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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laura izibor - sunshine>










 지민은 정국과 한달 만에 약속을 잡았다. 정말 오랜만이었다. 대학 때는 내내 붙어있었고, 백수일 때도 일주일에도 한번씩은 꼬박꼬박 봤으니 한달은 꽤 긴 시간이었다. 게다가 연락도 뜸했다. 일이 끝나고 집에 가면 뻗기 일쑤니 정국과 제대로 대화를 해본 것도 오래 전 일이었다.

 금요일 저녁, 좋아하는 펍, 가족 같은 후배. 세 박자가 고루 맞춰진 일상은 이제 백수를 탈출한 지민에게 더도 없는 천국이었다. 형 저 도착했어요. 정국의 문자를 확인한 지민은 엉덩이를 달싹였다. 드디어 퇴근이다 헤에. 지민이 눈이 아예 사라질 듯 눈웃음을 짓고 있자, 야근이 확정된 레이첼이 꼴사납다는 얼굴로 경고했다. 저렇게 감정표현 솔직하게 얼굴에 드러나는 애는 처음이네.



"광대 좀 넣죠?"

"그러게. 나한테서 벗어나는 게 그렇게 좋나 보네. 섭섭한걸."



 집무실 문을 열고 등장한 윤기가 말을 얹었다. 지민은 헉 하고는 입꼬리를 급히 가다듬었다.



"미스터 윤 지시하신 포스터들 뽑아서 앨범으로 만들어놨습니다."

"줘 봐."



 오늘 하루 종일 인쇄하고 자르고 붙이기를 반복해 만든 앨범을 지민이 양손으로 공손히 내밀었다. 한 손으로 받아 든 윤기는 앨범을 촤르르 넘겨보고는 착 닫았다. 완벽하겠지, 완벽할 거야. 손이 가위손이 될 지경으로 만들었는데. 지민의 바람이 통했는지 윤기는 다행히도 무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여줬다.



"내 차 조수석에 넣어놔. 그리고 퇴근하고."

"네!"

"너 입사하고 여태 들은 대답 중 가장 큰 대답인 거 같은데."



 아하하 어색하게 눈웃음을 만드는 것으로 지민은 답을 채웠다. 윤기가 다시 집무실 안으로 돌아가고, 지민은 야근 예정인 레이첼과 석진을 격려했다. 선배님, 힘내세요! 제가 응원하고 있을게요! 차라리 빨리 가라는 레이첼의 인사와 웃어도 우는 얼굴에 가까운 표정으로 반겨준 석진의 인사를 끝으로 엘리베이터에 탔다. 날개 돋친 듯 가벼운 발걸음이었다.





 맨해튼에 위치한 작은 펍은 지민이 뉴욕을 사랑하는 이유 중 하나였다. 유명한 술집은 아니지만, 술맛도 제법 괜찮았고 무엇보다 가수의 노래가 일품이었다. 듣다 보면 저 허드슨 강 위로 카누를 타는 것처럼 마음이 평화로워졌다. 이곳 저곳 자리가 찬 틈을 헤집고 들어간 지민은 테이블들 사이에서 유독 눈에 튀는 잘생긴 동양인 한 명을 발견하고 발걸음 속도를 올렸다.



"정국아!"

"형!"



 지민은 전쟁으로 떨어진 가족을 대하듯 정국을 와락 끌어안았다. 아 내가 정국이를 만나는 걸 보면 퇴근을 했구나. 오구오구, 잘 지냈어? 우리 정국이? 정국은 가만 끌어 안겨 있다 낯간지럽다며 지민의 어깨를 붙잡고 떼어냈다. 참 칼 같은 반응이었다. 무력하게 밀려난 지민이 섭섭하다며 어깨를 퍽 쳤다.



"형이 반갑다고 끌어안으면 같이 안아주진 못할 망정, 어?"

"뭘 고작 한달 안 봐놓고 유난을 떨고 그…형 얼굴이 왜 그래요?"



 질색하며 손을 휘젓던 정국이 지민의 얼굴을 양손으로 잡고 쭉 끌어당겼다. 으극? 붕어마냥 입술이 톡 튀어나온 지민이 눈을 껌뻑거렸다. 정국은 심각하게 얼굴을 잡은 채 하얀 얼굴 곳곳을 들여다봤다. 지민의 트레이드마크는 녹을 듯한 눈웃음과 뽈록 튀어나온 입술, 그리고 빵빵한 볼살이건만, 그 중 한가지가 쏙 사라져버렸다. 맙소사. 정국이 탄식하며 말했다.



"꼴이 왜 이 지경이야?"

"…야!"



 잡혀있던 지민이 정국의 손을 탁 때리며 벗어났다.



"나도 내가 못 생겼다는 거 알거든?"

"아니 그거 말고 형 살이 쪽 빠졌잖아요. 얼굴이 이게 뭐예요. 회사가 밥 굶겨요?"

"어…살이 좀 빠진 거 같긴 하던데…그, 그 정도야?"



 지민이 제 볼을 더듬더듬 만졌다. 최근 옷이 약간 헐렁해진 거 같긴 하던데. 겉으로 볼 때도 티가 나는 모양이다. 난 잘 모르겠는데. 중얼거리며 지민은 안쓰럽게 쳐다보는 시선에 괜찮다는 뜻을 담아 활짝 웃어 보였다.



"뭐 어때. 살 빠지면 좋지."

"역시 그때 더 말렸어야 했어요. 사람꼴이 축 처진 빨랫감같이 형편없이 변해선."

"야 아무리 그래도 형한테 빨랫감이 뭐야."

"대체 무슨 일을 하고 다니는 거예요? 그 사람이 무슨 일을 시키길래 사람 얼굴이 이렇게 망가지냐고요."



 정국이 분에 차 씩씩거렸다. 듣던 지민은 역시 챙겨주는 건 정국 하나뿐이라는 뿌듯함에 좋아해야 할지, 얼굴 꼴이 한 여름날 시들어가는 수박 같다는 평에 화를 내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말리지 않으면 당장 어거스트에 쳐들어가 윤기의 멱살을 흔들 기세라, 지민은 메뉴판을 뒤적이는 것으로 화제를 돌렸다. 여기 맥주 두 잔이랑 치즈소스 감자튀김 하나 주세요.

 정국은 호락호락 넘어가지 않았다.



"무슨 일을 하고 다니는 거냐니까요? 막노동이라도 해요?"

"막노동…은 아니긴 한데…아니 막노동인가?"



 지민은 헷갈렸다. 막노동보다 더 한 거 같긴 한데 일단. 윤기가 시키는 말도 안 되는 심부름리스트를 볼 때 막노동을 닮아있긴 했다. 양손으로 버거운 짐을 들고 매일 아침 뉴욕 거리를 뛰어다녀야 하고, 슈퍼볼 하프타임쇼 티켓을 구하기 위해 밤 새보기도 하고, 일주일에 한번씩 센트럴 파크에서 개한테 끌려 다니기도 하고. 알쏭달쏭한 얼굴로 맞나 아닌가 고민하는 지민을 정국이 채근했다.



"그냥 말해요. 뭔 일인데요?"

"위험한 건 없어. 생명에 지장이 있다거나 목숨이 위험하다거나 하는."



 왜 사무직으로 일하는데 생명이 오간다는 말이 나온단 말인가. 정국은 제 생각보다 지민의 직장생활이 심각하다 느꼈다. 말을 돌리려 노력하는 꼼수는 통하지 않았다. 무섭게 힘을 빡 주고 노려보는 큰 눈에 지민은 결국 술술 불었다. 첫마디를 장식하는 것은 긴 한숨이었다.



"난 비서가 이런 일인 줄 몰랐어…들으면 좀 의외인 거 같은 일들이 있긴 한데 그다지 위험한 건 아니야. 홀리 산책시키러, 아 홀리는 개야. 덩치 엄청 커. 예전에 두발로 서서 내 얼굴 핥던데 키가 나랑 똑같더라구 하하. 홀리랑 같이 센트럴 파크에 가서 뛰는 일이랑, 주지사였나? 아무튼 식사 약속 끝나고 받아온 튤립 키우는 일이랑…아 그건 좀 힘들었다. 슈퍼볼 티켓 구하기. 으으 무슨 티켓 구하기가 그렇게 힘들어? 비욘세 은퇴공연 콘서트 티켓 구하기가 더 쉬울 거야…또 영화 감상문 써다 받치는거랑…특별한 건 딱히 없어. 이거 봐. 내 목 붙어있잖아. 나 병도 없고 잘 살아있어."



 살아있으면 된 거지 하하. 지민은 스스로를 세뇌시키는 것 같았다. 이 일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이 일은 목숨이 위험하지 않다. 정국은 기가 차 헛숨을 토했다. 아직도 저 착하디 착한 박지민은 제 상사를 남 앞에서 헐뜯지 않고 있다. 아 답답해. 정국이 대신 분노했다.



"그거 완전 미친놈이잖아요!"

"아니야. 미친놈이긴…."

"무슨 그런 또라이가 다 있어요? 비서가 아니라 샌드백 구했던 거래요? 사람을 똥같이 무시하고. 인권위원회에서 뭐 경고 안 준대요?"

"아니…뭐…생각보다 그렇게 또라이는 아니야…."



 지민이 감자튀김을 우물우물 씹으며 작은 목소리로 반박했다. 마음 같아선 그 자식 완전히 미친 또라이라며 같이 열변을 토하고 싶었지만, 남을 욕하는 건 되도록이면 피하는 편이었다. 미련스럽게 착한 천성 탓이었다. 정국이 눈을 가늘게 뜨고 가만 노려보더니 툭 던졌다. 아아 난 또 착각했네.



"뭐 그런 명령쯤 다 내릴 수 있는 거잖아요. 내가 과민반응했네."

"……."

"착한 사람인데."

"…야! 너 지금 누구 편 드냐? 그 자식이 뭐가 착해!"



 꾹꾹 억누르며 속으로만 맞장구 치던 지민이 발끈했다. 착하다니! 그 살벌한 눈빛과 독 같은 핀잔들이 착하다니!



"그럼 어떤데요?"

"야이씨 아 몰라. 네 말이 맞았어. 취소할게. 그 사람 미친놈 맞아. 진짜 미친놈이야. 그때 내 입을 어떻게든 틀어막아주지 그랬어. 착한 사람이라니. 정신이 나갔었지. 사람 맞나? 내 생각에 로봇이야 로봇. 사람이라면 그럴 수가 없어. 심장이 없는 사람이야. 어떻게 그렇게 사람이 차갑고 재수없지?"



 봇물 터지듯 지민은 그간의 서러움을 풀어놨다. 나보고 뭐라는 줄 알아? 서류 조금 늦게 가져다 줬더니 키가 작으면 달리기까지 느리냐고 묻더라니까! 지도 나랑 별 차이 안 나면서! 분통을 터뜨리며 맥주잔을 단숨에 들이킨 지민이 테이블에 쾅 유리잔을 내려놨다. 정국은 들으면 들을수록 기가 차다는 추임새를 넣었다. 그거 싸이코 아니에요? 왜 그런 사람이 감옥 말고 사회에 나와 있어요? 지민은 동의하며 상사씹기에 열을 올렸다.



"내가 워커홀릭이라는 사람들은 몇 명 봤는데 거기서 민윤기 따라잡을 사람 없다고 확신한다. 사람이 어떻게 하루 종일 일만 하지? 난 그 사람 화장실 가는 것도 놀라워. 혹시 가는 척 하는 건 아닐까 생각한다니까. 진짜 로봇인데 사람인 척 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구. 그리고 무슨 영화 감상문을 세 장씩 쓰라고 해! 지가 써보라 해! 할말이 얼마나 없는데!"



 공대생 지민은 감상문을 쓰는 게 지옥이었다. 퇴근하고 집에 와 영화를 보는 것은 또 다른 고문이었다. 재미있는 영화도 와 이거 재미있다, 멋있다 한 마디면 끝나는 평을 세 장씩 늘려 쓰니 죽을 맛이었다. 없는 말재주 있는 말재주 다 갖다 붙여가며 쓰다 보면 시간은 어느새 새벽이었다. 얼마나 끔찍하면 꿈에서도 영화 감상문을 쓰다 뒤척이며 잠에서 깨는 수준이었다.



"너 그 사람 웃으면 어떤지 알아? 빌어먹을. 어제 본 영화가 배트맨인데 조커보다 더 무서워. 그 사람이 웃으면 안 좋은 심부름이 매일매일 다시 갱신된다고! 사무실에 앉아서 매일 생각한다니까. 나 벌써 사표 첫 줄부터 마지막 줄까지 머릿속에 다 써놨어. 어느 날은 너무 열 받아서 영화 감상문 대신 사표를 낼 뻔 했다니까. 아 왜 신은 나 말고 민윤기를 택했지? 아…민윤기 커피 먹다 입천장 데였으면 좋겠다…."



 악에 받쳐 외치던 지민은 말하다 호흡을 다 쓰고는 급히 산소를 들이켰다. 정국은 제 예상이 한치도 틀리지 않았음을 확신했다. 두달동안 그만 둔 비서가 열명이라더니 그 값을 톡톡히 한다. 한달 만에 그 유순한 지민이 벅벅 이를 갈며 사람을 씹는 걸 보면.



"형 그냥 일 그만두는 건 어때요?"

"…안돼."

"왜요. 그런 미친놈보다 다른 회사 알아보는 게 좋잖아요."

"엄마한테 뭐라 말해…한달 만에 그만 뒀다고. 걱정하실 거야."

"어머니한테는 잘 말씀 드리면 되죠."

"아니야…."



 지민이 세상 다 산 노인처럼 말했다.



"날 누가 받아줘…그리고 일단 월급은 안 밀리고 꼬박꼬박 주니까…삼일 전에 첫월급 나왔어. 그거 보니까 좀 버틸만 해."

"형 목숨은 꼬박꼬박 사라지는 거 같은데."

"몰라아…내가 생각해도 내 몸 진짜 튼튼하다. 그렇게 굴러도 아프지 않다니. 민윤기는 이런 거 모르겠지? 몸 아프고 그런 거. 하긴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사람인데. 아 다 마셨네. 술 더 시킬래?"



 술이 오늘처럼 잘 들어가 날이 없다. 제 꺼 마셔요. 술잔을 밀어주며 정국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술 잘하는 것도 아닌 사람이 저 정도면 말 다했지. 정국은 정신 못 차리고 술을 입에 털어넣는 지민을 보며 무슨 수가 필요하다 생각했다. 자칫하다간 지민이 웃은 법도 잃을 것만 같았다.









***









 세상에 오지 않았으면 하는 게 두 가지 있다. 하나는 핵전쟁, 또 다른 하나는 월요일. 지민은 월요일 아침도 여지없이 뉴욕 빌딩숲 사이를 돌아다녔다. 커피와 일간지는 레이첼이 전화를 걸지 않아도 알아서 척척 사게 되는 수준에 이르렀다. 이상하다. 이쯤이면 추가 심부름 전화가 오는 게 정상인데. 갸웃하며 지민은 거의 몇 번 없는 기회, 회사 로비를 걸어서 들어가는 여유를 누렸다.



"레이첼, 좋은 아침이에요."

"정말 좋은 아침이죠."



 레이첼이 보기 드물게 안정적인 미소를 보였다. 물건을 내려놓으며 지민은 궁금증이 더 커졌다. 한달 간 지켜본 결과, 레이첼은 무척이나 사무적인 사람이었다. 일과 관련된 이야기가 아니면 말도 걸지 않고, 상대의 가슴에 비수를 꽂는 윤기와는 다른 의미로 차가웠다. 지민이 친절한 석진을 졸졸 따라다니며 애교 있게 웃고 있으면 레이첼은 일 하지 않을 거냐며 분위기를 갈라놨다.



"어, 곧 회장님 오실 시간 아니에요?"



 늘 이 시간이면 전쟁이었다. 석진은 올릴 보고서를 프린트로 뽑고, 레이첼은 책상을 치우고, 지민은 일간지를 보기 좋게 윤기의 책상에 정렬했다. 레이첼의 신발은 아직도 아찔한 하이힐이 아닌 슬리퍼였다. 나 지금 좀 엄청 좋은 예감이 드는데. 그러고 보니 석진의 책상도 텅 비어있다.



"오늘 미스터 윤께서 오후에 출근한다 하셨어요."

"진짜요? 미스터 윤이요? 해가 서쪽에서 뜨려나 봐요!"



 지민이 꽃이 피어나듯 화사하게 활짝 웃었다. 월요일의 우울함이 다 날아갈 만큼 환했다.



"지민 여기 CCTV는 계속 돌아간다는 거 알고 있죠? 너무 좋아하는 티는 내지 말아요."

"헤헤, 알았어요. 그런데 진 선배님은요?"

"지금 캘리포니아에서 울면서 일하는 중이에요. 미스터 윤이 주말부터 출장을 보내버렸어요. 수요일 날 귀국한대요."



 진짜 극악무도한 악마다…. 휴일을 깡그리 뭉개버리고 출장이라니. 지민은 석진을 위해 짧게 기도했다. 선배님 덕분에 제가 위안을 받아요. 제가 하는 일들은 별 거 아닌 거 같아요. 주말을 상납하느니 홀리와 센트럴 파크를 다섯바퀴 더 뛰는 쪽을 택할 것이다. 



"그럼 점심까지 뭐해요?"

"지민 프랑스어 할 줄 알아요?"

"어음…봉주르…?"



 지민이 어설프게 발음했다. 본쥬르? 봉…? 레이첼은 말을 말자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그냥 지민 할일 해요. 지민은 한심하다는 눈빛에 머리를 멋쩍게 긁적거렸다. 한국어라면 잘하는데.

 아 사무실이 이렇게나 편한 공간이었나. 내 일터가 이렇게 좋은 곳이었어? 지민은 나른한 아침햇살을 받으며 윤기 몫으로 사온 커피를 홀짝였다. 어차피 식은 커피를 대령했다간 그 시퍼런 눈빛에 타 죽을 것이다. 윤기가 1분씩 늦게 오는 만큼 수명이 1분 늘어나는 거 같다. 아니 이미 민윤기가 깎아놓은 내 수명이 족히 일년은 될 텐데. 1년동안 사무실에 안 들어왔으면 좋겠다. 지민은 미리 제출할 다음 영화감상문을 쓰며 세계평화가 찾아온 기분을 만끽했다.


 마침내 그 시간이 찾아왔다. 아쉬웠지만 지민은 여태 가장 평화롭고 기분 좋은 얼굴로 윤기를 맞이했다.



"식사는 잘 하셨나요? 미스터 윤."



 한번쯤은 받아줘도 될 인사를 윤기는 또 무시하고 걸어나갔다. 인사무시에 단련이 된 지민은 초반 서운함을 느끼는 상태에서 돌같이 딱딱한 심장을 유지하는 상태에 도달했다. 자, 어서 날아와라. 지민은 메이저리그의 포수 같은 눈빛으로 윤기의 뒷모습을 주시했다.



"레이첼, 현지 상황은?"

"오늘 내로 진이 해결하고 보고 올린다 했습니다."

"내일 오전에 보고 올리라 해. 미팅 잡은 거 들어갈 거야."



 어라. 받아들 준비를 하던 지민은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어, 뭔가 좀…. 그 무시무시한 아우라는 그대로이고, 세상 모든 것을 자기 발 아래에 두는 흉흉한 눈빛도 그대로이고, 사람 무시하는 행동도 그대로인데 어디인가 위화감이 들었다. 지금 웃지도 않고 있는데. 지민은 어깨 너머로 윤기를 보려다 뒤도는 윤기에 흠칫하고는 파드득 제 자리를 유지했다.



"넌 오늘은 감상문 내지마."



 지민은 눈을 크게 떴다. 당황스러웠다. 눈을 마주하니 윤기의 상태를 자세히 볼 수 있었다. 뭐야. 이 사람. 설마.



"아프세요!? 미스터 윤?"

"헛소리도 가지가지 하는군. 네가 신경 쓸 영역 아니야."



 맞다. 아프다. 민윤기는 아픈 게 확실하다. 다른 날보다 창백한 안색과 함께 입술이 다 까칠하게 텄다. 지민은 경악했다. 진짜 사람이었어…. 불과 금요일날 로봇이 틀림없다며, 바이러스도 민윤기는 무서워서 도망갈 것이라 침을 튀기며 욕했는데, 그 당사자가 월요일날 병에 걸려 있다.

 지민은 급격히 윤기에게 미안해졌다. 양심이 따끔거렸다. 아 설마 내가 진짜 찔러도 파란 피가 나올 인간이라 욕해서 그런 건가. 다른 사람들 괴롭히는 맛에 사는 변태 악마라고도? 머리 그렇게 염색하다 나중에 탈모 걸리라고 해서? 민윤기가 아프다니. 충격에 지민이 흔들리는 동공으로 가만 서있자 윤기가 섬세한 미간을 찌푸렸다.



"오 이제는 대답도 안 하겠단 건가? 고귀한 입이라서?"

"죄, 죄송합니다."

"차 새로 산 거나 찾아와."



 윤기가 차키를 던지고 유유히 집무실 안으로 사라졌다. 차키를 낚아챈 지민은 동정심이 든 것도 잠시, 민트색 머리통에 차키를 던져버리고 싶었다. 난 차 면허 딸 때 빼고 한번도 몰아본적 없는 사람이라고! 그리고 네가 무슨 차를 샀는지 내가 알면 마법사를 했겠지, 비서를 했겠냐. 기필코 언젠가는 생명수당을 청구할 것이라 다짐하며 지민은 이를 갈았다. 그날이 언제 올지는 모르겠지만.



"레이첼 혹시 제가 나가서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면 앰뷸런스 보내줘요."

"살아 돌아 와야 할 거예요. 오늘 지민은 야근 당첨이거든요. 진이 출장을 가서 일이 밀려있어요."



 차라리 죽여줘…. 지민은 1분만에 10년은 더 늙어진 모습으로 모든 자동차 매장에 전화를 돌리기 시작했다.





 지민은 아무래도 정국에게 말을 수정해야겠다 생각을 고쳐먹었다. 비서라는 일은 생명에 지장이 있는 직업이었어. 도로 한 가운데서 죽다 살아난 지민은 핸들에 묻었던 고개를 들고 비틀거리며 차에서 내렸다. 자신은 죽을 때까지 살 수 없는 몸값을 자랑하는 벤틀리 컨티넨탈과 같이 도로 한복판에서 수명을 끝낼 뻔했다. 오늘 도로에서 들어먹은 욕만으로도 배가 불러 저녁은 생각나지도 않는다.



"다녀왔습니다아…."



 퀭한 얼굴로 귀환한 지민에 레이첼마저 흠칫했다. 도로에 차를 주행하러 간 게 아니라 흡사 하데스 강을 건너온 모습이었다. 지민은 흐느적거리며 걸어와 무너지듯 의자에 주저앉았다. 여기 아직 이승 맞죠? 저 살아있는 거 맞죠? 앉았다는 표현보단 다리에 힘이 풀려 쓰러진다는 게 옳았다. 레이첼은 혼이 나간 듯한 지민을 향해 서류를 툭 얹어주었다. 수고했어요. 이제 일해요. 이거 문서 작성해줘요. 지민은 울상을 지었다. 그냥 도로에서 병원에 실려갔어야 했나.



"근데 레이첼. 오늘 미스터 윤 아프신 거 아니에요?"

"아까 말씀하셨잖아요. 신경 쓰지 말라고."

"병원 안 가세요?"

"글쎄요. 스케줄에 진찰 잡아달라고 하신 말씀은 없으셨어요. 원래 종종 기분 저조하신 날도 그러시니까 크게 걱정 안 해도 돼요."



 그거 크게 아프기 전 상태인 거 같은데. 작게 웅얼거린 지민은 곧 신경을 껐다. 알아서 하겠지 뭐. 천하의 어거스트의 주인이 아프다고 하면 달려올 주치의만해도 열이 넘을 것이다.



"어? 레이첼? 나가요?"



 지민이 가방을 어깨에 거는 레이첼을 보고 놀라 펄쩍 뛰었다. 레, 레이첼이 가면 저는요?



"오늘 어머니 생신이거든요."

"아…."



 난 왜 주변에 오늘 생일인 사람이 없지? 지민은 침통한 눈을 하다 곧 억지 미소를 만들어내 축하했다.



"어머니께 생신 축하한다 전해주세요, 레이첼. 오늘 재미있게 보내요. 맛있는 거 드시구요."

"맡길게요, 지민. 미스터 윤이 퇴근하라 할 때까지 있으면 돼요."

"걱정 말고 퇴근해요."



 레이첼은 못내 걱정된다는 듯 책상에 미련을 놓다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잘가요. 손을 흔들어 인사한 지민은 이내 자신의 처지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오늘 달 뜨기 전에는 퇴근할 수 있겠지…? 흑흑, 우는 시늉을 해 보인 지민이 쌓인 서류를 한 장 한 장 앞으로 가져왔다.

 

 어느덧 쌓여있던 서류의 산이 현저히 낮아져 있었다. 꾸벅꾸벅 앞뒤로 꺼떡이던 까만 머리통이 퍼드득 놀라 깼다. 스읍, 축축한 입가를 닦은 지민은 한쪽 눈을 찡그린 채 시계부터 찾았다. 12시 30분. 뉴욕의 거리도 조금은 한적할 시간이었다. 아 뭐야 난 또.



"출근한지 약 15시간정도구나. 하하 얼마 안 됐네."



 망할 자식. 민윤기는 아직도 일 하나. 사무실 창으로 환히 켜진 불빛이 눈 감기 전과 그대로였다. 지민은 부시시한 몰골로 기지개를 켠 후 일어나 옷 매무새를 정리했다.



"미스터 윤, 들어가도 될까요?"



 똑똑 노크한 지민은 공손히 손을 모으고 답을 기다렸다. 미스터 윤? 저기, 미스터 윤? 두어번 불러도 문 너머는 조용했다.

 지민은 짧게 고민했다. 말도 안 하고 들어가면 민윤기는 분명 그 사람 같잖게 보는 얼굴을 하고 어마어마한 폭언을 퍼부을 것이다. 겁도 없이 호랑이 동굴로 들어오는 토끼를 보는 기분이네. 물어 뜯기지 전에 나가지 그래?

 다른 방법도 하나 있긴 했다. 이대로 사무실 책상에 엎어져 잠을 다시 자는 방법. 목이 디스크 걸리든 말든 상관 없이. 목디스크는 둘째로 미루더라도, 안 그래도 뻐근한 몸인데 청결까지, 인간의 마지막 존엄성까지는 포기하고 싶지 않다. 들어갑니다아. 지민은 조심스레 문 손잡이를 돌렸다.



"......."



 아 신이시여. 욕이 부디 안 나오게 해주세요. Fuck, 목구멍까지 넘어오려는 단어를 지민은 꼭꼭 씹어 삼켰다. 불호령도 째진 눈도 없다. 민윤기는, 그 대단한 민윤기는 자고 있었다. 맥이 탁 풀려버린 지민은 헛웃음을 허허 흘렸다. 잤구나…내가 사무실에서 졸았던 거랑 똑같이 자고 있었구나….



"미스터 윤?"

"……."

"미스터 윤 주무시는 거예요?"



 주무시는 거죠오? 지민은 눈치를 살피며 차츰 다가왔다. 아파보이더니 진짜 아프긴 한가 보구나. 퇴근한다고 말하고 가면 되려나. 깨울까 말까 고민하던 지민은 깬 후 인상을 찌푸릴 윤기를 생각하고는 일찌감치 접고 메모지를 하나 뽑았다.



[주무시고 계셔서 인사 못 드렸어요. 좋은 꿈 꾸세요.]



 윤기의 책상에 메모지를 붙였다. 이 정도면 됐겠지. 윤기가 깨기 전 한시 빨리 사라지기 위해 까치발을 들고 나가는데, 문득 지민은 윤기를 돌아보고는 머뭇거렸다. 저렇게 자면 감기 걸릴 텐데….

 무심코 생각하던 지민은 제 생각에 놀라 퍼덕거렸다. 잠깐, 박지민. 누굴 걱정하는 거야? 너 오늘 버스랑 박을 뻔한 사람이라고. 15시간동안 일하고도 부족했냐, 이제 그만 좀 쉬고 싶다고 이성이 외친다. 그러나 감성은 자꾸 그 반대로 자그맣게 말했다. 병원도 안 간 환자잖아. 레이첼이 한 말도 동실 떠올랐다 사라졌다. 원래 종종 그러시니까 괜찮아요.



"하아…."



 망할. 손잡이를 잡고 발만 구르던 지민은 결국 떠나기를 포기했다. 난 내 무덤자리도 내가 힘겹게 삽질할 사람이야. 아니, 잠은 또 왜 저렇게 불쌍하게 자는 거야. 사무실만한 침대를 뒹굴어도 모자랄 위치에 있는 사람이 쇼파 한쪽에 웅크린 채로 잔다. 나 도서관에서 찌그러져 자던 것보다 더 불쌍하게 자네. 돈도 많으면서 의사 좀 부르면 어디 덧나? 궁시렁거린 지민은 조심스레 집무실 문을 닫고 나와 레이첼에게 아스피린이 어디 있냐 문자를 보내려다 아, 했다. 생일이라고 했는데.



"이게 다 몰래 욕해서 벌 받는 건가."



 어쩔 수 없잖아, 그래도. 환자인데. 체념한 지민은 코트를 둘러 입었다.








 윤기는 문이 닫히는 소리에 눈을 떴다. 얼마나 잤나 시계를 확인하니 10분정도 잠든 것 같다. 빌어처먹을 두통. 감기가 오려는 모양이다. 난방이 따뜻하게 돌아가는 집무실이 추운 걸 보면. 뇌가 쪼개지는 듯한 머리를 붙잡고 비틀비틀 의자에 앉으니 메모지가 눈에 들어온다. 주무시고 계셔서 인사 못 드렸어요. 좋은 꿈 꾸세요.



"……."



 유려한 레이첼의 글씨체는 아니고, 출장을 보내놓은 진이 써놨을 리는 없다. 새로 뽑은 비서의 얼굴이 두둥실 떠오른다. 매번 겁먹은 모습을 보이다 어느 순간 대담해지는 그 어이없는 비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박지민이라 소개하던. 메모지를 손에서 놓은 윤기는 이마를 짚었다. 뜨끈하게 열이 오른 걸 보니 아무래도 일을 할 몸상태는 아닌 듯했다. 차를 가지고 집까지 돌아가는 것도 무리다.



"한심하군."



 오전에 일어나 영 상태가 좋지 않은 몸이 밤이 되니 아예 파업을 선언했다. 윤기는 스스로를 비난하며 다시 쇼파로 돌아와 몸을 말았다. 유난히 추운 밤이었다.








 지민은 약국으로 나가 아스피린과 영양음료를 사 돌아왔다. 술 취한 사람을 돌보냐는 약사의 물음에 애매한 표정으로 아마 그럴지도요, 하고 답도 했다.



"미스터 윤 잠시 일어나 보…."



 아니, 아니에요. 나간 사이 아까보다 더 몸을 웅크린 자세로 눈 감고 있는 윤기를 상대로 지민이 혼잣말을 했다. 그냥 눈감고 누워있어 주세요. 차마 일으켜 세워 약을 먹일 용기까지는 나지 않았다. 책상에 알약과 물을 준비해놓고 떠나면 그게 최선이다.



"열도 나나?"



 지민은 무심결에 윤기의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그러다 방금 나갔다 왔단 사실을 상기시키고 헉, 했다. 차가울 텐데. 괘, 괜찮나? 파드득 손을 거둬간 지민이 눈치를 살폈다. 당장이라도 시퍼런 안광을 발사하며 감히 네가 내 이마를 만져? 하고 다그칠 거 같았다. 호흡을 멈춘 지민은 제 손을 꼬집고 싶은 욕망을 참으며 쥐죽은 듯 기다렸다. 한참을 기다려도 윤기는 마치 죽은 사람처럼 눈만 감고 있었다. 아 근데 가만 생각해보니 웃기네. 무슨 간호하면서도 눈치를 봐야 돼. 투덜거리면서도 지민은 손을 비벼 열을 내 다시 열을 쟀다. 열 기운이 있을락 말락 하는 거 같기도 하고.

 근데, 이사람 여기서 이러고 자면.



"…감기 들 거 같은데."



 감기가 윤기에게 겁 먹어 도망갈 거 같긴 하지만. 고민하던 지민은 망설임 없이 자신의 코트를 벗었다. 되게 안 어울리네. 아픈 거. 눈만 뜨면 독설만 뿌리고 다니는 사람인데. 매번 피를 마르게 하는 사람이지만, 막상 아픈 모습을 보니 마음이 좋지 않다. 어휴, 사람이 아프면 병원에 갈 줄도 알아야지. 지민은 윤기의 목까지 코트를 올려주고 깰세라 작게 혼잣말했다.



"약 꼭꼭 챙겨 드세요."



 자서 안 들리시겠지만요. 지민은 완벽하게 불까지 끄고 마저 조심스럽게 문을 닫고 퇴근했다. 건물 밖으로 나오자마자 추위가 살갗을 파고들었다.



"와씨, 장난 아니게 추워! 으아악!"



 지민은 팔을 교차해 양 팔뚝을 문지르며 뛰었다. 괜히 코트 줬다. 생각해보니 난 밖에 나가는 사람이고, 민윤기는 쇼파 위에 계속 누워있는데. 백만 번 후회가 들었지만 지민은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만 재촉했다.








 불이 꺼진 공간에서 윤기는 가만히 제 몸 위를 덮고 있던 코트를 손에 쥐었다. 쇼파 앞 유리협탁 위에는 아스피린과 물까지 있다. 시키지도 않은 짓을. 윤기는 혀를 쯧 찼다. 약 꼭꼭 챙겨 드세요. 조곤거리던 목소리가 귓가에 되풀이된다. 손은 느리게 움직여 아스피린을 들고 목구멍 안으로 넘겼다.



"……."



 윤기는 천천히 이마에 손을 올렸다. 찬 손이 다녀간 자리. 짧고 똥똥한 손이 무서워하는 동물이라도 만진 것마냥 허겁지겁 떨어지는 게 제법 웃겼다. 그렇게 무서워하면서 간호하겠다고 나서는 광경이라니. 이상한 건 명령을 내리지 않고 받은 이 배려가 퍽 기분 나쁘지 않다는 점이다. 오히려 살짝 유쾌한 기분까지 들었다. 거기다 두 번째 닿은 손은 따뜻하다 못해 뜨거웠던가. 그래서 무슨 열을 잰다고. 픽 웃은 윤기는 손을 내리고 쇼파에 다시 누웠다. 이불처럼 덮은 코트는, 분명 밖의 찬바람냄새가 묻어있음에도 따뜻했다. 신기하게 정말 따뜻했다.

 더는 머리가 지끈거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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