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 It Ain't Necessarily So>
“수고하셨습니다!”
지민은 빵긋 웃으며 인사했다. 공중파 관찰형 예능 프로 엠씨들이 지민에게 칭찬세례를 퍼부었다. 이렇게 착하고 귀여운데 잘돼서 너무 보기 좋네. 다음에도 또 와요. 자식처럼 대해주는 그들에게 지민은 눈가를 반짝 휘는 눈웃음을 보여주었다. 팬들이 볼 때마다 귀엽다며 죽어가는 미소였다. 컴백하면 또 올게요!
성공적으로 첫 공중파 예능을 마친 지민은 뿌듯하게 대기실로 돌아왔다. 재미있게 찍힌 것 같았다. 정국이 운동한다며 물구나무를 서고, 의성이 중고마켓으로 생활용품을 네고하며 팔고 사고, 하준이 고장 난 음악장비를 때려부술 듯 펑펑 치는 모습이 방영됐다. 온갖 연예인들을 다 만나본 피디도 칭찬해주었다. 이런 아이돌은 난생 처음 보네요. 시청률 잘 나오겠는데? 이담과 요리를 한다며 숙소의 냄비를 태워 먹은 장면을 찍은 지민은 해맑게 기뻐했다. 그럼 잘 됐네요!
퇴근을 앞둔 시간. 폰을 꺼내려던 지민이 슬쩍 눈치를 보며 매니저에게 말했다.
“형! 저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어어, 그래. 빨리 다녀와. 형 짐 챙기고 있을게.”
네! 힘차게 답한 지민이 대기실을 떠났다. 그리고 향했다. 화장실이 아닌 비상계단 복도로. 벌써부터 기대감으로 지민의 광대가 봉긋 올라와 있었다. 왔나? 왔을까? 지민은 바로 작은 메시지 창을 열었다.
[촬영 잘해라]
예의상 남긴 것만 같은, 직설적으로는 성의 없어 보이는 답장에도 지민은 방싯방싯 웃었다. 그리고는 우다다 메시지를 날렸다.
[덕분에 잘했어요! 다들 다음에 또 오라고 해주시고 엄청 친절하셨어요. 예능 촬영도 재미있는 거 같아요.]
마지막으로 셀카까지 찍어 보냈다. 손 하트. 브이.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찍은 여러 장의 사진 중에서 가장 잘나온 것으로 골랐다. 전송 완료. 지민은 뿌듯하게 대화 창을 올려보았다.
박지민과 민윤기의 대화창은 늘 이런 패턴이었다. 지민은 틈만 나면 윤기에게 연락을 보냈다. 중간중간 찍은 깜찍한 사진과 함께. 야외스케줄을 하면 예쁜 하늘과 꽃을 찍어 보냈고, 실내 스케줄을 하면 자신의 사진을 찍어 보냈다. 흡사 소식 알림을 빙자한 일기장이었다. 이 젤리 너무 귀엽지않아요? 부사장님 닮았어요! 오늘 하늘 너무너무 예뻐요. 부사장님 같아요! 오늘 스케줄 너무 잘했어요. 부사장님 덕분이에요! 기승전민윤기로 끝나는 채팅창에 신기하게도 민윤기는 꼬박꼬박 답장을 해주었다. 나보단 말랑말랑한 게 오히려 너 닮았는데.
“아무리 사람 없는 곳이라고 해도 아이돌은 긴장 늦추면 안 되는데.”
“으악!”
지민이 비명을 질렀다. 뜬금없는 미성의 목소리는 위층 계단 쪽에서 튀어나왔다. 누, 누, 누구세요? 덜덜 떨면서 올려다보니 잘생긴 얼굴이 지민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남자가 손을 흔들었다.
“안녕.”
부리 같은 입술이 놀라 떡 벌어진다. 지민의 부리 같은 입술이 멍하니 벌어졌다. 풀메이크업이 되어있는 얼굴은 요새 연예계에서 가장 값비쌌다. 아이돌 솔로 데뷔 최초로 음원 대상을 휩쓸고, 최근 스크린에 진출해 신인 남배우 상까지 쓸어 담은 아이돌.
“하, 하도윤…?”
“와 엄청 오랜만에 본명 들어보네요. 후배 분이 이름 불러주는 건 또 처음이라 기쁜데.”
아. 지민의 얼굴이 시퍼래진다. 죄, 죄송합니다, 선배님! 제가 너무 놀라서 그만 실수를 하고 말았어요. 냅다 허리를 꺾어 인사했다. 이마가 땅에 박을 기세였다.
“아 뭐 사과 받자고 한 건 아니었어요. 그냥 진짜 반가워서 그런 건데. 고개 들어요.”
다정하고 부드러운 어조였다. 하도윤이 천천히 걸어 지민의 앞으로 다가와 섰다. 걸음걸이 하나도 모델 같았다. 지민이 살그머니 박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사람 좋은 미소가 주먹처럼 작은 얼굴에 걸려있었다. 요새 광고만 봤다 하면 나오는 미소다.
지민이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스태프며, 같이 일한 동료 연예인이며 수없이 쏟아져 나오던 연예계의 소문이 기억 났다. 하도윤은 날개 없는 천사다. 그 소문이 진짜인가 보다. 한때 그의 영상을 보며 연습생 시절 가슴이 두근거렸었다. 잊고 있던 팬심이 꿈틀거리는 순간이다.
“만나 보고 싶었었는데 지민씨를 방송도 아니고 이런 곳에서 보네요. 사람 인생 진짜 모른다니까.”
그거야말로 지민이 하고 싶은 말이었다. 요새 최고 주가를 달리는 연예인을 비상계단에서나 만나고. 지민은 도윤의 말을 짚다 문득 이상한 점을 알아차렸다. 도윤이 제 이름을 알고 있었다. 선배님께서 절 어떻게…? 동그래진 눈에 도윤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왜 놀라요. 연예인 오늘 처음 한 거처럼.”
거의 처음 맞다. 무명 속에 파묻혀있다 나온 지 아직 몇 개월도 되지 않았다. 지민이 황급히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너무 영광입니다. 선배님! 선배님처럼 대단하신 분이 절 아신다니 너무 놀랐어요.”
“메이크 콘서트 직캠도 3번이나 봤는데, 나.”
지민이 입을 떡 벌렸다. 메이크 콘서트 직캠은 컴백 이후 날개 돋친 듯 조회수를 불려갔다. 어머니와 아버지한테서도 우리 아들 잘하네, 연락을 받게 만든 영상이었다. 그 조회수 안에 하도윤이 포함되어 있으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지민이 또 머리를 박았다. 여, 영광입니다! 하도윤이 뺨을 긁적였다.
“후배님 아깐 우유 같았는데 지금은 나무토막 됐네.”
“…네? 우유요?”
“아니에요.”
하도윤이 생긋 웃었다.
“그런데 조심해요. 연예계 선배로서 알량한 충고 하나 하자면 이런 구석진 곳도 지켜보는 눈이 많아요. 애인이랑 죽고 못사는 때에도 긴장을 늦추면 안돼요. 훅 가는 건 한 순간이니까.”
“애인….”
애인? 나? 느리게 말뜻을 이해한 지민이 하도윤을 봤을 때보다 더 크게 놀라 펄쩍 뛰었다. 애인이라니. 허둥지둥 손까지 허공에 저어가며 필사적으로 뺙뺙 부정했다.
“아니에요! 절대 아니에요, 그런 거.”
“…애인 아니라고?”
“네, 정말로! 그런 거 아니고 그냥 아는 사람이랑 연락하는 거였어요.”
지민이 진심이라는 눈빛을 보냈다. 절대 애인 아니에요. 그런 거 없어요. 하도윤이 의아한 얼굴을 했다. 그게 사랑에 빠진 얼굴이 아니면 뭐가 사랑이지? 그러나 하얗게 질리기까지 해서 부정하는 모습을 보면 진짜 같다.
“진짜예요, 선배님….”
“그래요?”
“네!”
하도윤이 눈을 가늘게 뜨더니 픽 웃었다. 그렇게까지 숨기고 싶어하니 넘어가주겠다는 듯했다. 지민씨가 그렇다면야.
“이렇게 얼굴도 텄으니 다음부터는 만날 때마다 친하게 인사해요, 우리.”
“앞으로 잘 부탁 드리겠습니다! 너무 영광입니다!”
“그래요. 나도 잘 부탁해요.”
꼭 잘 지내봐요. 도윤이 지민에게 손을 뻗어 악수를 청했다.
***
예상치 못한 만남은 새로운 난관을 선사해주었다. 하도윤이 언급한 한 단어 때문이다. 연애? 내가? 부사장님이랑? 작은 조약돌은 가끔 큰 파장을 불러일으킨다. 그 한 단어는 지민의 머릿속을 떠나지 못하고 뱅뱅 맴돌았다. 원래도 민윤기 관련 생각밖에 안 하던 박지민의 머릿속은 더욱 민윤기로 가득 차버렸다. 나란히 손 잡고 걷는 민윤기와 박지민. 하루 종일 시간을 보내는 민윤기와 박지민. 서로를 애틋한 눈빛으로 바라보다, 침대에 같이 눕는…. 지민이 황급히 머리를 휘휘 저어 털어냈다. 귀끝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미쳤어, 미쳤어!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망상은 지민의 양심을 괴롭혔다.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부사장님을 상대로 내가! 심지어 처음 만났을 때도 그런 생각하지 말라며 엄포를 놓았던 그가 아닌가. 덕분에 시도 때도 없이 윤기에게 연락하던 손놀림에도 제동이 걸렸다. 메시지를 보내려다가도 움찔거렸다. 정말 이게 사랑인가…? 올망졸망한 이목구비가 울상을 지었다. 설마 욕정은 아니겠지? 어렸을 적에도 몇 번 찾아오지 않던 몽정이 지금 일어나는 건가?
지민은 부정했다. 하하하. 에이, 설마. 이건 존경이다. 어른을 향한 존경. 닮고 싶은 사람에 대한 동경. 지민이 감정의 홍수 속에서 방황했다. 그 사이 자연스럽게 윤기에게 매일같이 쏟아지던 지민의 셀카와 얼렁뚱땅한 메시지들이 줄어들었다. 생각을 삭제하듯 미친 듯이 속도를 올려 런닝머신을 뛰었다. 지민의 폰이 징 울렸다.
[전화해.]
메시지를 보자마자 폰을 쥔 지민의 손이 움찔 떨렸다. 동시에 심장이 쿵 떨어졌다. 윤기가 메시지를 먼저 보낸 적은 손에 꼽는다. 급하게 하실 말이 있는 건가? 무슨 일이 있는 건가? 지민이 멤버들을 흘끔 바라보았다. 운동을 하면서 오늘 저녁은 닭도리탕이냐, 된장찌개냐에 대해 논쟁을 펼치고 있었다.
“저 잠시만 나갔다 올게요.”
그들은 지민이 사라지건 말건 관심도 없어 보였다. 닭다리! 외치는 정국의 뒤로 이담만이 입구로 부랴부랴 사라지는 지민을 흘끔 봤을 뿐이다.
신발까지 대충 구겨 신은 지민은 체육관 구석에 도착하자마자 급히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인사가 채 끝나기도 전에 지민이 외쳤다.
“부사장님! 괜찮아요? 무슨 일 있어요?”
[…그건 내가 해야 할 말인데?]
낮은 음성이 바람 빠지듯 옅게 웃었다.
“네?”
[목소리 보니까 멀쩡한가 보네.]
“멀쩡…아니, 부사장님 괜찮은 거 맞아요? 괜찮으신 거 맞죠?”
[안 괜찮을 게 뭐가 있어 내가.]
“전화하라고 한 적이 단 한번도 없었잖아요. 정말 놀랐어요. 혹시 누가 괴롭혔나하구요.”
[대체 그런 발상은 어디서 하는 거야.]
윤기가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 괴롭힘을 당하는 게 아니라, 누군가를 괴롭힌 건 아니냐는 질문을 받아도 모자라다. 그러나 박지민은 진심이었다. 괜찮은 거 맞죠? 맞아. 몇 번이나 안부를 더 묻고서야 다행이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너 지금 연습 시간 아니야? 전화는 어떻게 했어.]
“어? 어떻게 스케줄을 알고 계세요?
[미안한데 나 네 스폰서야.]
지민의 개인정보쯤이야 윤기의 손바닥 위에서 놀고 있었다. 박지민은 종종 그 사실을 까먹고는 했다. 민윤기의 말이라면 뭐든 믿는 박지민은 개인정보유출 걱정 대신 태평하게 납득했다. 아 맞다!
“선생님께서 몸이 조금 안 좋다고 하셔서요. 여기 멤버들이랑 운동하러 왔어요.”
[그렇군.]
윤기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더니 짧은 침묵 뒤 대뜸 엔딩 멘트를 던졌다.
[별 일 없으면 됐어. 이만 끊는다. 가서 운동해.]
“…벌써요? 방금 전화했는데요? 하실 말씀 있어서 전화하신 거 아니에요?”
지민이 저도 모르게 윤기를 붙잡았다. 목소리가 조금 더 듣고 싶었다.
[할 말? 이제 더 없어. 종일 시끄럽던 네가 조용하길래 해본 거야.]
“아….”
[왜. 넌 뭐 있어?]
할 말. 지민은 방금 전까지 머릿속을 휩쓸었던 감정 문제를 상기했다. 당신의 얼굴이 동동 떠다니고 자꾸만 손끝이 떨렸어요. 목소리만 들어도 얼굴이 보고 싶어져요. 차마 그 말을 입에 담을 수는 없었다. 예전 같으면 수없이 보냈을 보고 싶어요, 언제 만나요, 그런 물음들이 지금은 어째서인지 벅찼다.
작은 침묵이 그들의 전화에 머문다. 지민은 아무렇지 않게 다시금 입을 뗐다.
“아뇨! 저도 없는 것 같아요. 그래도 부사장님 목소리 들으니까 좋아서요…종종 이렇게 전화했으면 좋겠어요.”
[…그래?]
“네.”
비상이다. 잠깐 윤기의 걱정으로 잊고 있던 문제가 떠오르니, 심장이 콩콩 가렵기 시작한다. 지민은 급히 전화를 끓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덕분에 윤기의 어조가 미묘하게 달라진 건 눈치채지 못했다.
“부사장님 좋은 하루 보내세요!”
이미 저녁이 가까운 시간이었지만 지민은 후다닥 전화를 마무리했다. 아까 런닝머신을 너무 급하게 뛰었나 봐. 그래서 그런 거다. 생각하며 가슴팍을 진정시켰다. 알쏭달쏭한 감정의 늪은 한층 더 깊이 지민을 집어삼켰다. 소년은 감정의 성장통 한 가운데를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
지민은 새로운 스케줄을 맞이했다. 단발성 이벤트로 기업에서 진행하는 화보집이 스케줄러에 등장했다. 수익금은 전액기부. 좋은 취지로 사회봉사활동이나 마찬가지였다. 출연료는 없는데. 할래? 매니저의 물음에 뉴위크 멤버들은 당연한 소리를 한다며 열정적으로 찬성했다. 같이 기부를 해도 모자랄 판에 출연료를 왜 받아요.
뉴위크는 당당히 한 파트를 차지했다. 멤버별 개인촬영과 단체촬영. 이미 단체촬영은 끝이 났고, 멤버들은 각자의 컨셉을 받아 개인촬영은 진행했다. 지민씨는 어떻게 할래요? 촬영하는 쪽에선 기부로 진행되는 만큼 아티스트의 의견을 존중한다고 했다. 사회적으로 기부되는 거면. 누구나 쉽게 좋아하는 것,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것. 지민은 조심스럽게 의견을 제시했다. 꽃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지민은 멤버들 중 마지막으로 개인촬영을 진행했다. 이미 다 찍고 간 멤버들로부터 후기를 들어 조금 긴장되었다. 감독님 성격이 조금 개 같아. 잘 찍긴 하시는데. 하나같이 수척해진 얼굴로 들어와 쥐어짜졌다며 멤버들이 하소연을 했었다. 결과물이 좋으면 괜찮아요. 지민은 걱정하는 멤버들을 안심시켰다. 그런 취급 한두 번 당해본 것도 아니니까. 무명연예인의 설움에 비하면 그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안녕하세요! 잘 부탁 드리겠습니다!”
“어어, 안녕하세요. 지민씨는 마지막이라 오랜만에 만나는 것 같네요.”
디렉터가 다가와 인사했다. 몇 차례의 안부인사를 나눈 뒤 그가 자랑스레 말했다.
“세트장 어때요. 우리 스태프들이 열심히 준비했어요.”
지민의 작은 의견은 화보의 메인 테마가 되었다. 꽃밭이 발 디딜 틈도 없이 바닥을 채우고 있음은 물론, 세트장에는 중간중간 구름모양의 솜이 떠있었다. 꽃과 별이 뒤엉켜있는 세트장은 요정이 사는 숲 같았다. 와아. 너무너무 예뻐요.
“어떻게 이렇게 다 준비하셨어요?”
“어떻게 준비하긴. 회사 쪽에서 예산 넉넉하게 준 덕분이지, 뭐. 찍을 맛 나겠어.”
감독이 이렇게 아낌없는 지원은 처음 본다고 했다. 지민도 동의했다. 정말 찍을 맛 나는 세트장이다. 최선을 다해야지. 최고 매출 화보를 향해. 지민이 결심했다. 스태프가 지민에게 다가왔다. 대기실은 이쪽입니다.
지민이 대기실에 도착하자마자, 스탭들이 사방에서 달라붙었다. 그들의 손에 몸을 맡기며 눈을 감고 심호흡했다. 오늘만큼은 완벽하게 그간의 혼란을 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잘 때도, 밥 먹을 때도, 차를 타고 이동할 때도 쉴새 없이 지민을 괴롭히던 민윤기를 잊어낼 수 있을 듯 했다. 일에 완전히 집중하는 거야.
잠시 뒤 스탭들의 손에서 지민은 다시 태어났다. 인간에서 요정으로. 시스루 스타일의 하얀 옷은 지민의 얇은 몸을 고스란히 비추고 있었다. 은색 체인과 보석으로 의상을 장식해놓으니 없던 요정 날개까지 보이는 듯했다. 다 됐습니다. 스탭의 말에 지민이 일어나 거울로 제 모습을 확인했다. 마음에 들긴 하는데 뭔가 아쉽다.
“음….”
도륵도륵 눈을 굴리던 지민은 대기실 한 켠에 놓인 화관을 발견했다. 이걸 한번 써볼까? 세팅한 머리에 조심스럽게 얹는데 집중했다. 그 사이, 대기실 바깥이 조금 소란스럽게 변했다. 거울에 집중한 지민은 신경 쓰지 않았다. 으레 촬영 시간이 가까워오면 소란스러워지고는 했으니까. 스태프들이 준비를 하고 있는 모양이다.
푸른색과 하얀색 꽃으로 장식된 화관은 생각보다 예쁘게 쓰기 어려웠다. 스타일리스트에게 해달라고 부탁하는 대신 낑낑거리며 마침내 화관을 얹었다. 됐다! 지민이 활짝 웃어 보였다. 스태프들이 있을 대기실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때요?”
괜찮아요? 그러나 지민의 상태를 봐줄 스태프는 대기실에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어느 샌가 텅 비더니, 스태프가 아닌 한 사람만이 남아있었다. 새로운 이였다. 그러나 지민이 익히 잘 알고 있는 사람. 밤낮으로 지민을 꽉 부여잡고 있는 사람.
“잘 어울리네.”
하는 것도 괜찮군. 윤기가 삐딱하게 문에 기대 서있었다. 수트를 입고 머리를 뒤로 넘긴 스타일링 덕분에 반듯한 이마가 훤히 보였다. 지민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부사장님…? 꿈…? 민윤기의 얼굴을 하도 떠올리다 못해 환각 증세가 오는 걸까? 지민이 얼떨떨하게 입을 뻐끔거렸다.
“환각…? 천국인가…?”
화보 촬영 전 차 사고라도 당했던 걸까? 윤기가 어이 없다는 듯 말했다.
“이승이야. 정신차려. 반갑다는 표현을 그렇게 하는 거야? 새로운 방식이네.”
“지, 진짜예요? 진짜 부사장님?”
“가짜겠니, 그럼. 포럼 연설 끝나자마자 왔더니 이런 취급이나 받고.”
이게 왜 진짜…? 지민이 여전히 눈만 감았다 떴다 반복하고 있으니 윤기가 거침없이 다가왔다. 독하다 싶은 그의 향수냄새가 지민을 덮쳤다. 요정의 영역을 침범하는 마왕 같았다. 향과 달리 그는 섬세한 손길로 지민의 화관을 조금 위로 올려주었다.
“이거 너한테는 좀 큰 거 같은데.”
“제, 제가 할게요.”
지민이 급히 윤기로부터 떨어진다. 심장이 고장 난 것처럼 뛰고 있었다. 윤기는 쉽게 물러나주었다. 그래 그럼. 지민이 멀어지는 정신을 되찾았다. 아니, 이게 아니라!
“제 말은 부사장님이 대체 왜 여기 계시냐는 거였어요. 화보인데, 이거…기부 화보….”
“그래. 화보.”
지민이 설마, 하며 윤기를 보았다. 권력으로 선량한 화보촬영장을 습격…? 점점 의심이 새겨지는 눈동자에 윤기가 태연히 뒷말을 이었다.
“송영에서 진행하는 화보.”
“네?”
“내 회사에서 하는 거니까 온 거야.”
“네!?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지민은 매니저가 처음 화보 이야기를 꺼냈을 때를 되뇌어보았다. 얼버무리며 넘어갔던 매니저 형. 개인화보 컨셉을 묻던 친절한 스태프. 지민의 몰랑한 입술이 천천히 어버버 벌어진다. 윤기의 시선이 그 입술에 닿는다. 윤기가 그에 씩 웃었다. 놀리기 작전을 성공한 동네 개구쟁이마냥.
“뭘 그렇게 놀라고 그래.”
“…….”
“원래 팬이 연예인 따라다니는 거잖아.”
“…….”
“이제 그런 건 익숙한 연차 아냐?”
문제 없지? 윤기가 태평하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