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 언니네이발관-아름다운 것>
"…으…."
감긴 눈꺼풀이 작게 열렸다. 눈꺼풀은 수차례나 깜빡거리고서야 열렸다. 이 붕 뜬 느낌. 손등에 연결된 링거까지 본 지민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히트사이클 왔었나 보네. 올 거 같더니 결국 예상보다 빨리 왔다. 지민은 알파의 페로몬에 노출된 탓이라 추측했다. 술집에서 만난 알파새끼 때문인가. 하여간 재수 없는 새끼들이다.
"전정국이 병원에 보낸 건가."
지민은 정국이 키스한 순간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열심히 정국을 쫓아 혀를 움직이다 어느 순간부터 기억이 흐릿했다. 그럼에도 지민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좋아해요. 미친 듯 좋아해. 낮게 쏟아지는 목소리를 떠올리자 다시 심장이 쿵쿵거렸다. 그 소리가 너무 커 히트사이클이 아니라 심장병으로 입원해야 할 판이었다.
"아주 전정국, 어? 아주 진짜 그렇게 사람 떨리게 고백하는 건 어디서 배워가지구."
발그레해진 볼로 지민이 푸스스 웃었다. 이불을 빵빵 차며 시냇물에서 튀어나온 생선처럼 침대에서 퍼덕거렸다. 어서 정국이 보고 싶었다.
"아니 근데 잠깐…병원이라는 건…히트사이클이 왔는데도 안 덮쳤단 거야? 진짜 고자 아냐?"
토끼는 괜찮아도 그건 좀 곤란한데. 지민이 심각하게 혼자 고뇌했다. 이내 머리를 붕붕 저어 불안감을 털어냈다. 에이, 설마. 아니겠지.
지민은 꿈에 부풀었다. 이제 드디어 정국과 결혼 할 수 있다. 비록 안 덮치긴 했지만, 서로 마음도 확인했고 더 이상 앞을 가로막을 것은 없었다. 가서 엄마아빠한테 정국이 소개시키고, 결혼 준비한 거는 엎지 말고 그대로 정국이랑 할까? 황금빛 미래를 수놓던 지민이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병실을 폴짝폴짝 뛰어다녔다. 어떡해! 너무 좋아! 입가에 핀 미소가 잠잠해질 생각을 안 한다. 지민은 한참 뒤에야 긴 심호흡을 통해 진정했다.
"후우…좋아. 됐어. 아 그런데 전정국 얜 어디 간 거야. 내가 깼는데 들어오지두 않구. 바로 옆에 딱 달라붙어서 지켜봐야 하는 거 아냐."
지민은 병실을 살폈다. 개인병실이다. 벽 한쪽을 가득 차지한 티비, 호화로운 과일바구니, 개인냉장고. 공기청정기는 병실 안 상태를 환자에게 알맞게 유지해주고 있었다. 모든 게 최고급이다. 지민이 고개를 갸웃했다. 정국이가 이런 걸 해줄 리가 없는데. 이내 지민은 뭐 어떻냐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안 오면 내가 찾으러 가야지 뭐.
지민이 주섬주섬 슬리퍼를 찾아 신고 있는 그때, 병실 문이 스르륵 열렸다. 전정국인가? 주인 기다리는 강아지마냥 들떠 훽 돌아본 지민은 입꼬리부터 올리고 있었다. 그러나 문을 열고 들이닥친 얼굴에 멈칫하고 말았다.
"…아빠?"
"지민아아!"
박사장이 뛰어와 지민을 격하게 끌어안았다. 컥! 지민은 숨 졸린 소리를 토하며 박사장의 등을 두들겼다.
"우리 강아지, 아이고오오, 무사해서 다행이다, 다행이야."
"아, 아빠 나 수, 숨!"
"강아지 안 일어나서 아빠가 얼마나 걱정했는데에에."
"아, 빠…!"
"어, 어 그래그래. 우리 강아지 숨 막히면 안 되지."
박사장이 힘을 주던 팔을 풀었다. 박사장 뒤로 따라들어온 박사장의 비서가 지민에게 짧게 묵례를 했다. 박사장은 어느덧 눈물 콧물이 흥건했다. 지민이 옆에 있는 휴지를 찾아 박사장에게 건넸다. 코를 팽 풀며 박사장은 감동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아빠 울지마."
도로 침대 위에 앉아 박사장의 등을 토닥거려주면서도 지민은 어안이 벙벙했다. 박사장은 지금 등장하면 안 되는 인물이었다. 물론 히트사이클이 끝나면 곧장 정국을 소개하려고는 했지만. 뭐지? 정국이가 먼저 알아서 온 건가? 박사장의 눈을 피해 미묘하게 얼굴을 구긴 지민은 박사장이 채 감정을 추스르기도 전에 물었다.
"근데 아빠. 아빠가 왜 여기 있어?"
"왜 있긴. 당연히 우리 강아지 가는 곳에 아빠가 있어야지!"
"그, 그건 그렇지. 그럼 나랑 같이 온 애 어디 있는지 알아?"
"같이 온 애?"
지민은 눈을 반짝거리며 손동작까지 곁들여 정국을 열심히 설명했다.
"응! 엄청 잘생기고, 키도 크고, 예의도 바르고. 눈 이렇게 땡그랗게 큰 애 있잖아. 입술은 이렇게 생겼구, 코는 높구. 베타고. 몸도 좋고 힘도 쎄고! 딱 봐도 엄청 잘생기고 괜찮아 보이는 애 있었을 텐데. 또 엄청 성실해보여. 실제로도 성실하고."
정국이 어디 있는지 궁금한 마음만 아니라면 지민은 밤이 새도록 정국의 이야기를 늘어놓았을 터였다. 첫 소개하는 정국을 자랑하고픈 마음과 정국을 어서 보고 싶은 마음이 싸우다보니 말하면서도 병실 문 쪽을 이따금 쳐다보았다. 박사장이 위치만 알려주면 당장에라도 뛰쳐나갈 기세였다.
"지민아,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여기 누가 있었다니?"
"…응?"
"아직도 머리가 아픈 거냐? 의사 불러야겠다. 너 쓰러진 거 병원 응급실에 실려 왔다고 연락받고 데려온 거야, 아빠가."
"병…원? 실려 와? 내가?"
지민은 박사장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도통 알 수 없었다. 이상하다. 마지막 기억장소는 단칸방이었다. 아닌데. 누가 있었을 텐데. 지민이 계속 같은 소리만 되풀이하고 있자, 박사장은 한층 걱정스러운 손으로 지민의 이마를 짚어왔다.
"기억이 이상한가 본데…그래, 납치 때 있던 일은 다 잊어."
납치라니. 명백한 가출이었다. 눈을 휘둥그렇게 뜬 지민은 순간적으로 말을 잃었다. 내가 전정국을 납치했으면 납치했지, 내가 납치를 당했다고? 단칸방을 처들어가 몇 번이고 못 나간다고 뻐기던 자신을 정국이 얼마나 내쫓으려 했던가. 납치는커녕 그나마 어울리는 단어를 찾으면 유기견 보호센터정도나 어울린다. 박사장은 지민이 말이 없자 그게 정답이라 생각했는지 이를 빠득 갈았다.
"그놈 남은 눈깔에 마저 칼자국을 내줬어야 하는 건데."
"아빠 나 히트사이클 방금 끝났단 말이야."
"어이쿠, 우리 강아지 아빠가 미안해."
순간적으로 무시무시한 알파 페로몬을 흘린 박사장은 다급히 페로몬을 집어넣었다. 인터폰을 통해 의사를 호출했다. 괘씸하다는 말을 되풀이하며 납치범을 욕했다.
"윤비서, 내일 김의원이랑 성의원 약속 잡아. 대법원장이랑도 연락해. 괜찮은 선물 하나 먼저 준비하고."
"예, 준비하겠습니다."
박사장이 사형판결을 받아내겠다며 투지를 불태웠다. 지민은 박사장이 드문드문 내뱉는 정보를 짜맞춰 조작된 시나리오를 파악했다. 노인정의 평상을 침략했던, 남자의 납치소행으로 가출은 뒤덮여있었다. 병원에는 누군가 쓰러진 지민을 발견해 데리고 왔고, 병원 쪽에서 박사장에게 연락을 취했다는 것이다. 제일 중요한 한 사람만 쏙 빠진 이야기는 그럴싸했다. 이상한 나라에 들어간 앨리스가 된 것만 같았다. 납치 이야기는 뭐고, 왜 그 이야기 속에서 전정국은 증발한 거고.
"아빠 그럼 병원에 있을…."
"축하드립니다, 박회장님. 아드님께서 깨어나셨다는 연락받았습니다."
병원장이 병실 안으로 의사 무리를 주르르 이끌고 들어왔다. 병원장 손짓에 의사 무리 중 한 명이 튀어나와 링거를 새로 갈아끼우고, 지민의 상태를 확인했다. 이제 휴식만 취하면 괜찮다는 진단까지 내리고 공손히 손을 모은다.
"박사장님께서 얼마나 걱정하셨는지 모릅니다, 지민군. 며칠 안식을 취하다 퇴원하시면 될 겁니다."
인자한 가면을 쓴 병원장이 아는 척을 해왔다. 다른 때라면 박사장을 생각해 사교성 있게 대답했을 지민은 생각이 복잡해 대충 고개만 끄덕거렸다. 병원장은 살짝 당황한 티를 내더니 허허 웃으며 박사장에게 아직 혼란스러우신가 봅니다, 하고 매끄럽게 넘어갔다. 그때 문이 또 열렸다.
"아들!"
문여사는 눈물을 달고 박사장과 똑같이 헐레벌떡 병실로 들어와 지민을 끌어안았다. 수척해진 얼굴은 그간 자식 잃은 부모가 얼마나 고생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지민은 생각을 끊고 문여사를 마주 끌어안았다.
"엄마 미안해…."
박사장이 문여사에게 손수건을 챙겨주었다. 지극정성으로 다정한 페로몬까지 문여사 쪽으로 흘리며 위로했다. 한참만에야 진정한 문여사는 지민의 손을 꽉 잡아왔다. 병원장은 틈을 보고 눈치 있게 마음고생이 얼마나 심하셨을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며 잘 보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지민은 모든 게 헷갈렸지만 한 가지 사실은 확신할 수 있었다. 돌아왔다. 일상으로. 정국을 만나기 전으로 시계바늘이 되돌려져 있는 것만 같았다. 야윈 문여사와 박사장을 보니 새삼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죄책감이 든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한 가지 물음이 왱왱 머릿속을 맴돌았다. 불길하게 초조했다.
전정국 너 지금 어디 있어?
***
정상적인 오메가의 히트사이클은 주기가 일정한 편이다. 알파에게 민감하게 반응하는 정도는 달라도, 대부분이 두 달이나 세 달에 한 번이 평범한 케이스다. 심한 스트레스나 외상을 입지 않는 한 주기는 틀어지지 않는다. 지민은 히트사이클은 끝났지만 납치 후 외상 스트레스가 발견될 수 있으므로 병원에서 일주일을 입원하라는 진단을 받았다. 문여사와 박사장은 하루동안을 꼬박 지민의 곁에 붙어있었다. 3개월 만에 만난 가족이 짜낸 눈물이 홍수를 이루었다.
"허엉, 다신 납치 안 당할게, 엄마."
지민은 과일을 깎다 우는 문여사의 품에 안겨 같이 울었다. 나한테 손끝 하나라도 대는 놈들 다 죽여버릴게. 웅얼거리자 박사장이 뒤처리는 자신이 몽땅 할 테니 다음에 누가 또 건드리면 차라리 살인을 하라는 격려를 건네왔다. 열심히 고개를 끄덕거리며 지민은 일단 짜인 시나리오대로 충실히 연기했다. 그리고 회사일로 문여사와 박사장이 나가면 지민은 눈물을 싹 거두고 휴지로 눈물줄기가 흐른 볼을 벅벅 문질렀다.
"내가 알아보라는 거 알아봤어?"
귀염성 있게 빨개진 눈과 동그란 코끝이 무색하게 눈빛은 날카로웠다. 남준은 냉큼 고개를 끄덕이며 들고 있던 사진을 지민에게 넘겼다. 여러장의 사진은 응급실 화면을 비추고 있는 CCTV중 한 장면이었다. 흐릿하지만 그사이를 빠져나오고 있는 남자의 얼굴을 구분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지민은 콧잔등을 찡그렸다.
"이거 가짜 아니야? 조작 같은 거?"
"아닙니다."
남준은 억울했다. 3개월만에 만난 지민이 내린 명령은 자신이 발견되었다는 병원의 CCTV를 털어오라는 것이었다. 납치된 3개월의 시작이 되었던 남자가 담겨있는 화면을 찾아서. 덕분에 남준은 외부인에게 CCTV를 공개할 수 없다는 병원의 입을 한울그룹이라는 명함으로 막고 3일 내내 눈이 빠져라 밤을 새워가며 CCTV를 확인했다. 병원 숙직실의 밥이 그렇게 맛없는 줄 처음 알았다. 세상 모든 응급실 의사들은 존경해야 한다.
"가짜 같은데. 가짜라고 해도 괜찮으니까 솔직하게 말해봐. 다시 일 안 시킬게."
"도련님, 진짜 맞습니다. 병원에 있는 CCTV 녹화테이프는 전부 뒤졌습니다."
"아니야, 이거 가짜 같아. 얘 전정국 아니야. 얘가 진짜라면 전정국이 지금 내 옆에 있었겠지! 이봐, 자세히 보니까 여기 화면 안 사람은 좀 못생겼잖아. 전정국이 이거보다 훨씬 잘생겼어."
지민이 이불 무더기를 들고 헐레벌떡 병원 안으로 뛰어들어가는 인물을 손가락으로 여기 봐봐, 하고 툭툭 치며 가리켰다.
"나가는 쟨 코가 좀 더 낮지? 그때 사진 봐서 알잖아. 전정국 진짜 잘생겼다니까?"
지민은 남준이 대꾸를 안 해도 혼자 떠들다 이내 입술을 꾹 깨물었다.
"…나가도 좋아."
"도련님…."
"안 울어. 걱정마. 아 그리고 우리 아빠가 불러서 뭐라고 하면 그냥 다 모른다고 해. 뭐 걸리면 내 책임이라고 하고. 내가 많이 아파서 돌봐줘야 한다고 나온다고 해. 혼나지 말고. 알았지? 김비서는 이거 전부 모르는 일이야."
남준이 무언가 말을 붙이려 하자 지민은 피곤하다는 핑계로 침대에 누웠다. 필요하면 인터폰으로 부르라는 말을 들었지만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발소리가 멀어지는 것까지 듣고 난 뒤 다시 벌떡 일어나 남준이 가져온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진짜 정국이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전정국 너 뭐야? 무슨 생각인 거야? 지민은 도무지 정국의 속마음을 알 수가 없었다. 너도 좋아한다고 했으면서 왜 나는 여기 있고, 너는 여기 없는 거야. 서로의 마음이 통했다. 그거 하나면 모든 게 다 이루어졌다고 생각했는데, 지민의 추측을 비웃기라도 하듯 모든 것이 어긋나 있었다.
지민은 될 수 있는 한 여러 가지 상황을 추론했다. 가장 그럴듯한 가정은 정국이 자신을 팔았다는 것이다. 정국이 돈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었으니 놀랄 일은 아니다. 만약 정국이 돈을 노린 것이라면 돈이 자신보다 앞선 것이 서운하긴 하겠지만, 사람도 아니고 돈이니 지민은 어찌어찌 넓은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생각했다. 나도 전정국만큼이나 옷 좋아하니까 뭐. 그런데 남준이 정리한 상황을 보면 아무도 사례금을 받아간 사람이 없다 한다. 두 번째는 추론은 정국이 입원시킨 사이 누군가 자신을 신고했다는 말인데, 아무도 거대한 사례금을 타간 이가 없단다. 마지막으로는 혹시 정국이 납치라도 당한 건 아닌가 싶었으나 방금 남준이 가져온 CCTV 화면으로 멀쩡히 병원 밖을 나가는 정국을 확인했다.
그럼 왜? 전정국이 왜 떠났을까. 지민은 아직 결코 정국이 자신을 버렸다 생각하지 않았다. 히트사이클이라고 내가 정신까지 맛이 갔을까 봐. 그리 애타는 고백을 놓친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얼마나 가슴이 뛰었는데. 얼마나 손끝이 짜릿하게 행복했는데. 무슨 수로 그 고백을 까먹는단 말인가.
"…흥, 내가 놓을까 봐."
마음을 확인한 이상 전정국을 놓을 생각은 없다. 퇴원하면 다시 가봐야지. 지민은 빠른 퇴원을 기원하며 정국의 단칸방으로 다시 처들어갈 날짜를 골랐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나 혼자만 덜렁 보낸 건지 따져 물을 생각이었다. 앞으로는 옆에서 병간호는 안해도 되니까 눈뜰 때 곁에 있어주는 매너 정도는 갖추라고도 일러줄 것이다.
그럼에도 마음 한구석이 어쩐지 자꾸만 불안해져 지민은 일부러 정국의 행방을 찾지 않았다. 차라리 돈을 받았으면 생각하기 편했을 뻔했다. 단지 정국이 작정하고 관계의 연결고리를 끊었다는 상상만 해도 심장이 아프게 조여와, 지민은 기울어가는 추측을 애써 잘라냈다. 그래, 차라리 그냥 가만히 있어. 정국이 밀어내지 않고 언제라도 그 자리에만 가만히 있어준다면 지민은 다시 다가갈 자신이 있었다.
지민이 사진을 놓치 못하고 계속 바라보는 그때, 경박스러운 발소리가 들리더니 병실문이 활짝 열렸다.
"지민아!"
말쑥한 정장을 차려입은 태형이 옆구리에 과일바구니를 끼고 들이닥쳤다. 최근 받고 있다는 후계자 수업이 끝나자마자 곧장 튀어온 모양새였다.
"야! 노크하고 들어오라고 했잖아!"
지민은 다급히 사진을 이불 아래로 숨겼다. 태형은 지민이 도로 나가라 떠들거나 말거나 상관없이 들어와 산같이 거대한 과일바구니를 냉장고 옆에 내려놓고 뻔뻔하게 침대 앞 간병인 의자에 앉았다. 태형이 지민의 손까지 한쪽 훔쳐가며 다정하게 잡아왔다. 은근슬쩍 내보내며 지민을 툭툭 건드렸을 알파페로몬은 상황이 상황이라 생각하는지 단단하게 집어넣고 있었다.
"색시야 괜찮아? 많이 괜찮아졌어? 뭐 먹고 싶은 거는?"
"누가 니 색시야? 말로 할 때 나가라?"
"아깐 들어오라며."
"내가 언제?"
"아까 엄청 다정하게 태형아 노크하고 들어와야 해 했잖아."
태형이 방끗 웃었다. 얜 뭐 한국어도 번역하는 능력이 있어. 지민은 짜게 식어 됐다, 말을 말자 하는 표정으로 솥뚜껑만한 태형의 손에 잡힌 제 손을 빼냈다. 태형은 몇 번 눈치를 보며 다시 손을 잡아 오려다 눈꼬리가 암팡지게 변하는 작은 눈을 보고 히히 지민을 귀여워하는 빙구웃음을 흘렸다.
"맞아, 내가 알려줬나? 우리 결혼은 좀 미루기로 했어."
"잘됐네. 영영 미뤄."
"아무래도 너 몸이 안 좋고 정신적 충격도 있을 테니까 3개월 정도 더 뒤에 식 올릴 거야."
"…야 잘들어. 나 진짜, 진짜 진지하게 말하는데 너랑 결혼 못 해."
안 하는 게 아니라 이제는 못하는 거다. 지민이 진지하게 태형을 마주 보았다. 매번 꺼져, 너랑 죽어도 결혼 안 해 하고 성가시다는 듯 외치던 때보다 훨씬 진중했다. 태형의 눈이 살짝 커지더니 곧 원래대로 돌아와 마찬가지로 진지한 눈빛을 보냈다. 웃고 있던 입꼬리가 천천히 굳어 내려간다.
"정말 못해. 할 수 없어."
하고 싶은 사람이 생겼다. 해야 할 사람이 생겨버렸다. 지민은 어디까지 밝혀야 할지 고민이 됐다. 정국이 곁에 있었더라면 얼굴 보이며 얘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그래서 너와 결혼을 못 한다고 당당히 말했을 텐데, 정국이 사라져버렸으니 불가능하다. 정국의 속생각을 모르는 지금 상태에서 마음의 정체를 드러내기도 조심스러웠다. 정국의 주변에서 쉽게 만난 평범한 사람들과는 거리가 먼 태형은 힘이 있는 존재였다. 때문에 앞뒤 다 잘라먹은 거절의 형태밖에 나오지 않았다.
태형은 잠시 말이 없이 큰 눈을 깜빡거렸다. 흐음. 낮은 숨소리를 내고 심각한 낯빛을 만들며 말해왔다.
"그럼…."
"……."
"여태 깐 건 다 장난이었어? 나 좀 기분 좋아질라 그래."
태형이 철없는 어린아이처럼 히죽 웃었다.
"그동안 진짜 까인 줄 알고 맨날 술 먹고 속상해했는데 다 장난이었던 거야? 그동안 나 혼자 삽질한 거였네. 우리 지민이 마음도 모르고! 섭섭했지? 어휴 우리 색시 너무 예쁘다. 결혼 좀 당겨달라고 할까? 아 나 좀 있음 러트인데 억제제 먹지 말고 같이 보낼까? 너 너무 이뻐서 못 참겠다."
태형이 감격적인 눈으로 다시 손을 엮어왔다.
"내가 잘할게. 나 섹스 잘해."
지민은 큰 손의 손등을 탁! 때리고 와작 인상을 구겼다. 그냥 꺼져버리라 축객령을 내리자 태형이 왜 그러냐며 항의해왔으나 싸그리 무시하고 티비를 켰다. 속이 터진다. 태형이 하는 소리를 듣고 있느니 티비에서 떠드는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나았다.
「한울그룹 총수 박한대 사장의 외동아들 박지민군을 납치한 범인은 억울하다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취재로 모여든 기자들 앞에서 잘못이 없다, 이건 모함이다, 손끝 하나 건드린 적이 없다 주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범인은 과거 전과사실이 드러나고….」
깊은 눈 흉터를 가지고 있는 남자는 미쳐버리겠다는 듯 붉어진 얼굴로 팔팔 뛰고 있었다. 지민은 심드렁하니 화면을 보다 문득 저 남자와 함께 축제에서 만났던 알파들도 용의선상에 올려버릴까 하는 생각을 했다. 진짜 걔네는 그때 좆을 잘라버렸어야 했는데. 뉴스는 다음 화제로 이어졌다. 그치지도 않고 지민의 이름이 언급되었다. 유성그룹과 한울그룹의 약혼이 미루어진다는 이야기다.
"색시야 나 갈게."
"…그래? 가."
어쩐 일로 빨리 간대. 시계를 확인하니 온 지 20분도 넘지 않았다. 문여사와 박사장 다음으로 방문한 태형은 첫 방문에서부터 눈물을 펑펑 짜내며 끈덕지게 달라 붙어왔다. 또 납치될지도 모르니 매일 밤 병실에서 보초를 서겠다는 걸 막느라 한바탕 진땀을 빼기도 했다. 오죽하면 히트사이클 때 받은 몸의 충격보다 그때 태형을 내쫓느라 소모한 에너지가 더 컸다. 입원한 지 3일째, 왔다하면 세시간은 기본으로 아무리 구박해도 자리를 유지하던 태형이 의외인 터라 지민은 희한하다는 눈길로 태형을 잠깐 돌아보았다. 태형은 특유의 맑은 웃음 그대로였다.
"내일 올게. 내일은 뭐 사올까?"
"내일 같은 거 안 와."
"또 과일?"
"…이미 저거도 못 먹고 있는데 과일은 무슨 과일이야."
지민이 오늘 태형이 내려놓은 과일바구니를 눈짓했다. 수박, 망고, 리치, 딸기. 가지각색 아무 과일이나 쌓여있는 바구니는 분명 태형의 비서들이 힘겹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럼 뭐 사올까? 햄버거? 치킨?"
"그냥 니가 오지 마."
"에이, 섭섭하게 왜 그래. 먹고 싶은 거 있음 문자해. 간다."
활기차게 손을 흔든 태형이 병실 밖으로 나갔다. 드르륵 문이 닫히자 언제 시끄러웠냐는 듯 조용해진다. 지민은 살그머니 다시 이불 안에서 사진을 꺼냈다. 이불을 들고 허겁지겁 달려오는 모습과 달리 다른 사진 속 정국은 땅을 보고 고개를 푹 숙인 채 천천히 병원을 나오고 있었다. 짧은 손가락이 사진 속 정국의 머리카락을 슥슥 문질렀다.
그게 뭐든, 어떤 거든 니가 안 오면 내가 갈 거야.
태형은 병원 밖에서 대기하고 있는 고급세단에 몸을 실었다. 비서는 태형이 타자마자 몰려오는 무시무시한 분위기에 흠칫했다. 매번 병실에 올 때마다 걱정만 한아름 품고 지민이가 그래도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야, 하고 누그러든 어조로 중얼거리더니만 오늘은 달랐다. 비서의 촉대로, 태형은 병실 안에서부터 간신히 꾸역꾸역 참아온 알파페로몬을 참지 않고 풀어내고 있었다. 위험할 만큼 흘러나오는 페로몬은 필시 병실에서 흘렸다면 지민이 민감하게 신음을 흘렸을 깊이였다.
"어디로 모실까요?"
침을 꿀꺽 삼킨 비서가 물어도 태형은 대답하지 않았다. 복잡한 얼굴로 창문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속아주는 척은 힘들다. 태형은 문을 열고 들어갈 때 작은 몸이 파닥거리며 급하게 무언가를 숨기는 걸 놓치지 않았다. 아무 일도 없는 척하면서, 정작 당황해 바쁘게 돌아다니는 눈동자는 거짓말을 못 한다. 태형은 느린 한숨을 쉬었다. 왜 그렇게 뭘 숨기는 거야, 지민아. 이미 알고 있었다. 납치 따위가 아니라 지민이 자발적으로 3개월 동안 사라진 것쯤은 그간 돌아다닌 남준의 위치만 봐도 훤했다. 더군다나 지민은 납치를 당한 사람의 태도가 아니었다. 어떤 피해자가 지루하다는 듯 마지못해 범인이 나오는 뉴스화면을 보고 앉아있겠는가. 태형은 지민이 돌아와 침묵한다면 속아줄 작정이었다. 때문에 미친 듯이 궁금했지만 숨겨진 지민의 3개월의 행방을 찾지 않았다.
자신이 모르는 3개월 동안 지민 안에서 큰 변화가 있음은 확실했다. 방금은 귀찮다는 듯, 그만 떨어지라 툭툭 던져대는 말이 아닌 진실한 거절이었다. 김태형이 박지민에게 진짜 차였다. 박사장을 위해 마지못해 약혼에 수긍하는 시늉이라도 하던 지민이 내비친 첫 번째 진실한 의사였다. 그래서 알고 싶다. 뭐가 널 변하게 했을까. 그 어떤 게 너를 나한테서 뺏어갔을까.
태형은 만약 지민이 감춘 3개월을 안다면 스스로가 어떤 일을 벌일지 자신이 없었다. 너는 내 오메가인데. 다른 알파와 관련된 일이라면 그 알파를 죽여버리고 싶을지도 모른다. 지민이 먼저 알파에게 다가가 페로몬을 원하고 각인을 원한다 말하는 건 떠올리기만 해도 우성알파로서의 고고한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서로 각인도, 주고받은 감정도 없는 상태에서 니가 뭔 유난이냐 말하면 할 말이 없음에도 욕심부리는 아이처럼 태형은 입술을 짓씹었다.
"박지민 납치했던 범인이랑 면회 잡아. 직접 갈 거야."
내가 먼저 탐냈다. 내가 먼저 알아챘고 원래부터 내 걸로 손에 쥐어져 있었다.
"은밀히 진행해."
니 알파는 나뿐이야. 뇌까리며 태형은 다음 지민의 히트사이클을 계산했다. 앞으로 3개월 뒤. 다른 알파를 경계하며 알파의 소유욕에 불이 타올랐다.
***
불 꺼진 단칸방에 한 사람이 시체처럼 누워있었다. 튼 입술은 물론 창백한 안색과 동태처럼 퀭한 눈동자는 숨이 붙어있다 칭하는 것도 민망했다. 정국은 육지에 올라와 숨이 끊기기 직전의 생선처럼 느리게 호흡했다. 사람은 어리석다. 십여년이 넘게 침묵과 어둠에 빠져있었으면서, 고작 3개월 단맛을 봤다고 과거를 새카맣게 잊고 낯설어한다.
지민이 송두리째 점령한 3개월은 정국이 예측했던 것보다 더 대단해서, 정국을 속수무책으로 무너뜨렸다. 병원에서 집으로 미친사람처럼 꺽꺽거리며 울다 멍하니 앉아만 있었다. 아침 해가 떠오는 것을 보고 간신히 폰을 들어 일주일 휴가를 냈다. 음식 생각은 안 나면서도 그럴 정신은 들었다. 우유 아르바이트는 이미 무단결근으로 다른 사람을 구한다 통보해왔고, 공사장은 건물이 완공되어 할 필요가 없었다. 술집 사장이 심각하게 무슨 일이 있는 거냐 물었지만 괜찮다 답하고 거의 일방적으로 끊어버렸다. 그 뒤로는 딱 숨 쉬는 시체,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세상에 있는 고통의 종류는 겪을 만큼 겪어봤다 생각했는데, 이건 이전보다 몇 배는 더 괴로웠다. 차라리 돈을 모조리 뺏기고 흠씬 두들겨 맞아 길에 쓰레기처럼 버려졌을 때는 명쾌했다. 아픈 건 꾸역꾸역 버티다 보면 낫는다. 얼굴에 상처가 났을 때는 일주일. 뼈가 부러졌을 때는 한 달. 지금은 각목에 두들겨 맞아 갈비뼈가 부러졌을 때보다, 구둣발에 채여 등에 상처 자국이 가득했을 때보다 훨씬 말도 나오지 않을 만큼 아팠다. 누군가 무거운 바윗돌을 가슴 위에 얹어놓은 것처럼 숨을 쉬기도 벅차다. 밀려오는 고통에 허덕이고 있다 보면 정국은 스스로가 우스워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버린건 자신이고, 상처받은 건 박지민이다. 서로를 놓고 저울을 재다 꼬리를 말고 도망갔고, 때문에 영문도 모른 채 떠내려간 박지민이 아파하는 건 말이 된다. 걔는 아파할만 해. 그런데 넌 무슨 자격으로? 사람을 칼로 찔러놓고 괴롭다 같이 울고 있으면 어쩌자는 건데.
정국은 일주일간 끊임없이 괴로워하고 절망하기를 반복했다. 정 버틸 수 없을 만큼 목이 탈 때만 물을 마시고 온 지도 모르는 새벽을 맞이했다. 억지로 꾸역꾸역 그래도 살겠다고 밥을 밀어 넘기는데, 즉석밥을 열면서 식탁에 앉아 웃고 있는 박지민이 눈에 떠올라 심장이 쑤셨다. 하루에도 몇 번씩 지민을 보낸 병원 속으로 시간이 갇혀버렸다. 눈 감은 너. 얇은 손목에 꽂혀있던 주삿바늘. 짠맛이 난 입맞춤. 지민이 어떤 상태인지 궁금해 티비를 키려다가도, 얼굴을 본 순간 스스로가 어떤 반응을 나타낼지 몰라 두려워 꾸역꾸역 참았다.
아예 일을 관뒀어야 했는데. 충분히 일주일 동안 괴로워하고 나면 어느 정도 괜찮아지리란 믿음은 둘도 없는 오만이었다. 정국은 한숨도 못잔 상태로 옷장을 열어 옷을 꿰어 입었다. 이미 폰은 제 시간에 출근하지 않은 탓에 연락이 불이나 있었다. 그 순간에도 옷장 앞을 기웃거리며 이 옷 저 옷을 꺼내보는 지민의 환상이 떠올라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정국이 현관문을 닫고 밖으로 나왔을 때였다.
"오 마침 나왔네, 전정국이."
검은 옷을 입은 사내들이었다. 푸짐한 덩치를 가진 사내 두명 중 한 명이 다가와 정국의 어깨를 껄렁껄렁 툭툭 두들겼다.
"착실하게 보내더니 요즘 뭔 딴생각이라도 해? 우리 사이 좋잖어. 계속 좋게 지내야하지 않겄어."
정국은 무표정한 얼굴로 입고 나온 자켓 안을 뒤적거려 꺼낸 하얀 봉투를 사내에게 내밀었다.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안부를 전해오던 때와는 딴판이었다. 정국은 사내가 돈 봉투를 받자마자 주저 없이 걸어갔고, 오히려 정국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 느낀 사내가 어깨를 붙잡아왔다.
"아야, 니 지금 쪼까 건방지다잉?"
"……."
"니…뭔일 있나? 흐미 피골이 상접했구마."
"괜찮으니 가보겠습니다."
정국은 사내의 손을 떼고 고개만 까딱한 뒤 걸음을 옮겼다. 아부의 새싹으로 허리까지 직각으로 접으며 먼저 들어가라 연기할 힘이 없었다. 사내는 미간을 좁히며 정국을 붙잡으려다 울리는 벨소리에 에이씹, 하고는 대신 침을 퉤 뱉었다. 사내는 다른 사내에게 정국의 뒷모습을 눈짓하며 말했다.
"저 새끼 지금 야마 돈 거 같제?"
다른 사내가 빨리 전화나 받으라 지적했다. 아 또 뭔 일이라야. 사내는 전화를 받고 정국으로부터 관심을 삭제했다.
술집은 번화가는 아니지만 먹자골목 사이에 속해있었다. 술집으로 출근하기 위해서는 버스정류장을 거쳐야 했다. 생각은 말 안 듣는 날씨처럼 통제할 수 없었다. 온통 박지민이었다. 여기도 추억이 있었다. 얼토당토않게 형이라 부르며 졸졸 쫓아오던 박지민. 벤치로 시선을 돌리니 유령처럼 투명한 박지민의 허상이 보인다. 데이트니까 오늘은 마음껏 손잡을 거야. 나란히 벤치에 앉아있을 때 당차게 뱉고 웃으며 손을 엮어오던 박지민.
"거기, 청년! 탈 거 아니에요? 탈 거면 빨리 타고."
어느새 버스 정류장 앞에 정지한 버스기사가 물어왔다. 거의 한밤중 혼자 서서 넋을 잃고 서 있는 정국을 요상하게 보는 눈길이었다. 정국은 말없이 카드를 찍고 버스 뒷자리에 앉았다. 버스에 설치되어있는 티비에서 연예뉴스가 나왔다. 정국은 화면을 마주한 순간 아예 말도 없이 일을 관뒀어야 했다 생각했다. 아니면 차에 치여 다리가 부러지거나.
「이번 사건은 하나의 해프닝에 지나지 않는다 주장한 한울그룹과 유성그룹은 공식적인 발표를 통해 약혼이 문제없이 진행된다 선언했는데요. 현재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기업 간의 암투 혹은 한울그룹과 유성그룹의 병합을 막는 은밀한 세력들이 있다는 루머는 자제해달라 의견을 표명했습니다. 박지민씨는 현재 빠른 회복속도를 보이며, 오는 3월 식을….」
연예부기자가 찍은 태형과 지민이 한 프레임 안에 담겨있는 파파라치 사진이 화면에 뜬 순간 정국은 더는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그럼에도 리포터는 발랄하고 일정한 목소리로 계속 떠들었다. 사람들의 입맛대로 박지민은 납치당한 가련한 신부였고, 그 짝인 우성알파는 상처받은 약혼자를 위로해주는 다정다감한 완벽한 짝이었다. 납치, 우성오메가와 우성알파, 재벌가의 약혼 세 박자는 함께 어우러져 더도 없을 21세기의 로맨스로 탈바꿈했다.
「어서 상처도 아물고 3월에 가장 행복한 부부의 모습을 보여주시길 바랄게요.」
정국은 의도적으로 다른 생각을 떠올렸다. 이번 아르바이트는 어디가 좋을까. 공사장은 수당을 꽤 받지만 시간이 애매하다. 전화상담을 해볼까. 아니면 새벽타임으로 바꿔서 대리기사나 할까.
「이미 김태형씨가 박지민씨 입원해있는 병원 문턱이 닳게 드나들고 있으니까 걱정은 없는 문제죠.」
생각할 시간이 없도록 수면시간을 줄이는 것도 좋겠다. 몸이 피곤하면 정신도 멀어지게 된다. 아 그 방법이 좋겠다. 머리가 딴 생각하지 못하게 딱 기절할 만큼 몸을 굴리는 거다.
「병원에서 알아온 소식에 의하면 두 분이 떨어뜨리는 깨 때문에 단 냄새가 폴폴 풍긴다고 하네요. 아 저는 언제쯤 이런 사랑을 할 수 있을까요?」
머리가 지끈거린다. 차분해지기 위해 시작한 생각은 점차 욕지거리를 동반하며 거칠어졌다. 풀 곳 없는 화남의 대상이 되는 건 자신뿐이다. 이번 달 빚 안 갚을 거야? 니가 감정에 빠져있을 시간이 있어?
「이건 유명한 사진이죠? 병원 정원에 박지민씨가 탄 휠체어를 끌고 나온 김태형씨 사진. 여기 보이세요? 눈에서 꿀이 떨어….」
삐이―, 버스 승차벨 알람소리가 유난히 신경질적으로 울려 퍼졌다. 아직 아르바이트 도착장소까지는 다섯 정거장이 더 남아있었다. 정국은 알람벨을 짓누르듯 몇 번 더 끈질기게 눌렀다. 부서뜨릴 기세로 벨을 누르니 버스 기사가 그만 누르라 큰 소리를 냈지만 정국은 신경 쓸 여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회피하듯 버스에서 내려 자괴감에 머리를 감싸 쥐었다. 최악이다. 너무 못난 자신에 헛구역질이 나왔다. 제발, 질투만큼은. 시발. 거기까지는.
습한 숨이 폐부에서 올라온다. 복잡한 생각 탓인지 점점 더 머리가 아파온다. 모조리 녹아 없어져버리면 좋겠다 생각하며 정국은 뛰었다.
모두 떠난 가게를 홀로 마감하던 시연은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장이 없는 날은 대부분 정국과 둘이 마감을 담당한다. 그러나 오늘은 정국이 나오지 않았다. 다른 아르바이트생이 무단으로 출근하지 않았다면 정신교육이 얼빠져 있다 생각하고 등짝이라도 한 대 쳤겠지만, 정국은 경우가 달랐다. 일주일간 휴가를 받아간 것도 그렇고, 그게 끝나도 나오지 않는 것도 그렇고. 심지어는 전화도 받지 않는다. 전화를 받는다 해도 뾰족한 수가 있는 건 아니다. 예의 있게 대하면서도 늘 거리를 두고 행동하는 정국은 무조건 괜찮다는 답만 반복할 게 빤했다.
가게 셔터를 내리려던 시연은 저쪽 멀리에서 걸어오는 한 인영을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
"정국아!"
"아…누나."
비틀거리는 정국이 시연을 발견하고 걸음을 멈췄다. 시연은 너무 놀라 억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상태가 가관이다. 뜬금없이 일주일 휴가를 내미는 걸 보면 필시 좋은 상황은 아니라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나 망가져있을지는 몰랐다. 다 쉰 목소리는 둘째 치고 그토록 쌩쌩하던 얼굴이 창백했다.
"정국아 너 괜찮…아니 안 괜찮아 보인다. 잠깐 가게 들어가서 상태 좀 보자. 얼굴 마른 거봐. 뭐하고 다닌 거야, 일주일 동안."
"사장님은요?"
"퇴근하셨어. 들어와."
"괜찮아요. 그럼 누나가 사장님한테 말 좀 전해주시겠어요, 저 일 관둔다고 좀…죄송하다는 말도 전해주세요."
"죄송이고 나발이고 너 꼴이 지금…됐고 빨리 들어와."
시연이 되돌아가려는 정국을 강제로 잡아끌고 가게 안으로 들어와 의자에 앉혔다. 환한 불빛 아래서 보니 상태는 훨씬 심각하다. 핏발 선 눈은 무덤에서 깬 좀비보다 처참했고 며칠이나 굶은 건지 마른 티가 확 났다. 바른 빛을 띄우던 눈빛은 죽어 알맹이는 쏙 빠지고 껍데기만 돌아다닌다.
"무슨 일이야. 말해봐. 도와줄게."
"괜찮아요."
"하나도 안 괜찮아 보이거든? 그런 말 하지 말고 정국아."
"저 정말 괜찮아요. 아무 일도 없어요."
마른 나뭇가지처럼 밋밋한 음성을 듣던 시연은 혹시나, 했다.
"…그거 때문이야?"
"……."
"지민 동생…?"
텅 비어버린 것만 같던 정국은 그 이름이 들리자 눈에 띄게 움찔했다. 맞구나. 설마설마했다. 시연은 순간적으로 정국을 따라 침묵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며칠 전 브라운관를 점령하는 재벌가 자제의 납치 소식을 듣고도 확신하지 못했다. 아무리 얼굴이 똑같이 생겼어도,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바로 주변에서 벌어진다고는 상상도 못 했다.
"허…내가 한울그룹 왕자한테 서빙을 시킨 거야?"
시연이 헛웃음을 흘렸다. 눈웃음을 배시시 뿌리고 돌아다니던 귀염둥이가 대재벌가의 왕자라니. 왕자가 주문도 받고 걸레질도 하고. 거기다가 성희롱도 당했다. 언론과 직접 본 상황이 너무도 달라 기가 막혔다. 대체 정국이 어떻게 그런 사람과 인연이 닿았는지 궁금한 한편, 몰래 지민이 다가와 소곤거리던 대화를 기억해냈다. 누나한테만 알려드리는 건데요, 사실 저랑 정국이랑 미래를 약속한 사이거든요. 기가 막힌다.
시연은 지민이 정국을 버린 것이라 확신했다. 그러니 애 꼴이 이렇게 말이 아니겠지. 적당히 돈 없고 잘생긴 정국을 가지고 놀다 지루하니 떠나버린 것이다. 흔히 말하는 스테이크만 먹다 질리니 잠깐 핫도그 같은 길거리 음식을 먹어본 거다. 전정국 마음을 홀랑 가져놓고 재미없어지니 튄 거다.
"내 참…사람은 이래서 얼굴 보고 판단하면 안 돼. 세기의 결혼은 개뿔. 지랄하고 앉아있네. 어후, 빡쳐."
미동 없이 앉아있던 정국이 퀭한 눈동자를 들어 시연을 쳐다보았다.
"비밀로 해주세요 누나."
"…세상이 미쳐 돌아간다 정말…."
시연은 마음을 접지 못한 정국을 불쌍히 여기고 올라오는 욕을 참아냈다. 어쩌다 정국이 그런 놀이에 걸린 건지 안타깝다. 정국이 이만 가보겠다며 일어나려하자 시연은 정국의 등짝을 팡 내리쳤다. 도로 어깨를 잡아 눌러 의자에 앉게 했다.
"찌개 끓여줄 테니까 먹고 가."
"괜찮다니까요. 사실 아까부터 계속 머리도 아파서 가봐야겠어요."
"이별이 대수니? 너 이렇게 망가질래? 안 먹으면 입에 강제로라도 입에 숟가락 박아넣을 거니까 먹어."
시연은 튀면 죽는다는 말을 남기고 주방으로 사라져 얼마 지나지 않아 김치찌개를 끓여왔다. 정국은 마지못해 숟가락을 들었다. 시연에게 미안할 정도로 아무 맛도 나지 않는다. 시연은 더욱 속이 터졌다. 대학교때 남자친구에게 차인 자신을 정국으로부터 찾아내고 열을 내며 저도 모르게 겉으로 지민을 씹었다.
"그래서 사귄다고 해놓고 모른 척 해달라고 한 거였네. 대외적인 약혼 하나 있으니까 뒤로는 구리게 놀고? 이중약혼이야 뭐야."
"…그게 뭔 소리에요 누나."
"알아서 좋을 거 없어. 먹어."
"박지민이 누나랑 다른 말 했었어요?"
"아냐. 어차피 끝난 거. 무시해."
"알려주세요. 아니, 알고 싶어요."
시연은 조금이나마 관심을 보이는 까만 눈동자에 씁쓰름한 입맛이 돌았다. 그래, 그냥 더 상처받고 깔끔히 잊는 게 낫지. 저 슬픔이 차라리 분노로 바뀌는 게 정국에게 이롭다.
"그때 가게 왔을 때 나한테 와서 그러더라. 너랑 미래 약속한 사이라고. 난 철썩같이 믿었지 뭐냐…."
"그랬어요? 다른 말은요?"
"비밀로 해달라고 했어. 너가 부끄러움이 많아서 숨기고 싶어 한다고."
"또 다른 건요?"
정국이 오아시스를 찾은 사람처럼 재촉했다. 시연은 일순 당황하며 어? 하고는 지민과 있던 시시한 일을 늘어놓았다. 접시를 잡기 쉬운 방법을 알려줄 때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던 반응이라거나, 주문을 받을 때 추천메뉴로 유도하라 했더니 눈을 반짝이며 그건 자신있다고 말해왔다거나.
"그리고요? 또 없어요?"
"또? 어…."
정국은 취조하듯 일화를 캐묻는 자신을 한심해하면서도 멈추지 못했다. 박지민의 흔적을 찾고 감격하고 있다. 아직 흔적도 이렇게나 좋다. 일주일을 처박혀있던 시간이 아무 의미 없이 다시 너무나도 보고 싶다. 지끈거리던 머릿속은 아예 누군가 쿵쿵 북을 귓가에 대고 치는 것만 같다. 시야가 흐릿해진다.
"그다음에는 딱히…저, 정국아! 세상에, 얘! 정신 좀 차려봐! 정국아!"
쿠당탕 무너진 의자가 굴러간다. 시연은 갑자기 쓰러진 정국을 흔들다 폰을 꺼냈다. 구급차를 부르려다 이내 방향을 바꿔 동생의 번호를 눌렀다.
"야 너 나 일하는 가게 알지? 거기로 좀 튀어와라."
시연은 병의 원인이 실연이라면 병원에 가도 달리 방법이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
병원에서 퇴원했다. 퇴원일은 대체 어떻게 안 건지 기자들이 북적거렸다. 헐렁한 병원복에 선글라스를 걸친 기묘한 패션으로 지민은 짜증을 꾹꾹 눌러참으며 경호원들에 둘러싸여 집으로 퇴원했다. 3개월 만에 돌아온 집은 변함없었다. 정국의 방보다 큰 신발장을 지나쳐 들어가자 도련님 고생 많으셨다며 우루루 달려 나오는 고용인들의 환대를 받았다.
오자마자 정국의 집으로 출발하려던 지민은 철저한 박사장의 간섭에 주춤했다. 가족의 사랑이 필요한 때란다. 아침과 점심, 저녁 모두 집으로 돌아와 식사하는 박사장과 문여사 탓에 꼼짝도 못 하고 집에 박혀있었다. 한주가 더 흘러 일이 밀렸다며 제발 돌아와 달라 비는 비서들에게 박사장이 질질 끌려가고서야 일명 박사장이 지정한 '가족행복시간'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거기 집으로 출발해."
지민이 뒷좌석에 올라타자 남준이 부드럽게 차를 출발시켰다. 남준은 또 이곳으로 가는 게 옳은 선택인지 마음이 영 찜찜했지만 묵묵히 이행했다. 앞좌석에 달린 거울로 흘긋 뒷좌석에 앉은 지민을 살폈다. 복잡한 표정으로 입술을 꾹 다물고 창문을 쳐다보는 지민은 혼자 바빴다. 간혹 인상을 찡그리기도 하고, 입술을 껌처럼 꾹꾹 물었다가 놓기도 하고, 고개를 휘휘 젓기도 하고.
남준은 차마 슬그머니 가도 소용이 없을 것이라 조언을 할까 고민했다. 모든 정황이 그쪽으로 화살표를 가리켰다. 신고를 받고 병원에 도착했을 때 의사는 신고자를 알 수 없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우연히 길에서 주워왔다는 말만 남기고 떠났단다. 히트사이클이 온 우성오메가를, 그것도 백억이 걸린 지민을 길에서 주워 병원에 버리듯 적선하고 간다는 건 성립하지 않는다. 수상한 낌새에 CCTV를 뒤지며 의사에게 친분을 쌓아 캐내니 역시나 다른 말이 나왔다. 이불에 감싸 도자기 대하듯 소중하게 데리고 온 사람이 방송을 보더니 어느 순간 홀연히 사라져버렸다 했다.
남준은 살짝 귀띔을 해줄까도 생각했지만, 알파와 오메가의 연애사는 끼어들어 좋은 꼴을 본 적이 없어 얌전히 빠지기로 마음을 굳혔다. 굳이 따지자면 오메가와 베타지만. 아니, 오메가와 베타라 더욱 해결책이 안 보이는 나쁜 문제인 것이다.
"김비서."
"예, 예!?"
"뭘 그렇게 놀라. 생각해보니까 갈 때 돈 좀 챙겨가. 내가 돈을 좀 빌렸어."
"예? 빌리셨다고요?"
"응."
훔치는 게 아니라 빌리는 거라니. 지민의 도덕관념을 깡그리 무시하고 있던 남준은 작게 감동했다. 장하다고 엉덩이라도 토닥거리고 싶어진다. 그러나 감상은 채 일 분을 가지 못했다. 지민이 뒤에 툭 던진 말은 남준을 경악시켰다.
"이거 삼백 배로 갚아야 하는데, 몽땅 현금이어야 해. 알아서 준비시켜."
"삼…백 배요?"
"어. 됐다고 했는데 내가 그렇게 말했어."
"…예. 준비하겠습니다."
어떤 미친 금융이지. 튀어나오는 욕을 누른 남준은 핸들을 꽉 잡았다. 동생이라면 아이고 화상아, 하고 꿀밤을 빛의 속도로 날렸겠지만 엄연히 모시는 도련님이다. 온실 속 화초로 자란 오메가 도련님에겐 돈을 빌렸다는 것만으로도 크나큰 발전이다. 대신 약 제 8의 금융 즈음 되어 보이는 쪽을 욕했다. 순진한 애 사기 처먹는 놈들을 상대할 변호사 리스트를 머릿속으로 뒤적이며 마저 운전했다.
지민은 익숙한 골목 거리에 차가 들어선 순간부터 다리를 달달 떨었다. 손톱을 깨물고 눈동자를 빙글빙글 굴리는 둥 안절부절못했다. 남준이 어디 불편한 거라도 있냐 물어왔지만 아무것도 아니라고 대답해 관심을 돌렸다. 진짜 별거 아니다. 전정국이 어디 있겠어. 당연히 집에 있겠지. 떨리는 건 뭐 항상 전정국 앞에선 떨렸으니까 떨리는 거지. 긴장은 무슨. 코웃음을 치며 아무리 떨쳐내려 해도 지민은 목이 타는 듯한 느낌에 미리 차에 준비되어있던 물병을 뜯었다.
"도련님 도착했습니다."
툭, 지민이 들고 있던 물병을 떨어뜨렸다. 해바라기씨를 문 햄스터처럼 볼에 물을 머금고 부러 천천히 삼켰다. 남준은 문을 열어주어도 지민이 나오지 않자 허리를 숙여 차 안을 들여다보았다.
"도련님?"
"가, 갈 거야."
지민은 개무시하고 지나갔을 떨어진 물병을 줍는 행동까지 마치고 천천히 차 밖으로 나왔다. 뭘 떨어? 가자. 전정국이 별거야? 아 별거긴 하지. 내가 좋아하니까. 지민은 한발자국씩 느리게 계단을 올랐다. 뒤에서 따라걷는 남준이 의아하다는 듯 다시 지민을 부르자 지민은 걸음을 뚝 멈췄다.
"…돈부터 갚고 갈래."
"예? 바로 안 가십니까?"
"원래 신용은 중요한 거라며. 김비서 어서 돈 가져와."
경영공부시간에 맨날 흥미없는 표정으로 딴짓하던 지민의 입에서 나오기에는 무리가 있는 철학이다. 빤히 쳐다보는 남준의 눈빛에 당황한 지민이 갖가지 이유를 밑에 첨부했다. 생각해보니 전정국이 지금 집에 없을 시간이야. 아침에는 일하거든. 어차피 열쇠도 없잖아. 문을 부술 수도 없고.
"뭐. 뭐. 왜 그렇게 보는데."
"예? 제가 뭘 어떻게 봤다고…."
"아 돈은 얼마 찾아왔어?"
"지금 당장 급하게 마련한지라 약 오천만 원 정도입니다. 가서 정확한 금액을 알면 맞게 다시 준비하겠습니다."
"그래? 알았어. 따라와."
지민은 윤씨의 집을 선택했다. 남준으로부터 돈이 준비된 가방을 들고 뒤에 가만히 서있으라 명령했다.
"할머니! 나 왔어! 지민이!"
찾아올 때마다 반갑게 열리던 문이 잠잠했다. 없나. 문에 매달려 기웃거리던 지민이 발길을 돌릴 즈음 삐걱거리는 문이 천천히 열렸다. 머뭇머뭇 나온 윤씨는 지민을 발견하고 지민의 뒤에 정장을 갖춰 입은 남준을 발견하고는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시선 둘 곳을 찾지 못했다. 지민은 반가움을 감추지 않고 활짝 웃었다.
"할머니 뭐 하고 있었어?"
"으…응?"
"내가 돈 갚는다고 했었잖아. 그때 버스비!"
공사장으로 정국을 찾아갔을 때 빌렸다. 삼 백배하면 얼마지. 지민은 돈이 가득 들은 가방을 뒤적이다 미간을 모으고는, 돈가방 자체를 내밀었다. 방긋 웃는 웃음이 천진했다.
"그냥 할머니 다 가져. 얼마 빌렸는지 기억 안 난다. 난 많으니까. 다른 할머니랑 할아버지한테두 나눠주구."
남준은 고리대금업체의 정체를 알고 연락하려던 변호사 목록을 삭제했다. 훈훈한 심정으로 변해 다큐멘터리를 보듯 감동의 돈거래 현장을 보고 있었다. 윤씨는 지민이 내민 돈가방을 안을 보고는 더욱 소스라치게 놀라 움찔했다. 왜 안 받아? 지민이 고개를 갸웃하며 한 번 더 들이민 순간이었다.
"지, 지는 일케 귀하신 분인 줄 몰라뵙고…."
윤씨는 양손으로 지민의 손을 잡아왔다. 미안하다는 말까지 덧붙여오는 윤씨를 보고 무언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 감지한 남준은 석고상처럼 뻣뻣하게 굳어진 지민을 발견했다. 예상 못 한 곳에서 날아온 공을 맞은 얼굴이었다. 말려야겠다. 저 상태면 지민은 분명 곧장 눈을 뾰족하게 치켜뜨고 야, 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티를 팍팍 낼 것이다. 박노인이 노인공경문제에도 더 신경을 써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희망사항을 속으로 중얼거린 남준이 유연하게 끼어들어 말리려는 때였다. 지민은 배시시 입꼬리를 당기고 윤씨의 손 위에 제 손을 올렸다.
"이건 할머니꺼야. 가져. 주고 싶어."
"……."
"다음에 또 올게! 정국이 곧 올 시간이거든."
지민은 손을 방방 흔들고 뒤돌아 윤씨의 집이 있는 골목에서 벗어났다. 남준은 정중히 허리를 접어 인사한 뒤 지민의 뒤를 따랐다. 어떠한 말도 해줄 수 없었다. 새하얀 가디건을 걸친 등이 유달리 작아 보였다. 현실과 꿈이 충돌하고 합쳐지는 과정에서 떨어진 성장통은 온전히 지민의 몫이었다.
"김비서는 차에 있어. 혼자 다녀올게."
얼굴도 보여주지 않은 지민이 성큼성큼 거리를 벌려 멀어졌다. 남준은 해가 떨어진 밤이 되어서야 지민을 다시 볼 수 있었다. 그 표정은, 울음을 꾹 참듯 계단을 내려오는 표정은 남준이 여태 본 지민의 표정 중 가장 슬퍼보였다. 물이 찬 투명한 눈동자가 더욱 아득바득 눈물을 참았다. 그건 아직 꿈을 깨고 싶지 않은 발버둥이었다.
"약속을 안 잡아서 그런가봐. 얘랑 나랑 진짜 안 통해. 차에서 잘래. 엄마랑 아빠한테는 김비서가 연락 좀 해줘."
남준은 처음 운전대를 잡은 순간 사실을 말했어야 한다 후회했다. 남준이 가늠한 것보다도 더 큰 성장통이 지민을 기다리고 있었다.
달동네에 어울리지 않는 고급차량은 시선을 끌었다. 그 차에 탄 지민은 며칠 동안이나 주인 찾는 강아지마냥 창문 밖으로 고개를 빼고 골목길을 오르내리는 사람을 지켜보고, 열리지 않는 단칸방 문 앞을 서성이기를 되풀이했다. 지민은 끈덕지게 진을 치고 기다렸다. 차에서 구겨진 채로 잠을 청하고 새벽같이 일어나 단칸방을 달려가 문을 두들겼다. 남준이 기껏 포장해온 도시락도 입맛이 없다 칭하며 물렸다. 본인은 입에 아무것도 넣지 않으면서 남준에게는 이런 거 말고 가서 맛있는 걸 먹으라 불퉁거렸다.
안 그래도 별로 없는 참을성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닳아만 갔다. 정국이 동네 시끄럽게 하면 안 된다는 말을 기억하고 참던 지민은 기어코 쾅쾅 문을 부수듯 두들기며 외쳤다.
"차라리 팔았다고 해. 돈이 급해서 날 팔은 거라고 하라고. 그 정도는 용서해줄 수 있어. 지금이라도 나와. 전정국, 너 안에 있는 거 다 알거든? 왜 나 보내놓고 돈도 안 받아가?"
나 이제 너한테 돈도 많이 줄 수 있는데.
"전정국! 나와! 얼굴 보고 얘기해! 내가 싫다고 얘기하면 떨어져나가 줄게! 전정국! 야! 이 나쁜 새끼야! 키스만 하면 다야! 다냐고!"
문을 내리친 주먹이 퉁퉁 부어올랐다. 버럭버럭 지르던 지민은 미끄러지듯 문 앞에 주저앉았다. 하얀 가디건은 이미 며칠을 바닥을 구르고 굴러 군데군데 때가 타 있었다. 열리지 않는 문손잡이를 원망스레 바라보다 왈칵 샘솟으려는 눈물을 눈가를 꾹꾹 눌러 참아냈다. 울면 안 되지. 왜 울어? 전정국은 단순히 일하느라 바쁜 거다. 집에도 못 들어올 만큼 정국은 바쁜 것뿐이다. 바보 같은 전정국. 그렇게 안 봤는데 머리 나쁘잖아. 내가 이제 돈 줄 수 있는데 일이나 계속하고 있고. 나만큼 인증 받은 황금티켓 아무데도 없는데.
아직까지는 버틸 수 있다. 이대로 다시 돌아만 와준다면 아무것도 묻지 않을 아량도 베풀 수 있다. 지민은 무릎을 털고 일어났다.
***
지민은 돌계단에 쭈그리고 앉아 지는 노을을 바라보았다. 주홍빛으로 물든 하늘이 하릴없이 예뻤다. 다 쓴 노트처럼 힘이 빠진 목소리로 지민이 울적하게 중얼거렸다.
"너 진짜 안 온다…."
나 참을성 다 썼어. 너 기다리는 거 너무 힘들어. 여행을 갔다, 약속을 잡지 않았다 그런 핑계들로도 이제는 막을 수 없다. 진짜 안 오는 거야? 진짜 안 와? 변명거리도 몽땅 써서 기다릴 명분도 못 만들어. 지쳐버렸다. 떨어지라 꺼지라 외치는 말을 직접 듣는 것보다 얼굴 한 번 보지 못하고 받는 무시가 가장 아팠다. 병실에서 깨어나 정국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 싹을 틔운 불안은 잘라도 잘라도 계속 자라더니 지금은 온 마음을 뒤덮어버렸다.
그래서 그런 생각도 들었다. 날 가장 효과적으로 떼어내려고 너 일부러 안 오는 거지. 내가 무시하지 말라고 말했던 거 생각나서. 실제로도 정국이 그럼 또 무시하냐 말을 건넨 적 있으니 정국이 알고 있다는 건 확실했다. 얼마나 내가 싫었으면 아예 집도 안 들어오냐. 너무하다. 지민은 정국이 했던 고백조차 헷갈리기 시작했다. 너한테 들었던 말 그냥 내 착각인가. 맨날 내가 듣고 싶은 대로 들어서 그거까지 착각했던 건가. 분명 너는 날 좋아한다고 했던 거 같은데. 좋아하면 나한테 이렇게 모질게 굴 수가 없는데. 히트사이클에 맛이 간 머리가 만들어낸 착각인지, 진짜인지 그것조차 모호해진다.
"도련님 아버님께 연락 오셨습니다. 또 묶는다고 답할까요?"
남준이 다가와 폰을 내밀었다. 지민은 천천히 무릎을 펴 일어났다.
"아니. 간다고 전해."
남준은 조금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지민이 덧붙였다.
"…이거 문 좀 열어줘."
마지막 확인이다. 굳게 잠겨있던 문은 남준의 지시 몇 번으로 사람들의 손에 의해 뜯겨나갔다. 동시에 지민의 마음도 같이 뜯겨나갔다. 지민은 그날 정국의 방이 좁은 것이 처음으로 미웠다. 눈을 돌리면 바로 정국을 볼 수 있어서, 둘이 붙어 잘 수 있어서 행복했던 좁은 방이 원망스러웠다. 너무 좁아 한눈에 방 안에 정국이 없다는 걸 알 게 만들어 미웠다.
"……."
지민은 문을 열어 정국이 없는 걸 확인하는 순간 반쯤 이성을 놓을 거라 예상했던 생각과 달리 멀쩡했다. 부정하는 시간동안 눈물을 다 써버린 건지, 끝을 마주하는데 신기하게도 눈물이 나지 않았다. 천천히 발걸음을 돌려 차에 탔다. 집에 도착해 박사장과 문여사와 저녁을 먹었다. 침대에 누운 순간, 텅 빈 방을 봤을 때도 나오지 않았던 눈물이 주르륵 터져 나왔다.
"씨이…."
전정국 정말 못됐다. 버려도 이렇게 매너 없이 버리냐. 지민은 베갯잇에 얼굴을 묻었다. 목구멍이 쓰라리고 아픈 건 오늘 저녁으로 먹은 생선가시 탓이다. 생선가시가 얼마나 큰 게 걸린 것인지 숨도 쉬기 힘들었다. 이건 비리고 맛없는 생선이 슬퍼서 우는 거다. 생선 주제에 이렇게 맛없으면 누가 먹냐. 맛도 없고 가시만 몽땅 있으면 누가 먹냐고.
너무 큰 가시를 삼켜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