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 wouter hamel - march april may>
입을 떡 벌린 지민이 포스터와 표를 번갈아가며 쳐다보았다. 포스터 속 날아다니는 아이언맨한테 머리를 얻어맞은 것만 같았다. 가짜 표까지 만들어, 아니 가짜 표를 만들라는 명령까지 내리면서 불러냈단다. 지민이 어이가 증발한 눈빛만 보내고 있자니 윤기는 태연하게 입구를 눈짓했다. 정치가보다 더한 뻔뻔함이었다.
“안 가?”
“저는, 그니까, 보고서 쓰려고 온 건데요?”
“쓰지 마. 가, 이제.”
“아니 아니, 잠시만요. 진심이세요?”
“그럼 너 데리고 장난이라도 칠까봐?”
장난이었으면 좋겠다. 지민은 말도 잘 나오지 않아 에러 난 컴퓨터보다 더 버벅거렸다. 저는, 그냥 영화를 보러 온 건데요? 영화, 마블, 아이언맨, 아니면 잭 블랙. 점점 일그러지는 윤기의 입매는 말하지 않고도 뜻을 전하는 재주를 발휘했다. 적당히 해. 예전이라면 굳은 표정만 봐도 움찔하고 뜻대로 하겠나이다, 굽혔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지민은 꽥 지르듯 의사를 밝혔다.
“저는 그럴 생각이 없는데요!?”
“그럴 거 같았어. 그래서 그딴 표나 만들라고 시켰지.”
덕분에 잘 먹혀서 이렇게 만났고. 당당하게 사기를 쳤다 실토하는 윤기를 지민은 어찌 대해야 할지 감이 안 섰다. 화를 내는 게 맞는 거 같긴 한데, 저리 뻔뻔하니 할 말이 없었다.
“안 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끈다. 지민은 하마터면 그대로 윤기를 졸졸 따를 뻔했다. 허겁지겁 정신을 차리고 다시 한 번 주장했다.
“자, 잠깐만요!”
윤기가 발걸음을 멈췄다.
“이건 너무 갑작스럽고 한 번도 생각 안 해본 거예요.”
“그럼 지금부터 생각해.”
“…그거 너무 말이 안 되지 않아요?”
“일정 바꾸는 게 갑작스럽다면 그냥 영화 보고.”
다른 선택지라 제안한 것마저도 지민은 얼척이 없었다. 윤기의 뇌가 궁금했다. 싸이코같은 명령을 내릴 때부터 맛이 갔다 생각하곤 했지만. 다섯 살 배기 애도 아니고 따라오라고 하면 내가 따라갈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라스베가스는 오너와 사원의 대화라는 허무맹랑한 변명거리라도 있었다. 물리적으로도 거절이 불가능한 그때와 지금은 현저히 달랐다.
“아무래도 저는 오늘 해야 할 일도 있고….”
“무슨 일? 일 없잖아, 너.”
그랬다. 이번 주말은 오직 영화감상 하나였고, 그 일거리는 방금 윤기가 날려버렸다. 실제로 오늘의 일정은 간단했다. 밀린 청소를 하고 텅텅 빈 냉장고를 채워 넣고, 세탁소에 맡긴 옷을 찾아오기. 내일로 미뤄도 상관없는 일들뿐이었다. 그럼에도 지민은 질 수 없어 더 고개를 처들었다.
“개, 개인적인 일들은 있거든요?”
“나보다 중요해?”
“…저는 오늘 오실 줄도 몰랐는데 어떻게 비교를 해요?”
어설픈 변명으로 돌려 거절하기는 끝내야 할 때다. 아니면 또 질질 끌려다닐 거다. 이런 허무맹랑한 방식은 싫어요, 지민은 깊은 심호흡을 내쉬었다.
“아 잠깐. 네가 뭘 말하고 싶은지는 알겠어. 그런데 일단 나가는 게 좋을 거 같지?”
윤기가 먼저 선수를 쳤다. 지민은 주위의 시선을 그제야 의식했다. 신기한 구경이긴 하다. 후드티를 대충 눌러쓴 대학생 또래의 남자와 척 보기에도 명품을 휘감은 화려한 남자의 조합은. 자체만으로도 눈길을 끄는데 하물며 큰 소리도 나고 분위기도 유쾌해 보이진 않으니 관심은 금방 모여들었다. 윤기의 말이 맞다. 이런 장소에서 누군가 윤기를 알아보기라도 하면 곤란해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어디로 가면 돼요? 지민의 말 한 마디에 윤기는 따라오라는 말을 남겼다. 눈에 튀는 무리는 영화관을 빠져나가 멀지 않은 주차장에 도착했다. 슈퍼카는 주인처럼 두드러지는 존재감을 자랑했다. 람보르기니 우라칸의 매끈한 광택이 빛났다. 브레이크 테스트 때 보지 못한걸 보면 최근 추가된 모양이었다. 지민은 윤기가 시키지 않았지만 당연하게도 운전석으로 다가갔다. 귀하신 몸이니 집으로 돌려보내드리는 일도 당연히 제 몫이리라. 윤기가 말했다.
“거기 말고.”
“어, 기사 분 오셨어요?”
“아니. 휴가 줬어.”
“네? 그럼 운전은 누가 하는데요?”
무인 자동차인가. 지민은 추호도 윤기가 직접 운전대를 잡는다 생각하지 않았다. 항상 윤기의 곁에는 기사와 경호원들이 따라다니기도 했고, 윤기의 시간은 금이었다. 그 짧은 이동 시간조차 보고를 받고 승인을 내리는 사무의 연속이었다. 윤기는 여 보란 듯 차키를 흔들었다.
“누가 하고 왔겠어?”
“…….”
“옆에 타.”
뭘 동상처럼 서있어. 걸어가고 싶어? 이어서 들어온 윤기의 한 마디가 아니었다면 지민은 윤기의 마른 어깨를 잡고 탈탈 털어댔을지도 모른다. 누구세요? 설마 아스팔트정글 주인공이신가요? 얼굴만 같은 다른 사람이요. 천 마디 말을 꼴깍 삼킨 지민은 간신히 조수석으로 돌아가 탑승했다. 차키를 꽂는 윤기에 지민이 머뭇거리며 말했다.
“지금이라도 제가 운전할까요?”
“됐어. 개미는 되고 싶지 않거든. 네 운전 실력 못 믿어. 운전 좀 하고 오라고 하면 반나절은 사라지잖아.”
“그건 안전이 제일 중요하니까…그런데 진짜 괜찮으시겠어요?”
“그거 내 걱정이야, 네 걱정이야? 걱정 마. 뉴욕 최고 병원을 인수해서라도 넌 살릴 테니까.”
지민은 입을 합 다물었다. 윤기가 선글라스를 접어 뒤로 아무렇게나 던졌다.
“가고 싶은 곳 있어?”
어서 고르라 강요하던 라스베가스처럼 도박판이라도 고르게 될까 지민은 처음부터 정신을 굳건히 다잡았다. 놀라 허둥거리는 것도 한 두 번이었다.
“미스터 윤, 저 깊은 오해가 있으신 거 같은데, 전 같이 가려고 따라온 게 아니에요.”
확실하게 선을 긋자. 지민은 이미 라스베가스의 어색한 데이트를 반복할 정도로 어리석지 않았다. 일이라는 변명도 붙일 수 없는 이 행위를 덥석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사실 집에 모셔다 드리려고 왔거든요. 근데 운전을 직접 하시니까….”
윤기가 운전대를 손으로 톡톡 쳤다.
“단호하네.”
차는 침묵으로 붕 떴다. 지민은 괜스레 목이 탔다. 확고하게 뜻을 밝혔는데도 속이 마냥 시원하진 않았다. 한참만에야 윤기가 침묵을 깼다. 낮은 목소리는 덤덤했다.
“그럼.”
“…….”
“네가 원하는 대로 해줄게.”
넌 뭘 원해. 윤기는 잠자코 지민을 쳐다보았다. 왜 또. 왜 이 순간 저런 비 맞은 눈빛으로 보는 건데. 뉴욕을 발아래에 깔아놓은 사람이 뭐가 아쉬워서 제 처분을 기다리고 있는 건지 지민은 아이러니하다 느끼면서도 마음이 휘청거렸다. 한없이 이런 부분에선 약해지고 만다. 지금 기분은 설명하자면 그래, 화려한 무대를 누비던 무용수가 막이 내리고 불이 꺼진 무대에 오도카니 오르는 걸 지켜봤을 때와 엇비슷했다.
왜 자꾸 티내. 왜 자꾸 들켜. 네가 외로운 걸 알아. 알고는 있어. 묵직한 알 수 없는 책임감 같은 게 이성을 툭툭 건드렸다. 한번 알아챈 이상 길거리 가십지 보듯 휙 지나가지 못하지만 끌어안기에는 부담이 됐다. 아마 그는 특별한 곳에서 빠른 지민의 눈치와 다정한 성격을 알고 이용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도대체 이게 무슨 짓인가 싶긴 하지만. 지민은 괜히 윤기와 마주치던 시선을 돌리고 후드를 벗으며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
“…….”
아무래도 자신은 글러먹은 거 같다. 묘를 세우는 것만으로도 모자라 관까지 깨끗하게 닦을 운명이 확실하다. 저렇게 바라보는데.
“…식사 하셨어요?”
거절은 못하겠다.
“아니.”
“저도 밥 못 먹었는데, 드시고 싶은 음식 있으세요?”
결국은 자리를 내주고 만다.
“…없으신가요?”
“레스토랑 예약했어. 거기 가지.”
언제 안쓰러운 눈빛이었냐는 듯 금세 윤기는 평소로 돌아왔다. 좋은 선택이야.
“내가 운전하는 차는 쉽게 탈 수 있는 게 아니니까 마음껏 즐기라고.”
누리고 싶지 않은 행운을 차지하게 된 지민은 조용히 안전벨트를 끌어왔다. 차가 커다란 엔진소리를 으르렁거리며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미슐랭 쓰리스타를 받았다는 레스토랑은 화려한 코스 요리를 자랑했다. 푸아그라를 시작으로 예쁘게 세팅 된 접시들이 줄줄이 등장했다. 다행히도 지난번처럼 체하지는 않을까 걱정은 안 해도 됐다. 로맨틱의 정점을 달리던 라스베가스 레스토랑의 어색함을 겪고 온 장인 지민에게 이 정도쯤은 가벼운 관문이었다. 윤기가 물었다.
“오늘 할 개인적인 일이라는 게 뭐야. 약속?”
“아 그건 아니구요. 그냥 집안일 같은 거예요.”
“정확히 뭔데.”
“뭐…장보기나 옷 찾아오기나 청소나…이런저런 것들이요.”
“나보다 중요하진 않군.”
…중요한데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 어떤 거보다 중요한 일이다, 그런 충고를 아무렇지 않게 날릴 만큼 윤기가 쉬워진 건 아니다. 지민은 후식으로 나온 한 입 크기의 아이스크림을 포크로 푹 찌르며 노동단체의 문구 같은 말을 덧붙였다. 하하…일 보다는 사람이 중요하죠.
“이제 어디로 가는 거예요?”
레스토랑까지 예약되어있다면 다른 장소도 준비되어 있을 터였다. 이미 한번 넘어가준 이상 지민은 적당한 선에서 윤기를 따를 의향이 있었다. 물을 마시며 대답을 기다렸다. 윤기는 고심하듯 나이프를 몇 번 까딱거렸다.
“원래는 어둑한 곳에서 와인이나 마시면서 분위기 좀 잡아보려고 했는데.”
“…켁!”
“영 네가 넘어올 거 같지 않아서 포기하게.”
사레가 들린 지민이 가슴을 팍팍 쳤다. 경고문 따위는 가지고 있지 않은 윤기는 신기하다는 듯 콜록거리는 지민을 구경했다. 아직도 전혀 몰랐던 것처럼 놀라네. 그러더니 결정했다는 듯 나이프를 내려놓고 빙글 웃었다.
“방금 다시 정했어.”
간신히 진정한 지민이 윤기를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잠깐이라도 방심하면 치고 들어왔다. 비상, 비상! 미어캣이 침략자라도 만난 듯 꼿꼿하다. 금방이라도 폭격이 날아오면 튈 자세였다. 윤기는 그런 지민을 보고 매력적으로 미소 지었다. 온실에서만 곱게 자란 화초같이 무해했다.
“마트.”
“…네?”
“장 본다며. 가자고.”
지민은 가짜 표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만큼이나 멍하니 윤기를 쳐다보았다. 대체 뭐하는 사람이지…? 어디로 튈지 모르는 하루였다.
손가락 하나 까딱 안 해도 냉장고에 최고급 재료들이 줄줄이 들어가 있는 집에 사는 남자는 마트라는 곳이 어딘지 모르는 게 확실하다. 지민은 윤기가 핸들을 꺾는 와중에도 안절부절 진심이냐 윤기에게 넌지시 되물었다. 그러다 조마조마하며 혹시 머리가 아프거나 하진 않으세요? 하고 겁 없는 질문까지 던졌다. 안 미쳤으니까 길이나 말해. 지민은 윤기가 혹여 짜증이 나 핸들이라도 과격하게 꺾을까 친절한 네비게이션이 되어 길을 안내했다.
결국 오고야 말았다. 지민은 익숙한 월마트 간판에 운전석에 앉은 사람을 한번 돌아보았다. 사실은 정국이가 운전석에 앉아있는 걸지도 몰라….
“내려.”
“다시 생각해보는 건….”
“그렇게 뜨거운 눈빛이면 핸들을 어디로 다시 돌릴지 나도 모르는데.”
헉, 지민은 냉큼 문을 열고 내렸다. 모든 게 이질적이다. 전혀 다른 복장의 남자 둘이 같이 다니는 것도, 중소형차들 사이 주차된 슈퍼카도, 그리고 그 중에서도 제일 이질적인 건 카트를 끄는 지민 옆에서 나란히 걷는 윤기였다. 무표정한 얼굴로 팔짱을 낀 윤기는 파티를 가려다 길을 잘못 들은 귀족 같았다. 기껏 왔더니 안 사? 지민은 윤기의 재촉에 못 이겨 눈에 보이는 물건 몇 개를 카트에 담았다.
“그래, 많이 먹어. 그래야 크지.”
어이가 없다. 자기도 작으면서. 윤기는 우유 하나를 더 집어 지민의 카트에 집어넣었다. 더 먹어. 지민이 불만어린 시선으로 쏘아보았다.
“뭐가.”
“…아니에요.”
지민은 옆에 윤기를 달고 계속해서 카트를 끌었다. 점점 적응된다. 어, 이거는 세일 안하는 건데 오늘 하네요. 잘 됐다. 커다란 씨리얼을 들고 활짝 웃은 지민이 카트에 세 개를 쓸어 넣었다. 간혹 윤기가 별걸 다 산다며 이해 안 간다는 듯 한 마디씩 던졌지만 능숙하게 넘겼다. 윤기는 어느덧 반절 정도 찬 카트를 보고 물었다.
“이제 끝이야?”
“그렇진 않은데, 당장 올 줄 몰라서 뭘 사려고 했는지 까먹었어요.”
“얼마나 더 사야 되는데.”
“보통은…카트 꽉 채우죠?”
“뭐?”
이걸? 고작 이 정도를 사는 데에도 꽤 시간이 걸렸다. 아마 카트를 다 채우려면 두 배의 시간이 걸릴 거다. 윤기는 제 선택을 후회했다. 점수 좀 따보겠다고 맞추긴 했는데, 사람이 북적거리는 곳에 파고드는 건 윤기의 성향과 맞지 않았다. 게다가 데이트 상대는 윤기를 아예 뒷전으로 미뤘다. 서서히 이 상황이 성에 차지 않기 시작했다.
“그냥 가.”
“네? 왜 일을 왜 하다 말아요.”
“마음에 안 들어. 월마트 통째로 사줄 테니까 가.”
실제로 능력을 가진 사람이 말하니 농담 같지 않았다. 팍팍 찡그려진 미간을 보면 농담이 아니라 진담 같지만. 지민은 조용히 카트를 끌고 과일코너를 살폈다. 딸기도 좀 살까.
“오 이젠 무시?”
“설마 그럴 리가요.”
“뻔뻔해졌군.”
그는 양심이 없다. 가짜 영화표까지 만들어 사기를 쳐놓은 사람이 할 말은 아니었다. 윤기는 날 이렇게 무시해도 살아남는 건 너밖에 없을 거야, 하고 덧붙이기까지 했다. 듣다듣다 지민은 어이가 없어 볼멘 목소리로 대꾸했다.
“미스터 윤도 남의 말 잘 안 들어주시잖아요.”
그동안 씹힌 인사를 세면 계절이 한 바퀴 돌아온다. 단순한 무시도 아니고 첫날부터 휙 지나치고 코트나 머리 위로 던져주던 게 그의 대답이었다. 심지어는 그 흔한 고맙다는 인사 하나를 못 들어봤다. 윤기는 친히 지민의 말을 정정해주었다.
“그건 잘 안 듣는 게 아니라 아예 무시하는 거야.”
그러니까 사람 말을 왜 무시하냐고. 지민은 반발의 소리는 꿀꺽 삼키고 말을 돌렸다.
“이거 맛있어 보이지 않아요?”
딸기 팩을 들고 묻는 지민에 윤기는 하아, 짙은 한숨을 쉬었다. 그러면서도 대답은 했다.
“알아서 사.”
의외다. 지민은 새삼스러운 기분이었다. 신기하네. 버럭 화를 내며 다 때려치고 나갈 거 같은 어거스트의 주인은 의외로 유순하게 카트를 끄는 지민의 곁을 지켰다. 하나같이 쓸모없는 물건들만 사는군, 하고 빈정거리기는 해도.
어느 정도 카트가 찼을 무렵, 마지막으로 간식 코너에 들어선 지민은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젤리와 푸딩을 담았다. 다 샀어요. 활기차게 말하며 윤기를 찾는데, 윤기는 예상 밖에도 빤히 젤리통을 바라보고 있었다. 와인이나 명품 브랜드의 물건이 아닌 어린 아이들이나 먹는 젤리. 뭔 일인가 싶은 지민은 윤기의 곁으로 다가가 슬쩍 말을 걸었다.
“왜요? 드시고 싶으세요?”
“내가 이런 질 떨어지는 고무를 왜 먹어.”
그 질 떨어지는 고무 방금 제가 카트에 담았는데요. 하여간 한번을 좋게 안 말한다. 지민은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럼 이건 왜 보고 계셨어요?”
윤기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네 번째 집에 입양 갔을 때 항상 그 집의 부모는 하나씩만 사놨는데 내가 먹을 때쯤엔 남아 있는 게 없었거든.”
“…….”
“거기 있는 아들이 이 젤리를 통까지 먹어 치우려했지.”
윤기는 감흥 없이 마저 중얼거렸다. 보니까 새삼 기억이 나는군. 지민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정작 당사자는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데 지민의 가슴속이 복잡하게 차고 올라왔다. 이를 테면 오늘 윤기를 따라오게 만든 어떤 것. 윤기는 조용한 지민을 발견하고는 유들유들하게 웃었다. 농담 같은 어조였다.
“니가 내 걱정하는 거 좋으니까 계속해.”
“하하…필요한 거 다 샀는데 갈까요?”
지민은 카트를 끌고 계산대로 갔다. 자연스럽게 윤기가 재킷 안에서 지갑을 꺼내는 걸 식겁하며 말렸다. 아니, 왜 계산을 하시려고 해요? 여기 이걸로 해주세요. 윤기는 재빠르게 제 지갑을 열어 카드를 꺼내는 지민을 보고 인상을 구겼다. 계산을 왜 니가 해. 흡사 제 권리를 뺏겼다는 듯 구는 윤기를 납득시키는 일은 꽤나 어려웠다. 결국 그 카드로 긁으면 매니저들이 달려오니 방지한 거라는 변명을 지민은 마지막까지 만들어 바쳤다.
윤기는 마지막까지 지민을 놀라게 했다. 세탁소는 어디야. 짐까지 친히 뒷좌석에 싣고 마지막 일정까지 챙겼다. 한사코 안 들려도 된다는 지민에게 세탁소의 위치를 캐내 옷까지 찾는 불편한 선행을 베풀었다. 드라이클리닝 맡긴 수트를 품에 끌어안은 지민은 반쯤은 혼이 빠져나간 상태였다. 1년 동안 놀랄 양을 오늘 다 채웠다.
“여기서 세워주시면 돼요.”
퀸스의 좁다란 골목에 세워진 슈퍼카는 한번 볼까 말까한 광경이었다. 어둑어둑해진 밤, 줄지어 늘어선 소형주택 하나를 윤기가 턱짓으로 가리켰다. 저기야? 맞다 대답한 지민은 예의 바르게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인사까지 했다. 지민은 차에서 내려 뒷좌석에 넣어놓은 짐을 챙겼다. 무얼 하는 건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심했다.
“잠시만요, 이게 잘 안 돼서.”
뭐 이렇게 끙끙대. 참을성 있게 기다리던 윤기가 뒤를 돌아보려는 찰나였다. 됐다! 밝게 외친 지민은 뒷좌석의 문을 닫고 창문을 똑똑 두드렸다. 지이잉 열린 창문으로 지민이 허리를 숙여 고개를 내밀었다.
“월요일 날 뵐게요! 오늘 정말 감사해요.”
마무리 인사를 하고 짐이 가득한 손을 흔들었다. 윤기는 빤히 지민을 바라보곤 지민이 원한 긍정의 대답은 다른 곳에 팔아먹고 영 마땅찮다는 듯 말했다.
“이대로 가?”
“네?”
지민은 윤기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했다.
“일꾼으로 써먹었으면 대가를 줘야지. 그냥 가라고?”
나도 그런 양아치짓은 안 하는데 네가 하면 안 되지. 주는 돈보다 두 배정도의 노동을 강요하는 양아치치고 상당히 양심이 없는 발언이었다. 지민은 곰곰이 생각하더니 그나마 가능성 있는 방향을 골랐다.
“어…돈이요?”
“뭐?”
윤기가 허, 기막히다는 듯 웃었다.
“돈으로 사는 관계는 싫다고 하더니. 언제부터 우리 사이가 돈으로 바뀐 거지?”
저는 어거스트에서 월급을 받고 있는데요…. 분명 진실이지만 지민은 쉽사리 답했다 어떤 대답이 떨어질지 몰라 눈만 굴렸다. 불타는 연인 사이도 아니니 작별키스 같은 건 없다. 말이 데이트지 다소 불편한 장보기 시간이었던 지민의 작은 머릿속에선 시간을 더 함께 보낸다는 로맨틱한 선택지가 없었다. 윤기는 혀를 쯧 찼다.
“좋아. 네가 원하는 게 그거라면 돈으로 내. 한 시간에 만 달러야.”
“네에!?”
지민이 집이라도 사기당한 사람처럼 말도 안 돼, 했다. 그러다 하하 억지웃음을 지었다.
“농담이시죠?”
“아니. 예전에 말해줬잖아?”
뭐 이딴 사기꾼이. 지민이 말을 잃고 입술만 뻐끔거렸다. 총 8만 달러. 당당하게 주장하던 윤기는 지민이 짜게 식은 눈으로 변하는 걸 보고서야 아량을 베풀어준다는 식으로 말을 흘렸다.
“아니면 초대해주던가.”
“…집에요?”
“설마 하트여왕 성이겠어?”
지민은 예상 못한 제안에 당황하던 것도 잠시, 고개를 끄덕거렸다. 차 한 잔정도야 못 줄 것도 없었다. 윤기 말마따나 그는 오늘 충실히 지민을 도와주었다. 좋아요, 들어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