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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보이지 않는 도시 02

by 토페 posted Aug 13,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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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Bistro Fada>








 대롱대롱 작은 고개가 흔들린다. 베테랑 근무경력을 자랑하는 지민은 최근 수면부족에 시달리고 있었다. 졸면 안되는데…일 해야 하는데…돈 날로 먹으면 안 되는데…. 매번 꿈에서 살해당하고 강제로 일어나면 창 밖은 늘 푸르른 새벽이었다. 헐떡거리는 심장을 붙잡고 다시 잠자리에 들기도 찝찝하고 버티다 보면 출근시간이다. 거의 책상에 닿을 즈음 지민은 퍼덕거리며 고개를 팍 처들었다.



"오 아슬아슬하게 안 박았네."



 커피잔을 입에 문 윤기가 대놓고 지민을 구경했다. 지민은 머쓱하게 뒷목을 슥 문질렀다. 윤기가 놓치지 않고 무심하게 지적한다. 침은 입가에 흘렸으면서 왜 뒤를 만져? 입가를 닦아야지. 지민은 뒷목을 문지른 손을 자연스럽게 앞으로 옮겨와 닦았다. 축축하다. 얼마나 피곤한지 평소 잘 안 흘리는 침까지 흘리며 잤다. 이게 다 그 잘생긴 개자식때문이다. 근무태만 현장을 적발 당한 지민은 큼큼 헛기침을 하며 나름대로 변명을 찾았다.



"아마 제가 졸았다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저는 졸은 게 아니고 잠깐 깊은 생각에 빠져있던 거거든요. 예를 들면 어떻게 하면 우리 병원이 장사가 잘 될까…막 그런거요. 어렸을 때부터 다들 그런 오해를 꽤 하더라구요. 명상과 수면부족을 헷갈리는, 약간의 의사소통 부재로 발생하는 오해라고 설명하면 될까요."

"시끄럽고 그냥 다시 자."

"진짜요? 아니, 잔 게 아니고…."

"환자 침대에서 자던가."

"손님 침대에서 어떻게 자요."

"여기 손님이 누가 있는데?"



 지민은 윤기 말대로 휑한 로비를 바라보았다. 아침부터 휑한 로비는 점심시간이 지나도 마찬가지였다. 쉽게 예측도 가능하다. 아마 이대로 저녁까지 잘하면 손님은 한 명, 아니면 아예 오지 않을 것이다. 그 망할 애완동물 복제칩. 획기적으로 유전자를 완벽하게 복제한다는, 즉 다시 태어나게 만들어준다는 칩이 등장했을 때 이정도로 큰 여파가 있을 줄은 몰랐다. 사람들은 높은 위험도가 동반되는 수술 대신 가격은 높아도 안전한 복제칩을 선택했다. 손님이 서서히 줄 때 환호성을 지른 게 불과 1년전 일이건만, 현재는 병원문이 닫힐까 걱정해야 할 판이다. 차마 손님이 오실 거라 빈말도 못하고 있자니, 윤기는 진심 어린 어조로 중얼거렸다.



"어서 빨리 망해버렸으면 좋겠군."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원장님처럼 자기 가게 안 아끼시는 분 처음 봤어요, 진짜."

"취미로 시작했는데 너무 힘들어. 귀찮고."

"생명을 구하는 일이라서 그런 거예요. 원장님은 엄청난 일을 하고 계시는 거라구요."

"말은. 원래 난 대단한 사람이야. 그리고 넌 그냥 놀고 먹는 직장 사라질까봐 걱정하는 거잖아."

"…어떻게 아셨어요? 그러니까 그런 말씀 하지마세요. 누구 백수 만드시려고."

"내 가정부 해."



 지금 욕하라는 거예요?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려는 말을 지민은 꼭꼭 씹어삼켰다. 사실 지금도 가정부와 별반 다르지 않긴 하다. 손님이 없는 날은 윤기의 식사를 챙기고, 커피를 타고, 낮잠을 자고 있으면 가게 망을 살피거나 환기를 시키고. 차마 무시할 순 없어 지민은 적당한 말로 제안을 물리쳤다.



"가정용 안드로이드 쓰세요. 요즘 미래기업 안드로이드 밥 잘한다고 소문 났던데."

"누가 집에 있는 거 싫어."

"…바뀐 거 알아요? 로봇취급이랑 사람취급이랑? 제가 있으면 더 신경쓰여야 하는 거거든요?"

"안드로이드 걘 밥도 그닥 못할 거 같아."

"저 쓰는데 잘해요. 요즘엔 아침을 잘 못 먹어서 못 쓰지만…."

"왜 못 먹는데?"



 지민은 고민했다. 꿈에서 어떤 잘생긴 미친놈이 나와 매일같이 자신을 죽인다고 말하면 쉽게 믿어줄까? 윤기는 무덤덤한 시선으로 지민을 응시했다. 괜찮을 것도 같다. 5년이라는 시간을 같이하면서 지민이 안 윤기는 퍽 나쁘지 않은 사람이었다. 나름 농담도 하고 간혹 환하게 웃기도 한다. 종종 업무가 밀렸을 때 까칠함과 예민함을 담아 싸늘하게 말하긴 하지만. 진지하게 말하면 잘 들어줄 거야. 지민은 침을 꿀꺽 삼켰다. 꿈과 관련해 처음으로 현실에서 이야기해본다.



"사실요."

"어."

"계속 같은 꿈을 꿔요. 어떤 남자가 총으로 절 쏴서 죽이는 꿈이요."



 윤기는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이었다. 커피를 탄 컵을 빙글빙글 돌리다 기울인다. 제대로 들었나. 지민은 용기를 얻어 이야기를 진행시켰다.



"맨날 꿈 속은 똑같은 도시 같거든요? 어느 날은 머리, 아주 자기 심심하면 심장도 쏘고 팔도 쏘고. 혹시 원장님은 이거 뭔지 아세요? 원장님은 똑똑하시니까. 그 남자가 제발, 하 죽을 거 같아요. 그 남자랑 꿈에서 안 만나고 싶고 그만 죽고 싶어요."



 일말의 기대를 걸었다. 5년동안 동물병원에 찾아온 모든 동물의 병을 고친 윤기의 전적을 지민은 직접 목격했다. 폐 한쪽이 막혀 컥컥거리는 고양이가 실려왔을 때도, 한 짝 날개가 완전히 망가진 매가 구조되어 왔을 때도. 수술 중 무섭도록 집중한 윤기의 눈을 볼 때마다 지민은 종종 생각하곤 했다. 어쩌면 보통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평소 병원 따위 어서 망해버리라 재촉하는 모습을 보면 그런 생각이 몽땅 증발하지만. 윤기는 답이 없었다. 원장님? 지민이 부르자, 윤기는 종이컵을 구기며 오늘 아침 메뉴를 묻던 어조와 똑같이 말했다.



"그냥 자도 된다고 했는데 왜 그런 말을 만들어."

"……."

"아니면 쓰고 있는 안드로이드 가상현실체험모드 꺼."

"…제 안드로이드는 그런 비싼 기능 없거든요?"

"소설 쓸 시간에 나가서 과일이나 몇 개 사와. 배고파."



 그럼 그렇지. 누가 믿겠어. 지민은 김 샜다는 듯 표정을 구겼다. 윤기는 종이컵을 구겨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볼일은 끝났다는 듯 명령만 남기고 쏙 진료실 안으로 들어가버린다. 스쳐 지나가며 가게주인답지 않은 말도 잊지 않았다. 돈은 번 거에서 훔쳐서 마음대로 써. 남겨진 지민은 조용히 중얼거렸다. 예예, 어련하시겠어요. 꿍얼거리면서도 외투를 챙겼다. 자기 먹을 거 사러 보내면서 훔치기는 무슨. 지민은 착실히 지문인식으로 병원 문도 닫았다. 윤기는 분명 늘어지게 낮잠을 잘 것이고, 같이 일하는 간호사 한 명은 휴가를 갔으니 아무도 병원을 지킬 사람이 없다. 문이 잘 닫혔는지 확인하고 걸음을 뗀 순간이었다.



"비켜주세요! 급합니다!"



 멀리서 초록불을 울리는 하얀 차가 다가온다. 지면에서 살짝 떨어진 채 날아온 차는 정확히 지민의 앞에서 멈췄다. 지난번 산양떼를 이송한 차였다. 문을 열고 내린 동물보호소 직원은 낯익은 지민의 얼굴을 보고 다급하게 외쳤다.



"병원 직원이시죠? 긴급 환자입니다."



 동물보호소 직원이 버튼을 누르자 뒤쪽 네모난 공간이 갈라지며 열린다. 질척한 피가 바닥을 메우고 있었다. 다친 멧돼지 네 마리가 괴로운 피울음을 토해냈다. 피범벅이 되어 목을 긁는 울음소리는 마지막 남은 생존투쟁이었다. 앞발 한쪽이 잘린 멧돼지를 확인한 지민은 더 볼 것도 없이 병원 문을 다시 열었다. 들어오세요. 웬 소란인가 진료실 문을 열고 나온 윤기는 피범벅이 된 멧돼지를 보고 얼굴을 굳혔다.



"수술실로 옮겨."



 벌써 네 번째 발생한 긴급환자였다.







***








 어으, 허리야. 피곤한 지민은 눈을 부비적거렸다. 바닥을 더듬거리자 딱딱하다. 지민은 꿈 속의 세계를 확인하고 다짜고짜 욕을 내뱉는 수준에서 체념하는 수준까지 올라섰다. 아 오늘은 진짜 피곤한데. 차라리 빨리 죽여주고 깼으면 좋겠다…. 드문드문 밀어닥친 야생동물 구조대로 그간 버린 근무시간을 보답이라도 하듯 밤까지 일했다. 병원은 안 망하니까 좋은 건가. 생각하며 익숙하게 눈으로 남자를 찾는다. 한편으로는 얻은 수확을 되새김질했다. 제이케이, 그게 바로 남자의 이니셜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놈이다. 왜 고작 그런 녹슨 밥그릇따위에 이름을 적어놓는 거냐고. 꿈이라 그런가.


 지민은 사실상 남자를 무력으로 이긴다는 생각은 포기했다. 정정당당 남자를 물리치고 여유롭게 도시를 구경하고 빠져나간다는 멋진 선택지는 이성적으로 무리였다. 남자는 물리적으로 자신보다 확실한 상위계층이었다. 걘 총이 있고, 근데 난 총이 없고. 오자마자 죽기 바쁜 저보다 이곳에 사는 남자는 지리도 훨씬 자세히 알고 있을 터다. 실제로 기습을 했을 때 엎어치기 한방에 뻗어 갈비뼈가 작살났을 게 분명한 고통을 얻었다. 치사하게 세 명이 모여 기습을 하는 방법이라면 모를까. 아쉽게도 남은 두 명의 인원이 부족했다.



"제이케이…제이케이…."



 이름을 곰곰이 입에서 굴리던 지민은 한가지 결론을 맺었다. 이름이 있다는 건 사회적 생활을 한 사람이라는 증거다. 남자는 자신이 날려준 가운데손가락이 욕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말이 통한다는 건 이성적인 이야기를 시도해볼 수 있다는 거다. 회색의 축축한 건물들 사이로 언뜻 움직이는 형체가 보인다. 지민은 직감했다. 남자다. 어차피 죽기밖에 더 하는데. 도망가거나 숨는 대신 입꼬리를 관자놀이에 닿을 기세로 확 잡아 당겨가며 웃었다.



"안녕! 나 또 왔어!"



 오랜 단짝친구를 보는 것마냥 손을 흔들었다. 여지없이 총구를 뻗던 남자가 잠깐 당황했다. 황당함이 물씬 번진 표정은 지민을 정확히 응시하고 있었다. 그래, 니가 봐도 내가 미친 거 같지. 나도 날 죽이는 미친놈한테 내가 이럴 줄은 몰랐다. 지민은 천연덕스럽게 눈웃음을 지으며 다가갔다.



"내 이름은 박지민이야. 와 날씨가 좋, 아 좀 그렇지? 뿌연 거 보니까 먼지 엄청 많다."



 남자는 기가 막힌 듯했다. 잘생긴 눈이 댕그랗게 커지더니 미간을 모은다. 정확히 그 표정은 한 문장으로 설명할 수 있었다. 상식 밖의 이상한 일이 일어나는 걸 볼 때. 그러니까 이런 말이었다. 이 자식이 갑자기 미쳤나. 지민은 모르는 척 히히 순하디 순한 미소를 머금고 밝게 손을 내밀었다. 내밀어진 손을 남자는 빤히 쳐다보기만 한다. 악수는 모르나. 민망하지 않은 척 센스 있게 뒤로 뺀 지민이 앞머리를 쓸어넘기며 전시용 미소를 빵긋 지었다.



"에이, 우리, 어? 잠깐 살인 전에 통성명이라도 잠깐 해보는 게 어때?"

"……."

"제이케이가 이니셜이지? 우리 친하게 지내볼까?"

"……."

"요기 이 무서운 건 좀 내려놓고. 응?"



 지민은 샐샐 웃으며 남자의 총구를 손으로 잡아 살포시 아래쪽으로 내렸다. 남자는 여전히 동물원 우리에 갇힌 멸종생물 보듯 지민을 가만 바라보았다. 이미 죽일 타이밍은 한번 벌써 지나갔다. 지금이다. 남자가 한번 멈칫한 이 때다. 지금 보여주어야 한다. 비록 너가 나를 33번이나 죽였지만, 마음이 한없이 넓고 착한 나는 너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으며, 앞으로 너가 나를 죽이지 않으면 우리는 아주 괜찮은 사이가 될 수 있다는 뜻을.



"내가 그동안 욕한 거 미안하구…그건 내가 제정신이 아니었던 거 같아. 나 죽이는 것도 질릴 거 아냐. 응? 우리 이제 슬슬 많이 낯도 익었는데. 그러고보니 우리 어디서 한번은 본 거 같은데. 우와아…너 진짜 잘생겼다…."



 21세기에나 먹힐 법한 작업멘트를 지민은 입에서 술술 굴렸다. 아부의 신이 있다면 당장 제자로 삼을 만큼 화사한 연기였다. 지민은 슬금슬금 손을 뻗어 남자의 어깨에 가져갔다. 주무르며 친근함을 더욱 높이려는 작전이었다.



"근데 넌 이름이 뭐…켁!"



 남자의 옷에 손이 닿은 순간, 아래로 향해있던 총구는 원래 자리로 돌아와 단숨에 지민의 심장을 겨냥했다. 신기하게도 남자가 사람의 손이 닿자 물고 도망가는 길거리 강아지같단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아픈 건 심각하게 아팠다. 아 시발…. 지민은 욕이 올라왔으나 꾸역꾸역 삼켰다.



"하하…! 조옴…아프…네…."



 심장 부근에 곱게 두 손을 모아 포갰다. 지민은 눈으로는 욕을 하고 입가로는 천사 같은 자비로운 미소를 지으며 즉사했다. 남자는 한층 더 괴생명체를 보는 듯한 눈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가슴팍과 입에서 꼬르르 피를 토해내며 최대한 곱게 말했다. 안녕, 내일 또 보자!


 역시 첫술에 배부를 순 없는 모양이다. 지민은 제 방 침대에서 일어나 알싸한 가슴팍을 문질렀다. 눈빛은 꿈속에서 죽은 사람치고 과하게 초롱초롱했다. 껄끄러워하는 남자의 표정이 더없이 만족스럽다. 지민은 모처럼 샐러드가 아닌 파스타를 주문해놓고 포만감 넘치는 아침식사를 즐겼다. 즐거운 포크질을 마치고 모처럼 병원에서 웃는 얼굴을 내내 유지했다. 드디어 정신을 놓은 거냐며 혀를 차는 윤기를 향해 드시고 싶은 거 있으시면 밖에서 심부름 해오겠다는 말을 남길 수 있을 만큼 좋은 기분이었다.





 지민은 한다면 하는 사람이었다. 사실 별다른 방도가 없기도 했다. 얌전히 개죽음 당하던가, 아니면 조금이라도 살기 위해 발버둥 쳐보던가. 둘밖에 없는 선택지에서, 아니 사실상 한 가지만 남아있는 선택지에서 사람이 행동할 수 있는 범위는 뻔했다. 지민은 방긋방긋 웃으면서 손수 친애하는 개자식의 앞으로 뛰어나갔다. 안녕, 제이케이. 나 또 왔다. 오늘은 어떻게 지냈어? 좋은 꿈은 꿨고? 결말이 죽음이란 건 변함 없었다. 다만 과정이 좀 달라졌다. 친절하게 할 수 있는 안부인사를 와다다 쏟아 놓고 총알이 날아오면 얌전히 박혀 웃으면서 죽는 것이다. 지나가는 사람이 본다면 입을 떡 벌릴 장면의 연속이었다.


 남자는 어디선가 약을 주워먹고 나타난 지민의 태도에 예전과는 다른 반응을 보였다. 찝찝함을 감추지못했다. 지민이 죽던 말던 제 할일 하기 바쁘던 남자가 쉽사리 발걸음을 못 뗐다. 석연찮은 듯 미간을 살짝 모으면서 지민이 눈감을 때까지 앞을 지켰다. 그러나 그도 잠깐이었다. 남자는 다시 지민을 매정하게 죽이고 황급히 자리를 떴다. 개자식. 이제 익숙해졌다는 거지. 지민은 서서히 적응해가는 남자를 보고 다른 방법을 강구했다. 동시에 누가 이기나 보자는 식으로 더욱 해맑은 웃음을 걸치면서 죽었다.



"이름이 뭐야!"



 지민은 남자의 이름을 알아내기로 결심했다. 처음으로 남자가 당황한 순간은 이니셜을 발견한 순간이었으며, 기본적으로 사람이란 이름을 건네 받고 하면서 친해지는 거다. 지민이 결심을 하건 말건 남자는 역시나 지민을 개무시했다. 참고 참고, 또 참던 지민은 간혹 무너질 뻔한 이성을 다잡았다. 여기서 욕하면 그간 쌓은 노력이 너무 억울하다. 눈알이 찢어지게 남자를 눈으로 욕하면서도 웃음을 만들었다. 그리고 꿈에서 깨면 베개를 퍽퍽 팼다.



"으아악! 개자식!"



 이름 알려주면 죽기라도 해? 서서히 참을성이 닳디 닳아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을 때, 급기야 지민은 씩씩거리며 남자의 이름을 재창조하기로 작정했다. 제이케이, 제이케이. 한글로 만들면 'ㅈㄱ'이라는 자음에 들어맞는 단어. 뭐더라. 막상 정확히 자신을 마주보고 있는 총구를 보고 하얗게 머리가 바란다. 급한 대로 지민은 떠오르는 단어 중 아무 단어나 뱉었다. 머릿속에서 검열할 여유 따위는 한참 전에 증발했다. 쩌렁쩌렁 악에 받친 목소리가 도시를 웽웽 울렸다.



"자기야!"



 방아쇠를 당기려던 손이 멈칫했다. 순식간에 목구멍을 타고 튀어나온 단어는 다소 낯간지러운 어감을 가지고 있었다. 적막한 공기가 둘 사이를 가르고 내려앉았다. 뭐? 지민은 스스로 말하고 스스로 질문했다. 너 뭐라고 했냐, 박지민? 그런 말도 안 되는 단어가 방금 제 입에서 튀어나왔다. 아무리 급해도 그런 몹쓸 단어를 입에 담다니. 총을 하도 맞으면서 머리가 같이 돌아버린 게 분명하다. 그 순간만큼 세상 제일 가는 친절의 아이콘 박지민이 파괴됐다. 자기? 자기? 기가 막혀 인상이 저절로 와작 구겨진다. 미친 자식! 스스로에게 환멸을 느끼던 지민은 문득 이상한 점 하나를 발견했다. 분명 남자는 총구를 들이밀었다. 그러나 심장은 아직까지 펄떡거리며 살아있다.



"……."

"……."



 방아쇠를 당기려던 손이 삐끗했다. 백발백중 심장을 관통하던 총구의 방향이 비틀어졌다. 댕그랗게 뜨인 눈으로 지민을 바라보기만 했다. 지민은 눈을 깜빡거리며 남자의 상태를 확인했다. 지금, 저거 그러니까. 남자는 늘 한 손으로 쥐던 총을 양손으로 잡고 있었다. 꼭 거대한 위협에 습격이라도 당한 것처럼. 뭐야 쟤 지금 당황한 거야?



"자기?"



 남자가 눈에 띄게 흠칫한다. 총을 더 꾹 움켜쥐고 경계심을 높인다. 지민은 설마, 했다. 고작 이런, 아니 제가 보기에도 살인마를 향해 이딴 말을 던진다는 게 미친 거 같지만, 망설임없이 사람을 탕탕 쏴죽이는 놈이 이 정도로 당황하며 반응한다는 게 어이없었다. 긴가민가하며 지민은 마지막 실험을 했다.



"자기야?"



 탕! 남자가 총을 쐈다. 심장에 틀어박혀야 할 총알이 예외적으로 어깨에 박혀왔다. 커다란 눈이 급하게 깜빡거린다. 사람의 손을 물고 도망가던 동물이 헛발짓을 해 바닥에 넘어진 모양새같았다. 이례없이 당황한 남자는 곧장 뒤이어 원래대로 심장에 총알을 꽂았다. 지민은 화끈한 고통에 정신을 차릴 수 없으면서도 남자의 반응을 확실히 망막에 각인했다. 순간적으로 거대한 비밀을 파헤친 것처럼 눈이 반짝 빛났다. 바로 이거다. 찾았다.


 꿈에서 깨어났다. 가파르게 들썩거리던 심장이 천천히 느리게 박동한다. 흐흐, 지민은 저도 모르게 나사 풀린 웃음을 흘렸다. 싫어한다는 거지. 질색하는 남자의 표정을 하나하나 그렸다. 찡그려지는 잘생긴 눈썹과 큰눈을 떠올리니 발끝부터 간질간질 묘한 쾌감이 타고 올라왔다. 이불을 감싸고 얌전히 누워있던 마른 몸이 일어나더니, 무릎에 얼굴을 묻고 어깨를 잘게 떨었다. 음흉한 속셈이 보이는 미소는 점점 커다란 악행을 꾸미는 사람의 것과 닮아갔다. 변태처럼 큭큭거리며 중얼중얼거렸다. 우리 자기, 자기야, 자기새끼야. 한참만에 출근시간을 확인하는 지민의 표정은 어느새 상쾌한 아침 샛노란 레몬을 씹은 것처럼 상큼했다.



"개자식 넌 이제 죽었어."



 자기야. 한번 더 읊조리니 또 위장이 뒤틀리는 격한 반응이 온다. 지민은 사뿐히 고통스러워하는 이성 한구석을 외면했다. 경찰에게 쫓기기라도 하듯 허둥지둥 방아쇠를 당기던 남자를 떠올리니 만족감으로 손바닥이 짜릿했다. 싫어? 나도 싫어, 새끼야. 어디 더 치떨리게 싫어해봐라. 기꺼이 스스로를 제물로 받치기로 결심했다. 깔끔하게 상황정리를 마친 지민은 모처럼 행복한 아침 만찬을 가졌다. 물컵을 들고 허공에 건배하며 외쳤다. 개자식에게 선사할 엿을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