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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자, 황궁 후원에 있는 숲엔 가면 안 된다.”

“황족이 가면 안 되는 곳도 황궁에 있습니까?”



 유난히 하얀 얼굴의 어린 황태자는 영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반문했다. 나이 지긋한 황제가 윤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제국의 어린 황태자는 늘 쉽게 수긍하는 법이 없었다. 왜 황제는 백성을 돌봐야 하는 겁니까? 전 그들의 얼굴도 하나 모릅니다. 그럴 때마다 황제는 화내는 일 없이 묵묵히 대답해주곤 했다. 백성을 위한 존재가 황제이기 때문이다. 백성이 없다면 황제도 존재할 수 없지. 황제는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차분히 대답했다.



“그래. 다른 곳은 다 가도 그곳만큼은 가선 안 된다.”

“왜 가면 안 됩니까?”



 황제는 아득한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먼 과거를 회상하고 있는 듯했다.



“그곳엔 괴물이 산다.”



 괴물? 어린 윤기는 이해할 수 없었다. 전설처럼 허무맹랑한 존재를 아버지는 믿는 것인가. 아니면 다른 의미일 수도 있겠다. 괴물이라면 많다. 부패한 귀족들, 제 등에 언제든 칼을 꽂으려는 다른 형제들, 저를 죽여 제 자식을 황제로 만들려는 아버지의 수많은 후궁들. 그 존재가 정확히 무엇입니까. 윤기가 질문하려던 그 순간이었다. 컥컥, 황제가 격한 기침을 하며 피를 토했다.



“폐하! 어서 의원을 불러와라!”



 시종이 급히 달려오며 황제를 붙든다. 태자전하를 밖으로 모시거라! 시종의 다급한 외침에 황제가 손을 들어 그를 저지했다.



“됐다.”



 황제는 혼자 남을 태자가 영 걱정되었다. 진심으로 사랑한 황후와의 사이에서 느지막하게 얻은 하나뿐인 자식이었다. 몸이 약한 황후가 태자를 낳자마자 죽고, 한 번도 어미 품에 안겨본 적 없는 불쌍한 자식. 이제는 살벌한 황궁에 혼자 내던져질 내 핏줄.



“태자, 이리 가까이.”



 윤기는 기운이 빠진 황제의 입에 귀를 바짝 가져갔다.



“황궁에선 그 누구도 믿지 말아야 한다.”



 태운비를 조심하라. 시종의 귀엔 들어가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였다. 윤기는 그 순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것이 황제와 나눌 수 있는 마지막 대화라는 것을. 피가 묻은 아비의 손을 윤기는 꽉 쥐었다.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시종은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눈치를 봤다. 윤기는 짧게 시종을 노려봤다. 아마 쪼르르 태운비에게 달려가 모든 것을 다 떠벌릴 테지. 어린 아이임에도 그 시선에 움찔한 시종이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윤기가 다시 황제를 바라보며 포부를 말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훌륭한 황제가 되겠습니다.”



 그 말에 황제는 가냘픈 숨을 만족한 듯 크게 내쉬었다. 서서히 눈이 감긴다. 윤기는 그 마지막 순간을 박제하듯 눈에 새겼다. 완전히 황제의 손에서 힘이 빠졌을 때, 윤기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부드러운 소매로 벅벅 눈물을 문질러 닦으며 시종을 향해 명령을 내렸다.



“황제께서 승하하셨다 알리거라.”



 시종이 숨을 흡 들이키며 무릎을 꿇고 절을 올린 뒤 문밖으로 나섰다. 윤기는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잡고 있던 황제의 손을 놓았다. 황제의 피가 손에 묻어있었다. 윤기는 그 채로 주먹을 꽉 쥐었다.





***






 황제의 죽음으로 제국은 비통에 잠겼다. 선황은 백성을 아낄 줄 아는 황제였다. 국장은 2주간 진행되었다. 황태자는 모든 장례의식에 참여해야만 했다. 3일은 곡기를 끊고 2주간은 침소에도 가지 못한 채 밤마다 선황의 시신 곁을 지켜야만 했다. 윤기는 그 과정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진행했다. 어린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무뚝뚝하고 뚱한 얼굴로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선황의 시신이 하얀 천에 덮여 마지막으로 사라질 때까지.


 지옥 같은 2주의 장례기간이 끝난 뒤에야 비로소 윤기는 황태자궁에 돌아올 수 있었다. 시종은 아직까지도 꼿꼿한 윤기의 어깨를 보면서 혀를 내둘렀다. 독하긴 독했다.



“환복을 하루 종일 하는 것이냐.”

“송구합니다, 전하.”



 시종이 땀을 뻘뻘 흘렸다. 차분하고 온화한 성격의 선황 밑에서 어떻게 이런 성격의 황태자가 나왔는지 모르겠다. 환복이 끝나자마자 윤기는 축객령을 내렸다. 물러가라. 예, 전하. 시종이 허리를 숙여 인사한 뒤 밖으로 나간다.


 적막에 잠긴 침소. 시종의 작은 소리까지도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윤기는 무너지듯 침상에 누웠다.



“…….”



 시종이 내일 읊어준 참여일정을 생각했다. 할 일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일단 중앙청 회의에 참여하고…태운비가 대리청정을 맡게 될 거고…그럼 또 죽이려고 들겠지. 태운비가 낳은 3황자도 다시 황궁으로 돌아올 거다. 종종 태운비의 뒤에 앉아 질투와 시기심에 찬 눈으로 저를 바라보던 3황자를 떠올렸다. 윤기는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저를 그냥 가만 놔뒀으면 좋겠다.



“…….”



 누구도 듣지 못하는 깊은 새벽. 분노는 금세 녹고 슬픔이 잠식한다.


 혼자 남은 어린아이는 그제야 눈물을 흘렸다. 온통 서러웠다. 이 무서운 황궁에 제 편은 아무도 없다. 장례의식이 치러지며 선황의 묘에서 머무는 동안 흰 천에 감싸인 선황의 시신을 붙들고 가지 말라 애원하고 싶은 것을 간신히 꾹꾹 참아냈다. 아바마마…. 훌쩍거리며 작게 선황을 부른 그때.


 작은 인기척이 났다. 금세 윤기가 고개를 번쩍 들고 소리가 난 곳을 노려보았다.



“…어어….”



 금발 머리의 소년이 서있었다. 소년은 윤기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당황한 듯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볼을 긁적이면서 변명부터 한다.



“울고 있어서 조용히 사라지려고 했는데…어…민망하게 할 생각은 없었는데….”

“누구냐.”



 윤기는 벌떡 일어나 침구 아래 숨겨놓은 칼을 잡았다. 국상이 끝나는 날 바로 자객을 보낸 건가.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윤기가 소년을 응시했다. 소년은 자객이라고는 도저히 볼 수 없는 선한 얼굴로 제 소개를 했다. 박지민이야…. 윤기는 미간을 좁혔다. 누가 한가롭게 이름이나 묻고 있겠냐고.



“네 정체가 뭐냐 물었다.”

“나? 나는….”



 지민은 잠시 말을 멈추고 노려보는 윤기와 눈을 맞췄다. 날카로운 말투에도 겁먹은 기색은 없다. 나는 그니까, 어 엄청 대단한 존재인데, 너한테는 뭐냐면…. 말을 빙빙 돌리더니 무언가 생각하는 듯 하더니, 지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널 지켜주는 용이야.”



 지민이 신뢰의 눈빛을 보내며 말했다. 반대로 윤기의 하얀 얼굴이 미묘하게 구겨졌다. 저딴 걸 믿으라고 하는 소리인가. 불신이 가득한 윤기의 눈초리를 받으면서 지민은 열심히 제 존재를 주장했다.



“진짜야. 나는 오래 전부터 황족을 지켜오고 있었어. 네가 슬퍼해서, 그게 나를 불렀어.”



 윤기의 눈에 불신이 더욱 가득 찬다. 아예 안 믿고 있다. 대체 침소에는 어떻게 침입한 건지 의심하는 눈치다. 믿는 게 이상하다. 기껏해야 제 또래로 보이는 애가 전설에나 나오는 존재라고 우기고 있는데. 지민은 억울해했다.



“진짠데. 진짜 용인데…왜 안 믿어줘?”



 지민이 눈썹을 모으더니 통통한 입술을 쭉 뺐다. 남을 죽이기엔 한참 모자라 보이는군. 윤기는 갑자기 튀어나온 금발의 소년을 위협적이지 않다고 판단한 뒤, 손에 쥐고 있던 단검을 놓았다.



“나가라. 아니면 경비를 부를 거다.”

“진짜 용이라니까?”

“아바마마가 돌아가시자마자 얼마나 경비가 무능한지 확인하다니.”



 이대로면 한 달도 못 가서 죽겠어. 윤기는 지민을 없는 존재 취급하며 한숨을 쉬었다. 어떻게 대책을 마련하지. 나만의 군대를 키워야 한다. 지민은 기가 막혀 눈을 끔뻑거렸다. 아예 무시하네 저게…. 지민이 괘씸함에 윤기를 째려보자니, 그 시선은 느낀 건지 윤기가 지민을 돌아보았다.



“아직도 안 나갔느냐? 정말로 경비를 불러 쫓아내야겠다. 그럼 멀쩡히 두 발로 궁 밖으로 걸어나갈 수 없을….”



 윤기의 말을 중간에 끊듯 지민은 쿵쿵거리며 윤기의 앞으로 다가왔다.



“무시하지마.”



 듣긴커녕 윤기가 경비를 부르려 입을 떼려던 그때 지민이 덥석 윤기의 손을 꼭 잡았다.



“아까처럼 울지 않게 해줄게.”

“…….”

“내가 널 지켜줄 거야.”



 제 손을 꽉 쥔 작은 손을 한번 바라보고, 윤기는 지민을 마주 바라보았다. 태자궁 침소의 넓은 창으로 떨어지는 새벽달빛이 소년의 얼굴 위로 내려앉았다. 투명하고 맑은 눈이었다. 달빛을 타고 내려온 것 같았다.


 잠시 가만히 있던 윤기는 이내 지민의 손에서 제 손을 비틀어 빼냈다. 아직 따뜻한 온기가 민망했다. 지민은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제 할말을 이어했다. 꽤나 억울하다는 듯.



“그리고 그렇게 아무나 사람 의심하고 그럼 못 써.”

“나는 황태자다. 경어를 써라.”

“…나는 용인데?”



 보통 사람보다 전설적인 존재가 더 위에 있는 거 아닌가. 지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윤기는 조금 움찔하더니 곧 평소와 같은 무표정으로 주장했다.



“그렇다고 네가 날 지켜주는데 내가 쓰는 건 이상하지 않느냐. 원래 지켜주는 사람이 신하다.”

“…그렇구나….”

“그리고 난 어차피 네가 용인 걸 믿지 않는다. 보지 않는 한 믿지 않을 거다. 그런 게 존재한다고 들은 적도 본 적도 없다.”

“진짜 용 맞는데!”

“…….”

“…전설적이고 신비한 존재란 말이에요.”



 지민이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 윤기는 가뿐하게 무시하고 말했다.



“앞으론 널 만나려면 어디로 가야 되지?”

“전 맨날 여기 있을 거예요. 태자전하가 오늘처럼 힘들 때마다요.”



 말을 마친 지민이 창 밖의 달을 확인했다. 서서히 기울어져 가고 있었다.



“또 찾아올게요.”



 이제 울지 말고 자요. 속삭이며 지민은 윤기를 밀어 침상에 앉혔다. 놀랍게도 윤기는 순식간에 졸음이 밀려왔다. 잠에 끌려들어가며 감기는 시야 사이로 웃고 있는 작은 얼굴이 보였다.







***







 지민은 불규칙적으로 윤기를 찾아왔다. 5일에 한 번, 어떤 날은 일주일에 한번. 아주 가끔은 2주에 한번. 대체로 아주 달이 밝은 날이었다. 황태자궁 침소를 자연스럽게 제 집 드나들 듯 연기처럼 나타났다 사라졌다. 윤기는 침상에 눕는 대신 의자에 앉아 지민을 기다렸다. 문밖의 시종도 물리고 혼자 조용히. 그러다 보면 윤기가 보고 있지 않은 뒤쪽에서 지민이 윤기의 어깨를 툭툭 건든다. 나 왔어요. 해맑게 말하는 얼굴은 여전히 전설적이고 위협적인 존재라 보기 어려웠다. 때문에 윤기는 지민을 환상이라고도 생각했다.



“왜 그렇게 봐요?”



 지민이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윤기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윤기는 뜬금없이 손을 내밀었다.



“날 한번만 물어보거라. 여기.”



 기르는 짐승 대하듯 손가락만 내미니 지민은 윤기를 정신 나간 사람 바라보듯 바라보았다. 멋쩍어진 윤기는 손을 내렸다.



“오해하진 마라. 네가 진짜 존재한다는 걸 알고 싶어서 그랬다.”



 그 말을 들은 지민은 잠시 고민하더니 침대로 다가가 배게 아래쪽을 뒤적거렸다. 망설임 없이 숨겨진 윤기의 단도를 꺼낸다. 그게 거기 있는 줄은 어떻게 안 거야. 윤기가 뒤에서 의뭉스럽게 바라보고 있는데, 말릴 새도 없이 지민은 단도로 제 손을 베어냈다. 놀란 윤기가 급히 다가와 칼을 쳐냈다.



“미쳤느냐?”



 윤기가 지민의 손을 감싸 쥐었다. 지민은 피가 나는 제 손을 윤기의 손바닥에 비볐다. 흐르던 피가 윤기의 손바닥에 이상한 그림을 그리며 번졌다. 이번엔 윤기가 지민을 이상한 사람 바라보듯 했다.



“아침에 손바닥을 봐요. 내가 진짜란 걸 알 수 있을 거예요.”



 아프지도 않은지 지민은 배시시 웃었다. 윤기는 따뜻한 지민의 손바닥을 잡고 있다가, 인상을 구기면서 빼냈다.



“누가 이렇게 무식하게 증명하라 했느냐.”



 입은 퉁명하게 말하면서도 손으로는 조심스럽게 지민의 상처 난 손을 천으로 감싸주었다. 다정하고 따뜻했다. 지민은 길게 휜 눈꼬리로 윤기가 감아주고 있는 손을 내려다보았다. 뭘 좋다고 웃고 그래. 투덜거리는 어투는 이미 지민의 귀에 들리지 않고 있었다. 윤기의 귀끝이 조금 붉어져있었다.







***







 태자궁의 침소에서 아무도 모르는 만남이 이어지는 동안 제국은 태운비의 손아귀에 떨어져있었다. 선황이 실시했던 백성들과의 면담을 폐지했고, 귀족들의 세금은 최대로 낮아져있었다. 그 사이 윤기는 커다란 계획을 그리고 그에 맞춰 행동했다. 무능하고 방탕한 평판을 쌓아 태운비에게 황제의 자리에 관심이 없다는 뜻을 내비쳤으며, 뒤로는 자신만의 사람을 불러모았다. 신분의 귀천은 따지지 않았다. 능력만 있다면 평민과 귀족을 따지지 않았으며, 그 가운데에는 황녀도 포함되어 있었다.


 황위계승권에서 완전히 제외되어있는 황녀는 상황판단능력이 탁월했다. 매일같이 잠자리 상대를 바꾸며, 환각제에 찌들어있단 소문을 가진 황태자의 본질을 단번에 파악했다. 사냥 전 자세를 낮춘 사자. 그게 황태자였다. 황녀는 황태자를 찾아 먼저 제안했다. 태운비에게 뺏긴 제국을 되찾을 생각이 있다면 함께 하겠습니다. 풀린 눈을 유지하던 윤기는 그 말을 듣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 번뜩이는 눈을 했다.



 황녀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인상을 썼다.



“이미 충분히 더러워져있는 평판을 쓸데없이 더 더럽힐 필요가 있습니까. 태자궁에서 사람을 불러모아 해괴한 짓을 했다는 이야기가 여기까지 들려옵니다.”

“내 성실한 노력이 폄하 당하니 기분이 좋지 않군. 마음이 아주 아프다. 꾸준히 해야 태운비께서 안심하시지.”



 마음이 아프긴커녕 아무 신경도 쓰이지 않는단 표정으로 술술 되받아 친다.



“…그렇게 황궁의 모든 사람이 태자전하를 저급하게 보고 있습니다. 정말 전혀 신경이 쓰이지 않습니까?”

“오히려 꽤 편하지. 황녀도 애용하면 나쁘지 않을 거야.”



 윤기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여유롭게 찻잔을 들어 한 모금 삼킨다. 머리 좋은 황태자는 사람 속을 긁는 재주도 탁월했다. 황녀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황제가 되신 이후를 생각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백성들에게 과거를 증명할 방법은 없습니다.”

“흐음….”

“또한 전하께도 소중한 분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오해를 쌓기는 쉬우나 풀기는 어려운 법입니다.”



 소중한 사람. 윤기는 저도 모르게 어떤 얼굴을 떠올렸다. 밤에만 볼 수 있는 사르르 웃는 하얀 얼굴. 만나지 못한지 벌써 2주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곧 생각을 털어낸 뒤 황녀가 무어라 말을 더 꺼내기 전 날카로운 눈빛을 보냈다. 황녀는 저 눈빛을 안다. 이만 입을 다물라는 뜻이다.



“그전에.”



 윤기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이만하면 본론 전 사담으로는 충분하다는 듯.



“연합국의 동세가 심상치 않아. 가벼운 소문 한두 개 쌓이는 것보단 이런 건설적인 이야기를 나눠보는 건 어떨까 싶은데.”



 황녀는 혀를 내둘렀다. 황궁 안에서 제국의 모든 소식을 듣고 있다더니.



“연합국이 말입니까? 저번에도 공물을 보내왔다 들었는데.”

“그렇겠지. 아직은.”



 제국과 국경이 맞닿아있는 동쪽의 5개 왕국을 연합국이라 불렀다. 제국의 건국시절 강대한 힘에 맞서 생긴 연합국은 현재 제국이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덩치가 커진 상태였다. 윤기는 가져온 제국의 지도를 펼치고 표시된 국경 부근을 손으로 쭉 그었다. 동쪽 숲부터 남쪽 강까지.



“머지않아 이곳 모두 불바다가 될 거다.”

“설마….”

“군대를 모아야 한다. 3년안에 전쟁이 일어날 것이다.”



 황녀의 안색이 딱딱히 굳었다. 제국에 큰 바람이 몰려오고 있었다.






***







 윤기는 선황의 기일이 다가오는 날이면 원인 모를 압박감에 시달렸다. 황제가 되겠습니다. 선황과의 약속이 떠오르며 어깨가 중압감에 짓눌리는 느낌이었다.


 황궁에선 그 누구도 믿지 말아야 한다.


 황제의 말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그런 때만 되면 애써 파묻어놨던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전쟁터에 나가서 죽으면 어쩌지? 내 부하들의 시체를 밟고 넘어가야 되면 어쩌지? 아니 당장 내일 배신당해 독이 든 차를 마시고 죽으면? 윤기는 눈을 감았다. 언제쯤 이런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아마 황제가 되면, 황제만 되면.



“…….”



 컴컴한 윤기의 침소로 달빛이 살그머니 내려왔다. 윤기는 감았던 눈을 떴다. 서서히 달이 기울어지고 있다. 어쩐지 그 다정한 목소리가 간절해진다. 시리고 외롭다.



“…….”



 오늘은 오지 않을 모양인가 보다. 2주나 얼굴을 보이지 않아서 오늘쯤 오지 않을까 기대한 윤기의 예상이 빗나갔다. 마른 두 손에 얼굴을 파묻은 그때.



“왜 그렇게 불편하게 자요?”



 고개를 드니 그곳엔 지민이 서있었다. 더 이상 소년이라 불릴 수 없는 남자는 의아하단 눈으로 윤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윤기가 골격이 넓어지고 검술을 익혀 손에 굳은 살이 박히는 동안, 지민은 선이 유려하고 아름다운 사람으로 자라났다. 매번 스스로의 정체를 용이라 언급하지 않았다면 달의 신이라 착각했을 거다. 가만히 지민을 바라보던 윤기가 투정부리듯 낮게 중얼거렸다.



“…늦었지 않았느냐.”

“아 미안해요. 오늘은 좀 추워서 나오는데 시간이 걸렸어요. 많이 기다렸어요?”

“왔으니 됐다.”



 지민은 왠지 윤기가 안심한 사람처럼 보였다. 무슨 일이 있었던 얼굴이다.



“무슨 일이에요?”



 지민은 곧장 윤기의 앞에 앉았다. 원래부터 지민은 막힘이 없었다. 궁금한 것과 알아야 한다고 생각되는 건 무조건 윤기에게 다 질문했다. 윤기는 지민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아무 일도 없다.”

“거짓말하지 마세요. 태자전하 지금 스스로 얼굴 안 보셨죠?”



 그래. 쉽게 믿을 박지민이 아니다. 윤기는 느꼈던 두려움을 실토하는 대신 다른 말로 감정을 뒤덮었다.



“전쟁이 시작될 거다.”

“아…그때 말했던 연합국과….”

“그래.”



 지민이 시선 둘 곳을 찾지 못하고 고개를 떨군다. 목구멍에 갇혀있던 질문을 조심스레 꺼냈다.



“갈 거예요?”



 윤기가 고개를 끄덕인다. 이미 지민도 알고 있던 답이었다. 아무리 황실 사정에 어두운 용이라도 쉽게 예측 가능했다. 전쟁을 이끌고 승리하여 돌아온 황태자. 어마어마한 보상이 윤기에게 쏟아질 거다. 지민은 시무룩 눈썹을 축 떨구었다. 위험하다고 윤기를 말릴 순 없다. 대신 할 수 있는 일이 하나 있긴 한데…그렇게 하면…. 고민도 찰나, 곧 어떤 결심을 한 건지 지민의 얼굴에 잠시 결연한 빛이 스쳤다. 윤기가 끼고 있던 반지를 가리켰다.



“그거 저 주세요.”



 윤기가 반지를 낀 손가락을 까딱거린다. 이걸? 네. 윤기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순순히 빼며 말한다.



“원하면 다른 비싼 걸 구해다 줄게.”

“아니 날 뭘로 보고…용은 그런 재물 같은 거에 관심 없거든요?”

“어디 쓰려고.”



 지민은 대답대신 손바닥에 윤기의 반지를 올려놓고 집중했다. 바람이 불지도 않는데 반지가 지민의 손 위에서 덜덜거리며 떨렸다. 윤기의 눈이 놀라 작게 커진다. 점점 더 커지는 반동에 지민이 주먹을 꽉 쥐자, 그 손에서 금빛이 팍 터지듯 작게 반짝였다. 다시 손을 폈을 때 반지는 평소와 다름없이 똑같았다. 됐다. 만족스럽게 웃은 지민이 윤기에게 도로 반지를 내밀었다.



“뭘 한 거지?”

“태자전하가 다치지 말라고요. 앞으로 잘 가지고 다녀요.”

“…진짜 용이었네.”

“아직도 안 믿었단 말이에요!?”



 지민이 기가 막힌다는 듯 허, 했다. 오동통한 입술이 불만스레 튀어나온다. 인간은 원래 다 태자전하처럼 의심이 많아요? 아니면 태자전하만 그런 거예요? 인간이 전체 다 그러면 그건 종족에 좀 문제가 많은 거 같은데. 윤기는 이제 믿는다며 성의 없는 말로 지민을 달랬다. 사실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선뜻 믿기지 않는다. 전설 속에 나오는 용이라기에 박지민은…저 어린 얼굴이 어떻게? 윤기가 지민을 관찰하며 생각에 빠진 사이, 지민은 윤기에게 손을 한번 더 들이밀었다.



“빨리 가져가요. 안 주고 싶어지니까.”

“…….”

“안 가져가요?”



 윤기는 지민의 손바닥 위에 놓인 반지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더니 지민을 한번 슥 보고는, 가져가는 대신 제 손을 불쑥 내밀었다.



“끼워줘.”



 지민은 멈칫했다가, 곧 윤기의 손을 붙잡고 남은 손으로 반지를 잡았다. 마디마디가 툭툭 불거진 네 번째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 넣었다. 얼굴로 쏟아지는 윤기의 시선이 느껴진다. 왜 그런지 모르게 민망하다. 지민은 살짝 붉어진 볼로 부러 시선을 맞추지 않았다. 어색한 공기를 덜어내보려 웅얼거렸다.



“인간들은 원래 네 번째 손가락에 자주 끼워주던데….”

“그 의미가 뭔지 알아?”



 지민이 고개를 저었다. 말을 나누는 존재는 윤기가 유일했다. 그저 인간들이 서로 나눠 끼는 장면만 봤을 뿐이다. 머리를 굴려본 지민이 단순한 관점으로 말했다.



“자주 쓰는 손가락에 있으면 불편하니까…?”

“아니.”



 윤기가 아직 제 손을 붙잡고 있는 지민의 손에 제 손을 엮었다.



“사랑한다.”



 그런 뜻이지. 지민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마비된 것처럼 꼼짝 못했다. 손만 붙잡혔을 뿐인데, 털어내면 사라질 작은 힘인데. 덫에 걸린 것마냥 움직이지 않는 지민을 윤기가 당겼다. 입술이 맞물렸다. 달빛이 가장 시끄러울 만큼 고요한 적막이 방에 내려앉았다. 어느새 지민이 눈을 감고, 윤기의 손이 자연스럽게 지민의 허리를 쓰다듬으면서 내려간 그쯤, 잠깐 입술이 떼어진 사이 지민이 윤기의 어깨를 살짝 밀어냈다. 아쉬운 숨이 두 사람의 입에서 동시에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이상하게 지민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려있었다.



“…아무래도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아요.”



 윤기는 인상을 살짝 찡그린 채 창 밖을 확인했다. 달이 거의 사라져있었다. 지민이 윤기의 이마로 손을 뻗었다. 재우려는 거다. 매번 지민은 윤기를 잠에 밀어 넣고 혼자 빠져나갔다. 연기처럼 사라지는 걸 보여주기 싫다는 게 그 이유였다. 이번엔 윤기가 지민의 손을 잡아 닿지 못하도록 막았다. 붙잡힌 손을 빼 한번 더 시도해보려 했으나, 아예 잡힌 손목이 빠지지도 않는다. 빠지긴커녕 윤기가 지민을 당겨 제 품에 끌어안았다.



“어디로 가야 널 진짜 만날 수 있는 거지?”



 지민아. 윤기가 불렀으나 지민은 답이 없었다. 아예 기운이 빠진 건지 흐리게 웃고는 윤기의 어깨에 이마를 묻었다.



“다시 와.”

“…….”

“기다릴 테니.”



 지민이 연기처럼 윤기의 품 안에서 점차 투명해진다. 윤기는 지민을 안은 팔에 힘을 주어 더욱 꽉 끌어안았다. 사라지지 않게. 품에 가둬둘 수 있게. 그러나 흐릿해진 지민은 끝내 증발하고 말았다. 윤기는 눈을 깊게 감았다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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