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 Bernadette Carroll - Laughing on the Outside>
지민은 난데없이 폭격을 받은 기분이었다. 현실이라는 걸 자각하자마자, 심장이 빠질 것처럼 어지럽게 뛰었다. 만반의 준비를 하고 얼굴을 봐도 모자랄 판에 이런 기습 공격이라니. 대답조차 못하고 어버버거리고 있으니, 윤기가 갸웃거리며 지민을 살펴보았다.
“왜 그래. 정색을 하곤. 안 반가워?”
“여, 연락이라도 좀 해주지 그러셨어요. 이렇게 갑자기 오시니까 놀랐잖아요.”
윤기는 지민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확실히 지금 박지민에겐 문제가 있다. 매번 츄르 발견한 고양이마냥 튀어나와 안기기 바쁘더니. 눈가를 살짝 가늘게 좁히다가, 이내 톡 튀어나온 부리 같은 입술에 눈길이 닿았다. 박지민의 상태는 신경 쓰이는데 왜 저건 또 귀엽단 말인가. 오물거리는 모양에 윤기가 픽 웃고 말았다.
“자주 놀라도 되겠네. 붕어 같고 좋아.”
가슴을 진정하라며 다독이던 지민이 멈칫했다. 붕어…? 붕어요? 누가요? 저요? 여기 너 말고 누가 있니. 윤기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지민이 식겁하여 펄쩍 뛰었다.
“저 진짜 부, 붕어…지금 그렇게 별로예요?”
“별로라고는 안 했는데. 좋다고 했지.”
“그건 그렇…아니, 붕어가 귀여운 동물은 아니잖아요!”
지민이 황급히 자신의 의상을 내려보았다. 뭐가 문제라서 붕어가 떠오른 거지? 무려 처음으로 찍는 단독화보다. 다이어트도 하고 컨셉도 열심히 짜고, 의상도 최선을 다해 골랐다. 무조건 예쁘게 나와야만 했다. 화보 판매율도 중요, 까지 생각하던 지민이 윤기를 흘끔 보았다. 딱히 윤기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긴 하다만. 어찌됐든 완벽주의자인 박지민은 완벽한 결과물을 만들고 싶었다. 하늘하늘거리는 의상은 아무리 봐도 붕어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렇다면.
“저 메이크업이 안 어울려요?”
지민이 윤기에게 얼굴을 훅 들이밀었다.
“한번 봐봐요, 부사장님. 안 어울려요?”
아담하고 뽀얀 얼굴이 윤기에게 바짝 붙는다. 언제 멀어졌냐는 듯 자세히 좀 보라며 아주 가깝다. 이번에는 윤기가 드물게 흠칫했다. 그러나 주춤거리거나, 뒤로 물러나진 않았다. 그 자리 그대로 가까워진 채 지민의 들이밀어진 얼굴을 빤히 구경했다.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진 지민은 그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대답을 요구했다.
“어디가 문제인 것 같아요?”
“…문제 없어. 잘 어울려.”
“괜찮아요? 정말요? 설마 진짜 좋은 의미로 하신 거였….”
안도의 숨을 돌리던 지민은 윤기와 가까워진 거리를 눈치챘다. 키도 비슷해서 유난히 더 가까운 것 같다. 분명 명품일, 수트를 입은 윤기로부터 향수 냄새가 훅 퍼진다. 누군가 뒤통수만 꾹 밀면 입술이 부딪힐 위치다. 헉. 지민이 황급히 뒷걸음질 쳤다.
“죄, 죄, 죄송해요! 이런 거 싫어하시는데…너무 놀라서 생각을 못하는 바람에 그만. 다음부터는 주의할게요.”
지민의 귓가가 잘 익은 홍시마냥 발갛게 변했다. 큰일났다. 부사장님은 이렇게 하는 거 싫어하시는데. 첫만남부터 그런 기미는 아예 딱 잘라 싫다고 했었다. 하지만 이성과 다르게 다시 한번 뽑혀나갈 것처럼 가슴이 뛴다. 이건 사람과 가까이 붙어 있어서 놀란, 그런 거다. 절대 음흉한 감정이 아니다. 사람을 대놓고 앞에 두고 그럴 수는 없다. 지민이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며 진정시켰다.
윤기는 반면 표정 변화 없이 멀찍이 떨어진 지민을 응시했다. 얘는 뭐 중간이 없다. 가까이 붙거나, 놀라서 멀리 후다닥 달아나거나. 올망졸망한 표정으로 또 사과하는 지민과 다르게 윤기는 어쩐지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가까이 다가오니 표정 다채로운 작은 얼굴을 가까이 관찰할 수 있어 좋았다. 윤기가 무척이나 당혹스러워하는 지민을 보다 이내 화제를 돌리듯 말했다. 됐어. 그런 건 기분 안 나빠.
“이제 곧 촬영이라며. 어서 의상 마저 입어.”
그가 의상이 걸려있는 행거를 턱짓했다. 의상이요? 지민이 자신의 의상을 내려보고, 행거를 보더니 순수하게 반문했다.
“다 입은 건데요?”
“뭐? 이게 다 입은 거라고?”
명치까지 파인 블라우스는 속이 훤히 다 보이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한없이 얇은 천은 목선을 따라 이어지는 마른 실루엣이 고스란히 드러냈다. 보온은커녕 바람 한 점도 못 막게 생겼다. 윤기는 잠시 침묵했다. 언뜻 보이는 살이 사람 기분을 이상하게 만든다. 차라리 맨 살을 다 드러내놓고 있는 게 더 낫겠다 싶다. 윤기의 의상이 미묘하게 찡그려진다.
“네. 어때요? 예쁘죠.”
“…….”
“제가 열심히 골랐어요.”
지민이 뿌듯하게 한 바퀴 빙글 돌아 보이기까지 했다. 하늘거리는 천이 살랑거리며 같이 돈다. 윤기는 여전히 어떤 말도 얹지 못했다. 이딴 옷을 입고 사진으로 박제하겠다고? 당장 행거에서 다른 의상을 꺼내 이 위에 덧입히고 싶었다. 그의 눈길이 투명한 시스루 의상에 내려갔다가, 다시금 뿌듯해하는 지민의 얼굴로 올라온다.
“예쁘지 않아요?”
하고픈 말이 윤기의 입 속에 넘실거렸다. 당연히 긍정적은 아니었다. 당장 바꿔 입어. 이딴 옷을 후보에 올린 스탭이 누구야? 그러나 불만에 뾰족해진 눈은 지민의 기대감 실린 얼굴에 힘을 잃고 말았다.
“열심히 준비 했으니까 촬영 예쁘게 잘 나왔으면 좋겠어요.”
“…그래.”
윤기는 다른 말을 쥐어 짜냈다. 부정적이고 이 옷 들이민 새끼 찾아오라는 말은 단전 아래로 꾹 눌러 넣었다. 자고로 돌보기로 결심한 고양이 앞에서는 좋은 말만 해줘야 하니.
“나쁘지 않네. 잘 나올 거야.”
지민이 칭찬 같지도 않은 칭찬 한 마디에 반짝 미소 지었다. 분위기가 몽글하고 달달한 생크림 같았다. 마른 몸은 무용가처럼 늘씬하게 뻗어있는데, 활짝 웃는 얼굴은 싱그럽게 예뻤다. 반짝반짝 빛이 난다. 윤기는 박힌 것처럼 지민을 빤히 바라보았다.
“부사장님이 괜찮다고 하니까 다행이에요. 저 진짜 오늘 최고로 예쁜 날이어야 해요. 열심히 할게요! 오늘 알게 됐지만 부사장님 회사니까….”
아 물론 부사장님 아니었어도 열심히 하려고 했어요. 지민이 덧붙인다. 그때였다. 스태프가 문을 두들기며 슬그머니 공지를 알려왔다.
“이제 슬슬 촬영 시작해야 할 것 같은데요. 괜찮으실까요?”
“아 네! 지금 갈게요.”
모든 준비가 끝난 모양이다. 지민이 나가기 전 윤기의 옷자락을 잡아왔다.
“부사장님 촬영하는 것도 보실 거예요?”
지인이 촬영을 구경하면 민망한 느낌이 드는 편이다. 그러나 윤기는 곁에 있어주면 좋겠다는 감정이 더 크게 들었다. 이렇게 하면 조금이라도 더 부사장님이랑 같이 있을 수 있겠지? 그러나 윤기는 조용했다. 부사장님?
“…어, 잠깐 일이 있어서. 먼저 하고 있어.”
“네!”
열심히 하고 있을게요! 지민이 마지막까지 손을 흔든 채 대기실을 빠져나간다. 뒤에 남은 윤기는 사라지는 지민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고 있었다.
***
촬영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세트장 안에 들어간 지민은 인간계를 벗어나 놀러 나온 천사가 되었다. 훌륭한 피사체에, 훌륭한 배경. 오랜만에 만난 환상적인 조합에 사진작가는 열정을 불태웠다. 찍을 맛이 났다. 표정 너무 좋다. 너무 잘 나오는데? 여기 한번 서볼래요? 팔 한번만, 어어, 그렇지, 고개도 아래쪽으로 각도 조금만. 캬, 너무 좋다.
지민은 꿀떡처럼 작가의 요청을 반영했다. 꽃밭에 누워 몽환적인 표정을 짓는 컷, 찰박거리는 물에 발을 살짝 담그고 있는 컷. 포즈와 자세 하나를 취할 때마다 스태프들 사이에서는 감탄이 터져 나왔다. 무슨 컷 하나하나가 명작이네. 이 잡지 대박나겠다. 괜히 대기업에서 이제 막 뜨는 아이돌을 뽑은 게 아니라니까.
결과물은 지민의 마음에도 쏙 들었다. 몽환적이고 아름다운 동화처럼 보였으면 했는데, 그대로 나왔다. 같이 작업 모니터를 보던 사진작가가 연신 찬양했다. 천재네, 천재야.
“셀렉하는데 진짜 힘들겠는데? 죄다 A컷뿐이야. 다 냈다간 잡지 5권으로 내야 할 판이네요.”
“제가 한 게 뭐가 있다구요. 전부 작가님께서 다 잘 찍어주신 덕분이에요.”
저는 포즈만 취했을 뿐이에요. 지민이 쑥스럽게 웃었다. 멤버들이 그렇게 인성이 파탄 났다며 학을 떼던 감독도 짧은 칭찬의 말을 얹었다. 오 진짜 잘 나왔네. 빠른 퇴근 가능하겠는데요.
“우리 영상도 깔끔하고 빠르게 잘 찍어 봐요. 잠깐 쉬고 바로 촬영 들어갈게요.”
네, 알겠습니다! 깍듯하게 인사한 지민의 곁으로 메이크업 수정팀이 붙는다. 지민은 곧장 촬영장을 둘러보았다. 부사장님이 오셨나? 그러나 구석구석 보아도 윤기의 흔적은 찾을 수가 없었다. 시간이 없어서 가신 건가. 살짝 아쉬웠다.
“지민아 입술 잠시만.”
“앗 네, 누나. 저 혹시….”
폰 좀 주실 수 있을까요? 그 말이 입에 맴돌았으나, 지민은 이내 접었다. 바쁘실 수도 있는데. 그리고 조금 전 겪은, 심장에 지진이 온 현상을 촬영 중 다시 겪으면 촬영을 망칠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응, 왜? 아니에요. 괜찮아요. 그 사이 감독이 자리로 돌아와 디렉션 준비를 끝냈다. 촬영 시작하겠습니다.
“한번 테스트샷 먼저 찍어볼게요.”
카메라에 불이 들어온다. 영상은 SNS에 올릴 티저와 홍보용이었다. 지민은 사진을 찍었을 때처럼 몽롱하게 눈을 풀었다. 손을 둥글게 휘저으며 꽃밭 위에서 스텝을 밟았다. 화면은 잘 나오네. 피사체가 역시 좋아. 모니터를 확인한 감독이 만족했다. 시작부터 의상 미스라며 안 좋은 소리를 퍼부었다던 다른 멤버들의 후기에 비해 양호한 편이다. 비주얼이 통과하니 감독이 쓰읍, 소리를 내며 고민한다.
“그런데 지민씨 화면은 예쁘긴 한데, 알맹이가 없어 보여요, 지금. 스토리를 하나 짜서 넣으면 좋을 거 같은데. 즉석에서 감정표현 할 수 있겠어요?”
“네! 뭐든 다 할 수 있습니다!”
지민은 자신 있었다. 유령저택에서 광대 옷을 입고 춤을 춘 경험까지 있었다. 웃으면서 울기, 놀라면서 행복해하기. 무엇이든 다 가능하다. 그러나 감독은 지민의 예상을 한참 벗어난 사람이었다.
“인간을 보고 첫눈에 반한 천사 컨셉, 어때요? 그거 지금 지민씨한테 제일 잘 어울릴 거 같은데?”
“아…첫눈에 반한 천사….”
“가능하겠어요?”
“네, 가능합니다!”
“대답은 시원시원해서 좋네. 사랑에 빠지는 표정 한번 해볼게요.”
일단 대답부터 냅다 외친 지민은 속으로 큰일이 났다고 생각했다. 난감한 컨셉이야 늘 받아왔으니 그렇다 치고, 이런 추상적인 감정표현 요구는 처음이었다. 좀 더 상큼하게, 좀 더 섹시하게. 기계적 표정만을 찍어냈었는데 감정이라니. 오랜 연습생 생활에 짓눌려 첫사랑조차 없이 학창시절이 끝났으니 표본도 없었다. 감독은 바로 카메라를 준비시켰다.
“바로 슛 들어갈게요.”
카메라에 다시 불이 들어온다. 모르겠다. 지민은 되는 대로 조금 전과 같이 몽롱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감독이 곧장 엔지를 외쳤다.
“그건 여태까지 한 거 아닌가? 좋긴 한데 영. 다른 표정 해봐요.”
“아, 네!”
첫눈에 반할 땐 대체 어떤 감정을 느끼는 거야? 자 다시. 감독의 지시에 지민은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상큼한 노래의 뮤직비디오에서 종종 지어 보이던 표정이다. 웃음 밝기 레벨은 좀 낮춰서 수줍어 보이게. 감독이 모니터를 화면을 확인하고는 미간을 긁적였다. 아까는 분명 잘했는데 왜 저러지.
“지민씨, 아까 말이 잘 안 들렸어요? 사랑에 빠진 표정입니다.”
“…아 죄송합니다! 다시 해볼게요.”
웃는 것도 아니야? 대체 사랑은 어떤 감정이란 말인가. 지민은 이번에 정색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가지고 있는 표정의 한계였다. 굳게 일자로 다물린 입과 노려보는 눈동자에 감독이 움찔 떨었다. 사랑에 빠지라고 했더니 왜 잡아먹을 것처럼 굴어? 보다 못한 감독이 중단시켰다. 잠깐 끊을게요.
“그게 어떻게 사랑입니까. 누구 하나 파묻으려고 해요? 컨셉이랑 전혀 안 맞아요, 지금.”
“…죄송합니다! 다시 해볼게요.”
지민은 가지고 있는 온갖 표정을 끌어냈다. 하나하나 안 맞는다며 이유를 설명해주던 감독은 이내 본성을 드러냈다. 멤버들이 겪었다는 그 악마의 감독으로. 엔지, 엔지, 그리고 또 엔지. 그 사이 감독의 표정에서는 점점 미소가 사라졌다.
“무작정 다시 할게 아니고. 잘 모르겠어요? 이런 감정표현 단 한번도 안 해봤어요? 연예인인데? 연습생 때 그런 거 안 배워요?”
이렇게 촬영하면 영상 못 나와요. 저희 회사는 가난해서 춤과 노래 외에는 아무것도 시켜주지 못했습니다…. 한 마디 하고 싶었지만 지민은 망돌의 자세가 몸에 익어있었다. 어디를 가도 일단 굽히고 봤다. 그것만이 살 길이었다. 죄송합니다!
“다시 한번 해보겠습니다! 잘 해볼게요.”
“해본다니까 다시 찍겠는데, 여기 지금 지민씨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는지 생각도 좀 해….”
지민은 식은땀이 등 뒤로 흘러내린다. 스스로도 답답했다. 그 동안 본 드라마 속 주인공들에 빙의라도 잠깐하고 싶었다. 뉴위크 얼굴에 나 혼자 먹칠을 할 순 없다. 믿어주신 부사장님을 생각해서라도. 할 수 있어. 해낼 수 있어. 심호흡을 하며 카메라를 다시 마주보았다.
그런데, 어째 카메라에 불이 들어오질 않는다. 감독 역시 조용했다. 지민이 의아하게 감독이 있는 방향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한 남성을 발견할 수 있었다. 스태프 복장과는 먼, 직장인용 수트를 입은 남성. 바로 윤기의 비서. 그가 슬쩍 감독에게 다가가 귓속말로 무언가를 전달하자 감독이 사뭇 당황하더니, 더듬더듬 확성기를 잡았다.
“…이런 화보가 처음이라 많이 낯설긴 하죠. 시간 많으니까 천천히 해보면 될 거 같네요.”
감독이 큼, 헛기침을 했다. 거들먹거리던 태도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눈치를 보듯 조심스러웠다. 비서가 있다는 건. 지민은 바쁘게 촬영장을 눈으로 훑었다. 아까 사라졌던 윤기도 있을 것이다. 어디 계시지.
마침내 지민은 윤기를 찾아냈다. 지민의 고개가 그쪽에 틀어박힌 듯 멈춘다. 눈이 마주친다. 팔짱을 낀 채 윤기가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할 수 있다는 듯. 믿고 있다는 듯. 언제까지고 자신의 편에 서있어 줄 거라는 듯. 그게 꼭 지민의 눈에는 거대하고 단단한 성벽처럼 보였다. 방향키를 잃은 조각배에 올라타 있는 것만 같았는데, 곧장 안정감이 되찾아진다.
아. 지민은 그 순간 깨달았다. 온갖 사람이 다 섞여있는 곳에서 한 사람만 보이는 감정은. 이 사람만 내 곁에 있어주면 모든 게 다 괜찮을 것 같단 이 느낌은. 머리 위로 폭포가 쏟아져 내리는 것만 같다. 이미 사랑에 흠뻑 적셔져 있었다. 맥박이 귓가에서 뛴다. 지민은 있는 그대로의 감정을 올곧게 마주했다. 아무래도 이건….
“지금! 바로 지금! 완벽해! 카메라 보고 찍어 볼게요.”
이렇게 잘 할 줄 알면서! 휴식을 선언하고 뜨려던 감독이 모니터를 확인하자마자 급히 외쳤다. 바로 슛 들어갈게요. 카메라의 플래시가 번쩍인다. 네모난 프레임은 세상에 단 하나뿐일, 새로운 세계에 갇힌 소년의 표정을 남김없이 담아냈다.
***
도로를 달리는 차 안. 비서는 오르락내리락하는 상사의 기분만큼 개 같은 게 세상에 없다고 생각했다. 오전만 해도 민윤기는 무척이나 기분이 좋았다. 어화둥둥 챙기는 아이돌의 화보촬영현장을 방문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는 손꼽게 너그럽고 유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 계약 건이라면 천천히 하세요. 일정은 무리하게 맞추지 않아도 됩니다. 날카롭게 지적하며 따져 묻더니, 밀린 스케줄에도 천사처럼 하나하나 넘어가는 모습에 비서는 사람이 바뀐 줄 알았다.
그러나 아이돌의 화보촬영현장을 나온 지금. 민윤기의 표정은 저주해 마지않는 친인척을 봤을 때보다 더 박살 나 있었다. 깊게 구겨진 미간이 펴질 줄을 모른다. 대체 어디에서 기분이 상한 건지 짐작도 못하겠다. 아이돌이 꽃밭에 들어가서 활짝 웃어 보일 땐 눈 하나 깜짝 않고 바라보더니만. 비서는 이대로 집으로 사라지고만 싶었다. 그러나 꿋꿋이 윤기의 남은 스케줄과 업무 관련 사항을 읊었다.
“시찰 일정은 다음주로 잡아놓았습니다. 확인하고 말씀해주시면 바로 생산이 진행된다고 하니….”
윤기는 생각에 갇혀있었다. 무슨 생각이냐 하면, 꽃밭에서 활짝 웃는 박지민, 하늘하늘 인어 같은 몸짓으로 춤 추듯 꽃 사이를 유영하던 박지민, 의상이 예쁘지 않냐며 한번 봐달라고 빙글 돌던 박지민, 구박받아 허둥지둥 거리다 자신을 보자마자 완벽하게 촬영을 끝낸 박지민. 부사장님! 묘하게 쑥스러워하면서도 활짝 웃으면서 다가온 그 어린 애 얼굴이 머릿속을 차지하고 비켜나질 않고 있었다.
촬영을 하는 박지민은 새로웠다. 결과물은 수없이 봤어도 과정을 만드는 박지민은 처음이었다. 책임감 넘치는 모습으로 집중하는 얼굴도 처음이었고, 꿋꿋하게 기죽지 않고 노력하는 모습도 처음 봤다. 지민으로부터 눈을 뗄 수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미 죽어 묘비에 잡초까지 자라있던 민윤기의 취향 감지센서가 꿈틀 반응했다. 세상사 하고 싶은 것도 다 해보고, 이루고 싶은 것도 다 이뤄 봐서 그 무엇에도 흥미가 사라진 자신에게.
윤기는 마른 손으로 얼굴을 쓸어 내렸다. 하. 기가 막혔다. 어이가 송두리째 뽑혀나간다. 자신을 구해주고 홀랑 사라진 박지민을 다시 만나 정체를 확인했을 때보다 더. 나이가 몇인데 그런 어린 애한테. 범죄가 따로 없다.
“미친 새끼.”
비서와 운전기사가 움찔한다. 비서는 마침내 촬영 현장에서 감독을 눈으로 총살하던 윤기를 냉큼 기억해냈다. 역시 그 놈이 문제였던 거다. 결과물이 완벽하긴 했다만, 역시 자기가 키우는 꽃 같은 아이돌한테 막말을 했으니. 그래도 직장인데 과보호로 유난 떤다고 생각하며 비서가 입을 열었다.
“감독을 바꿔 재촬영을 원하신다면 일정을 고려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윤기가 그때서야 비서를 돌아보았다. 이제야 눈에 들어왔다는 얼굴이다. 왜 이 발언이 나온 건지 잠깐 고민하더니, 아아, 하며 쿨하게 답했다.
“놔두세요. 그쪽과 관련된 말은 아니니.”
그럼 대체 어디에? 혹시 나…? 눈치를 보던 비서는 어딘가 멀리 응시하는 듯한 윤기의 표정에 판단을 바꿨다. 아주 괘씸한 놈을 떠올리고 있는 모양이다. 심각한 그의 상사는 의외로 색다른 명령을 내려왔다. 아니, 어쩌면 이젠 익숙한 아이돌 관련 명령.
“오늘 촬영본은 다 가져와요.”
화관을 얹은 채 환히 웃는 지민이 윤기의 머릿속을 연신 동실동실 떠다녔다. 사그라들지 않는 구름처럼.
그러나 윤기는 잔상처럼 남아있는 지민의 모습을 지워냈다. 잠시나마 미쳤던 게 분명하다. 몇 년이나 넘게 성애적 자극을 쉬었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 생각하며 그는 지민과 맺은 관계가 결코 변할 일은 없다고 단언했다. 천만 분의 일 확률로조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