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 These Boots Are Made for Walking>
민윤기와 박지민의 첫만남은 우연이다. 박지민이 우연으로 만든 첫만남. 그리고 그 뒤의 인연은 타의에 의해 이어 붙어졌다. 민윤기에 의해서.
지민은 한 차례 도둑 수련이 망한 뒤, 또 다른 지갑을 사냥하기 위해 나섰다. 그거 개미친놈이네. 그런 미친 새끼들은 눈길도 주면 안 돼. 태형은 민윤기에 관한 설명을 듣고는 절대 엮이지 말라고 주의를 줬다. 지민도 듣고 나서 동감했다. 복잡한 사정은 나 하나로 충분하니 얽히지 말아야지. 당장 먹고 살 길이 막막했으므로.
그리고 취객들이 많은 사냥 명소에 도착하자마자 지민의 다짐은 깨부숴졌다.
“도둑이 왜 이렇게 게을러 터졌어. 그래서 도둑질이 돼? 먹고 살 수 있겠어? 기다리다 목 빠지는 줄 알았다.”
볼캡을 푹 눌러쓴 민윤기가 지민을 맞이했다. 지민이 입을 떡 벌렸다. 밥 한끼 먹고 헤어진 이후 지민은 연락처를 남기라는 윤기의 말에 이상한 번호를 찍어주었다. 지갑을 털려고 하기도 했고. 혹시 모르니까. 말 그대로 스쳐 지나가는 인연으로 놔두려고 했다. 그냥 길을 지나가다 만든 선행. 그쯤이었다.
“왜, 왜 여기 있어요!?”
“너 기다렸는데. 네가 찍어준 번호 누르니까 치킨집 사장이 전화 받더라고. 네 덕분에 치킨 시켜먹는 사람 됐어.”
“그…게, 아니, 그니까 절 왜 기다려요?”
“네가 나 살려놨잖아. 책임져야지.”
윤기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몰랐어? 원래 생명의 무게는 무거운 거야. 그거 알고 살렸어야지. 한 번 거두면 끝이야.”
민윤기는 요새 SNS에 돌아다니는 문구라며 ‘입양은 신중히’라는 문장까지 언급했다. 지민은 다시 한 번 황당함에 벙 쪘다. 처음도 그렇고 두 번째도 그렇고 만날 때마다 지민의 어이를 지구 밑바닥까지 털리게 하는 남자였다. 그렇다면 이 남자는 자신이 오길 기다리며 매일 밤 이곳을 서성거렸단 말인가? 미친놈인가?
“저는 그렇게까지 막중한 책임감으로 한 거 아닌데요?”
“어쨌든 살렸잖아. 못 물러.”
“아니, 그럼 뭐 해수욕장에서 라이프가드 하는 사람들은 하렘 하나씩 있게요?”
“그건 모르겠네. 그런데 넌 그런 거 못해. 나는 나눠 가지는 거 싫어해.”
“…저 바쁘니까 알아서 가세요.”
미친놈이네. 헛소리에는 차단이 답이다. 지민은 윤기를 지나쳤다. 다른 작업 장소로 가야지. 태형이 알려준 도둑질 핫스팟이 몇 곳 더 있었다. 빠르게 걸어 장소를 벗어나려던 지민이 발걸음을 뚝 멈췄다.
“…왜 따라와요?”
“알아서 가라며.”
“근데 왜 절 따라와요?”
“그게 내 할 일인데? 너 따라가는 거. 생명의 은인 도우러 가야지 내가 어딜 가.”
“안 도와줘도 돼요. 따라오지 마요.”
“그럼 안 도와주고 옆에 있기만 할게. 망 보는 거 필요하지 않아? 영화 보면 죄다 2인조던데.”
“괜찮아요. 갈 길 가세요.”
“그게 네 옆이라니까.”
“…혹시 머리에 좀 이상이 있어요?”
“미쳤냐는 말을 참 다정하게 하네.”
윤기가 픽 웃었다. 너 생긴 거랑 하는 짓이 똑같네.
“아무래도? 죽으려던 새끼가 정상이겠어?”
“…….”
“내 생각에 우리 좀 잘 어울리는 거 같아. 넌 네 입으로 양아치 도둑놈이라며. 나는 미친 새끼고. 꽤 괜찮은 거 같은데. 아냐?”
“…저는 아직도 도둑 안 됐어요.”
“뭐 어쨌든. 그냥 날 옆에 두는 선인장 같은 거라고 생각해봐. 반려식물이라고 하던데.”
지민이 그게 뭔 소리냐는 듯 윤기를 어리둥절히 본다. 윤기는 잠시 턱을 매만진다.
“네 옆에만 있게 해줘. 얌전히 있을게.”
“…….”
“내가 살길 원하는 사람 너밖에 없어.”
그 말에는 또 매몰차게 굴지 못한다. 박지민은 남을 등 처먹는 길로 진로를 정한 주제에 잔정이 많았다. 사람 성정이 원래 그랬다. 그렇게 험한 인생사를 겪고도 지민에겐 마지막 남은 동정심이 존재했다. 부모님의 사망 소식을 듣던 날. 간절히 바랐다. 누군가는 부디 자신의 삶의 의미를 찾아주기를. 갈팡질팡하던 지민은 결국 민윤기의 검은 눈을 마주하고 한숨을 포옥 쉬었다.
“…진짜 가만히 있을 거예요?”
“응.”
“가만히 있어야 돼요.”
“그럴게.”
“…밥은 먹었어요?”
민윤기는 씨익 웃더니 주머니에 손을 푹 꽂고 지민과 발맞춰 걸었다. 내 애칭은 뭐로 할 거야. 보통 식물에는 애칭 지어주던데. 밥은 잘 드셨나 보네요. 기운이 넘치시는 거 같아요. 너는 개소리한다는 말도 예쁘게 잘 돌려 말한다. 윤기는 흥미롭다며 지민의 곁을 총총 따랐다. 낮은 저음으로 툭툭 말을 거는 민윤기에게 대답하다 보니 지민은 그날도 하루를 통째로 날렸다. 이게 아닌데. 동 트는 해를 보며 좌절하는 지민에게 민윤기가 위로 아닌 위로를 했다. 원래 모든 직업은 처음이 어려운 법이지.
그 날부터 반려식물 민윤기를 곁에 들였다. 지민은 자연스레 민윤기와 함께하는 시간이 늘었다. 도둑질을 하겠다고 나가선 같이 강가를 걷고, 편의점에서 컵라면을 사먹고, 24시간 게임센터에 가서 농구 게임기로 내기를 했다. 이상한 놈이니 깊게 엮이지 말자고 했던 결심은 시간 앞에 녹아 내렸다. 대화를 할수록 웃음이 많아졌고, 가끔 빤히 마주보는 눈에 이상하게 뺨이 달아올랐다. 민윤기가 입꼬리가 패이게 웃을 때는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삶이란 끝까지 어떻게 될지 모른다 했던가. 갑작스레 지민의 인생에 또 다른 반전이 등장했다.
“도련님!”
“유모…? 진짜 유모야?”
지민이 얼떨떨한 얼굴을 했다. 바싹 마른 여성이 눈물을 흘리며 지민의 손을 감격스럽게 쥐었다. 그 동안 도련님을 얼마나 만나고 싶었는지 몰라요. 믿기지 않아 멍하니 서있던 지민은 곧 같이 눈물을 뚝뚝 흘리며 유모를 끌어안았다. 그녀는 지민에게 또 다른 부모나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몸이 좋지 않아 관두기 전까지는.
“늦게 찾아서 미안해요, 도련님.”
“그럴 필요 전혀 없어. 몸은 이제 괜찮은 거야?”
유모는 활짝 웃었다. 그럼요. 이제 다 나았습니다. 문제없다며 그녀는 지민을 안심시켰다. 그리고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기다리고 있는 흥신소 직원에게 입금을 했다고 말했다. 유모가 이렇게 큰 돈은 어디 있어서…. 걱정하는 지민에게 유모는 보험금이 많이 나와 괜찮다고 했다. 지민은 유모의 품에 다시 한 번 안겼다. 어렸을 적 포근하게 느낀 향이 그대로 났다.
이럴 수가. 역시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안다는 사람들 말이 맞았다. 박지민 인생에도 다시 이런 날들이 올 수 있다니. 유모를 찾았다. 이 기쁜 소식을 윤기에게도 전했다. 보들보들한 뺨이 상기되어 있었다.
“사실 저도 예전에는 사는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었는데요. 요새는 너무 행복해요. 유모를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어요.”
“잘 됐네.”
“형한테도 삶을 살게 만드는 행복한 이유가 생겼으면 좋겠어요.”
진심을 꼭 담은 눈빛으로 말한다. 윤기는 지민을 빤히 바라본다. 그러더니 평소와 똑같이 무던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건 네가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아.
그리하여 지민은 아름다운 날들만이 존재할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렇게 혼나고도 아직 배우지 못했다. 인생이라는 놈은 믿는 게 아니라는 것을. 쿨럭. 유모가 기침을 거세게 했다. 화장실에서 돌아오던 지민이 발걸음을 멈췄다. 유모는 급하게 손수건으로 입가를 닦으며 그것을 숨기려는 듯 품 안에 급히 쑤셔 넣었다. 오셨어요, 도련님.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는 유모에 지민은 보지 못한 척을 했다. 응, 방금 왔어. 그 날, 저녁. 지민은 유모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옷장에서 핏자국의 흔적이 남은 손수건들을 발견했다.
다 나으신 게 아니었어. 지민은 유모가 약값을 살 돈까지 모두 털어 저를 찾기 위해 흥신소에 의뢰한 것을 알게 되었다. 모든 게 제 탓 같았다. 뭐라도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다. 그대로 지민은 길거리로 뛰쳐나갔다. 민윤기와 만나는 평소의 장소가 아니었다.
돈이 필요해. 나 때문이야. 돈이 있어야 유모한테 바로 약을 줄 수 있어. 지나가는 사람들을 정신 없이 스캔하던 지민은 곧장 행동에 옮겼다. 민윤기와 시간을 보내며 사라진 목표 의식을 다시 세웠다. 골목길 안쪽 비틀거리는 취객에게 다가서 툭 부딪혔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날렵하게 안쪽을 털어 달아나려는데.
“이 새끼, 뭐야! 너 지금 내 지갑에 손댔지!”
비틀거리던 남성이 돌연 눈을 부릅 뜨더니 지민의 뒷덜미를 잡아챘다.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아니에요!”
“아니긴 뭐가 아냐! 씨발 너 같은 퍽치기 새끼들 내가 한두 번 보는 줄 알아? 주머니에서 손 꺼내.”
“아니라니까요? 왜 이러세요? 이, 이거 놓으세요.”
“이 어린 놈의 새끼가! 눈을 지금 시퍼렇게 뜨고 거짓말을 쳐?”
덩치 좋은 남성이 손을 허공 위로 쳐든다. 지민이 눈을 질끈 감았다. 저 커다란 주먹에 맞으면 머리가 반쯤 부서지는 거 아닌가 싶다. 선천적으로 힘이 약해 빠져나갈 수 없었다. 그리고 잠시 뒤 퍽, 거친 타격음이 들린다. 돌아간 건 지민의 뺨이 아니라 남자의 몸이었다. 어억! 남자가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엎어진다. 어느새 지민의 옆에는 민윤기가 서있었다.
민윤기는 다짜고짜 지민의 뺨을 붙잡고 뽀얀 얼굴을 이리저리 살핀다. 그리고는 깊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씨발 심장 떨어질 뻔 했네.”
그사이 덩치 커다란 남성이 비척비척 일어난다. 그리고 공교로운 타이밍으로 골목 안 쪽으로 다른 남성 셋이 들어온다. 이 새끼들은 뭐야? 아니, 형님! 험악한 인상의 그들은 그대로 남자를 부축하더니, 상황을 전해 듣고는 떼로 달려들었다. 무차별적인 폭력의 시작이었다.
민윤기는 그 와중에도 지민을 꽉 끌어안고 위에서 덮듯 절대 놓지 않았다. 퍽퍽 쏟아지는 발길질을 죄다 받아냈다. 골목 밖에서 사이렌 소리가 들릴 때까지. 이 씨발 새끼들 운 좋은 줄 알아라. 남자들이 사라지자마자 민윤기는 감싸고 있던 박지민부터 확인했다. 이마까지 까져 피가 철철 나고 있는 민윤기와 달리 멍 자국 몇 개 든 것 말고는 보송보송하다.
“쪼끄매서 다행이네.”
지민이 민윤기의 아래에서 빠져 나왔다. 이번에는 지민이 윤기의 뺨을 붙잡고 이리저리 살폈다. 윤기가 쓰읍, 따갑다는 듯 인상을 옅게 찡그렸다.
“병원, 병원 가요 어서.”
“그 정도는 아냐. 침 바르면 나아.”
“그게 어떻게…!”
“진짜야.”
윤기는 멀쩡하다는 듯 손을 털어 보인다. 명치들은 죄다 보호했어. 여기 까지고 등만 조금 밟혔을 뿐이야. 지민의 표정이 울망거린다. 글썽거리는 눈물이 떨어지기 일보 직전이다. 안 그래도 비 맞은 고양이 꼴 같았는데, 아예 홀딱 젖어간다. 지민이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형이 왜 나 때문에 맞아요.”
“그럼. 주인이 맞을 위기인데 반려식물이 방패 해야지 가만히 있냐.”
“다, 다 내가 잘못해서 생긴 건데 왜 형이, 형은 아무 잘못도 없는데.”
“박지민.”
윤기가 말을 끊으며 지민의 어깨를 붙잡는다. 흔들림 없는 눈빛이다.
“너 아니면 내가 누구 지켜.”
“…….”
“내가 말했잖아. 나한테는 너만 남았다고.”
그냥 이만하길 다행으로 생각해. 너 한 대라도 맞았으면 그 새끼들 이미 죽이고 나 감옥 갔어. 그러더니 한쪽 입꼬리만 들썩이며 이번엔 농담을 건넨다.
“근데 나 감옥가면 보러 올 거냐. 그건 괜찮을 거 같은데.”
어떻게 이런 사람이 존재한단 말인가. 피를 줄줄 흘리면서 안심 시키겠다고 난리다. 이런 마음을 지민은 알고 있다. 남을 이렇게나 생각하는 마음. 자신이 민윤기를 보며 꼭 행복해졌으면 좋겠다고 느끼는 것과 같다. 민윤기는 여전히 그렁그렁한 눈망울의 지민을 보고 머리를 멋쩍게 긁적였다. 안 웃기냐.
가슴에 뜨거운 것이 번져간다. 참지 못한 지민은 민윤기의 멱살을 잡고 냅다 입술을 들이박았다. 민윤기의 눈이 조금 커진다. 폭신한 입술을 짧게 붙였다 뗀 지민은 이제 울망거리는 얼굴이 아니었다.
“좋아해요.”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이 척박한 삶 속에서도 결국 사랑이 피어났다.
민윤기는 제가 지킨 말간 얼굴을 봤다. 평생 지켜주고 싶은 사람. 제 삶에서 단 하나 남은 의미. 그대로 답하듯 고개를 꺾어 키스한다. 짧게 떨어진 지민과는 달리 아예 지민의 뒷머리를 헤집는 손까지 넣으며 본격적이다. 으응. 핏자국이 있는 이마에서는 이제 통각도 느껴지지 않는 듯했다. 여러 번 붙었다 떨어지며 윤기가 그대로 지민의 어깨에 머리를 파묻는다. 지민의 귓가에 저음이 쏟아진다.
“솔직히 너한테 그런 말 들으면 어떨까 상상해본 적 있는데.”
“…….”
“하아, 씨발. 비교도 안 되게 좋다, 지민아.”
윤기는 그대로 지민을 끌어안은 채 온기를 만끽했다. 쪽쪽 입을 맞추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벅찬 마음으로 같이 응하던 지민은 문득 아래에서 느껴지는 감각에 흠칫했다. 허벅지를 찌르는 이게…. 민윤기는 정말 튼튼했다.
“…형 말대로 병원 안 가도 될 거 같긴 하네요.”
“나는 진심만 말해. 모텔 갈까?”
“아니요! 약국부터 가요. 상처 남으면 안 돼.”
윤기는 실실 웃으며 얌전히 지민을 따라 일어났다. 네가 하자고 하는 건 다 같이 할게. 골목길을 빠져나가는 두 사람은 서로 꼭 붙어 걸었다. 새로 시작한 연인이므로.
지민은 일련의 사건 뒤로 새로운 마음 가짐을 먹었다. 민윤기와 연애를 시작하는 것 외에 추가된 한 가지다. 앞으로 도둑질은 안 할래요. 윤기는 아무렴 상관없다는 듯 쿨하게 끄덕였다. 네가 하고 싶은 거 해. 박지민의 목표는 이렇다. 남들처럼 평범하게 사는 것. 민윤기와 연애하고, 정상적으로 일해서 번 돈으로 유모 치료를 도와드리는 것.
윤기는 묵묵히 지민의 뜻을 따랐다. 밤거리를 전전하던 지민이 일을 그만두고 평범한 삶을 원하니 같이 일자리를 구했다.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지민에 맞춰 공사장에 취직했다. 먼지에 뒤덮여 들어와 씻고 난 뒤 지민과 한 이불을 덮고 생활했다. 그러다 보니 분명 시작은 가벼운 뽀뽀였는데, 그를 기점으로 어느 샌가 몸을 끊임없이 나눴다.
태형에게 윤기도 소개시켜주었다. 그때 그 너 쫓아다니는 변태 싸이코? 태형이 저도 모르게 민윤기를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무슨 말이야, 태태! 지민이 당황하여 허겁지겁 다른 사람과 착각한 모양이라며 태형을 무마시켰다. 윤기는 픽 웃으며 태형에게 악수를 청했다. 그 변태 싸이코 맞습니다. 그리고는 무던하게 지민에게 덧붙였다. 잘 소개했네. 맞는 말인데 뭐. 내가 너 쫓아다녔지. 변태도 맞고.
유모는 지민이 약을 전달하며 모든 사정을 알았다고 설득하니 한사코 약을 거절하다 결국 받아들였다. 도련님께 짐이 되지 않고 싶었어요. 지민은 유모를 모시고 병원에 발도장을 찍었다. 점차 차도가 보인다는 의사의 말에 지민이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유모도 온화한 미소로 기뻐했다.
그렇게 모든 생활이 안정된 궤도를 찾아가고 있었다. 사랑해 마지 않는 애인과 부모 같은 유모와 둘도 없는 친구. 점점 커다란 꿈도 키웠다. 작은 카페를 내기로 했다. 지민의 말이라면 무조건 들어주는 윤기도 동의했다. 그것도 나쁘지 않네. 지민은 열심히 돈을 모았고, 윤기 역시 지민의 꿈에 동참했다. 그렇게 모은 돈이 작은 카페를 차릴 수 있을 만큼 쌓였을 그 즈음이다.
“잠깐 여행이라도 다녀올까? 가게 오픈하면 시간도 많이 없을 텐데.”
윤기의 제안이었다. 지민은 동의했다. 두 사람은 제주도로 향했다. 지민은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푸른 바다와 하늘을 보며 웃었고 윤기 역시 지민을 보며 웃었다. 행복의 절정 같았다.
그리고 다시 집으로 돌아온 다음 날. 민윤기가 사라졌다. 지민과 같이 모은 모든 돈을 들고서. 아무런 연락도 남기지 않고 박지민을 버렸다.
***
지민은 천근 같은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온몸이 뻐근하게 쑤신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짜증나는 건 바로 오랜만에 꾼 꿈이다. 요새는 안 꾸더니 왜 갑자기 또 과거의 파편들이 찾아온 건지. 기분이 엿 같았다. 아무래도 이건 현실에서 다시 민윤기를 만났기 때문이다. 끄응. 지민이 길게 몸을 늘리며 침대에서 일어나려는 때였다. 방 안으로 어제 밤을 같이 보낸 구애인이 찾아 들어왔다.
“일어났네. 몸은 어때.”
대체 언제 일어난 건지 수트까지 풀세팅을 마친 윤기가 방문에 삐딱한 자세로 기대있었다. 명품 수트가 단정하게 채워진 모습을 보니 어제 지민을 짐승처럼 몰아붙인 몰상식한 인간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지민은 퉁명스레 답했다.
“좆같아요.”
“그래. 어제 우리 같이 좆질을 열심히 하긴 했지.”
지민이 윤기를 째려보았다. 그냥 말을 말자. 윤기는 뿐만 아니라 기다렸다는 듯 지민에게 이것저것 잔소리를 했다.
“피곤하면 더 자도 돼. 어제 보니 더 마른 거 같던데 체력 관리는 한 거야? 영 형편 없던데. 젊은 나이에 벌써 그럼 못 써. 영양제 꼬박꼬박 먹어. 밥도 인스턴트만 먹지 말고.”
꼴랑 두 살 차이 나는 주제에. 그리고 박지민은 오히려 평균 또래보다 체력이 좋은 편에 속한다. 침대 속으로만 들어오면 민윤기의 체력이 미친 듯이 불어나는 게 문제였다.
“일은 어떻게 됐어요? 태형이 찾았어요?”
“아직 마땅한 소식은 없어. 너무 걱정하진 마. 네 친구 감 하나만큼은 뛰어나잖아. 믿어보라고.”
“그쪽한테 제 친구 믿으라는 말은 듣고 싶지 않네요. 오늘 내로 소식 알 수 있어요?”
“글쎄. 우선 사람 붙여서 행동 추적해보라고 했어. 경찰 쪽에서는 아직 연락 없으니 안심해.”
잘 빠져나간 듯도 하다. 지민이 가슴을 쓸어 내린다. 위험한 건 아닌가 보네. 윤기는 그를 가만 지켜보다 지민에게 다가왔다. 그가 신기하다는 듯 말했다.
“왜 여유가 있지? 내가 볼 때 넌 네 걱정이나 좀 더 해야 할 것 같은데.”
“왜요. 경찰에 넘기게요?”
“아니. 위험한 게 그쪽 말고.”
그럼? 지민이 뒷말을 기다리듯 윤기를 본다. 음. 윤기는 뒷말을 더 잇지 않고 팔짱을 낀 채 고민한다. 뭐야. 왜 뜸 들여. 이상하다는 듯 윤기를 바라보던 지민은 더 기다리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불이 내려가며 우유를 부은 것 같은 맨 살이 드러난다. 이미 어제 물고 빨아 붉은 자욱이 가득했다. 그에 윤기의 진득한 시선이 닿는다. 그렇게 탐했으면서도 아직 모자란 듯 짙고 습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지민은 뻐근한 허리 통증에 미간을 찡그리며 가운을 걸치기 바빴다. 완전히 가운을 묶을 때까지도 말이 없는 윤기에 결국 돌아본다.
“뭔데요 그럼. 말을 해요.”
윤기가 애매하다는 듯 입매를 매만지다가 결국 픽 소리 나게 웃는다.
“난 네가 눈치 없고 순수해서 좋아.”
단번에 지민의 미간이 팍 구겨진다. 그리고는 주저하지 않고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들며 욕실로 저벅저벅 발을 옮겼다.
“바쁜 거 아니에요? 어서 꺼져요.”
“내 걱정도 해주는 거야? 고맙네.”
“못 본 사이 더 맛이 갔네.”
“응. 좀? 칭찬 고마워.”
룸서비스 시켜놓을 테니까 나와서 밥 먹어. 와서 검사할 거야. 이어지는 윤기의 말이 뒤로 흩어진다. 지민은 더 대답하지 않은 채 욕실 문을 닫았다.
꿈에서 봐서 그런가. 민윤기는 왜 안 늙는 거야. 이곳이 값비싼 호텔 뷰가 아니었다면 꿈에서 깨지 않았다고 착각할 뻔했다. 재수없게도 한 때 잘생기고 예쁘다고 생각했던 얼굴이 그대로였다. 아니, 인정하기 싫지만 돈 생겨서 여유 생기고 그런지 조금 더 잘나졌다.
지민은 이마를 부여잡았다. 삶이 그대를, 시발, 이렇게까지 속여야 될까요. 구남친이랑 또 자다니. 연이어 뺨을 찹찹 쳤다. 이건 민윤기를 이용하는 것일 뿐이다. 흔들리면 안 된다. 굳건하게 다짐했다.
앞으로 일주일 안에 어떻게 되든 탈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