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 Teddy Adhitya - In Your Wonderland>
지민은 나간 비서에게 멋쩍게 뒤늦은 인사를 했다. 진짜 못 봤어요…죄송합니다…. 사장님께 매번 연락해주는 분이실 텐데. 들어올 때 정말 민윤기만 한 가득 차서, 주변이 몽땅 삭제됐다. 이런 적은 또 처음이다. 일찍 아이돌로 사회생활을 시작하며 눈치 하나는 잘 보는 편이었다.
“조금 떨어지라고 했지 아예 뒤통수를 보이라는 말은 안 했어.”
사람 나간 곳은 뭐 그렇게 열심히 봐. 돌아보니 윤기는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지민이 금새 방긋 웃으며 윤기에게 폴짝 가까이 앉았다. 중간이 없다. 좀 떨어지라고 했더니 세 걸음 떨어지고는 바로 한 걸음 다시 붙어온다. 윤기만 가득 담은 까만 눈이 말갛다.
“오늘은 뭐할 거예요?”
“별 거 있나. 뭐 먹고 싶어.”
“…부사장님은 왜 맨날 절 만나면 먹이려고만 하세요.”
“네 얼굴이 먹이고 싶게 생긴 얼굴이야.”
그게 대체 뭔 얼굴이지? 지민이 의아하게 고개를 까딱이고 있자니, 윤기가 연이어 말했다.
“만날 때 들린 곳이 네가 먹고 싶어했던 것들은 아니었잖아.”
“아.”
목소리는 무심한데 내용은 다정하다. 지민의 눈동자가 초롱초롱하게 변하더니, 기분 좋게 배시시 웃었다.
“부사장님은 참 다정하시네요.”
“내 주변에서 너만 그렇게 말한다.”
“왜요? 진짜 다정하신데.”
지민이 눈을 댕그랗게 떴다. 대체 누가 아니라고 해요? 그러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카만 윤기의 세미수트와 바짝 말라 예민한 이목구비를 보곤 저도 모르게 뒷말을 멈칫거렸다. 윤기는 성가시다는 듯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건 그렇다고 치자.
“먹기 싫으면 가고 싶은 곳이라도 가던가.”
“가고 싶은 곳이요?”
“하나쯤은 있을 거 아냐.”
가고 싶은 곳. 지민은 곰곰이 떠올려보았다. 사실 서울로 올라오면서부터 지민의 인생에서 휴식은 없었다. 연습실. 숙소. 그리고 연습실, 그리고 또 숙소. 그곳만 구르고 또 굴렀다. 기껏해야 데뷔 후 조금 시간이 날 때 정국과 동네 앞 영화관을 들락거리거나, 특별한 날 고향으로 돌아간 것이 전부였다.
“없어?”
“아 그게….”
난감하게 눈동자만 데룩데룩 굴러다닌다. 이대로면 또 짧은 식사 후 윤기는 떠나버릴 텐데. 지민은 초조함에 머릿속을 바쁘게 뒤적였다. 어디 있지? 둘이 가능한 같이 오래 붙어있을 수 있는 곳. 쉽게 떨어질 수 없는 곳. 그러니까 그런 곳이….
“놀이공원이요!”
윤기의 표정이 미세하게 구겨진다. 상대의 기분에는 눈치 빠른 지민이 냉큼 한발 물러난다. 조금 그렇죠. 저도 그렇게 가고 싶었던 곳은 아니에요. 다른 곳으로 가도 좋아요. 지난 번처럼 영화도 좋고…. 윤기가 벌떡 일어난다. 설마 기분 나빠서 그대로 가시는 건가? 지민이 윤기의 옷자락을 덥석 잡았다. 안돼.
“어, 어디로 가시는….”
“가자며.”
“네?”
“놀이공원.”
윤기가 시계를 확인한다. 검은색으로 도배된 옷차림 중 유일하게 은색이다. 지금 가면 되겠네. 성큼 먼저 앞서가는 윤기를 지민이 따랐다. 민윤기는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사람이 맞다.
모험과 상상의 세계로 어서 오세요! 해맑은 얼굴의 곰 캐릭터가 입구에서 엉덩이 춤을 춘다. 보는 것만으로도 정신 사나운 디자인에, 그 아래로는 더 정신 사납게 수많은 인파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이정도 수에 비하자니 영화관은 천국이었다. 윤기는 이곳을 제 발로 찾아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너는 어떻게 고르는 곳마다 사람이 한 가득이니.”
“그래서 좋지 않아요?”
“제 정신으로 하는….”
정색했던 윤기는 잘 꾸며진 놀이공원 전광판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박지민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와아. 흡사 눈을 처음 밟는 강아지마냥 들 떠 있었다. 심지어는 조금 감동까지 받은 듯했다.
“저 여기 처음 와봐요. 예전에 멤버들이랑 오려고 했다가 스케줄이 바뀌어서 못 왔었거든요.”
“그래?”
“네. 사실 그때 너무너무 아쉬웠었는데 활동이 먼저니까요. 근데 그 뒤로는 활동이 잘 안 풀려서…올 생각을 못했었어요.”
지민이 씁쓸한 웃음을 옅게 지었다. 윤기는 그런 지민을 옆에서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었다. 위로에 재능은 없는 편이었다. 상처에 소금을 뿌리고 더 파고들면 파고 들었다. 스스로 봐도 능력 중에서 공감능력은 제거되어 있었다. 평상시 같으면 무시했을 거다. 남의 일이니까. 그런데 지민의 표정 하나에 윤기는 입술만 달싹거리며 짓씹었다. 무언가 말을 해주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 사이 지민은 언제 그런 웃음을 지었냐는 듯 샐샐 웃으며 윤기의 곁에 딱 달라붙어 섰다.
“근데 부사장님이랑 이렇게 와서 괜찮아요.”
“…앞으로 가고 싶은 곳 있으면 더 말해.”
“정말요?”
역시 다정하시네요. 윤기는 공감 못할 대사를 지민이 연신 외쳐댔다. 그때, 그들의 옆으로 귀여운 동물 머리띠를 쓴 사람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를 본 지민이 어! 외치며 발을 동동 굴렀다. 저건 바로 놀이공원의 상징…! 윤기가 물었다.
“하고 싶어?”
“네!”
한창 호기심이 많을 나이지. 윤기가 먼저 발걸음을 떼려다가, 문득 지민을 돌아보았다. 곁에 바짝 붙어 쫓아오던 지민이 의아하게 보았다. 왜요? 그는 위아래로 지민을 훑었다. 작은 얼굴이 마스크와 모자에 폭 가려져있다. 옷은 지난 번과 마찬가지로 가벼운 후드티에 청바지였는데, 체구가 작아 단체로 놀러 온 고등학생 일행 중 하나라고 봐도 어색하지 않았다. 윤기는 고심한 끝에 한숨을 쉬며 손을 내밀었다.
“잡아.”
“…네?”
“길 잃어버리면 안되잖아.”
…뭐지? 이 말도 안 되는 취급은? 진짜 내가 미아보호소에 갈 나이로 보이는 건가? 지민은 어이가 사라지다 못해 벙 찐 기분이었다. 한번은 강하게 말해야 할 필요가 있다. 부사장님. 전 어엿한 성인이고, 이렇게 하는 거 저도 불편해서…, 까지 생각하던 지민은 생각을 뚝 멈췄다.
제 앞에 내밀어진 큰 손. 뼈마디가 툭툭 불거져 나온 흰 손. 지민이 꼭 한번쯤은 저런 손으로 태어나고 싶다고 소망했던 것이다. 지민은 홀린 듯 조용히 윤기의 손을 붙잡았다. 작은 손은 윤기의 손에 폭 감싸여 사라진 것만 같았다. 마주 닿은 온기가 따뜻하다. 그 온도가 기분이 좋아 지민은 괜히 심장 박동수가 빨라졌다.
“꽉 잡아라.”
“네…!”
지민은 으스러지게 윤기의 손을 붙잡았다. 아. 부러뜨릴 셈이야? 너무 세게는 말고. 앗, 네. 온통 검은 차림의 남성과 캐주얼한 복장의 소년은 서로의 손을 잡은 채 인파를 헤집었다.
놀이공원의 굿즈를 파는 샵은 마찬가지로 사람이 꽉 차 있었다. 샵의 입구에는 놀이공원의 마스코트인 호랑이 캐릭터의 인형탈을 쓴 사람이 열심히 빙글빙글 돌며 홍보를 하고 있었다. 그 옆을 꼬마 아이들이 다가가 퍽퍽 때리거나 매달리며 놀고 있었다. 어린이 여러분~이렇게는 하면 안돼요~ 말리는 유치원 선생님들로 인해 앞은 인산인해였다. 그냥 인수해버리고 싶다. 그리고 사람을 다 내보내고. 짜증이 한층 더 올라간 윤기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쯤.
“아, 저기 있어요!”
머리띠 장식이 한쪽 장식장 칸에 꽂혀있었다. 지민이 먼저 윤기의 손을 놓고 장식장 앞으로 팔랑팔랑 날아간다. 뭐지. 윤기는 살짝 미간을 좁혔다. 잠깐 닿았던 온기가 사라지자 무언가 굉장히 허전한 기분이 든다. 괜히 손을 쥐었다 폈다 했다. 이내 아무렇지 않게 팔짱을 낀 채 느린 발걸음으로 장식장으로 다가갔다. 어느새 토끼 귀를 고른 지민이 착용하고는 윤기를 돌아보았다.
“저 이건 어때요?”
“얼굴을 죄다 가려놓고 물어보면 어떻게 알려줘.”
“아 참.”
지민이 주섬주섬 마스크와 모자를 벗었다. 구석 쪽에 박혀 있어서 그런지 다행히 이곳에 관심을 두는 이는 없었다. 물론, 당장 이번 컴백 곡 하나만 뜬 아이돌이기에 알아볼 사람은 무척이나 적을 테지만. 지민이 다시 토끼 귀 머리띠를 썼다. 귀 한쪽에는 데롱데롱 당근이 매달려있었다.
“어때요?”
“잘 어울리네.”
“…부사장님 말에 영혼이 안 담겨있어요.”
알아차릴 줄은 몰랐다. 이런 장신구 따위에 평생 눈길 한번 줘본 적 없는 윤기는 헛기침을 크게 했다. 그래도 발뺌부터 했다.
“내 영혼이 담겨있는지 안 담겨있는지 네가 어떻게 알아.”
“무표정하시잖아요.”
“아쉽게도 원래 얼굴이 그렇게 생겨먹었어.”
진행됐던 팬싸인회에서 이런 장신구를 걸쳤을 때 팬들이 해주는 반응에 익숙해져서 그런가? 지민은 팬들이 했던 주접을 윤기가 해주는 상상을 해보았다. 지민이는 진짜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야? 아니면 요정? 높은 비명과 함께 진심을 담아 그런 말을 해주는 민윤기. 휙휙 고개를 저어 상상을 털어냈다. 안 어울리는 수준을 넘어 이런 상상을 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죄스러웠다.
“이건 어때요?”
지민이 이번에는 하얀색의 고양이 귀 머리띠를 써보았다. 윤기는 물끄러미 지민을 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보다 괜찮아.”
“그래요? 그럼 이걸로 해야지.”
지민이 거울을 보며 머리띠의 고양이 귀를 잘 고정시켰다. 고작 머리띠 하나에도 섬세한 손길이 비주얼에 민감한 아이돌다웠다. 윤기는 차분히 기다려주었다.
“더 사고 싶은 건 없어?”
그 말에 지민의 눈동자가 빙그르르 굴러간다. 놀이공원을 골랐을 때와 비슷한 움직임이었다. 왜. 뭔데. 윤기가 눈을 가늘게 좁힌다. 지민이 머뭇거리더니 조심스럽게 자신과 같은 고양이 귀 머리띠를 하나 또 뽑아왔다.
“부사장님도 해주시면….”
윤기는 귀를 의심했다. 지금 나보고 하는 말이니. 저 정신 나간 권유가 놀랍게도 진짜인지 지민이 쭈뼛거리며 머리띠를 윤기에게 내밀고 있었다. 윤기는 기가 막혀 허, 헛숨을 내뱉었다.
“내가 그걸 왜 해.”
“원래 놀이공원에 오면 다 같이 맞추고 하는 거라고 그랬는데….”
“어떤 놈이 그런 법칙을 만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나이 서른에 하면 미쳤다는 소리 들어. 넌 내가 어울린다고 생각하니.”
올 블랙의 수트에 살짝 넘겨서 이마가 드러나는 머리. 손목에는 수 억의 시계가 차있었다. 객관적으로 봐도 안 어울렸다. 지민이 머리띠를 꼬옥 쥔다.
“…그래두 잘 어울리실 거 같은데요. 잘생기셔서….”
윤기를 마주보는 눈이 비 맞은 새끼 강아지같다. 왜 또 눈망울은 이렇게 투명한지. 잠깐의 정적 끝에 하아, 작게 한숨을 쉰 윤기가 손을 뻗었다. 어린애 한번 돌보기 진짜 힘드네.
“내놔봐.”
“제가 해드릴게요!”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신이 난 지민이 조심스럽게 윤기의 머리 위로 손을 뻗었다. 머리카락을 만지는 손길이 부드럽다. 그 손길이 지나가니, 수트에 어울리지 않게 귀엽디 귀여운 고양이 귀 머리를 착용한 남성이 서있었다. 인상이 언짢게 구겨지니 더 괴리감이 컸다. 백호 귀 대신 고양이 귀가 잘못 달린 것만 같은.
“이제 됐니.”
심기가 불편해진 뚱한 고양이. 지민은 그 순간 하준이 키우는 고양이가 떠올랐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뚱한 표정으로 온 집안의 화분을 다 깨부수고 다니던 녀석. 그 고양이와 윤기가 너무나도 비슷해 보였다. 지민이 참지 못하고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청량한 웃음소리가 맑게 퍼져나간다. 아하하.
“부사장님 너무, 아 죄송해요. 그런데 너무, 너무.”
귀여워요. 목구멍에 맴도는 말을 지민이 꾹꾹 눌러 넣었다. 그 말까지 했다간 더는 되돌릴 수 없을 미래를 알았다. 샵에 있던 시선이 이곳으로 쏠린다. 지민이 움찔하며 급히 입매를 가다듬었다. 윤기는 말이 없다. 혹시라도 화나셨나. 그런데 어쩐지 윤기의 표정이 멍하다.
“부사장님…?”
“아이돌은 원래 다 너 같냐.”
“네?”
“아니다.”
윤기는 급하게 지민의 시선을 피했다. 이래서 다 아이돌, 아이돌 하는 거군. 중얼거리는 그의 귀 끝이 미묘하게 붉었다. 무슨 일이지? 지민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내 행복하게 웃으며 윤기의 손을 꽉 잡았다. 어떤 것이든 지금 같이 있는 이순간이 너무나도 행복했다.
“이제 가요!”
이렇게 머리띠 쓰고 꼭 놀이기구도 타야 된다고 했어요. 잠깐 멈칫했던 윤기는 지민에게 손을 그대로 내주었다. 너 그런데 모자랑 마스크는. 아 맞다. 황급히 마스크와 모자를 가져온 지민이 고민하더니 마스크만 다시 썼다. 머리 위에는 하얀 고양이귀가 여전히 쫑긋 서있었다.
한 쌍의 똑같은 고양이 귀를 단 그들이 다시금 복잡한 인파 속으로 헤집고 들어갔다. 손을 계속해서 꼭 맞잡은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