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방 만나게 될 거야. 지민은 보고 싶다고 보내놓은 영상 편지에 대한 답을 다음날이 되어서야 받았다. 어서 한국 갈게요! 저 오늘 무대 열심히 하고 올 테니까 기다려주세요. 그리 보내니 윤기는 문자 투표를 캡처해서 보냈다. 뉴위크. 지민이 포실포실 웃었다.
해외 특설무대는 어마어마한 규모에서 진행됐다. 뉴위크 스탠바이. 준비해주세요. 스태프의 구호에 지민이 마이크를 꼭 쥐었다. 타이틀의 도입부는 지민 담당이었다. 리듬이 나오고 수백 번, 아니 수천 번은 반복한 동작을 털어 넣었다. 다른 때보다 큰 규모의 관객석에서 환호하는 목소리들이 응원 구호를 외쳤다. 뉴위크! 뉴위크! 관객석에사 꽤나 큰 규모를 차지한 뉴위크의 응원봉들이 일제히 흔들린다.
하아, 하아. 엔딩 포즈로 지민이 커다란 하트를 보내는 시늉을 했다.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드니 비명소리 같은 함성소리들이 더 커진다.
“네, 뉴위크 분들의 멋진 무대까지 만나보았는데요.”
이어 MC들이 무대 중앙으로 올라온다. 이번 주 1위를 발표할 시간입니다. 소개에도 지민은 관객석에 있는 팬들에게 손을 흔들기 바빴다. 여기까지 와줘서 고마워요. 다른 멤버들도 마찬가지였다.
“1위는 뉴위크 분들입니다! 축하 드려요.”
폭죽이 펑 터진다. 진행자들이 트로피를 안겨준다. 멤버들이 어리둥절하게 서있다가, 입을 틀어막는다. 우, 우리요? 뉴위크? 트로피를 받은 의성이 먼저 입을 연다. 저, 저희가 이렇게 영광적인 수상을, 흐윽, 허어어, 허어엉. 지민도 마찬가지로 눈물을 꾹꾹 소매로 눌렀다. 말을 제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이 없는 그 무대에서, 정국이 마이크를 잡아챘다.
“뉴데이 여러부운! 우리 1등했어여! 다 여러분 덕분이에여! 1위 퍼포먼스로 물구나무 서기 할게여!”
읏차. 지민이 형도 시켜요? 알았어요. 제게 다가오는 정국을 보며 지민은 울면서 웃고 말았다. 꽃가루가 비처럼 내렸다.
***
광고 촬영은 근교의 스튜디오에서 진행됐다. 제품 런칭을 기념하여 아예 세트장을 따로 지었다고 했다. 지민은 사회성 넘치는 미소를 뿌려대며 감독과 스태프들에게 하나하나 인사했다. 잘 부탁 드리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뉴위크의 지민입니다! 어, 잘 왔어요. 반가워요. 몇 개월 연예계 생활을 꽤 해봤다고 그새 태가 났다.
지민은 촬영장을 누비며 이곳 저곳 둘러보았다. 꼭 무언가를 찾듯. 멤버들과 분리된 개인스케줄로 매니저 대신 같이 온 사장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왜. 뭐 찾아? 가져다 줄까? 담요?”
“그건 아니구 찾는 게 있긴 한데요.”
지민이 흘끔 주변 눈치를 본다. 그리고는 사장에게 달라붙어 귓속말로 속삭였다.
“부사장님은 안 오세요?”
“…응?”
“송영에서 하는 건데. 오실 수도 있지 않나 해서요.”
일개 광고 촬영에 부사장 직급의 사람이 오지 않는다는 건 지민도 안다. 그러나 지민은 윤기로부터 받은 문자가 있었다. 거기에 더해 음악방송 1위까지 했다. 귀국하자마자 잡혀있는 광고 촬영 스케줄에 윤기가 온다는 상상이 안 됐다면 거짓말이다.
사장은 말을 골랐다. 어음. 사실상 몇 주 전부터 아예 부사장 비서실과는 연결이 끊겨있었다. 사사건건 걸고 넘어지며 하나하나 체크 받더니, 이제는 스케줄만 받아갈 뿐이었다. 기대하는 지민의 눈동자에 그는 삐질 땀을 흘렸다. 그게 말이다.
“따로 온다는 그런 연락은 못 받았던 거 같다만, 중간에, 음, 오실 수도, 음…마음만은 지민이 너와 함께하고 싶으실 거다!”
“그래요? 어쩔 수 없네요. 진짜 사장님 말대루 함께면 좋겠어요.”
잔뜩 실망해서 시무룩해질 거란 예상과 달리 아주 멀쩡했다. 오히려 사장이 놀랐다.
“지민이 너 괜찮니? 안 오셔도?”
“네? 안 괜찮을 건 뭐예요.”
지민은 쿨하게 대답했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죠. 부사장님이 한가하신 분도 아니고. 그치만 괜찮아요. 아직 저한테는 기회가 많이 남아있거든요.”
한 달이라는 기간도 끝나지 않았으니 승산은 있었다. 지민은 실망하긴커녕 열정을 불태웠다.
“열심히 찍을 거예요.”
부사장님네 회사 제품이니까 최고로 잘 찍어야 돼요. 그럼 좋아하시겠지? 지민이 광고 역사에 길이길이 남을 광고로 만들겠다며 의지를 다졌다. 메이크업 스태프에게 찾아가 부탁한다. 저 오늘 최고로 예쁘게 해주세요. 빡세게! 사장은 열정이 넘치다 못해 불에 직접 뛰어든 소속사 아이돌을 보며 위안했다. 우리 아이, 언제나 긍정적이라 좋아요.
그때 스튜디오 안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메이크업을 받던 지민이 고개를 돌려보았다. 하도윤이 들어오고 있었다. 지민이 단숨에 활짝 웃으며 그를 반겼다.
“도윤이 형! 오랜만이에요.”
“잘 지냈어? 와 그 잠깐 사이에 더 슈파스타 됐던데? 1위 축하해. 형도 투표했어.”
“정말요? 감사해요. 형 덕분이에요.”
그리고 진짜 슈퍼스타는 형이잖아요. 지민이 쑥스럽게 웃었다. 하도윤은 생글생글거리며 아직 세팅이 안 된 지민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조만간 나보다 더 될 거 같은데? 우리 회사 직원도 지민이 너한테 싸인 받아달라고 하더라. 누가 봐도 지민을 귀여워하는 웃음을 흘리며 하도윤이 옆자리에 앉는다. 오늘 촬영 잘 부탁해. 저도요!
촬영은 빠르게 시작됐다. 촬영 시작할게요. 스태프의 알림에 지민과 도윤이 세트장 안으로 발을 들였다. 세트장은 요정들의 비타민 제작소 컨셉이었다. 피곤해하는 학생과 직장인을 구름 통신망으로 확인한 요정들이 비타민을 보내준다, 라는 다소 세기말 감성이었다. 이게 먹히겠냐며 수십 번 논쟁을 벌였었으나, 하얀 니트티와 반바지를 지민이 등장하자마자 스태프들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 비타민…!
이건 된다. 심지어 하도윤은 자타공인 연예계에서 내로라하는 미남이다. 안 어울릴 수가 없었다. 이번 모델 발탁은 무척이나 성공적이라고 그들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감독이 마이크에 대고 외쳤다.
“테스트 샷 한번 해볼게요.”
“네!”
내 방 속 작은 비타민의 요정! 지민이 제품을 얼굴 가까이 대며 활짝 웃는다. 레몬즙이 터지는 것만 같다. 하도윤 역시 능숙하게 척척 지시대로 동작을 표현했다. 카메라를 보며 만족의 미소를 짓던 감독이 이어 지시했다.
“혹시 친근하게 등 맞대고 웃어볼 수 있어요? 연구한다는 느낌으로.”
지민은 먼저 적극적으로 도윤에게 다가가 등을 붙였다. 키 차이가 꽤 나는 탓에 도윤이 혼자 껑충 뛰어있었다. 좀 낮춰줄까? 괜찮아요. 제가 까치발 하면 돼요! 지민이 열정적으로 까치발을 든다. 그에 촬영장에 밝은 웃음이 터진다. 정말 비타민 같았다. 그렇게 두 사람은 등을 대고, 이마를 맞대고, 율동 같은 춤을 추며 촬영을 했다. 누가 봐도 친밀해 보였으며, 현장은 단란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커엇.”
수고하셨습니다! 종료 사인에 지민이 활짝 웃었다. 결과물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이 정도면 부사장님도 좋아하시겠지? 무척이나 뿌듯했다. 윤기에게 보낼 모니터 사진을 몇 장 찍었다. 윤기 형. 오늘 광고 진짜 열심히 찍었어요. 메시지를 꾹꾹 누른 지민이 윤기의 칭찬을 기대하며 헤죽헤죽 웃고 있을 때였다.
“수고했어요, 요정님.”
하도윤이 장난스럽게 다가왔다. 지민이 냉큼 폰을 숨기듯 내렸다. 아. 선배님, 깜짝 놀랐어요.
“요정 선배님도요. 비타민 배합 정말 잘하시던데요?”
“그래서 내가 폭탄주도 잘 타나 보다.”
“저 그때 먹고 죽을 뻔 했던 그거….”
그건 잘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아요. 지민이 그 날을 떠올리며 좋지 않은 안색으로 말했다. 도윤은 가볍게 웃었다. 그게 그렇게 썼나. 그런 거 치곤 잘 받아 마시던데. 그는 몇 마디 간단한 농담을 던지더니, 슬쩍 운을 뗐다.
“서울 바로 올라가야 되는 일정 아니면 같이 밥 먹고 갈래?”
“어…오늘 저녁요?”
“형이 맛있는 걸로 사줄게. 돈도 벌었잖아. 광고 찍어서.”
지민은 잠시 고민했다. 일정도 없었으며,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그러나 도윤을 싫어하던 윤기의 얼굴이 모락모락 피어 오른다. 그딴 새끼한테 널 주겠니. 그렇게 말했었다. 하지만 광고를 같이 찍게 했다면…친해지라는 걸까. 아리송하다. 고심하며 지민이 선뜻 답을 하지 못하고 있으니, 도윤이 은근슬쩍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을 얹는다.
“식사하면서 다음에 같이 작업할 컨텐츠도 상의해보면 좋을 거 같던데.”
“컨텐츠요?”
“이렇게 광고까지 찍은 거 보면 사람들이 우리 조합에 흥미가 많아 보이지 않아?”
물 들어올 때 노 저어야지. 도윤이 덧붙였다. 원체 타인의 스킨십에 익숙한 지민은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심지어 이미 안무를 맞춰볼 때 이 정도 스킨십은 원만하게 오고 갔었다. 컨텐츠 회의라면 괜찮을 것도 같다. 지민이 고개를 끄덕이려는 찰나.
“왜 이렇게 안 나오나 했더니.”
익숙한 저음이 들려온다. 지민이 화들짝 놀라 그곳을 쳐다보았다. 도윤도 목소리의 근원지를 찾았다. 둘 다 놀란 표정이었다. 곧이어 한쪽은 표정이 와그작 구겨지고 말았다. 지민이 놀라 그를 불렀다.
“윤기 형? 어떻게….”
도윤이 지민을 돌아보았다. 윤기 형? 그새 호칭이 바뀌어있었다. 윤기는 성큼성큼 그들의 앞으로 다가왔다.
“내가 못 올 곳이라도 왔니.”
윤기의 시선이 지민의 어깨에 올려진 손에 잠시 닿는다. 그는 도윤에게 악수를 청했다.
“촬영 수고하셨습니다. 애써주신 덕분에 좋은 결과물이 나온 것 같네요.”
“…아, 별 말씀을요. 오히려 모델로 맡겨주셔서 저야말로 영광입니다.”
도윤이 지민의 어깨에서 손을 떼고 악수했다. 윤기는 유연하게 대화하며 자연스럽게 지민의 옆에 당도했다. 마치 그들의 사이를 파고들 듯. 앞으로도 잘 부탁 드립니다. 좋은 인연이 계속 이어졌으면 좋겠군요. 예, 저도 잘 부탁 드립니다. 도윤은 광고주에게 싹싹한 연예인 버전으로 예의상 미소를 한 가득 걸고 있었으나, 속으로 그를 눈치챘다. 아니나다를까 윤기가 자리를 정리했다.
“피곤하실 텐데 이만 가보시죠. 서울까지 돌아가려면 시간이 꽤 걸리실 텐데.”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도윤도 지지 않았다. 그는 웃으면서 지민에게 다시 손을 뻗었다.
”갈까?”
윤기는 그를 물끄러미 본다. 윤기가 무어라 말하기 전, 도윤이 선수를 쳤다.
“아, 저녁식사를 같이 하기로 했습니다. 시간도 늦었고 서울까지 올라가면 늦으니까.”
몇 남지 않은 스태프들이 그들을 흘끔거리다 대기실을 빠져나간다. 기묘한 기류가 흘렀다. 당사자만이 알 수 있을 만큼 아주 미묘했다.
“…아.”
윤기 역시 예의상 걸친 미소를 유지했다. 도윤의 같잖은 도발이 어이가 없었다. 눈에 훤히 보이는 수다. 그러나 더욱 황당한 건 뻔히 알면서도 불쾌하게 긁히는 제 기분이었다. 윤기는 생각했다. 지민이 알고 슬퍼하건 말건, 하도윤을 아예 재기불능으로 진창에 처박아놨어야 했나. 그는 벌써 오늘만 두 번째 이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촬영 중간 지민이 하도윤과 친밀하게 바짝 붙은 모습을 봤을 때가 첫 번째였다.
그때, 지민이 미묘한 흐름을 깼다. 혼자 해맑게 몰랐다. 윤기가 들어온 이후부터 윤기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던 지민이 그제야 도윤과 마주한다.
“도윤이 형 죄송해요. 생각해보니까 저 스케줄이 있어서요. 오늘 저녁 식사는 힘들 것 같아요.”
“…그래?”
“다음에 따로 연락 드릴게요. 오늘 너무 감사했습니다.”
지민이 꾸벅 인사했다. 이어진 시선은 다시금 윤기에게 향해 있었다. 윤기만을 보는 눈동자에 생기가 돈다.
“부사장님도 와주셔서 감사해요.”
수고하셨습니다! 다음에 뵐게요. 지민이 생긋 눈을 휘었다. 이후 기쁜 일이 일어날 것을 아는 사람처럼.
지민은 당연한 것처럼 차에서 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윤기 형! 그가 근처에 오자마자 지민이 깡총 뛰어내리며 반긴다. 사장은 허리를 꾸벅 접으며 인사했다. 예예, 오랜만입니다. 부사장님. 지민이 예의 바른 사장에 덩달아 앗, 하더니 눈을 굴리며 아닌 척 호칭을 정정했다. 아니, 부사장님….
윤기는 바로 알아차렸다. 다 들켰네, 박지민. 그런데 당당한 폼을 보아하니 혼자만 동네방네 짝사랑 들켰다는 걸 눈치 못 챈 듯하다. 그게 너무 박지민다워서 윤기는 달싹이는 입꼬리를 내리누르기 위해 입술을 물었다. 조금 전 느낀 불쾌한 기분은 사라져있었다.
“사장님 먼저 서울 돌아가셔도 돼요! 저는 부사장님이랑 같이 올라갈게요.”
“…으응?”
사장이 지민과 윤기를 휙휙 번갈아 보았다. 무표정한 송영의 재벌 부사장과 방긋 웃고 있는 제 소속사 아이돌. 그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랴. 사장은 허허 웃으며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을 했다.
“그래…다녀오렴. 저…우리 지민이 잘 부탁 드리겠습니다….”
“걱정 마시고 올라가세요.”
윤기는 지민을 보며 말했다.
“무사히 돌려보낼 테니까요.”
지민이 사장에게 인사했다. 조심운전 하세요 사장님. 일찍 돌아갈게요! 그 짧은 인사 뒤, 그들은 값비싼 외제차가 주차되어있는 곳을 향했다. 사장은 자식 독립시키는 어미 새처럼 아련하게 뒷모습을 바라 보았다. 행복만 해다오…내 새끼.
시원하게 뚫린 도로는 한적했다. 지민은 윤기의 옆자리에 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어떻게 오셨어요? 저 보러 오신 거예요? 안 오신 줄 알았는데 어디 계셨던 거예요? 저 찍는 것도 보셨어요? 엄청 열심히 했는데!”
“하나씩 말해줄래.”
“저 좋아해요?”
윤기가 지민을 훽 돌아본다. 지민이 냉큼 뻔뻔하게 웃으며 아무 말도 아닌 척 앞을 가리켰다. 조심해야죠. 어서 앞에 보세요. 차 오잖아요. 윤기는 무어라 말 하려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다른 말이나 하는 게 전부였다.
“…먹고 싶은 거나 말해.”
“윤기 형이 오니까 너무 좋아요. 깜짝 선물 받은 기분이에요. 형은 존재 자체가 저한테 선물인가 봐요.”
지민은 헤실헤실 웃었다. 윤기가 침묵한다. 이제는 이 침묵도 익숙해서, 지민은 상관하지 않고 폰을 뒤적거렸다. 여기서 먹을만한 곳이 어디 있을까요. 윤기 형은 뭐 먹고 싶어요?
그러나 지민의 바람대로 행복한 데이트는 이어질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근교 근처 식당이 죄다 문을 닫은 탓이었다. 영업 종료, 영업 종료. 붉은 글씨로 정보 표기된 식당만 수십 군데 발견한 지민이 울상을 지었다.
“시간이 그렇게 늦은 것도 아닌데….”
“어쩔 수 없지.”
윤기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배고플 텐데 바로 서울 가지.”
“그치만….”
지민이 아쉬움이 뚝뚝 흘러내리는 말투로 말했다.
“이렇게 헤어지기 아쉬워요. 더 같이 있고 싶은데….”
“뭐 차 타고 가는 동안 같이 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서울 가서 같이 밥 먹어도 되고. 늦겠지만.”
“…….”
“길바닥에서 풀을 뜯어먹을 순 없잖아.”
네가 아무리 다이어트한다고 해도 그건 안돼. 윤기는 안 그래도 마른 지민의 몸을 떠올렸다. 촬영에, 혹독한 컴백 스케줄에 식사를 거를 때가 많았을 거다. 그러나 지민은 영 윤기의 답변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곳이 사람이 많지 않아 마음에 들었다. 서울로 가면 식당을 간다고 해 봤자 룸일 터다. 평범한 데이트는 될 수 없었다.
그 때 마침 지민의 눈에 도로 표지판이 들어왔다. 생태공원. 호수 산책길. 순간 지민의 눈이 반짝 빛난다.
“식사 말고 다른 건 어때요?”
“뭐.”
“저거요.”
지민이 표지판을 가리켰다. 혹시나 싶어 바로 덧붙인다. 가서 바로 밥 먹을게요. 윤기는 실내등 조명을 받는 지민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했다. 꼭이야. 핸들 방향이 지민이 원하는 곳을 향해 꺾인다.
호수는 꽤나 컸다. 밤이 어둑해서인지, 둘레길은 텅 비어있었다. 가로등 몇 개만이 불을 밝혔다. 바람은 적당히 차가웠다.
“안 춥니.”
“네! 너무 좋아요.”
지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형, 이거 보세요. 오히려 도착하니 지민은 윤기보다도 주변을 살피느라 바빴다. 물고기가 있는 것 같은데. 컴컴해서 잘 안 보이는 것 같아요. 바쁜 스케줄로 몇 달을 도심에서만 살았더니, 이런 여유를 즐길 시간이 없던 탓이었다. 해외스케줄로 다녀온 바다에서는 물고기가 다 보였었어요. 지민이 여러 가지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윤기는 중간중간 추임새를 넣었다. 거기 바다는 염도가 높아. 대부분 백과사전 같은 말들이었다.
“아! 형 저 촬영한 거 봤어요? 어땠어요? 마음에 들어요?”
지민이 윤기의 곁에 붙어 섰다. 꼭 스스로를 가리키며 묻는 것 같았다. 저 마음에 들어요? 윤기는 크흠, 헛기침을 하며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진 않았어.”
“다행이다! 그래도 다음에는 더 열심히 찍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도윤이 형이랑 율동도 맞춰오구 할게요.”
“그 놈이랑?”
윤기의 미간이 굳는다. 대체 왜.
“당연히 같이 화면에 나오니까죠. 안 그래도 아까 감독님이 친근하게 하라고 했는데 제가 연기를 너무 못해서…더 친밀하게 붙었어야 했는데.”
“그 정도면 충분하니까 다신 하지마. 광고 컨셉 바꾸라고 할 거야.”
“왜요? 컨셉 다 좋았다고 했는데…광고 잘 나와야죠!”
“안 나와도 돼.”
“…이거 형 회사 꺼예요. 까먹은 거 아니죠?”
윤기는 잠시 생각하듯 말이 없었다. 정말 컨셉을 바꿔버려도 괜찮을 것 같다. 이왕이면 박지민 혼자 찍는 걸로. 지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네. 형이 생각한 거 아니에요?”
“내가 이딴 걸 왜 해.”
“…윤기 형이 저 꽂아준 거 아니었어요?”
“꽂긴 뭘 꽂아. 그런 말 어디서 배웠어.”
윤기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내가 했으면 제 정신으로 그 놈이랑 같이 찍게 했겠니.”
지민이 멍하니 입술을 벌렸다. 진짜요? 못 믿는 지민에 윤기는 부연설명을 추가했다.
“그날 이후로 관여한 적 없어.”
“그 날요?”
“네가 한 달만 만나자고 한 날.”
윤기는 그날 이후 지민과 관련한 일에선 손을 뗐다. 스폰 뛰러 온 거예요. 저 그렇게 깨끗한 애 아니에요, 바락바락 외치던 지민을 본 이후 많은 생각을 했다. 게다가 훤히 보였다. 어떻게든 도움 받고 싶지 않아 악착같이 노력하는 지민의 뜻이 보였다. 그는 못 박듯 말했다.
“다 네가 네 힘으로 한 거야.”
“…….”
“광고 따낸 것도, 1등한 것도.”
“…….”
“수고했어.”
기특하네. 덧붙이며 윤기는 지민의 어깨를 툭툭 쓰다듬어주었다. 지민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입만 뻐끔거렸다. 다 내가…. 가슴이 쿵쿵 벅차게 뛴다. 감격에 젖어있는 지민을 귀엽다는 듯 구경하던 윤기가 툭 말했다.
“그래서 소원은 뭐 할 거야. 1위하면 하나 들어준다고 했잖아.”
“아! 그거! 어, 그게….”
난감하다. 소원으로 빌려던 것은 그거였다. 저한테 더 이상 스폰 해주지 마세요. 그런데 이미 윤기가 손을 뗐다고 하니, 그 소원은 삭제됐다. 지민이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렸다.
“안 정해놨어?”
“이, 있었는데요. 그게, 방금 바뀌었어요.”
“없음 말고.”
“아니에요! 있어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제 소원은요. 뭐냐면, 어….”
지민이 흘끔 윤기를 본다. 윤기는 언제든 말하라는 듯 차분히 기다려주고 있었다. 가로등 불빛이 쏟아지는 가운데, 풀벌레 소리만 이따금 울린다. 지민은 주저하다가, 말했다.
“저 정말 아무거나 해도 돼요?”
“뭐든.”
윤기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인다. 머뭇거리던 지민이 이내 용기를 얻었는지 대뜸 윤기의 손을 꽉 쥔다.
“제 소원은 이거예요.”
“…손 잡는 거?”
“아직 안 끝났어요.”
얽힌 손에 지민이 힘을 꼭 준다. 커다란 윤기의 손에 비해 작은 지민의 손은 가려지는 듯했다. 지민은 그 채로 조금은 쑥스럽게, 하지만 대담하게 말했다.
“윤기 형이 저랑 있을 때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
“그래서 오래오래 같이 함께 있고 싶어요.”
지민이 붙잡은 윤기의 손등에 입술을 꾹 누른다. 쪽 맞닿았다 떨어지는 감각이 말랑하다. 중세시절 기사가 하는 맹세 같았다. 지민은 눈가를 접으며 웃었다. 세상에서 가장 애정을 담은, 무해한 웃음이었다. 그런데 윤기는 그대로 손을 내준 채,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윤기 형?”
“…….”
“어…왜 그렇게 봐요.”
뚫어져라 보는 시선에 샐샐 웃던 지민의 표정도 불안이 서린다. 설마 스킨십은 아예 안 되는 거였나. 손등에 하는 키스는 정도는 괜찮지 않나.
“아, 아무거나 해도 된다고 하셨는데….”
"…….”
“…이건 예외인가….”
지민이 윤기의 눈치를 봤다. 윤기 형은 보수적이구나. 이건 존중할 필요가 있지. 성희롱을 할 순 없어. 기가 죽은 지민은 입술을 삐죽거리더니, 사과를 했다. 죄송해요.
“…1위했다고 신나서 그랬나 봐요. 다시는 이런 거 안 할게요.”
지민이 윤기의 손에서 제 손을 빼내던 그 순간. 윤기의 손에 힘이 들어가 지민을 쥔다. 그는 그대로 지민을 당겨 입술을 맞물렸다. 으응? 지민의 눈이 더할 나위 없이 확장된다. 지민이 당황하여 윤기를 밀어냈다. 놀란 지민에게 윤기는 다시금 한 발작 다가왔다. 벌어진 틈이 좁아진다.
“네가 맞는 거 같아.”
지민은 넋 나간 사람처럼 윤기를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사랑.”
이렇게 가슴이 따뜻하게 충만해지는 건. 지민이 쏟아 내린 애정에 흠뻑 젖어 든다. 더는 걷잡을 수 없는 충동이 그의 안에 일어났다. 윤기는 지민의 뺨을 다정히 붙잡았다. 천천히 다가가, 다시금 입술을 맞댔다.
지민이 움찔 떨었다. 나무토막같이 굳어있던 몸은 어찌할 줄을 모른다. 허둥거리는 지민을 붙잡고 윤기는 부드럽게 입맞춤했다. 무척이나 조심스럽고 정중했다. 마침내 지민의 눈꺼풀 역시 스르륵 감긴다. 지민은 윤기의 옷자락을 꾹 쥐며 호응했다.
쿵쿵 가슴이 뛰었다. 이번에는 또 다른 감정 때문이었다. 사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