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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짐] 502 배드게이트

by 토페 posted Jan 23,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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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 Looking for the Sun >






 흔한 자취생 치고는 과도하게 좋아 보이는 오피스텔 안. 광활한 화면을 자랑하는 풀스크린 티비로 아름다운 영화의 엔딩이 올라오고 있었다.



"갓벽하다. 레전드 결말이다…커흥…."



 엔딩 크레딧이 올라오는 화면 뒤로 남준이 눈물을 줄줄 짰다. 윤기는 그 옆에서 묵묵히 휴지를 뽑아 건넸다. 그의 시선은 영화보다 남준이 아슬아슬하게 붙잡고 있는 팝콘 봉지에 달라붙어 있었다.



"남준아 팝콘은 좀 내려놔주겠니. 카펫에 흘리면 답도 없거든."



 그러나 감동에 젖은 남준은 물개가 되어 목놓아 꺼이꺼이 울뿐이었다. 헝헝, 헤즐리. 윤기가 결국 남준의 손에서 팝콘을 빼앗아 구석에 두었다. 이제 됐군. 윤기가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형은 이게 안 슬퍼요?"



 남준의 얼굴은 눈물로 축축하게 젖어 엉망으로 찌그러져 있었다. 영화 관람 반, 카펫 걱정 반을 하느라 대충 봤던 윤기는 평소와 똑같이 무던한 말투로 말했다.



"나름대로 해피엔딩이던데 뭘."

"와, 해피? 해피이? 형 눈이 없어요? 이게 안 슬프다구요? 남자주인공이 죽었잖아요!"

"그래도 그 눈을 받아서 장님이었던 여자주인공이 꿈을 이뤘잖아."

"…그거 진심이에요?"

"응."

"내가 여태 이런 사람이랑 영화를 보고 있었다니. 신이시여 아니라고 말해주세요. 아니, 어떻게 그게 해피엔, 와 말이 안 나온다. 형 사실 사람 아니고 로봇이죠."



 아니면 그럴 수가 없어. 남준이 혀를 내둘렀다. 누가 이 영화에 점수를 낮게 줬나 했더니. 형 같은 싸이코 패스들이었던 거야. 그러니까 로튼 토마토 점수가 90이지. 형이 남은 10이었어. 남준이 극악무도한 민윤기 로봇설에 이어 싸이코패스설까지 주장하거나 말거나 윤기는 귀나 대충 후비적거렸다.



"네가 먹다 흘린 팝콘 알갱이들이나 치워라. 참고로 중간에 밟아서 뭉개면 손으로 세탁해야 된다."

"…진짜 극악무도하다…."


 그래도 말은 잘 듣는지라 남준이 커다란 덩치로 주섬주섬 팝콘을 주워담았다. 윤기는 쇼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 방향을 지시했다. 야, 저쪽 구석에도 있잖아.


 윤기는 대체 영화가 왜 슬픈지 공감할 수 없다. 스토리는 대충 이랬다. 부잣집 귀족을 짝사랑하는 시각장애인인 여주인공. 그리고 그 여자를 짝사랑하는 평민 남주인공. 부잣집 귀족이 과거에 구해줬다는 사실 하나로 여주인공은 부잣집 귀족만을 바라봤고, 평민 남주인공은 평생 그녀만 바라보다 대신 죽고 눈을 기증한다. 여주인공은 그제야 과거에 자신을 구해준 인물이 귀족이 아니라 평민인 남주인공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된 세상에서 그토록 그리고 싶었던 그림을 완성하는 것으로 영화는 끝난다.


 윤기는 영화를 한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었다. 이게 뭔 개 같은 스토리야. 등장하는 인물 셋 모두 멍청하고 답답했지만, 남준이 목놓아 외치던 남주인공은 특히나 더 가관이었다. 왜 영화 내내 자신이라고 말하지 않는가. 귀족을 향한 여주인공의 환상과 사랑을 지켜주고 싶다고? 웃기고 있다.


 본인 목숨까지 버려가며 남을 위해 희생하는 게 사랑이라면 하지 않는 게 낫다. 그깟 게 뭐라고. 너무나도 불합리하고 이성을 마비시키는 불필요한 존재다. 그는 멜로영화의 후기를 이렇게 평했다.


 사랑은 덜떨어진 인간들이나 하는 모자란 것이다.



"다 담았냐."

"네."

"수고했네. 그리고 나중에 이런 재미없는 영화는 너 혼자 봐라. 난 영 취향이 아니다."

"…형이 언젠가 꼭 지독한 사랑을 해보길 응원할게요."



 그럼 이 영화를 좀 이해할 수 있겠죠. 근육이 가득한 팔로 팝콘 통을 소중하게 끌어안은 남준이 저주하듯 중얼거렸다. 윤기는 픽 비웃음 아닌 비웃음을 흘리며 받아 쳤다.



"그래 꼭 빌어줘라."



어차피 다음 생에나 해볼 수 있을 거다. 약 1퍼센트의 가능성으로. 윤기는 당시의 대화를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






 복학 후 오랜만에 걷는 캠퍼스는 평소와 똑같았다. 즉 지루하고 따분했다.



"이번 시험은 조별과제로 대체합니다."



 강의실에 있는 모두의 얼굴 위로 공통적인 생각이 잠시 스쳐 지나간다. 좆 됐네. 그 가운데에 낀 윤기는 유일하게 표정 변화 없이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들었던 대로군. 조별과제라는 것만 빼면 나름 점수 얻기 괜찮은 강의다. 윤기가 손을 들어올렸다.



"질문이 있습니다."

"네, 하세요."

"혼자 해도 되나요?"



 교수는 단호했다.



"불가능합니다. 협동과 소통을 중점으로 진행되는 조별과제이므로 참여하지 않는 학생은 모두 0점이에요."



 다행인지 불행인지 교수는 주변에 붙어 앉은 사람끼리 랜덤으로 조를 짜주었다. 그리하여 윤기는 총 4명의 조별과제 멤버를 얻었다. 졸업직전의 사회체육과 한 명, 경영학과 새내기 둘, 연영과 헌내기 하나, 그리고 민윤기. 서로 어색하게 인사하며 눈치 보는 사이에서 윤기는 유일하게 늘 일관된, 어딘가 나른해 보이는 표정으로 인사했다.



"컴공과 16학번 민윤기입니다."



 학번을 듣자마자 새내기들은 저들끼리 눈빛을 주고 받았다. 좋지 않은 사인임이 분명했지만 윤기는 그저 가만히 있었다. 어차피 조별과제로 한철만 볼 사이. 여러 인간들과 엮이고 싶지 않다. 다음으로 인사를 한 건 연영과의 헌내기였다.



"안녕하세요. 저 김태형이라고 합니다. 연영과예요."



 새내기들은 윤기 때와 달리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태형을 바라보았다. 사회체육과가 크흠, 헛기침을 했다.



"슬슬 우리도 조장을 정해야겠지? 그런데 나는 취업이 코앞이라 조장은 좀 그래."



 그에 시선들은 민윤기 쪽으로 쏠렸다. 학번이 다음으로 높다 이거다. 윤기는 별 다른 저항 없이 끄덕였다.



"그럼 제가 조장할게요."



 그렇게 맺어진 교양과목 '사랑과 현대사회'의 조별과제는 겉으론 완벽했다. 자료조사 담당 경영과 새내기 둘, 자료취합 민윤기, PPT 제작담당 연영과, 발표담당 사회체육과. 윤기의 지도 아래 세분화하여 역할을 분담했다.


 그러나 문제는 처음으로 약속을 잡는 시기부터 발생하기 시작했다.



 (사회체육과) 나 취업 면접이 그날로 잡혀서ㅠ

 (경영과1) 선배님 저 어머니가 몸이 안 좋으셔서요ㅠㅠ

 (경영과2) 형님 저 배달 아르바이트하다가 넘어져서 다쳤어요ㅠ



 단톡으로 쏟아지는 메시지들을 보며 윤기는 미련 없이 역할분담 파트를 수정했다. 자료조사 민윤기, 자료취합 민윤기, PPT제작 민윤기. 어차피 사람에 대한 기대가 없어서 그런지 딱히 열이 받진 않았다. 그저 한 가지 결말을 예측했을 뿐이다. 벌써 3명의 이름은 빼겠군. 마지막 남은 한 명의 이름도 빼야 할지 기다리는 도중, 약 5시간뒤 연영과로부터 연락이 왔다.



 (연영과) 헐 다들 일이 많으시네요ㅠ 전 PPT 만들어놨어요 ㅎㅎ 언제가 좋으세요.



 윤기는 조금 의외라는 생각을 했다. 연영과는 제일 연락도 늦으며, 참여율도 저조한 편이었다. 뭐, 둘이 남겠군. 태형의 이름은 보고서에 남겨두었다. 그러나 점검을 위해 태형과 둘이 카페에 모여 앉은 날. 윤기는 후회했다. 진작 보고서에서 태형의 이름도 뺐어야 했다고.



"어때요 형?"



 태형이 간식 기다리는 강아지마냥 윤기를 재촉했다. 윤기는 잠깐의 침묵을 지키다, 약 5분의 시간이 흘렀을 즈음, 태형에게 물었다.



"이거 어디서 긁어왔어요."

"제가 직접 만들었는데요?"



 윤기는 살면서 이렇게 생긴 PPT는 처음 보았다. 책을 써놓은 건가? 장편 소설마냥 매 페이지마다 빼곡하게 배치해놓은 글은 물론, 마지막에 괴상한 캐릭터를 배경으로 움직이는 애니메이션까지 최악이었다. 못한 부분을 꼽으니 '처음부터 끝까지'가 나왔다. 윤기는 더 볼 것도 없이 태형의 노트북을 덮었다.



"발표 담당해주세요. 나머지는 제가 할 테니까요."

"에? 갑자기요? 발표는 사회체육과 선배님이 하기로 하지 않았어요?"

"어차피 안 올 겁니다."



 아 그래요? 태형은 의아해했으나 곧 수긍했다. 넵, 알겠습니다 형님! 그런데 형님 말 놓으세요 헤헤. 조금이나마 다행이었다. 말은 들어먹는 애네. 윤기는 노트북을 챙겨 일어나며 태형에게 말했다. 그래. 단톡방에 뭐라고 올라오든 이제 무시하고.


 미래는 윤기의 예상을 한치도 빗나가지 않았다. 경영과 새내기 하나는 장례식장을 전전하며 돌아다녔고, 다른 하나는 다리에 이어 팔까지 부러졌다는 비보를 전해왔다. 사회체육과는 윤기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으니 더욱 뻔뻔히 나왔다. 아예 단톡방을 무시하다가 발표 일주일 전이 되었을 때 간신히 메시지 하나만 던져놓았다.



 (사회체육과) 나 면접 있어서 그날 발표 못할 것 같아ㅠ 미안하다 진짜ㅠㅠ



 태형은 그 뒤로 윤기를 신 모시듯 따랐다. 와 조장 형 예지능력 대박. 어떻게 아셨어요? 점집이라도 다녀왔냐며 감탄하는 태형에게 윤기는 묵묵히 만들어놓은 발표자료를 건넸다. 대본 짰으니까 읽고 낭독만 하면 돼.


 그때쯤 민윤기의 머릿속에는 머지않아 이 조별과제에서 만난 인연들을 모두 삭제해야겠다는 계획이 있었다.


 잘하진 못해도 성실한 친구 김태형은 착실하게 연습했다. 그는 연습을 끝장나게 했다며 윤기를 초대했다. 저 다 외웠는데 와서 한번 봐줘요. 민윤기는 수긍했다. 다 차려놓은 밥상을 엎을 수준인지 아닌지 확인은 해야 했다. 그래. 언제 보면 되니.


 그들은 저녁 이후 카페에서 리허설을 약속 잡았다. 아마 그것이 마지막 만남이 되지 않을까, 윤기는 생각했다.


 그러나 가끔 미래는 예측 불가능하게 움직이곤 한다. 약속 당일 김태형이 발표문의 첫문장을 읽었을 때, 벨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며 그 흐름을 끊어놓았다. 태형이 전화를 무시하고 껐으나 전화는 끈질기게 울렸다. 마치 안 받으면 큰 일이라도 날 것처럼. 윤기가 턱짓으로 전화를 가리켰다.



"받아봐. 급한 일인가 본데."

"아씨, 왜 이러지. 잠시만요, 형."



 어, 난데. 왜? 태형이 전화를 받는 동안 윤기는 무표정한 얼굴로 PPT를 뒤적였다. 시간소모는 질색이지만 어차피 10분 남은 조별과제. 영영 안녕일 테니 이 정도는 기다려줄 수 있었다. 그러나 전화를 받는 태형의 표정은 점점 심각한 빛으로 물들어 갔다. 대화 내용 역시 심상찮았다.



"뭐? 또? 아 돌겠네. 어디로 갔는데? 아 알았어. 나도 찾아볼게. 어, 어. 찾으면 바로 연락해줘라."



 전화가 끊긴 뒤, 태형은 돌연 누구 한 명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이 진지하고 급한 얼굴로 윤기의 팔을 덥석 붙잡았다. 형 진짜 죄송한데요.



"저 잠깐만 도와주세요. 큰일났어요."



 윤기는 눈을 여러 차례 깜빡거렸다. 내가? 손가락으로 스스로를 가리키니 태형이 목이 떨어져나가라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이내 무언가를 말하기도 전에 태형의 손에 이끌려 밖으로 끌려 나왔다.








 민윤기는 현재 이름도 모르는 누군가의 집 앞에 서있었다. 드나드는 사람이 많지 않은 오피스텔 촌에 있는 건물 중 하나였다. 딱 봐도 고급스러운 곳이었다. 내가 왜 여기 있는 거지? 조별과제를 마무리하러 나와서 왜 이곳에 서있는지, 그의 심정은 어이없음과 황당 그 자체였다.


 태형의 부탁은 이랬다. 형 거기 서있다가 혹시 누가 싸우는 목소리 들리면 바로 저한테 연락해줘요. 바로 해줘야 해요 진짜!


 그렇게 입구에 동상처럼 박혀 선지 1시간. 윤기는 서서히 짜증이 났다. 다리도 아프고 춥고 시간낭비였다. 그냥 못한다고 하고 돌아가야겠다. 생각하며 태형에게 연락을 하려는 찰나. 큰 소리와 함께 사람 둘이 입구에 내려왔다.



"얘기 좀 해."

"얘기는 무슨 얘기. 야 박지민 너 나 진짜 못 믿어?"

"못 믿는 게 아니라 사실이 그렇잖아."

"아 너 이렇게 말꼬리 빙빙 잡는 거 지겨워. 그만하자, 제발. 어?"

"…지겨워?"



 윤기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웅크려 숨었다. 다행스럽게도 어제 누군가 이사를 하고 버린 건지 커다란 옷장이 그곳에 있었다. 입구로 나온 둘은 계속해서 언성을 높였다.



"그게 어떻게 바람이냐. 그냥 이야기만 좀 나눈 거 가지고."

"넌 내가 바보로 보여?"

"아니, 착각이라니까. 각도가 묘한 거라니까? 내가 말했잖아. 키스한 거 아니라고. 난 너밖에 없어. 걔는 그냥 친구라니까!"



 윤기는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이 인간들이 김태형이 말한 목표구나. 바로 태형에게 문자를 넣었다.



[니 친구 나왔다.]



 임무를 완수한 윤기는 미련 없이 자리에서 움직였다. 척 들어보니 애인 사이다. 끼어들어서 볼 이득은 아무것도 없었으며, 피곤해질 게 뻔했다. 이 조별과제를 아예 혼자 다 했어야 하는 건데. 얕은 후회를 하며 일어난 그때.



"한번 넘어가주니까 우습지."



 서늘한 음성과 함께 누군가 쿵 옷장에 부딪혔다. 그와 동시에 옷장이 거세게 흔들렸다. 일어서던 윤기는 문득 머리 위로 짙은 그늘이 진다고 느꼈다. 그리고 순식간에 옷장은 윤기의 위로 쏟아졌다. 제 이름을 부르는 태형의 목소리도 들렸다.



"조장 형! 윤기형!!"



 아찔한 통증이 머리를 덮쳤다. 윤기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






 온몸을 두들겨 맞으면 이런 기분인가. 윤기는 천천히 눈을 떴다. 병실이다. 오른쪽 팔은 깁스에 감겨 힘이 들어가질 않았고, 머리에는 붕대가 둘둘 감겨있었다. 생존했다는 안도감, 통증 그런 것보다도 다른 감정이 윤기의 안에서 떠돌았다.


 이 뭔, 개 같은. 그는 이 상황이 어이가 없었다. 무임승차 조별과제 혼자 운전하다가, 아무 상관도 없는 게이 커플싸움에 휘말려 대가리가 깨지다니. 아주 올해 민윤기 인생에 마가 꼈다. 기가 막혀 헛웃음을 흘리고 있자니, 문득 옆 간병인 의자에 굴러다니는 햄버거 포장지들이 보였다.


 왜 포장지만 보고도 떠오르는 인물이 있는 걸까. 보기만해도 찝찝하다. 설마, 하는 그 순간 아니나다를까 병실 문이 열리고 예측한 인물이 시끄럽게 등장했다.



"어! 조장 형!!!"



 다신 마주치고 싶지 않은 인물이 마시던 음료수도 날려버릴 만큼 격하게 반기며 달려왔다. 누워있던 윤기의 이불 위로 노란 음료수가 비처럼 뿌려졌다. 하필 노란색이라 침대가 더 더러워 보였다. 태형이 멀쩡한 윤기의 나머지 한 손을 부여잡으며 흑흑 눈물을 짜는 시늉을 했다.



"형 정말 일어나서 다행이에요. 전 이대로 형이 죽는 줄 알았어요. 진짜 심각했다니까요. 막 이렇게 머리에서 피도 질질 나고. 난 영화에서나 나오는 장면인 줄 알았는데, 실제로도 보니까 이게 막, 으. 하 다행이다."



 태형이 너무나도 다행이라며 줄줄 이어 떠들었다. 의사쌤이 형 뇌진탕도 걸리고 팔도 한 짝 작살났다고 했는데. 대충 얼마나 민윤기의 몸이 박살이 났으며, 일상생활로 돌아가기까진 시간이 많이 소요된다는 소리였다. 두서없이 쏟아지는 언어의 폭격에서 윤기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태형아."

"네?"

"머리 찢어질 거 같으니까 좀 조용히 말해줄래."

"헐 어떡하지 의사 부를까요 형? 몸 어때요? 앞은 잘 보여요? 의사쌤이 일어나서는 잠깐 충격 때문에 앞이 잘 안 보일 수 있다고도 했는데. 근데 형 얼굴 더 하얘져서 꼭 유령 같네요. 좀 무셔."



 윤기는 그냥 입을 다무는 쪽을 선택했다. 태형의 존재를 삭제하며 앞날을 계획했다. 퇴원수속 밟고. 당분간 집안일 도와줄 사람을 찾아봐야 하나. 남준이나 불러서 며칠 쓸까. 교수한테는 따로 연락해야겠군. 차곡차곡 머릿속으로 일을 해결한 찰나, 문득 태형이 옆구리에 끼고 온 물체가 눈에 들어왔다.



"그걸 왜 네가 가지고 들어와."

"아 이거요? 형 노트북. 그게 수리센터 갔다 왔거든요."

"…뭐?"

"형 넘어져서 뇌진탕 걸렸을 때, 요 녀석도 조금 뇌진탕이 걸렸나 봐요. 화면을 열어봤는데 금이 가있는 거예요. 혹시나 해가지고 확인 차 켜보려고 하니까 안 켜지던뎅."



 윤기가 낚아채듯 태형의 손에서 노트북을 가져왔다. 떨리는 손으로 전원 버튼을 눌렀다. 화면은 여전히 검은색 그대로다. 태형이 말했다.



"아 그게요. 가보니까 모뎀이 아예 나가서 수리가 힘들다고 하더라고요. 그냥 다른 거 하나 사라고 추천해주던데요."



 너무나도 열 받으면 머리가 하얗게 탈색된다는 게 이런 기분일까? 윤기는 세상에서 태어나 몇 번 느껴보지 못한 분노로 온몸이 타들어 갔다. 당장 발표할 자료는 그렇다 치고 이 노트북에는 최근 연구하고 있던 파일과 구축해놓은 시스템이 몽땅 들어있었다. 목숨을 바꿔서라도 소중하게 가지고 있던 그 자료들이. 크고 하얀 손이 덜덜 떨려오기 시작했다. 태형은 그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조금 전 들은 노트북 사망선고를 친절하게 읊어주었다.



"자료들은 백업이 가능할지 불가능할지 모른다고 하는데 커다란 희망은 가지고 있지 말라고…."



 쭉쭉 이어 말하던 태형이 문득 옆에서 느껴지는 살기 어린 기운에 말을 멈추었다. 눈치 없는 태형조차 느낄 수 있었다. 이 형, 개빡쳤다.



"…그랬는데 아무래도 거기 고치는 사장님이 잘못 고치셨나 봐요. 다른 가게 가서 물어보면 고칠 수 있을지도 몰라요. 다시 갔다 와볼게요."



 급하게 말을 유턴한 태형이 윤기의 품에서 노트북을 다시 데려가려는데, 윤기가 살기 가득한 어조로 말했다.



"네 친구 불러와."

"…네?"

"이렇게 나 병실에 앉혀놓고 내 노트북까지 부순 새끼 불러오라고."

"그…정확히는 제 친구가 혼자 했다고 보기에는, 엄…."



 태형이 윤기의 눈치를 보며 말을 흐렸다. 그게 조금 억울한 부분이 없지 않아, 약간 있는데. 한번만 들어보는 것도…. 그러나 이미 윤기의 귀엔 들리지 않았다. 온통 죽여버리겠다는 생각뿐이 들지 않았다.


 감히 내 자료를 날려? 머리는 순식간에 어떻게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든 새끼를 조질지 계획했다. 상해죄든 폭행죄든 뭐든 엮어서 감옥에 처넣을 것이다. 처넣기만 할 뿐이랴, 있는 돈 없는 돈까지 싹싹 털어서 바닥에 나앉게 해주마. 민윤기의 반년을 날려먹은 대가는 철저히 고통스럽게 치르게 될 거다.


 윤기가 당장 잡으러 나갈 기세로 침상에서 벌떡 일어났다. 살인이라도 저지를 듯한 눈빛이었다. 태형이 허겁지겁 다가와 윤기를 붙잡았다.



"형, 형! 진짜 이번 한번만 참아주시면 안 될까요? 제가 시키는 건 다시 다 해올게요."



 태형이 윤기의 어깨를 꾹 누르며 마킹했다. 그러나 분노한 인간은 순식간에 괴력을 발휘했다. 악. 옆으로 밀려나간 태형이 이불 위로 퍽 엎어졌다. 그럼에도 용수철처럼 벌떡 일어나 윤기의 발치를 붙잡고 매달렸다.



"윤기형! 진짜 제 친구는 억울…!"

"안 놓으면 너도 죽인다."



 살벌하게 내뱉으며 윤기가 태형을 떨궈내려 발을 털려는 그 시점. 병실 문이 덜컹 열렸다. 걸어 들어온 건 꽃다발, 아니 자기 몸처럼 큰 꽃다발을 안고 들어오는 남자였다.



"이거 생각보다 너무 커서, 좀 도와, 앗!"



 남자의 품에서 꽃다발이 추락했다. 헉. 까만 머리에 유독 입술이 통통한 남자는 급히 허리를 숙여 꽃다발을 주워들었다. 안돼. 조금 속상해진 얼굴로 바닥에 떨어진 꽃을 주워 들고 일어난다. 그리고 이내 남자와 윤기의 눈이 마주쳤다. 남자의 눈이 동그랗게 변한다.


 윤기는 문득 그 빡친 상황에서도 한 가지 생각을 했다.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말랑하게 생길 수 있지? 윤기에게 매달려있던 태형이 벌떡 일어났다.



"지민아!"

"태태? 왜 거기…."

"아니 그게 어, 그러니까…!"



 태형이 지민에게 다가와 부산스레 설명했다. 형이 방금 깨어나셔서, 엉, 그게! 민윤기 형이신데! 아 이건 내가 지난 번에 설명했지. 그런데 지민아, 그게 아니고. 지민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미간을 살짝 모았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아니! 그니까! 이제 조금 우리 밖에 나가서 준비 대화를 해보는 건 어떨까?"



 태형이 윤기를 흘끔거렸다. 당장 지민을 밖에 내보내고 싶은지 옷소매를 붙잡는다. 그런데 다시 돌아본 윤기에겐 아까와 같은 살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어딘가 살짝 멍해 보이는. …저 형이 왜 저러지?


 민윤기는 생전 처음 겪는 경험을 또 하고 있었다. 아까는 분노였는데, 이번에는 알 수 없는 정신 체험이었다. 머리가 조금 붕 뜨고 한 사람을 제외하고 주변이 삭제되는 기분. 확대경으로 한 사람만 들여다보고 있는. 꽃다발을 안고 들어온 사람을 향해 모든 신경이 집중되어 벗어날 수 없었다. 뭐야? 우유로 예쁘게 빚어놓은 떡 같은 인간이 존재….


 우유떡이, 아니 지민이 태형이 붙잡은 옷자락을 털어내고 윤기에게 총총 다가갔다.



"깨어나길 기다렸어요."



 돌연 윤기는 가슴께가 뻐근하게 짓눌리며 쿵쿵거렸다. 분노로 싸늘하게 식었던 방금 전과는 또 다르다. 무언지 알 수 없는 기분인데, 손 하나 빳빳하게 굳어서 움직이기 힘들었다. 죽여버리겠다고 호언장담한 방금 전과 달리 지민의 얼굴로부터 눈 하나 뗄 수 없었다. 미안함이 가득 담긴 작은 얼굴이, 아니, 얼굴뿐만 아니라 목소리가 간지럽게 느껴졌다.



"저 때문에 그렇게 되셔서 너무 걱정했는데…아! 저는 박지민이라고 합니다. 정말 너무 죄송해요."



 윤기는 다소 멍청히 눈만 깜빡거렸다. 스스로가 무척이나 당황스러웠다. 침묵하는 윤기를 보곤 지민이 고개를 갸웃했다.



"…저기, 괜찮으세요?"



 태형이 둘의 곁으로 다가왔다.



"방금 깨어났는데 열 받아서 안 좋아졌나 봐. 맞다, 의사쌤한테 연락해야 됐는데."

"뭐? 안 했어?"



 아, 알써. 태형이 급히 인터폰을 붙잡았다. 지민은 헐레벌떡 윤기의 손을 붙잡고 침대로 이끌었다. 여기 누우세요. 손에 닿는 온기에 하얗고 큰 손이 조금 놀라 움찔했다. 그에 지민이 더욱 걱정을 표하며 윤기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어떡하지. 갑자기 머리 아프신 거예요?"



 그 기분을 아는가. 너무 거세게 뛰는 심박수에 호흡이 멎어버릴 것만 같은 느낌. 윤기는 홀린 듯 지민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진짜 상태가 너무 안 좋으신 거 같은데. 지민이 초조하게 중얼거린 그 순간, 문이 덜컹 열리며 의사와 간호사들이 들어왔다.



"선생님! 빨리 봐주세요. 상태가 안 좋아요."



 지민이 일어나 의사와 간호사들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잠시 검사하겠습니다. 환자분 괜찮으신가요? 윤기는 멍한 시선을 지민에게 계속 박은 채, 여전히 쿵쿵거리는 심장을 느끼며 생각했다. 아무래도 머리를 맞을 때 이상해진 게 분명하다고.






***






 병실 침대에 혼자 덩그러니 누운 윤기는 스스로의 상태를 진단했다. 어제 일어난 괴현상에 관하여. 한 사람만 남겨놓은 채 주변 다른 것들은 모두 삭제되는 현상. 그 사람이 다가오는 순간 심장마비라도 걸릴 것처럼 심장이 뛴다. 인생에서 처음 일어난 기묘한 현상들이었다.


 때문에 윤기는 의사를 붙잡고 진지하게 물어보았다. 사고 후유증이 정신적으로도 일어날 수 있는 건가요. 의사는 그런 경우도 있다고 대답했지만, 그럴 가능성은 매우 적다고 했다. 윤기씨는 외상 외에는 큰 문제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감정은 뭐란 말인가? 윤기는 분노로 추정해보았다.


심장이 뛰는가? O

시도 때도 없이 그 사람 얼굴이 생각나는가? O

얼굴이 빨개지는가? O

또 만나고 싶은가? O

고소하고 싶은가? X

폭력을 행사하고 싶은가? X


 윤기는 미간을 찡그렸다. 폭력은 원래부터 무식한 양아치들이나 행하는 행위로 분류하여 싫어한다. 게다가 김태형의 친구는 한대 치면 부러지게 생겼다. 그렇다면 그 사람으로 인해 우울한가? 우울하긴커녕 박지민의 얼굴만 떠올리면 카페인이라도 몽땅 들이킨 것처럼 심장이 뛰고 정신이 알딸딸해졌다. 아니면 노트북이 부숴진 게 너무 충격이라 뇌가 맛이 간 건가.



"……."



 모르겠다. 아무래도 좀 더 관찰해봐야겠다고 윤기는 생각했다.





 기회는 생각보다 더 빠르게 다가왔다.


 지루하기 짝이 없는 입원생활. 혼자 보내는 시간을 인생에서 가장 좋아하는 민윤기조차 슬슬 병실 생활에 실증이 났다. 노트북도 승천한 마당에 할 일이라곤 게임밖에 없어 윤기는 게임을 켰다. 게임 화면 위로 메시지 하나가 날라온다.



(김남준) 형 형님 어머니한테 아까 전화 왔었는데요.



 윤기는 메시지를 무시했다. 잠시 뒤 메시지가 또 하나 날아왔다.



(연영과) 형 몸 어때요? 쌤이 괜찮대요?



 무시. 그대로 다음 판을 진행했다.



(연영과) 오늘 가도 돼요?

(연영과) 형 자요?

(연영과) 바빠요?



 또 무시했다. 상대가 귀찮은 연영과라면 그는 오늘 하루 종일 바쁠 예정이었다. 오는 연락이 귀찮아진 나머지 아예 알림까지 끄려는데.



(연영과) 지민이가 형이랑 이야기하고 싶다고 하는데 형 시간 안되니까 걍 전화로 하라고 할게여



 게임을 껐다. 윤기는 태형에게 답을 날렸다.



[오늘 시간 괜찮아.]



 태형은 잠시간 답장이 없었다. 왜 없지? 조별과제 무임승차에도 단 한번도 연락을 재촉해본 적 없던 윤기는 살짝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연락은 잠시 뒤 왔다. 그럼 오늘 지민이가 2시쯤에 간대요.


 윤기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게임 따위 이제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거울 앞에 서서 엉망으로 구겨져있는 환자복을 털고 머리를 손봤다.



"……."



 나 왜 이렇게 생겼냐. 환자복 때문에 허옇고 마른 겉모습이 불만스러웠다. 윤기는 스스로의 외모에 대해 딱히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애초 외모라는 것에 관심이 없었다. 티비에 나오는 잘생기고 예쁜 연예인을 봐도 그러려니 할 뿐, 그의 관심사는 농구선수와 축구선수, 게임선수 등 온갖 능력치로 승부를 가리는 스포츠뿐이었다.


 되는대로 옷장을 열어보았다. 있는 거라곤 사고 당시 입고 있던 검은 후드티뿐이었다. 윤기는 집에 체크셔츠가 가득 담겨있는 옷장이 그리워졌다. 후드티를 잡고 화장실 거울에 대보다가 때려 쳤다. 뭘 해도 저승사자마냥 창백한 게 방금 죽었다가 막 일어난 사람이다. 재빨리 병원 근처에 있는 매장에서 아무 옷이나 사와야겠다. 지갑을 챙겨 병실 문을 통과하려는 그때.



"문 열어주셔서 감사, 앗!"



 이번에는 거대한 과일바구니가 살아서 움직였다. 아니, 과일바구니에 집어 삼켜진 사람이 끙끙거리며 움직이고 있었다. 결국 비틀거리더니 과일바구니가 추락했다. 안돼! 등장한 인간이 냉큼 바닥에 떨어져서 굴러가는 귤을 담아왔다. 윤기가 제 발 아래로 툭 굴러 떨어진 귤 하나를 주웠다. 감사하다며 지민이 웃었다.



"잡아주신 덕분에 살았어요."



 윤기는 어디선가 상큼한 과일향이 불어오는 것 같았다. 그러나 곧 향은 날아갔다. 지민이 윤기를 확인하자마자 표정을 딱딱히 굳혔기 때문이다. 헉.



"아, 그, 전 간병인분일 줄 알았어 가지고, 죄송해요. 팔은 괜찮으신가요."



 지민은 첫만남과 달리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마주치자마자 움츠러든 게 꼭 언제든 위협에 튀어나갈 준비를 하는 햄스터 같았다.



"…윤기씨?"



 반면 윤기는 지민을 보자마자 처음 겪었던 괴현상을 다시 겪고 있었다. 이상하게 입안이 바짝 말라왔다. 큼, 헛기침을 한번 하며 그가 안쪽으로 지민을 안내했다.



"멀쩡합니다. 들어오세요."



 지민은 쭈뼛쭈뼛 윤기의 뒤를 따라 들어와 과일바구니를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간병인 의자 끝에 걸터앉았다.



"……."

"……."



 끝없을 것 같은 정적으로 분위기는 사망했다. 윤기는 도통 입을 열지 못했다. 너 인생 그따구로 살지 말라며 인생에서 마주친 몇몇 인간들 덕분에 사회생활이라면 충분히 잘했는데도. 지민이 아주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몸은 괜찮아지셔서 다행이에요. 전적으로 제 실수였고 화나신 게 당연해요. 뭐든 제가 할 수 있는 건 보상을 다 해드릴 거구요. 또…."



 그때 지민의 말을 자르고 병실 문이 다시 드르륵 열렸다. 윤기와 지민의 시선이 그쪽으로 옮겨갔다. 고급스러운 수트를 입은 중년 여성이었다.



"생각보다는 멀쩡하구나."



 말하며 들어온 그녀의 얼굴을 보며 윤기는 아까 무시했던 남준의 연락을 떠올렸다. 아. 그걸 무시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지민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들을 보았다. 윤기가 말했다.



"…어머니."



 지민이 헙,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금세 내리긴 했지만 놀란 안색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렇게 개인 병실 안에 법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구도 생겼다. 가해자와 피해자, 그리고 피해자의 부모. 중년 여성은 꼿꼿한 걸음거리로 지민이 앉아있는 간병인석에 다가왔다.



"몸은 어떠니."



 중년 여성이 말했다. 고저 없는 목소리였다. 윤기는 마찬가지로 무던하게 보고했다. 네. 수술도 성공적으로 끝났고 양호해서 3주뒤쯤이면 퇴원도 가능하다고 들었어요. 그렇군. 응급처치가 좋았나 보구나. 프로그래밍된 로봇들의 대화 같았다.



"어머니는 어떻게 오셨어요."



 그의 모친은 해외에서 기업을 운영 중이었다. 한국에 들리는 건 1년에 두세 번이 전부였다. 고등학교 때부터 윤기는 그녀를 본 기억이 흐릿했다.



"병원에서 쓰러진 채 실려왔다고 연락 받았다."

"그런 것도 연락이 가나 보네요."

"올해 너한테 받은 연락보다 많이 왔더구나."

 


 올해 윤기는 단 한번도 가족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유전자의 특성인 건지 신기하게 누구도 서운해하지 않았다. 언젠가 윤기의 가족을 만났던 남준은 그들을 사막이라 표현했었다. 중년 여성의 시선이 불안하게 눈동자를 흔들고 있는 지민 쪽으로 옮겨갔다.



"이쪽 학생은."

"안녕하세요, 박지민이라고 합니다. 전…."



 지민이 머뭇거렸다.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었다. 제가 바로 댁 아드님의 머리와 팔을 부숴놓은 장본인입니다….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이는 몇 존재하지 않을 터였다. 그래도 지민이 답하려 입을 연 찰나, 대답은 지민이 아닌 윤기에게서 나왔다.



"다친 절 발견해서 병원으로 옮겨준 애예요."



 지민의 눈이 살짝 커졌다. 윤기는 여전히 지민의 눈도 바라보지 않고 있었다.



"큰 도움을 주었군요. 고마워요, 학생."

"아, 아니에요.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걸요…."



 지민의 목소리가 뒤로 갈수록 작아졌다. 잠시간 지민을 빤히 바라보던 중년 여성은 다시 윤기를 바라보았다. 아들의 무뚝뚝한 얼굴과 어쩐지 당황하는 듯한 학생의 얼굴. 잠시간 침묵하던 그녀는 곧 그쪽으로 더 관심을 두지 않고 다른 화제를 꺼냈다.



"그 팔은 어떻게 할 거니. 이번 방학 때 참여할 프로젝트는."



 윤기는 이번 방학에 모친의 회사에서 꽤나 비중 있는 프로젝트에 참여 예정이었다. 모친의 회사는 해외에서도 꽤나 알아주는 서버 시스템 개발 업체였다. 국내 기업에서 야근하며 썩어갈 의사가 전혀 없으므로, 해외 기업을 겨냥하고 있는 윤기의 입장에서는 아주 좋은 포트폴리오였다. 작살난 노트북에도 이번 프로젝트를 위한 자료가 꽤나 모여있었다.



"다른 팀원들한테 피해 안 가게 할 수 있습니다."

"그 한 팔로는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만."



 윤기는 반박하지 못했다. 이 몰골이라면 남들 두 배의 시간을 들여가며 작업에 매달려야 겨우 성과가 나올 터였다. 애초 기본 의식주 생활조차 불편했다. 양치며, 식사며. 효율과 결과를 중요시하는 모친의 입장에서는 마음에 들지 않는 게 당연했다. 망했군.



"그렇네요. 어쩔 수 없…."

"괜찮으면 제가 도와드려도 될까요?"



 지민이 튀어나왔다. 중년 여성과 윤기의 시선이 지민을 향해 겹쳤다. 지민이 발표하듯 자그맣게 손을 들고는 이야기했다.



"불편하신 동안 제가 윤기, 어…혀, 형의 팔이 되어드릴게요."

"…지민 학생이 말인가요?"

"네. 저도 방학이라 시간이 많아서…괜찮을 거예요! 간병인 역할도 하고요."



 윤기는 방금 지민이 내뱉은 말을 해석했다. 그리하면 주기적으로 지민이 이곳에 온다는 것. 당황스러운 한편 쿵쿵 심장이 뛰었다. 저도 모르게 이불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윤기의 모친은 곁눈질로 아들의 모습을 확인했다.


 그녀는 병실에 입장한 뒤 처음으로 씨익 웃었다. 윤기도 몇 번 본적 없는 미소였다.



"다행이구나. 이렇게 윤기 곁에 착한 동생이 있어서."

"……."

"그래요. 지민 학생, 우리 윤기 좀 잘 부탁할게요."

"네! 맡겨만 주세요."



 지민이 당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형은 제가 책임질게요."

"……."

"잘 부탁 드려요, 형."



 지민이 윤기에게 손을 내밀었다. 집채만한 과일바구니와 꽃다발을 들고 오다 떨어뜨린 게 이해 갈 만큼 작은 손이었다. 윤기를 보며 초롱초롱 빛나는 눈은 감동과 기대로 잘 버무려져 있었다. 윤기는 얼결에 그 손을 맞잡았다. 작지만 아주 따뜻했다.






***






 박지민은 꼬박꼬박 윤기의 병실에 출석했다. 맡겨달라고 했던 말이 그저 빈말이 아니었던 거다. 윤기는 매일같이 하던 게임 대신 지민을 구경했다. 이 좁은 병실에서 할 게 뭐가 있다고 아주 부지런히도 움직였다. 꼭 어떤 사명감에 가득 차서. 청소는 물론, 냉장고 정리, 시트 정리. 호텔리어마냥 바쁘게 돌아다닌 후, 식사시간이 되었을 때다.


 윤기가 밥숟갈을 뜨자마자 지민이 앗! 하며 달려왔다. 잠시만요. 그러더니 대뜸 젓가락을 하나 가져와 장조림을 윤기의 수저 위에 올려놓았다.



"자요."

"……."



 양로원인가? 얜 뭐지? 윤기는 숟갈을 내려보기만 했다. 윤기가 먹지 않고 있으니 지민이 염려하며 친절하게도 물었다.



"장조림 안 좋아하세요? 다른 걸로 올려드릴까요?"



 남준이 봤다면 기함할 장면이었다. 남이 얹어주는 반찬을 얌전히 앉아서 먹고 있는 민윤기라니. 윤기는 슬쩍 숟갈을 아래로 내렸다. 부담스러운데. 그만 해줄래. 그렇게 말하려 했으나, 지민을 본 순간 그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또 묘한 간지러움이 전신을 휩쓸었다. 급히 휙 고개를 돌리고 숟갈을 입안에 쑤셔 넣었다.



"너무 잘했어요! 골고루 먹어야 돼요. 그래야 어서 튼튼해지죠."

"……."

"다음에는 뭐 올려드릴까요."



 지민이 5살 아이 다루듯 윤기를 흐뭇하게 보며 젓가락을 들고 대기했다. 이유식 먹는 신생아. 아니면 병원 다녀와서 사료 주는 주인. 그런 것들을 떠올리며 윤기는 묵묵히 밥 숟가락질을 했다.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르게.


 박지민은 그 이후에도 민윤기를 알뜰살뜰 챙겼다. 하나같이 민윤기가 기함하는 행위들의 연속이었다. 어느 날은 옆구리에 노트북을 끼고 들어왔다.



"이게 뭐야."

"형 노트북 부숴졌잖아요. 그래서 사왔어요."



 안타깝게도 윤기의 노트북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버렸다. 노력 덕분인지 파일만 대충 백업할 수 있었다. 지민은 연영과로부터 이야기를 전해 들은 건지 윤기가 요구하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사온 것이다. 윤기는 노트북의 사양을 확인했다. 전부 다 올해 최신으로 나온, 하나같이 값비싼 부품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지민이 슬쩍 노트북을 매만지는 윤기를 향해 넌지시 말했다.



"어때요…?"

"괜찮긴 한데."

"정말요? 다행이다."



 지민이 방긋 웃었다. 따지면 원래 가지고 있던 노트북보다도 좋았다. 가격이 꽤 나갔을 텐데. 아무리 봐도 평범한 대학생으로 보이는 지민의 통장 사정이 염려되었다. 300만원정도 나갔을 텐데, 어지간한 대학생이라면 영혼을 갈아 만든 돈일 거였다.



"얼마 줬어?"

"이거요? 얼마였더라. 육백인가? 칠백?"

"뭐라고?"



 부러진 팔로 짚고 일어날 뻔했다. 다시금 비틀거리는 윤기에게 지민이 헐레벌떡 다가갔다.



"괜찮아요? 큰일날 뻔 했어요. 형 아직 무리하면 안돼요."

"육백? 대체 뇌를…."



 어디다 놨어. 미쳤어? 호구냐? 튀어나오려던 말은 순수 그 자체로 눈을 깜빡거리는 지민을 보고 쏙 들어갔다. 윤기는 답답해지는 마음을 눌렀다.


 얘 대체 이 험한 세상 어떻게 살아가려고. 지민이 이만저만 걱정되는 게 아니다. 큰일은 자기한테 난 줄도 모르고. 호구를 잡혀도 이렇게 잡히는 사람은 처음 봤다. 가능한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어디서 산 건지는 모르겠는데, 일단 당장 다시 찾아가. 환불해달라고 하고 혹시라도 썼다거나 뭐라고 하면서 안 해준다고 하면 나한테 전화해. 이 가격 완전히 말도 안 되는 거고, 하, 등쳐먹을 게 없어서 어디 애 돈을."



 윤기는 작게 씨근거리며 분노했다. 어차피 다리 다친 건 아니니 직접 가서 따질까? 이렇게 작고 착한 애는 무시당할 수도 있다. 남일에 관심이라고는 쌀 한 톨만치도 없던 민윤기는 본인 일마냥 분노했다. 서늘하게 굳어진 인상이 다소 싸늘했다. 그러다 윤기는 문득 지민이 조용하단 사실을 깨달았다. 놀랐나. 크흠, 헛기침을 했다.



"…왜."

"형 정말 귀엽네요."



 물끄러미 윤기를 바라보던 지민이 작게 눈꼬리를 휘며 웃었다.



"제 걱정 해주시는 거예요?"



 일순 사레 걸린 윤기가 거친 기침을 했다. 형! 지민이 물컵을 챙겨 들고 윤기의 곁에 다가가 앉았다. 윤기는 물 한잔을 마시고 간신히 진정했다. 그러나 생체반응은 진정되지 않았다. 심장은 터질 듯 뛰었고 귀 끝은 붉어졌다.



"얼굴이 빨개요, 형. 괜찮아요? 선생님한테 연락해야 하나."

"괜찮아."



 윤기는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은 심장에 얌전히 다시 침대에 누워 지민으로부터 등을 돌렸다. 다행히도 고장 난 로봇마냥 멍 때리던 처음보단 대처 방법이 늘었다. 박지민을 이렇게 안 보고 있으면 진정이 된다.



"잠깐 쉬면 돼."

"…정말요?"

"어. 넌 가서 꼭 환불 받아와라. 지금 가."



 지민이 머뭇거리며 윤기의 곁에 머물렀다. 열 나는 건 아니죠. 윤기는 다 괜찮으니 피곤하다는 말을 무기로 잠든 척을 했다. 그럼 내일 또 올게요. 지민이 나가며 문을 닫히는 소리가 나자마자 벌떡 일어나 앉아 이마를 짚었다. 온몸에 퍼진 기현상 중 최고라 할 만하다.


 그러나 어쩐지 싫은 기분은 아니었다. 윤기는 지민이 나간 문을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두근거리는 가슴을 끌어안고 베개에 머리를 뉘였다. 형 정말 귀엽네요, 귀엽네요. 잠들 때까지 그 말이 이명처럼 퍼졌다.






***






 민윤기는 박지민이 베푸는 친절들이 좋았다. 박지민은 따뜻하고, 웃을 때 귀엽고, 쫑알거리는 목소리도 귀여웠다. SNS에서 핫하게 돌아다니는 반려동물 영상보다 박지민을 볼 때 윤기는 웃음이 자주 나왔다. 과일의 살을 반절 이상 덜어내며 껍질을 깎는 것도 귀여웠고, 윤기의 프로젝트를 도와준다며 노트북으로 집중할 때 튀어나오는 부리 같은 입술도 귀여웠고, 말할 때마다 꺄르르 뒤로 넘어가며 웃는 것도 귀엽고, 형은 어떻게 그렇게 잘 아냐며 댕그랗게 뜬 눈도 귀여웠다. 그러니까 그냥 숨 쉴 때마다 귀엽단 이야기다.


 윤기는 남을 위한 선의의 거짓말도 처음으로 해보았다.



"혹시 음식 뭐 좋아하니."

"저요? 어지간한 거는 다 잘 먹는데…김치볶음밥 좋아해요! 돈까스랑."

"나도 그거 좋아하는데. 통했네."



 순 거짓말이다. 민윤기의 취향과는 딴 판이었다. 먹고 살 수 있는 수준으로만 삶을 연명하며, 학기를 다니는 와중에는 맛 없다고 소문난 학식도 잘도 입안으로 쑤셔 넣었다. 남준은 진짜로 기계에 연로 넣듯 먹지 말라고, 그냥 음식물이기만 하면 되냐며 윤기를 보고 혀를 차기도 했다. 그나마 좋아하는 음식이라고 하면 술이었는데, 50도가 넘어가는 독약 같은 것들이었다.



"진짜요? 그럼 나중에 형 퇴원하면 같이 밥 먹으러 가요. 저 단골가게 있는데 거기 김치볶음밥 진짜 진짜 맛있거든요. 계란도 올려주시는데 그것도 너무 맛있어요."



 퇴원 후에도 만날 수 있는 빌미가 있다니. 윤기는 이야기를 꺼내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만날 수 있는 끈을 더 만들고 싶다.



"돈까스는 나 잘 만드는데…."



 자기자랑 같긴 했지만 사실이다. 레시피만 보고 따라 하면 되는 요리 분야에서는 전문가였다.



"형 요리도 할 줄 알아요? 대박."

"뭐…엄청 잘하는 건 아닌데, 그냥 내입에는 맛있어."

"저 다음에 그럼 꼭 초대해주세요!"



 지민이 너무 좋아하며 윤기의 곁에 찰싹 달라붙어왔다. 또 다른 건 어떤 거 만들 줄 알아요? 전 예전부터 요리 잘하는 사람들이 너무 대단했어요. 멋있다며 치켜세워주는 지민의 리액션에 윤기는 자꾸만 솟아오르는 광대를 가라앉혔다. 별 거 대단한 것도 아냐. 술은 좋아하니. 식성을 묻는 취향의 대화가 끝나있을 때 그들이 잡은 약속은 무려 5개였다. 윤기는 아주 만족했다.


 민윤기의 머릿속은 이제 박지민으로 도배되었다. 비합리적이라며 스스로를 돌아볼 땐 언제고 한번 고삐를 놓으니 진도는 아주 빨랐다. 하루 종일 지민이 병실로 들어오는 시간만 망부석처럼 기다렸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벌떡 일어났다. 꼭 멀리 떠난 주인을 현관에서 반기는 고양이마냥.


 하루는 병문안으로 찾아온 남준이 들어왔었는데, 그는 아주 기막혀하며 윤기에게 따져 물었다. 대체 그 노골적으로 실망한 표정은 뭡니까, 형님. 저 병문안 처음 온 거거든요? 양손 가득 들고 온 음료수를 내려놓은 남준이 억울해했다. 윤기는 금세 시큰둥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네가 안 반가운 건 아냐. 남준이 날카롭게 포인트를 짚었다. 실망은 했단 거네요. 윤기는 느릿느릿 남준이 사온 음료수 박스를 보는 척했다. 오 맛있는 거 사왔네. 배 음료. 이거 맛있더라. 수상하다며 누구를 기다린 거냐 캐묻는 남준에게 윤기는 어물쩡 대답을 넘겼다. 대충 있어. 그리고 기다린 거 아니다.


 지민은 꼬박꼬박 윤기의 병실을 들렸지만, 간혹 방문하지 못하는 때도 있었다. 가족과 저녁 약속이 잡힌다거나, 친구와 잡아놓은 약속 때문이다. 오늘은 일이 있어서요. 죄송하다며 전화를 걸어온 지민에게 윤기는 괜찮다고 했다. 윤기도 알고 있었다. 출근하듯 매일같이 오는 게 쉽지 않은 일이란 걸.


 너무 걱정 마. 나 원래 혼자 있는 시간 원래 좋아해. 그렇게 말했으면서도 끊어놓고 나니 윤기는 왠지 모를 헛헛함을 느꼈다. 지민이 오면 보려고 노트북에 찾아놨던 영화 리스트도 껐다. 전부 9점대로 끝내주는 액션이 담겨있어 볼만하다고 느꼈는데, 지금은 세상 지루했다. 이딴 영화를 팔아먹는 새끼들은 양심이 있나.


 원래 혼자 뭐했지? 과거에는 어떻게 살았는지 기억이 안 난다. 무슨 재미로…. 꼭 남준의 말대로 된 것 같았다. 처음으로 감정을 배운 로봇 같은. 결국 윤기는 무표정으로 노트북을 켜 프로젝트 관련 코딩을 시작했다. 시간은 그럭저럭 잘 갔지만 헛헛함은 여전했다. 작업을 하는 와중에도 종종 메시지 창을 확인했다. 혹시라도 누군가로부터 연락이 올까 봐.


 띠링! 알람이 울리자마자 윤기는 폰을 냉큼 집어들었다.


[(광고)올해 특가 SALE! 망개떡 10세트!]



"……."



 더 기운이 빠졌다. 윤기는 노트북을 아예 닫아버리고 침대에 누워버렸다. 어느새 밖은 꽤 깜깜해져 있었다.



"……."



 잠자기 전에도 오직 한 사람 생각밖에 없었다. 행성 다큐멘터리를 1시간이나 봤는데도 전혀 집중이 안됐다.


 윤기는 지민과의 메시지 창을 켰다. 난생처음 남의 프로필 사진을 뒤져보았다. 만든 직후 기본 프로필 사진에서 단 한번도 바꾼 적 없는 민윤기와 달리 지민의 프로필 앨범은 풍성했다. 어릴 적 사진, 친구들과 찍은 사진, 남이 찍어준 듯한 사진. 아주 가득했다.


 어렸을 때도 똑같이 생겼네. 유난히 오동통한 입술을 보며 윤기는 저도 모르게 실실 웃었다. 생긴 게 이때부터 귀엽다. 친구들과 같이 찍은 사진을 봤는데, 거기서도 지민은 튀었다. 활짝 웃고 있는 미소에서 유난히 애굣살이 통통하다. 처음 봤을 때처럼 우유에 담갔다 뺀 떡같이 말랑해 보였다. 지민만 확대해서 보던 윤기는 한참 뒤에야 그 사진에서 태형도 발견했다. 어렸을 때부터 친했나. 태형은 확대하지 않고 1초만에 다음 사진으로 넘겨버렸다.


 간혹 김태형이 등장하긴 했지만 지민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매번 얼굴이 바뀌었다. 친구가 많군. 한참을 구경하던 윤기는 다시금 헛헛함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자신은 하루 종일 박지민 생각밖에 안 하는데, 박지민은 이렇게 많은 사람들과 계속 어울릴 것이다.



"……."



 뭔지 모르게 불만족스럽다. 윤기는 엄지손가락을 자판에 올렸다. 그러나 그때부터 난관이 시작되었다.


 밥 먹었니. 밤 9시에 누가 그딴 안부를 묻겠는가. 뭐라고 보낼지 고민됐다. 자니, 뭐해. 새벽 두 시 구남친의 전형적인 메시지라며 치를 떨던 연애 프로그램의 패널 멘트가 순간적으로 윤기의 머릿속을 관통했다. 그런 것들은 다 빼고. 자체심의평가는 냉정하게 진행되었다. 그렇게까지 신경 쓰는 티는 내지 않고 무난하게 연락할 수 있는 그런….



"…존나 어렵네."



 시를 쓰는 인간들은 대단한 놈들이다. 언어가 이렇게 어려운 것이었나. 머리가 터지기 직전이다. 때려친다며 폰을 대충 던지려 했을 때였다. 엄지손가락이 자판을 잘못 눌렀다.



[ㅗ]



 윤기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급하게 메시지를 삭제하려는데 마음만 급하다 보니 손이 허둥지둥 움직였다. 겨우 삭제버튼을 찾아 눌렀을 때, 비슷한 타이밍으로 옆에 떠있던 1이 사라졌다.



"…씨발."



 봤나? 아. 윤기는 일이 더 커지기 전에 솔직하게 썼다.



[아 잘못 눌렀네 미ㅇ앙]

[미안]



 지민에게 바로 답장이 왔다. 다행히도 지민은 크게 괘념치 않는 듯했다. 오히려 천사처럼 물어왔다.



[형님 뭐 필요한 거 있어요?ㅎㅎ]

[아니]

[그럼 심심해요?]



 심심한가? 사실 하려고 하면 할 일은 많다. 혼자서도 원래 매우 잘 논다. 그저 한 가지 일을 하고 싶을 뿐이었다. 지민과의 대화. 솔직하게 쓰기는 좀 민망해서 약간 가공했다.



[뭐 그냥 할 게 조금 없네]



 잠시 답이 없던 지민은 비보를 전해왔다.



[근데 어떡하죠]

[저 일 있어요ㅜㅜ]



 지민이 눈물을 흘리는 병아리 이모티콘을 보냈다. 꼭 써도 자기 닮은 걸 쓴다. 윤기는 픽 웃었다.



[딱히 와달라는 건 아니었어]

[이 시간에 무슨]

[일이 더 중요하지 집은 갔어?]



 지민은 집에 도착하려면 한참 멀었다고 설명했다. 가족들과 오랜만에 가진 외식이 먼 곳까지 나왔단다. 피곤하겠네. 도착해서 푹 쉬어. 더 지민을 귀찮게 할 수 없어 대화는 내일 보자는 말과 함께 흐지부지 끝맺었다.



"……."



 윤기는 침대에 다시금 누워도 잠은 오지 않았다. 아까 본 박지민의 프로필 사진들이 아른거렸다. 존나 귀여웠는데….


 새삼 병실생활을 하고 있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딴 환자복은 그만 입고 지민의 친구들처럼 박지민과 다른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같이 밥 먹고, 영화관도 가고, 여행도 가고…근데 나 왜 또 박지민만 생각하냐.



"……"



 병실이 외롭게 느껴졌다. 외로움이라곤 머리털 나서 느껴본 적도 없는데. 인간은 혼자 태어나서 혼자 죽는다. 그것이 윤기의 철학이었다. 깊은 한숨을 쉬며 다시 우주 다큐멘터리나 켰다. 명왕성의 공전주기 설명이 나올 때였다. 똑똑, 누군가 문을 두들겼다.



"네."



 자발적 아싸 민윤기에게 찾아온 사람은 딱 셋이었다. 박지민, 간호사, 그리고 한번 찾아온 김남준. 박지민은 일이 있으니 당연히 간호사일터였다. 이 시간에 검사는 다 끝났을 텐데. 윤기는 의아해하면서도 일어나 앉았다.



"들어오세요."



 문이 드르륵 밀렸다. 그리고 들어오는 건. 



"왜 이렇게 힘 없이 앉아있어요."



 지민이 편의점 봉투를 한 손에 달랑달랑 끼고 사뿐하게 들어왔다. 윤기는 얼이 빠져 멍하니 입을 벌렸다. 아까 바쁘다고…. 지민은 멍청한 윤기의 표정을 보고 맑은 웃음을 터뜨렸다. 아 형 왜 이렇게 웃긴 얼굴 해요.



"그냥 형 보고 싶어서 중간에 뛰쳐나왔어요. 잘했죠."

"……."

"나 안 반가워요?"



 지민이 윤기를 쿡 찔렀다. 윤기가 어정쩡하게 끄덕였다. 반갑지, 그렇지 반갑지. 미묘하게 시선을 피하는 윤기에 지민이 킥킥 웃었다.



"온 보람이 있네에."



 애교 있게 말끝을 늘리며 지민이 윤기의 침대로 가까이 다가오며 방싯 웃었다. 우리 같이 영화 봐요. 형이 보구 싶다고 햇던 거. 윤기는 삐그덕거리는 나무 인형처럼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그래.







 윤기는 꿈인지 현실인지 모호해지는 기분이었다. 노트북을 만지작거리는 지민을 뒤에서 흘끔거렸다. 갑자기 봐서 그런지 심장이 떨어질 뻔했다. 아직까지도 쾅쾅거리는 건, 뭐, 너무 놀라서 그런 건가. 마우스를 달칵거리던 지민이 윤기를 불렀다.


 

"형 이거 이렇게 하는 거 맞아요? 왜 안 되지."

"해줄게. 나와볼래."

"넹."



 지민이 히히 웃으며 침대에 앉았다. 윤기의 손길 몇 번에 영화가 재생되었다. 영화는 윤기가 골라놓은 액션 스릴러였다. 주인공이 납치된 도시에서 탈출하는 스토리로 다소 깜짝깜짝 놀라는 장면들이 있다고 했다. 영화사 로고가 화면에 커다랗게 떴다. 지민은 사온 편의점 봉투에서 부스럭거리며 팝콘과 음료를 꺼냈다.



"소주? 맥주?"

"…나 환자인데."

"당연히 농담이죠. 병원에서 누가 술을 마셔요. 여기 콜라."



 지민이 캔 콜라를 윤기의 손에 쥐어주었다. 장난스레 배시시 웃은 지민이 곧장 영화 화면에 집중했다. 저 병원에서 영화 보는 건 처음이거든요. 반면 윤기는 도통 영화에 집중할 수 없었다. 앞에서 아무리 시끄러운 타격음이 터져도 옆만 흘끔거리며 봤다. 지민은 팝콘 통까지 바짝 쥐어가면서 긴장하고 있었다. 얘는 대체 뭘까.


 이 야밤에, 정말 그냥 내가 보낸 문자 하나로 내 옆에 있다고? 그것도 내가 보고 싶어서 뛰쳐나왔다고? 얘는 그런 말이 그냥 일상 언어인가? 혼란스럽다. 천둥이 치고 전쟁이 터진 민윤기의 속과 다르게 박지민은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윤기는 스스로를 다잡았다. 순수한 애를 상대로 무슨. 그냥 박지민은 다정하고 착한 것뿐이라고.



"형…이거 영화 무서운 거예요?"



 영화를 보던 지민이 곁에 조금 더 붙으며 자그맣게 속삭였다. 팝콘통이 부숴져라 꼭 쥔 채였다. 어? 윤기가 버벅거리며 답했다.



"액션이 비중이 높다고 했는데. 잔인해서 성인물이라고만 했어."

"아…."

"왜. 너 무서운 거 못 봐?"

"아니, 뭐 굳이 찾아보지는 않는데 그래도 그렇게 못 보는 건 아닌, 아악!"



 사건은 순식간에 일어난다. 화면에서 침묵하던 주인공의 위로 칼을 든 적이 튀어나왔다. 대답하며 화면에 집중하던 지민이 비명을 지르며 팝콘을 던졌다. 하얀 알갱이들이 흩뿌려지는 건 물론, 침대에 놨던 콜라까지도 윤기의 옷 위로 쏟아지고 말았다. 대참사였다. 지민이 으아아, 작은 비명을 지르며 휴지를 득득 뽑아왔다.



"형 죄송해요. 아 어떡하지. 옷 벗어볼래요?"



 병원복이 흠뻑 젖었다. 지민은 휴지로 윤기의 바지를 닦아주는 것만 생각했다. 윤기는 유난히도 너그러워졌다.



"괜찮아. 실수할 수도 있지."

"미안해요. 일만 치고. 이러려고 온 게 아닌데. 많이 끈적해요?"

"아냐. 괜찮아. 아냐, 지민아."



 허벅지 위를 작은 손이 자유분방하게 돌아다녔다. 안쪽 허벅지며, 위며, 근육이 다 느껴질 만큼 바쁘게. 일순 아랫배 쪽이 서늘해지는 위화감에 윤기가 다급히 지민을 막았다.



"됐어. 별 거 아냐. 손 떼."

"그치만 형 옷이, 휴지 더 뽑아올게요."

"아니, 손 떼보라고."

"지금 안 닦으면 끈적거려서…."

"잠깐, 박지민, 손!"

"네?"



 지민이 윤기의 격한 반응에 어리둥절히 손을 뗐다. 그러나 문제는 그 다음에 발생했다. 급하게 움직이던 작은 몸이 비틀거리며 넘어질 뻔하다가, 간신히 윤기의 허벅지를 붙잡고 버텼다. 윤기는 잠시 숨 쉬는 법을 잊었다. 이 반갑지 않은 느낌은, 그러니까 지금 절대 들어서는 안 될 이 느낌은.



"휴 넘어질 뻔…."



 안도의 숨을 내쉬던 지민이 급격히 말을 멈췄다. 지민과 윤기의 시선이 동시에 아래를 향했다. 윤기는 생각했다. 지금이야말로 대참사가 일어났다고.


 앞섶이 불룩했다. 



"……."

"……."



 씨발. 윤기는 죽고 싶었다. 당장이라도 병원 옥상으로 올라가 투신하고 싶었다. 병원복 사이즈가 그나마 널널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민망할 정도로 흉흉해 보이지 않았지만, 어쨌거나 결과는 매한가지였다. 세웠다, 씨발, 씨발. 억겁 같은 침묵의 형벌이 병실에 떨어졌다.


 그들 사이에서 끔찍한 정적이 흐르고 지민이 간신히, 정말 간신히 억지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아, 그, 어…괘, 괜찮아요! 이럴 수도 있죠 뭐. 같은 남자끼리."

"……."

"이해해요! 그러니까 그냥 생리적인 반응인 거잖아요?"

"……"

"손이 닿으면 그럴 수도 있죠. 그쵸. 저도 알아요."



 위로해줄수록 비참해진다. 민윤기가 평생 겪은 일 중 가장 쪽팔렸다. 아무리 위로해도 윤기의 낭패 섞인 안색이 나아질 줄 몰랐다. 효과가 없으니 급기야 지민은 아무 말이나 막 던져댔다. 원래 저 잘 잊어요. 내일이면 아무것도 기억 안 나요. 사실 아까 먹은 콜라에 알코올이….



"정말 괜찮다니까요 형! 저도 원래 아무나 남의 손 닿으면 자주 그래요. 시도 때도 없이 그냥…."

"…뭐?"

"…네?"



 지민은 스스로가 무슨 말을 한지도 모르는 표정으로 눈을 끔뻑거렸다. 윤기의 안에서 다른 감정이 발작적으로 깨어났다. 아무나? 순간적으로 욱한 그는 단호히 말했다.



"난 아무나도 그냥도 아니야. 너니까…."


 

 윤기는 말끝을 흐렸다. 다시금 침묵의 바다에 병실이 잠겨버렸다. 이번에는 수습도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그나마 아까 수습하고 나섰던 박지민도 지금은 입을 살짝 벌리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 점점 목부터 얼굴이 발갛게 분홍빛으로 달아오른다. 민윤기 얼굴도 마찬가지였다. 엎질러진 물에서 그들은 헤엄쳤다.



"……."

"……."



 윤기가 한숨을 쉬며 입을 달싹이는데, 노크소리가 들렸다. 지민이 냉큼 일어났다.



"자, 잠깐만요! 지금 가요!"



 구세주는 간호사였다. 옆 병실에서 소란스럽다고 문의가 왔거든요. 자제 좀 해주시겠어요. 지민이 대답했다. 아 죄송해요. 주의하겠습니다.


 항의하러 온 간호사가 떠나고 지민은 다시금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왔다. 어색한 침묵은 그대로 있었지만, 아까만큼 숨이 졸려 죽을 만큼은 아니었다. 지민이 운을 뗐다.



"저…전 이만 가볼게요. 시간이 많이 늦어서…."

"어, 그래, 가봐야지."

"다음에 올 때 연락할게요. 잘 자요!"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지민이 평소의 인사를 남기며 떠났고, 윤기는 배웅했다. 그러나 아직도 둘의 얼굴에는 은은한 홍조가 깃들어 있었다.






***






 모든 배움은 처음이 느리다. 누가 그리 말하지 않았는가. 시작이 반이라고. 민윤기는 마침내 깨우쳤다. 느리고 느린 걸음마 단계를 거쳐, 인간의 말을 처음 배운 로봇 상태를 지나, 완전한 그의 감정 상태를. 분노도 아니고, 단순히 애완동물 영상 보듯 귀여운 호감도 아니고, 여타 다른 동생들 대할 때와는 다른 이것은. 남준과 봤던 그 영화에서 나오는 대사처럼.


오, 이것은 사랑!



"……."


 콜라 대참사 이후 확실해졌다. 민윤기가 사랑을 한다. 사람은 다소 원초적인 동물인지라, 제 신체 변화에서 오는 반응을 보고 알아차렸다. 원래부터 성에 담백한 편이었으니. 그는 정말 단순히 허벅지 언저리에 손 하나 닿았다고 벌떡벌떡 세우는 미친 새끼가 아니었다.


 결과는 찾았다. 그러나 민윤기가 갈 길은 멀다. 아니, 아예 길이 보이지가 않았다. 윤기는 폰을 들고 앉아 손톱만 까득까득 씹고 있었다. 왜냐하면 지민에게 연락할 모든 말들이 삭제됐기 때문이다. 원래부터 말을 고르기 어려웠는데, 제 치부를 보여주고 난 뒤부터 언어실력은 더 처참해지다 못해 바닥을 기었다.


 윤기는 지민에게 건넬 인사말 후보를 추렸다.



(안녕)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이딴 식으로 보내는 건 기억상실증 정도는 걸려줘야 한다.

(그때는 내가 잠깐 미쳤었고 네 말대로 손 닿으니까….) 성욕에 미친 씹새끼가 되기 싫었다.

(언제와? 안 온지 한참 됐는데) 진짜로 박지민이 간병인도 아니고….

(날씨가 요새 많이 춥지?) 스팸인 줄 알고 차단할지도.



 다 마음에 안 든다. 모든 글을 다 지워버린 윤기는 토독토독 자판을 두들겼다. 제일 진심이 담긴 말.



(보고 싶어)



 그러나 발송은 못하고 메모장에만 써둔 채 폰을 껐다. 만나고는 싶고, 그런데 어떻게 해야 할지는 모르겠고. 윤기는 한 자리에서만 백 번이 넘는 한숨을 쉬었다. 벌써 지민으로부터 연락이 안 오고 못 본지 일주일이 넘어가고 있었다. 놀라긴 놀랐을 거다. 심장이 떨어지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혹시라도 박지민이 자길 멀리하진 않을까 고민도 됐다. 끔찍하다. 혼자만 껄떡대는 양심 없는 놈은 되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까인 채 예전의 생활로 돌아갈 자신이 없었다.


 병원에는 정기적인 의사와의 상담 시간이 있었다. 의사가 윤기를 호명했다.



"민윤기씨."

"네."

"오늘 컨디션은 어때요?"



 한번 더 입원해야 할 것 같은데요. 속으로만 대답하며 힘없이 누워있던 윤기는 의사의 부름에 간신히 일어났다. 의사는 누가 봐도 초상집을 치르고 온 것 같은 윤기의 얼굴을 보며 걱정을 해주었다. 혹시라도 집안에 무슨 일이 생긴 건가요. 아닙니다. 멀쩡해요. 100년은 건조시킨 두부처럼 생기 싹 빠진 얼굴로 꾸역꾸역 답은 한다. 의사는 윤기 모르게 혀를 찼다. 수많은 환자를 진료 보았지만 이런 얼굴을 한 사람들을 알고 있었다. 차였나보군.


 윤기의 몸을 확인한 의사는 긍정적인 소식 역시 들려주었다.



"회복력이 엄청 좋으시네요. 이제 퇴원하셔서 가끔 병원 오면 될 거 같습니다."

"…그런가요."

"네. 매일 오던 보호자 분께도 좋은 일이겠어요."



 늘어져있던 윤기가 팔딱 깨어났다. 이거다. 의사가 흠칫 놀랐다. 갑자기 생기가 도네. 의아해하면서도 그는 좋은 일이라 생각했다. 환자가 튼튼해졌으니 말이다.






 윤기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퇴원수속을 밟으러 내려갔다. 병원 직원은 윤기의 호실을 보더니 곧장 처리를 완료해주었다. 네, 이제 바로 퇴원하시면 됩니다. 시원하게 나오는 대답에 윤기가 고개를 갸웃했다.



"병원비는요."

"이미 완납되어 계세요."

"저는 낸 적이 없는데요."

"보호자 분께서 내주셨어요."



 어머니는 아닐 터였다. 이미 모친은 윤기에게 카드를 내민 뒤 알아서 필요할 때 사용하라 했다. 불현듯 600만원짜리 노트북을 사기 당해서 해맑게 들고 들어오던 박지민이 떠올랐다. 어찌어찌 환불은 완료했는지 다음날 200만원짜리를 사 들고 온. 윤기는 지민을 걱정했다. 1인실이면 한두 푼인 게 아닐 텐데. 그의 머릿속에선 이미 누구 때문에 머리가 터졌는지 남아있지 않았다.



"혹시 병원비 환불하고 다시 내는 거 가능한가요."

"네?"



 직원은 어리둥절하게 반문했다. 윤기는 주장했다.



"제가 내고 싶어서요. 보호자가 저 몰래 낸 거예요."

"아니, 내실 필요 없으세요."

"환불이 안 된다는 건가요?"



 직원은 환불만 외쳐대는 윤기를 기이하게 취급했다.

 


"보호자분이 병원장님 조카신데, 이미 병원장님께서 처리해주신 건이라 낼 필요 없으세요."

"…네?"



 윤기는 어벙하게 되물었다. 박지민이 병원장 조카라는 게 무슨 말인가. 일단 그는 자신을 이상하게 바라보는 직원에게 인사를 한 뒤 로비로 나왔다.


 새하얀 병원 복도를 내려보며 생각했다. 이 병원은 한국에서 손꼽히는 대기업의 계열사 중 하나였다. 그런데 조카라는 것은…. 600만원을 사기 당하고도 헤헤 웃던 박지민. 대학생으로서는 부담 되는, 몸집만한 꽃다발과 과일바구니를 들고 오던 박지민.



"……."



 어쩐지 경제관념이 그렇게 해맑더니만. 윤기는 헛웃음을 지었다. 짝사랑 상대가 현대판 왕자였네. 생각해보니 민윤기를 보자마자 박지민이 날린 첫 문장도 백마 탄 왕자님의 것이었다. 처음부터 너무나도 강력해서 또렷이 기억이 난다. 깨어나길 기다렸어요, 그리 말했지.


 윤기는 어깨를 으쓱했다. 뭔가 그간 있던 일이 약간은 다르게 느껴지긴 했지만, 결론은 변하지 않았다. 민윤기는 여전히 박지민을 만나고 싶다는 것. 그리고 퇴원이라는 좋은 명분이 생겼다는 것.


 윤기는 들뜬 걸음으로 로비를 가로질렀다. 그의 머릿속에는 긍정적인 미래가 조금씩 들어차기 시작했다. 퇴원이라는 말을 꺼냈는데 바로 역겹다고 화내진 않겠지. 어느 정도 대화를 하면서 물꼬를 트고 그날 일은 우연찮게 벌어진 해프닝일 뿐이라고 설명하면 된다. 다시 한걸음 한걸음 천천히 관계를 쌓아가다 보면 그 끝에는….


 지민을 잃은 지 일주일 만에 윤기의 눈빛에 불이 들어왔다. 당장 연락하고 싶어 주머니 안의 폰을 만지작거렸다.


 윤기가 엘리베이터를 타러 로비에 마련된 카페 앞을 지났을 때다.



"…어?"



 환자 슬리퍼가 뚝 멈췄다. 세모꼴의 눈이 더없이 커졌다. 카페 안에는 오매불망 윤기가 그리던 님의 얼굴이 있었다. 박지민. 그리고….


 찬찬히 윤기는 맞은 편의 남자를 살펴보았다. 그 남자 역시 윤기가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박지민 프로필 사진 속에 있던 친구 무리 중 한 명이 아니라 실제로 본 사람. 오피스텔 앞에서 지민과 다툼을 했던 애인.


 남자가 무어라 말했다. 그러자 지민이 미소를 보였다. 고른 치열이 드러나며 애굣살이 솟는 게 보인다. 멍청히 민윤기는 그 자리에 박힌 듯 서있었다.



"……."



 윤기는 천천히 주머니에서 손을 뺐다. 그는 더 지켜보지 못했다. 도망치듯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와 병실로 질주했다.


 바로 그날 윤기는 홀로 1인용 병실에서 퇴원했다.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고.






***






 박지민은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는 것에 모든 운을 다 썼다. 일상생활에서의 운은 한결같이 나빴다. 뽑기 게임마다 벌칙을 골랐고, 사는 물건마다 불량이 발견되는 건 예삿일이었으며, 여태 사귀었던 애인은 쓰레기라는 호칭이 아까울 정도의 폐차였다.


 최근 1년간은 운이 더욱 최악이었다. 굵직한 사건들만 해도 이렇다. 연초에는 운전연수를 하다 가벼운 접촉사고가 났으며, 중순에는 애인의 첫 바람 소식을 들었다. 연말에는 두 번째 바람 소식을 듣고 따지다가 애먼 사람의 뒤통수를 깨먹었다.


 나 방금…사람 죽였어? 머리가 피에 범벅이 된 채 눈 감고 있던 사람을 처음 봤을 때의 기분이란. 호러 영화의 주인공이 된 것마냥 피가 식는다는 게 어떤 말인지 알 것 같았다. 쓰레기 애인 따위는 보이지도 않았다. 괜찮아요? 어떡해. 눈물을 줄줄 흘리며 태형과 응급실로 달려간 일은 단연코 올해, 아니 박지민 인생 최악의 사건 어워드에서 1등을 차지했다.


 수술 끝나 붕대를 칭칭 감은 민윤기를 처음 본 날. 지민은 죄책감이 두 배는 더 커졌다. 안색은 거의 밀가루마냥 하얬고, 그는 아예 혼이 빠져나가 있었다. 여태 자신이 만난 사람 중 가장 똑똑하다며, 빅스비보다 똑똑하다고 태형이 치켜세웠던 모습은 단 한 군데도 보이질 않았다.



"삼촌이 상태가 나빠진 건 아니라고 하셨는데…태태 나 가도 되는지 물어봐 주라."

"야 지민아 안 된다니까?"



 태형은 태도를 싹 바꿨다. 결사반대. 조장 형 알고 보니까 무서운 인간이었어. 절대 전화로만 해. 아니면 너네 아빠 비서님한테 대신 가라고 해. 나는 친구 장례식에 가고 싶지 않아. 지민은 물음표를 가득 띄웠다. 처음 본 윤기는 절대 그렇게 생긴 인물이 아니었다. 그저 붕대를 둘러싼 다친 마시멜로 정도…. 그러나 태형은 강경히 말렸다. 겉모습에 속으면 안돼! 그 형 널 불에 튀겨먹을 기세였다니까?


 지민은 그럼에도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그래도 얼굴 보면서 사과해야겠어. 내가 잘못한 거잖아. 태형이 뚱한 얼굴을 했다. 네가 잘못한 게 뭐가 있냐. 따지면 바로 튀어버린 그 똥차새끼 잘못 아냐. 잠시 투덜거린 태형은 이내 굳은 다짐이 서린 지민의 눈동자를 보고 한숨을 쉬며 윤기에게 연락을 해주었다.


 두 번째로 만났을 땐 조금 긴장을 했다. 그 형이 한대 칠 기세면 무조건 도망가! 태형이 세뇌시켜놓은 말들 때문이었다. 그러나 민윤기는 중간에 찾아온 자신의 가족에게 지민을 감싸주었다. 저 도와준 애예요. 


 지민은 극심한 감동을 받았다. 김태형이 잘못 본 거다. 민윤기는 천사가 분명했다. 자기를 이렇게 만들어놓은 사람까지 포용해주는 진짜 천사. 어쩐지 그렇게 하얗더라니. 경계심은 눈 녹듯 사라졌다. 감정에 충실한 박지민은 솔직하게 표현했다. 제가 책임질게요. 정말 할 수 있는 건 뭐든 다 하겠다고 지민은 그날 다짐했다. 최선을 다해서 돌봐줘야지.


 그러나 본가에서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자란 박지민에게 간호는 어려운 것이었다. 해본 적이 있어야지. 독립도 최근에 했다. 저 이거 하는 법 알려주시면 안돼요? 본가의 일해주는 아주머니께 과일 예쁘게 써는 법을 배웠고, 환자에게는 어떻게 해줘야 하는지도 물어보았다. 가사도우미는 기억을 더듬으며 지민에게 가능한 꼼꼼히 알려주었다. 늦둥이로 얻은 8살 아들이 입원했을 적의 경험이 바탕이라는 건 지민도 몰랐다.


 지민은 꾸준히 병실 문턱을 드나들었다. 처음에는 분명 간호라는 사명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그저 윤기를 찾아가는 것이 즐거웠다. 그렇게 다니다 윤기가 이마에 칭칭 감았던 붕대를 푸는 날이 왔다.



"형 붕대 푸니까 잘생겼어요."

"그전에는 못 생겼다고 생각했나 봐."

"아이, 그런 말이 아니잖아요."



 지민은 시원하게 뻗은 윤기의 눈썹이 예쁘다고 생각했다. 칭찬을 해주니 슥 고개를 돌려버리는데, 그게 또 보기 좋았다. 귀끝이 살짝 붉은 게 보였다. 속으로는 좋아하는 거 같은데 왜 아닌 척을 하지. 이해할 수는 없는데 볼 때마다 좋았다. 언젠가 길거리에서 만난 츄르 달라고 바닥에 벌렁 드러눕는 고양이를 닮아 보였다.


 어느 날은 노트북 하나에 씩씩거리며 제 대신 걱정을 해주는데, 그게 그렇게 또 귀여워 보일 수가 없었다. 그런 윤기의 모습을 보자니 다른 이상한 것들도 마구 사서 가져오고 싶었다. 민윤기가 자신을 신경 써주는 게 너무 좋았다.


 지민은 온통 민윤기에게 집중했다. 친구들과의 연락도 빈도수를 줄였다. 어차피 태형을 제외한 나머지는 친구라는 말도 아까운 인간들이었다. 어쩌다 보니 과에 집안이 알려지게 됐는데, 그 이후 하나라도 말 붙이려 모여든 놈들이었으니. 금수저 물고 태어나서 싸가지가 존나 없더라. 그런 소문이 도는 게 귀찮고 싫어 어울려주던 것뿐이었다. 친구는 어렸을 적부터 친했던 김태형 하나면 충분했으니, 지민은 그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내버려두었다.


 가족모임이 있는 날에나 윤기와 만나지 못하는 게 아쉬울 뿐이었다.



"지민이는 그때 일 괜찮니."

"네. 잘 해결됐어요. 전혀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보상금은 가져가지 않는 게냐?"



 대기업의 수장이자 지민에게는 다정한 아버지였다. 윤기를 위해 마련된 보상금은 어마어마한 액수였다. 지민이 고민했다.



"잘 모르겠어요. 형이 그런 이야기만 꺼내면 됐다고만 해서…."

"진짜 신기한 인간이네."



 맏형이 의외라는 듯 언급했다. 보통 하나라도 더 빼먹으려고 안달이 나는데 말이야. 맏형은 혹시나 모른다며 그를 대비하여 변호사군단까지 마련해놓고 있었다. 한사코 지민이 그럴 필요 없다는데도 인간은 믿을 수 없다며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부르라 했다. 가만히 대화를 듣고 있던 어머니가 말했다.



"조만간 퇴원이라는 소식은 들었는데 언제 한번 같이 집에 오렴."

"네!"



 지민이 방긋 웃었다. 가족들 역시 윤기를 좋은 시선으로 보고 있었다. 항상 주변 인물들과 관련된 이야기는 하면 할수록 가족들의 낯빛이 어두워지거나 굳곤 했는데, 윤기와 관련된 이야기는 밝게 마무리되었다.


 평범한 대화들이 오고 갔고 식사 중간에 윤기로부터 메시지를 하나 받았다. 그 하나에 지민은 단 걸음에 윤기에게 튀어나갔다. 저 오늘은 일찍 가봐도 될까요? 영화를 보는 건 어떠냔 대화를 떠올리고 간식거리를 챙길 때까지, 지민은 어떤 일이 일어날지 전혀 상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콜라를 윤기의 옷에 엎지른 뒤 어떻게 집까지 돌아왔는지 기억이 안 난다. 도착해서 침대에 얼굴을 파묻었는데도 민윤기 생각밖에 안 났다. 심장은 터질 것처럼 뛰었다. 여태 사귄 애인들과도 이런 적은 없었다. 고작 손 좀 닿고 아래 좀 세웠다고 얼굴까지 빨갛게 달아오른 적은.


 생각해보니 전에는 이런 과정도 없었다. 자신을 좋아한다고 매달려오는 놈들 중 나름 괜찮게 생긴 사람을 골라 만났을 뿐이었다. 백화점에서 물건 고르듯 연애는 늘 쉬웠다.


 

"……."



 근데 윤기형 생각보다 더 크던데. 지민이 저도 모르게 되새김질했다. 환자복이 그 정도였으니까 한 이만큼…. 거기까지 떠올리다 이내 침대에서 팔딱거리며 더워진 얼굴에 손 부채질을 했다. 적당히 하자 지민아, 적당히. 스스로 중얼거렸다. 애인도 아직 아닌데 무슨.



"……."



 …애인? 나 방금 윤기형이랑 미래를 상상한 거야? 갑작스레 머리를 둔기에 후드려 맞은 느낌이었다. 윤기형이랑 있으면 재미있고 기분 좋고. 계속 또 보고 싶고, 어느 순간부터는 손끝이 저릴 만큼 가슴이 두근거리고.


 지민이 나직이 탄식했다. 아. 이게 바로. 지민은 그 동안 연애에서 빠졌던 감정을 비로소 발견했다. 나는 윤기형을….


 한 순간의 깨달음은 여러 고민들을 가져왔다. 윤기형에게는 어떻게 말하지. 사실 형이 입원해있는 여기는 내 삼촌의 병원이고…. 하나하나 다 걱정해주던 형이었는데 이 사실을 알았다간 배신감을 느낄 것도 같았다.


 고민하며 염려하는 사이 퇴원기간은 다가왔다. 나름대로 서프라이즈 이벤트를 준비하여 병원에 방문했다.



"박지민?"



 모델처럼 잘 빠진 남자가 지민의 어깨를 붙잡았다. 지민은 돌아본 순간 싸늘한 눈빛을 장착했다. 두 번 다시 볼일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새끼. 구애인이었다.



"여기서 볼 줄은 몰랐는데."

"그러게 네가 여긴 왜 있어. 미국으로 갔다더니?"



 지민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사건이 있고 나서 구애인과의 연락은 아예 뚝 끊겨있었다. 이 소식도 한참 윤기에게 신경 쓰고 있던 때 태형이 말해준 것이었다. 그 새끼 윤기형 잘못 될 줄 알고 해외로 튀었더라. 마주치면 다음에는 총으로 쏘라는 말까지 덧붙이며.



"아니 뭐, 잠깐 미국에 급한 볼일이 있었는데 잘 해결 됐거든. 그래서 왔어."

"아."



 지민이 픽 어이없는 웃음을 지었다. 생각보다 더 한심스러워서 상대할 가치조차 잃어버렸다. 무시하고 가려는데, 구애인이 지민의 어깨를 붙잡아왔다.



"여기 그때 그 사람 입원해있다고 들었는데. 맞지? 확인하려니까 개인정보라면서 안 알려주네."



 구애인은 자신이 아주 좋은 정보를 가져왔다고 했다.



"CCTV 찍어둔 거 있잖아. 거기서 서성이고 있던 거 증거로 잡아서 스토커로 몰면 돼. 합의도 무르고. 나는 거기 너 지켜주러 온 거고. 지민이 너도 사고 쳤다고 낙인 찍히면 곤란하잖아."

"……."

"안 그래, 자기야."



 이렇게 남이 혐오스럽고 경멸스러운 적이 있던가? 빤히 구애인을 바라보던 지민은 생긋 웃었다. 무시하려던 계획을 변경했다.



"얘기 좀 하자."



 사냥으로.






***






 남준은 퇴원기념으로 윤기의 자취방에 찾아왔다. 그리고 윤기의 얼굴을 보자마자 헛것이라도 본 것처럼 눈을 비비적거렸다.



"퇴원해도 되는 거 맞아요? 다시 입원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얼굴 꼴이…."



 남준은 말을 잇지 못했다. 살아있는 미라인가? 병실에서 만났을 때보다 상태는 더 악화되어 있었다. 퀭해진 눈이며, 푸석해진 피부며. 살까지 내려선 예민하게까지 보였다. 형 입원했을 때는 얼굴에 꽃이 폈었는데 지금은 다 시들었어요. 윤기는 남준이 물어도 대충 대꾸했다.



"왔으면 있다 가라."

"아니 형 무슨 일 있었어요?"

"없어."

"전혀 없는 게 아닌데요?"



 윤기는 대꾸도 하지 않았다. 일이라면 있긴 있었다. 그러나 차마 누군가에게 털어놓을 수 없는 종류였다. 입도 벙긋거리기 전에 차인 일. 난생처음 좋아한 애한테 애인이 있던 일. 그리고 마지막으로 짝사랑 상대한테 흉한 아랫도리만 보여주고 끝난 일. 최악 중에서도 최악이다.



"남준아."

"네?"

"지난번에 본 그 좆 같은 영화 있잖아. 제목이 뭐였냐."

"…아 명작한테 무슨 그런 실례되는 말을."



 남준은 투덜거리면서도 제목을 알려주었다.



"블라인드 러브요."

"고맙다."



 윤기는 남준에게 먹고 싶은 게 있으면 시켜 먹고 가라고 했다. 남준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됐어요. 형 딱 봐도 입맛 없어 보이는데 나 혼자 뭘 먹어요. 사실 윤기가 신기하기도 했다. 그런데 저 형이 저런 감정을 느끼기도 하네. 로봇이 어쩐 일. 어찌됐거나 다 혼자 끌어안고 사는 버릇이 있는 민윤기는 본인이 이겨내기 전까지 이야기를 내려놓지 않을 거다. 남준은 그런 윤기를 배려하여 빠른 퇴장을 해주었다.


 윤기는 노트북을 열었다. 뭐라도 해야지. 박지민 생각 잊으려면. 기계적으로 영화를 검색해서 홈페이지를 들어가려는데.


[Error 502 Bad Gateway]


 하얀 화면이 나타나 윤기를 차단했다. 서버에서 뜨는 에러코드였다. 씨발. 민윤기는 그것마저 서글펐다.


 민윤기의 사랑도 접속조차 하지 못하고 입구에서 쫓겨났다. 아니 입구는 보였나. 사랑은 배드게이트 에러다. 미련하고 한심한데 포기할 수 없어서 또 서성거린다. 존나 서럽다. 눈물이 툭툭 윤기의 볼 위를 적셨다. 남준이 떠나지 않고 봤다면 로봇이 고장 났다고 경악했을 거다.


 왜 영화를, 씨발 내가 찍고 있는 거야. 윤기는 사랑하는 이를 다른 사람에게 보내주던 남자주인공의 마음을 이해하고 말았다. 그 놈은 엄청난 놈이다. 왜 죽었는지도 알겠다. 죽을 만큼 마음이 아프고 고통스러웠다. 그리고 어이없는 건 이 와중에도 박지민이 보고 싶다는 거였다. 왜 죽으면서도 여주인공을 그리워했는지 알아버렸다.



"……."



 윤기는 다시금 지민과의 채팅창을 들여다보았다. 이미 지민으로부터 연락이 몇 번 와있었다.



[형 퇴원했다고 들었는데 왜 이야기 안 했어요ㅜㅜ]

[윤기형 이거 보면 연락해줘요]



 민윤기의 답장은 전부 다 거절이었다. 퇴원한다고 정신이 없었네. 미안. 일이 좀 바빠서 나중에 따로 연락할게. 당장이라도 만나고 싶은 걸 있는 인내심, 없는 인내심 모두 끌어 모아 참아낸 부산물이다.



"……."



 착한 박지민은 그렇게 흉한 꼴을 보였는데도 다시 연락해주고…. 한숨을 쉬며 엎어져있을 때였다. 갑자기 전화가 울렸다. 연영과였다. 퇴원 축하 연락이려나. 지민과 아는 사이가 된 후 차단하겠다던 마음을 바꿔 아직까지 연락은 하고 있었다. 윤기는 고저 없는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형! 큰일났어요!]

"갑자기 전화해서 그게 무슨 말이야."

[지민이 집에 지금 그때 그 새끼가 찾아갔는데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겠어서. 형 지민이랑 집 제일 가깝죠.]



 윤기는 더 들을 필요도 없이 전화를 끊었다. 대충 외투를 챙겨 입고 뛰쳐나갔다. 포기, 짝사랑, 그런 것들은 머릿속에서 깡그리 없어져버렸다.






***






 지민은 주인 잃은 강아지마냥 풀이 죽은 채 앉아있었다. 태형이 지민의 앞으로 햄버거를 떠밀었다.



"야 한 입이라두 먹어."

"어제부터 입맛 없어. 너 먹어."

"너 어제부터 아무것도 안 먹었잖아. 그러다 해골 된다."



 태형은 지민이 걱정됐다. 안 그래도 식단 관리한다고 삐쩍 마른 애가 민윤기의 퇴원을 기점으로 음식이 들어가질 않는다며 밥을 거부하고 있었다. 간병인 역할이 끝났으면 더 건강해져야 하는 거 아닌가. 그의 생각으로는 지민을 이해할 수 없었다. 지민이 한숨을 푹푹 쉬었다.



"태형아…사랑이란 뭘까?"

"나보다 더 많이 연애해놓은 애가 그걸 물어보는 건 뭐냐."

"그간 내가 한 건 다 장난이었나 봐…."



 난 진짜가 뭔지 알아버렸어. 지민이 테이블에 철푸덕 엎어졌다.



"그럼 좋은 거 아냐? 이번에는 누군데."



 태형은 지민의 연애관을 알고 있었다. 매달려오는 사람 중 얼굴이나 몸에서 취향인 부분이 한 개라도 있으면 가볍게 만나곤 했다. 혼자 있는 건 심심하잖아. 그런 이유로 만났던 놈들만 10명이 넘어갔다. 물론 연애동기만큼이나 끝은 전부 다 좋지 못했고. 이번에는 제발 멀쩡한 인간이었으면 좋겠는데. 지난번처럼 싸이코 새끼 같은 경우는 태형도 진절머리가 났다.


 지민이 웅얼거렸다.



"윤기형."

"…엉?"



 태형이 먹던 감자튀김을 테이블에 툭 떨어뜨렸다.



"그 빅스비?"

"야 김태형 내가 그렇게 부르지 말랬잖아! 대체 윤기형이 어디가 인공지능 같다는 거야. 우리 형 진짜 재미있는 사람이거든?"

"와 언제부터 우리 형까지 됐냐."



 누가 개발한 사람 모양의 로봇이 분명하다며, 내가 백 마디 하면 그 형은 한 마디를 한다며, 조별과제를 시작했을 때부터 부르던 호칭은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종종 지민에게 병실에 가서 윤기형을 만날 때마다 좋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이런 결과가 나올 줄은 몰랐다. 태형이 입을 떡 벌렸다.



"진짜 그 형을? 와…그래도 덕분에 다음에는 따라다니면서 신경 쓸 필요는 없겠네…."



 아니 오히려 써야 되는 거 아냐? 박지민이 말라 죽으면…. 감정표현에 적극적인 박지민과 태형이 아는 사람 중 제일 사막 같은 민윤기라니. 전혀 안 어울리는 조합이다. 태형은 눈치껏 노려보는 지민의 눈에 입을 닫았다. 태형이 콜라를 쪽 빨아 마신 뒤 말했다.



"잘 어울린다고 내 말은. 근데 그럼 좋은 거 아냐? 윤기형 퇴원도 했다며."

"…형이 거리 두는 느낌이야."



 지민이 시무룩하게 말했다. 몇 번이나 연락을 해봤는데 답장은 아주 느릿느릿 왔고 그마저도 바쁘다는 이유로 만날 수 없었다. 처음에는 퇴원을 했으니 바쁘겠지, 했던 지민도 눈치를 채고 말았다. 민윤기가 멀어지려 한다는 것을. 태형이 입을 떡 벌렸다.



"헐…박지민이 짝사랑이라니…."

"아니 짝사랑 아닌데."



 지민이 곧장 인상을 찡그리며 반박했다.



"아니라고? 그 형도 너 좋아한다고 했어?"

"아니 그건 아닌데…."

"뭐야 그럼."



 지민이 난감하게 태형의 눈을 피했다. 물론 윤기가 말로 하진 않았다.



"말 말고 다른 걸로 알려줬는데, 아무튼 비슷해."



 말 말고 다른 걸로? 그게 뭔데? 태형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지민은 대충 말이라며 얼버무렸다. 신체도 어쨌든 몸의 언어니까 상관없지. 너처럼 진짜 사랑을 모르는 어린애를 데리고 뭘 하겠니. 지민이 한숨을 쉬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먹고 가라."



 태형은 콜라를 다시 마시며 허공에서 눈을 한번 데굴 굴렸다. 저렇게 빠진 얼굴 보니까 이번에는 진짜인 가보네.


 한편, 너무나도 컬쳐쇼크 같은 지민의 선언에 전해줘야 태형은 까먹고 말았다. 너의 진짜 우리 형, 그러니까 박씨 가문의 장남이 네 전 애인을 아주 잘근잘근 조져놨다는 말.








 지민은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민윤기가 자신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는 이유가 있을 거다. 콜라 대참사가 있던 마지막으로 이 지경이 되었으니 모든 문제는 그날에 있을 것이다. 내가 너무 이상한 표정을 지었나? 생각해보니 너무 뚫어지게 보긴 했다. 그게 성희롱처럼 느껴져서? 그런데 형도 나한테 세웠잖아. 모르겠다. 지민이 축 처진 이불빨래처럼 늘어졌다.



"……."



 민윤기는 모든 순간에서 자신을 사랑했다. 무슨 일이 있을 땐 걱정을 해줬고, 같이 웃고 떠들었으며, 마찬가지로 전화를 끊을 땐 아쉬워했다. 새벽 늦은 전화에 지민이 이만 끊으려고 하면 붙잡은 건 오히려 민윤기였다. 난 원래 아침에 자. 지금이 한낮이야. 한국인데 뉴욕 살아. 지민은 그게 무슨 말이냐고 한참을 웃었다. 형 너무 재미있어요.


 그게 전부다 착각인가. 내 오해인가.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나는 이제 민윤기로 머릿속이 꽉 차버렸는데. 자신을 밀어내는 이유라도 알고 싶다.


 그때였다. 누군가 쾅쾅 문을 두들겼다.


 지민은 무시했다. 김태형으로 추측했다. 나름 친구라고 요새 민윤기와의 실연으로 기운이 빠진 자신을 위해 먹을 것을 사 들고 집을 들락거리곤 했다. 비밀번호도 알아서 열고 들어오면 되는 걸 종종 저렇게 장난을 쳤다. 지금은 우울해서 들어줄 힘도 없다. 사랑의 쓰라림에 빠진 날 놔둬….


 쾅쾅쾅! 문을 부수는 소리는 더 크게 들렸다.



"아 진짜."



 베개로 머리를 틀어막던 지민은 결국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짜증이 나서 덜컥 문부터 열었다.



"그냥 열고 들어오면 되는 걸…응?"



 김태형이 아니었다. 뭐야. 구남친이다. 그는 상당히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장난해?"



 다짜고짜 찾아와서 뭔 소린지. 어차피 관심 없다. 그간 헤어졌다고 다시 한번만 더 기회를 주면 안되냐고 질질 짜는 애들은 수도 없이 많았다. 귀찮게. 지민은 도로 문을 닫으려 했다. 구애인이 발을 끼워 넣어 막는 바람에 실패했다.



"씨발, 박지민 지금 너 나 무시하냐?"

"그때 할 말 다 한 걸로 아는데."

"쇼에서도 갑자기 잘렸어. 잡혀있던 이번 시즌도 줄줄이 취소되고. 너네 집 맞지? 네가 한 거잖아."

"모르는데?"

"뭐?"



 지민은 무표정한 얼굴로 또박또박 대답해주었다.



"난 모르는 일이라고. 실력 없어서 잘린 걸 내 탓하지마."



 구남친은 그 말에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발 비켜. 잘리기 전에. 지민이 툭 까며 다시 문을 닫으려는 순간, 구남친이 달려들어 멱살을 잡았다. 완전히 이성을 잃은 눈깔이었다.



"지랄하지마, 씨발! 너 맞잖아!"



 키가 작은 지민이 밀쳐졌다. 지민은 슬슬 열이 받았다. 어렸을 적부터 배워온 검도와 태권도로 지민의 몸은 어지간한 성인 남성쯤은 금방 부술 수 있었다. 무릎을 까버리려 발을 들어올린 찰나였다. 쿠당탕, 급하게 올라오는 발걸음 소리가 났다.



"박지민!"

 


 비호처럼 날아온 민윤기가 지민의 구남친을 쳤다. 구남친은 나동그라졌고, 지민 역시 벽에 등을 박으며 떨어졌다. 윽! 아으. 지민은 그 와중에도 갑작스러운 윤기의 등장을 믿을 수 없어 입을 멍하니 벌렸다.



"윤기형?"



 그때 나뒹굴고 있던 지민의 구남친이 일어나 윤기의 얼굴 주먹으로 쳤다.



"형!"



 지민이 비명처럼 외쳤다. 한대 맞자마자 나동그라진 윤기는 오뚝이처럼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주먹을 내지르는 게 아니라, 곧장 지민에게 달려와 그를 감싸 안았다. 지민의 체구 작은 몸이 윤기에게 폭 끌어 안겼다. 윤기는 보호하듯 지민을 안은 채, 지민의 구남친을 노려보았다. 턱뼈가 도드라진다. 지민을 안고 있는 손도 주먹을 쥐며 핏줄이 불거져 나왔다.



"이대로 계속 폭력 행사하시면 경찰에 신고하겠습니다. 저한테 했던 행동 역시 살인미수죄로 청구할 겁니다."

"하 니가 그때 그 새끼…."



 지민이 말을 자르고 끼어들었다.



"이윤혁."



 이윤혁은 그날 살아있는 공포를 마주했다. 살면서 인간을 보고 등골이 서늘해진 적이 얼마나 있던가. 눈빛이 매섭다. 매 앞의 생쥐처럼 오도가도 못한 채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내가 말한 거 잊었어?"



 윤혁은 깨달았다. 소속사에서 취소 통지를 받고 주체 못하는 감정에 찾아왔으나, 다시 한번 그날의 공포가 전신을 휘감았다. 병원에 앉아 생글생글 웃던 지민이 싸늘하게 내뱉었던 말들. 실수했다. 잘못 찾아왔다. 윤혁이 주춤주춤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이내 하얗게 질린 채 그는 현장을 도망갔다.


 윤기는 남자가 빠져나간 지 한참이 지나도 지민을 끌어안고 있었다. 혹시라도 돌아올 위협에 보호하듯. 아직도 급박한 상황 때문에 심장이 쿵쿵 뛰었다. 멱살을 붙잡힌 지민을 봤을 땐 정말이지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이렇게 직접적으로 폭력에 연관된 적은 처음이었다.


 안겨있던 지민이 나직이 말했다.



"…형."

"어? 아…."



 윤기가 지민을 놓아주었다. 윤기는 급히 지민의 온몸을 살펴보았다. 다친 데는 없어? 염려 가득한 말투에 지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지민이 울상이다. 다친 데는 없다는데 왜…. 생각하던 윤기는 어렵지 않게 답을 추측하고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사랑하는 애인과 이렇게 됐는데 속상하겠지. 윤기의 표정이 무척이나 어두워졌다.



"지민아."



 윤기는 다소 머뭇거리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마음이 쓰라렸다.



"내가 너한테 이런 말 할 권리는 없지만 저 새끼는 진짜 아닌 거 같다. 지민아."

"…네?"

"네가 이런 취급 당하는 거 내가 못 보겠어. 차라리 다른 사람이랑 사귄다고 하면 깔끔하게 포기하겠는데…."

"잠깐, 잠깐만요. 네? 누가 사귄다고요?"



 지민이 금시초문이라는 듯 덧붙였다. 저랑 아까 그 새끼랑요?



"…아냐?"

"형 다쳤던 그때 이미 헤어졌어요. 왜 만났는지 과거의 저를 뜯어 말리고 싶은 지경인데 무슨 그런 오해를…."

"그럼 그건 뭐야. 너랑 아까 그 새끼랑 같이 병원 로비에 있던 거."

"…아 그걸 봤었어요?"



 지민이 뭔가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곧 민망해하며 목을 긁적였다. 시선이 이리저리 굴러다녔다.



"그거 그냐앙, 경고의 몇 마디 해준 건데…말 꺼내기도 전에 도망갈까 봐 웃고 있었던 건데…."

"아…."

"형이 그걸 봤을 줄은 몰랐어요."



 윤기의 머릿속이 바쁘게 움직였다. 그렇다는 건. 만나는 게 아니라는 건. 그의 짝사랑이었던 상대는 애인이 있는 것도 아니며,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있는 것도 아니란 말이다. 제 마음이 접근조차 못하고 차단당하는 게 아니라는 거다. 윤기가 다급히 물었다.



"그럼 우리 예전처럼 다시, 아."



 입술 쪽이 아팠다. 손으로 대보니 피가 묻어 나온다. 아까 맞으면서 터진 듯했다. 다시금 속상해진 지민의 눈망울이 울렁거렸다.



"이게 뭐예요."

"괜찮아."

"뭐가 괜찮아요. 괜찮긴. 형 얼굴이 얼마나 큰 재산인지 알아요?"



 지민이 윤기의 뺨을 소중히 매만졌다. 그간 살도 빠져서 전보다 마른 것 같다.



"왜 나 때문에 계속 다치지."



 윤기는 지민의 말을 정정해주었다.



"다친 게 아니라 지킨 거야."



 눈이 마주치면 피하기 바빴던 민윤기는 지민과 담담히 눈을 맞췄다. 지켜냈다. 제 힘으로. 비록 터져서 상처까지 났지만, 어찌됐거나 지민은 제 곁에 있었다. 지민의 손이 작게 파르르 떨렸다. 목울대가 꿀렁 울린다. 지민이 말했다. 근데요, 형.



"나 좋아해요?"



 윤기는 일순 호흡을 까먹었다.



"나는 자꾸 형이 날 좋아하는 것 같아요."

"……."

"내 착각이에요?"



 윤기는 긴장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 뺨에 올려진 지민의 손은 따뜻했다. 다정한 눈빛과 체온. 혼자 수없이 허공으로 고백했던 감정인데. 지민이 앞에 있으니 막상 쉽사리 나오지 않았다. 시선은 다시 아래로 추락했다. 달아오르는 얼굴을 느끼며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손을 올려 지민의 손을 아래로 잡아왔다. 핏줄이 유난히 굵은 손에 작은 손이 쏙 파묻혔다.



"네가 생각하는 게 맞아."



 시선도 마주하지 못하는데, 민윤기는 온몸으로 사랑한다고 외쳐대고 있었다. 지민이 포스스 사랑스럽게 눈을 휘었다. 다시금 지민과 흘끔흘끔 눈을 맞추며 윤기가 말했다.



"그…지난번에 약속했었던 거."

"……."

"우리 집에 돈까스 먹으러 올래?"



 잘 구워줄게. 지민이 산책 나가는 강아지마냥 좋다고 활기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아, 하며 말했다. 영화도 봐요, 우리. 



"그땐 옷 젖어도 안 도망갈게요."



 지민이 속닥거리고는 냉큼 윤기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기침이 터진 윤기가 가슴팍을 약하게 들썩거렸다. 그의 귀끝이 빨개졌다. 커흠. 헛기침을 하면서도 딱히 반박은 안 한다. 대신 마찬가지로 지민의 등뒤로 팔을 올려 안았다. 무언가를 암시하는 허락 같아서 지민이 킥킥 웃었다.



"근데 너무 다행이에요. 나는 형이 그냥 내 몸만 보고 그러는 줄 알고, 섹파라도 해야 하나 했는데."

"뭐? 너 무슨 그런 해괴한…."



 어? 어디서 그런 몹쓸 말을. 윤기가 정색하며 지민을 떼어냈다. 그리고는 혹시나, 하는 어조로 말했다.



"너는."

"네?"

"너는 어떠냐고."



 지민은 조금 느리게 이해했다. 그러니까 이 말은 너도 날 좋아하냐는, 그런 종류의 질문인 것 같다. 묘하게 살짝 긴장한 윤기의 하얀 얼굴이 보여서 지민은 가슴팍이 간질거렸다. 살랑살랑 단 바람이 불어오는 것 같다.


 지민이 눈을 꾹 감고 입술을 부딪혔다. 쪽. 가벼운 소리와 함께 말랑한 것이 윤기의 입에 붙었다 떨어졌다. 윤기는 빳빳하게 굳어버렸다.



"됐죠."

"……."

"아니에요? 모르겠어요?"



 이 형 또 얼었네. 지민이 실실 웃고 있자니, 곧 윤기도 작게 웃었다. 갖고 놀고 있는데도 행복해서 미치겠다.



"한번 더 하면 알 거 같네."



 지민이 다시금 윤기에게 달려들었다. 윤기 역시 마주 안으며 깊게 입을 맞추었다. 그들은 한참이나 서로의 숨을 나누었다. 짧게 돌아와 마주한 행복은 더없이 영롱했다. 윤기는 생각했다. 자신의 이론은 틀렸다. 사랑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위대하며 꼭 필요한 것이다.


사랑의 환희가 그들을 감싸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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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하인드


1. 데이트 할 때 민윤기는 체크무늬 셔츠를 입고 나간다 (본인은 열심히 신경 씀)

2. 박지민은 귀엽다고 칭찬해줌

3. 다음에 커플룩으로 체크무늬 셔츠를 맞춤

4. 민윤기 자취방에서 그 셔츠는 홀랑 벗겨졌다고 한다

5. 김태형 연락처 속 민윤기는 조장형에서 빅스비형으로 바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