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 임세현 - 龍 ( 용 )>
나룻배는 조용히 물길을 따라 흘러간다. 고요한 밤이 되니 사람들의 끔찍한 비명도 괴물들의 기괴한 울음도 사라지니 모두 지어낸 이야기 같다.
“하아아. 자네들 덕분에 내 목숨을 건졌소! 이 은혜는 평생 잊지 않으리다.”
행낭을 묶고 쫓아온 사내가 안심이 되는지 먼저 말을 꺼냈다. 윤기는 그를 영 언짢다는 듯한 눈길로 응시했고, 지민이 밝게 말을 받았다.
“사람이 사람을 구하는데 이유가 필요합니까.”
“성곽에서 그 꼴을 보니 꼭 그렇지도 않소이다. 고맙소. 난 담언이라고 하오. 하 내 태어나 그리 무섭게 생긴 괴물들은 처음이오. 입이 이마까지 찢어지지 않았소? 내 머리가 한입에 절반이 사라질 뻔했다오. 그런데 도령 활 솜씨가 매우 좋던데, 내 그런 명궁은 또 처음 보는데 훈련이라도 받은 것이오? 이거 참 든든하오. 허허허.”
“너야말로 입이 이마까지 찢어졌냐? 무슨 말이 이리 많아.”
“형님. 처음 보는데 그리 험한 말은….”
“든든은 무슨. 네 몸은 네 스스로 지켜라. 도련님은 널 지키려고 있는 사람이 아니다.”
윤기가 코웃음을 치며 답한다. 형님, 조용히 해요. 지민이 윤기의 옆구리를 푹 찌르니 인상을 찌푸리며 왜 누르냐는 듯 군다. 왜. 저놈이 먼저 처음 보는데 이상한 소리를 했지 않아. 형님은 그냥 가만히 있으십시오. 담언은 두 사람의 모습을 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그쪽은 사정이 있어 노비 행세를 하는 거요?”
도령이라 불리는 이는 비단옷을 입고 있어 누가 보아도 양반인데, 형님이라 불리는 쪽이 아무리 봐도 양반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괴물조차 양반으로 안 볼 거다. 순식간에 두 사람의 입이 다물리니 담언은 혼자 해맑게 결론을 지었다.
“하긴. 이렇게 된 마당에 양반이고 노비고 뭐가 중요하오! 하하하. 같이 살아있다는 게 중요한 거지. 안 그러오? 박 도령, 민 도령이라 부르면 되겠소. 그런데 내 살면서 박 도령처럼 고운 사내는 본 적이 없는 듯하오. 한양에서도 서역에서도 본 적이 없소! 그리고 민 도령은 이렇게 시정잡배 같은 말투를 잘 쓰는 사람도 처음 보오. 위장을 아주 잘하는 구려! 어디서도 본 적 없이 상스러운 게 내 노비로 단단히 착각했소이다 하하하. 산적 같기도 하오!”
“진짜 머리가 반은 뜯겼나 보네.”
환히 웃는 담언을 향해 윤기가 혀를 차며 중얼거린다. 머리가 반이 뜯겼다면 이미 나는 괴물이 됐을 거요. 그건 안심하시오. 그조차도 활기차게 답하는 모습을 보니 담언은 꽤나 눈치가 없는 편이었다. 지민은 그 사이에서 난감하게 웃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대들은 어디로 가는 거요?”
“아직 목적지는 없습니다. 성주 안으로 가는 것이 목표였는데 일이 이렇게 될 줄은….”
관군의 보호를 받는 것이 제일 안전할 텐데, 그곳이 붕괴되었다. 게다가 성주가 뚫린 것을 보아하니 도착하는 곳이 마냥 안전하리라는 확신도 없다. 지민의 표정이 어두워진다. 그를 본 담언이 눈을 빛냈다.
“갈 곳이 없다면 나와 같이 한양까지 가는 건 어떠하오? 나는 한양까지 가야하오.”
“한양 말입니까?”
“듣기로 한양은 안전하다고 하오. 왕께서 있는 곳이니 그 어느 곳보다 안전할 거요. 안전한 곳을 찾는 거라면 그만한 선택이 없을 거요! 어떻소. 게다가 이미 우리는 한 배를 탄 사이 아니오? 이제 서로를 믿고 의지해야 조금이라도 더 살지 않겠소?”
“네 뭘 믿고 말이냐. 다음 나루에서 넌 내려줄 테니 따로 가라.”
윤기가 여전히 담언을 경계한다. 짐승이었다면 털을 잔뜩 세운 채 경계하는 상태일 거다. 윤기 형님. 지민이 이름을 부르자 윤기는 뚱한 표정으로 입을 다문다. 지민은 뱃길을 가늠했다. 이대로 쭉 타고 가게 된다면 한양으로 올라가는 길이다.
윤기의 말도 일리가 있다. 이렇게 변한 세상에서 담언의 무얼 믿고 흔쾌히 동행한단 말인가. 허나 마땅한 방도가 없는 것도 현실이다. 성주가 무너진 이상 이 지역은 멀리 떠나는 편이 옳다. 아마 그러기 위해선 중간중간 식량을 구하러 마을을 들려야 할 터인데, 혹시라도 그곳에서 괴물들을 상대한다면 사람이 한 명이라도 더 있는 것이 나은 편이다. 더하여 왕이 있는 한양이라면 그곳만큼은 안전할 게 분명하다. 지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한양까지 같이 가요.”
“아주 좋은 선택이오! 잘됐구려!”
윤기는 영 수상쩍다는 표정을 지우지 못했지만 결국 지민이 정한대로 얌전히 따를 건지 침묵으로 긍정을 표했다. 모든 지민의 선택에 민윤기는 결국 복종했다. 혼인도, 삶의 갈림길에서도.
윤기가 지민의 몸에 묶어놓은 자루를 푼다. 안에서 고소한 음식 냄새들이 서서히 퍼진다. 담언이 눈을 번뜩였다.
“오오. 혹시 식량 좀 가진 게 있는 거요? 계속 배를 곯았더니 내 배에서 나는 소리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벼락보다 더 큰 거 같소.”
“없다.”
“아니 거기 다 훤히 보이는데 왜….”
“네놈 줄 건 없어.”
“식량이 꽤 있으니 같이 나눠 먹어요.”
딱 잘라 말하는 윤기 옆에서 지민이 웃으며 육전을 내민다. 편히 드시지요. 담언이 냉큼 지민의 곁으로 다가온다. 당장이라도 목을 물을 듯 노려보는 윤기의 시선이 보이지 않는 건지 크게 한입 베어 먹는다.
“도령은 정말 얼굴처럼 마음도 곱구려. 민 도령도 마음씨가 정말 하는 언행과 똑같구려.”
“야 너 먹은 거 토해내.”
“형님도 어서 먹어요.”
윤기는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담언을 노려보며 지민을 툭 쳐 제 등 뒤로 보낸다. 지민도 그에 반항하지 않고 얌전히 윤기의 뜻을 따른다.
담언은 그 모습을 보고 신기해하며 윤기와 지민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주인과 충견 같기도, 익숙한 형제 같기도, 보호 받는 게 익숙하고 보호하는 게 익숙하기도. 모호하면서도 흥미로운 관계다. 서역에서 공부할 때도 경험해보지 못한 것이군. 입은 바쁘게 우물거리면서도 관찰의 눈길로 그들을 바라본다. 어찌 되었든 한 가지 사실은 확실해 보였다. 서로 애정이 깊은 사이군.
물가로 나온 이상 나룻배는 고요하고 주변에 괴물의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세 사람은 거의 눈을 뜬 채 밤을 지샜다. 지민은 푸르스름하게 밝아오는 하늘을 보다가, 이내 꾸벅거리며 고개를 흔들기 시작했다. 맞은 편에서 담언은 이미 입을 떡 벌린 채 기절해있었다. 윤기는 평소와 다름없이 말없이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지민이 파드득 고개를 흔들며 잠을 털어냈다. 형님한테 도움이 되어야지.
“졸리면 눈 좀 붙여라.”
“아, 안 졸았습니다.”
눈이 뒤통수에도 달렸나. 분명이 물가만 바라보고 있었는데 어찌 안 건지. 지민이 화들짝 놀라며 부정했다. 윤기가 혀를 찬다.
“거짓부렁 하지 말고 자.”
“괜찮습니다. 어제도 형님이 내내 밤을 새우지 않으셨습니까. 형님이야말로 쉬어요.”
“다리 다친 애가 뭘 한다고. 됐다. 이 조금 안 자도 괜찮아.”
“저도 조금 안 자는 건 괜찮습니다.”
“알아서 해라 그럼.”
윤기는 다시금 물가로 시선을 던진다. 지민은 다시금 눈을 수 차례 부릅 떠가며 잠을 떨쳐냈다. 형님이랑 같이 있어야 하는데. 나도 형님을 지켜야 한다. 그러나 사방은 고요하고 흔들리는 배는 잠을 끊임없이 불러왔다. 심지어 말을 타는 내내 긴장하며 몸을 굳히고 있었더니 더할 나위 없이 피곤했다. 괴물이 밀려드는 세상에서도 왜 인간은 피곤을 느낀단 말인가. 다시금 지민의 고개가 꾸벅꾸벅 흔들린다. 그러다 이내 기우뚱거리는 순간. 물가만 바라보던 윤기가 손을 뻗어 지민의 고개를 받쳐주었다. 윤기가 바라보던 물에서는 지민의 고개를 받쳐주고 있는 윤기의 모습이 그대로 투영되고 있었다.
“…….”
윤기는 조심스레 지민을 눕혔다. 그리고는 물가가 아닌 잠든 지민의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한참이나 그를 내려다보다, 거의 동이 터올 때 즈음 윤기 역시 지민의 곁에 앉은 자세로 간신히 잠을 청했다.
그 뒤로부터 지민이 잠을 깬 건, 큰 소란 때문이었다. 간밤의 평화는 녹아 내린 듯 사라져있었다.
“사, 살려주시오! 으아악!”
“무슨 짓을 하려고 한 거냐. 바른대로 말해라.”
“오해요! 전부 오해일 뿐이오! 그저 박 도령이 다친 거 같아서 환부를 살피고 있던 것뿐이오!”
졸음에 비몽사몽 눈을 깜빡이던 지민이 벌떡 일어났다. 펼쳐진 모습은 가관이었다. 윤기가 담언의 멱살을 쥐고 물 밖으로 떨어뜨릴 듯 밀고 있었다. 담언이 윤기의 손을 붙잡고 꽥꽥 비명을 지르며 난리를 쳤다.
“으아악. 진짜 떨어진단 말이오! 살려주시오! 아이고 나 죽네. 박도령이 다리에 천을 묶고 있어서 환부를 치료해주려 한 거요! 참말이오. 저, 저기 내 행낭을 보시오.”
“바지춤에 손을 뻗는 게 치료란 말이냐?”
“형님! 갑자기 이 무슨 일입니까!”
지민 역시 비명을 지르며 윤기를 말리려 붙었다. 나룻배가 휘청거린다. 으아아악. 멈추시오오오. 담언이 더한 고함을 친다. 배가 뒤집히면 죽지 않소 엉엉. 지민도 더는 가까이 가지 못하고 곁에 떨어져 섰다.
“일어나니 이 자가 네가 자는 사이 바지춤을 끌러 내리고 있었다.”
“그야 환부를 자세히 보려면 그리 할 수 밖에는, 으, 으억, 숨 막히오! 아니 같은 사내끼리, 켁켁!”
담언이 급히 제 행낭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나, 나는 사실 의원이오. 저 안에 약재들과 서책이 있소. 확인해보면 될 것 아니오. 박 도령이 내 행낭을 보면 다 설명이 될 거요. 박 도령 어, 어서.”
“형님 우선 진정을 해보시지요. 제가 확인 해보겠습니다.”
지민이 담언의 행낭을 연다. 그 안에는 담언의 말대로 서책과 약재 몇몇이 들어있었다. 자 보시어요. 지민이 그를 윤기에게 들이민다. 이것 보시오! 담언이 이제 당당히 외친다. 윤기는 여전히 미심쩍은 얼굴로 담언의 멱살을 놔주지 않고 있었다. 아니, 민도려어엉. 지민이 윤기에게 이만 담언을 놔달라는 말을 하려는 찰나였다.
“정말 의학 서책과 약재들이 맞습, 어…?”
지민이 서책을 보더니 멈칫한다. 지민은 담언이 제 바지를 벗기려고 했단 소식을 들었을 때보다 더 굳어진 표정으로 담언의 서책을 열었다. 담언이 그에 흠칫하며 눈치를 본다. 설마. 서책은 서역의 언어와 조선말로 복잡하게 적혀있었다.
“…밤에만 움직이는…인간….”
“바, 박 도령이 서역 말을 어찌….”
온갖 책을 모으길 좋아하는 박 대감 덕분에 지민은 서역의 책 또한 구경했었다. 자유롭게 읽고 쓰진 못해도 몇몇 단어를 더듬거리며 읊을 수는 있었다. 적혀진 내용은 그 뒤로 복잡하여 자세히 읽을 수 없었다. 지민이 굳어진 낯빛으로 담언을 본다.
“괴물과 관련된 내용인 거지요.”
“그냥 나의 일지! 그런 거라고 보면….”
“정확히 말하십시오. 아니면 버리겠습니다.”
지민이 서책을 물 밖으로 버리겠다는 시늉을 한다. 담언의 얼굴이 아예 허옇게 질린다. 쌍으로 협박을 해대는데 수준이 아주 남다르다.
“아니, 박 도령 지금 너무 흥분한 것 같소. 일단 차분히 내려놓….”
“버립니다.”
“으악! 말하겠소! 전부 말하겠소!”
담언이 눈을 꽉 감는다. 그에 지민이 책을 다시 내려놓았다. 담언은 협박에 못 이겨 돈을 토해내는 사람마냥 줄줄 읊었다.
“…나는 내의원이오. 왕의 밀지를 받고 이 병에 대해 알아보고 있는 중이오.”
“뭐?”
그 말에는 윤기조차 놀랄 수밖에 없었다. 담언은 흑흑거리며 이제 이 멱살을 풀어달라 요청했다. 윤기가 지민을 돌아보니 지민이 고개를 끄덕거린다. 마침내 손이 풀리자 담언이 다리에 힘이 풀린 건지 주저앉는다.
“왕께서는 이미 이 병에 대해 알고 계시오. 허나 조선에서는 처음 겪는 병이기에 서역에 나를 보내 은밀히 이 병에 관해 조사해보라 명하셨소. 허나 서역에서도 알아보니 방도가 없었소. 몇몇 일지를 구한 것밖에는…한양으로 돌아가야 하는 이유는 이 때문이라오. 왕께서 내가 가져올 소식을 기다리고 있으시오.”
“…….”
“바지를 벗긴 건 정말로 환부를 살피기 위함이었소. 그대로 두면 다리를 평생 절게 될 게 분명하오. 내 아무리 도령이 어여쁘다고 해도 여인에게만 관심이 있고…헉, 설마 혹시 도령도 민 도령처럼 분장을 하는 거요?”
“…사내 맞습니다.”
지민은 그리 답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윤기 역시 생각이 복잡해졌다. 왕의 밀사라니. 민윤기는 그저 박지민만 살리면 됐다. 안전한 장소에 두고 싶을 뿐이다. 허나 지민이라면 또 다른 생각을 할지 모른다. 지민은 늘 모든 생명을 귀하게 여기고, 배를 곯는 자가 있으면 식량을 나눠주기도 했으며, 배움을 열심히 해야 한다고 했으니까. 아니나다를까 골똘히 고민하는 얼굴이다.
그러나 담언과 앞으로 동행하게 되면 문제가 더욱 커진다. 왕의 밀사다. 솔직한 심정으로 민윤기는 담언이 죽든, 괴물이 되든 아무런 관심도 없었지만 박지민은 지키려고 할 거다. 그렇다면 민윤기도 지켜야 한다. 왜냐하면 박지민의 뜻이 민윤기의 길이었으므로. 지민의 칼이 되겠다고 맹세한 순간 그리 하기로 했다.
“제발, 제발 한양까지 같이 가주시오! 동행하여 도왔다고 하면 왕께서도 큰 상을 내려주실 거요!”
냅다 담언이 지민의 손을 텁 붙잡는다. 이게. 윤기의 미간이 좁혀진다. 윤기가 손을 뻗으려는 순간 지민이 입을 뗐다.
“좋습니다.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대로 한양까지, 아니 궁까지 동행하겠습니다.”
“박 도려어엉! 고맙소. 정말 고맙소! 도령처럼 배포가 큰 사내는 내 보지 못했소이다!”
앞으로 더 험난한 여정이 되겠군. 윤기는 속으로 판단했다. 이번에도 역시 정해졌으니 따를 뿐이다. 담언의 엉덩이를 발로 툭툭 쳤다.
“의원이라면 실력은 있겠네. 너, 어서 도련님 환부를 살펴라.”
“민 도령처럼 산적 같은 자도 내 처음 보오.”
“치료는 눈 감고 해라.”
“아니, 그럼 치료를 어떻게 하오?”
“감으로 해. 내의원이라면 높은 거잖아. 보지마. 안 보고도 해 봐.”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요. 민 도령이야말로 머리가 먹힌 거 아니오?”
“잔말 말고 눈 감아라.”
담언이 그게 어찌 되냐고 투덜거린다. 지민은 어서 치료하라고 협박하는 윤기를 바라보다가 끝이 보이지 않는 강을 봤다. 어쩌면 이 바뀐 세상에서 괴물들이 다 사라질 때면 많은 것들이 바뀌어 있을지도. 그리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