다.
“농담.”
“아….”
“이 형 헛소리하는 게 특기야. 귀 담아 듣지마.”
“꼬마야 계산은 이걸로.”
“아냐. 이걸로 해줘.”
윤기가 내미는 카드 위로 지민이 자신의 카드를 내밀었다. 아직도 얼이 나간 소년이 눈만 도르륵 굴린다. 이걸로 해. 어버버거리던 소년이 저음에 정신을 차린 듯 얼결에 윤기의 카드를 받아 들었다. 삼만 팔천 육백원입니다…. 고마워. 다음에 또 올게. 지민은 황급히 봉투를 받아 들고 민윤기의 팔을 붙잡았다. 도망치듯 편의점을 나왔다.
소년은 후다닥 멀어지는 두 사람을 보며 여전히 멍한 얼굴로 편의점의 본주인인 할머니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친형이랑 같이 다니는데 할미가 볼 땐 아주 둘이 부부여. 부부. 소년이 넋이 여전히 빠진 채 중얼거렸다. 그 말이 진짜였어….
지민은 아무도 시선을 끌지 않는 골목으로 후다닥 대피하듯 도망쳤다. 편의점이 아예 보이지 않게 되고서야 바락 외쳤다.
“미쳤어요? 걔는 슈퍼 할머니 손자예요!”
“그랬군. 슈퍼에서 편의점으로 잘 바꾸셨네. 그때도 트렌드를 잘 아셨는데.”
“한가하게 지금 그런 반응이 나와요? 내가 형 때문에…!”
외치던 지민은 문득 윤기가 아래쪽을 내려본다는 걸 확인했다. 뛰어나오면서 꽉 잡고 있던 손이다. 후다닥 손을 털 듯 놓았다. 됐다. 이렇게 해 봤자 민윤기 귀에 박히는 단어가 하나는 있을까. 지민이 뿌리치며 손을 거두자 윤기는 혀로 볼을 쓸었다. 아쉽다는 듯.
“자.”
윤기는 지민에게 아이스크림을 하나 내민다. 쭈쭈바였다.
“먹으면서 산책 가자.”
이제 다 체념한 지민은 얌전히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었다. 이 와중에도 박지민이 좋아하는 바닐라 맛이다. 그래. 어차피 채 몇 시간도 남지 않았다. 윤기는 자신 역시 아이스크림을 하나 입에 물었다. 그리고는 장 본 봉투를 지민의 손에서 뺏어 들고 먼저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지민이 한 발자국 뒤쳐져 그 뒤를 따라간다.
골목길 언덕으로 올랐다. 이 길 역시 그들에게 익숙하다. 언덕을 끝까지 오르기 전, 왼쪽으로 꺾어 골목 안 쪽으로 들어가면 휑한 공터가 나온다. 재개발 이슈로 싸우다 분쟁이 좁혀지지 않아 그대로 방치된 곳이다. 그러나 꽤나 운치 있는 곳이었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때의 노을은 환상적으로 아름다웠으며, 노을이 진 후 반짝거리는 야경의 불빛은 꼭 반딧불이 축제 같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이곳을 민윤기와 박지민만이 안다는 점이다. 이곳에서 그렇게나 가슴 간지러운 데이트를 했었다.
지민은 꽤나 어색했다. 한국으로 다시 돌아와 자리를 잡고서도 굳이 오지 않았던 곳인데, 민윤기와 같이 오게 될 줄은 몰랐다. 조금 전 민윤기의 미친 짓 때문에 사라졌던 이상한 감정이 다시 돌아오는 것만 같다. 통통한 입술이 쭈쭈바에 달라붙었다가 떨어진다.
그리고 아주 다행스럽게도 서서히 지는 노을에 하늘이 주홍빛으로 물든다. 황혼의 시간이다. 지민은 저도 모르게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옆에서 저음이 들려온다.
“여전히 예쁘네.”
아마 민윤기도 같은 생각이었나 보다. 지민이 하늘만 보던 고개를 내려 윤기를 보았다. 민윤기의 시선은 처음부터 하늘은 본 적도 없다는 듯 지민에게 박혀있었다. 분명 또 이상한 플러팅인데. 대책 없이 넘어가려는 수작인데. 홀린 듯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에 순간적으로 당황해버리고 말았다. 지민은 애써 윤기의 시선을 피하며 아이스크림을 쥔 손에 힘을 더했다.
“…감상하니까 방해하지 말아요.”
“응. 그래.”
말은 또 잘 들어서 그 뒤로는 침묵을 유지한다. 주홍빛 물감을 풀어놓은 하늘이 천천히 짙은 푸른색으로 뒤바뀐다. 하나 둘 가로등과 옹기종기 모인 집들에 불이 들어온다. 지민과 윤기 머리 위에 있는 가로등에도 불이 팟 켜진다.
황혼이 망자도 살아온다는 마법의 시간이라고 하던가. 민윤기가 얻어낸 마법의 시간도 그처럼 소멸했다. 두 사람은 본능적으로 알았다. 애써 돌리고 돌린 유예기간이 끝났다는 것을. 윤기는 잠시 제 뺨을 쓸어 내렸다. 긴장되어 입이 마르는 사람처럼.
“지민아.”
“…….”
“같이 돌아가자.”
“뭘 위해서 가야 되는데요?”
“…널 위해서.”
윤기는 합리적인 이야기를 늘어놓듯 말을 이었다. 발표회에서나 할 법한 신뢰감을 주는 낮은 어조로.
“지금 네 상황이 좀 위험해.”
“상황이 어떻게 위험한데요?”
“이미 너 수배돼서 찍혔어. 국제 수배령이야. 여기 있다가는 결국 체포돼서 들어갈 거고. 네가 훔치지 않았더라도 이미 낙인 찍혀서 수사는 받게 될 텐데 그럼 결국 이전에 했던 일들이 발각돼서 곤란해질 거야.”
“…그게 저한테 하고 싶은 말이에요? 그거 때문에 사람까지 보내서 날 찾았다고요?”
“어. 그러니까 나랑 같이 돌아가자. 내 곁이면 안전해. 수배가 떨어졌어도 보석 주인의 애인은 못 데려가지.”
그 말을 끝으로 윤기가 입을 닫는다. 지민은 윤기를 고요히 본다. 위험하다고 하는데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윤기는 이럴 줄 알았다는 듯 낮게 바람 빠지는 웃음을 흘린다. 눈 하나 꿈쩍 안 하네. 박지민이 많이 컸네. 예전이라면, 민윤기의 말이면 뭐든 믿는 박지민이었다면 벌써 믿었을 거다.
“여기까지는 협박이었고.”
더 이상 윤기는 작은 웃음기조차 남겨놓지 않았다. 진심을 털어놓는 얼굴은 애달프고 간절했다.
“여기서부터는 애원.”
“…….”
“사실은, 빌러왔어.”
“…….”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구차하게 매달려보려고.”
“…….”
“네가 아니라 날 위해서가 맞아. 도저히 포기가 안 된다, 지민아.”
“…….”
“다시 시작하면 안 될까.”
이제야 대화가 된다. 지민은 마침내 속을 온전히 드러낸 민윤기에 마찬가지로 제 속을 보여주었다.
“그럼 말해줘요. 왜 날 떠났는지.”
“…그게 그렇게 중요해?”
“네. 중요해요.”
윤기가 입술을 짓씹는다. 지민은 한 치의 물러섬도 없다. 윤기는 직감한다. 결코 지민이 져주지 않으리라는 것을. 매번 작은 일에서는 지민이 윤기에게 져주곤 했다. 형 한번만 한다면서…! 아잇, 이거 맵잖아요! 쫑알거리면서도 마음 넓은 내가 참아준다, 하고 넘어갔다. 사실 윤기도 지민에게 자주 져줬다. 네가 좋아하는 게 내가 좋아하는 거야. 그 말을 입에 달고 사니 이길 의지조차 없었다.
그러나 이것만큼은. 민윤기도 물러날 수 없었다.
“…그냥 돈이 좀 필요했어. 호텔 물려받으려면 다른 형제들이랑 싸워야 했는데, 너도 알다시피 난 빈털터리고 가진 게 없었잖아. 그래서 내가 미쳐서 그런 거야.”
“…….”
“알잖아. 나 한번 미치면 확 미치는 거. 그 때는 내가….”
이만하면 들을 말은 다 들었다. 시간도 줬으며, 기회를 주고 또 줬다. 지민이 윤기의 말허리를 끊고 파고 들었다.
“나도 못 들은 우리 유모 유언을 형이 그렇게까지 잘 지킬 줄은 몰랐네.”
“그걸 네가….”
늘 차분하던 윤기의 표정에 유례없이 금이 간다. 잘만 떠들던 말문이 턱 막혔다. 지민이 여태 속으로만 썩힌 울분을 우수수 쏟아냈다.
“여태 말하길 기다린 내가 병신이야. 형은 어떻게 아직까지도 이렇게 제멋대로야.”
“…….”
“어떻게, 어떻게 형은 또 이래? 평생 숨길 생각이었어?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알아? 형 떠나고 미친 새끼처럼 그럴 리 없다고 부정하면서 찾아 다녔어. 나중에는 도저히 모르겠어서 그냥 나 저주했어. 내가 모자랐나 보다. 내가 그렇게 부족했나 보다. 다시 돌아오기만 하라고 매일 빌었어.”
“…….”
“나중에는 무슨 생각한 줄 알아? 형이 죽은 건 아닌가. 내가 형을 붙잡은 게 아니었나 보다. 나 때문에 살고 싶어졌다고 했었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었나 보다. 처음 만난 차도 위에 섰을 때에서 변한 게 하나도 없나 보다. 그 생각하자마자 나도 죽고 싶었어.”
“…지민아.”
“그런데도 형이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 단 한 개 때문에, 진짜 그 하나 때문에 살았는데….”
윤기가 입술을 짓씹었다. 이게 아닌데. 지민이 자신을 저주하기를 바랐다. 스스로를 좀 먹어 들어가는 게 아니라 자신을 저주하라고 한 건데. 그 몫은 내가 감당하려고 했는데 왜 이거까지 네 몫이 됐지. 그 어느 것보다 그 사실이 민윤기를 고통스럽게 했다.
박지민이 운다. 온몸에 피가 빠지는 기분이었다.
“형은 늘 이랬어. 나한테 아무것도 이야기해주지 않아…. 슬픔도 절망도 고통도 아무것도. 내가 그렇게 형한테 의지될 수 없는 존재야?”
말간 눈물이 하얀 뺨을 타고 뚝뚝 떨어진다. 그러나 스스로 뺨을 훔쳐 눈물자국조차 지웠다. 그 앞에서 민윤기는 무장해제되고 만다. 자신 때문에 우는 박지민이라니. 그는 마침내 마지막 남은 모든 진심까지 끌어냈다.
“…미안해.”
“…….”
“그게 아니야. 계속, 그분을 너한테 소중한 사람으로 남겨두고 싶었어. 뺏고 싶지 않았어.”
“…….”
“네 유일한 가족이잖아.”
“…….”
“내가 뭐라고 네 가족까지 망쳐놔.”
차마 망칠 수 없었다. 민윤기의 두려움은 그것이었다. 지민의 마지막 인연을 제 손으로 파괴해버리다니. 그렇게나 가족에 목말라하는 앤데. 자신은 어머니의 마지막을 지키지 못했지만, 지민만큼은 그 마지막을 온전하게 지키길 바랐다. 그 고통이 얼마나 큰지 아니까 지민만은 겪지 않기를 바랐다.
윤기의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또 잘못 선택했다. 어머니를 잃었을 때처럼. 자신은 지민의 곁에 있을 자격이 없다. 아무리 욕심 많고 이기적인 쓰레기 새끼라도, 고통스러워하는 박지민을 옆에 붙들어둘 수 없다. 고통스러워하는 지민을 보면서 제 심장이 먼저 갈기갈기 찢길 거다. 이대로 지민을 보내주는 게 맞는 것 같다.
“…지민이 네가 원하는 대로 할게. 미안해. 널 속이고 싶어서 속인 건….”
“아니 잠깐, 잠깐. 뭐야.”
지민이 급히 저지한다. 그러더니 잔뜩 구겨진 윤기의 얼굴을 보며 인상을 쓰고 외친다.
“왜 떠날 준비해? 못 버린다며. 이미 내가 살렸는데 어디다 버려. 그거 유기라며. 난 그런 거 못해. 집 나간 것도 지금 데리고 돌아왔는데. 절대 혼자 안 둘 거야. 못 둬.
“…….”
“아니, 형은, 형은 진짜 바보야?”
“…….”
“형도 내 가족이란 말야….”
윤기의 눈이 홉 뜨인다. 이내 하얀 얼굴이 일그러지며 윤기가 눈을 질끈 감는다. 박지민은 늘 이렇게 민윤기를 구원한다. 낭떠러지에 서있을 때. 아무것도 없는 바다에서 표류할 때. 흔들릴 때마다 단단히 붙들어준다. 매번 이렇게 민윤기를 살려냈다. 다정하고 강하게. 윤기가 지민에게 손을 뻗는다.
“안지마. 아직 말 다 안 끝났어.”
지민이 윤기의 어깨를 막는다. 그리고는 당차게 이야기한다.
“힘들면 힘들다고 나한테 말하고 슬프면 슬프다고도 해. 사랑만 말하지 않아도 돼. 좋은 것만 주는 게 사랑이 아냐. 형 혼자 버텨낼 생각도 앞으로 하지마. 형이 그쯤 힘들다고 해서 내가 형을 버릴 거 같아?”
“….….”
“그렇게 할 때 나한테 사랑한다고 해. 내 말 알아들었어요?”
“…사랑해.”
온 진심을 담아 전하는 단어다. 목소리는 여전히 낮았으나 조금 떨렸다. 그 말에는 지민도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많이 돌고 돌아왔지만. 끝이 이렇게 되어 참 다행이다.
“…이제 안아도 돼.”
말이 끝나기 무섭게 윤기가 지민의 허리를 당겨 안는다. 단단한 두 팔이 아주 힘껏, 지민을 끌어안았다. 다시는 놓아주지 않을 것처럼. 지민도 윤기의 넓은 등을 끌어안았다. 따뜻한 온기가 하나가 되어 체온이 닮아간다. 윤기는 그대로 지민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평소에 윤기가 해준 것처럼 지민이 윤기의 머릿속으로 손을 헤집어 쓰다듬는다.
“어떻게 살았어요, 여태…. 이렇게 괴로웠으면서.”
지민은 제 어깨 부근이 뜨겁게 젖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조용히 울고 있는 윤기의 어깨가 조금씩 떨린다. 그 떨리는 등을 지민이 더욱 꽉 끌어안는다. 그대로 귓가에 조곤조곤 속삭였다. 여전히 다정한 목소리로.
“형 보고 싶었어요, 진짜루.”
한참 만에야 윤기가 고개를 뗀다. 눈이 벌개져 있었다.
“…나도.”
윤기는 지민의 뺨을 조심스레 잡는다. 그대로 입술을 포갰다. 지민은 기꺼이 눈을 감고 입을 열었다. 수없이 섞은 숨 중에 가장 조심스럽다. 또 다른 의미의 첫키스 같았다. 마침내 서로의 세상이 온전히 섞인다.
***
그렇게 헤어지고 죽네 사네 염병을 떨더니…. 지민은 태형이 질린다는 눈빛으로 중얼거린 말에 움찔 떨었으나 곧 뻔뻔하게 말했다. 뭐. 그래서 불만 있어? 태형이 냉큼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나는 지인짜 축복해. 형님이랑 너랑 알콩달콩 사는 미래가 너무 그려진다. 민윤기가 압수해가지 않은 돈가방을 꼭 끌어안고 그렇게 말했다. 오히려 민윤기는 태형에게 크루즈 여행권을 하나 더 얹어줬다. 네 입이 싸서 고맙다며. 약속을 개뿔로 알고 안 지킨 덕분이라고 하면서 욕인지 칭찬인지 모를 말과 함께.
지민은 윤기와 같이 라스베가스로 돌아왔다. 물론 떠나기 전 반지하 집에서 일주일 정도를 머물렀었다. 그 기간 동안 눈만 마주쳤다 하면 서로를 물고 빨기 바빴다. 꼭 처음 관계를 가졌을 때 같았다. 윤기가 지민의 옷에 손을 넣으며 말했다. 지민아 가끔 죄책감이 든다. 왜 넌 얼굴이 그대로야. 지금 나이차이 한 10살은 나는 거 같다. 형은 그게 무슨 또 헛소리예요? 그래서 싫어요? 아니 귀엽고 좋다고. 말하며 윤기는 뽀뽀해오는 지민을 보고 정말 아저씨마냥 실실 웃었다. 그리고 그 일주일 기간 동안 건물주를 만나 아예 도장을 찍었다. 호텔 재벌 남친은 집도 기념품이라며 소장한단다.
“으 심심해….”
파칭코 기계를 의미 없이 연타하며 지민이 중얼거렸다. 연신 당첨이라고는 하나도 안 되는 기계를 발로 한번 쿵 치고는 그대로 이마를 아래에 박았다.
“힝…민윤기 보고 싶어….”
사랑하는 연인과 불타는 시간을 보낼 줄 알았던 지민은 예상과 달리 민윤기 머리카락조차 보기 힘들었다. 만사 다 제치고 지민을 잡으러 떠난 윤기는 그 시간을 메우기라도 하듯 라스베가스로 돌아와서 꽤나 바쁜 일정을 보냈다. 투자자 미팅에, 폴리스 라인 해제에, 아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진짜 재벌 남친이 됐다.
에휴. 지민이 한숨을 푹푹 쉬고 있을 때였다. 커다란 손이 지민의 퐁실한 뒤통수를 부드럽게 매만진다.
“게임하고 있었어?”
“윤기 형!”
지민이 반색하며 팔짝 일어난다. 단숨에 이제 다시 제 것인 품에 폭 안긴다. 초롱초롱 빛나는 눈동자는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것을 보는 눈이었다. 짧게 반가운 재회를 나눈 뒤, 조금 전 머리를 파묻고 했던 생각들을 밖으로 꺼냈다.
“근데 이거 기계 제대로 작동되는 거 맞아요? 어떻게 이렇게 당첨이 하나도 안돼요. 잭팟 나온 사람을 본 적이 없어. 이거 사기치는 거죠.”
“왜. 필요한 돈 있어? 나한테 말해. 줄게.”
“아니 돈이 목적이라기 보단 사기 당하는 것 같은 기분이 영….”
말하던 지민이 문득 윤기를 바라본다. 호텔 오너에게 이렇게 따지고 있으니 새삼 신기한 기분이 든다.
“어떻게 길에서 주운 게 호텔 재벌이지? 이거야말로 당첨이네. 난 진짜 운이 좋나 봐요.”
지민이 쫑알쫑알 떠들었다. 형을 만나는데 운을 다 써서 이건 당첨이 안 되나 봐요. 예쁜 말을 참 골라서도 잘 했다. 윤기는 지민의 머리칼을 한번 더 쓰다듬으며 다정을 만끽했다.
“그 운으로 따지면 좋은 건 네가 아니라 나지.”
“엥? 형이요? 나 개털인데?”
“개털이 뭐냐 개털이.”
“하긴. 이제 조금 돈이 있긴 해. 남 호주머니 턴 돈들이긴 하지만.”
지민이 고개를 주억거린다. 윤기는 지민의 말을 정정해주는 대신 그저 픽 웃었다. 지민이가 이제 형 먹여 살려야겠네. 어리고 예쁜 남친 덕 좀 보자. 그에 지민이 당당하게 가슴을 쫙 편다. 생각해보니까 내가 어리고 예쁜 것만으로도 형은 운이 좋네요.
민윤기는 여전히 귀여운 짓을 하는 지민을 보며 생각했다. 정말 당첨은 제가 됐다. 몇 번이고 끝에서 살려준 건 너야. 박지민은 빛 한 점 보이지 않는 민윤기의 밤하늘에 뜬 유일한 달이다. 항상 길을 비춰주는 박지민이야말로, 민윤기 인생에서 얻은 가장 값진 것이다. 재벌가 핏줄도, 명예도, 돈도 아닌 박지민이야말로 민윤기가 가진 행운을 모조리 털어 마련한 것이다.
“형 이제 다시 가봐야 되는 거 아니에요?”
“아니. 안 가는데. 일주일간 휴가야.”
“진짜!?”
지민이 폴짝폴짝 뛴다. 남의 휴가에 박지민이 더 좋아했다. 윤기도 좋아하는 지민을 보니 좋았다.
“내가 이 날만을 기다렸어. 형 쉬면 하고 싶은 거 진짜 많았는데!”
“왜. 뭐 가고 싶은 곳 있어?”
지민이 곰곰이 생각에 잠긴다. 아니 그건 딱히 없, 말하다 말고 민윤기를 흘끔 보더니 말을 바꾼다.
“응. 하나 있어.”
지민은 씨익 입꼬리를 당겨 환하게 웃었다.
열 시간이 넘는 비행시간을 들여 몇 년 만에 다시 찾은 제주도는 여전했다. 두 사람이 사랑하고 헤어지고 싸우고 다시 만나고 지지고 볶는 기간이 없던 것처럼 아주 푸르렀다. 에메랄드를 그대로 녹인 바다와 청량한 하늘은 언젠가 딱 한 번 본 그날을 떠올리게 했다. 운전대는 윤기가 잡았다. 쫙 트인 해안도로를 달리는 동안 지민이 창문을 내리고 손을 내밀었다. 스쳐 지나가는 바람이 손에 잡힌다.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는 지민을 보면서 윤기가 툭 물었다.
“왜 여기로 고른 거야.”
“제대로 못 봤었단 말이에요. 그때 형이 밤에 안 놔줘서 잠도 제대로 못 자가지고.”
뜨끔한 윤기가 그대로 입을 다문다. 그래. 다시 보면 좋지. 별 뜻 없이 던진 말에 민윤기가 꼬리를 마는 걸 보고 지민의 입꼬리가 심상치 않게 올라간다. 흐응? 재미있는 생쥐 장난감을 발견한 고양이처럼 눈이 빛난다.
제주도에서 처음으로 도착한 장소는 바다 앞이었다. 햇빛에 반짝이는 맑고 푸르른 바다를 보면서 지민이 감탄사를 흘렸다. 한껏 풍경을 감상하며 윤기와 사진도 찍고, 바쁘게 돌아다니다가 툭 말했다.
“기억나요? 우리 지난 번에는 반대쪽 바닷가로 갔던 거?”
“기억나지. 어떻게 잊어.”
그 바다 앞에서 윤기는 지민만을 바라봤다. 바다를 보면서 웃는 지민이 명소 그 자체였다. 거기도 물 파랗고 예쁘고 진짜 좋았죠. 형이 막 사진도 많이 찍어주고 그랬었는데!
“그리고 튀었지.”
“…….”
“난 그래서 그쪽 바다보다 여기가 훠얼씬! 더 좋은 거 같아.”
“…배 안 고프니? 다른데 갈까?”
“그것두 나쁘지 않아요. 배고프다.”
지민이 동의했다. 바다를 실컷 구경하고 난 뒤 들린 곳은 삼겹살 집이었다. 유명한 흑돼지 집이라고 한다. 지민이 고른 메뉴였다. 직원이 와서 고기를 구워준다. 맛있다! 감탄사를 흘리며 지민이 윤기의 그릇에도 고기를 밀어준다. 똑같이 젓가락도 있는데 항상 윤기를 챙기는 게 박지민 버릇이었다.
“어때요?”
“맛있네.”
“다행이다. 형이 예전에는 직접 구워줬었던 거 기억나요?”
“어.”
“그때 진짜 맛있었잖아요. 소시지도 진짜 좋았는데. 제주도는 그래서 소시지도 다르냐고 막 이야기하고 그랬었는데!”
지민이 흘끔 먹고 있는 윤기를 본다.
“그러고 사라졌잖아요. 돈도 다 들고 튀고. 제가 그 뒤로 흑돼지는 못 먹고 하얀 돼지만 먹었어요.”
켁켁. 윤기가 사레 들려 기침을 한다. 헉. 괜찮아요? 지민이 급히 물을 담아 내민다. 어. 고마워. 저지른 잘못이 있는 민윤기는 그대로 침묵하며 지민의 수발을 들었다. 형이 쌈 싸줄까? 넹. 좋아요.
그 이후로는 정원에 들렸다. 꽃을 테마로 만들어놓은 정원이다. 유달리 꽃을 좋아하는 지민에게 딱인 공간이다. 평일이어서 그런지 구석진 곳에는 사람이 없었다. 오히려 그래서 더욱 좋았다. 둘만 있는 것 같아서.
윤기와 손을 잡고 걷던 지민이 잘 꾸며진 조경을 보자마자 냉큼 말한다. 이미 얼굴은 잔뜩 들떠있었다. 놀릴 생각에 아주 신이 났다. 매번 능청맞게 요리조리 잘 빠져나가기에, 쩔쩔 매는 민윤기를 보기란 박지민에게 있어 쉬운 기회가 아니었다.
“그때 형이!”
지민이 말을 하기 무섭게 이번엔 윤기가 반격했다.
“야 난 시애틀을 이제 못 가. 네가 만약에 호텔이 아니라 거기 국립공원에서 떠났지? 난 그대로 동사했어. 너 찾겠다고 온 설산을 다 뛰어다녔을 테니까. 헬기 띄웠어. 응급실로 실려가야 돼서.”
“그래서, 억울해요?”
“…아니. 고맙다고. 호텔에서 가줘서. 덕분에 바로 너 쫓아갈 준비 다 했어. 어떻게 그렇게 잘 사라졌냐.”
결국 터진 윤기에 지민이 꺄르륵 웃음을 터뜨렸다.
“꽤 많이 참았네요?”
“저지른 잘못이 있는 놈이 어떻게 말하냐.”
“뭐 어때요. 이제 다시 민윤기 내 건데.”
지민이 생글생글 예쁘게 웃는다. 윤기는 지민과 잡은 손에 힘을 더욱 꽉 쥐었다. 도망가면 끝나는 거야. 알겠어? 협박 같은 멘트에도 지민은 변함없이 웃어 보였다. 맞다. 박지민은 온전히 자신의 것이다. 다시는 놓지 않을 테니까. 아팠던 과거조차 함께 나눌 수 있게 옆에 있어준다. 현재도, 미래에도 영원히 곁에 있을 거란 확신이 든다.
윤기가 말했다.
“내일은 뭐 하고 싶어. 못 했던 거 다 해.”
“…호텔 가기?”
지민이 앙큼하게 윤기와 잡은 손에 깍지를 낀다. 윤기가 우뚝 멈췄다. 지민아 너 감당 가능하겠어? 아냐, 잠시만. 잠깐 한번 생각해볼게요. 지민이 고민하는 사이, 윤기가 안되겠다며 결국 지민의 손을 이끈다. 두 사람은 벗어나듯 빠르게 정원에서 빠져 나왔다. 와. 지난 번보다 더 빨리 귀가하는데?
급하게 침대로 직행한다. 어느새 예쁜 풍경은 잊혀진 채 서로만 남았다.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변함없이 사랑한다. 함께 있는 시간조차도. 모든 게 기껍고 소중하다.
다시 쌓아 올린 관계는 이전보다 더욱 단단한 땅에 자리잡았다. 결코 무너지지 않을 땅에. 바람이 아무리 불고, 눈보라가 몰아쳐도 흔들리지 않는다. 지민은 사랑에 새로운 정의를 내렸다. 좋은 것만 주고 싶은 것도 사랑. 매일같이 힘들더라도 곁에 함께하고 싶은 게 사랑인 것 같다.
다시금 새로 시작한 연인은 깊은 입맞춤을 나누었다. 언제나 애틋하게 서로를 원하며. 막 풋풋한 커플처럼 뜨겁다. 변하지 않을 사랑의 온도였다.
完
+++
짧은 후기
여차저차 잭팟 완결이 났습니다!
1편은 아주 오래 전에 썼고 나머지 편들은 갑자기 정말 문득 갑자기 쓰고 싶어져서ㅋㅋ 쓰게 됐습니다. 제가 봐도 신기하네요. 이게 완결이 날 수 있는 거였나...
슈짐 사전에 헤어지는 일은 없다. 재결합을 위한 헤어짐 뿐이다.
같이 달려주신 분들 감사합니다. 이 이야기가 작게나마 위로가 되었으면 합니다.
완결을 축하드립니다.
요즘같이 뒤숭숭한 나날들에 큰 위로가 되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