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 Ed Sheeran - Supermarket Flowers>
올 겨울 뜨문뜨문 내리던 눈이 겨울 끝자락에 펑펑 쏟아졌다. 하룻밤 사이 하얀 색으로 뒤덮인 뉴욕거리는 걷는 곳마다 발이 푹푹 빠졌다. 유난히 따스한 겨울이라며 한풀 꺾였던 추위도 다시금 추운 입김을 뿜어냈다. 변덕스러운 게 누구누구 닮았네. 더는 겨울의 요정이라 부르기 힘든 어떤 남자를 떠올린 지민은 털모자와 목도리를 칭칭 둘러맸다. 춥다, 춥다 중얼거리면서도 꿋꿋이 아침 심부름을 시작했다.
“좋은 아침이에요, 오늘은 어떤 커피로 드릴까요?”
커피머신 노릇을 꽤 하다 보니 스타벅스의 직원은 지민의 얼굴을 외우고 먼저 말을 걸어오기도 했다. 커피 정말 좋아하시네요. 카페인중독 수준으로 매일 몇 잔씩 사가니 그런 오해를 한 거 같지만, 지민은 굳이 그의 상사가 찾기 때문이라는 말을 하진 않았다. 뜨거운 커피를 들고 나온 맨해튼의 길거리. 신호등을 가로질러 빠른 걸음으로 사라지려했다. 불현 듯 찌릿거리는 등줄기만 아니면.
정국이가 퇴마하러 가자고 꼬셔서 그런가. 이건 그런 느낌이었다. 집요하고, 불안하고, 등골이 쎄하고. 어거스트에 입사한 뒤 머릿속 비상벨이 놀랍도록 발달한 지민은 예민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순간 눈에 박히는 유독 커다란 덩치 한 명. 흰 이를 드러내고 웃는 그가 지민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하하, 반갑습니다. 또 만났네요.”
정말 우연이죠? 시몬 윌리엄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던 남자였다. 지민은 시몬을 마주보았다. 서부 총잡이 영화처럼 묘한 긴장감이 맨해튼 거리에 감돌았다. 러시아워로 머릿수 꽉꽉 찬 길이 황야로 변했다. 띠리링 어디선가 휘파람 배경음악이 들려야 할 것만 같은 무대, 시몬이 한 발자국 다가왔다.
“우연의 우연으로 정말 우연처럼 만났는데 인터뷰 다시 해보실 생각…이봐요!”
팅, 둘 사이의 긴장감이 끊어지는 순간 놀란 미어캣처럼 멀뚱히 서있던 지민은 총알처럼 튀어나갔다. 젠장, 어거스트는 비서를 달리기 빠른 순으로 뽑나. 시몬은 그 언젠가 지민보다 덩치가 큰 동양인 비서를 상기시켰다. 그도 놀란 수사슴처럼 껑충 달려 나가더니, 도토리만한 앞의 남자는 도도도 빠르게 굴러갔다. 시몬이 놓칠세라 뒤쫓았다.
“잠시만 서보세요! 장담하는데 수상한 거 아닙니다!”
“싫어요!”
“지민!”
그때 바로 신고했어야 했는데! 지민은 전속력을 다해 뛰었다. 이 기세로 뛰면 센트럴파크에서 홀리보다 더 빨랐을 터였다. 잠깐이면 됩니다! 지민은 진저리를 쳤다. 싫다니까요! 아무 사이 아니에요! 아무 사이 아니라구요! 아무도 묻지 않은 질문에 열심히 대답하며 도망가길 한참, 29번가 신호등 앞. 파란 불이 켜지고 파도같이 수많은 사람들 속으로 지민이 쏙 사라진다. 빠앙, 클락션이 크게 울린다. 빨간불이 시몬의 앞길을 차단했다.
“이봐요! 절대 수상한 거 아니니까 잠시만…! 어후, 뭐 저렇게 빨라!”
놓쳤다. 흘끔 뒤를 돌아본 지민이 건너지 못한 시몬을 확인하고 쪼르르 도망간다. 시몬은 허리에 팔을 올리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다른 작전이 필요할 듯하다.
지민은 언젠가는 꼭 한 번 어거스트 법무팀을 방문하기로 마음먹었다. 시몬인지 뭔지 기자라 주장하는 파파라치 덕분에 무려 15분이나 늦게 사무실에 입장했다. 미스터 윤, 도착했어요? 도착한 지민은 뛰는 와중에도 지킨 커피를 들고 헥헥거리며 사무실을 관찰했다. 세상에, 진이 마라톤 대회라도 출전하고 온 몰골에 탄식을 쏟으며 커피를 받아주었다.
“아침부터 무슨 일 있었어요?”
“별 거, 헉, 별 거 아니에요. 미스터, 헉, 윤은요?”
숨 돌아가겠다. 지민이 초조하게 집무실 쪽부터 확인했다. 진은 대답 대신 녹여주듯 스타벅스 컵을 꽝꽝 얼은 볼에 가져가댔다. 지민 그 걱정을 할 게 아니에요. 지민이 눈사람 되기 직전이에요. 아끼는 막내비서 이러다 죽겠지 싶었다. 지민이 식겁하며 볼을 뗐다.
“안돼요! 이러면 커피 다시 사와야 하잖아요.”
“오늘은 괜찮아요. 안 계시거든요.”
“네? 정말요? 안 계신다구요?”
“이리와 봐요, 이거 계속 대고 있어요. 지금 루돌프보다 코가 더 빨개요.”
커피를 볼에 댄 채 지민이 사무실을 둘러보았다. 레이첼도 안 보인다. 최근 윤기는 대주주며, 시의원과 장관급의 인사와 잦은 만남을 가졌다. 요즘 복잡하긴 한 거 같던데. 편지대필을 어느 정도 하다 보니 정확한 사항은 몰라도 얼추 심각한 내용들이 오간다는 건 추론할 수 있었다. 약속이라도 갔나 보다, 생각하며 지민이 물었다.
“언제쯤 돌아오신다 하셨어요?”
“아 오늘 아예 출근 안 했어요.”
“네?”
목도리에 파묻힌 지민이 눈만 땡그랗게 열었다. 아예요? 진은 별 일 아니라는 듯 끄덕거렸다.
“피곤하다고 일정 다 취소하셨어요. 차 바로 다시 돌렸다 했어요. 집에서 쉬신다고.”
“무슨 일 있으신 거예요?”
“음, 그건 아닐걸요. 운전기사가 사표 써도 되냐고 물어본 거보면.”
진은 염려 말라는 듯 어깨를 두들기며 하루 일과를 안내했다. 오늘은 무리하지 말고 전화만 잘 받으면 될 거예요. 좀 쉬고 일해요. 아직도 볼이 차가워요. 흔치 않은 기회를 즐기라 덕담까지 붙인 진이 자리로 돌아갔다. 지민은 천천히 둘둘 말고 있던 목도리를 끌러 내렸다. 태엽을 감은 인형처럼 의자에 앉아 마침 시끄럽게 벨이 울리는 수화기를 들었다. 네, 어거스트입니다.
윤기의 부재시 대처방법을 이력서를 내민 순간부터 교육받은 지민은 이제야말로 비서답다는 수식어가 어울렸다. 네, 미스터 윤 잠시 자리를 비우셨거든요. 메시지 남겨주시면 전해드리겠습니다. 땡땡이를 업무 중 외출로 곱게 포장하는 방법도 능숙해졌다. 오늘 하루 일과는 빠짐없이 평소와 같았다. 오히려 핀잔과 잔소리들이 없으니 진과 여유로운 점심식사도 즐길 수 있었다.
그럼에도 문득문득 가만히 있는 순간이면 그런 생각도 스쳤다. 설마 아픈가. 지민은 계속해서 떠오르는 생각을 멈추지 못했다. 정말 그냥 피곤해서 안 온 건가? 뭐하고 있지? 혼자 있나? 복잡해진 감상은 다른 의문도 데려왔다. 나 왜 이러고 있지…?
그는 가만히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다른 때처럼 니가 한 말이 신경 쓰인다, 니가 내 걱정을 하는 게 좋다, 그런 엄청난 말을 들은 것도 아니다. 사람 마음 간지럽게 하는 미소를 입가에 걸고 있는 것도 아니고, 뜬금없는 데이트 신청을 하는 것도 아니다. 하물며 아예 눈앞에서 사라져있기까지 했다.
전화라도 해볼까…. 윤기의 직통 전화번호를 떠올린 지민은 일순 퍼뜩 놀라 고개를 흔들었다. 미쳤어. 추워서 뇌세포가 얼은 게 확실하다. 오늘 얼굴을 못 봐서 당신이 아주 궁금한데 어떻게 지내고 계십니까, 이딴 소리라도 하려고? 정신 차려.
여기서 가장 합리적인 판단은 그리 걱정된다면 차라리 윤기의 개인 주치의에게 연락을 취해보는 것이었다. 주치의 처방전에 따라 약국을 들락날락한 지민은 그 사실을 누구보다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지민 일 다 끝냈어요?”
어느새 진이 코트를 입고 지민에게 다가왔다. 몇 번 지켜져 본 적 없는 계약서상의 퇴근시간이었다.
“퇴근하세요?”
“하 그 단어를 지금 시간에 꺼내보기도 하네요.”
진이 감격하며 박수를 짝짝 쳤다.
“오늘 저녁이라도 같이 먹을까요? 최근에 베트남 요리 잘하는 집을 알아놨어요. 날씨도 추우니까 쌀국수 괜찮지 않아요? 잘 먹어요?”
“그럼요! 저 쌀국수 좋아해요!”
“역시 지민만큼 통하는 사람을 못 봤어요. 빨리 퇴근 준비해요.”
점심을 먹는 둥 마는 둥 했던 터라 배가 고프긴 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외친 지민은 붕대 싸매듯 목도리를 둘렀다. 털모자까지 야무지게 푹 눌러쓴 순간, 폰으로 음식점 위치를 검색하고 있는 진의 뒤로 펼쳐진 배경이 그의 발을 붙잡았다. 오늘 하루 종일 불이 꺼져있는 집무실. 그 언젠가 저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그런 적도 있었다. 아스피린, 살이 에이는 추위, 그리고 웅크려 누워있던 민윤기.
“한 30분 정도면 도착할 거 같네요. 눈 때문에 길이 좀 막히겠지만요.”
“…….”
“괜찮죠, 지민?”
“어…그, 진.”
지민이 곤란하다는 눈웃음을 띄웠다.
“선배님, 진짜 죄송한데 생각해보니 일이 좀 남아있어요.”
“집에 가져가서 해도 되지 않아요? 감시자도 없는데.”
진이 빈 집무실을 눈짓한다. 지민이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하고 가야 할 거 같아요.”
그래요? 어쩔 수 없죠, 그럼. 아쉬워요. 진은 다음을 기약하자는 소리와 함께 사무실을 나섰다. 고요해진 공간. 지민은 끄응, 이마를 짚었다. 그래, 아무래도 해야겠다. 시간을 확인했다. 레이첼에게 문자를 보냈다. 레이첼, 언제쯤 도착해요?
레이첼이 피곤한 손길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녀는 오늘 하루 종일 윤기가 취소한 일정의 뒷감당을 해야만 했다. 언짢아하는 시의원의 심기를 달래기 위해 온 뉴욕을 쥐 잡듯 뒤져 희귀식물을 선물로 내놨으며, 갖은 모욕을 들었다. 그러나 아직도 할 일이 남아있었다. 잘나신 사랑 덕분에 옷 배달까지 그녀의 몫으로 떠내려 왔다. 하다하다 멈췄던 눈까지 내리기 시작했다. 이 쓰레기들. 지친 심신을 끌고 사무실에 도착했다. 기다리고 있겠다는 문자를 남긴 이가 레이첼을 반겼다. 꾸벅꾸벅 조는 뒤통수로.
“지민.”
“으음…레이첼?”
지민이 비몽사몽 눈을 뜨더니 금세 정신을 차렸다. 오셨어요? 레이첼은 의아하다는 듯 코트부터 목도리까지 장착한 지민을 위아래로 훑었다. 어디로 봐도 잔업을 위해 남은 복장은 아니다.
“진은요?”
“네 시간 전쯤? 먼저 퇴근하셨어요.”
“오늘 최고의 승자군요.”
다음 외근은 진에게 부탁해야겠다. 레이첼이 필요한 서류를 챙기고 책상을 정리하는 동안, 지민은 쭈뼛거리며 레이첼의 곁을 서성거렸다. 오늘 많이 힘드셨죠, 차라도 한 잔 타드릴까요? 괜찮다해도 계속에서 얼쩡거린다. 우산 가져다드릴까요? 레이첼이 한숨을 밑바탕으로 깔며 물었다.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어요?”
“레이첼 많이 피곤하실 텐데 그….”
그러니까 많이 피곤하시니까. 어, 제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냐면요. 그렇게 대단한 말은 아니거든요, 그래서. 횡설수설하던 지민이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옷 제가 가져다 놓을게요.”
레이첼은 물끄러미 지민을 바라보았다. 해도 될까요, 허락을 구하는 게 아니라 가져다 놓겠단다. 밍숭맹숭한 지민 답지 않은 화법이었다. 어떤 커다란 심경변화가 있는 모습이지만, 그녀는 결론적으로 하우스저택의 열쇠를 내밀었다.
“그렇다면 나야 고맙죠. 부탁해요, 지민.”
레이첼은 운 좋게 얻은 휴식을 즐기기로 했다. 일을 얻은 사람치고는 과하게 활짝 웃는 얼굴로 지민이 인사했다. 푹 쉬어요, 레이첼!
***
신경증이 도졌다. 수천 개의 바늘에 찔려 머리가 두 개로 쪼개지는 듯했다. 윤기는 침대시트를 구기며 잇새로 새는 신음을 삼켰다. 정신없이 들이닥친 헐리우드의 배우처럼 급작스럽게 입 밖으로 꺼낸 과거의 조각은 그를 괴롭혔다. 뷔와 대화하며 겪은 일의 아주 작은 부분을 꺼내놓은 것뿐인데도, 여파는 나비효과처럼 윤기를 집어삼키고 흔들었다.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기도 힘들어 집에 처박혀 꽁꽁 숨을 만큼.
이걸 뭐라 정의하면 좋을까. 왜 내가 이런 고통을 겪어야만 하냐는 분노? 나는 잘못이 없다 증명하고 싶은 마음? 복잡하고 정의할 수 없는 태풍 같은 감정 속에서 한 때는 그런 걸 느끼기도 한 거 같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무뎌지면 다른 게 찾아온다. 그건 다름 아닌 공포다. 이걸 언제까지 견뎌야 하는 거지? 여기서 나가지 못하는 건가? 내가 어디까지 버틸 수 있을까? 윤기는 누구도 답해줄 수 없는 질문들을 오도카니 끌어안았다. 자칫 입 밖으로 내뱉었다간 그 질문들이 실체화 될 것 같았다.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 가정이라, 침대 밑 괴물을 무서워하는 어린 아이들처럼 이불을 뒤집어쓰고 싶어졌다.
이렇게 정신이 쇠약해지는 때만 되면 그는 타임머신을 탔다. 스트레스로 머리가 반 이상이나 빠져버린, 세상에서는 아내를 잃은 둘도 없는 사랑꾼이라 정의한 로빈츠 하트만이 누워있는 침실이 도착장소였다. 복잡한 병원 기계들에 엮여 삶을 부지하는 노쇠한 남성은 더 이상 세계적인 대기업을 이끈 수장으로 볼 수 없을 만큼 허약했다. 그는 쉬어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슈가, 널 데려온 걸 후회한단다. 너만 오지 않았다면 우리는 행복했을 텐데.
그는 눈을 감는 순간까지 저주를 퍼부었다. 너한테 이 자리를 주지. 여기 앉아 아래를 내려다보렴. 다들 널 원한다고 외치겠지. 그러나 그들이 너를 좋아하는 걸까? 돈일까, 너일까. 너는 누구도 믿지 못하게 될 거다. 피라도 토할 듯 거친 기침소리를 제외하고 정리하면 그런 내용이었다. 평생 불신의 늪에 갇혀 혼자 외롭고 고독하게 썩으라는 저주.
간병인 좌석에 앉은 윤기는 듣고만 있었다. 씁쓸했나. 조금 가슴이 저렸던 거 같다. 하트만 성을 달고 있는 인물들은 얼굴도 기억 안 나는 친부모를 제외하고 그나마 정을 준 상대였다. 가족이라 묶여보고 싶었던. 그는 그래서 마지막으로 불러보았다. 그의 인생에서 이제 더는 그 단어는 등장하지 않을 테니까. 네, 아버지.
“…….”
세상에 돌로 만들어진 사람은 없다. 지쳤다. 로빈츠 하트만의 저주는 너무나도 잘 먹혀서 윤기는 외로움의 공포에 질려버렸다. 얼마나 무서운지 SOS 팻말이라도 들고 광고를 뿌려야 할 판이었다. 펜트하우스에서 내려다보는 맨해튼의 불빛조차 부러워 하우스저택으로 옮겨버릴 만큼 그는 지쳐버렸다. 고립될 만큼 쏟아진 눈 때문인지, 주체할 수 없도록 커다란 공간 탓인지 갑갑증이 인다.
그때 머릿속을 스치는 작고 하얀 얼굴 하나. 제가 지켜드릴게요, 더 좋은 사이가 되고 싶어요. 몇 번이고 치료제로 쓴 말들이다. 지금 순간 윤기는 그의 다정다감한 온도가 그리웠다. 이 밤에 얼토당토 않는 심부름을 시켜 앞에 끌고 오고 싶을 정도다. 당장이라도 전화를 걸어 자신을 좋아한다 말해 달라 조르는 유치하고 끔찍한 만행을 저지를 것도 같았다. 윤기는 곧장 생각을 고쳐먹었다. 질려하겠지. 싫어할 거야. 가시밭을 헤치고 성에 도착해준 유일한 사람이 질려 떠나가도록 만들 수는 없었다. 그를 귀찮게 굴 수는 없으니 약이라도 먹고 잠에 빠져야겠다. 익숙하게 하얀 약통을 꺼낸 그 순간이었다.
지이잉, 초인종이 울린다. 보안이 철저한 부르주아 저택거리에선 아무나 초인종을 누르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경호원이 누르지 못하도록 막았다. 돈을 받아도 일을 못하는 얼간이들은 도대체 세상에 몇이나 되는 걸까. 경호업체를 바꿔야겠군. 생각하며 윤기는 가뿐하게 무시했다. 그러나 대체 무슨 패기인지 초인종은 끊임없이 징징 울렸다. 나오지 않으면 문을 부수고 들어오기라도 할 것처럼.
어떤 미친 자식이지? 윤기는 샤워가운을 꽉 묶고 슬리퍼를 끌었다. 짜증 가득한 미간으로 문을 연 순간.
“미스터 윤, 벨 눌러서 죄송해요. 근데 옷이 너무 많아서, 쏟아질 거 같아서 자, 잠시만 잡아주시면…헉!”
박지민이 서있었다. 가시밭에 더해 설산까지 헤치고 온 듯 하얀 눈을 송글송글 머리 위에 뒤집어 쓴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