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 Smash Mouth - Walkin' On The Sun>
형 살려줘요. 난데없이 전화한 정국은 그 말만 뱉고 끊었다. 정국아? 전정국! 놀란 지민은 주말 감상문을 위해 예매해놓은 표도 놓치고 정국을 구조하러 갔다. 애가 혹시 공부가 너무 힘들었나? 사업을 시작한다는 게 농담은 아닌지 연락만하면 도서관에 처박혀있었다. 예상과 같게도 정국은 검은 후드를 뒤집어쓴 채 도서관 책상에 엎어져있었다. 야, 정국아. 쓰러진 건 아닌지 흔들어 깨우니 정국은 퀭한 눈으로 지민을 올려다보았다. 배고파….
지민은 별 다른 말없이 정국을 데리고 근처 핫도그 가게로 향했다. 사신처럼 허연 안색으로 도착한 정국은 핫도그를 네 개 밀어 넣고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천천히 먹어. 얼마나 굶은 거야?”
“2일요.”
“두 끼만 안 먹어도 눈물 난다는 자식이, 야 몸 좀 챙기면서 해. 정국아 형이 살아보니까 알겠더라. 돈으로는 건강 사고 싶어도 못 사.”
“건강을 팔아야 돈이 벌리죠. 건강 찾으려면 전 진작 옥수수농사 했을 거예요.”
입사초 마찬가지로 건강을 팔아본 지민은 수긍했다. 그렇긴 하지. 어거스트에 취업하시겠습니까? 과거로 돌아가 묻는다면 절박한 백수에게 다른 선택이 없긴 하다. 심지어는 모시는 상사와 애매모호한 관계가 된다는 걸 알아도 했을 거다. 후자일 경우 이직의 생각이 밑바탕으로 깔려있겠지만.
털어놔도 될까. 지민은 고민했다. 정국이라면 최근 시작한 고민을 잘 들어줄 터였다. 늘상 무언가를 하고 있는 바쁜 정국도 사람 사이 미묘한 관계에 박학다식한 건 아니지만, 정국을 제외하면 이런 고민을 털어놓을 창구가 아예 사라졌다.
“정국아.”
정국은 메뉴판에 코를 박고 뒤적거린다. 지민은 쉽게 입을 떼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괜찮을까? 정국이라면 괜찮을 것도 같다. 동성결혼 합법화가 화두로 세워졌을 때 어떤 반응도 나타내지 않았긴 했다. 같이 밤을 새워가며 코딩을 하고 있는 터라 신경 쓸 여력이 부족했다는 게 맞지만.
“왜요, 말해요.”
정국은 가만있으면 들려올 거라 예상한 목소리와 달리 한참이나 뒷말이 없자 고개를 들었다. 휴지를 꼼지락거리는 게 척 보기에도 나 지금 어려운 말 할 거예요, 티가 난다. 그게 있잖아. 지민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남자끼리 사랑하는 거 어떻게 생각해…?”
“난 또 뭐라고. 나 이거 시켜도 돼요? 이건 좀 비싼데. 다음에 갚을게.”
“아니 내 말 들었어?”
“남자끼리 사랑하는 거 어떻게 생각하냐면서요. 뭘 말할 게 있어요? 사귀면 사귀는 거지. 나 이거 시키고 올게요.”
긴장한 지민이 무색하게 정국은 냉큼 핫도그를 주문해 받아왔다. 그리고는 행복하게 웃으며 입에 밀어 넣었다. 너무나도 아무렇지 않은 반응이라 차라리 오늘 입은 속옷색이 하늘색이다, 했으면 더 놀랐을 거 같다. 빵빵하게 부푼 볼이 우물거린다.
“맛있다, 이거.”
“긴장한 내 심장이 아깝다.”
“형 좋아하는 사람 생겼어요?”
“뭐….”
지민은 긍정도 부정도 안 했다. 확신은 없는데 그런 기미가 있는 거 같기도 하고 아닌 거 같기도 하고. 한차례 언덕을 넘으니 이 상황 자체가 민망했다. 샤프심을 빌려줬다며 수줍게 고백하던 막내가 떠오른다. 지민은 하이스쿨 파티에서 킹으로 뽑힌 운동부 주장을 몰래 좋아하는 일개 학생이 되어 끙끙거렸다. 좀, 좀 그런데, 그게 있지. 보다 못한 정국이 질문을 틀었다.
“어떤 사람이 형 좋대요?”
“…그 사람도 모른대.”
“그럼 대체 왜 물어본 거예요?”
정국이 황당하다는 듯 말했다.
“서로 모르면서 뭘 한다고. 그냥 가서 슈퍼맨 놀이나 같이 하자고 해요. 보이스카우트나 같이 하자고 하던가.”
지민은 대놓고 비웃는 정국의 어깨를 퍽 때렸다. 웃지 말고 더 들어봐.
“그럼 만약에….”
“아 뭐 이렇게 질질 끌어요. 그냥 말해요. 어떤 거도 안 놀라니까.”
“진짜지? 너 약속했다.”
“네.”
“뭐 걸래.”
“유치하게…걸긴 또 뭘 걸어요.”
“아 빨리.”
“이거 걸게요.”
정국이 반절 남은 핫도그를 흔들었다. 놀라면 안 먹을게. 지민은 그럼에도 고민의 고민을 거듭하며 어렵게, 아주 어렵고도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흡사 1분 뒤 운석이 떨어지니 대피하라는 비상벨을 울리는 것처럼.
“상대가 민윤기면 어떨 거…같아?”
툭 정국의 손에서 핫도그가 떨어진다. 커밍아웃 선언에도 눈 하나 깜빡 안하던 정국이 쩡 굳어버렸다. 떨어지는 운석을 머리로 받아낸 표정이었다. 사람은 너무 놀라면 적절한 반응도 잊기 마련이다. 정국은 콜라와 쿠키가 담긴 판을 엎는 대신 주섬주섬 휴지로 입가를 닦았다. 떨어진 핫도그를 수습하며 다시 한 번 더 확인했다.
“세상에는 많은 민윤기가 있죠.”
“너랑 내가 아는 민윤기가 둘이겠니.”
나도 아직까지 안 믿기긴 해. 지민은 민망하다는 듯 볼을 매만졌다. 진짜 그럴 생각은 없었는데 어쩌다보니까 여기까지 흘러왔다. 그딴 싸이코와 왜 만나냐며 미쳤냐 당장 날뛸 것 같던 정국은 예상 외로 조용했다. 얘도 알고 있었나. 정국아? 지민이 부르자 정국은 고심스러운 눈길로 지민을 바라보았다. 꼭 오류가 잔뜩 나 붉은 줄 천지인 코딩화면을 바라보듯.
“형.”
“응?”
“퇴마 한번 받아볼래요?”
“…나 이대로 지갑 들고 나간다?”
너까지 그러지마. 나 진지하다니까. 지민이 후드를 잡아당겨 눌러쓰며 정국이 마시던 콜라를 쪽 빨았다. 심각하거든. 내 인생이 걸린 문제라고. 정국은 볼을 긁적거리며 다른 제안도 해왔다.
“스톡홀름 증후군 그런 테스트 한번 하러 가는 건 어때요? 같이 가줄게.”
“형 나간다. 잘 있어라 전정국.”
“아 잠깐, 잠깐요. 진짜 진심으로 하는 말이에요? 그 민트색 싸이코랑?”
“염색했어. 검은색이야.”
지민은 싸이코라는 말을 부정하는 대신 색만 부정했다. 정국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어디서 사랑을 느낄 수 있는 거지? 허구한 날 부려먹기만 하는 사람한테? 속이 탄다. 정국이 지민의 손에서 콜라를 받아 벌컥벌컥 들이켰다. 아까 도서관에서 아사할 걸 그랬다.
“그럼 그 기사도 진짜였어요? 라스베가스?”
“아냐! 그땐 아무것도 없었어.”
“지금은 많고?”
“…….”
“환장하겠네. 대체 언제부터예요?”
정국이 헛웃음을 흘렸다. 글쎄, 잘 몰라…. 지민은 테이블 위를 손으로 끄적끄적거렸다. 사랑인지 연민인지 하루에도 수백 번씩 머릿속이 복잡해서 터질 거 같다, 이미 두 번이나 키스했다, 그런 말을 했다간 정국이 진지하게 퇴마 예약이라도 잡아놓고 통보할 것만 같았다.
“아니 뭐 그래요 형 취향이 그런 거라면 존중하긴 하는데.”
“고맙다.”
“근데 차라리 핫도그랑 사귄다고 하면 이해하기 편했을 텐데.”
“네가 사귀고 싶은 거 아냐, 그건.”
지민은 가볍게 분위기를 전환하듯 웃었다. 그러나 정국은 미간을 모았다. 대체 뭐가 좋다고 그딴 싸이코와 연애감정을 논하는지 백번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도 어쩌나. 소심한 지민이 충동적으로 결정할 리는 없을 테고, 애초 정국에게 참견할 권리도 없긴 했다. 게다가 있더라도 아무리 옆에서 뭐라 해도 들리지 않을 거다.
금세 다시 콜라 빨대를 잘근잘근 씹는 지민은 척 보기에도 길 잃은 도심 사거리 한복판이었다. 정국은 이내 한숨을 푹 쉬었다. 앞으로 그런 기사 수백 개씩 나면 어떡하려고요, 우리랑은 다른 삶을 사는 사람이란 거 알죠, 나는 반대예요. 지민도 이미 알고 있을, 쌓이는 부정적인 말들 대신 다른 소리를 보탰다.
“영화 같이 보자면서요. 난 액션.”
“안 돼, 저번 주에 봐서 냈어. 남은 거 로맨스 영화야.”
“자기 연애 한다고 골랐네.”
“…그런 거 아니거든!? 그리고 아직 아무 사이도 아니야!”
정국은 귀를 후비적거리며 흘려들었다. 아 네, 곧 되실 거라구요. 예, 예.
***
어거스트 최상층의 사무실이 늘 전쟁터는 아니다. 한가로운 날도 있긴 하다. 이를테면 윤기가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사무실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사실상 그도 정확히 맞는 말은 아니다. 어거스트의 주인 한 사람만 평온했고, 상사를 모시는 셋은 여전히 산처럼 쌓인 일거리에 치이는 중이었다. 오후의 회의 안건을 검토 완료한 진이 말했다.
“지민, 투자논문 검수 다 했어요?”
“네, 복사해서 새로 드릴게요. 잠시만요.”
지민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그러다 어라, 싶었다. 이미 숫자판이 움직이고 있다. 어떤 미친 일개 평사원이 제 발로 민윤기 사무실에 처들어올리는 없고. 사무실에 발을 들일 수 있는 인물은 이미 다 사무실에 있었다. 오늘 아침엔 윤기가 일 못하는 애벌레들이라 비꼬긴 했어도 부르진 않았다. 누구지? 엘리베이터는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띵 열린 순간 그 안에는.
“안녕.”
선글라스와 마스크, 그리고 모자를 푹 눌러쓴 남자가 있었다. 남자가 귀에 걸린 마스크 한쪽을 푼다. 시원시원한 이목구비로 남자는 반갑다며 웃었다. 나 왔어.
“뷔!?”
응, 나야. 뷔는 보자마자 눈을 둥그렇게 뜬 지민의 머리를 훅 쓰다듬고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사무실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레이첼 안녕, 진 안녕. 진과 레이첼은 골든 글로브를 휩쓴 배우가 찾아와도 태평했다. 옆집 사는 친근한 이웃이 왔나 보다, 하는 식이었다. 레이첼은 짧게 윤기가 안에 있다 설명했고, 진은 지민을 찾았다. 지민 작업하러 가는 김에 이거도 같이 부탁할게요. 지민이 진을 붙잡았다.
“미스터 윤 오늘 뷔랑 약속 있었어요?”
“아니요. 그건 아닌데 원래 뷔는 몇 번 찾아왔어요. 한 3개월 됐나. 그러고 보니 지민은 본 적이 없겠네요. 심부름 때문에 밖에 있던 적이 많아서.”
내가 샤넬 쇼핑백 찾고 식물 영양제 같은 걸 사왔을 때 뷔가 왔구나…. 묘한 아쉬움에 입맛을 쩝 다시고 있는데, 뒤에서 활기찬 목소리가 났다. 안녕, 윤기. 윤기의 집무실로 향하는 유리문을 통과하고 있는 뷔였다. 다소 귀찮음이 뚝뚝 떨어지는 윤기의 목소리도 이어 들려왔다. 비서실로 전달되는 스피커가 웅웅거렸다.
“누가 아무나 막 들이라고 했지? 넌 약속을 잡는 매너라고는 모르나?”
“에이, 피차없는 매너 논하기 있기, 없기?”
딱딱하게 무슨 전화를 해. 우리가 그렇게 딱딱해? 뷔가 어린아이처럼 순수하게 웃었다. 윤기는 매몰찼다. 언젠간 널 꼭 고소할 거다. 예민하게 구겨진 미간을 끝으로 유리문이 닫힌다. 지민은 입을 떡 벌렸다. 민윤기한테 저러고 살아있는 사람이 있다니. 진은 지나가는 택시 보듯 평범한 목소리로 웃으며 지민을 달랬다.
“걱정마요. 저래보여도 한 번도 미스터 윤이 유리문에 의자를 던진 적은 없어요.”
진, 그건 딱히 안심되는 말이 아닌데요. 지민은 사무실의 안위는 자신이 지키겠다며 등을 미는 진에 엘리베이터로 올라탔다.
그렇게 친했나? 지민은 한 번도 윤기가 뷔에게 연락을 취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아스팔트 정글을 촬영하기도 바쁜 뷔가 매니저도 없이 올 이유가 뭐가 있지? 뷔는 헝헝거리며 몸이 세 개도 모자라다고 우는 시늉을 하곤 했다. 고민하던 지민은 이내 개런티를 더 올려 받았어야 했다며 탄식같이 내뱉던 뷔의 말을 기억해냈다. 음, 그래도 그렇게 단순한 이유는 아닌 거 같은데. 무언가 의아하다 생각할 무렵, 띵 울리는 안내음에 생각을 지웠다. 지민의 손길을 기다리는 경제투자논문은 아직도 산처럼 쌓여있었다.
아무도 쉽게 출입하지 못하는 어거스트 최상층의 개인 집무실.
“알았어, 그렇게 할게.”
“그럼 이제 나가.”
윤기가 볼 일 끝났다는 듯 뷔를 내몬다. 순한 양처럼 고개를 끄덕이던 뷔가 황당하다는 듯 혀로 입술을 훑었다.
“너무 한 거 아니야? 내가 오늘 오려고 촬영 어제 얼마나 열심히 했는데.”
뷔는 억울했다. 그는 오늘 이 시간을 갖기 위해 갖은 노력을 했다. 워싱턴 값비싼 저택에 사는 멀쩡한 부모님이 북극으로 장기여행을 다녀온다는 거짓말까지 만들어 왔다. 곤란하다는 듯 그건 좀 그렇다는 감독을 붙잡고 하소연을 얼마나 했는지, 아스팔트 정글 대본보다 열심히 외웠다. 옆에서 지켜보던 올리비아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은 건 물론이다. 윤기는 성가시다는 듯 뷔를 무시하고 다시금 서류를 집었다. 시선도 주지 않고 말을 툭툭 뱉는 행동에서 귀찮다는 티가 팍팍 났다.
“됐으니까 나가. 시끄러워.”
“맨날 툭하면 무시야.”
“친한 척 굴지 마.”
뷔는 불만족스럽게 입술을 삐죽거렸다. 뭐, 그렇긴 한데. 고작 10분 쓰겠다고 어제 그렇게 개고생한 거 아깝다고. 아무리 친해지는 과정은 5분이면 충분하다 외치고 다니는 뷔도 까탈스럽게 구는 윤기를 상대로는 여기까지가 한계였다. 아예 들쳐 업고 친해지자 조를 수도 없고. 매니저 몰래 탈출해서 놀까, 생각하며 나가려는 순간 윤기의 책상에서 익숙한 단어를 발견했다. 지민의 감상문이었다.
“이거 내꺼잖아?”
퍼펙트 플라이. 커다랗게 박힌 타이틀은 뷔의 히트작 중 하나였다. 뷔가 반갑다는 듯 종이를 휙 채간다.
“누구야, 지민이 쓴 거야? 감상문이네. 쓴다는 게 이런 거였구나.”
무슨 일을 주로 하냐 물으니 지민은 민망하다는 듯 웃으며 감상문 같은 걸 쓴다 했다. 어렵진 않은, 아니 쪼금 시간 많이 걸리긴 하는데 매일매일 쓰고 있어요. 떠올리면 욕밖에 안 나오지만 선량하게 하하 웃는 모습은 꽤나 불쌍한 기억으로 남아있었다. 뭐야, 어렵다고 했는데 생각보다 잘썼잖아. 뷔가 실실 웃으며 읽고 있을 무렵이었다. 뷔가 있건 말건 서류를 넘기던 윤기가 어느새 뷔에게 시선을 빤히 박고 있었다. 순수하게 감상문을 뒤적거리는 뷔를 바라보는 눈빛에 거슬린다는 기운이 조금씩 깃들기 시작하더니, 기어코 그의 입에서 한 마디가 튀어나왔다.
“내꺼야.”
단조로운 어조와는 달리 너무나도 유치한 단어라 뷔는 고민했다. 저게 나한테 하는 말인가. 멀뚱멀뚱 보고만 있으니 윤기는 불편한 기운을 풍겼다. 못 들었어? 뷔는 진지한 얼굴로 유치원생 같은 소리를 지껄인 윤기가 믿기가 어려워 들고 있는 감상문을 팔락팔락 흔들었다.
“…이거?”
“내놔.”
한술 더 떠 손까지 내민다. 소유권은 나한테 있으니 내놓으라는 듯. 뷔는 재미난 장난감이라도 발견한 듯 눈을 빛냈다. 오호라, 그런 거였어? 빙글빙글 웃으며 종이를 책상 위에 내려놓고 나가려는 계획을 변경했다. 완벽한 일처리를 추구하는 어거스트 회장님을 놀릴 기회는 쉽게 주어지는 게 아니다.
“사심 채워가면서 일해도 되는 거야?”
내가 알았으면 당장 도망간다. 음흉하다며 뷔는 은근히 날카로운 눈매로 파고 들었다. 그동안 시킨 거 그냥 재미있으니까 한 거지? 현장보고도 같은 원리지? 하나같이 사실이라 움찔할 법도 하건만 윤기는 심드렁하게 되받아쳤다. 그게 뭐 어쨌냐는 듯.
“어차피 걔도 내꺼야.”
“안 믿어. 지민은 안 그렇다고 했다고.”
윤기 이야기만 나오면 허우적거리는 게 영 마음이 없는 건 아닌 거 같지만. 뷔는 친절하게 뒷말을 더하는 아량을 베풀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윤기는 만만치 않게 손까지 까딱거리며 비아냥거렸다. 오, 촬영이 아주 만만한가보군. 그렇게 떠들 시간 넘치는 거 보면. 더불어 그는 뻔뻔하게 말을 바꿨다.
“곧 내꺼야.”
졌다. 뷔는 우웩 속을 올리는 시늉을 했다. 버터 되는 거 같아. 혹시 몇 살이세요? 그런 말을 꾹꾹 삼키며 몸을 부르르 떨고 도망가듯 집무실을 튀어나갔다. 평생 변하지 않는 사람은 없나 보다. 그는 소름 돋는 팔을 꾹꾹 누르며 생각했다. 저런 거 모르는 거겠지? 모르니까 반할 수 있는 거겠지? 이 일은 비밀로 묻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