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 Deela El Mechánico>
레이첼은 재빨랐다. 당황스러운 윤기의 명령쯤은 눈감고도 예측했다는 듯 착착 일을 진행했다. 라스베가스의 호텔과 레스토랑을 예약하고, 영혼이 빠져있는 지민에게 짧은 작별인사를 건넨 다음 순식간에 캐리어를 빼 사라졌다. 잠깐 짠한 눈초리를 지민에게 보내긴 했으나 고장 난 지민이 알아채는 기적은 없었다. 윤기는 굳이 지민을 옆자리에 앉히지 않았고, 지민은 윤기의 뒷자리에 경호원들과 나란히 앉아 무릎만 꼭 쥐고 있었다. 간절한 게 하나 있었다. 지금 사직서를 내면 사원이 아니니까 안 가도 되지 않을까. 왜 놓고 왔지? 사직서를 여권처럼 챙겨 다녔어야 했는데.
야속하게도 비행기는 추락하는 일 없이 하늘을 갈라 예정에 없던 도시 위에 도착했다. 푸른 하늘 아래 깔린 도시는 뉴욕만큼이나 화려했다. 사막 위 우뚝 솟은 호텔도시는 어마어마한 경쟁을 벌이며 저마다의 환상을 제공했다. 지민은 라스베가스를 관통하는 거대한 롤러코스터를 창문 밖으로 확인하고서야 현실을 실감했다. 맙소사. 믿기 힘들었다. 원래 세워놓은 휴가계획을 실천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것도 민윤기와 둘이.
“내려.”
윤기는 기다림 따위는 모르고 순식간에 내려버렸다. 전용기 비행장에서부터 고급차량이 윤기를 마중하고 있었고, 지민은 감옥에 끌려가는 것마냥 같이 뒷자리에 탑승했다. 지민은 입안이 바짝바짝 말랐다. 초조한 기색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윤기는 창문을 통과해 들어오는 빛이 눈이 부신지 인상을 얕게 찡그렸다.
“그래서 뭐가 제일 먼저 하고 싶은데.”
여차하면 갑자기 배가 아프다는 말까지 날릴 준비가 되어있던 지민이 어리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제일 먼저 하고 싶은 거요? 지금 당장 제일 먼저 하고 싶은 건 이 차를 탈출하는 거지만, 윤기가 묻는 의도는 그게 아닐 터다. 무슨 말씀인지 잘…. 윤기는 차분하게 말을 얹었다. 어조만큼은 심부름을 시킬 때와 똑같았다.
“원래 오고 싶었다며.”
“…네?”
“라스베가스. 생각해둔 거 있을 거 아니야.”
“그걸 미스터 윤이 어떻게 아세요?”
지구상에서 라스베가스 휴가계획을 아는 건 딱 셋이었다. 자신과 정국, 그리고 진. 정국이 윤기와 연락이 닿을 일은 우주가 터져도 불가능하며, 그런 사적인 이야기는 보고서로 만들어 올라가지 않는다. 눈을 동그랗게 뜬 지민이 되묻자 윤기는 뻔뻔하게 답했다.
“내가 모르는 게 있을 거라 생각해? 아주 기발한 발상이군.”
“…….”
“어디로 갈지나 말해.”
“제가 정해요?”
“어.”
지민은 난처했다. 윤기와 있을 때의 패턴은 항상 같았다. 윤기가 목적지를 말하면 빠릿빠릿하게 움직이고, 심부름거리를 해결하고. 그도 당연했다. 비서니까. 지민은 당장이라도 외치고 싶은 뉴욕이라는 단어를 눌러놓고 머리를 굴렸다. 이탈리아의 베네치아를 옮겨놓은 호텔, 아니면 이집트와 파리를 본 딴 거리. 아니야, 끔찍하게 로맨틱하잖아. 둘이 걷다 피부에 소름이 돋아 도마뱀이 될지도 모른다.
“없어?”
질문 까먹기라도 했나? 점점 짜증으로 찡그려지기 시작하는 윤기의 미간을 본 지민은 마음이 급해졌다. 어디로, 어디로 가지? 그 순간 계획을 짤 때 마다 정국이 툭툭 내뱉던 말이 떠올랐다. 형 라스베가스에 가면 당연히 그거죠. 윤기가 다시 입을 열려는 찰나, 지민은 되는대로 와다다 내질렀다.
“카지노요!”
“…….”
“…제가 방금 카지노라고 했나요? 말이 헛 나왔….”
“차 돌려. 카지노로.”
지민의 말을 화끈하게 잘라먹은 윤기는 운전기사와 연결된 버튼을 눌러 지시했다. 지민이 입을 떡 벌렸다.
“진짜 가시게요!?”
“가고 싶다며. 오자마자 도박, 좋네.”
“아니, 그…꼭 거기를 가고 싶다는 게 아니고…제 말은…아무래도 라스베가스에서 즐길 수 있는 볼거리를 보러가는 게 좋지 않나…. 미스터 윤은 어디 가고 싶으신 곳 없으세요?”
지민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스스로 선택하고 괴로워하는 것보다 질질 끌려 다니는 게 낫지 싶었다. 놀이기구라던가 아니면 보고 싶었던 쇼라던가…. 지민이 주섬주섬 선택지를 늘어놓는 걸 보다, 윤기는 다리를 꼰 자세 그대로 평범하게 말했다.
“글쎄, 어디를 가고 싶을까.”
“말씀하시면 준비할게요.”
“그럼 카지노로 가지.”
“…네.”
누운 곳이 알고 보니 무덤이라 헐레벌떡 일어나려는데 관짝이 닫혔다. 이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잘 모르겠다. 지민은 리셉션의 레드카펫을 밟았을 때만큼 커다란 심호흡을 했다.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괜찮을 거야. 그리 믿는 수밖에 없었다. 화창한 라스베가스의 태양광이 속도 모르고 지민의 눈에 박혀들었다.
카지노장에선 시계를 걸어놓지 않는다. 그곳은 시간이 증발한 환락의 굴이었다. 1층을 점령한 슬롯머신 사이를 지나 올라가자 펼쳐진 곳은 지민이 처음 본 세상이었다. 해가 떨어지지도 않은 낮부터 딜러와 머릿수를 세기도 벅찬 겜블러들이 주사위와 룰렛을 굴렸다. 하루에도 수천억이 넘는 액수가 오가는 카지노는 화려하고도 고급스러운 장식이 눈을 현혹시켰다. 이상한 나라에 방금 도착한 앨리스마냥 지민은 입을 헤 벌리고 구경했다.
“처음 와? 네 표정 보면 괜한 질문인 거 같긴 하지만.”
지민은 그제야 합 입을 다물었다.
“많이 티 나요?”
“어, 심각하게. 사기 치기 딱 좋겠어.”
윤기는 거침없이 칩을 바꿨다. 직원이 액수를 보고 위층으로 안내를 시도했지만 윤기는 거절했다. 뻔했다. 게임 한 판으로 도시 하나가 휘청거릴 액수를 가진 사람들의 테이블일 것이다. 얼마를 바꿔드릴까요? 지민은 소심하게 40달라를 말하고 내밀어진 윤기의 칩과 비교했다. 검은색은 천달라를 뜻하고, 붉은색은 오 달라를 뜻한다. 내가 붉은색 칩 여덟 개. 어디 민윤기는. 검은색이 하나 둘 셋 넷…아니야. 지민은 입이 다시 떡 벌어지기 전에 세는 걸 포기했다. 윤기가 말했다.
“왜? 돈 빌려줘?”
“아니 그건 아닌데….”
“이자는 두 배야.”
“…괜찮아요.”
“사기꾼 쳐다보는 얼굴이군. 걱정 마. 내 비서 등 처먹을 정도로 주머니 사정이 급한 건 아니니까.”
능청스럽게 웃는 윤기를 보면서, 지민은 투자자들과 만찬을 갖는 윤기를 회상했다. 놀라운 언변으로 어떻게 구워삶아 먹는 건지 하나같이 만찬이 끝나면 윤기에게 어마어마한 신뢰를 보냈다. 아 네…감사합니다…. 어정쩡한 답을 듣지도 않고 윤기는 테이블을 향해 걸었다. 게임이 방금 끝난 테이블은 구경하는 사람과 게임에 참여하는 사람들로 머릿수가 제법 모여 있었다. 카드를 쥐고 있는 딜러가 인사했다.
“환영합니다, 참여하시겠습니까?”
“둘.”
“저 미스터 윤, 저는 게임방법을 몰라요.”
“그럼 옆에서 뭐하게.”
“아무래도 응원이나….”
운이란 건 어렸을 적부터 지민의 인생에 없는 편이었다. 가판대에서 잡지책을 사도 다섯 번 중 한번은 속지가 너덜거렸다. 카지노를 행선지로 외친 당사자가 쏙 빠지는 우스운 몰골이긴 해도 참여하면 돈을 모조리 털릴 게 훤했다. 좀 그런가요. 머뭇거리는 지민을 윤기는 빤히 바라보다 판으로 시선을 돌렸다. 한명만.
지민이 가슴을 쓸어내릴 새도 없이 게임이 시작됐다. 카드가 판에 돌았다. 윤기는 어린아이 사탕 사듯 손쉽게 칩을 한 개 배팅했다. 정작 참여하고도 무덤덤한 윤기와 달리 지민이 침을 꼴깍 삼켰다. 왜 내가 더 난리야 하는 건 민윤기인데. 그 대단한 회사를 손에 쥐고 주무르는 사람인데. 물론 고작이라는 단어가 어울리지 않는 액수의 돈이 걸려있긴 하지만, 윤기가 하루에 찾는 레스토랑 저녁 값보다 못하다. 게다가 지민은 여태 윤기가 못하는 일은 본적이 없었다.
힘내세요, 파이팅. 짧은 지민의 응원이 닿자, 윤기는 지민을 잠시 흘끔 돌아봤고 게임이 시작됐다. 결과는 금방 나왔다.
“서렌더.”
“배팅금액에서 50퍼센트를 잃으셨습니다. 게임을 이어서 진행하시겠습니까?”
윤기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깔끔하게 패를 내려놓았다. 졌다. 판에서 돈을 딴 사람은 한 명이었다. 지민은 손이 풀리지 않았나보다, 하고 넘겼다. 다음 판이 시작되었다. 카드가 돌고 가벼운 긴장감이 돌았다. 딜러가 윤기의 패를 확인했다.
“배팅금액을 잃으셨습니다. 게임을 이어서 진행하시겠습니까?”
“물론.”
그래, 두 번째까지는 손풀기로 적당하지. 지민은 손에 땀이 나도록 주먹을 꼭 쥐고 관람했다. 맥 빠지게도 윤기는 카드를 보자마자 툭 내려놓았다.
“서렌더.”
“배팅금액에서 50퍼센트를 잃으셨습니다. 게임을 이어서 진행하시겠습니까?”
지민은 떨리는 동공으로 사라지는 윤기의 칩을 바라보았다. 지금 순식간에 2000달라가…. 황급히 윤기를 쳐다보니 아직도 당당하다. 져놓고는 미련하나 없이 또 칩을 배팅하고 있다. 세계도박챔피언 대회에 나가 이긴 사람 같은 얼굴로 계속해서 지고 있었다. 지민의 센서에 심상찮은 불빛이 감지되었다. 설마…게임 못하는 거야?
“배팅금액을 잃으셨습니다. 게임을 이어서 진행하시겠습니까?”
졌다. 또 졌다. 지민은 입을 떡 벌리고 경악했다. 순식간에 천 달러가 넘게 분해되었다. 윤기는 무식하게 칩을 계속해서 밀어 넣었다. 여태 테이블에서 한 번도 딜러를 이기지 못한 사람은 윤기뿐이었다. 오죽하면 딜러조차 내심 당황한 눈치였다. 또? 망설임 없이 칩을 투자하는 하얀 손가락을 말리고 싶은 이는 분명 많았으리라. 거기, 큼, 이쯤에서 그만 하는 건…. 다른 겜블러가 헛기침을 했다. 물론 들은 체도 하지 않은 윤기는 또 지고 천 달러를 약 5분 안에 잃었다.
“…또 참여하시겠습니까?”
“자, 잠시만요!”
지민은 칩을 밀어 넣는 윤기의 손을 제 손으로 텁 붙잡았다. 급한 김에 머릿속에 있는 말이 그대로 쏟아져 나올 뻔 했다. 미쳤어요? 참을 수 있던 건 저 밑 잘리면 끝이라는 마지막 이성이 힘써준 덕분이다. 제 돈도 아니고, 돈이라면 머리카락 수보다 많을 윤기지만 어쨌든 막아야겠단 의무감이 들었다. 윤기는 포개진 손을 빤히 내려보다 지민 쪽으로 시선을 틀었다.
“왜.”
“이제 그만 가는 건 어떨까요?”
당신이 게임을 발로 하는 거보다 못하니 작작해라, 이 말을 돌려 말하는 과정까지는 꽤 긴 시간이 필요했다. 슬슬 그만 갈 때도 된 거 같고, 술도 다 떨어졌고요, 라스베가스는 넓으니까 할 일이 꽤 많지 않을까요? 급하게 모아온 지민의 만류가 먹히지 않았는지 윤기는 영 반응이 없었다. 또 한 번 지민 아래에서 윤기의 손이 칩을 밀어넣으려 움찔거렸다. 보다 못한 지민이 더럭 외쳤다.
“제가 할게요!”
“네가?”
“네.”
그만해, 그만하라고. 숨 쉬듯 돈을 쓰는 윤기를 막은 지민은 테이블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 사람 하나 살렸다는 안도감이 담겨있는 것 같았다. 전혀 쓸 생각 없던 40달러짜리 칩을 주섬주섬 꺼내면서, 또 늦은 후회를 했다. 아 왜 나섰지. 내 돈도 여기 있는 이게 전부인데. 열 개가 모여도 블랙칩 한 개가 안 되는데….
그리고 카드 패를 받으면서 뒤늦게 아차, 했다. 설마 지금 네가 나를 무시하는 건가? 혹시 여분용 심장 같은 거라도 집에 놓고 다니나? 같잖다는 코웃음이 튀어나와도 무리는 아니었다. 지민이 소심하게 윤기를 확인했으나, 윤기는 무슨 심리인지 얌전히 팔짱을 끼고 지민을 구경했다. 지민은 옆얼굴이 뚫릴 것 같은 시선을 의식하며 억지미소를 지어냈다. 이기고 올게요.
“하하 오늘따라 사람이 많네요.”
“늘 이곳은 사람이 많죠.”
딜러가 답하며 카드를 돌렸다. 소심하게 칩을 배팅한 지민은 카드를 확인했다. 아니나 다를까 이변은 없었다. 윤기와 마찬가지로 배팅금액을 몽땅 잃었다. 지민은 미련을 두지 않았다. 목적은 하나였다. 어서 윤기를 끌고 이곳에서 나가, 잘난 손에 들린 칩을 없애버리는 게 더 중요했다.
“이제 나갈까요?”
“아니.”
“네?”
“내가 참여하지.”
도박 중독의 실태의 심각성을 이런 곳에서 찾을 줄 몰랐던 지민은 답답한 가슴을 속으로 쳤다. 뼈마디가 툭툭 튀어나온 하얀 손가락에 또 카드가 걸렸다. 배팅까지 완료한 윤기를 보고 딜러가 사뭇 당황하며 물었다.
“전부 다 배팅하시는 겁니까?”
지민은 윤기가 배팅한 칩을 안타까운 눈길로 바라보면서도 가만히 있었다. 상사의 멱살을 휘어잡고 작작하라 외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판의 모두가 별다른 기대 없이 윤기의 차례를 바라보았다. 자동현금인출기쯤으로 보는 시선이었다. 그리고 반전은 그때부터 찾아왔다.
“더블다운.”
순식간에 판이 뒤집어졌다. 딜러는 물론, 게임을 구경하던 사람들이 멍한 정신으로 윤기가 툭 내려놓은 카드를 바라보았다. 뭐야 할 줄 알았던 거야. 지민이 혼란에 빠져들고 있을 무렵, 깔끔하게 판을 휩쓴 윤기는 이겨놓고도 별 감흥 없는 태도로 말했다.
“돈 챙겨서 따라와.”
“미스터 윤 게임 잘하시는 거 아니었어요?”
허겁지겁 따라붙은 지민이 물었다. 밤에 무슨 일이 있었던, 이 어이없는 여행의 타이틀이 어찌됐건, 당장 카지노 안에서의 황당한 사건만 떠올랐다. 몸을 사리겠다는 조금 전의 결심이 삐끗했다는 것도 지민은 의식하지 못했다. 윤기는 당당했다.
“원래 게임 못해.”
“네? 그럼 돈을 왜 그렇게 많이 거신 거예요?”
“그게 많은 건가?”
제 세 달치 월급을 그런 취급하지 말아주실래요. 지민은 재수 없는 민트색 뒤통수를 향해 티 안 나도록 눈을 흘겼다.
“그런데요, 그럼 마지막에는 이길 줄 알았던 거예요? 어떻게 아신 거예요?”
“아까도 한 대답이군. 내가 모르는 게 있을 거란 착각을 버려.”
“그렇지만 아까는…헙.”
다 졌잖아요. 그런 말을 하려다 지민은 간신히 멈췄다. 싸늘한 시선을 마주하지 않을까 지민이 눈치를 보기도 전에, 윤기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뭐, 오늘은 도박이 목적은 아니라서.”
“네?”
“다음 가고 싶은 곳 말해.”
윤기가 걸음을 멈췄다. 도박장에 와서 도박이 목적이 아니라는 헛소리를 해석하기도 전에, 지민은 고민에 잠겼다. 가고 싶은 곳. 아마 서서히 해가 진 시간이다. 지민은 윤기를 조심스레 살폈다. 같이 있다 보니 괜찮은 거 같기도 한데. 착각인지 환상인지 몰라도 까칠한 그의 상사는 오늘따라 얌전했다. 그래 내가 라스베가스를 이제 또 언제 와본다고.
“거기로 가도 돼요?”
“어디.”
“벨라지오 분수쇼요.”
유치하다 구박이라도 맞는 건 아닌가 걱정이 무색하게도 윤기는 다시 발을 뗐다. 그러던가.
***
세계 3대 분수쇼라는 명성답게 이미 분수대 주변은 머릿수로 꽉 차 있었다. 거대한 분수대 뒤로 높다란 호텔 객실마다 불빛이 빛났다. 지민은 사람들 틈 사이에 섞여 난간을 붙잡았다. 여기가 잘 보일 거 같아요. 윤기는 흔쾌히 행선지를 옮겨준 것만큼이나 아무 말 없이 지민의 옆자리에 섰다. 아마 쇼는 꽤 기다려야 시작되는 거 같다.
“오랜만에 다시 보는군.”
“와보신 적 있으세요?”
“어. 처음 취임해서 늙은이들이랑 밥그릇 싸움할 때 지나가다가 봤어.”
윤기가 분수대 옆 도로를 달리는 차를 눈짓했다. 저기 앉아서. 윤기는 금세 팔짱을 끼고 분수대에 삐딱하게 몸을 기댔다.
“넌?”
“저는 처음이에요.”
“오 그래? 잊을 수 없는 경험을 고작 나랑 보내게 돼서 슬픈 건 아니지?”
윤기가 가볍게 웃었다. 농담을 거는 윤기는 처음이라 지민은 내심 놀라면서도 착실히 답했다.
“그럴 리가요. 아까 카지노도 처음인걸요.”
“그 소리는 첫판에 돈을 잃었단 거군.”
“네….”
“아쉬워? 원하면 또 해도 되고.”
“아뇨, 괜찮아요. 돈은 정직하게 벌어야 돼요.”
지민이 기겁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윤기는 어깨를 으쓱했다.
“현명하네. 어차피 오늘 네가 딴 거에 비하면 푼돈이니 잊어버려.”
“오늘 저는 딴 게 없는데요?”
“나랑 같이 있잖아.”
“……?”
“내 한 시간을 돈으로 바꾸면 만 달러도 넘어. 벌써 넌 오늘만 5만 달러도 넘게 딴 거라고.”
“…….”
“그리고 앞으로 최소 2만 달러는 더 벌 수 있겠군. 축하해.”
맞는 말이긴 하다. 세계적인 기업의 회장의 시간은 돈으로 환산하기도 벅차다. 지민은 반박하고 싶어도 할 말을 찾지 못해 입술만 우물거렸다. 저기 그렇긴 한데요, 그 7만 달러 바꿔주는 은행이 없잖아요. 이런 소리를 했다간 화기애애한 이 분위기가 산산조각 날 거 같아 꾹 눌러 담았다.
둘만 다시 남겨져도 걱정하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지민은 아직 잠잠한 분수를 바라보는 윤기의 옆얼굴을 가만 쳐다보았다. 이렇게 보면 그냥 내 또래 같은데. 라스베가스 분수대 앞에 선 민트색 머리카락의 청년은 명함만 없다면 평범한 관광객이었다.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는 옆얼굴만 바라보다가, 지민은 마음을 접었다. 알아도 무얼 할 수 있으랴.
어색한 침묵이 이어지기 전, 다행스럽게도 음악이 흘러나왔다. 우아한 클래식에 맞춰 분수가 춤을 췄다. 풍성한 밤하늘을 수놓는 물방울은 아름다웠다. 조명과 합해진 물줄기는 물에서 터지는 폭죽이었다. 건물 높이까지 뚫을 듯 올라가는 분수는 비가 되어 쏟아져 내렸다. 물이 쏘아질 때마다 곳곳에서 탄성이 흘렀다. 지민도 예외는 아니었다. 와아아, 와아아. 태어나 별을 처음 구경하는 어린아이처럼 들떠 고개를 쭉 뺐다. 절정으로 달한 클래식이 끝날 때까지 지민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 동영상 찍었어야했는데.”
아쉬움에 물이 멈춘 꼭지만 바라보다가, 문득 옆얼굴을 찌를 듯한 시선을 감지했다. 흠칫한 지민은 고개를 돌렸고 아니나 다를까 윤기가 있었다. 쇼를 보기는 한 건지, 아니면 낭만적인 쇼를 봐도 감동이 없는 건지 시선은 전보다 진해져있었다. 지민은 요상하게 뒷목이 간지러운 기분을 느끼면서도 민망함을 감추기 위해 애써 눈을 휘며 웃었다.
“생각보다 훨씬 더 예쁘네요.”
“…그러게.”
윤기는 잠깐 말을 쉬었다가 미묘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생각보다 더.”
지민은 윤기의 짙은 시선을 감당하다, 먼저 눈을 피했다. 폰을 어디다 놨더라. 괜히 주머니 안에 있는 폰이 손에서 미끄러진다. 꺼내들고 여전히 뒤통수에 닿는 시선을 모른 척하며 이미 끝난 분수대에 카메라를 들이댔다. 얼굴과 넓은 분수대가 같이 나오도록 끙끙거리고 있자니 지켜보던 윤기가 손을 내밀었다.
“그런 식이면 호텔이 부식될 즈음 찍힐 거 같은데.”
“…어….”
“찍어준다고.”
친히 찍어준단다. 남을 위해 손을 쓰는 일이라면 침대에서 옷을 벗기는 정도가 전부였을 손이 지민의 폰을 가져갔다. 찍힌지도 모르게 찍힌 지민은 얼떨떨한 정신으로 윤기에게 폰을 돌려받았다. 이건 뭐지? 뭔가 변했다. 다르다.
“아직 마지막이 남았으니 정신 놓는 건 조금만 더 참아.”
마지막이 어디더라. 지민은 비행기에서 윤기가 레이첼에게 내린 명령사이에 레스토랑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미리 소화제를 사놓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