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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club des belugas - posing>












 지민은 어떤 말도 꺼내지 못했다. 사과를 해야 하는 거 같긴 한데, 좀체 입이 얼어 말이 나오질 않았다. 나 눈 왜 가지고 있지. 툭하면 신문 1면을 장식하는 윤기를 알아보지 못한 두 눈은 차라리 찌르는 편이 낫다. 아무짝에도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 기능을 못하는 건 입도 마찬가지라, 어버버거리는 지민과 싸늘한 윤기의 대치를 깬 건 둘 중 누구도 아닌 서류를 들고 있던 여성의 하이힐소리였다.



"미스터 윤, 다시 지원자를 뽑도록 하겠습니다."

"지원서류나 줘봐. 기껏 면접 보러 왔는데 매정하게 내쫓으면 내 꼴이 뭐가 되겠어? 같이 엘리베이터도 타고 올라왔는데 말이야. 레이첼이랑 진은 나가봐. 그리고 기획팀 책임자 불러 올려. 아 미리 사원증은 반납해도 좋다고 말해줘도 괜찮겠네. 그딴 개한테 줘도 버릴 기획을 써서 내? 내 회사를 망치려고 작정한 게 틀림없군."

"네, 알겠습니다."

"넌 왜 아직도 안 들어오고 거기 서있어? 엘리베이터가 좋아? 이대로 발 돌려서 내려가고 싶으면 내려가도 돼."



 내뱉는 말이 하나하나 독처럼 썼다. 지민이 허겁지겁 사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들어가기 직전 마주친, 진이라는 남자의 얼굴에서 동정심을 느낄 수 있었다. 부디 살아나오길. 아무런 목소리도 없었지만 어쩐지 그 음성이 귀로 들려오는 착각이 일었다.



"어디 보자."



 서류를 훑은 윤기는 지민을 보다 흐응, 하고는 책상에서 일어나 의자에 앉았다. 몸을 등받이에 깊게 묻으며 종이와 지민을 비교했다. 날카로운 눈빛에 지민은 침을 꼴깍 삼켰다. 식은땀이 등에서 홍수를 이뤘다. 정육점에 걸린 고기가 되어 품평 당하는 기분이었다.



"웬 대학도 졸업 못한 애를 데려다 놨나 했더니 그건 아니었군."

"스, 스물여섯입니다."

"네 소개를 해봐."



 윤기는 서류를 책상에 툭 던졌다. 머릿속이 백지장으로 하얗게 변한다. 지민은 어물어물 떠오르는 대로 말을 뱉기 시작했다.



"이름은 박지민입니다. 나이는 스물여섯에…포드 일렉트릭사에서 인턴과정을 수료했고, 시에서 주최한 공모전에 참가해 수상도 했고요…학교에서 자, 장학금도 한 번 받아봤어요…또 한국출신이라 한국어에도 능통하구요…또 그리고…또…."



 단지 쳐다보기만 하는데도 지민은 윤기의 기에 눌렸다. 북풍한설 같은 시선이 얼굴을 푹푹 쑤시니 말까지 버벅거렸다. 버클리 공대에서 진행한 프로젝트에 참여한 적도 있구요…교수님 연구실에서 조교로도 활동했습니다. 아 또 미국에서 주최한 해킹대회에 참여했는데 거기서는 차상, 아, 아니 우승도 해봤어요. 자신감 없는 목소리는 지민이 들어도 영 뽑고 싶지 않은 사원의 표본이었다. 나 또 뭐 했지. 뭐 했더라. 반은 탈색된 머리를 괴롭히고 있는데, 듣던 윤기가 말을 끊고 들어왔다.



"너 내가 누군지 알긴 해?"

"네?"

"아냐고, 나."



 지민은 어거스트라는 회사에 대해 공부했지, 민윤기라는 사람에 대해 공부하지 않았다. 에너지사업의 방향성과 그에 어거스트가 기여하는 의미를 읊으라면 눈감고도 줄줄 읊을 수 있었지만, 회사대표에 관해서 아는 것이라곤 세간에 알려진 유명한 사실들뿐이었다. 동양인이라는 것, 그리고 수많은 열애설과 염문설로 한 달에 몇 번씩이나 가십지를 장식한다는 것과 스물여섯 자신과 똑같은 나이에 회사를 물려받았다는 사실 정도다. 하루 종일 티비를 장식한 그 사실들은 알고 싶지 않아도 자연스레 알게 되었다.



"어거스트를 대표하시는 분이시고, 그리고…."



 천하의 바람둥이이고, 개망나니다. 마지막 말은 차마 던질 수가 없는 말이라 지민은 끝말만 되풀이했다. 그리고…그리고…. 지켜보던 윤기가 혀를 쯧 찼다.



"말 좀 안 더듬을 수 없나?"

"죄, 죄송, 아니 죄송합니다."

"내 비서가 되어 어떻게 할 건지 말해봐."



 비서? 뜬금없는 이야기였다. 지민은 눈을 둥그렇게 뜨고 윤기의 말을 따라했다. 비, 비서요? 처음 듣는다. 비서라니. 지민이 전공한 분야와는 멀리 떨어져도 너무 멀리 떨어진 직업이었다. 최상층에서 면접을 보는 의문과 뉴욕 본사로 출근하라는 의문이 풀렸다. 그럼 나보고 지금 이 사람 밑에서 일하라는 거야? 지민이 충격에 말을 못하고 있자, 윤기가 미간을 찡그렸다.



"말을 더듬지 말라고 했지, 아예 하지 말라고는 안 했는데."

"저기…저는 연구직인 줄 알고 왔는데요…."

"뭐?"

"비서는 오늘 처음 듣는 이야기인데…이쪽으로 면접만 보러 오라고 들었거든요."



 지민은 혹시라도 구겨진 윤기의 미간이 더 험악하게 구겨질까 조심스레 말했다. 그러니까요, 저는 연구소에서 일할 사람을 찾는다는 건 줄 알았거든요. 잠자코 듣던 윤기가 어이없다는 듯 하, 했다. 그리고는 책상 한쪽의 버튼을 누르고 차게 말했다. 기획팀 책임자 부르기 전에 잠깐 나 좀 보지. 레이첼, 진.



"왜 여기저기서 잘라달라고 아우성인지 모르겠단 말이야."

"……."

"그렇다면 너랑 난 이 자리에 같이 있어야 할 필요성이 없네. 난 비서를 뽑고 있고, 넌 하기 싫어하고."



 윤기가 명쾌하게 정리되었다는 듯 박수를 짝 쳤다. 안 그래? 맞는 이야기이긴 하다. 상대방은 비서직을 구하고 있고, 자신은 비서직은 꿈도 꿔보지 않은 사람이다. 지민은 얼결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내 비서직을 탐내는 사람을 센다면 이 뉴욕을 빼곡히 차고도 넘칠 텐데. 아까 면접 많이 떨어졌다고 했지? 거기에 이건 추가하지 마. 너도 하기 싫은 면접이었고, 나도 썩 네가 마음에 들진 않았으니까. 서로 없던 일로 하자고."



 지민은 어, 했다. 자, 잠깐만. 윤기의 기에 눌려 쫄았던 정신이 차츰 돌아왔다. 하얗고 가는 손가락이 문을 가리켰다.



"이제 나가봐."

"네?"

"면접 끝이라고."



 윤기는 볼일 끝났다는 듯 책상에 준비된 다른 서류에 눈을 돌렸다. 지민은 그제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렇게 흘러가면 안 된다. 이대로 면접이 끝나면 취업은 없던 일이 된다. 이 사무실로 들어오기 전까지 받았던 말들이 떠올랐다. 한국에서 잘됐다며 기뻐하던 엄마와 우리 형 좋은 회사 다닌다고 자랑했다 말하던 어린 동생들, 그리고 역시 형은 될 줄 알았다며 등을 두드려주던 정국이. 이 취업마저 무산이 된다면 또 언제 기회가 찾아올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시 주변 사람들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자, 잠시만요!"



 윤기가 서류를 보던 자세로 눈만 들고 지민을 쳐다봤다. 말랑하게만 생긴 얼굴에 굳은 결심이 섰다.



"뭐 할말이라도 남았나?"

"저 하고 싶습니다, 비서."



 이 일을 해야 한다. 지민은 절박했다. 더는 짐으로 남고 싶지 않다. 윤기는 지민을 가만 쳐다보았다. 작은 두 손이 어느 샌가 주먹을 불끈 쥐고 있는 것도, 동그란 눈이 굳센 다짐으로 총명하게 빛나는 것도, 쭈그러들었던 어깨가 당당하게 펴진 것도. 짧은 사이에 많은 생각이 교차한 모습이었다. 윤기가 턱을 괸 채 무심하게 말했다.



"그래서?"

"…네?"

"네가 내 비서가 되고 싶다 하면 내가 어서오세요 하면서 뽑아줘야 하는 건가?"

"……."

"아까 농담으로 흘려 들었나 봐. 그건 진심이었는데. 난 네가 썩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했어. 딱히 너를 뽑아야 할 이유를 모르겠군. 내가 자선사업이라도 하는 줄 알고 있다면 큰 착각이야."



 이만 나가봐. 말하며 더는 볼 일 없다는 듯 윤기가 서류에 시선을 박았다. 까였다. 탈락인 것이다. 지민은 발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내가 봐도 한심하긴 하다. 무슨 일 하러 온지도 모르고, 심지어 상사되는 사람한테 패션 지적질이나 하고. 말도 더듬고 잘 보인 점은 하나 없지. 면접실패의 획기적인 사례로 책에 실릴 판이다. 정국이가 식당까지 예약해놨다는데 뭐라 말해야 할까. 나 떨어졌어? 알고 보니 나보고 비서일 하래?

 그러다 문득 문손잡이에 손을 올려놓고 있는 상태에서 오기가 생겼다. 가만 생각하자니 억울했다. 아무런 통보도 받지 못하고, 누군들 같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싶어서 올라왔나. 마중 나오지 않은 회사쪽 잘못이다. 더불어 지민은 이 일자리가 꼭 필요했다. 처음부터 면접을 제대로 봤더라면, 이런 식으로 형편없게 보지 않았을 것이다. 이미 떨어진 판, 될 대로 되라는 패기가 마음속에서 용솟음쳤다.



"그런데요."



 지민이 윤기를 향해 돌아섰다. 윤기가 뭐냐는 듯한 얼굴로 고개를 들어 지민을 응시했다.



"아까 질문 하셨잖아요. 비서가 되면 어떻게 할 거냐고. 미리 이 면접이 비서로서의 면접이란 걸 알았다면 전 다른 대답을 했을 거예요."



 흐음, 윤기가 눈을 가늘게 좁혔다. 어디 할 말 있으면 해보라는 태도다. 지민은 언제 쫄았냐는 듯 윤기와 눈을 정면으로 맞부딪히며 당당하게 입을 열었다.



"제 전공이 이쪽과 안 맞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전 똑똑해요. 그리고 현명하죠. 참을성도 좋아요. 일이 힘들다고 금방 그만두는 사람들하고는 달라요. 저를 곁에 두신다면 그 선택이 옳았다는 걸 증명해 보일 수 있어요."

"……."

"인정할게요. 저는 당신에 대해 많이 몰라요. 저기 밖을 걸어 다니는 사람들도 다 아는 그 정도 상식이 고작일지도 모르죠. 하지만 전 미스터 윤, 당신이 원하는 사람으로 변할 수는 있어요. 가령 이 사무실을 청소하라고 시켜도 전 완벽하게 해낼 수 있고, 밤새 사무실에서 일 하라면 일할 수도 있어요."

"……."

"전 이 일자리가 정말 필요하거든요."



 말을 더듬지도 않았고, 시선을 피하지도 않았다. 당당했다. 엘리베이터에서 쫄고, 모기만한 목소리로 시선을 피하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지민은 속에 가득 찼던 말을 뱉고는 숨죽여 윤기의 반응을 기다렸다. 진짜 마지막이다. 이것마저 먹히지 않으면 탈락인 것이다. 윤기는 가늠하듯 가늘게 좁힌 눈으로 지민을 보다 고민하듯 턱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그게 전부였다. 어떤 말도 윤기의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역시 처음이 너무 구렸나. 지민은 결과에 승복했다.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문이 닫힐 때도 윤기는 말이 없었다. 풀이 죽은 지민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끝이구나. 나오는 지민을 발견하고 레이첼이 다가왔다.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전형적인 미녀의 표정이 미안함으로 가득 차있었다.



"지민, 죄송합니다. 미리 안내해드리지 못했어요."

"…괜찮아요. 어차피 떨어졌을 거 같아요."

"미스터 윤께서 약속을 생각보다 일찍 끝내고 오시는 바람에 내려가지 못했어요. 제 잘못이에요."



 평소 심성이 착한 지민은 씁쓸한 속을 뒤로하고 괜찮다는 듯 웃어 보였다. 한쪽에서는 진이라 불린 남자가 볼과 어깨에 전화기를 끼우고 정신 없이 통화를 하고 있었다. 저 사람도 동양인이네. 한국 쪽인 거 같은데. 시선이 느껴졌는지 진이 전화 중 지민을 향해 고개를 까딱했다. 지민은 어설프게 웃으며 마주 인사했다.



"아 그런데 전 연구소 쪽에 지원서를 넣었었는데 왜 연락이 온 거죠?"



 떨어진 건 떨어진 거고 궁금했다. 윤기의 말을 따르면 이 직업을 가지고 싶다는 사람이 널려있다 했다. 그런데 연구직 지원서를 뒤적거려 자신을 데려올 이유는 뭐란 말인가. 그것도 두 달이나 지난. 아 그거에 관해 말하자면. 레이첼은 생각만해도 골치 아프다는 듯 인상부터 구겼다.



"새로 비서를 뽑고 있는데 뽑히는 족족 그만 뒀거든요. 결국 회장님께서 다른 방식으로 사람을 구해오라고 했는데, 마침 연구소쪽에서 신입사원들을 뽑기에 한 사람 부탁했어요. 안타깝게 뽑히지 못한 사람들 중에서 지민이 한국계라는 걸 알았고, 미스터 윤과 잘 통하지 않을까 해서 연락 드렸던 거였어요. 결국은 이런 식으로 됐지만요."

"아 그렇군요…."



 지민은 쉽게 수긍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하자면 급히 자리 채울 사람이 필요해서 불렀다는 말이다. 언론에서 개망나니 성격이라 뿌려대는 기사대로 정말 개차반인 성격인가 보다. 십 분만에 사람 하나를 밑바닥 찌꺼기가 된 기분으로 만드는 어마어마한 눈빛을 볼 때, 왜 그만 두는데요 하는 물음이 없어도 납득 가능했다.



"이만 미스터 윤께 가봐야 할 거 같아요. 지민, 잘 가세요."

"가시나 봐요. 고생하셨어요."



 진이 전화를 끊고 일어나 인사를 했다. 지민은 이번에도 어색하게 웃으며 인사를 받아주었다.



"진, 심호흡해요. 지난번처럼 혼나다 멍하니 서있지 말고요."

"후우, 좋아요 갑시다. 만약 또 내가 멍하니 있으면 내 발을 힐로 찍어요."



 부랴부랴 레이첼과 진이 사무실 안으로 들어선다. 왜 이제 들어와? 들어오라는 것도 두 번씩이나 말해야 알아들으려나. 빈정거리는 윤기의 말을 끝으로 지민은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번쩍거리는 로비를 밟는 발걸음에서 아쉬움이 뚝뚝 떨어졌다. 이번에는 진짜 취업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일단…정국이한테 예약을 취소하라고 말하는 게 좋겠지…?"



 뉴욕 퀸스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은 지민은 전화를 걸었다. 기다렸다는 듯 정국이 냉큼 받았다.



[형 어디에요? 뭐래요? 면접은 잘 봤죠? 형은 당연히 붙었을 거야. 배 안고파요? 형 기다리느라 저 배 많이 고픈데. 식당으로 바로 갈까요?]

"정국아 하나씩 물어봐 줄래."

[와아 형 변했어. 어거스트에서 일한다고.]

"내가 뭘 변해. 나처럼 한결 같은 사람이 어디 있어."

[세계에서 손 꼽히는 대기업 취업했다고, 어? 막.]



 지민은 어디서부터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했다. 농담으로 해야 하나. 아니면 진지하게 세상 고통이란 고통은 다 짊어진 것처럼 말해야 하나. 어느 쪽으로 해도 정국이 위로할 말을 찾느라 분주할 건 빤했다.



"그러는 넌 세계에서 손 꼽히는 대기업들한테 러브콜 받아서 날 그렇게 무시하지, 아주? 힘 좋다고 들어서 던지고, 꼬집고, 내팽개치고."

[내가 언제요.]

"나처럼 한결같으란 말이야."

[아 시끄러워요. 밥이나 어서 먹으러 가요.]

"근데 정국아 식당 예약 취소해도 될 거 같아."



 지민은 하하 가볍게 웃었다. 가능한 쿨한척, 가볍게 말하기 위해 과장되게 웃으며 말했다.



"내가 너무 한결같아서 또 떨어졌거든."

[…….]

"나만큼 일관되게 떨어지는 사람도 없을 거야. 그렇지?"

[형….]



 지민은 아무렇지 않은 척 메뉴를 물었다. 그냥 그 식당에서 먹을까? 거기 맛있다며. 떨어진 기념으로 내가 쏠게. 지금 괜찮은 기분을 어필하며 노력을 기울였으나, 정국은 쉽사리 말을 잇지 못했다. 할 말을 찾는 듯 했다. 지민이 이 면접을 위해 얼마나 밤잠 설치며 노력을 기울였고, 기대했는지 알기 때문에 더욱 쉽게 말을 건네지 못했다.



"야아, 나 괜찮아. 왜 네가 풀이 죽고 그래. 누가 보면 네가 떨어진 줄 알겠다. 진짜 괜찮다니까? 나 지금 집 가는 버스 탔는데, 한 시간 뒤면 도착할 거 같아. 정국이 넌 언제 도착해?"

[…30분 뒤에 도착할거 같아요.]

"응 그래 집에서 보자. 떨어졌다고 울지 말고."



 지민은 마지막까지 농담을 뿌리며 전화를 끊었다. 울지 말고. 괜찮은 척 올리고 있던 입꼬리가 스르륵 내려갔다. 버스창문에 머리를 꿍 박고 스쳐 지나가는 풍경들을 보다 눈을 감았다. 그래, 떨어졌다고 울지 말자. 수많은 실패 중 하나일 뿐이잖아. 이거 떨어진다고 인생 끝나는 건 아니지. 뭐, 나도 그런 성격파탄자 같은 사람 밑에서 일하기 싫었어. 했다간 내 쪽에서 먼저 사표 내고 끝냈을 거야.

 스스로 최면을 걸던 지민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취업을 해야 하는 목적은 생활의 안정이 첫 번째 이유지만 두 번째 이유도 있었다. 바로 가족의 미안함을 덜어주는 것이다. 어린 시절 집에는 4남매를 키울만한 돈이 없었고, 거진 입을 덜기 위한 목적으로 맏이인 자신을 미국에 있던 고모할머니에게 맡긴 것을 부모님은 미안해하셨다. 지민은 미안해하는 부모님에게 떳떳이 보여주고 싶었다. 괜찮노라고, 잘 살고 있노라고. 더불어 아직도 넉넉지 않은 집안형편에 보탬이 되고 싶었다.

 상념에 잠긴 지민을 벨소리가 흔들어 깨웠다. 발신인은 처음 보는 전화번호였다.



"여보세요?"

[전화 받는 거 하나는 마음에 드네. 난 전화 오래있다 받는 거 싫어하거든. 내 비서가 되려면 신호음이 여섯 번 이상 울리기 전에 받아.]



 지민은 창문에 기댔던 머리를 똑바로 세웠다. 등도 꼿꼿이 섰다. 이 목소리는 그 목소리였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나 잘났다는 포스를 풍기는, 어찌 들으면 약간은 나른하고 거만한 목소리. 어거스트의 주인, 민윤기다. 너무 놀라 딸꾹질이 히끅, 터져나왔다.



[내가 원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 말했지?]

"네, 네."

[난 똑똑하고 영리한 사람이 필요해. 내가 맡긴 일을 충분히 소화할 수 있는 사람 말이야. 게다가 끈질긴. 넌 네가 똑똑하고 충분하다 했어. 그렇지?]

"네, 물론입니다."



 지민은 긴장으로 침을 꿀떡 삼켰다. 다시 손에서 식은땀이 났다. 삐삐 울리는 버스 벨소리보다 윤기의 목소리 하나하나가 머릿속을 점령했다.



[그럼 묻지. 내가 별이라도 따오라고 하면 따올 준비가 되어있나?]



 지민은 달리는 버스라는 걸 알면서도 벌떡 일어났다.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된다. 평소 소심하다는 평을 듣는 지민에게 지금 그런 시선 따위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별을 따올 준비가 되어있냐고요? 심호흡을 한 뒤 지민은 자신만만하게 답했다.



"맡겨주신다면, 달도 같이 따올게요."



 전화 너머로 윤기가 픽 웃는다. 마음에 드네. 맞아, 네 말이. 이왕 따는 거 별이랑 달이랑 몽땅 다 따버려야지. 심장이 윤기의 말을 따라 쿵쿵 뛴다. 지민은 이 순간이 인생의 전환점이 될 순간이라 생각했다.



[내일부터 출근해.]



 그 말을 끝으로 전화가 끊겼다. 지민은 끊긴 전화를 귀에 댄 채 얼이 빠져버렸다. 내일부터 출근해. 스피커 울림효과처럼 출근 하라는 말이 머릿속을 웽웽 울렸다. 내일부터, 출근. 한자한자 곱씹은 지민이 감격에 못 이겨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아직 공공장소라는 인식은 있어서, 튀어나올 기쁨의 환호성을 간신히 집어넣었다.



"저, 내릴게요!"



 벨을 누르며 지민은 정국에게 문자를 날렸다. 형 합격함. 예약한 곳에서 밥 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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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참고 했숩니당 정말 열번 돌려봐도 재미있는 영화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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