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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20 00:57

[슈짐] 야담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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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Piece of Memory>










 민윤기는 산 어귀를 얼쩡거렸다. 다른 때처럼 깊숙이 올라 사냥을 하고 계곡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초반 입구에서 연신 서성였다. 제 뜻도 아닌데 고개가 자꾸만 입구 쪽으로 돌아갔다. 꼭 다시 보는 거여요! 말간 얼굴의 그 아이가 계속해서 머리에 맴돌았다. 약조한 날이 아님에도 묶인 것마냥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다. 계집아이도 아닌 사내아이가 뭐가 그리 달게 굴어. 지민을 떠올릴 때마다 뒷목에 닿던 간지러운 숨결이 자꾸만 떠올랐다.



“더럽게도 느리게 가네.”



 낮밤이 언제부터 이리 게으르게 흘러갔단 말인가. 윤기는 나흘이나 남은 약조날을 손꼽으며 투덜거렸다. 혹시라도 지민이 올까 산을 타지도 못했다. 애가 좀 아무나 잘 믿어서 내가 돌봐줘야 한다고. 그러나 지민은 약조한 날 올 모양인지 코빼기도 비추지 않았다.



“어린 것이 할 일이 뭐가 있다고.”



 윤기는 괜히 발코로 땅을 툭툭 쳤다. 벌써 뉘엿뉘엿 해가 진다. 더는 기다려도 지민이 오지 않을 것 같아 집으로 향했다. 종종 들고 오던 토끼, 꿩 같은 사냥감은 이제 윤기의 손에 없었다.


 허름한 집들 사이를 가로질러 마찬가지로 허름한 집 어귀에 도달했을 때였다. 가축을 잡을 때가 아니면 늘 조용한 집이 이상하게 웅성거린다. 뭐야. 백정의 집에 찾아올 방문객이 따로 있진 않을 터. 있으나마나 한 담 너머로 여러 음성들이 건너왔다.



“그래서, 형님 지금 우리를 배신하겠다는 거요?”

“배신은 무슨! 난 원래부터 동의한 적 없어, 이 사람아.”

“우라질. 모임에 나왔잖어! 이제 와서 뒤통수를, 아아 그러고 보니 최근에 형님 거, 박대감 집에 불려갔었지? 그거 때문이구만. 그거 하나 잘 보이겠다고 우리를 배신하는 거야? 뭐 그 양반이 면천이라도 시켜준다던?”

“그 소리가 여기서 왜 나와. 백정이 꿈꿔봤자 백정이지. 그런 생각 한 적도 없네! 사람을 해하면서까지 난, 어어, 윤기야. 왔어?”



 방문객은 백정 무리들이었다. 윤기도 익히 아는 얼굴들이었다. 백정은 그 어느 곳에서도 받아주는 곳이 없어 백정들끼리 모여 살고 있었고, 지나가며 마주쳤었다. 비록 버릇없는 민윤기는 만나도 대충 인사만 까딱거릴 뿐 제대로 웃어른으로 대한 적이 없긴 했다. 여섯의 덩치 좋은 백정들이 마당을 채우니 자리가 꽉 찼다. 하나같이 험악한 얼굴들이었다.



“이제 그만 돌아들 가! 그 이야기는 따로 우리끼리 하고. 윤기 너 또 산에 댕겨오는 거냐? 너도 어서 방으로 들어가라.”



 훠이. 아버지가 다른 백정들을 내쫓는다.



“형님 잘 생각하쇼.”

“아 다음에 이야기 하자니께. 얼른 나가!”



 다른 백정들은 여전히 불만에 가득 차있었지만, 아버지의 강경한 의사에 마지못해 밖으로 나갔다. 윤기는 제 곁을 스쳐가는 백정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기억했다. 윤기 너도 어서 집 안으로 들어가라니까? 아버지의 성화에 방 안으로 향했다.



“뭔데. 저거.”

“뭐가 말이여. 아니 이놈 자식이 또 싸가지 없이 웃어른한테 저거가 뭐냐, 저거가.”

“뭔지 알려줘.”

“넌 신경 쓸 거 없어. 뭐 뻔하지. 백정들끼리라도 잘 뭉쳐서 살아야 한다 그런 거지. 다음에 또 술이나 같이 한잔 하자는 거여. 아 왜 지난 번에 술 같이 안 마셨잖어. 박대감한테 내가 선택 받으니까 다들 뿔이 난 거지. 다아 부러워서 그런다, 부러워서.”



 내 솜씨가 좋은 걸 그냥 인정하면 되는 걸 가지구. 아버지는 이어 박대감 집에서 이번 일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며, 또 일이 있으면 자신을 불러주겠다는 약조를 받았다고 신이 나 떠들었다. 이내 윤기는 흥미가 시들었다. 또 박대감 자랑을 일장 늘어놓겠지. 이러니 다른 백정들이 진절머리를 냈을지도.



“아버지 너무 그렇게 박대감, 박대감 하고 다니지 말아. 양반 놈들이랑 얽혀서 좋을 것 없어.”

“아니 이 녀석아 너는 좀 들어라. 이게 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중요한 정보들이야! 네 어미도 살아있었다면 분명 좋아했을 거다.”



 아버지는 윤기가 태어나자마자 죽은 어머니 이야기까지 꺼냈다. 조금 뒤면 아마 술을 마시면서 홀로 추억에 잠길 터다. 평소와 다름없다고 생각한 윤기는 아비의 말을 씹고 화살대를 다듬기 시작했다.


 지민이 오면 토끼를 잡아 보여주어야지. 계곡에서 물고기도 잡고. 그럼 좋아하겠지. 활짝 웃는 말간 얼굴을 기대된다. 어서 나흘이 지나갔으면 좋겠다.







 마침내 약조한 날이 되었다. 전날에 이상하게 잠도 쉬이 오지 않았다. 윤기는 새벽부터 일어나 만반의 준비를 했다. 활도 챙기고 화살촉도 확인했다. 그리고는 아직도 드르렁거리며 자고 있는 아버지를 내려다보았다.


 아버지는 어제 다른 백정들을 만나고 온다며, 돌아올 땐 술에 떡이 되어 돌아왔다. 잔뜩 취해 비틀거리는 몸을 부축하니 취중에 헛소리를 마구 해댔다. 아이구 내 새끼, 윤기야. 너어는 양반으로 태어났으면 세상을 호령했을 놈이야. 못하는 거 하나 없지 머리도 좋지 생김새도 훤하지. 우리 소화도 이리 다 큰 널 봤으면 엄청 좋아했을 텐데….아비가 백정이라 미안허다…미안타….


 그렇게 잠들었으니 아비는 늦게나 일어날 것이다. 지민을 만나면 늦게 돌아올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작업이 있다면 또 자신을 찾을 것이다. 윤기는 찾지 말라는 뜻으로 아비를 흔들어 깨웠다.



“아버지 나 산에 다녀온다.”

“…크음…응? 아니 이 꼭두새벽부터 무슨…, 다녀와라, 다녀와.”



 아버지는 손으로 휘적거리며 금방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윤기는 반쯤 흐트러진 이불을 아비의 위로 잘 올려주었다. 집밖으로 나오니 이제 막 동이 트는지 공기가 차갑고 어슴푸레한 빛이 보인다.


 산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그 어느 때보다 날래고 가볍다. 이렇게나 빨리 산 근처에 도착한 적이 없다. 윤기는 아예 산으로 올라가지 않고 가는 길목 근처에서 서성였다. 산으로 오려면 이 골목을 지나야 하니 여기 있다 보면 지민을 조금 더 빨리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약조한 시간까지 한참 남았지만 어쩐지 지루하진 않았다.


 슬슬 해가 중천에 뜬다. 길목을 지나다니는 사람들도 보인다. 곧 지민이 올지도 모른다. 윤기는 저 먼 길 끝만 바라보며 지민을 닮은 사람을 찾았다. 평생 가져보지 못했던 기대감이라는 게, 민윤기의 안에서 무럭무럭 자라났다.


 그런데 찾던 지민이 아니라 몇몇 사람들이 골목 어귀를 바삐 뛰어간다.



“아 여기서 뭐 하는가! 큰일이 났네!”

“왜 또 그러는가.”

“아 불이 났다지 뭐야! 엄청 크게 났다는디 가서 물이라도 끼얹어야지. 다른 집에 옮겨 붙게 생겼네!”

“무어? 어디 났는데 그래.”

“아랫골목 서백촌 쪽이라던데.”



 기분 좋게 느껴지던 가슴소리가 발 아래로 툭 떨어진다. 서백촌은 백정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윤기는 홀린 듯 발걸음을 옮기더니, 아예 뜀박질로 거리를 질주했다.


 발끝부터 기어올라오기 시작한 불안감이 머릿속을 점령한다. 토할 것 같은 숨을 거칠게 몰아 쉬며 집 방향을 향해 달리자 그 사람들의 말대로 시커멓게 피어 오르는 연기가 보인다. 그러나 한창 타오르던 불이 조금 꺼졌는지 연기는 약했다.


 불행이란 누구에게나, 갑작스럽게 파고든다. 잠시라도 행복할 틈을 주지 않는 것처럼. 천하게 태어난 네 주제를 알라고 하는 것처럼. 윤기의 손에서 활대가 툭 떨어진다. 불에 탄 집 앞에 모든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렸다.



“아이고, 저걸 어째. 아이고. 사람이 있었을 텐데!”

“못 나온 거랴? 세상에.”



 아버지가 잠들어있던 집이 시커멓게 변했다. 타다 남은 잿더미가 되어 완전히 무너져있었다. 그 짧은 사이에. 윤기는 사람들 틈을 헤집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 주저앉은 지붕. 아버지와 같이 윤기의 키를 잰 흔적이 남아있던 기둥. 허름한 집은 화마를 찰나조차 감당하지 못했다. 희망 한 포기 남기지 않고 부숴진다.


 털썩 윤기의 무릎이 무너진다. 시체조차 찾을 수 없는 처참한 꼴에 손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그때, 한 짝만 남은 아버지의 짚신이 윤기의 눈에 들어온다. 뺨으로 굵은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린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그 짚신을 손에 쥐었다. 그 행동이 지혜를 주는 계기였을까? 아니면 악인에게 누군가 내리는 징벌이었을까? 윤기의 머릿속으로 며칠 전의 상황이 떠오른다.


‘형님이 우리를 배신한 거지!’


 순간 윤기의 눈이 희번덕거린다. 그 놈들이다. 새끼들이 분명하다. 윤기는 바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마당 한 켠에 놓여있어 타지 않은 작업 도구들 사이를 뒤적였다. 꺼낸 손에는 도끼가 들려있었다. 흐익! 아니 아야 너 지금 뭔. 윤기는 사람들을 밀치듯 치고 집 밖으로 빠져 나왔다.


 죽여버릴 거야. 이미 얼굴은 외워두고 있었다.











 지민은 오늘따라 말이 느린 글선생을 들들 볶았다. 아이 참, 스승님 오늘은 이만 끝내주면 안되시어요? 소인 아주 바쁜 일이 있습니다! 백발이 무성한 노인은 지민의 요청에 홀홀 웃으며 그리 해주었다. 과제를 잘 하여 드리는 상입니다. 지민의 광대가 하늘을 향해 치솟는다. 오늘만큼 수업이 끝나 기쁜 순간이 또 없다.



“덕대야! 늦었다! 빨리빨리 가야 한다! 형님은 이미 한참 전부터 기다리고 계실 거란 말이야!”

“아이고 도련님 그런 소리는 하면 아니 됩니다. 형님이라니요! 평민들이랑 어울리는 걸 알면 대감마님께서 경을 칠 겁니다. 소인 듣기만해도 목이 달랑거립니다요.”

“그치만 이미 형님이 되어주셨는걸? 어서 움직여라, 어서. 너 때문에 늦겠다! 아이 나 혼자 갈 걸 그랬어.”

“소인과 약조하는 겁니다. 오늘만 가고 다음부턴 그 평민을 보지 않기로요. 아시겠습, 도련님!”

“덕대 너 그렇게 시끄럽게 떠들 거면 돌아가.”

“어억, 도련님! 뛰면 아니됩니다! 넘어지기라도 하시면, 도련니임!”



 덕대를 조르다 못한 지민이 아예 달음박질을 친다. 아니 우리 고운 도련님이 어떻게 저런 말투를. 예절 따지기로는 그 누구보다 잘하는 지민이 쓰는 거친 말투에 덕대가 충격을 받아 머뭇거리다 이내 지민을 따라 황급히 뛴다. 넘어지면 도련님이 아니라 제 목이 달아답니다아아. 울상을 지으며 덕대가 뛰어오건 말건 지민은 넘치는 체력으로 우다다 뛰었다.


 오늘만을 기다렸다. 윤기를 만난 그날 밤부터, 윤기를 또 만나는 날만을 손꼽아 셌다. 형님이랑 놀고 싶은데. 형님한테 산 구경시켜 달라 하고 싶은데. 형님한테 맛있는 것도 잔뜩 가져다 주어야지. 어찌나 설레는지 지민은 제가 좋아하는 꿀타래와 밀과를 포함한 여러 간식들까지 바리바리 챙겼다. 하루에 개수를 제한해서 먹는 간식들은 먹고 싶은 걸 꾹 참고 모아놓기까지 했다. 덕대의 손에 달랑거리는 보자기에는 평민들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값비싸고 귀한 음식들이 가득했다.



“허억, 헉. 여기서 만나기로 한 겁니까요?”

“응. 형님이랑 산에서 만나기루 했는데….”



 지민이 산으로 들어가는 앞에서 기웃거렸다. 윤기의 모습이 보이질 않는다. 해가 여기 떴을 때쯤 만나자구 하였는데…. 지민이 풀이 죽는다.



“내가 늦게 와서 형님이 실망하여 간 걸까?”

“감히 평민이 양반이랑 한 약조를 어기려구요. 그럴 일은 없습니다요.”

“좀 늦으시나 봐.”

“도련님! 평민에게 경어라니요!”



 덕대가 또 뒷목을 잡는다. 덕대 너 시끄럽다. 아니 도련님 대체 그런 말투는 어디서…! 지민은 그러거나 말거나 길 끝만을 바라보며 윤기를 찾았다. 어서 오면 좋겠다. 작은 발을 동동 구르며 기다린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윤기는 오지 않는다. 뭐지이…. 지민이 눈썹을 축 늘어뜨렸다. 그 순간, 길 끝에서 인기척이 느껴진다. 지민이 주인 기다리는 강아지마냥 활짝 웃었다가 이내 윤기가 아니란 것을 확인하고는 시무룩해진다.



“저 짝에서 불이 났다는데 글쎄. 어린애 하나만 남겨놓고 죽어버렸대.”

“허이고. 불이 아주 크게 났나보구먼.”

“뭐 그래도 백정인 게 천망다행이지 뭐여.”



 지민이 귀를 쫑긋거렸다. 시간이 지나도 오지 않는 윤기. 그리고 마침 마을에서 난 큰 일. 음. 잠시 눈알을 데굴데굴 굴린 지민은 판단을 마쳤다. 



“덕대야 우리 거기로 가보자. 백정들이 사는 집이 어디야?”

“도련님! 그런 소릴 하덜 마시어요. 백정들이 사는 곳이라니요! 이건 진짜 안됩니다요. 얼마나 더러운 곳인지 압니까? 역병이라도 걸리면 어쩌시려고! 차라리 절 죽이십시오!”

“이보시오. 불이 난 곳이 어디오?”



 지민이 행인에게 말을 붙인다. 덕대가 경악하거나 말거나 지민은 위치를 전해 듣곤 쫄랑쫄랑 앞으로 나아간다. 보폭은 작은데 굉장히 빠르다. 덕대는 답답하다는 듯 가슴팍을 푹푹 쳤다. 말도 더럽게 안 듣는다. 우리 도련님이 벌써 반항을 시작한 것인가…. 벌써부터 제 고생길이 앞에 훤했다.



“도련님! 같이 가요! 뛰면 아니 됩니다!”



 덕대는 부랴부랴 지민의 뒤를 뒤쫓았다.










 범인으로 지목되는 이의 집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어제 그곳에서부터 아버지를 부축해서 나왔기 때문이다. 쾅. 거친 소음과 함께 윤기가 문을 발로 까고 들어섰다. 기세가 흉흉했다. 집안에서 놀란 표정의 사내가 나온다. 아버지의 친우였다.



“뭐, 뭔 놈이! 아니. 네가 왜 여기를 온 거냐?”

“네가 불 질렀지.”



 윤기는 어린 나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살기로 사내를 노려보았다. 덩치가 두 배는 차이 남에도 워낙 살벌하여 사내는 자신도 모르게 흠칫했다. 그러나 곧 정신을 차리고 언성을 높였다.



“이놈이 뭔 소리를 하는 거야!”

“개잡놈아. 너 맞잖아.”



 술 취해서 아버지가 했던 말에는 이런 말들도 있었다. 세상을 바꾸는데 피가 있어선 안 된다…. 우리같이 매일 짐승 피 보고 사는 놈들은 그럼 안 돼…. 계속 보다 보면 별 거 아니게 된다. 그렇지만 생명이 얼마나 귀한지를 알아야 한단 말이다. 그래야 우리가 산다. 그렇게 덤비면 나중에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되어있어. 아무리 힘들어도 그건 안 되는디….



“신분 높은 양반한테는 막상 그럴 용기가 없고 같은 백정 죽이는 건 쉬웠어? 너 같은 새끼 때문에 우리가 이런 거다. 천하고 역겹고. 넌 평생 백정 팔자야. 아버지가 너네 계획 박대감한테 불어버릴까 겁나던?”

“아니 이 육시랄 놈이!”



 사내가 성큼성큼 걸어 나온다. 윤기도 그대로 도끼를 쳐들고 달려들었다. 그러나 윤기는 사내에게 도달할 수조차 없었다. 형님! 뒤에서 튀어나온 사람이 윤기의 뒤통수를 나무막대로 내리쳤다. 윽. 윤기의 몸이 바닥으로 추락한다.



“증거 있어! 증거 있냐고. 느그 아버지 내가 죽인 거 니가 봤나?”



 격분한 사내가 다가와 온 힘을 다해 윤기를 발로 마구 찬다. 윤기는 아직도 흔들리듯 울리는 머리를 감쌌다. 머리에서부터 흘러나온 피가 바닥으로 퍼진다.



“똑같이 백정인 주제에! 혼자만 아닌 척, 귀한 척! 안 그래도 재수 없었어! 너 같은 것도 자식이라고 품고 사는 게 딱해서 껴줬건만 주제도 모르고! 헉헉.”



 무자비하게 짓밟힌다. 형님! 아무리 그래도 어린아이인데, 그러다 죽겄소. 윤기의 머리를 내리친 사람이 뛰어와 말린다. 내가 죽이면 뭐, 그래서 뭐! 어차피 백정이 죽어봤자 아무도 관심 없어! 바락바락 사내가 외친다. 윤기는 몸을 말아 방어하면서, 바닥을 더듬거렸다. 그리고 손에 도끼 막대가 잡히자마자 위로 휘둘러 내려찍었다.



“아악! 내 발! 발! 아아악!”

“혀, 형님!”



 사내의 발에 도끼가 박혔다. 이 미친 새끼. 죽여버릴 거야! 윤기는 피로 물든 얼굴로 기괴하게 웃었다. 그 사이로 눈물이 흘러내린다. 피눈물을 흘리는 것처럼 보였다. 분하지만 저 놈의 말이 맞다. 백정 따위 죽어봤자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다. 살인이든 자살이든. 당한 사람만 멍청한 것이다. 진상을 밝힌다고 해도 윤기의 편을 들어줄 이는 아무도 없다. 백정은 짐승만도 못하다. 짐승이 도륙 당했을 뿐인데, 그 누가 신경이나 쓰는가. 뜯어먹기 바쁘지.



“형님 그건!”

“놔!”



 사내가 제가 쓰는 도축 장비들을 꺼내온다. 도끼와 칼이다. 윤기는 여전히 무력하게 바닥에 누워있었다. 먼저 몸에 힘을 빼고 눈을 감았다. 고작 열 살인 자신이 장정 두 명을 상대할 비책은 없었다. 칼이 하늘로 높이 올라간다.


 그 순간이었다.



“안 돼!”



 윤기보다 더 체구 작은 몸이 윤기를 꼭 감싸 안았다. 억. 순식간에 나타난 비단옷에 놀란 사내가 휘청거리며 칼을 놓친다. 챙. 칼은 윤기와 감싼 이를 조금 비켜나 바닥으로 떨어졌다. 윤기는 자신을 감싼 부드러운 천을 느끼고 감았던 눈을 떴다. 시야에 온통 작은 얼굴이 들어온다. 오매불망 기다리던 그 얼굴이.



“형님 괜찮아요?”

“…네가 어떻게 여기에….”



 윤기의 눈이 조금 커진다. 고운 비단천이 윤기의 피와 흙 바닥에 엉망진창이 된다. 그런 것 따위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는 듯 지민은 오로지 윤기의 얼굴만을 보고 요리조리 살피더니 입술을 깨문다.



“저 자들이 형님을 이렇게 만든 겁니까?”

“아니 웬 아가 갑자기…형님이라니, 뉘, 뉘신지….”

“도련니임!”



 헉헉거리며 덕대가 나타난다. 쏜살같이 달려나간 지민 때문에 길을 찾기 힘들어 헤맸다. 덕대는 도착하자마자 이번에야말로 기절할 것 같았다. 피로 물든 바닥. 지민 근처에 떨어져있는 칼과 도끼. 톱도 있다. 심지어 이미 다른 사내아이는 심하게 맞은 건지 상태가 말이 아니다. 그 옆에 있는 곱디 고운 도련님이라니. 차라리 제 목이 떨어지는 게 나을 것이다. 식겁하여 덕대가 지민에게 황급히 뛰어왔다.



“도련님 이게 다 무슨 일입니까요. 괜찮으신 겁니까? 다치신 곳은….”

“마침 잘 왔다. 덕대야 형님을 챙겨다오.”

“예, 예?”



 덕대의 말을 끊은 지민이 조심스레 윤기를 다시 내려놓고 벌떡 일어난다. 늘 총명한 지민의 눈이 뾰쪽하게 뜨여있었다. 지민이 윤기의 앞을 가로막듯 섰다. 윤기는 제 등에 너끈히 업혔던, 한 주먹거리도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지민을 본다. 갑자기 일어난 상황에 윤기를 팬 백정들은 당혹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꿇어라.”



 어린 아이의 말에 사내 둘의 무릎이 바로 푹 꺾인다. 이제는 저보다 낮아진 그들을 보며 지민이 말했다.



“내가 누군지 아느냐. 나는 박가 집안의 장손 지민이다.”



 히익. 그 말을 듣자마자 사내들의 안색이 아예 시퍼렇게 질린다. 이제는 아예 바닥에 고개를 푹 박았다.



“제발, 제발 살려주십시오. 잘못했습니다. 양반나리이신 줄 몰라 뵙고 그런 겁니다. 잘못 했습니다!”

“입을 다물라.”



 지민의 한 마디에 사내들은 꼼짝도 하지 못했다. 지민의 등이 무척이나 꼿꼿했다.



“감히 양반을 시해하려 한 죄. 중히 물을 것이다. 내 아버지께 이 일을 낱낱이 고하겠다.”



 양반을 시해하면 무조건 사형이다. 백정들은 핏기가 빠져나간 혈색이 되었다. 연이어 지민이 바닥에 있는 윤기를 눈짓한다.



“그리고 무고한 이를 해친 죄. 너희들에게 또 다른 죄가 있다면 관아에서 밝혀질 것이다. 죗값을 톡톡히 치르게 될 것이다.”



 윤기는 피에 물들어 흐릿한 시야로도 지민을 눈에 담았다. 그 작은 등이, 그 순간에는 마치 태산 같았다. 산에서 눈물을 찔끔거리며 길 잃은 어린 아이가 아니라 든든한 보호막이 되었다. 지민이 할 말을 다 끝냈다는 듯 뒤를 돈다. 



“덕대야 가자.”

“예, 예.”



 윤기가 덕대에게 실려가듯 안겼다. 피를 흘린 탓에 정신이 가물거린다. 윤기의 손이 축 늘어진다. 그때, 윤기는 작은 손이 자신의 손을 마주잡는 것을 느꼈다. 따뜻하고 보드라웠다. 피가 잔뜩 묻은 제 손과는 달리.










 윤기는 눈을 떴다. 그리고 살아온 인생 동안 누워보지 못한, 아니 아마 평생을 가도 못 누워볼 두텁고 값비싼 이부자리에 누워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머리에는 흰 천이 감겨있었다. 누운 채로 방안을 휘 둘러본다. 도자기. 병풍. 구석에 놓인 서책들. 순전히 값나가고 귀한 것들이었다. 척 보기에도 누구의 방인지 알 수 있었다.



“…….”



 평인인줄 알았더니 양반이란다. 윤기는 첫만남에 얼굴이 빨개져 웅얼거린 지민의 얼굴을 기억해냈다. 더불어 아버지와 박대감의 집을 넘어왔을 때 호기심을 품었던 웃음소리도. 계집아이가 아니라 박지민이었던 거다. 멀리서조차 윤기의 관심을 홀랑 잡아채가던 그 아이. 윤기가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귀한 애들이 다 그런 웃음을 흘리는 게 아니라 그 아이라서. 그래서 민윤기의 시선이 간 거다.


 아직도 조금 울리는 머리를 감싸며 윤기가 자세를 바로 앉았다. 얼마나 시간이 흐른 건지. 마침 밖에서 도란도란 말소리가 들려온다.



“도련님 이건 정말 정말로 아니 됩니다. 대감마님께서 아시면 그날로 저는 죽은 목숨입니다. 백정한테 도련님 방을 내어주다니요!”

“내 형님이야. 그리고 어머니께선 목숨은 모두 귀하다고 하셨어.”

“저 많고 많은 방을 놔두고 왜 도련님 이부자리냔 말입니다. 역병에라도 걸리면…!”

“이미 만지고 다 했는데? 형님이 업어줬는데 안 걸렸어. 괜찮대두.”

“업어줬…! 아니 대체 언제 말입니까? 아니 이놈이. 도련님 참말로 그 놈을 시동으로 곁에 두시겠단 말입니까?”

“당연하지. 이미 아버지께서도 허가한 일이셔.”

“허락이 아니라 포기를 하신 게지요…전 이제 모르겠지라….”

“그래. 차라리 생각을 하지 않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덕대야. 아잇 약그릇을 똑바로 들어라. 흘리면 어쩌려구 그래.”



 장지문이 덜컥 열린다. 윤기가 쏟아지는 빛과 함께 등장한 지민을 본다.



“형님!”



 지민이 활짝 웃으며 단숨에 윤기에게 쪼르르 다가온다. 매우 기뻐하며 윤기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깨어나셨습니다!”

“이놈, 일어났으면 어서 거기서 나와라. 네가 지금 누워있는 곳이 어디인 줄은 알고….”

“덕대야. 어서 그 약그릇 놓고 넌 나가라.”

“…….”

“어서 나가래두?”



 머뭇거리던 덕대가 마지못해 나간다. 장지문이 도로 닫힌다. 윤기는 여전히 제 손을 꼭 붙들고 있는 지민의 작은 손을 흘끔 보았다. 윤기가 슬그머니 제 손을 빼냈다. 어. 지민이 눈을 동그랗게 뜬다.



“…귀한 분이셨습니다. 지능이 거기까지 닿지 못하는 미련한 놈이라 몰라봤습니다.”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해….”

“양반이고 전 천민입니다.”



 윤기가 딱 잘라 말한다. 평인이라면 몰라도 양반이다. 아마 윤기를 두들겨 팬 백정 놈들은 양반을 시해할 시도를 했다는 것만으로도 사지가 찢겨 죽었을 것이다. 그것도 가장 고통스럽게. 지민이 아무리 자신을 지켜주고 가까워진다 한들, 윤기는 마땅히 도리를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까 노비의 말도 일리가 있다. 양반의 이부자리에 눕는 호사를 어찌 감히 백정이 누리는가.


 그런데 돌연. 지민이 눈썹을 축 떨구더니 양볼이 서러움을 가득 담는다.



“형님이 되어주겠다고 했으면서 어찌….”



 윤기는 자못 당황했다. 지민의 눈에 물가가 어룽거리더니 닭똥 같은 뚝뚝 떨어진다. 이렇게나 바로 울 줄은 몰라서 놀란 윤기가 허둥지둥거렸다.



“왜, 왜 웁니까?”

“나는 형님이 일어나는 것만 기다렸는데, 크흥, 내가 어제 옆에서 하루 종일 형님 곁을 지키고 돌봐줬는데. 아버지한테도 형님이랑 같이 안 살게 해주면 다시 멋대로 밖을 나가겠다고 했는데, 흐잉. 융기 형님은 일어나자마자 이제 내 형님 안 해주게따고 하고….”



 마지막에는 어찌나 서러운지 발음까지 뭉개진다. 통통하고 하얀 볼에 눈물길이 새겨진다. 윤기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어린 아이를 울린 적은 처음이다. 그것도 양반을. 머리를 쓰다듬어주어야 하나. 그렇지만 양반인데. 그에 결국 지민이 원하는 바를 내주었다.



“알았다. 내 계속 네 형님 해주마. 그러니 울지 마라. 사내놈이 왜이리 잘 우는 거야.”

“징짜요?”

“진짜다.”

“징짜?”

“그렇대두. 아니 왜 눈물은 안 그치는 거냐?”

“원래, 킁, 한 번 터지면 쉽게 잘 안 멍추고, 흥.”



 지민이 눈물을 소매로 찍어낸다. 양반은 체통을 지켜야 한다구 아버지가 그랬는데. 나는 글러먹었다. 웅얼거리는 말에 윤기는 결국 실소가 터져 나왔다. 지민이 윤기를 영문을 모른 채 본다. 갑자기 왜 웃는 거람. 그 눈빛이 선해서, 저도 모르게 손이 뻗어나갔다. 보드라운 머릿결을 윤기가 쓰다듬었다.



“훌륭한 양반이다. 너처럼 멋들어진 양반을 내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러니 울지 마라.”



 지민이 그 말에 배시시 웃는다. 한번 터지면 쉽사리 멈추지 않는 눈물이 그 손길에 똑 멈췄다. 언제 울었냐는 듯 이제 눈꼬리를 휘어 접으며 웃는다. 윤기는 지민을 보며 조용히 마주 미소 짓다가 이내 큼큼 헛기침을 했다.



“…살려줘서 고맙다.”

“형님도 날 살려줬는걸.”

“뭐….”



 산에서 길 잃은 것 도와준 거랑 이게 어디 같겠냐만은. 윤기는 그저 머리를 쓰다듬던 손을 내려지 민의 뺨에 그려진 눈물 자국을 슥슥 닦아주었다. 지민이 그를 물끄러미 보더니 좋다는 듯 윤기의 손에 뺨을 붙이고 비비적거린다. 보드랍다. 여태 윤기가 만진 것 중에 가장 생의 기운이 넘친다. 윤기가 동작을 멈추고 지민을 본다. 또랑또랑한 눈망울이 윤기를 똑바로 본다.



“이제 형님은 앞으로 쭉 내 옆에 있어주는 거지?”


 윤기는 잠시 말이 없다가, 끄덕였다. 그리고 제 다짐을 말했다. 이건 지민이 제 앞에 등을 보이고 선 순간부터 했던 생각이다.



“내 목숨은 이제 네 거다. 네 마음대로 써라.”



 지민이 두 눈을 깜빡인다. 평생 붙어있는다는 소리입니까? 그래. 지민이 활짝 웃는다. 민윤기의 머릿속을 내내 떠나지 않던 그 웃음이다. 결국 봤다. 다시 보니 역시나 그토록 기다린 이유가 있었다. 맑고 따스하다.



“이제 제 것입니까? 그럼 평생 소중히 아껴줄 겁니다.”



 민윤기의 가슴에 따뜻한 것이 퍼진다. 이 웃는 얼굴만 본다면 정말 평생, 윤기는 그 어떤 짓이든 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윤기는 여전히 보드라운 뺨을 슬쩍 엄지로 문질러보았다. 지민은 얌전히 맡기고 있는다. 이것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박지민이 자신을 살리고 지켜주었으니 이제 자신은 박지민을 지켜야 한다. 백정의 자식은 삶에 새로운 의지를 품었다. 사냥과 도축이 같은, 생명을 앗는 일이 아니라 지키는 일로.


 정말 내 목숨을 바쳐서라도 널 지킬 거다. 어린 민윤기는 지민의 까만 눈에 홀로 맹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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