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오메가나 알파끼리는 서로를 알아볼 수 있었다. 의도적으로 페로몬을 숨기거나 페로몬 샤워를 통해 잠깐 위장이 가능할 뿐이다. 채윤은 정국에게 발려있던 페로몬의 주인을 맞부딪히자 당황하고 있었다. 얌전히 마음 정리를 하고 있던 채윤의 입장으로서는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떨어졌다. 우성오메가를 만난 것은 처음이었고, 본능적으로 자신이 아래라는 것을 느꼈다. 희귀한 우성과 평범한 오메가는 격이 틀렸다.
특히나 박지민이라는 우성오메가는 적의를 숨기지 않았다. 대놓고 적이라 선포했다. 정국은 자신의 것이니 넘보지 말라 페로몬이 으르렁 경고하고 있었다. 페로몬이 다가 아니었다. 지민은 실제로도 빈 테이블을 닦고 있는 채윤에게 다가왔다. 대뜸 지민이 던졌다.
"너지?"
"……."
"아닌 척 하지 마. 다 알고 있거든?"
존대도 없다. 채윤은 기분이 와락 상했다. 정국을 좋아하는 것은 맞다. 우성오메가가 표시해놔도 미련을 버리지 못할 만큼 좋았다. 그리고 오늘, 지민을 만났을 때 채윤은 끝이라 직감했다. 사랑의 끝이다. 채윤은 평범한 오메가였고, 욕심을 접을 줄 알았다. 가게 사람들 앞에서의 햇살 같은 지민은 정국에게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 앞에서 삐딱한 표정으로 거만한 표정을 짓는 사람은 정국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건방지다. 척 보기에도 느낄 수 있었다. 앞의 행동은 연기일 뿐이고, 이 모습이 원래 지민이라는 것을. 아까 짓던 표정과 달리 지금 짓는 표정은 꼭 맞는 옷을 갖춰 입은 느낌이었다. 씁쓸했던 가슴 한쪽에서 불씨가 되살아났다. 이런 사람 때문에 내가 포기해야 한다고? 화가 났다. 채윤은 지지 않고 답했다.
"그런데요?"
"되게 뻔뻔하네. 남이 찍은 거 훔치는 버릇은 어디서 배워먹은 거야?"
"그쪽이 더 뻔뻔한 거 아닌가요? 정국씨는 지민씨랑 사귀는 것도 아닌 거 같던데, 페로몬을 그렇게 뿌려놓는 건 예의에 어긋난다는 거 몰라요?"
"뭐?"
"룸메이트잖아요? 단순한."
순간 거만한 지민의 표정이 흔들렸다. 채윤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정국과 지민은 사귀는 사이가 아니다. 켜진 승부욕에 기름이 들이 부어진다. 우성오메가를 상대로 승산이 보이는 것도 같았다.
"그래서?"
"…정국씨를 당신이 가진 것처럼 굴지 마세요. 지민씨라면 알고 계시겠죠. 제가 정국씨한테 관심 가지고 있다는 거. 정국씨가 선택하게 해주세요."
"뭐 지금 나한테 선의의 경쟁이라도 하자는 거야?"
"네."
지민은 이내 흔들리는 표정을 지웠다. 대신 비웃음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뭔가 착각하나본데, 이건 경쟁이 아니라 도둑질이야."
"네?"
"전정국은 반드시 나를 좋아하게 될 거니까. 네가 하고 있는 건 도둑질이라고."
채윤은 당황스러웠다. 무슨 자신감인지 지민은 아주 당당했다. 정국이 자신을 좋아할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동시에, 채윤은 기분이 더욱 나빠졌다. 이런 버릇없고 개념 없는 사람에게 정국을 보냈다가는 반드시 불행할 것이다. 보내주는 법도 사랑이라지만 그것은 보내주는 대상이 자신보다 나을 때의 이야기였다. 지민이 자신보다 나은 점이라고는 우성이란 점 뿐이었다.
"당신 이런 거 정국씨도 아는 건가요?"
"전정국? 아주 잘 알지. 내가 생각 없는 것도 알고, 얼마나 욕심쟁이인지도 알아."
"……."
"내가 자기 좋아하는 것도 알고 있어."
채윤은 말을 잃었다. 밑도 끝도 없는 당당함으로 밀고 나온 지민은 도도한 고양이처럼 콧대를 높이 치켜들었다.
"그런데도 나랑 같이 사네?"
강제성이 짙은 동거로 시작했다는 말은 쏙 감추고 거짓말을 덕지덕지 발라 대꾸했다. 지민은 얼이 빠진 채윤을 지나쳐 음료수병을 들고 손님 테이블로 다가갔다. 맛있게 드세요. 살살 눈웃음을 치고 돌아나오자 저 멀리 시연이 불렀다.
"지민아! 6번 테이블 주문!"
"네, 시연누나!"
지민이 뒤돌며 답했다. 상큼한 눈웃음이 채윤을 노려볼 때와는 완전히 달랐다. 지민이 마지막 말을 남기고 떠났다.
"나는 내 꺼 건드리는 거 아주 싫어해. 그러니까 도둑질 그만하고 꺼져."
채윤은 주먹을 꽉 쥐었다. 화가 나 참을 수 없었다. 세상에 무슨 저런 사람이 다 있나 싶었다.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아주 재수 없었다. 사람에 따라 차별하는 자세며, 말하는 방식 자체가 글러 먹었다. 방금 전까지도 살벌하게 경고해놓고, 테이블에 가서는 생글생글 웃는 낯짝은 이중인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저런 사람이랑 같이 산다고? 원해서? 거짓말일 것이다. 채윤은 정국이 불쌍하기까지 했다.
분노가 진정된 것은, 어디선가 풍기는 알파 페로몬 때문이었다. 기분이 더 저조해진다. 자신이 일한 직후부터 종종 소문을 들은 알파들이 술집에 오곤 했다. 추근거리며 손님이라는 위치를 이용해 교묘히 성희롱했다. 그때마다 사장이나 남자 아르바이트생들이 말리긴 했지만, 알파들은 끊임없이 찾아와 행패를 부렸다. 알파들을 강경하게 쳐내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이 돈이 많았으며, 이 동네를 주름잡고 있는 조직에 속해있다는 소문이 있는 탓이었다.
채윤은 알파의 페로몬이 나오는 방향을 쳐다봤다. 6번 테이블. 지민이 주문을 받으러 간 곳이었다. 채윤은 저도 모르게 꼴좋다는 생각을 했다. 아마 자신을 지명하려던 알파들은, 우성인 지민을 발견하고 노선을 튼 것이다. 뻔했다. 우성을 노리는 알파는 언제나 득실득실했다. 아니나 다를까 알파들이 지민에게 치근덕거렸다. 주문 내역서를 쓰는 손을 쓰다듬거나 볼을 꼬집었다. 채윤이 당한 것보다 더 직접적이었다. 여성오메가인 자신보다 남성오메가인 지민은 밖의 눈치를 살필 필요가 없다 판단한 듯싶었다.
"어딜가. 잠깐 앉아서 술 좀 따라봐라. 서비스 좀 받아보자."
알파들은 아예 지민을 자리에 붙잡아 앉혔다. 사근사근 웃고 있는 지민의 미소가 점차 어두워졌다. 입꼬리가 파르르 떨린다. 그렇지. 싫겠지. 곧 있으면 히트사이클이라 광고하고 있는 지민의 페로몬을 봤을 때 더 괴로울 것이다. 채윤은 지민의 본성이 만천하에 드러나기를 바랐다. 저기서 목소리라도 높이며, 쌍욕이라도 했으면 좋겠다. 정국이 알고 정이 떨어져 버렸으면 좋겠다.
"손니임 지금은 좀 곤란해서요."
"곤란하긴! 손님이, 어? 시키면 해야지. 집은 어디야?"
지민을 옆에 끌어다 앉힌 알파가 지민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순간적으로 지민이 뻣뻣하게 굳는 것이 채윤의 눈에도 보였다. 주방 쪽에서도 저거 말려야하는 거 아니냐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채윤은 정국을 눈으로 찾았다. 정국은 6번 테이블을 못 박힌 듯 쳐다보고 있었다.
"저 진짜 안 되거든요 손님. 양해 좀 구할게요. 주문이 많이 밀려서요."
"다른 애 시켜. 너 하나야? 아니잖아."
"손님 죄송해요."
"앙탈 그만 부려. 내가 이뻐해 주려는 거야."
"저기 손님, 손 좀 떼주세요."
지민이 연신 조용조용한 목소리로 알파의 손을 떼어내려 했다. 알파는 알파랍시고 페로몬으로 지민을 농락했다. 손이 허벅지까지 내려간 순간 지민의 안색이 싹 굳었다. 지민이 알파의 귀에 대고 무언가를 속삭였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주방 쪽에서 쾅 커다란 소음이 터졌다. 쟁반이 바닥에서 잔소음을 남기며 덜그럭거렸다. 가게의 모든 시선이 쟁반을 던진 정국 쪽으로 쏠렸다. 그 속에 알파와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지민도 포함되어있었다. 정국이 6번 테이블로 걸어갔다.
"손님, 하지 마시죠."
"뭐, 뭐야. 지금 손님한테 덤비는 거야?"
정국이 알파에게 붙들린 지민을 빼앗듯 일으켜 보호하는 것처럼 자신의 뒤쪽으로 보냈다.
"명백한 성희롱입니다. 계속하신다면 경찰 부르겠습니다."
"하 고작 종업원 새끼가 야 너 이름 뭐야. 전정국? 새파랗게 어린놈의 자식이 지금!"
"아까 하신 행동 범죄입니다. 나가주세요."
"뭐, 뭐? 나가? 나아가아?! 여기 사장 누구야! 이딴 교육도 안 된 직원을 쓰…."
알파가 허리에 팔을 짚고 일어나 본격적으로 난리를 피우려는 찰나였다. 순간, 정국의 뒤쪽에 숨겨져 빼꼼 얼굴을 내민 지민을 보고 멈칫했다. 처음엔 고개를 갸웃하더니, 곧 귀신이라도 본 얼굴로 변했다. 알파는 사색이 되어 허겁지겁 가게를 빠져나갔다. 경찰을 부르려 전화기를 들고 있던 술집사장도, 숨소리 하나 못 내고 긴장하고 있던 아르바이트생들도 안도의 숨을 토했다. 정국이 지민을 이끌고 주방 안쪽으로 들어가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지민아, 괜찮아?"
"네 괜찮아요."
지민이 어설프게 헤헤 웃었다. 억지미소다. 정국의 얼굴은 굳어있었다. 채윤은 그런 정국의 표정을 처음 봤다. 아무리 진상인 손님이 들어와도 정국은 화 한 번 내지 않았다. 덕분에 정국은 진상을 부리는 테이블로 보내지기도 했다. 정국이 화를 꾹 눌러 참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사장님, 오늘 일찍 퇴근할 수 있을까요?"
"어, 어 그래. 지민씨가 많이 놀란 거 같은데. 지민씨 죄송해요. 가게 관리를 못해서 그만…."
"괜찮아요, 사장님. 정국이랑 이만 들어가 볼게요. 다음에 또 오겠습니다!"
지민을 이끌고 정국이 가게를 빠져나갔다. 채윤은 손끝이 빳빳하게 굳어버렸다. 자신을 좋아하게 될 거라며 당당히 소리치던 무논리 지민의 말에 졌다. 정국이 선택하게 두라는 자신의 말조차 들먹일 수 없게 됐다. 인정해야만 했다. 패배였다. 정국은 한 번도 자신이 알파들에게 당하고 있을 때 감정적으로 나선 적이 없었다.
지민은 집에 돌아가는 내내 정국의 눈치를 살폈다. 가게를 나온 순간부터 정국은 말 한마디 없었다. 아씨, 뭐지. 내가 사실 전정국이랑 약혼한 사이라고 시연누나한테 뻥친 거 들었나. 아니면 그 오메가랑 한판 치고받고 싸울 뻔했다는 거 안 건가. 사기에, 싸움미수에, 하도 잘못한 것이 많아 지민은 머리를 싸매고 고민했다. 뭐지? 뭐가 걸린거지?
"전정국, 화났어?"
"……."
"정국아?"
아 모르겠다. 지민은 그래도 나름 자신이 잘 대처했다고 생각했다. 그 오메가가 하는 말에 하마터면 너 죽고 나 죽자 덤빌 뻔했지만, 어쨌거나 참았다. 걔가 혹시 전정국한테 꼬지르는 거 아냐. 내가 자기 협박했다고? 전정국은 다행히 관심 없어 보이는 거 같긴 하던데. 지민이 참을 수 있던 이유는 거기에 있었다. 일하는 내내 정국은 채윤에게 무심했다. 그래, 천하의 박지민한테도 안 넘어오는데 그깟 오메가에게 넘어가겠어. 그렇고말고. 지민은 정국의 굳은 심지가 다행이라 여기고 채윤에게 관심을 껐다.
지민은 딱딱한 정국의 얼굴을 흘금 살폈다. 시연이 말했을 가능성도 재보았지만, 그것도 희미했다. 정국이가 아르바이트장에서는 비밀연애로 하고 싶다고 해서, 시연누나한테만 살짝 알려드리는 거예요. 지민은 있는 대로 끼를 떨며 윙크까지 했다. 홀린 얼굴의 시연은 무덤까지 모르는 척하겠다며 머리가 떨어져라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럼 뭐지. 지민은 마지막 상황을 떠올렸다. 알파새끼들 때문인가. 아닌데, 잘 대처했는데. 하지 말라 해도 계속 추근거리는 알파에 지민은 천사표 연기를 지우고 속삭였다. 페로몬으로 얽매여 완전히 힘을 쓸 수 없기 전에 말이다. 너 시발 계속 만지면 좆 잘라버린다. 비록 그 순간 정국이 다가와 깽판을 쳐 효과가 약했지만, 지민은 정국의 뒤에서 입모양으로 마지막 크리티컬까지 먹여줬다. 와 다들 좆이 두 개인가 보네. 알파들이 기묘하게 쳐다보다 자신이 누구인지 깨달은 건지 허겁지겁 꽁무니를 말고 도망치는 모습은 제법 볼만했다. 집에 도착하고 나서도 정국은 말이 없었다. 참다못한 지민은 결국 빽 내질렀다.
"야! 내가 뭘 했다고! 가게분위기 망쳐서 그래? 그렇지만 참기 싫었단 말이야! 알파새끼들이 그러면 얼마나 기분 더러운데…!"
"박지민씨 계속 참았으면 그 자리에서 제가 그 새끼 죽여 버렸을 거예요."
지민이 움찔했다. 뻗어 나오는 기세가 어마어마했다. 흉흉한 눈빛이 자신을 향한 것도 아닌데, 괜히 움츠러들었다.
정국은 속이 복잡했다. 머리가 뒤엉켜 지민의 말에 답할 수도 없었다. 터질 것만 같았다. 화가 치솟았다. 그 알파새끼들의 손을 잘라버리고 싶었다. 지민을 향해 쏟아지는 음흉한 눈을 다 뽑아버리고 싶었다. 정국은 제 안에 이런 폭력성이 잠들어있는지 처음 깨달았다. 어떻게 이런 게 숨어있었는지 놀랄 만큼 짙고 깊었다. 지민이 진정시키듯 정국의 손을 잡아왔다.
"야…난 괜찮아…."
다른 사람의 시선이 박지민에게 달라붙는 것이 싫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가슴이 뛰었으며, 자기 전 속닥거리는 목소리에 미소가 걸쳐졌다. 누구에게라도 뺏기고 싶지 않았다. 천천히 조금씩 마신 애정이, 그래, 너무 달콤했다. 체할 정도로 들이부어지는 순수한 애정이 사랑스러웠다.
"박지민씨."
"어…?"
"고백해봐요."
밤색 눈동자가 크게 활짝 열린다. 지민은 조금 당황한 것 같은 얼굴을 하더니 잡고 있는 손을 더욱 꽉 잡아왔다. 진지한 정국의 눈동자가 깊게 잠겨 보였다. 침을 꿀꺽 삼켰다.
"좋아해, 너."
정국은 사납게 주장을 펼치던 분노가 다른 무언가로 바뀌어 가슴 안이 뜨거워졌다. 진짜로 지민을 밀어내지 못한 건. 독하게 마음먹고 처음부터 거절하지 못한 이유는. 인정할 수밖에 없다. 기다렸다. 혼자 걷는 사막에서 마른 목을 축이고 지정표를 따라 건너면서도 외로웠다. 남은 물과 식량은 한 명만 감당할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퍽퍽한 모래를 횡단하면 도착지까지 혼자라는 사실이 두려웠다. 마음 깊숙한 곳에서는 이 버티기 힘든 길을 누군가 같이 걸어주길 간절히 바랐다.
"한 번 더."
"좋아해."
"또."
"진짜 좋아해."
겁도 났다. 나 때문에 같이 망가져버리는 건 아닌지. 나쁘던, 좋던, 돌이킬 수 없을 운명으로 같이 이끌고 갈까 무서웠다. 그래서 밀어냈다. 얼토당토않은 이유로 찾아온 지민에게 점점 끌리면서도 최선을 다해 외면했다. 같아지는 감정을 끝내 알아차리지 않았으면 싶으면서도, 알아차리고 싶었다.
"또 해줘."
"니가 제일 좋아. 너무 좋아."
정국은 심장이 너무나도 떨려와 차라리 울고 싶어졌다. 진통제라도 되는 것처럼 지민의 고백을 계속 들었다. 정국을 잠잠히 지켜보던 지민이 입술을 달싹였다.
"넌 내가 그렇게 열심히 말했는데도 내가 널 얼마나 좋아하는지 잘 모르는 거 같아."
"……."
"난 원래 나밖에 모르고 살거든? 그래서 남 좋아하는 거 별로 싫어해. 나한테 안 좋은 것도 그 사람이 좋아하면 하게 되더라구. 안 좋아도 좋은 척하고 그래. 그거 불편해서 싫어."
"……."
"그러니까 넌 내가 좋아해주는 거에 자부심…."
정국은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양 볼을 감싸 쥐고 지민의 입술을 찾아들었다. 지민은 눈을 크게 뜨고 코앞으로 밀려온 정국의 감긴 눈을 쳐다보았다. 혀가 입술을 다급하게 핥는다. 지민은 볼을 잡아오는 손에서 전해지는 열기를 느끼고 눈을 감았다.
키스는 서툴고 뜨거웠다. 감전이라도 되는 것만 같았다. 제대로 된 첫 키스라 믿기지 않을 만큼 격렬했다. 정국은 끝없이 숨을 탐했고, 잡아 삼키기라도 할 듯 달려들었다. 조용한 단칸방에 숨 섞이는 젖은 소리가 가쁘게 울려 퍼졌다.
"아흐…."
작게 입술이 떨어지는 사이로 지민이 신음했다.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휘청거렸다. 정국은 지민을 끌어안고 바닥에 눕혔다. 지민이 급하게 정국을 찾았다. 열이 오른 목소리였다.
"정국아, 정국아."
"하아, 박지민."
"나 좋아해? 나 좋아하는 거야?"
"좋아해요. 미친 듯 좋아해."
입술을 물고 빨던 정국은 그 아래로 내려갔다. 혀가 얇은 목선을 타고 질척하게 기었다. 오메가의 페로몬이 울컥 쏟아졌다. 꽃봉오리가 개화하듯 터진 페로몬은 그 어느 때보다 직접적이었다. 정국은 그것이 더 자극적이었다. 반응하며 자신이 좋다는 듯, 좋아 못 견디겠다는 듯 시시각각 한층 더 달콤해지는 향에 머릿속이 탈 것 같았다.
"박지민씨, 지민아."
정국은 당장 지민을 가지고 싶었다. 자신만을 위해 피어난 꽃을 꺾어 품에 쥐고 싶었다. 정국은 망설이지 않았다. 정국의 손이 지민의 옷자락으로 파고들었다. 그 순간이었다. 신음 섞인 음성으로 지민이 정국의 목을 감고 매달리며 할딱거렸다.
"페, 페로몬. 흐으, 정국아, 페로몬, 흣, 더 뿜어줘."
정국은 빳빳하게 굳어 버렸다. 머리 위로 찬물이 들이 부어지는 기분이었다. 페로몬. 정국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었다. 열기가 지독한 독으로 변해 정국의 숨을 틀어막았다. 서늘하게 굳어버린 정국을 향해 지민이 졸랐다. 알파를 찾은 오메가의 본능적인 몸짓이었다.
"나 좀…나 좀 어떻게…으응…."
지민은 정국에게 닿는 것만으로도 민감하게 반응했다. 정국은 지민의 상태를 알아차렸다. 히트사이클이다.
정국은 달아올라 뜨겁다 못해 괴로워하는 연인을 두고 정국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무슨 오메가가 베타랑 붙어먹어, 병신같이. 부정할 수 없는 문장이 뇌리를 때렸다. 무력함과 좌절감이 정국을 밑바닥으로 끌어내렸다. 잔혹한 현실이 아가리를 벌리고 정국을 빨아드렸다.
"정, 국아…아…!"
"박지민씨, 정신 차려 봐요."
정국은 엉겨 붙어 하반신을 비벼오는 지민을 필사의 정신력으로 밀어냈다. 오메가가 히트사이클에 왔을 때 해결할 수 있는 건 알파뿐이다. 베타와는 몸을 섞어도 열이 식지 않는다. 입술을 씹으며 고민하던 정국은 이불을 들고 와 지민을 감쌌다. 조금만 참으라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급하게 골목을 달려 병원을 향하는 택시를 탔다.
커다란 병원은 지역에서 거의 유일했다. 지민을 병원으로 옮기는 동안 정국은 속이 타들어갔다. 괜찮아요, 괜찮을 거예요. 조금만 참아요. 제정신이 아닌 지민이 들을 수 없는 위로와, 이불을 더욱 당겨 꽁꽁 뒤집어씌우고 최대한 남의 시선을 피하도록 하는 게 고작이었다. 정신없이 도착해 안내데스크에 뛰어들어가자 간호사와 의사는 지민을 병실로 옮겼다. 상태를 확인하고 약을 투여했다.
"곧 괜찮아질 겁니다. 아무리 우성이라도 잘 듣는 약이니 걱정하지 마세요."
의사는 땀이 흥건한 정국을 흘끔거렸다. 괜찮다 말을 해주었는데도 누워있는 오메가의 손을 잡고 시선을 떼지 못한다. 아무리 봐도 베타 같았다. 애초 알파라면 히트사이클이 온 오메가를 둘러업고 병원으로 달려오지 않았을 것이다.
"며칠 동안 입원해있어야 하는 건가요?"
"아마 일주일 내로 퇴원하실 수 있을 겁니다. 보통 오메가들은 히트사이클 약을 맞고 입원하면 일주일을 넘기지 않으니까요."
정국은 눈 감고 누워있는 지민의 이마로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다행히 열이 사라졌다. 방금 전만 해도 이름을 부르며 꽃잎처럼 붉었던 입술이 얌전히 닫혀있다. 술같이 뜨거웠던 두 뺨도 밀가루마냥 하얗기만 하다. 얇은 팔목에 꽂혀있는 링거조차 걱정되었다. 의사는 정국을 안심시키듯 덧붙였다.
"원래 히트사이클이 올 때 알파가 없으면 이러니 크게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게다가 환자분의 몸 상태를 보니 매번 억제제를 드시면서 피하신 거 같은데, 이번에 터지면서 참아왔던 게 몰렸던 거라 증세가 꽤 심했던 거 같군요."
"약을…계속 복용하는 건 몸에 안 좋은 겁니까?"
"아무래도 의학의 힘을 빌리기보다는 알파가 옆에 있는 게 제일 좋긴 합니다."
정국은 마른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오메가의 히트사이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강렬했다. 알파. 오메가에게는 생리적으로 알파가 필요하다. 정국은 잇새로 소리 없는 욕을 짓씹었다. 이미 지민이 오메가라는 건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심장이 무너지는 것만 같은 기분은 오메가의 히트사이클이 생각보다 더욱 무기력함을 선사해주었다.
"아 그런데…."
의사가 누워 잠든 지민을 훔쳐보다 눈치를 보며 운을 뗐다. 무언가 할 말이 남아있는 듯한 얼굴이었다. 정국은 심장이 덜컹거렸다. 혹시라도 지민이 잘못될까 걱정이 앞섰다.
"무슨 문제라도…?"
"크흠, 아닙니다. 환자분 건강은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다만 아무래도 보호자분께서 모르시는 거 같은데…."
"무슨 말씀이시죠?"
의사는 정국을 살폈다. 핏기 없는 피부색에 섞인 걱정이 거짓은 아니다. 의사는 지민을 한 번, 정국을 한 번 보고는 넌지시 귀뜸하고 방을 나섰다.
"보호자분, 병원로비 잠깐 들러서 뉴스 좀 보고 오세요."
정국은 지민을 놔두고 가는 것이 찝찝했지만, 의사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잠깐만 있어요. 들을 리 없는 지민에게 속삭이고 이마에 짧은 입맞춤을 했다. 그리고 나서야 자꾸만 붙어있으려는 발걸음을 움직였다. 로비는 커다란 티비가 중앙에 자리 잡고 있었고, 환자복을 입은 사람들이 돌아다녔다.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환자들과 음료수를 뽑아먹고 있는 어린아이들 또한 보였다. 유난히 티비 앞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있었다. 정국은 사람들 틈을 파고들어 티비 앞으로 다가갔다. 환자복을 입은 사람 둘이 떠들었다.
"허 상금이 백억이라니. 대단하네. 역시 한울그룹이야."
"그러게나 말이야. 백억이면 직장 같은 거 다 때려 치고 저 우성오메가 잡으러 다녀도 될 거 같은데."
한울그룹? 백억? 정국도 들어본 적 있는 기업명이었다. 손을 안 뻗친 사업부문이 없는 대기업 이름을 일자리를 필요로 하는 정국이 모를 리 없었다. 지금 공사장 아르바이트를 하기 전, 오전 시간 한울그룹에서 운영하는 백화점에서 주차요원을 했었다.
뉴스를 본 정국은 숨을 멈췄다. 티비 화면 속을 지민이 가득 채우고 있었다. 제 손에 안겨 병실로 옮겨진 그 박지민과 얼굴이 같았다. 한울그룹 외동아들 우성오메가 박지민 실종. 거대한 타이틀이 자막을 장식했다. 앵커의 목소리가 정국의 귓전을 앵앵 울렸다. 화면으로 수척한 안색의 남성이 비춰졌다. 남성의 옆에 눈물자국이 채 마르지 않은 여성도 있었다.
「유성그룹과 세기의 결혼식을 준비 중인 박지민군의 실종에 시민들은 충격에 빠졌습니다. 한쪽에서는 박지민군 납치설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한울그룹은 이번 일에 관해 단호한 입장을 내비쳤습니다. 박지민군의 행방을 아시는 분은 아래 번호로 전화 또는….」
그 뒤로는 들리지 않았다. 귓가를 파고드는 문장은 물컹한 물처럼 정국의 반대쪽 귓가로 흘러내렸다.
"아…."
정국은 발밑이 훅 빠져 깊은 구렁텅이로 추락하는 기분을 맛보았다. 모래먼지가 호흡을 막듯 목이 따끔거린다. 염증이 일어난 것처럼 목구멍이 부어 조여오는 탓에 숨을 내쉬기가 힘들었다. 질식할 것만 같았다.
"저기 안색이 창백하신데 괜찮으신 건가요?"
로비를 지나가던 간호사가 환자인지 추측하며 물었다. 삐걱거리는 로봇처럼 고개를 돌려 간호사를 본 정국은 아무 대답없이 비틀거리며 지민의 병실로 걸었다. 응급실은 여전히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급작스럽게 응급실로 실려 들어온 교통사고 환자 탓에 간호사와 의사가 바쁘게 뛰어다녔다. 정국은 옆 침대에 사람이 들어오는 걸 보고 멍하니 일어나 지민의 침대를 숨기기라도 하듯 커튼을 쳤다. 정신이 이상해진 건지, 물에 잠긴 것처럼 현실감각이 멀어진 건지 아까는 매캐하게 느껴지던 소독약 냄새가 나지 않는다.
"……."
정국은 지민을 내려다보았다. 색색 고른 숨소리를 내며 눈을 감은 지민은 평화로웠다. 니가 너무 좋아. 너랑 결혼할 거야. 대책 없는 소리를 하며 예쁘게 웃었고, 세상에 이런 달콤한 말도 있다 알려주었다.
1분도 채 보지 못한 뉴스 화면 안의 캐주얼 수트를 입고 있는 지민이 지금 만원도 하지 않는 자신의 반팔티를 입고 누워있는 지민 위로 덧씌워진다. 자신이 모르는 박지민. 오메가와 베타. 빚쟁이와 약혼을 진행 중인 재벌가. 화면에 나온 괴로운 표정의 남자와 여자의 얼굴이 그 위로 겹쳐진다. 고개를 숙인 정국은 웃는지 우는지 모를 표정으로 어깨를 떨며 헛웃음을 흘렸다.
우습다. 어떻게 지민의 말을 듣고 한 번이라도 자세히 찾아볼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가 들었다. 정국은 눈뜬장님처럼 진실만 피해 교묘히 빗겨나간 자신의 과거가 혐오스러웠다. 처음 문을 따고 왔을 때, 아니면 지민을 버스정류장에 버리고 왔을 때만 됐어도. 이 사실을 알았더라면 전정국 인생 다시 없을 횡재였다. 얼씨구나 이게 웬 떡이야 하고 지민을 팔고, 남은 빚을 청산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했을 것이다. 평생을 일해도 손에 쥐지 못할 돈으로 평범함을 사고, 부모님이 돌아가신 순간부터 원하진 않았지만 세워진 꿈을 사고, 어쩌면 사람들과의 신뢰도 샀을지 모른다.
왜 지금 알았을까? 왜 하필 처음 욕심을 낸 순간 알았을까? 어차피 알 거라면, 피하지 못할 진실이라면 조금은 그 사실을 모르고 행복한 다음 알아도 좋지 않았을까. 나도 널 좋아한다고. 이대로 계속 같이 알콩달콩 살고 싶다고, 미래에 뭐가 기다릴진 모르지만 그 속에 너 하나만은 있어 줬으면 좋겠다고 제대로 말을 할 기회라도 있었다면.
정국은 어쩌면 이건 경고가 아닐까 생각했다. 욕심을 부리지 말라는 경고. 주제 파악을 하라는 경고. 감당할 수 없는 걸 삼키면 다시 버려질 테니 얌전히 제 자리로 돌아오라는 본능의 경고. 아니면 지민이 외치던 말을 무시하던 벌이다. 단꿈은 충분히 꿨으니 하찮은 너의 현실로 돌아오라 누군가 몸을 흔들어 깨운다. 정국은 눈가가 뜨거워졌다. 울음은 한 줄기 흘러내리더니 겉잡을 수 없이 주륵주륵 샜다. 탁한 눈물이 링거를 꽂고 있는 지민의 손등 위로 뚝뚝 떨어졌다.
여기까지다. 여기서 멈추면 된다. 멈출 수 있을 것이다. 아니, 멈춰야만 했다.
만약 네 애정이 지쳐서 떨어져 나가면 난 가진 게 없다. 아무리 봐도 지민이 밝게 빛날 수 있는 자리는 제 옆자리가 아니다. 정국은 자신이 떠안은 불리한 조건들이 한없이 못나 보였다. 세상의 풍파를 견디기 위해 두르고 있던 바른 청년 전정국이 한꺼풀만 벗겨지면, 이토록 한없이 약한 부분이 눈을 떴다. 정국은 외로운 별에 사는 여우처럼 길들여지기만을 기다리는 떠돌이였고, 자유로운 지민은 어느 행성이나 갈 수 있는 어린 여행자였다. 잠깐의 여행은 끝났다.
"……."
정국은 허리를 숙여 닫힌 여린 입술에 제 입술을 눌렀다. 부드럽게 닿아 이 순간을 박제해 보관하기라도 할 듯 뜨거웠다. 이 와중에도 심장이 떨렸다. 예쁘고 사랑스럽다.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입술을 뗐다. 손을 들어 하얀 지민의 두 뺨 위로 떨어진 시린 눈물들을 쓸며 볼을 매만졌다. 정국은 오히려 커튼 밖으로 도망치듯 빠져나갔다. 병원 로비로 나와 안내데스크에서 전화를 빌렸다.
번호를 누른다. 뉴스화면에 쓰여 있던 번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