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노아님과 같이 썼습니다 1편은 여기에서 열람하고 와주세요!
_짭근 소재주의
중학교 마지막 학기를 보내던 어느 날. 지민은 새로운 가족이 생겼다. 지민아 인사 드려. 엄마가 말했던 분이야. 생전 처음 보는 중년의 남성, 아마도 지민의 새로운 아버지가 될 남자는 꽤나 다정한 표정으로 지민에게 인사를 했다.
“네가 지민이구나. 예쁘게 생겼네. 엄마를 쏙 빼닮았어.”
지민은 어머니가 그렇게 환히 웃는 걸 처음 봤다. 아주 어릴 적 사고로 죽은 아빠의 장례식을 치른 이후 보지 못했던 미소다.
“안녕하세요, 저야말로 말씀 많이 들어서 꼭 한 번 뵙고 싶었어요.”
“말도 아주 똘망똘망하게 잘 하네. 반갑다.”
중년의 남성은 지민을 무척이나 귀여워하며 용돈까지 듬뿍 얹어주었다. 필요하면 부담 갖지 말고 언제든지 더 말하고. 그리고는 지민이 반장이고 곧 졸업한다고 하니 교실에 햄버거까지 박스로 보내준다고 했다. 섬세하고 좋은 사람 같았다. 엄마를 힐끔 봤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해 보이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혼자 자신을 키우면서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한 우리 엄마. 지민이 새로운 가족을 거부할 이유는 없었다.
아저씨는 자신에게 아들이 하나 있다고 했다. 지민이 너보다 딱 두 살 많은 형이야. 지민은 결혼 전 식사자리에서 아저씨의 아들을 만날 수 있었다.
아저씨 아들의 이름은 민윤기였다. 처음부터 다정한 아저씨와는 정반대로 달랐다. 새카만 머리칼에 이 자리에는 관심 없다는 듯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엄마의 질문들에 대답은 하긴 했다. 윤기 이야기 많이 들었어. 잘생겼네. 부르고 싶은 대로 불러. 아줌마라고 해도 되고. 네. 학교 생활 많이 힘들겠다. 이제 고3이 된다며. 괜찮아요. 요새 날씨가 많이 춥지? 네. 틀에 박힌 대답만 줄줄 뱉어내는 로봇 같았다. 말수가 많이 없는 편인가. 그러다 잠깐 눈빛이 마주쳤는데, 조금 날카로운 편이라 왠지 모르게 피하게 된다. 고등학교 형들은 다 이렇게 무섭나?
서로의 자식들이 어떤 상황이던 간에 아저씨는 마련한 자리를 매우 만족스러워했다.
“둘이 서로 잘 의지하고 지내라. 지민이 넌 모르는 거 있으면 형한테 많이 물어보고. 윤기 너도 지민이가 도와달라고 하면 잘 도와줘라. 이제 형이잖니.”
“네.”
대답은 오직 지민만이 했다. 아저씨의 부릅 뜬 눈에 윤기도 뒤늦게 대답한다. 네. 지민이 윤기에게 먼저 손을 척 뻗었다.
“잘 부탁해요, 윤기 형. 저는 박지민이라고 해요. 앞으로 친하게 지내요.”
민윤기는 내밀어진 손을 빤히 보더니 대충 끄덕이며 두어 번 흔들어주었다. 그러더니 내팽개치듯 놓고 제 아버지 쪽을 쳐다봤다. 의자를 밀고 일어난다.
“저 바쁜데 먼저 갈게요. 인사만 하면 된다고 했잖아요.”
“민윤기. 너 지금 네 멋대로….”
“얼마나 바쁘겠어요. 한창 중요한 시기잖아요. 응, 윤기야 아줌마 만나러 나와줘서 고마워. 만나서 반가웠어. 조심이 가고 다음에 또 보자.”
음식이 줄었나 싶을 정도로 모든 것을 남긴 채 민윤기는 그대로 자리에서 퇴장했다. 저 버르장머리 없는…. 한숨 쉬는 아저씨 대신 지민의 엄마가 윤기의 편을 들어주었다. 아직 시간이 필요할 거예요. 너무 갑작스러웠잖아요. 그리고는 지민을 보며 눈치를 보낸다. 당황스러워 윤기가 떠난 뒷모습만 지민이 냉큼 고개를 끄덕인다.
“저는 괜찮아요, 아저씨. 윤기 형이 많이 놀란 거 같아요. 나중에 잘 이야기 해볼게요.”
지민이 생글 착하게 웃어 보였다. 아 그리고 이제 아버지라고 불러도 돼요? 이제 곧 같이 사는데 아저씨라고 부르기는 쫌…그래서요. 센스 있는 답변에 아저씨, 아니 새 아빠는 함박 웃으며 지민의 동그란 머리를 쓰다듬었다. 새로 생긴 형의 퇴장은 그쯤에서 잊혀진 화제가 되었다. 엄마 역시 다시 화기애애해진 분위기에 웃었다.
잘 될 거야. 지민도 단란하게 웃으며 생각했다. 어찌 됐거나 새로 생긴 가족이니까. 가족끼리는 서로 사랑해야 하므로. 아버지가 죽은 이후 엄마와 둘이 살며 배우고 학습한 것이 그것이었으므로.
***
결혼식이 성큼 다가올수록 엄마는 지민을 키링처럼 이리저리 달고 다녔다. 지민이 방 꾸미는데 뭐가 좋은지 말해봐. 지민은 새 아빠와 엄마의 동행에 끼어 침대를 고르고, 책상을 고르고, 같이 식사도 했다. 새 아빠는 그 때마다 지민이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금액을 지불했다. 에어맥스를 비롯해 고가의 노트북이 지민의 앞으로 뚝뚝 떨어졌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지민이 인사를 꾸벅 하면 새 아빠는 인자한 웃음 지으며 공부 더 열심히 하라고 했다. 엄마는 한 발자국 떨어져서 그 광경을 매우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그 날도 마찬가지였다. 결혼식장에서 입을 지민의 옷을 맞춘다는 명목으로 지민은 백화점을 방문했다. 새 아빠와 엄마 앞에서 명품 옷을 수도 없이 걸쳐본 다음 쇼핑백을 양 팔이 떨어질 만큼 가득 선물 받았다. 그러다 사고가 생겼다. 카페에서 커피를 픽업해 쇼핑백과 함께 뒤뚱거리며 걷던 지민이 커피를 옷에 줄줄 쏟았다.
“잠깐 아빠 집에 들렸다 가자. 여기서 가까워. 윤기 옷 입으면 되니까.”
“죄송해요.”
“에이. 실수하고 그럴 수도 있지, 뭘. 금방이니까 가자.”
지민은 살면서 그렇게 넓은 집은 처음 봤다. 엄마와 둘이 사는 집의 세 배는 되는 것 같았다. 여기가 윤기 옷방인데 들어가서 원하는 걸로 하나 갈아입으렴. 네, 감사합니다. 지민은 떠밀려 들어온 옷방에 와아, 감탄하며 둘러보았다. 무채색 위주의 옷이 널려있는 공간이 지민의 방보다도 컸다. 그런데 정작 걸려있는 옷은 몇 없었다.
지민은 뭘 고를지 망설이다가 대충 가장 저렴할 것 같은, 무늬 없는 하얀 티셔츠를 꺼내 입었다. 오늘 새 아빠와 함께한 쇼핑 목록이 죄다 고가인 걸 보면 이것도 고가겠지만. 옷을 갈아입으니 저보다 커서 헐렁거리며 어깨 품이 남아 돌았다. 바로 나가야지. 남의 사적인 공간이니까.
바로 윤기의 방을 지나 나가려는데, 문득 책상에 굴러다니며 대충 엎어진 것이 지민의 눈에 들어왔다. 손바닥만한 액자였다.
“…쓰러진 건가?”
지민이 저도 모르게 다가가 액자를 세워주었다. 그 안에는 사진이 들어있었다. 잔뜩 야윈, 누가 봐도 건강이 좋아 보이지 않는 여성과 민윤기였다. 새 아빠를 닮지 않았다고 생각했던 새로운 형은 사진 속 여성과 꼭 닮아있었다. 마치 엄마와 자신처럼. 윤기 형 엄마구나.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사진 구석에는 날짜가 적혀있었다.
“…….”
몇 해전의 봄. 지민은 그 날짜를 못이 박힌 것처럼 바라 보았다. 그러니까, 그 날짜는 엄마가 처음으로 지민에게 아빠가 될지도 모르는 사람을 만나고 있다고 알려준 것보다 뒤였다. 지민아 엄마가 우연히 만난 사람이 있는데 말이야. 초등학생 박지민은 오랜만에 먼저 말을 걸어오는 엄마가 오랜만이라 그 날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 이야기를 한 이후부터 식당 일로 늘 피곤하다고 하며 죽어가던 얼굴에 점점 생기가 넘치기 시작했으니까.
식사자리에서 한번 마주친 윤기의 얼굴이 떠오른다. 호의적이지 않던 그 얼굴. 아. 그랬던 것이다. 그 형은 그럴 수밖에 없던 것이다.
“…….”
멀쩡한 가정을 깨부순 건 우리였다. 제 엄마였다. 새로운 가족은, 이미 만들어져 있던 가족에서 강제로 뺏어온 거다. 민윤기의 행복을 부수고. 지민은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 멍하니 서있었다.
“지민아. 옷 다 갈아 입었니?”
방문이 열리고 엄마가 들어온다. 멍한 지민의 얼굴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하며 다가온다. 왜 그래. 몸이 안 좋아? 얼굴이 왜 그렇게 하얗게 질렸어. 엄마는 다가와 이마에 손을 올리려다가, 액자를 발견했다. 순식간에 엄마의 얼굴이 파랗게 변한다. 지민은 아마 그것이 자신의 색과 비슷할 거라고 생각했다.
“너, 이걸….”
엄마가 액자를 빼앗는다. 그리고는 다가오는 발소리에 황급히 다시 책상 위에 액자를 엎어놓았다.
“왜. 지민이 옷 사이즈 맞는 거 없대?”
“뭘 입을지 몰라서 한참 골랐나 봐요. 우리 지민이가 옷에 한창 관심이 많을 나이잖아요.”
엄마는 아무 일도 없는 것마냥 웃으면서 새 아빠를 대했다. 아 그럼. 이제 새로운 집으로 이사 가면 지민이도 윤기처럼 멋진 방 만들어 줘야지. 지민은 그 말에 꾸벅 인사하며 이제는 입에 박힌 듯한 감사인사를 했다. 네, 아빠. 조금 익숙해진 호칭을 부르는데, 일순 명치가 푹 쑤시는 듯했다. 원래 제 것이 아닌 빼앗은 것을 부르는 거라 죄책감이 후벼 팠다.
어떻게 집으로 돌아왔는지 모른다. 태워준다는 새 아빠를 뒤로하고 택시를 타고 도착했다. 거대한 집에서 나와, 반지하로 돌아온 집은 적막했다. 지민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진짜예요, 엄마?”
엄마는 지민의 눈을 피했다. 그것이 대답이 됐다. 진짜 우리가 윤기 형한테 그런 짓을 한 거예요…? 그런데 어떻게 윤기 형이랑 같이 살아요…? 목구멍에 걸린 질문이 넘실거리는데, 엄마가 대뜸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고 눈물을 터뜨렸다. 흡, 흑.
“지민아 엄마도 이제 행복해지고 싶어….”
“…….”
“엄마 너무 힘들었잖아. 지민이 너도 알잖니. 아빠 그렇게 죽고 엄마 쉬지도 못하고 일했어. 매번 죽고 싶었는데 그 사람 만나고 그나마 살고 싶어진 거야. 엄마가 윤기 형 아빠랑 만날 때 사실상 이혼한 상태라고 했어. 실제로도 이혼하려고 했는데, 그분 건강이 안 좋으셔서 하지 못했던 거야. 그게 진짜야. 지민이 너는 엄마 말 믿지?”
“…….”
“엄마 이제 행복해지면 안 될까…? 지민이 네가 좀 도와주면 안 되겠니? 응? 우리는 가족이잖니.”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는 엄마 앞에서 박지민은 아무 말도 못했다. 가족끼리는 이런 것도 지켜줘야 되나? 얇은 어깨를 들썩이며 우는 엄마한테 박지민은 우물쭈물하다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고개를 푹 숙였다.
“윤기 형한테는 그만큼 더 잘해주면 되는 거야. 행복해질 수 있어.”
엄마가 지민의 어깨를 단단히 붙들고 이야기한다. 지민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결국 결혼식은 예정대로 진행됐다. 지민은 식장에서 수트를 입은 윤기를 마주했다. 그때 본 무표정한 하얀 얼굴인데, 지난 번과 다르게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죄지은 사람처럼 그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기가 힘들었다. 황급히 피해 구석으로 도망가듯 움직여 박수만 내리 쳤다. 그러다 식이 시작되고 하얀 드레스를 입은 엄마가 나왔다. 세상 환히 웃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 다른 사람들과 같이 박수를 치는 윤기를 본다. 온통 하얀 지민의 옷과 다르게 온통 검은 색으로 맞춰 입었다. 결혼식은 차례대로 진행되어, 사회자가 사진을 찍는다며 불렀다. 지민은 윤기와 함께 단상 위로 올라섰다. 비협조적으로 굴 것 같던 윤기는 의외로 착실하게 지민의 옆에 자리잡고 서있었다.
“네 분만 가족사진 같이 찍을게요!”
사진기사가 외쳤다. 카메라 조명이 팡 터진다. 점멸하는 하얀 빛이 불꽃놀이처럼 시끄럽고 어지러웠다.
아. 지민은 깨달았다. 남들이 볼 때도 이제 자신들은 가족이 됐다. 이제 되돌릴 수 없는 일이구나. 이 죄는 평생 마음 속에 품어야 한다.
***
같은 호적에 들어갔을 뿐 성부터 생김새까지 모조리 다른 형과는 집에서 마주칠 일이 적었다. 형은 매번 늦게 들어왔다. 고3이라 바쁜가? 등교를 준비하는 아침에만 마주칠 수 있었다. 그마저도 지민에게 구태여 말 붙일 생각이 없다는 듯 방에서 나와 현관문으로 직진했다. 교복의 형태조차 완성되지 않은 차림으로.
그래도 같은 집에 사는데. 이제 내 형인데. 지민은 엄마의 말을 떠올렸다. 그만큼 사랑해주면 되는 거야. 잘 해주면 돼. 기회는 생각보다 빨리 왔다.
“어 형! 오늘 비 온댔는데.”
지민은 이게 뭐냐는 듯 보는 윤기한테 부러 생글 웃어 보였다. 나는 선해요. 그렇게 얼굴에 써 붙였다. 속에선 식은땀이 잔뜩 났다. 긴장해서 발이 꼬일 것만 같았다. 싫다고 내치면 어떡하지? 무시하고 그냥 가려나? 상간녀 자식인 내가 꼴도 보기 싫겠지. 근데 오늘 진짜 비 오는데. 형 감기 걸리면 안 되는데. 이미 거절 당하는 시나리오 쫙 뺐는데, 의외로 윤기는 지민과 우산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얌전히 받아 들었다. 그대로 훌쩍 밖으로 나간다. 그 반응이 너무 얌전해서 뒤에 남은 지민이 오히려 놀랐다.
생각보다 괜찮은데? 아니, 아주 많이 괜찮다. 그날 윤기가 받아준 게 너무 좋아서 지민은 학교를 가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우중충한 먹구름이 가득 꼈는데도 좋았다. 어쩌면 형이랑 괜찮은 사이가 될지도?
용기는 한 번 내고 나니 처음이 어렵지 그 다음부터는 쉬웠다.
“형 시리얼 드실래요?”
지민은 씻고 방으로 들어가려던 윤기를 냉큼 붙잡았다. 윤기는 이번에도 거절하지 않았다. 떨떠름한 표정으로 지민의 앞에 자리 잡았다. 이딴 건 왜 먹지? 그게 쓰인 얼굴로도 앞에 앉아 자신이 준 시리얼을 먹었다. 오히려 지민이 조금 당황했다. 입맛에 안 맞으면 안 먹어도 되는데. 고무 씹는 표정으로 저걸 왜 다 드시지…. 깨끗하게 비워진 그릇을 보면서 지민은 이번에도 대충 저지를 걸치고 먼저 사라지는 윤기를 본다.
두 번째가 되니 조금의 가능성이 생긴다. 형은 내가 안 미운 건가. 지민은 배시시 웃으며 식탁에 앉아 발을 동동 굴렀다.
일종의 부채감으로 자리 잡아 의식적으로 베풀던 친절은 이제 무의식으로 자리잡았다. 지민은 제가 좋아하는 것들을 윤기에게 툭하면 나눠주려고 했다. 형 이거 맛있는데 하나 드실래요? 형 이거 쓰실래요? 이 볼펜 진짜 좋아요. 섬유탈취제 저 있는 거 향 좋은데. 침대에 놓고 써요, 형. 윤기는 그럴 때마다 물끄러미 지민을 바라보다가 받아 들었다. 어, 그래. 응. 단 한 번도 거절하지 않는 윤기를 보면서 어느새 가능성은 확신으로 변했다. 윤기 형은 날 안 미워해. 싫어하지 않아.
고등학교는 여태 다니던 중학교와 달랐으나 비슷한 점들이 있었다. 지민은 반에서 또 반장을 맡았고, 반에서 누구나 박지민을 좋아했다. 담임 선생님이고, 양아치고 혼자 책상에 맨날 처박혀 고개 묻고 있는 애도 지민이 말 걸면 끝내 웃으면서 대화했다. 언제나 주변에 사람을 몰고 다니는 박지민은 이 호의들이 낯설지 않았다.
“아 씨바 하필 저기 3학년 선배들 있는 거임? 돌아가야 되잖아. 이거 존나 무거운데.”
담임이 심부름을 시킨 날이었다. 같이 체육 비품을 옮기는 일을 맡게 된 형준이 투덜거렸다. 형준의 말대로 3학년들이 복도 끝에 뭉쳐있었다. 지민은 그 사이에서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 어, 윤기 형. 집에서 맨날 보던 심드렁한 얼굴은 학교에서도 마찬가지로 심드렁했다. 간혹 픽 웃으며 친구들이 하는 말에 반응이나 좀 보일 뿐이었다. 지민이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냥 가면 안 돼?”
“저 형들 일진임. 괜히 거슬리면 좆 돼.”
형준이 질색을 한다. 저 형들이 고1 애들 돈 엄청 뜯고 다닌대. 담배 사오라고 시키고. 안 사온다고 하면 개팬다고 함. 같이 다니는 누나들도 있는데 그 누나들도 성깔 존나 더러워. 지민은 그 말에 윤기를 빤히 보았다. 일진? 윤기 형이? 형준은 멈춰 선 지민의 어깨를 툭툭 쳤다. 야 빨리 가자. 응, 알았어. 혼자 속으로 물음표를 연신 띄워댔다. 아닌데. 우리 윤기 형 착한데. 맛 없는 시리얼도 다 먹어주는 형인데. 윤기의 친구들은 몰라도 민윤기만큼은 그러지 않으리라고 지민은 홀로 확신했다.
학교가 끝난 오후였다. 친구들이 지민의 가방을 붙잡았다. 야야 반장. 피시방 가자. 가서 한판만 해. 인원수만 맞춰줘. 지민이 한사코 독서실을 간다고 해도 가방까지 들고 튀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그 뒤를 따랐다. 대충 피시방으로 올라가는 골목길 어귀 즈음이었다.
어, 윤기 형이다.
지민은 편의점 근처에 서있는 윤기를 발견했다. 검은 아디다스 저지가 눈에 확 박혔다. 흔하디 흔한 검은 색일 뿐인데 그게 왜 눈에 박혔는지는 모르겠다. 가방을 맨 건지 만 건지 대충 걸치고 짝다리 짚고 선 채 폰을 하고 있었다. 커다란 손에 잡힌 폰은 흡사 아기들 장난감 같았다. 새 아빠가 사준 지민의 폰과 같은 기종이다. 지민이 괜히 제 주머니 안에 든 폰을 만지작거렸다. 자신이 만질 땐 꼭 양 손으로 잡아야 놓치지 않는 폰이다.
“야 박지민! 뭐해 안 따라오고. 거기 뭐 있어?”
“아냐, 없어.”
지민이 고개를 저으며 피씨방 건물로 올라갔다. 같은 반 친구들한테 굳이 윤기를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또 일진이니 뭐니 떠들어댈 게 분명하다. 다른 사람의 입에서 함부로 민윤기가 씹히는 건 싫다. 반장 넌 저런 일진 형들 보면 털릴 테니 빨리 튀어야 한다고 아우성치는 소리들이 듣기 싫었다. 다들 아무것도 모르면서. 윤기 형이 얼마나 착한데. 나도 용서해줬는데. 부처님이랑 간디가 와도 그거보다 더 착한 형인데.
정말 다 민윤기를 모르는 사람들뿐이다. 하나뿐인 동생이라고, 이렇게 잘 챙겨주는 형은 민윤기밖에 없을 거다. 독서실에서 나오던 어느 밤이었다. 투명한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익숙한 얼굴에 지민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형?”
민윤기다. 호적만 공유하는 가짜 형. 설마 어제 무섭다고 해서 데리러 온 건가? 정말로? 그 한 마디에 독서실 앞까지 올 줄은 전혀 몰랐다. 그 누구도 지민을 이렇게 살뜰하게 챙긴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엄마는 늘 바쁘고 힘들다고 했기 때문에 집에서조차 누군가 기다려준 적이 없고, 지민 역시 기대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걸 성도 다른 가짜 형이 해줬다. 어안이 벙벙하기까지 했다. 민윤기만을 시선에 꽂아두고 있는데, 왁자지껄한 소리들이 윤기 대신 튀어나왔다.
“너가 윤기 동생이야? 야 우리 학교네!”
지민이 움찔했다. 이번에 집단 폭행한다고 소문난 것도 그 일진 선배들이래. 우리 엄마도 그 소문 듣고 밤에 절대 혼자 다니지 말라더라. 반장 너도 조심해. 옆 학교 애 다리 부러지고 허리뼈 나가서 전치 한달 나왔대. 최근 학교에 떠도는 소문을 읊던 친구들의 말이 머릿속을 동동 떠다닌다.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고 눈만 굴렸다.
윤기 형이 내가 동생이라고 알려준 건가? 그럼 인사는 해야겠지? 어색하게 쏟아지는 말들에 네네 하면서 고개 꾸닥거렸다. 네에, 박지민이에요. 네에, 같은 학교예요.
“새끼 존나 귀엽네! 1학년?”
그거에도 끄덕거리려는데 대뜸 지민은 제 어깨를 보호하듯 잡아채는 손길에 의해 옆으로 끌려갔다. 익숙한 검은 저지가 바로 옆에 있었다. 야 다 꺼져. 실제로 민윤기는 자기 친구들을 파리 내쫓듯 매정하게 치워버렸다.
“형 친구들이에요?”
“어 뭐.”
애들의 말이 머릿속을 휘젓는다. 일진, 깡패. 지민은 저런 저렴해 보이는 부류와 윤기가 같이 엮이는 게 싫었다.
“…근데요.”
“뭐.”
“담엔 형 혼자 오면 안 돼요?”
“누가 또 온대?”
처음으로 형이 자신의 말에 부정적으로 군다. 다른 것도 아니고 그 친구들 때문에. 지민이 입술을 삐죽였다. 아깐 쓰레기 던지듯 다 쫓아냈으면서. 그래도 친구는 친구란 건가. 고개 푹 숙이고 길만 봤다.
“저 새끼들이 멋대로 온 거야.”
“…….”
“내일은 안 달고 올게.”
지민은 곧장 고개 들어 윤기를 봤다. 멋쩍은지 처음 독서실에 얼굴 비췄을 때처럼 어색하게 다른 곳만 바라보고 있었다. 도드라진 눈썹 뼈가 가로등 불빛 아래 선명하다. 책가방을 꼭 쥔 지민의 양손에 힘이 들어간다.
가까이 붙은 윤기에게서는 묘하게 술 냄새가 났다. 그 냄새가 싫지는 않았다. 일을 하고 온 엄마한테 매일 나는 냄새였으므로 거부감은 없었다. 오히려 익숙하고 친숙하다. 가족의 냄새였다. 그 때문인가? 뺨이 묘하게 덥고 희한하게 가슴이 동동거렸다. 간지럽게 꼬이는 발끝을 누른다. 다소 빠르게 걷는 윤기의 발걸음에 맞춰 보폭을 넓혔다. 가슴 박동이 빨라진 발걸음보다 더 빠르게 뛰었다.
지민은 그날 이후부터 윤기와의 사이에서 쳐놓았던 경계선을 지웠다. 형도 손 뻗어줬잖아. 그 손을 잡고 윤기를 제 울타리 안으로 완전히 잡아당겼다.
“형 공부 해야죠. 저랑 같이 독서실 가요!”
“내가 그걸 왜 해.”
“고3이잖아요!”
“너나 가.”
“형 안 가면 저도 공부 안 할 거예요.”
“…가끔 너 되게 대책 없이 구는 거 아냐?”
대답 대신 샐샐 웃기만 했다. 가방까지 다 챙겨서 아직도 침대에 대충 앉아있는 윤기를 잡아당겼다. 그에 형이 결국 일어난다. 간다 가. 지민은 길을 걷는 내내 혹시라도 윤기가 튈까 단단히 옆에 서서 감시하듯 걸었다. 네가 감시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냐. 어이없다는 듯 툭 던지는 말에도 꿋꿋이 도보 안쪽으로 밀었다.
독서실에 도착한 뒤 윤기는 그대로 책상에 엎어져 쓰러지듯 잤다. 몇 번 말려보려 했으나 포기하고 말았다. 어떻게 우리 반 애들보다 더 말을 안 듣지. 어마어마한 반장 경력으로 찐따부터 일진까지 전부 케어해 본 지민이 혀를 내둘렀다. 그리고 공부를 시작하려는데, 이상하게 오늘따라 유독 공부가 잘 안 됐다. 옆에서 쿨쿨 자고 있는 민윤기는 죽은 거나 마찬가지니 방해하는 건 아무것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문제집을 한 페이지도 채 넘기지 못하고 자꾸만 신경이 넘어가는 옆을 바라봤다.
“…….”
유달리 하얀 뒷목과 함께 대충 책상 위에 올려져 있는 커다란 손이 보인다. 핏줄이 툭툭 불거진 손은 말랑하기만 한 제 손과는 한참 다르다. 민윤기는 자신과 전부 다 반대다. 온통 순하고 말 잘 듣는다는 평을 듣는 자신과 다르게 일진이라는 말을 뒤집어 쓴 형. 엄마 말이라면 숨 멎는 시늉까지 하는 자신과 달리 아빠한테도 인사만 대충대충 하는 형.
문득 지민은 반 친구들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같이 다니는 누나들 존나 예쁨. 근데 거기서 민윤기 형이랑 사귄 적 있대. 그 형 개부러워. 워낙 윤기에 관한 소문을 많이 듣다 보니 듣고 흘려 넘기는 게 습관이 됐지만 이것만큼은 이상하게 잘 넘어가질 않았다.
진짜 사귄 건가? 윤기 형 인기 많다고 했으니 윤기 형 좋아하는 사람도 거기 있나? 몇 명이나 사귄 거지? 형은 진짜 다 좋아서 사귄 건가? 근데 나 데리러 올 땐 한 번도 못 봤는데. 여친 있는데 맨날 나 데리러 올 수 있나? 여친 있으면 나한테 말해주지 않았을까. 지금 사귀는 사람 없는 거 같은데. 그냥 헛소문인가. 근데 왜 나 이런 생각 하고 있지. 빤히 잠든 윤기의 얼굴을 보며 골몰하던 지민은 문득 윤기의 귓바퀴에 시선을 빼앗겼다. 피부색만큼이나 하얀 귀에 구멍이 뻥뻥 뚫려있었다. 이런 사소한 것마저 매끈한 자신의 귀와는 달랐다.
저도 모르게 손 뻗었다. 숨소리 하나 안 내고 자는 걸 보니 괜찮을 것 같았다. 그런데 무슨 마법에 빠졌다가 일어나는 숲 속 공주도 아니고 손끝으로 건드리자마자 형이 부시시 일어났다. 꼭 나쁜 짓이라도 하다 걸린 사람처럼 움찔 떨고 말았다. 지민은 습관적으로 웃었다. 멋쩍으면 늘 이렇게 웃어 넘겨버릇했다. 허둥지둥 말했다.
“이거 피어싱이죠.”
진짜 신기하다. 구멍이 하나, 둘… 와아. 이렇게 봐도 멋있다. 이거 안 막혀요? 우수수 쏟아내는 감상에 민윤기는 박지민의 아무 말을 알기라도 한 건지 마땅찮은 답 없이 상체를 일으켰다. 아직 잠이 덜 깬 건지 나른한 얼굴은 별 관심 없어 보이기도 했다.
“삼십 분만 더 해.”
그리고는 다시 책상에 엎어진다. 숲 속의 왕자님은 세상만사 모든 게 귀찮아 보였다. 지민은 괜히 멋쩍어 손끝을 쥐었다 폈다 했다. 괜히 쓸데없는 생각은 해가지구. 평소 반 친구들이랑 스스럼없이 툭툭 건드리는 대로 형한테 한 건 좀 그랬나. 지민은 다시금 문제집에 머리를 박았다. 그러나 여전히 공부는 되지 않았다. 앞으로 윤기 형이랑 독서실은 오면 안 될 거 같다. 민윤기가 모든 관심을 먹어 치우므로.
그러나 한 번 가진 호기심은 쉽게 사그라 들지 않았다. 학교에서 윤기의 무리가 보이면 눈 여겨 보게 되었다. 또 남자 선배들이랑만 다니는데. 역시 여자친구 없는 거 같다. 그렇게 판단이 서자 이상하게 안심이 됐다. 같은 학교에 다니는 친형이 일진이라는 소문을 무수히 달고 다니다 보니 이렇게 관심이 가는 거라고 지민은 생각했다. 이제 신경 쓰지 말아야지. 어차피 형은 맨날 나 보러 오잖아. 매일같이 독서실 끝나는 시간이 기다려졌다. 앞에 서있는 하얀 얼굴이 유독 보고 싶어서.
똑같이 기다릴 윤기를 생각하며 독서실 밖으로 나온 어느 날이었다. 매번 기다리던 하얀 얼굴이 없었다.
“뭐지.”
오늘 아무런 말도 없었는데. 윤기한테 전화를 몇 번이나 걸었지만 전부 다 받지 않았다. 바쁜 일이 생긴 건가? 형이 그럼 미리 말해줬을 거 같은데. 묘한 불안감이 생겨 기다릴까 아니면 집으로 돌아갈까 고민하다 발걸음을 옮기는 쪽을 택했다. 부모님한테 물어봐야겠다. 다소 빠른 발걸음으로 직진했다. 매일같이 윤기와 걸었던 밤길이 혼자 걸으니 조금 스산하게 느껴진다. 봄인데도 불구하고. 막 편의점을 지나던 길이었다. 급하게 뛰어오는 검은 인영이 보였다. 익숙한 저지. 민윤기다.
“형! 안 그래도 전화했는데….”
확 고개 드는 반가움도 잠시. 밝아졌던 지민의 표정은 윤기의 얼굴을 보자마자 심각하게 구겨졌다. 가슴이 쿵 떨어진다. 다짜고짜 손을 뻗어 하얀 두 뺨을 감싸 쥐었다.
“형 맞았어요?”
이리저리 돌려보며 상처를 살피니 꽤 컸다. 터진 입가에 피가 그대로 있었다. 그 꼴을 발견하자마자 꼭 제가 맞은 것마냥 화가 났다. 어떤 놈이 이렇게 만든 거야. 일진이 무슨 이렇게 맞고 다녀. 민윤기 일진이라고 혀 내두르던 애들한테 이건 대체 뭐냐고 따지기라도 하고 싶었다.
“형은 왜 내가 눈을 못 떼게 만들어요? 빨리 이리 와요. 얼굴에 이게 뭐야. 많이 아프잖아요.”
“야 뭐 하냐. 이런 거 안 발라도 돼. 야야 이거 피 나는 데 바르는 거야.”
걱정스럽던 마음은 별 일 아니라는 듯 가볍게 취급하는 윤기로 인해 점점 빡침으로 변했다. 민윤기는 별 것 아닌 것처럼 구는데 왜 이렇게 대신 화가 나는지 모를 일이다. 마음 같아선 제가 대신 가서 패싸움이라도 대타 뛰어주고 싶었다. 화 아닌 화를 내며 윤기를 냅다 끌고 가려고 했다.
“…지금, 좀 그래.”
“뭐가요.”
“아버지랑 그래 가지고.”
그 말에 윤기를 쥐고 있던 손에서 힘이 조금 빠지고 말았다. 새 아빠. 그러니까 자신한테 다정하고 친절한 새 아빠는 민윤기만 보면 언행이 다소 거칠어졌다. 저 새끼 저거 언제 정신 차릴는지. 종종 한심하다는 듯 지민과 엄마 셋만 있을 때 윤기 이야기를 하는 새 아빠를 목격한 게 한 두 번이 아니다. 그때마다 지민은 부러 새 아빠에게 말을 걸어 화제를 돌렸다. 저 오늘 학교에서 반장으로 뽑혔어요. 오늘 담임 선생님한테 칭찬 받았어요. 그럼 껄껄 웃으며 잘 했다고 하는 새 아빠와, 방관만 하다 남편이 지민에게 관심을 주자 좋아하는 엄마 사이에서 지민은 속으로 생각했다. 진짜 윤기 형을 아는 건 나밖에 없어. 내가 막아줘야지.
어디로 가야 되지. 세상에 둘만 남은 기분이다. 망설이는 사이 손이 잡혀 이끌려 갔다. 공원이었다. 평소에도 자주 오는 지 윤기는 꽤나 익숙한 듯 보였다. 매번 독서실만 가던 지민은 처음 와보는 곳이었다. 매번 독서실 앞에서만 만났는데, 윤기가 이끄는 곳으로 오니 꼭 형의 공간에 초대 받은 것만 같았다. 살살 머리를 쓰다듬어 넘기는 봄바람마저 포근하다. 그 사실이 뭐라고 안정감이 든다. 벤치에 털썩 앉는 윤기를 졸졸 따랐다.
“뭐 하냐.”
“봐야 약을 바르죠.”
“아 눈 부셔.”
“가만히 좀 있어 봐요.”
지민은 플래시를 들이밀고 하얀 얼굴을 다시 제 손에 쥐었다. 손뿐만 아니라 눈썹 뼈도 도드라진 얼굴은 꽤나 예민하고 날카로워 보이는데, 제 손 안에서는 얌전하다. 터진 상처가 더욱 잘 보인다. 바로 연고를 짜서 손에 올리고 톡톡 건드렸다. 아. 작게 신음하는 모습을 보니 더욱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이제는 아예 대신 다치고 싶은 마음까지 든다. 내가 형 대신 맞았으면 좋았을 텐데. 지켜주기로 결심하고선 이게 뭐야 박지민.
속상함과 스스로에 대한 실망감에 저절로 입술이 삐죽거리며 튀어나왔다. 불빛을 끄고 터진 상처에 입김을 불었다. 다음부터는 진짜 내가 지켜줘야지. 거기서 형을 지켜줄 사람은 나뿐이야. 그렇게 다짐했을 때.
입술이 겹쳐졌다. 갈급하게 가르고 들어오는 혀에 지민은 입 벌리고 말았다. 앗아가는 숨, 얽히는 코끝. 기껏 정성스럽게 발라준 연고는 제 입에 비벼져 뭉개진다. 입술을 내어주면서 웃기게도 그 생각이 머릿속을 잠깐 스치고 지나갔다. 다시 상처 터질 텐데. 동시에 한 가지 사실을 인지했다.
첫 키스였다. 연고는 쓰고 떫고 맛이 없는데, 입안을 건드리는 형의 혀 느낌이 너무나도 자극적이라 어떤 맛도 느끼지 못했다. 세상에는 이런 것도 있었다. 공부하고 대학가는 게 전부가 아니라 이렇게 사람 둘이서 자극적인 것도 할 수 있었다. 고장 나듯 뇌가 멎는다.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이 윤기의 옷자락만 꾹 쥐었다. 늘상 입고 있는 그 검은 저지를.
봄바람은 연신 살랑거리며 지민의 앞머리를 가르고 지나갔다. 마침내 겹쳐진 입술이 떨어진다. 은색 실타래가 늘어진다. 첫 키스는 한 밤에 공원의 벤치에서 했다. 그런데 그게, 방금 제가 지켜주기로 결심한 호적상 형이라니. 뒤늦게 인지한 뇌가 비상신호를 보낸다.
나 지금 형이랑 뭐한 거지. 우린 형제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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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춘亂春 - 어지러운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