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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선우정아-봄처녀>












 자고로 인생은 어떻게 사는 게 중요하다 말하고들 한다. '어떻게'는 생을 유지하는 기본적인 조건에서 시작한다. 조건은 대표적으로 의식주 세 가지가 꼽힌다. 지민은 기본적인 조건을 아주 충실히 유지했다. 가장 먼저 의. 지민은 샵을 들러 그간 제대로 돈을 쓰지 못한 한을 풀기라도 하듯 전투적인 기세로 쇼핑을 했다. 디자이너가 붙어 머리부터 발끝까지 세팅하고 하루를 시작하는 게 일상이었다. 의식주 중 식은 원래도 소홀한 만큼 식탁에 나오는 대로 먹었다. 박사장의 당부를 따라 고용인들이 기력회복을 위해 랍스타나 산삼차, 장어구이 같은 음식을 바리바리 싸다 날랐으니 식도 훌륭했다.


 가장 홀대받는 건 의식주 중 주, 침실이었다. 지민은 따라가기 벅찼던 후계자 수업 외에도 다른 공부를 시작했다. 다름 아닌 옷을 만드는 디자인 일이다. 펜을 잡고, 패션계의 흐름을 파악하고, 그리고 가장 엉망인 그림실력을 어느 정도 디자인을 그릴 수 있을 만큼 쓸만하게 만드는 작업에 열을 올렸다. 작업실에서 밤을 새우기 일쑤였고, 침실은 자연스럽게 주인을 잃었다. 새로 시작한 공부가 재미있다 박사장에게 흘리듯 말했더니 박사장은 우리 강아지는 누굴 닮아 이렇게 똑똑한가, 하고 자랑스러워하며 브랜드까지도 떡하니 안겨줄 기세였다.


 한 달. 마지막으로 정국을 찾아 빌었던 시간으로부터 한 달이 지났다. 한 달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다. 시늉만 건성으로 이어지던 학습태도가 열정적인 학구생으로 변하니 한울그룹의 이사진들은 드디어 철부지 도련님이 정신을 차린 게 아니냐며 웅성거렸다. 시간이 긴 이유를 하나 더 증명하라면 태형과의 관계변화를 들이밀 수 있었다.



"어제 울었지?"



 모처럼만에 방에서 자고 일어나니 태형이 들이닥쳤다. 어깨를 움찔한 지민은 부러 당당하게 턱을 쳐들었다.



"안 울었는데?"

"눈 부은 거 티나, 지민아. 술도 마셨어? 냄새 장난 아닌데."

"아 안 울었다니까?"

"그래, 그럼 안 울은 걸로 하자."



 태형이 난 지민이 좋아하니까 거짓말 믿을래, 하고 연이어 염장을 질렀다. 지민은 진짜 울지 않았다 벅벅 우기면서도 거울을 흘끔 확인하는 걸 잊지 않았다. 티 나나? 재수도 없다. 하필 어제 수면 유도를 위해 틀어놓은 다큐멘터리의 주제가 토끼였다. 토끼의 대단한 번식력에 대한 내래이션을 들으며 눈물을 펑펑 짜다 술까지 한 병 까 마셨다는 건 무덤까지 끌고 가야 할 비밀이다.



"…티 많이 나?"



 지민이 결국 작게 소곤소곤 물어왔다. 태형은 손을 뻗어 눈 아래를 꾹꾹 눌렀다.



"여기도 띵띵 붓고, 이 위쪽도 붓고 전체적으로 동글동글해져서 눈이 더 작아졌어."

"…심각해?"

"부었어도 예뻐."

"원래 예쁜 건 예쁜 거고. 저녁에 밥 먹기로 했는데…가라앉을 거 같아?"

"누구랑? 장인 장모님?"

"야 너 그렇게 부르지 마."

"나 방금 와서 손 차가우니까 내가 눌러줄게."



 눈두덩이를 살살 문지르며 태형이 눈 작아지니까 더 귀엽다, 하고 히이 웃었다. 강제로 눈이 감긴 지민은 한 마디 던지려다 관두었다. 둘 사이에 꿀 떨어지는 사랑은 없어도 약혼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으니, 어찌됐든 태형은 호칭을 부를 수 있는 위치에 앉아있었다.


 지민은 진작 태형이 요즘 같은 태도를 과거에 보였다면 정국을 만나러 갈 일이 없었을 것이라 종종 생각했다. 김태형은 변했다. 전처럼 마구잡이로 너는 내 오메가라는 주장을 펼치지도 않았고, 알파 페로몬도 자극적으로 내뿜지 않도록 자제한다. 정국이 옆에 있을 때 하늘이라도 뚫을 만큼 높았던 파혼 생각은 정국을 잃고 시들시들해지더니, 마지막에는 그저 원래대로 돌아온 거뿐이라는 체념으로 돌아섰다.



"이거 그 베타 때문에 운 거지?"



 태형이 훅 질문을 들이밀었다. 눈을 맡기고 있던 지민은 손을 쳐내며 발끈 뛰었다.



"야! 아니거든? 나 걔 다 잊었어! 이제 기억도 안나! 이건 그래, 어제 본 영화가 너무 슬퍼서 운 거야!"

"내 앞에서는 센 척 안 해도 돼. 이제 한 달쯤 됐잖아. 그때 엄청 생각나는 거 알아."

"다큐멘터리 때문이라니까?"

"맞아. 지금 감정 다큐멘터리지, 너."

"아 너 꺼져."



 지민이 침대에서 내려가라 태형의 등을 떠밀었다. 태형은 밀린 척 침대에 누우며 곡소리를 냈다. 아야야 지민이가 때려서 아파서 나갈 수가 없어, 하고 뭉기적거렸다. 지민이 베개로 태형을 팡팡 때렸다. 태형은 베개를 막으며 아프다 외치다 순간 베개를 확 잡고 지민을 끌어당겼다. 으악! 반대로 끌려간 지민이 태형의 품에 갇혔다. 지민은 곧장 꿈지럭거리며 풀라는 듯 어깨를 탁탁 때렸다.



"놔. 안 놔? 아씨 김태형 힘만 좋아선…!"

"아아 졸려. 어떡하냐. 이대로 잘까?"

"다음에 눈 못 뜨고 싶으면 자."

"에이, 어젯밤에 너네 집 왔었는데 김비서가 돌아가라고 해서 차에서 밤 샜단 말이야."



 흠칫한 지민은 급히 방을 휙휙 훑어보고 벽에 낙서되어있는 숫자들에 태형 모르게 탄식을 흘렸다. 아 미쳤지. 또 전정국 보고 싶다 질질 짰나 봐. 혀 깨물고 죽고 싶다.


 지민은 아무리 자신이라도 멀쩡하다 말하기 민망한 술버릇을 가지고 있었다. 전정국과 헤어진 후로 전보다 더 독해졌다. 어느 날은 찢긴 베개커버와 그 속에서 토해져 나와 흩날린 하얀 깃털들이 방 곳곳을 장식하고 있었고, 어느 날은 벽에 가득 의문 모를 숫자들이 낙서되어 있었으며, 또 어느 날은 바닥에 쿠션과 베개를 모아 풀장처럼 동그란 원을 그리고 그 안에서 자고 일어나 아침을 맞았다.



"무거워! 비켜!"



 지민이 태형의 어깨를 깨물었다. 태형은 과장스럽게 악, 하고는 엎치락뒤치락 씨름하다 마지못해 푸는 척 지민을 놓아주었다.



"지민아."

"왜."

"저녁밥 먹기 전까지 오늘은 나랑 놀자."

"싫어. 오늘 할 거 많아."

"맞아, 나랑 할 거 많아."



 태형은 버티는 지민을 기어코 침대 안에서 끌어냈다. 지민은 전처럼 미쳤냐 차갑게 대꾸하거나 쌩하니 나가버리지 않았다. 필요했다. 실상은 이런 배려가 감사했다. 하루종일 떠오르는 정국의 얼굴을 조금이라도 지우려면, 텅 빈 단칸방을 떠올리지 않으려면, 3개월의 추억을 곱씹지 않으려면. 태형과 같이 떠들고 정신없이 휩쓸려 다니다 보면 그나마 잊을 수 있었다. 가장 중요한 전정국. 아니, 중요했던 전정국. 그 빈자리를 메꾸기 위해 지민을 쉴 새 없이 노력하고 있었다.







 태형은 꾸역꾸역 지민이 언급한 저녁식사 약속까지 들러붙으려다 꺼지라는 발길질 몇 번을 받고 물러났다. 마지막까지 장난스럽게 웃다가 기껏 손질한 머리카락을 엉망으로 헤집었다. 망할새끼. 결혼 전 각서는 확실히 받아내야겠다. 지민은 태형이 내려준 호텔 안으로 들어가 안내를 받아 스카이라인이 보이는 레스토랑으로 올라갔다.



"아들!"



 검은 드레스를 쫙 빼입은 문여사가 손짓했다. 그녀는 나이가 무색하게 여전히 우아하고 아름다운 자태를 자랑했다. 마찬가지로 정장을 입은 박사장이 흐뭇하게 올라온 지민을 보고 팔을 활짝 벌렸다.



"아빠!"



 호텔 주변을 둘러볼 때만 해도 차가운 얼굴이 사르르 녹아 지민이 쪼르르 달려갔다. 쪽쪽 박사장과 문여사 둘과 볼키스를 하고서야 자리에 앉았다.



"아들 요즘 통 말랐어."

"엄마 이게 요즘 유행하는 모델핏 그런 거야. 일부러 빼는 거니까 걱정하지 마."



 지민이 헤실헤실 눈꼬리를 접었다. 그리고는 애교 있게 화제를 돌렸다. 요즘 하는 공부가 어떤지, 그림을 조금 더 잘 그리게 되면 초상화를 그려주겠다든지. 박사장은 흐뭇하게 삐약거리는 병아리 보듯 지민을 보고 껄껄 웃었다. 문여사는 다음부터 매번 이렇게 넘어가면 통하지 않는다며 아프지 않게 지민의 볼을 꼬집었다.



"그렇지, 우리 강아지 내일 사무실 좀 들러."

"응? 내일?"

"왜? 곤란해? 미룰까? 아빠가 선물 하나 준비해놨는데."

"아냐, 아냐. 갈 수 있어! 아빠 있는 곳이면 저어쪽 멀리 태양이라도 갈 수 있어!"



 마지막 애교로 지민이 사랑의 총알이라며 손가락으로 하트를 날렸다. 애교에 껌뻑 죽어나가는 문여사와 박사장 덕에 테이블은 웃음이 가득했다. 지민은 히히 웃는 가면을 쓴 얼굴 뒤로 부은 눈이 들키지 않아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래도 살아진다. 밥도 먹고, 웃음도 낼 수 있다. 이렇게 멀쩡한 척 하다 보니 점점 더 멀쩡해지는 거 같다.








***








 회사 로비로 들어서자마자 한 몸에 이목을 집중 받은 지민은 남준을 대동하고 박사장의 사무실을 찾았다. 박사장은 길어진 주주총회 회의 탓에 발이 묶여있었다. 조금만 기다려달라는 여비서의 말에 따라 사무실 쇼파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박사장의 책상에 세워진 가족사진을 보던 지민은 무심코 중얼거렸다. 전정국 서울로는 안 왔으려나…. 방세로 빼곡히 넣어놓은 돈으로 빚은 충분히 갚았을 것이다.



"…아씨."



 퍼뜩 정신을 차린 지민은 인상을 와작 구기고 몸부림을 쳤다. 왜 또 이 새끼 생각이야. 베타가 뭐가 좋다고. 아 빡쳐! 왜 모든 생각이 다 전정국으로 끝나는 거지? 뇌세포가 미친 걸까? 전정국한테 미친 건가? 내 뇌인데 왜 내 뜻대로 생각 못 하는 거지? 다리를 덜덜 떨던 지민은 결국 커피라도 한잔 달라 할 셈으로 문 가까이 다가간 때였다.



"맡기신 일 처리하고 왔습니다."



 문손잡이를 돌리려다 멈칫했다. 전정국 목소리와 닮았다. 매일같이 생생하게 떠올렸으니 그 목소리를 헷갈릴 일은 없다. 심장이 가빠르게 변한다. 그러나 동시에 지민은 냉정하게 감성을 정리했다. 여기 전정국이 오긴 왜 와. 매번 홀로 몸집을 더 부풀리는 착각이 이제는 귀까지 멀게 만든다. 지민이 신경질적으로 문을 팍 열어젖혔다. 앉아있던 여비서가 벌떡 일어난다.



"뭐 필요하신 거라도 있으십니까?"

"커피…아니, 차가운 물 줘."



 지민은 머릿속으로 그럴 리가 있냐 떠올리면서도 사무실을 살피는 눈까지는 막지 못했다. 그럼 그렇지. 여비서 혼자다. 그건 착각일 뿐이다. 문을 닫고 들어가기 전,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우리 강아지! 왔어? 아빠가 늦게 왔지?"

"아니야. 나두 방금 왔어! 회의 힘들었지이?"



 지민이 콩콩 어깨를 두들겨오자, 박사장은 누구 자식인지 모르겠다며 비서들이 보고있음에도 불구하고 뽀뽀세례를 퍼부었다. 박사장이 지민을 달고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기 전이었다. 여비서가 급하게 운을 뗐다.



"사장님, 아까 처리 부탁하신 일 완료했다는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오, 빠르군. 알았네. 가자, 우리 강아지."



 비서들에게 밖에 있으라 명령한 박사장은 사무실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부산스러운 산타마냥 서랍을 뒤졌다. 한 대기업을 이끄는 총수라고는 믿기지 않을만큼 가벼운 손놀림이었다. 방금 주주총회에서 무시무시한 분위기를 연출하던 얼굴과는 딴판이었다. 박사장이 서랍을 탈탈 털고는 이상하다며 고개를 갸웃하더니 아, 하고는 바지주머니에서 물건을 하나 꺼내들었다. 열쇠였다.



"자! 우리 강아지 선물 여기있다."

"…차?"



 지민이 양손을 뻗차 열쇠가 손바닥으로 툭 떨어진다. 차를 운전할 줄 모르는 지민에게는 쓸모없는 선물이다. 어리둥절한 지민을 보고 허허 웃은 박사장은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이탈리아에 약속 준비시켜놨다."



 박사장은 거물급 디자이너들의 이름을 줄줄 읊었다. 패션쇼가 열리는 세계적 브랜드들의 쇼가 열리는 일정이다. 그렇지 않아도 참여할까 생각하고 있던 지민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기쁜 미소를 띄웠다. 박사장은 기뻐하는 지민이 부리는 애교를 받다 껄껄 웃으며 한소리를 덧붙였다.



"가서 누가 따라오면 결혼한다고 철저히 쳐내고, 위험한 상황이면 아빠가 늘 말했지? 어설프게 패는 것보다 죽이는 게 편하다고. 아빠가 뒤처리는 다 할 테니까."

"응."

"그리고 사람 한 명 붙여줄 테니까 꼭 데리고 다녀."

"응! 알았어!"



 지민은 웃고 있는 얼굴 뒤로 생각했다. 명분이 생겼다. 한 줄기 자존심으로 꾹꾹 참고 있던 피난길을 박사장이 터줬다.



 사무실에서 내려와 차에 올라탔다. 사람을 만난다는 건 피곤하니 다음으로 미룬다 전했다. 한국 떠나면 결코 우연으로도 못 마주칠 텐데. 웅얼거리며 지민은 창문에 머리를 꿍 박았다. 이번에는 우울하다. 화가 났다가, 슬펐다가 쉴 새 없는 반복이다. 뭔 상관이야, 이제. 지민이 서류를 뒤적이고 있는 그때였다. 문이 열리고 앞좌석에 누가 탄다. 지민은 당연히 남준이겠거니, 하고 다른 서류를 바라보며 들고 있는 서류를 앞좌석으로 내밀었다.



"이거 보는 거 좀 어려워. 어떻게 읽으면…."



 무언가 느낌이 달라 지민은 미간을 찌푸리며 앞좌석을 확인했다. 남준이 아니다. 어떤 정신 나간 놈이 차까지 처들어오는지 황당했다. 정장을 입은 뒷모습이 묘하게 낯이 익었다. 뭐지? 지민이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데, 남자는 아무렇지 않게 서류를 낚아챘다.



"야 너 뭐야."



 지민이 까칠하게 지적했다. 남자는 서류를 들춰보며 태연하기 짝이 없는 어조로 말했다.



"이거 공부해요? 뭐 해보게요?"



 그 익숙한 목소리가, 너무 보고 싶어 몰래 염탐까지 하러갔던 그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지민은 딱딱하게 굳어버리고 말았다. 크게 확장된 눈동자는 경악어린 빛을 담았다.



"너, 너…."



 지민은 할 말을 찾지 못했다. 미쳤다. 이건 미친 거다. 영화의 절정처럼 펼쳐진 한 장면에서 빠져나온 인물이 빠르게 생각을 표백시켰다. 그러니까, 지금 앞에 앞좌석에 앉아있는 사람이 그 사람이다. 전정국.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찾아가 빌었어도 외면한 사람이 태연하게 차문을 열고 차에 타 서류를 넘기는 건 너무나도 현실성이 없어 지민은 얼이 빠져버렸다. 놀람을 넘어 어리벙벙한 얼굴로 지민이 물었다.



"너 뭐야?"

"왜요."

"아 이거 꿈인가."



 꿈인 모양이다. 엄청나게 생생한 꿈. 지민은 볼을 꼬집어보았다. 더럽게 아프다. 꿈 치고는 너무 섬세한데. 뒷좌석을 돌아보는 전정국의 눈이 마지막으로 만난 그때와 똑같아서, 높게 뻗은 코가, 입술이 전부 다 실제 전정국이라 숨이 덜컥 막혀왔다. 눈만 크게 뜨고 굳어버린 지민은 정국을 바라보기만 했다. 깊게 숨을 들이마시는 동안 차는 정적이었다. 정국은 눈을 내리고 서류를 훑었다.



"옷, 본격적으로 공부해요? 어울리네요. 박지민씨랑."



 단조로운 어조였다. 헤어진 시간 따위는 없는 것처럼 평범했다. 상세하게 따지면 오늘은 저녁 메뉴로 야채볶음을 가져왔다 말하던 때와 비슷했다. 정국이 서류를 펄럭 넘기고 다시 지민에게로 내밀었다.



"아직 영어는 공부 많이 못 해서 몰라요."



 내밀어진 하얀 종이와 손을 보고서도 지민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머리가 띵했다. 꿈인 게 분명한데, 꿈이 아니라면 설명이 불가능한데, 꿈이 자꾸만 말을 걸어온다.



"박지민씨 밥 안 먹었다면서요. 뭐 먹을 거예요?"

"……."

"계란말이 아직도 좋아하죠? 아니면 추우니까 따뜻한 거 먹어도 좋고."

"……."

"고민하는 중이에요?"



 아니다. 전정국이 꿈에 나온 적은 단 한 번이다. 구차하게 문고리를 잡고 빌었을 때 알파로 나온 그 딱 한 번. 이건 뭐지? 살아있는 건가? 살아있는 전정국? 지민이 우주에서 날아온 외계인이라도 보는 듯한 표정으로 얼이 빠져있자, 정국은 뒷좌석을 보기 위해 틀었던 몸을 원상태로 만들었다. 운전대에 키를 꽂아넣고 말했다.



"그런 표정 하지 마요. 운전 못 해요. 심장 떨려서."



 내가 약을 했었나. 코카인 같은 거. 지민은 동물원 우리에 갇힌 사자를 구경하듯 운전대를 잡은 정국의 뒤통수를 나사가 하나 빠진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답을 한참 기다리던 정국이 생각 안 나면 집으로 갈까요, 하고 묻고서야 지민은 하얗게 바래는 머릿속을 필사적으로 붙들어 맸다. 맨 처음 해야 했던 질문을 이제야 꺼냈다.



"니, 니가 여기 왜 있어!?"

"박지민씨 아버님께서 말씀해주셨을 거 아니에요. 한사람 같이 간다고."

"…그게 너라고?"

"네."



 지민은 혼돈의 태풍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땡, 얼음처럼 굳어있던 상태가 깨지자 여러 가지 의문이 쏟아진다. 병원을 나가고 나서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건지, 왜 상황은 납치로 바뀌어있었는지, 대체 무슨 수로 박사장과는 어떻게 만난 것이며, 이 차에 탈 수 있게 된 건지. 수십 가지가 날뛰었지만 무엇보다 가장 궁금한 건.



"너 왜 온 거야?"



 왜 갑자기 지금에서야 나타났는지. 니 손으로 모든 걸 쓰레기통에 처박아버리고 왜 이제 와서? 버린 사람과 버려진 사람의 주체는 명확하다. 정국이 버렸고, 자신은 버려졌다. 그런 사람이 뜬금없이 나타나서 밥은 먹었냐느니, 심장이 떨린다느니 관계가 망가지기 전처럼 이야기한다. 벙찐 표정을 지운 지민이 더없이 딱딱하게 말했다.



"뭘 하려고 온 거야."

"말했잖아요. 박지민씨 이탈리아 가는 거 도와주러 왔다고."

"장난치지 마."

"진짠데."

"아 단순하게 취업한 거라고? 내가 병신이야? 그걸 믿게? 말해. 왜 왔어."



 더는 평범하게 이야기를 나눌 사이가 되지 못한다. 파탄 난 관계였다. 외면이라는 최악의 방법으로 끝이 났다. 지민은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정국의 태도를 보자니 슬슬 열이 받았다. 앞유리에 흐릿하게 보이는 정국의 표정은 가늠하기 어려웠다. 잠깐 침국을 유지하던 정국이 입을 뗐다.



"보고 싶어서 왔어요."



 지민은 한 문장으로 그나마 이성을 유지해주던 꼭지가 뽑혔다. 보고 싶어서? 보고 싶어서 왔다고? 너무나도 기가 차서 목이 막혀버렸다. 어이가 털려 차오르던 화마저도 증발해버렸다.



"…너 나 놀리냐?"

"아뇨. 진심인데요. 박지민씨 보고 싶어서 왔어요."



 가슴속에서 불꽃이 터졌다. 감정은 억울함과 닮아있었다. 방금 전까지도 누구는 아려오는 가슴을 부여잡고 괴로워하고 있었는데, 지금 그 원흉은 멀쩡한 표정으로 차 앞좌석에 타고 보고 싶었다는 말을 지껄인다. 거짓말일텐데. 거짓말이어야 하는데. 거짓말이어야 할 그 말이 너무나도 진심 같아서 심장이 팔딱거렸다. 단 한 번만이라도 얼굴을 보고 싶다는 그리움은 상황을 따라가지 못하는 이성에 밀려 나뒹굴었다. 지민은 눈꼬리를 날카롭게 올렸다.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왜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는데요, 박지민씨는."

"곰이야? 겨울잠이라도 잤어? 기억 중간에 잘렸어? 니가 뭐 했는지 기억 안 나?"

"전부 다 나요. 일단 차 출발시킬게요."

"사고 나서 뒹굴기 싫으면 핸들에서 손 떼. 나 지금 뭔 짓 할지 모르겠거든?"



 지민은 씨근덕거리며 정국을 노려보았다. 투명한 유리창을 두고 눈이 마주친다. 정국은 지민을 가만히 마주 보더니 운전대에서 손을 뗐다. 알았다는 듯 안전벨트도 풀어버린다. 지민은 그 와중에도 수트가 잘 어울린다 생각하는 제 머릿속이 미친 건 아닐까 생각했다.



"보고 싶어서 왔어요. 박지민씨 생각 많이 했고, 만나고 싶어서 만나러 왔어요."

"하…너 뭐 차에 치였어? 돌은 거야?"

"안타깝지만 정상이에요."



 유리창에 반사된 정국의 눈과 지민의 눈이 맞붙어 전파가 튀었다. 노려보기만 하는 눈맞춤에 침묵이 끼얹어진다. 눈을 맞춘 채, 정국은 혀로 입술을 축이고 넥타이를 느슨하게 끌렀다. 지민은 먼저 시선을 피했다.


 정말 짜증나게도, 빌어먹게도 화가 나면서도 그 큰 눈을 마주하고 있으니 가슴이 일렁거렸다. 그 눈과 마주치자마자 깨달았다. 한 달 동안 멀쩡한 척 살아보려던 노력은 모두 쓸모없는 짓이었다. 허하다 생각했던 가슴속은 심지어 빈자리로 남지 않고, 여전히 정국이 눌러앉아있었다. 그리움의 무게는 하나도 줄지 않았다. 아무래도 지금 당장 버틴다면 정말 아무것도 묻지 않고 단지 전정국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넘어갈 것 같았다. 징하다, 나도. 판단한 지민이 차 문을 열려는 순간이었다.



"맞아요. 사실 정신 나갔어요. 문 앞에 쭈그려 앉아서 우는 박지민씨 보는 순간 반쯤 미친 거 같아요."



 지민은 숨을 흡, 멈췄다. 동그랗게 커진 눈이 놀라 굳어버렸다. 정국을 마주한 얼굴보다 두 배는 놀란 얼굴이었다. 대체 언제? 그게 꿈이 아니었나. 유일한 꿈이라고 생각했는데. 정국은 한 번 물꼬를 튼 말을 멈출 생각이 없는지 쭉쭉 이어나갔다.



"도망가려고 했는데 박지민씨가 발목 잡았고 거기에 주저앉아버렸어요. 박지민씨 못 떠나요. 온종일 박지민씨 생각만 나고, 거기다가 떠들어대는 뉴스도 박지민씨 이야기라 한 눈도 못 팔고, 밥 먹기 전에도 박지민씨 생각, 자기 전에도 박지민씨 생각. 내가 이런 말을 할 거라곤 상상도 못 했는데, 아무래도 미친 게 확실해요."



 봤다고 한다. 지민은 말을 까먹은 사람처럼 멍청히 듣고만 있었다.



"어떻게 여기 있나 궁금하다는 거 알겠는데. 간단히 설명하면 일 배우는 거 빌미로 박지민씨 옆자리 차지하려고요."

"……."

"박지민씨가 꺼지라고 해도 옆에 있을 거고, 그냥 뭘 해도 옆에 있을라고요."



 지민은 느리게, 아주 느리게 정국의 말을 이해했다. 날 좋아한다는 거야? 착각이 아니야? 그 만약이라는 가정 하나로 정국이 이대로 미안하다고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자 말한다면 그동안 뽑은 눈물의 양도 상관없이, 얼마나 가슴이 아팠는지조차 까먹고 고개를 끄덕일 것 같았다. 잘못을 빌기도 전에 용서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그래서 지금 니가 나한테 말하는 게. 지민이 달달 떨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확실히 물으려던 때였다.



"그러니까 박지민씨는 그대로 결혼해요."

"…뭐?"



 잘 흘러가던 테잎이 싹뚝 끊겼다. 결혼을, 하라고? 오늘만 벌써 세 번째 일어나선 안 되는 일들이 일어났다. 첫 번째는 헤어진 전정국이 멀쩡하게 차에 탄 일, 두 번째는 마지막 애걸을 전정국이 봤다 말한 일, 마지막으로는 다른 사람이랑 결혼하라 전정국이 권하는 일. 혹시 진도를 급하게 빼 청혼으로 잘못 말한 건가 가만 쳐다봐도 정국은 말을 정정할 생각이 없다.



"결혼…하자는 거야?"

"하자 말고 하라고요."

"…그러니까, 너랑 나?"



 정국이 쐐기를 박았다.



"그 알파랑 결혼하라고요. 그게 박지민씨한테는 유리하니까."



 이제 뽑힐 어이도 없는데. 지민은 기가 막힌 헛숨을 길게 토했다. 너무 어이가 없어 하! 하고 헛숨을 토한 다음 고개를 한 바퀴 꺾듯 돌렸다. 흡사 얼음물을 한 바가지 뒤집어쓴 것처럼 애틋했던 마음도, 분노도 모조리 싸늘하게 변해버렸다.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전정국 너 이중인격이야? 결혼을 하라고? 나만 이해가 안 가는 거야, 아니면 니가 이해 못할 소리를 하는 거야."

"나쁘게 생각하지 마요."

"야 내려."

"잘 들어봐요, 박지민씨. 문제가 생각만큼 간단하지 않아요."



 지민은 팔짱을 끼고 삐딱하게 입술을 짓씹었다. 스스로가 너무도 한심하고 불쌍했다. 남이랑 결혼하라고 하는 상대를 놓고 용서부터 할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니. 걷잡을 수 없이 울컥했다. 밑바닥으로 끌어내리고는, 찾아와서 또 한 번 밑바닥으로 처박아버리는 정국이 이 순간만큼은 어떤 말로 표현하지 못할 정도로 원망스러웠다. 유리창으로 마주보는 정국이 입술을 달싹거리자마자, 지민이 먼저 말을 가로챘다.



"야."



 안 듣고 싶어. 니가 뭔 이유를 갖다 붙이든 이해 못 해.



"너 진짜 개새끼다."



 정국은 묵묵부답이었다. 그러다 숨이 막히는지 넥타이를 조금 더 풀어냈다. 지민은 한달 동안 가슴 속을 시리게 괴롭히던 어떤 감정보다 지금이 더 화가 났다. 입에 일렁이는 말은 보고 싶었다, 사랑한다, 돌아와줘서 고맙다, 하는 종류의 말 대신 나오는 말은 분노와 배신감에 찬 가시가 돋친 것이었다. 서늘하게 식은 목소리는 지민이 정국에게 한 번도 내본 적 없는 차가움이 담겨있었다.



"내가 니 인생인데."

"……."

"넌 니 인생 그렇게 남한테 쉽게 내줘?"

"이건 그런 게 아니라…."



 지민이 냉랭하게 말허리를 잘라냈다.



"그리고 너 뭔가 착각하는데, 너랑 나 이제 아무 사이도 아니야. 니가 뭔데 결혼하라 마라야."

"……."

"아니 우리가 무슨 사이긴 했냐?"

"……."

"내려. 그리고 이탈리아, 그거 너 오지 마."



 정국은 목각인형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차는 다시 정적이 내려앉았다. 낮은 호흡만 오가는 공간에서 지민이 니가 안 내리면 내가 내릴게, 하고 문을 여는 순간 정국이 문을 열었다.



"다음에 봐요."



 혼자 남겨진 지민은 짧은 시간동안 일어난 일을 믿을 수가 없어 눈을 감았다. 개자식. 서럽다. 눈물이 뚝뚝 흘렀다. 난 어떻게 저런 새끼한테 마음을 뺏긴 거지. 뭐가 좋다고 계속 좋은지 모르겠다. 잠시 뒤 차에 탄 남준이 눈물을 흘리는 지민을 보고 놀라 휴지를 건넸다. 지민은 눈물을 닦으며 남준을 향해 웅얼거렸다.



"이탈리아 가는 거 짐 싸."



 일단 고민 좀 해봐야겠다. 나쁜 새끼. 어디서 저런 병든 생각을 하고 온 거야. 다소 마르긴 했지만 건강해보이는 얼굴에 계속 무거웠던 궁금증이 한시름 가벼워졌다. 눈물이 새는 와중에도, 화가 나서 정국을 내쫓은 와중에도 웃기는 건 작은 희망이 고개를 처든다는 거다. 아직 끝이 아니다. 그러면 방법은 뭐가 있을까.


 고쳐서 가져야지. 지민은 눈물 서린 눈으로 독하게 결심했다.








***








 남준은 비행기 타기 전부터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살벌하게 스파크를 튀기는 오메가와 베타 사이에서 딱 죽을 맛이었다. 이제야 깨달았다. 알파와 오메가가 문제가 아니라, 사람 마음이 문제인 거다. 지민이 팔짱을 끼고 도도하게 턱을 치켜든 채 빼쪽하게 지적했다.



"너 가지 말라고 했는데 왜 타."

"사장님께서 가라 했어요. 그리고 말했잖아요. 박지민씨 곁에 있을 거라고."

"누구 마음대로? 내려. 가지마. 김비서, 얘 캐리어 빼."

"싫은데요. 캐리어 다시 실어주세요. 부탁드리겠습니다."

"…진짜 미쳤지?"

"그거 박지민씨가 할 말은 아닐걸요? 이미 박지민씨는 3개월 동안 무단침입한 죄가 있잖아요."

"뭐, 뭐? 야…!"



 지민은 벙 찐 표정을 짓다 시뻘겋게 변해버렸다. 유치하고 쓸모없는 말싸움은 계속되었다. 방세 냈거든! 정국은 철벽같은 표정으로 뻔뻔하게 응수했다. 받을 생각 없는데요? 내가 안 받으면 박지민씨는 평생 무단침입이죠. 난감해하는 남준이 어디에서 파고들어 싸움을 끊어낼까 고민할 즈음, 지민은 눈을 가늘게 좁히고 어깨를 파르르 떨다가 고개를 팍 돌려버렸다.



"넌 비행기에 매달려서 와!"



 부러 화가 잔뜩 난 발걸음으로 쿵쿵 전용기 안으로 사라진다. 기장이 눈치를 보다 물었다.



"출발해도 되겠습니까?"

"예, 실례했습니다."



 정국은 예절 바르게 꾸벅 고개를 숙이고 남준에게도 인사했다. 언제 팔팔 뛰는 지민과 말싸움을 했냐는 듯 차분하고 친절한 말투였다.



"소란 피워서 죄송합니다."



 대단한 놈…. 남준은 혀를 내둘렀다. 지민이 일방적으로 매달리는 바른 베타 청년이라 생각했는데, 만만찮은 또라이다. 동족끼리는 서로 알아보기라도 하나. 이미 남준이 들은 소식만으로도 전정국은 어마어마한 독종이었다. 수소문해 정국을 찾은 박사장에게 대범하게 돈 대신 일을 배우게 해달라고 말하는 거하며, 박사장이 무리하게 내린 일을 악착같이 완수한 집착력 하며, 일을 그리하고도 잠은 자지도 않는 건지 매일매일 놀랄 만큼 공부도 해온다.


 나름대로 안면이 있는 박사장의 비서에게 들은 바로는 박사장은 정국을 바로 밑에 둘 생각이 없다했다. 박사장은 뛰어난 사업가였고, 현실적으로 수많은 인재가 널린 사회에서 가진 것이라곤 열정과 젊은이 고작인 정국은 영 달갑지 않은 존재였다. 아무런 기술도 지식도 없는 사람이 대기업 회장 바로 밑에 들어가 일을 배운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박사장이 적당히 밖으로 내몰아 일자리를 준 것을, 정국은 자신의 능력으로 기어 올라와 차지했다. 얼마나 노력을 쏟아부었을지 가늠조차 되지 않아 남준은 얌전히 지민의 옆자리를 점령한 정국을 곁눈질로 바라보았다.



"자요. 꽤 시간 걸려요."

"니가 말 안 해도 잘 거였어. 그리고 너 왜 비행기 바퀴에 타라니까 여기 타? 보는 거 불편하니까 다른 쪽으로 꺼져."

"불편해해요. 그렇게 내 생각 좀 해주면 난 좋고."



 지민이 얄밉다는 듯 정국을 노려보다 등을 돌려버린다. 침대 같은 좌석에서 아예 누워버리기까지 했다. 남준은 지민의 뒷모습을 보는 정국의 표정이, 옆에서 그동안 지켜본 지민이 짓던 괴로운 표정보다 더 써 보이는 것만 같았다. 둘이 서로 사랑하는 게 빤히 보이는데 왜 저럴까. 역시 베타라서? 도련님은 상관없어 보이던데. 남준은 이해할 수 없다며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남의 연애사는 신경 쓰는 게 아니지. 남준은 잠을 청했다.











 호텔은 스위트룸이 예약되어있었다. 이탈리아 시내 중심에 차려진 호텔은 바로크 시대 건물양식을 흉내 낸 최고급이었다. 벨보이들이 캐리어를 날라주었고, 지민이 혼자 쓰는 방 양옆으로 남준과 정국이 각 방을 하나씩 썼다. 지민은 카펫이 깔린 호텔 문앞에서 쌩하니 정국과 눈도 마주치지 않고 쾅! 문을 닫았다.


 드디어 혼자다. 지민은 문에 기대 다리에 힘이 풀려 주르륵 주저앉았다.



"…미치겠네."



 한 달간은 슬픔과 우울, 분노가 번갈아가며 날뛰었다면, 현재는 그저 정국을 따라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행동하고 싶은 마음과 배신감이 번걸아가며 감정을 자극했다. 지민은 볼을 찹찹 치며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너 미쳤어? 너 박지민이야, 박지민! 정신 차려! 쟤 좋아할래!?"



 거기서 전정국한테 설레면 어쩌라는 거야. 주인 속도 모르고 좋다 뛰는 심장에게 차라리 멎어버리라 악담을 외치던 지민은 자리에서 빙글빙글 돌다 복잡한 머리를 붙잡고 씩씩거렸다. 산 정상에 올라가서 왁왁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다. 비행기에서 자지 못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차에서 정국을 만나고 내내 싱숭생숭하게 밤을 새웠는데도 못 잤다. 어떻게 자. 온몸이 시멘트로 만들어진 사람이라면 잤을 수도 있다.


 지민은 손톱을 까득까득 씹었다. 자는 척 눈을 감고 있을 때, 정국이 담요를 덮어주는 손길을 느끼고 움찔하고 말았다. 티 났나. 알아챘나. 갈등하다 결국 자는 척 연기하고 자는 동안 얼굴 위로 꽂히는 시선은 얼굴을 태울 것만 같았다. 얜 왜 나한테 쓸데없이 너무 잘 해주는 거야? 아니 그야 날 좋아하니까…. 거기까지 생각하다 또 화산처럼 열이 터져버렸다.



"개자식! 뭐? 뭐어어? 결혼? 부케로 처맞아도 모자라!"



 그런데 걔 그때 알파 페로몬은 뭐야. 분명 페로몬이 느껴졌고, 때문에 더 꿈이라 여겼다. 고민하던 지민은 얼마 지나지 않아 단순하게 생각을 끊어버렸다. 전정국이 지금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알파한테 가라고 지껄이고 있는데 알파는 무슨.


 전정국은 어렵다. 너무 어렵다. 다시 돌아왔으면 돌아온 거지, 잡혀준다고 했으면 잡혀주는 거지 왜 김태형이랑 결혼하라는 소리 같은 걸 지껄이는 거야. 유리창으로 비추던 단호한 큰 눈을 떠올리니 또 답답함이 몰려온다.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고? 대체 복잡해야 할 이유가 뭐가 있는데. 니가 날 좋아하고, 내가 널 좋아하는데.



"망할 자식…."



 지민은 침대에 뛰어들어 초조함으로 몸을 동그랗게 말았다. 이제 뭘 어떻게 해야하지. 놓지도 못하고, 가지고 싶어서 안달은 나는데 완전하지 않은 전정국은 싫다. 태형과 결혼하라는 정국의 말을 따른다? 최면에 걸리지 않는 이상 그럴 일은 없다 지민은 확신할 수 있었다. 지민은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완전히 가지거나, 완전히 잃거나. 둘 중 하나다. 중간에 있는 선택지는 없다.



"……."



 결혼식이 언제까지지. 지민은 머릿속으로 날짜를 헤아렸다. 여기서 물러나면. 여기서도 원하는 답이 나오지 않는다면. 지민은 주먹을 꼭 쥐었다. 이번이야말로 진짜 끝이다.









***








 일정은 빡빡했다. 세계적인 브랜드들은 겹치지 않는 날짜로 하루 건너마다 쇼가 자리 잡고 있었다. 새로운 상반기 시즌을 맞아 신상들이 봇물 터지듯 흘러나오는 패션쇼는 전 세계 옷에 관심 있는 셀러브리티들이 죄다 참여했다. 지민은 그 속에 섞여 쇼를 구경하고 부유한 상류층자제로서의 특권을 누렸다.


 정국과는 말 한마디 섞지 않았다. 엄밀히 따진다면 상하관계로는 섞긴 했다. 박지민씨, 그쪽 길 아니에요. 박지민씨 신발끈 풀렸어요 이리와요, 묶어줄 테니까. 정국이 신발끈을 묶는 동안 지민은 수그리고 있는 뒤통수를 보면서 입술을 꽉 깨물었다. 부풀은 정국의 애정에 설레기도 전에 괘씸함이 먼저 고개를 들고 일어났다. 이러면서 딴 사람한테 나를 보낼 생각을 해? 그밖에도 정국은 사사건건 지민을 챙기고 들었고, 할 일이 사라진 남준은 미묘한 공기의 흐름이 오가는 둘을 어색하게 서서 바라보기만 했다.


 지민은 이번 여행이 폭삭 망했다는 쪽으로 확언할 수 있었다. 평소라면 침을 줄줄 흘렸을 옷들은 모두 눈에서 겉돌았다. 시끌벅적한 노래와 모델들의 워킹도 눈에 잡히지 않는다. 전정국이 무대에 옷을 입고 걸어 나오면 좀 봤을지도 모른다. 지민은 피날레가 끝나기도 전에 밖으로 나왔다. 정국이 멀쩡한 얼굴로 맞아주었다.



"빨리 나왔네요."

"도련님 인사는…?"

"피곤해. 김비서가 대신 인사 전해줘."



 박사장이 특별히 마련해놓은 자리지만 지금 빠진 정신상태로는 헛소리나 지껄이지 않으면 다행이다. 애먼 데 짜증을 낼 수도 있다. 옷을 얼마나 못 만들면 보는데도 전정국 생각이 나고, 노래는 우울해 죽겠는데 뭘 좋다고 그렇게 신나는 걸 틀어놓는 거냔 말이다.



"그래도 도련님 시간을 쪼개 부탁…."



 지민이 심통 맞게 입술을 쭉 뺀다. 이크. 남준은 가라앉은 지민의 기분을 알아차리고 뒷말을 꿀꺽 삼켰다.



"대신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차 안에 들어가 계시죠. 정국씨 부탁드려요."



 남준은 다녀오겠다며 살그머니 베타와 오메가를 피해 패션쇼장 안으로 사라졌다.



"가죠."



 지민은 차로 곧장 걸어가는 정국의 뒷모습을 보고 이를 으득 갈았다. 시선도 안 맞추고 먼저 차로 들어가 버리는 뒷모습에 열이 뻗쳤다. 왜 전정국이 돌아온 건데 이딴 생각이나 하고 있어야 하는 거야.



"마셔요."



 차에 타자마자 정국이 물병을 내밀었다. 지민은 불퉁하게 됐다며 병을 내민 손을 치웠다. 정국은 꿋꿋이 병을 내밀다 지민의 손에 병을 쥐여주었다.



"뭐야. 됐다고."

"아까부터 목말랐잖아요. 내가 주는 게 싫은 거면 새로 사 올게요."



 지민은 긴장을 하면 목이 타는 버릇이 있었다. 아침부터 쇼와 박사장이 잡아준 약속을 돌아다니며 긴장을 했고, 쉬는 동안 물 한모금 마시지 못했다. 거기다 더해 정국과 신경전까지 벌이고 있으니 아침도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전정국이 어떻게 알았지. 지민은 흠칫했지만 티 내지 않고 천천히 물을 마셨다.



"……."

"……."



 막무가내로 처음 집을 처들어갔을 때조차 이런 어색함은 없었다. 남준이 자리를 비우면 사슬 같은 침묵은 계속되었다. 벌써 이탈리아에 머문지 4일째로 익숙해질 만도 한데, 익숙해지질 않는다. 아마 단칸방에서 정국과 있을 때 항상 사랑을 조잘거리기 바쁜 탓일지도 모른다.


 지민은 물통만 만지작거렸다. 그냥 만나고 올 걸 그랬나. 남준과 함께 항상 셋이 있었기 때문에 더 낯설었다. 지민은 물통도 바닥에 툭 버린 뒤 다리를 꼬고 손만 까딱거리다 무어라도 해야겠지 싶어 차에 꽂혀있던 신문을 뺐다. 남준이 보고 있던 신문이다. 정국이 빤히 신문을 보고 있는 지민을 쳐다보더니 한마디 뱉었다.



"…그거 지금 이탈리아어인데요?"

"그래서 뭐."

"이탈리아어 못하잖아요."

"배웠어."

"거꾸로 든 거 같은데."



 지민은 신경질적으로 신문을 팍 접었다. 차에 아무렇게나 버리자 정국이 이런 버릇은 고치라 타박하며 신문과 물통을 줍는다. 지민은 선글라스를 거칠게 벗으며 바락 외쳤다.



"니가 무슨 상관이야!"

"상관 많죠. 박지민씨 좋아하니까 신경이 쓰여요."



 거기선 또 덜컥 말이 막혔다. 정국의 눈동자는 당연한 사실을 읊는 것처럼 평범하다. 정신차려. 이걸로 흔들리면 안 돼. 또 질 거야, 박지민? 지민은 주먹을 꽉 쥐었다. 심장이 덜컹덜컹 흔들리면서도 정국이 뱉은 말이 떠올라 눈을 마주보면 울컥거렸다. 여행 내내 참고 있던 감정에 홍수가 났다. 지민은 따지듯 말했다.



"가라며! 김태형이랑 결혼하라며! 좋아해? 그딴 소리 지껄이지 마. 넌 자격 없어."

"가라고는 안 했어요. 결혼하라고만 했지."

"하? 너 지금, 지금 나한테 결혼해서, 널 세컨드로 두라고 지껄이고 있는 거야?"

"누가 세컨드에요. 신혼생활은 나랑 보냈잖아요. 그러니까 내가 퍼스트지."

"참나!"



 되풀이된다. 미약하게 덜컹거리던 심장 대신 화가 그 자리를 메꾸었다. 끝까지 부정은 안 하지. 세컨드, 퍼스트. 그룹까지 나누고 앉아있네, 이 망할 자식. 듣고 싶었던 잠시 내가 헛소리를 했다, 하는 말이 아닌 그룹까지 나누고 있는 정국은 머릿속에서 부글부글 끓고 있던 지민의 화산을 터뜨렸다. 지민은 되는 대로 외쳤다.



"신혼? 신호온? 떡 안쳤잖아! 신혼은 개뿔!"



 정국은 표정 하나 꿈틀하지 않고 대꾸했다.



"떡은 사랑하니까 치는 거죠. 사랑한다고 했잖아요."

"정신이 나갔었나 보지!"

"지금도 같이 정신 나가면 되겠네요. 이미 우리 키스는 세 번 했는데."

"뭐!"



 정국은 뻔뻔한 표정으로 손가락을 꼽았다. 첫 번째, 히트사이클 왔던 순간. 두 번째, 박지민씨 병원에 신고하기 전 병실에서. 세 번째, 마지막으로 박지민씨 처들어왔을 때 문 앞에서. 지민은 당황하고 말았다. 맞다. 꿈이 아니라고 했으니 그건 현실이다. 먼저 정국을 끌어당기고 입술을 붙였었다. 그런데 병원은 뭐야. 당황한 대로 상황이 불리해지자 지민은 한 발 뺐다.



"…기억에 없거든?"

"난 다 나요. 박지민씨가 어떻게 혀 감아왔고, 소리는 어떻게 냈는…."

"그, 그딴 것도 키스라고 치냐!? 그딴, 그딴, 넌!"



 언젠가 누가 던졌던 소리다. 지민은 아차, 했다. 하나라도 추억에 관련된 걸 꺼내면 안 되는데. 멀어졌다 해야 하는데 아직도 곱씹고 있다는 걸 티 내면 어떡하라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정국은 크게 반응하지 않았다. 아니, 다른 쪽으로 크다 못해 격정적으로 반응했다. 미간을 찡그리고 급격히 목소리 온도가 낮아졌다.



"그딴 거라고요?"

"그래, 그딴거! 넌! 넌 이제 나한테 그딴거야! 그 정도라고!"



 공기는 미묘하게 굴러갔다. 일촉즉발이다. 정국은 지민을 집아 삼킬 듯 마주보았고, 지민은 지지 않고 같이 노려보았다. 정국이 하나하나 즈려밟듯 말문을 열었다.



"내가 왜 그런 말을 하…."

"도련님, 많이 기다리셨습니까?"



 남준이 들어왔다. 앞좌석에 앉은 남준은 얼은 코를 부여잡고 끙끙거렸다. 발이 시려 더욱 빨리 뛰었다. 날씨가 꽤 많이 춥네요, 중얼거린 남준은 두 명이나 타고있음에도 아무 목소리가 들리지 않은 뒷좌석으로 고개를 돌렸다. 서로 각자 반대방향의 창문을 바라보며 등을 돌리고 있는 지민과 정국이 보인다. 뭐지. 남준이 운전대를 잡으며 말했다.



"호텔로 출발할까요?"



 지민이 고개를 끄덕인다. 뭐가 있었나. 조금은 심상찮은 분위기를 감지한 남준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차를 출발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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