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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jay z - empire state of mind>








 빌어먹을 인생. 지민은 낮부터 술에 취하고 싶었다. 맥주캔을 빨며 이 힘든 현실을 몽땅 날려버리고 싶었다. 도무지 결과를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이 끝을 모르고 넓은 뉴욕 땅에서, 이 많고 많은 빌딩 중에, 수많은 사람들이 취직한 이 땅에서 자신의 일자리만 없다니. 대학만 졸업하면 뭐든 게 술술 풀릴 것이란 생각은 큰 오산이었다.

 도대체 뭐가 부족했던 걸까. 지민은 허탈하기까지 했다. 여기서 뭘 더 노력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분노도 차오른다. 내가 그 학점을 따려고 도서관에서 코피를 얼마나 쏟았는데. 새벽 세시까지 도서관에서 책과 씨름하다 기숙사로 들어가는 건 당연한 일이었으며, 괜찮은 인턴자리 하나 차지하려고 교수 연구실로 퍼다 나른 커피가 대체 몇 잔이고, 공모전을 위해 얼마나 많은 밤을 눈에 실핏줄 터져가며 매달렸던가. 면접도 못 본 것이 아니다. 약간의 버벅거림이 존재했지만 묻는 질문에는 또박또박 답했다. 스스로 판단하기 민망하지만, 솔직히 까놓고 말해 어디 내놔도 빠지지 않는 스펙이었다.



"하아…날씨는 좋네…."



 백수가 날씨가 좋아서 뭐해. 울적하게도 뉴욕의 날씨는 화창했다. 인텔, 애플의 개발직을 줄줄이 탈락하고 마지막 희망을 걸고 있던 구글에서마저도 전화가 오질 않았다. 오겠지, 오겠지 하고 빌며 폰만 바라보는 날도 끝났다. 등에 등록금이란 빚만 떠안은 채 학교를 졸업한 거렁뱅이로 전락해버린 것이다.

 이런 우울한 날에는 술을 마셔야 한다. 지민은 학교 후배 정국의 번호를 띡띡 눌렀다. 학교에서 희귀한 동양이라는 점과 고향이 한국이라는 공통점에서 급격하게 친해질 수 있었다. 성격도 모쪼록 잘 맞았다. 기숙사마저도 방향이 비슷해 친해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먼 한국에 있는 동생들을 떠올라 자연스레 정국을 챙겼고, 정국은 잘 따랐다.



"바쁜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도 나오는 건 안내메세지다. 지민은 한 번 더 정국의 번호를 누르려다 이내 포기했다. 됐다, 뭔 술이냐. 정국은 졸업하고도 거의 한 해가 되어가도록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는 자신과 달랐다. 조기졸업을 앞두고 있는 지금, 여러 회사에서 정국을 스카우트해가겠다며 줄을 섰다. 전화를 건다면 정국이 두말할 것도 없이 술을 마시러 나올 테지만, 더욱 비교되는 것만 같아 지민은 입맛이 씁쓰름했다.



"매정한 도시같으니라구."



 내 일자리 하나 정도는 남겨줘도 좋잖아. 한숨을 쉬며 지민은 자취방에서 혼자 캔맥주를 땄다. 뉴욕, 뉴욕 누군가는 찬란한 태양의 도시라며 노래를 부르지만 이십대 청춘에게는 쓰기만한 도시였다.





 새벽 늦게까지 술을 마신 지민을 깨운 것은 벨소리였다.



"…으응…."



 시체처럼 자던 지민이 꿈틀거리며 잠결에 목을 긁적거렸다. 어제 한바탕 난리 친 자취방 꼴은 가관이었다. 헝헝 눈물을 짜며 닦아낸 휴지가 온 방안에 뿌려져 있었고, 그 사이사이로 맥주캔이 나뒹굴러 다녔다. 적당히 귀를 막고 이불 안으로 꿈틀꿈틀 기어들어가는데도 벨소리는 끈질겼다. 숙취로 울리는 머리에 방정맞은 벨소리는 안 좋은 조합이다. 결국 에이씨, 웅얼거린 지민이 눈을 감은 채 더듬더듬 폰을 찾았다. 전화 올 곳도 없는데 아침부터 누구야. 실눈을 뜬 채 액정을 보니 처음 보는 번호였다.



"여보세요…."



 갈라져 형편없는 목소리를 애써 고칠 생각은 안 했다. 잠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 티가 역력했다.



[박지민 본인 맞으십니까?]

"제가 박지민인데요…누구세요…?"



 별일 아니면 끊어주실래요. 뒷말은 입에서 삭제했다. 딱딱한 여성의 목소리 탓이었다. 삘이 딱 잡상인 전화는 아닌 거 같은데. 학부시절 내내 도서관에서 책과 연애한 지민의 퍽퍽한 인생에서 여성이란 먼 존재였다. 있어봤자 한국에 계시는 부모님과 여동생 전화가 고작이다. 지민은 아직도 잘 떠지지 않는 눈을 손등으로 비비적거렸다. 전화를 받는 상대방은 사무적인 목소리로 답했다.



[어거스트입니다. 면접 일정을 알려드리기 위해 전화했어요.]



 반쯤 감겨있던 눈이 번떡 열렸다. 지민은 퍼덕거리며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 무릎을 꿇은 자세로 바꿔 전화를 양손으로 받쳐들었다.



"며, 면접이요?"

[네, 이력서를 보고 연락 드립니다. 면접은 이틀 뒤로, 오전 11시까지 뉴욕 어거스트 본사 건물로 찾아오시면 되세요. 안내데스크에서 레이첼이라는 이름을 말씀하시면 장소로 안내드릴 거예요. 따로 면접에 필요한 서류는 없으니 몸만 오시면 됩니다. 자세한 사항은 내일 오시면 알려드릴게요.]

"네, 네. 알겠습니다."



 지민은 정신 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비몽사몽하던 정신은 어거스트라는 이름 하나에 날아갔다. 어거스트.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IT기업. 전화는 몇 마디가 더 오갔다. 옷 스타일을 면접에 맞게 입고오라는 소리와 함께, 면접에 합격하면 그날부터 바로 일을 할 거라는 말이었다. 더없이 공손한 자세로 전화에 응한 지민은 얼이 빠진 채 여성의 말에 알겠다는 말만 주워담았다.



"네, 시간 맞춰서 갈게요. 네, 알겠습니다."



 마침내 전화가 끊겼다. 지민은 전화를 끊은 자세 그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폰을 내리고 액정을 손으로 조심스레 문질렀다. 이 번호가 어거스트에서 온 전화번호…어거스트…어거스트…. 믿기질 않아 지민은 제 볼을 꽉 꼬집었다. 현실이라고 보기에는 깨고 싶지 않았고, 꿈이라기에는 평생 꿈에서만 살고 싶었다. 술을 너무 마셔서 취한 것일지도 모른다. 억 소리 날 정도로 볼을 잡고 흔든 지민은 볼이 떨어져나갈 정도로 얼얼해질 즈음 손을 놨다.



"미친! 현실이야! 현실이라고! 나 면접 봐! 면저업!!"



 지민은 양손을 박수치듯 맞잡고 허공에 세레머니를 날렸다. 펄쩍펄쩍 뛰고 좁은 방을 가로지르듯 달리며 기쁨의 포효를 외쳐댔다. 쿵쾅거리는 심장을 다듬으며 지민은 액정에 쪽쪽 뽀뽀했다.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충실한 돈의 노예가 되겠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개가 될 준비를 마친 저에게 이런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히죽히죽 웃던 지민은 한참 만에서야 폰에 뜬 부재중 전화 23통을 발견했다. 술에 떡이 되고부터 구석에 처박아 놔 보지 못한 전화는 모두 정국의 것이었다. 이 기쁜 소식을 알리기 위해 냉큼 정국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민이 형! 아 전화가 왜 이렇게 안 되는 거예요! 걱정했잖아요! 무슨 일 난 줄 알고, 내가 얼마나 하, 형 진짜 난 형 취업 안 된다고 자살이라도 한 줄 알고…연락 안돼서 경찰까지 부를 뻔했다구요.]

"정국아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그게 안 중요하면 뭐가 중요한데요.]



 정국의 목소리가 부루퉁했다. 남 일에 신경 안 쓰는 성격을 가진 사람이 정국이라, 평소 토라질 일이 없지만 이번에는 단단히 토라진 듯 했다. 평소라면 냉큼 눈치 채고 유연하게 대꾸했을 지민은 정신이 다른 곳에 팔려있었다. 이 우울한 뉴욕도시에서 나만 하지 못했던 일이 풀리는데 그 일 외에 다른 것이 보이면 이상한 것이다. 정국아 내가 말이야. 지민이 광대가 솟은 얼굴로 밝게 말했다.



"나 취업한다!"



 정말요? 놀란 전화 안의 목소리에 밝은 목소리가 한 톤 더 올라갔다. 정확히는 면접이었지만 이미 지민의 머릿속에서 취업은 기정사실화 되어있었다. 아침을 바쁘게 돌아다니는 워커홀릭대열에 자신이 포함되는 건 시간문제다. 아름다운 뉴욕도시. 오 뉴욕. 콘크리트 정글에서는 모든 꿈이 이루어지지. 네가 못할 것은 없어. 어디선가 들었던 가사를 떠올리며 지민은 부풀은 가슴을 끌어안았다.









***









 어거스트. 전세계적으로 돈을 쓸어 담고 있는 대기업 중 하나. 전망이 기대되는 기업에 당당히 업계 1위를 달성하며 경영잡지를 오르락내리락했다. 에너지, 의료, 금융사업까지 삼킨 명실상부 손에 꼽히는 기업이다. 지민이 지원서를 넣은 곳이기도 했다. 비록 공대생인 지민이 일할 곳인 에너지사업 부분보다는 금융업에 발달한 곳이기 때문에, 대학에서 졸업할 때까지만 해도 크게 원한 직장은 아니었지만, 지금은 절을 해도 모자라다.

 전화를 끊은 지민은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입사지원서는 무려 두 달 전에나 넣은 것이고, 그마저도 그때 불합격했다. 어거스트에서마저 완전히 떨어졌다는 사실에 정국을 끌고 펍에서 술을 진탕 퍼마신 건 아직도 선명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거기다 지민이 알기로는 어거스트의 에너지 사업 연구소는 뉴욕이 아닌, 미국 서부 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두 달 전에나 지원했던 서류를 가지고 면접을 보러 오라니. 어거스트라는 이름과 진중한 태도가 아니었다면 사기전화로 매도했을 수준이다. 그러나 지금이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다. 등에 얹혀진 학자금 덩어리와 한국에서 기다리는 동생과 어머니를 생각하면 기꺼이 가야만 옳았다.


 지민은 복장을 체크했다. 정국을 불러내 오케이 사인까지 받아낸 옷이 면접에 부적합하진 않을 터지만, 떨림으로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같은 동작을 반복했다. 머리 손질 완벽. 넥타이 완벽. 손목시계 완벽. 후우우 심호흡을 하며 자꾸만 긴장으로 하얗게 질리는 손을 다독였다. 괜찮아. 진정하자, 진정. 평소처럼만 면접 보면 될…아니 평소처럼 보면 또 떨어지지 않을까?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하나. 손톱을 잘근잘근 깨무는 사이 어느새 발은 커다란 빌딩 앞에 도착해있었다. 다행히 러시아워 시간에서는 벗어난 시각이었고, 면접 예상 도착시간보다 무려 한 시간이나 일찍 나온 터라 마음을 다스릴 여유는 있었다.



"…아 안 떠는 게 이상한 거야."



 이 무지막지하게 커다란 빌딩 앞에서 쫄지 않을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고 해. 고개를 꺾어도 보이지 않는 끝을 자랑하는 건물의 위용은 대단했다. 계속 보다 보면 안 그래도 하얀 얼굴이 더 허옇게 질릴 것만 같아 지민은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구두와 정장을 입고 돌아다니는 사람들 틈으로 쭈뼛쭈뼛 안내데스크를 찾아 돌아다녔다.



"저…."

"네, 어거스트입니다. 말씀하시겠어요? 찾으시는 게 있으신가요?"

"면접 보러 왔는데요. 레이첼이라는 이름을 대면 아실 거라고…."

"아 그분이시군요?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어요?"



 안내데스크 여직원의 반응에 긴가민가하던 지민은 안심했다. 사기가 아니구나. 진짜 어거스트에서 온 전화였구나. 지민은 어디론가 전화를 거는 여직원을 기다리며 침을 꿀꺽 삼켰다. 짧은 대화와 함께 통화를 끊은 여직원이 곤란한 얼굴로 말해왔다.



"지금은 내려오기가 곤란하시다고, 한 20분정도는 기다리셔야 할 거 같아요. 괜찮으시겠어요?"

"네, 그쯤이야 괜찮아요. 두 시간도 괜찮은 걸요."



 취업만 시켜주신다면 이틀도 괜찮습니다. 본심을 조금만 내비친 지민은 넉살 좋게 웃었다.



"20분뒤에 저쪽 엘리베이터로 마중 나오실 거예요. 그분 따라가시면 됩니다."

"네!"



 활기차게 답한 지민은 엘리베이터자리를 눈에 새겼다. 맨 왼쪽 엘리베이터. 면접 설레임에 벅찬 지민은 의심하지 못했다. 왜 그 엘리베이터를 사람들이 사용하지 않는지를.


 지민은 회사를 둘러보려다 바삐 오가는 구두소리에 주눅이 들어 가만히 앉아있는 쪽을 택했다. 다른 면접 지원자들은 아직 오지 않았나 보다.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로비는 호텔을 방불케 했다. 이 로비를 밟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피땀나도록 노력했으며, 눈앞에 비추는 사람들이 세계 금융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생각하니 겨우 진정시킨 식은땀이 다시 나는 기분이었다. 나름 괜찮던 인턴시절 회사도 으리으리한 어거스트에 비하면 작은 기업 나부랭이다.

 반드시 나도 이 로비를 매일 밟을 거야. 다짐하며 지민은 전화를 받은 순간부터 달달 외운 면접상식들을 떠올렸다. 올해 미국경제 상황과 에너지사업부분에서 어거스트의 위상. 에너지시장의 발전 가능성 등등 전공서적을 머릿속에 탈탈 털어왔다. 그러는 사이 시계를 내려보니 20분을 지나있었다.



"왜 안 오시지…."



 앉아 기다리던 지민은 엘리베이터 쪽으로 전진했다. 전화상으로 알려준 면접시간과는 불과 10분밖에 남질 않았다. 초조하게 시계를 내려다보며 입술을 꾹 깨물고 있을 때였다. 옆으로 인기척이 느껴졌다.



"……?"



 남자였다. 지민은 아래위로 남자를 스캔했다. 로비를 걸어다니는 사람들과 어딘지 조금 다른 차림새다. 돌려 쓴 스냅백과 캐주얼정장차림은 로비의 수트군단과는 동 떨어져있었다. 머리마저 검은색이 아니라 하늘거리는 민트색이다. 일반 회사원의 차림과는 훨씬 벗어났다는 점에서 일단 어거스트의 일반사원이 아니라는 점은 알겠다. 단순한 사원도 아닌데, 이 엘리베이터에 서있는 이유는 뭘까. 선글라스를 쓰고 있는 탓에 남자의 표정을 볼 순 없었다. 남자는 당당하게 엘리베이터버튼까지 눌렀다. 고민하던 지민은 아, 했다. 나랑 같이 면접 보러 온 사람이구나.



"안녕하세요."



 지민은 작게 눈꼬리를 접으며 손을 내밀었다. 담당자가 내려오지 않는 이때 같은 면접동지는 꽤나 동지의식이 생기는 상대였다. 선글라스를 쓴 남자가 고개를 까딱 돌려 뻗어진 손을 내려봤다. 지민을 한번, 손을 한번 쳐다보는 폼이 이딴 건 뭔가, 하는 사람 같았다. 지민이 선하게 웃으며 손을 한번 더 들이밀었다.



"전 박지민이라고 해요."



 그때서야 남자는 느릿하게 손을 뻗었다. 밝은 인사에 건너오는 대답은 없었다. 매우 느리고 어색한 그 악수에 지민은 의식하지 못했다. 왜 사람들이 엘리베이터쪽에서 멀리 떨어져있는 것인지, 이쪽 상황을 보며 수근수근거리고 있는지. 면접담당자가 내려오지 않는 이 상황이 더 이상한 탓이었다.



"근데 여기 담당자 분이 안 내려오시네요. 혹시 뭐 들은 거 있으세요?"



 주위를 살피며 지민이 물었다. 때마침 엘리베이터가 띵 울렸다. 남자는 말 한마디 내뱉지 않은 채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



"아! 아시는 거세요? 면접장소? 사전에 안내 받으셨나 봐요. 저는 못 받아서…."



 됐다. 이제 면접시간에는 안 늦을 수 있다. 다행이라 생각하며 지민은 남자를 따라 졸졸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 남자가 지민을 흘긋 바라볼 때, 지민은 눈을 반짝거리며 남자의 손을 쳐다봤다. 면접실로 남자가 안내해줄 것이라는 굳은 믿음을 가진 눈이었다. 선글라스 밑으로 남자가 삐뚜름하게 입술끝을 올리는 게 보인다. 지민이 의아하다는 듯 말했다.



"버튼 안 누르세요?"



 긴 손가락이 최상층으로부터 3층 아래인 층을 눌렀다. 어라, 왜 최상층이지. 다수의 면접경험을 둘러볼 때 최상층에서 면접을 본 기억은 없다. 법으로 면접을 최상층에서 보지 말라 막은 건 아니지만, 흔한 광경은 아니었다. 뭐, 맞겠지. 지민은 회사업무와는 결코 어울리지 않는 남자의 복장을 믿어보기로 했다.

 엘리베이터는 곧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

"……."



 엘리베이터가 생각보다 느리다. 숨막히는 정적에 지민은 자연스럽게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렸다. 중요한 면접을 앞두고 남에게 신경을 쓰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지만 둘만 나란히 놓이니 저절로 신경이 갔다. 면접에서 모자 저렇게 쓰면 당장 쫓겨날 텐데. 면접관이 까다롭다면 의자에 앉지도 못하고 쫓겨날 것이다.

 복장불량인 남자가 바로 쫓겨나면 제게는 좋은 일이었지만, 한 편으로는 측은지심도 들었다. 저 사람도 면접 탈락할 대로 다 탈락하고 온 걸 텐데. 그리고 이 남자가 아니었다면 면접시간에 지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래 선심 한번 쓰자. 바뀌는 층수만을 바라보던 지민은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저기요."



 팔짱을 낀 채 가만 서있던 남자가 지민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모자 말인데요. 앞으로 쓰시는 건 어떨까요…?"



 선글라스에 가려져 남자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단순한 패션 지적처럼 보일까 지민은 황급히 덧붙였다.



"아니, 그 멋지세요! 저도 평소에 밖에서는 그러고 다녀요. 그런데 여기는 회사니까…그…면접관분들은 좀 뭐라고 해야 할까…회사에서 규칙을 지키기를 원하니까요. 좀 더 단정하고…아 물론 지금도 무척 단정하시지만요! 조, 좀 더 단정한 건 어떨까 하고…모자라는 게 원래는 앞으로 쓰잖아요? 어…아니 뒤로 쓰는 게 요즘엔 더 유행하지만, 회사 면접관분들은 앞으로 쓰는 걸 좋아하시지 않을…까요?"



 마지막으로 사람 좋은 미소까지 입꼬리를 당겨 띄워봤지만, 남자는 역시나 침묵한다. 괜히 말했나 보다. 지민은 황급히 수습하려 노력했다.



"그게요. 제가 절대 그쪽 패션을 비하하고 그러는 게 아니고요. 같은 면접 보는 사람 입장에서 볼 때 그, 느낌이라는 게 있잖아요? 제가 회사 많이 떨어져보고 면접 많이 봐서 아는데, 그렇다고 많이 아는 건 아니지만 조금! 아주 조금 아는데요. 면접관 분들은 스냅백도 잘 모르시는 경우가 많거든요…그러니까요…그게…아, 아니에요. 패션 정말 좋으세요. 머리색도 이쁘시구…저도 다음에 그런 색 한번 해보고 싶어요."



 지민은 속으로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중이었다.



"그래서…제 말은…뭘 말하고 싶은 거냐 하면…모자 정말 예쁘시고, 선글라스도 너무 예쁘시다구요…면접 잘 보세요…."



 모기만해진 목소리로 웅얼거리다시피 지민은 말을 끝내고 구석 쪽으로 몸을 묻었다. 엘리베이터 층수가 거의 목적지층에 도착했을 때에는, 지민도 기분이 상했다. 아씨, 그냥 떨어지게 놔둘걸. 이 놈의 오지랖. 사람이 말을 걸면 기본적으로 말이라도 하는 게 예의인데, 이 남자는 그것도 모르나 보다. 저런 성격으로 어떻게 회사생활을 할 수 있는 거야. 상사가 화내도 어쩌라는 듯한 표정으로 씹고 있을 상이다.

 띵, 경쾌한 소리를 내며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문 앞에는 두 사람이 서있었다. 정장을 차려입은 훤칠한 남성과 안경을 쓴 전형적인 엘리트 인상의 여성이었다.



"오셨어요, 미스터 윤."

"좋은 아침입니다, 회장님."



 지민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눈만 깜빡거렸다. 회장님? 미스터 윤? 두 사람이 인사를 하는 건 엘리베이터 안이다. 그리고 엘리베이터에는 자신과 남자밖에 없다. 고로 인사를 받을 사람은 둘 중 하나라는 거다. 맹세코 지민은 자신의 탄생비화에 한국 막장드라마에서나 나올 출생비밀이 없다 자부할 수 있었고, 이름에 '윤'이라는 글자도 들어가지 않는다. 엘리베이터 구석에서 주춤주춤 지민이 나왔다.



"회장님이요…?"



 전 일개 면접생이고, 이쪽 제 옆에 탄 사람도 일개 면접생인데 무슨 소리세요, 하는 뒷말이 나오지 않은 것은 앞에 선 두 사람 탓이었다. 두 사람은 구석에 가려져있던 지민을 발견하고는 표정이 급격히 흐려졌다. 이 미친 상황은 뭐지? 하고 온 얼굴이 외치고 있었다. 뜬금없이 자신을 있으면 안 되는 존재마냥 쳐다보는 표정에 지민은 더럭 당황해 눈만 깜빡거렸다. 오지 못할 곳에 온 것만 같았다. 그때 옆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엘리베이터 안이었다. 아무리 말을 걸어도 대답 않던 재수없는 남자의 목소리였다.



"이거 누가 뽑았어?"



 남자의 손가락 끝에는 자신이 있었다. 이거…? 충분히 기분 나쁠 호칭이었지만 지민은 뻣뻣이 굳어버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여성이 다급히 목을 꺾었다.



"죄송합니다. 미스터 윤."

"됐어."



 남자는 여성이 든 서류철 위에 선글라스를 던지듯 올려놓고 안으로 쭉쭉 걸어 들어갔다. 지민은 멍청한 얼굴로 서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힌다는 안내음에 황급히 내렸다. 남자가 책상에 걸터앉아 팔짱을 꼈다. 사무실은 바닥을 제외한 벽이 모두 유리로 되어있었고, 남자의 뒤로 멋들어진 뉴욕의 뷰가 활짝 펼쳐졌다. 남자는 손으로 명패를 쓸며 뱉었다. 지민을 똑똑히 쏘아보며.



"내 회사에서 모자도 마음대로 못 쓰다니. 말해봐. 누구부터 잘라야 내가 모자를 거꾸로 쓸 수 있을까."



 '민 윤 기'. 명패에 똑똑히 새겨들어간 글자 옆으로 CEO가 붙어있었다. 저 명패를 왜 같은 면접자라 생각한 사람이 당당하게 쓸고 있는 거며, 마중 나온 두 사람은 비상사태라도 난 것만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거며, 연구직 면접을 보러 왔는데 왜 지금 어거스트 회장과 한 자리에 있는 거며. 모든 게 다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었지만 하나만은 확실했다. 나는 왜 전회장이 사망하고, 입양한 동양인 아들이 회사를 물려받았다는, 전세계를 들썩이게 만든 소식을 진작 떠올리지 못했을까.

 지민은 거만한 자세로 팔짱을 낀 윤기를 상대로 울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꾸겨 넣었다. 백수탈출의 기회가 물거품으로 돌아가기 일보직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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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짐 행사에 가져갈 수 있길 바라며ㅠ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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