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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04 05:03

[슈짐] 야담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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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위령제>




_트리거워닝 유혈

_시대물+좀비물










 윤기는 이부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멍한 얼굴로 앉아있었다. 새벽부터 일어난 노비들이 벌써 대감집을 이곳 저곳 누비고 있었다. 잔칫날은 늘 바지런히 움직이니 모든 노비들이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거다. 짜증나게 성실한 것들이다. 꾀는 부릴 줄 모르는. 하긴 그게 원래 노비들의 처지였다. 주인 말에 따라 꼬박꼬박 예, 예 답해주는 게. 윤기는 손으로 잠이 덜 깬 얼굴을 문질렀다. 얇은 문지방 너머로 노비들의 들뜬 목소리가 들린다.


 우리 도련님이 드디어 장가를 가신다니, 대감마님께서 오늘 잔칫상은 여태 보지 못한 것들로 다 준비하라고 하신 거 알지?


 윤기는 다시 이부자리에 드러눕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오늘은 봐줘도 되지 않나. 정인의 혼례소식을 듣다 못해, 제 손으로 씻기고 먹이고, 가마까지 태워 보내라는 건 너무하잖아. 물론 박대감의 장손 박지민은 가마가 아닌 혈통 좋은 하얀 말을 타고 갈 테지만. 그는 이불을 대충 개켜놓은 다음 모든 노비들이 똑같이 입는 옷을 입고 방문을 열었다. 얼마나 화려한 잔칫상을 준비하려는지 벌써부터 부엌에서 고소한 냄새가 올라왔다.


 윤기는 결리는 목을 위아래로 흔들며 기지개를 쭉 켰다. 혼례를 올리는 새신랑을 축복이라도 하듯 날씨도 좋다.



 “…….”



 내일이 오지 않고 세상이 멸했으면 좋겠다. 지민이 혼례를 치르지 못하게, 이대로 아무도 없는 세상에서 둘만 살 수 있게.



 “…….”



 그러나 그런 일은 오지 않겠지. 공양미를 아무리 바쳐도 안 일어날 거다. 만약 된다 하면 공양미가 아니라 귀한 짐승의 털가죽, 바다의 신비한 생선, 온갖 산해진미를 바칠 의향이 있다. 나무 뿌리 썩은 것 같은 얼굴로 마당을 바라보고 있는 윤기에게 같은 노비인 덕대가 다가왔다. 덕대는 곰처럼 커다란 덩치를 가진 사내였다.



 “윤기야 오늘은 소 잡는 거 네가 그거 좀 보고 있어야겠다.”



 윤기는 고개를 끄덕이며 짚신을 신었다. 소 한 마리입니까? 그래. 대감마님께서 아주 튼실한 놈으로 고르셨다더라. 백정의 아들이란 사실 때문인지 잔칫날 고기를 받아오는 일은 늘 윤기가 했다. 특별히 큰 일은 아니었다. 뒷마당에서 백정이 소를 잡아 고기를 해체하는 과정을 지켜볼 뿐이다. 백정이 좋은 고기를 훔치는지 안 훔치는지 그것만 감시하면 됐다.



 “형님은 어디로 가십니까?”

 “아 나는 영순이네 집 좀 다녀와야 될 거 같다.”

 “거긴 왜요?”

 “거기 바깥양반 송장 처리하러 갔다 오더니 며칠을 앓아 누웠다고 하더라고. 영순 어미가 이번 도련님 혼례복에 쓰일 비단이라고 사방팔방 구해 다녔었는데…음식이라도 좀 가져다 줘야지. 그럼 부탁하마.”



 덕대가 윤기의 어깨를 두들겨주고 먼저 자리를 떠난다. 윤기는 드높은 대감집 문턱을 넘어 짚신을 질질 끌었다. 덕대가 바깥으로 나갔으니 더 일손이 부족할 터였다. 좋아해야 할지 우울해야 할지 여타 다른 생각을 할 일이 없을 거 같다. 정인을 떠나 보내는 아침 공기가 더없이 상쾌했다.






***






 윤기는 점심이 지나기 전 고기를 받아오는 모든 일을 끝냈다. 백정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윤기에게 예상보다 더 많은 삯을 받고 만족해 돌아갔다. 수레에 고기를 싣고 날랐다. 반은 스스로 하고 반은 다른 노비를 시켰다. 박대감 집안에서 꽤나 오랜 생활 노예로 묶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고기를 나르느라 손이 피범벅이 됐다. 빨리 씻고 싶다. 손을 털며 부엌으로 돌아가는 그 길. 껄껄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대감마님, 감축 드리옵니다. 첫째 아드님이 이리 훌륭한 짝을 만나셨으니, 너무도 잘 어울리는 한 쌍입니다.”

 “고맙소, 이대감. 많이 드시게. 자, 지민아 한잔씩 따라드리거라. 먼 길에서 오신 분들이다.”

 “예, 아버님.”



 윤기는 발걸음을 멈췄다. 지민이 아비와 친한 양반들에게 미소 띤 얼굴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먼 곳까지 걸음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 잘 살도록 하겠습니다. 편히 묶다 가십시오. 예, 내일 신부 댁으로 출발합니다. 그 작은 목소리가 여상하게 귀에 솔솔 꽂혔다. 알고 있는 사실들을 다시 읊어주는 것뿐인데도, 미묘하게 기분이 착 가라앉는다.


 윤기는 그곳에 서서 비단옷을 입은 무리들을 가만 바라보았다. 그들의 하얀 옷을 바라보고, 아직 씻지 못해 피범벅인 제 손을 바라보았다. 꼭 서로 다른 나라에 있는 거 같다. 이러면서 무슨 기대를 하고. 무슨 바람을 가지고…. 술잔을 드는 지민을 바라보던 와중이었다.



 “얘 너 여기서 뭐하니? 한참 찾았다. 침소에 누워있을 줄 알았더니, 그것도 아니고 대체 이 중요한 잔칫날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안 그래도 일손 부족해 죽겠는데.”



 향소가 윤기의 어깨를 팍 쳤다. 부엌에서 일을 하고 온 그녀의 이마는 땀으로 흥건했다. 중간에 쏙 사라진 민윤기가 얄밉기 그지 없다. 너 용케 잘 빠져나간다? 어? 누구는 미끌거리는 기름 앞에서 같이 익어가고 있는데. 이제 내가 기름인지 사람인지도 헷갈리는 판에, 팔짜 좋게 여기서…. 실컷 윤기를 비꼬던 그녀는 손님을 맞이하고 있는 지민 쪽을 발견하고는 눈을 반짝 빛냈다.



 “어머머 우리 도련님 웃으시는 거봐. 정말 행복해 보이시네. 꽃이 따로 없다. 너도 보이니?”

 “평소랑 다름 없구만….”



 윤기가 뚱하니 중얼거렸다. 산보 나가실 때나 약과 드실 때 맨날 보던 얼굴인데. 향소는 뭘 모른다며 한심하다는 듯 혀를 쯧쯧 찼다.



 “다름 없긴! 다른 때보다 확 피셨는데. 나 같아도 확 피겠다. 우리 새아가씨가 얼마나 고우신 줄 아니? 그런 여인과 혼인하는데 당연히 기쁘지.”



 향소가 제 두 손을 꼭 붙잡고 연정에 빠진 사람마냥 허공을 바라보았다. 네가 아가씨가 도련님한테 보낸 연서를 한 번이라도 봤으면 그런 말 못한다. 글을 얼마나 잘 지으시는지 아니? 심지어 자수도 잘 놓으시고, 듣기로는 현명하기 그지 없어서 어지간한 학자들도 한 수 접는다고 하더라. 윤기는 여전히 감흥 없는 얼굴로 말했다.



 “그렇게 좋으면 네가 아가씨랑 혼인하면 되겠다.”

 “뭐? 세상에, 너 어디 그런 모가지 떨어질 소리를 함부로 하니? 도련님이 좀 아껴주니까 네가 아주 정신을 놨구나.”



 너처럼 건방진 노비는 우리 도련님 아니면 바로 목이 떨어졌을 거야. 윤기는 다시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 같이 입씨름 해봤자 얻는 이득도 없다. 향소는 묵묵히 듣고 있는 윤기를 허수아비 삼아 다시 혼자만의 상상에 푹 빠져버렸다.



 “우리 도련님이랑 새아가씨 사이에서 태어날 아기는 얼마나 어여쁠까? 사내아이도 좋고 계집아이도 좋지만 가능한 계집아이였으면 좋겠어. 그리하면 내가 머리도 땋아주고 비단옷도 같이 골라주고….”

 “일손이 부족해서 죽겠다더니 계속 떠들 거냐? 입 좀 다물어라.”

 “아 왜이리 승질이야. 네놈이 할 말은 아니거든? 그러는 넌 그렇게 조용해서 입에 거미줄은 안 쳤니? 그리고, 너 한씨 아줌니가 시킨 일은 했어? 고기 받아오라고 했잖아.”

 “다 날랐다.”

 “그건 또 무슨 재주로 했대. 백정 아들이었다고 또 어떻게 재주는 있나 봐.”



 향소가 퉁명스레 말했다. 윤기는 다시 대꾸를 안 한다. 다시 지민이 있는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흐음. 미간을 좁힌 향소가 수상하다는 듯 말했다.



 “그런데 너 진짜 입이 왜 새 부리만큼 튀어나왔니? 누가 보면 너야말로 정인이라도 뺏긴 줄 알겠다.”



 윤기의 표정에는 별 다른 반응이 없다. 잔칫날 일을 많이 해서? 하지만 잔칫날은 맛있는 걸 먹을 수 있는데. 이리저리 고민하던 향소가 깨달았다는 듯 아! 했다.



 “너 네가 업어 키운 도련님이 장가가니 아쉬워서 그러는구나?”



 향소는 눈치가 없는데 개념까지 없다. 윤기가 주제 넘게 관여하지 말라 한 마디 하려던 그 찰나였다. 담소를 나누던 지민과 눈이 마주쳤다. 향소의 말대로였다. 사랑하는 이와 혼례를 올려서 그런 건지 다른 날보다 더욱 말갛고 하얀 안색이었다. 사람의 시선을 잡아 끈다. 옆에서 향소가 시끄럽게 굴었으나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다.



 “응? 그치? 그렇지?”



 눈이 마주친 채 그대로 지민이 슬쩍 웃는다. 눈으로 건네는 인사다. 윤기는 지민과 마주치던 시선을 훽 피해버렸다.



 “왜 대답을 안 하니? 아 됐다. 어차피 도련님은 계속 네가 모시고 가는…어디가!?”

 “일하러 간다.”



 윤기는 도망치듯 등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자꾸 그렇게 웃지 말라고. 천한 노비 마음 헤집어놓는 도련님이 미웠다.







***






 잔칫날은 일이 끝도 없이 있다. 과장을 약간 보태 지나가는 아무 사람이나 붙들고 일을 맡겨야 할 판이었다. 윤기는 객들의 말을 관리하는 일을 맡았다. 한 마리를 걸어두면 또 다른 말이 오고, 또 다른 말을 받으면 또 다른 말이 오고. 인망 좋고 성품 좋은 박대감을 찾아 꽤나 떨어진 지방으로 한양에서 잘도 양반들이 내려왔다. 누군가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린다. 객이 데려온 노비라 생각하고 뒤를 돌았다.



 “여기 있었구나.”



 내일 혼례를 올리는 도련님이었다. 노비들보다 더 바쁜 장본인이었다. 윤기가 살짝 놀란 얼굴로 지민을 바라봤다가, 다시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왔다. 지민이 밝은 얼굴로 말했다.



 “한참 찾았는데도 안 보여서 물어보니 예 있다고 해서 왔다. 이건 원래 덕대가 하는 일이었던 거 같은데.”

 “…시킬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윤기는 저도 모르게 딱딱한 얼굴을 했다. 이리 하고 싶지 않았는데 어찌 할 도리가 없다. 지민이 두 눈을 여러 차례 감았다 떴다 했다. 빤히 윤기를 바라본다.



 “오늘 누가 널 괴롭혔어?”

 “그럴 리가 있습니까.”

 “그렇긴 하지.”



 지민이 고개를 주억거린다. 널 괴롭히기는 조금 힘들긴 하지. 당하면 모를까. 윤기의 미간이 다시 찡그려진다. 이 도련님이 뭘 하고 싶어서 여기 온 건지 모르겠다. 지민이 연이어 질문했다.



 “아니면 일이 너무 많아서 그러는 거냐?”

 “…무슨 말을 하고 싶으신 겁니까.”

 “왜 그리 골이 났어?”

 “누가요.”

 “당연히 너지. 여기 또 누가 있다고.”



 말은 사람이 아니니까. 지민이 가볍게 농을 덧붙이며 웃었다. 윤기는 정색한 얼굴로 딱 부러지게 쳐냈다.



 “안 났습니다.”

 “안 나긴.”



 지민이 윤기의 하얀 미간을 손가락으로 꾸욱 눌렀다. 아까부터 요기 이렇게 주름이 진 걸 봤다. 윤기는 묵묵히 고개를 돌려 지민의 손을 피했다. 안 보는 것 같더니 그새 또 다 보긴 했나 보다. 내일 혼례를 올리는 신랑이 노비 한 명 챙길 시간이 어디 있다고. 윤기는 무표정한 얼굴로 꿋꿋이 우겼다.



 "원래 그런 인상입니다. 도련님이 잘못 보신 겁니다. 모르십니까? 더러운 인상 때문에 다른 노비들한테 따돌림도 받고 있었습니다."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한다. 따돌림을 당해? 당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민윤기가 하고 있었다. 노비들이 씩씩거리는 장면을 한 두번 본 게 아니다. 저번만 해도 민윤기 이 놈이 물만 길러오고 처소로 쏙 사라졌다고 향소가 한탄을 하고 있었다. 장신구 골라주는 게 그리 어렵냐며 도끼눈을 뜨고 윤기의 처소를 노려보았다. 지민은 짐작했다. 골이 엄청 났구나…. 윤기는 더는 지민과 대화를 이어갈 생각이 없는지 까칠하게 굴었다.



 “그 말 때문에 예까지 오신 겝니까?”



 지민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도련님은 노비의 불경한 어투는 신경쓰지 않는다.



 “그래. 나는 네가 나한테 무슨 일이든 다 말해줬으면 한다. 눈이 마주쳤는데 피하는 걸 보니 마음이 아주 좋지 않았다.”

 “…….”

 “늘 말하지 않았느냐. 내 최고의 벗은 너라고.”



 다정하기 짝이 없는 말투였다. 굳건한 믿음을 가진 지민 앞에서 윤기는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어떻게 하면 좋나. 차마 마음에 품었다고 말할 수도 없는 저 눈빛을 어찌하면 좋나. 윤기는 잠시간 말을 잇지 못했다. 지금이 화를 풀 기회라고 생각했는지 지민이 주변을 살피고는 윤기의 소맷자락을 붙잡아왔다.



 “형님.”



 지민은 윤기와 둘만 남을 때마다 형님이라고 부르곤 했다. 이리 부르면 더 가까워진 거 같다면서. 그 호칭까지 들으니 허탈함, 착잡함, 그리고 알 수 없는 감정들이 윤기의 안에서 휘몰아쳤다. 마지막으로 차고 나오는 건 분노였다. 왜 신분이 달라서, 왜 같은 사내로 태어나서, 왜, 왜. 자신은 안중에도 없는 지민을 보면서 애꿎게 화를 냈다.



 “왜 굳이 알려고 하십니까? 도련님이 알아서 어찌하시게요. 노비는 그런 것까지 일일이 다 고해 바쳐야 하는 겁니까?”

 “윤기야, 나는 그런 뜻으로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태생부터가 다릅니다. 더는 제게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십시오.”



 목이 백 번은 따여도 이상하지 않은 소리를 덤덤히 내뱉은 윤기는 지민에게 등을 돌렸다. 윤기야, 윤기야. 잠시만 기다려보거라. 따라나오던 지민을 다른 노비가 붙든다. 큰 도련님, 대감마님께서 찾으십니다. 곧 따라오는 발소리마저 들리지 않는다. 윤기는 걸음을 더 빨리 재촉했다. 눈물이 흐를 것만 같았다. 못난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





 컴컴해진 마을은 그럼에도 잔칫날로 인해 밝았다. 등불이 곳곳에 켜있었다. 모든 사람이 박대감 장손의 혼례를 축하하고 있었다. 발걸음 닫는 대로 걸어 도착한 곳은 저잣거리에서 조금 비껴난 냇가였다. 바로 등 뒤에선 사람들의 먹고 마시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도 그나마 조용한 게 여기다. 빌어먹을 세상 만사 원래 다 이런 건가 보다.


 윤기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천한 놈이 가질 수 없는 사람이라는 건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양반의 자식이 노비와 비역질따위나 하다니.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알고 있으면서도 가슴 깊숙이 파고드는 절망감과 착잡함이 쉽게 달래지지 않는다.


 그는 앞으로의 날들 역시 잘 알고 있었다. 내일이면 사과를 건네고 지민이 신부를 데리러 가기 위해 탄 말을 이끌 거다. 도련님은 신부와 혼례를 올리고, 입을 맞추고, 자신 역시 언젠가는 짝 붙여주는 다른 노비와 혼인을 하게 될 테고. 연모하는 정인의 옆에 평생 붙어있을 수 있단 사실에 감사를 해야 할지, 욕지기를 퍼부어야 할지.


 윤기는 옷을 털고 일어났다. 돌아가야겠다. 분명 그딴 말을 듣고도 다정하기 짝이 없는 도련님은 자신의 걱정을 산더미만큼 하고 있을 것이다. 막 돌아나가려던 그때.


 냇가 쪽에 이상한 덩어리가 보였다.



 “…개?”



 윤기는 시야를 가늘게 좁혔다. 덩어리는 힘 없이 축 늘어져있었다. 윤기는 다시 발걸음을 돌려 덩어리 쪽으로 다가가 무릎을 구부려 앉았다. 동물의 사체였다.



 “누가 이곳에….”



 매캐한 악취가 났다. 죽은지 족히 3일은 넘은 듯하다. 숨을 참고 사체를 보는데, 이상한 자국이 있었다. 뭐지? 미간을 찡그린 윤기가 그 부분을 자세히 살폈다. 살을 뜯어먹은 동물의 이빨 흔적이었다. 윤기는 인상을 찡그렸다. 산에서 내려온 짐승이 물어뜯어 놓은 듯했다. 살쾡이보다도 이빨자국이 더 크다. 곰은 아니고. 동물이라면 꽤나 잘 아는데도 추측하기가 어렵다. 이대로 두면 썩어 문드러져 살 썩은 내가 진동을 할 거다.


 다른 때라면 몰라도 사체를 발견하니 영 찝찝했다. 내일은 지민의 혼인식이 있는 날이었다. 묻어야겠다. 막 개의 사체를 들고 일어나려던 그 무렵.



 “의원님! 더 빨리 가야합니다, 더, 우리 아부지가, 아부지가…!”

 “지금 이게 최고로 빨리 뛰고 있는 거요!”

 “이러다 우리 아부지 죽습니다, 어엉.”



 허씨의 딸 영순이었다. 오늘 아침 들었던 덕대의 말이 떠올랐다. 그녀는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의원과 함께 뛰고 있었다. 나이가 많은 의원이 잘 뛰지 못하는지 속도가 뒤처진다. 마침 냇가 아래에서 올려다보던 윤기와 영순의 눈이 부딪힌다. 영순이 눈을 부릅 뜨더니 돌연 걸음을 멈춰 윤기를 향해 외쳤다.



 “거, 거기 좀 도와주십시오!”

 “…저 말입니까?”

 “그럼 누구겠습니까! 의원님 좀 업고 데려가 주십시오! 한 시가 급합니다. 사람이 죽는단 말입니다!”



 어서요! 윤기는 개의 사체를 놓고 허겁지겁 뛰어올라왔다. 잠깐 신세 좀 지겠네. 의원 영감을 업고 뛰었다. 뛰는 내내 영순은 훌쩍거리면서도 잘 따라왔다.









 마침내 도착한 영순의 집은 사람으로 붐비고 있었다. 의원을 내려놓기도 전에 곡소리부터 들렸다.



 “아이고, 아이고 이대로 가면 나는 어찌 살라고 이렇게 가! 영순 아버지!”



 열린 문 사이로 영순 아범을 끌어안고 오열하는 영순 어멈이 보였다. 축 늘어진 몸은 이미 생을 끝낸 사람이었다. 영순이 손을 떨었다. 윤기는 괜스레 제 잘못인 것 같았다. 더 빨리 뛰어왔어야 했나. 착잡하게 가라앉은 기분으로 그 어떤 말도 하지 못하고 있는데, 영순이 집 밖으로 뛰쳐나갔다. 어이구, 쯧쯧, 어떻게 하나. 소란으로 몰려온 마을 사람들이 안타까움에 혀를 찼다.



 “우리 영순이, 불쌍해서 어떡해, 어, 이렇게 매정하게 혼자 가! 흐윽….”



 윤기의 등을 의원이 툭툭 두드렸다. 그래도 자세히 봐야 하니 안 쪽으로 들어가주시게. 윤기는 고개를 끄덕이고 방 안으로 발을 들였다. 의원을 내려놓고 옆에 앉았다. 침전된 분위기로 의원이 영순 아범의 맥을 짚는다. 어두워지는 표정을 보니 이미 답은 나와있었다. 이제 빠져줘야 할 거 같다. 조용히 돌아 나오려던 찰나, 영순 어멈이 깜짝 놀라 말했다.



 “여, 영순 아버지?”



 영순 아범이 꿈틀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고개가 기이한 각도로 꺾인다. 분명 숨이 끊긴 사람이었다. 모두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영순 어멈이 외쳤다.



 “영순 아버지!”



 영순 어멈이 눈물을 쏟으며 영순 아범의 목을 끌어안았다. 윤기 역시 입을 크게 벌리고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차, 참말이여? 진짜 살아난 거여? 무, 무슨 말이라도 해봐, 영순 아버지.”



 그러나 영순 아범은 답이 없었다. 어딘가 조금 이상하다. 으레 사냥을 자주 나가면 얻는 촉이 있다. 위협적인 짐승을 만났을 때 느껴지는 불안감과 긴장감. 그때와 비슷한 날카로운 불안감이 윤기의 등을 엄습했다. 의원이 나서서 영순 아범의 진맥을 다시 시작했다.


 영순 아범의 발작 상태는 점점 이상해졌다. 초점이 잡히지 않는 눈동자는 흐리멍덩했으며, 흰자에 붉은 실핏줄이 넝쿨처럼 올라왔다. 뿐만 아니라 목 주변으로 퍼런 핏줄이 울긋불긋하다. 크으으, 크으. 이상한 울음소리는 꼭 짐승의 그것 같았다. 기괴하게 목을 꺾던 영순 아범이 입을 딱딱거리며 꿈틀꿈틀거렸다. 윤기는 돌연 냇가에서 어떤 짐승에게 물어 뜯겼던 개의 사체를 떠올렸다. 살쾡이보다는 크고 여우보다도 컸던 이빨자국.


 떼어놔야 할 거 같다. 윤기가 영순 어멈 쪽으로 손을 뻗던 그 순간.



 “아아악!”



 벌떡 일어난 영순 아범이 영순 어멈의 목을 물어 뜯었다. 크륵, 크륵 짐승이 살을 파먹는 소리가 적나라했다. 순식간에 튄 피가 윤기의 얼굴에 뿌려졌다. 영순 어멈이 숨을 거칠게 헐떡였다.



 “영순 아버…컥!”

 “여, 영순 아범! 정신 차리게! 자네 부인 아닌가!”



 당황한 사람들이 앞으로 튀어나가 영순 어멈을 영순 아범으로부터 떼어놓으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영순 아범이 다른 사람에게 또 달려들었다. 아악!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아니, 영순 아범! 지금 뭐하고 있는 거야! 잡읍시다! 사람들이 달려가 영순 아범을 떼어놓으려고 하는 사이 의원이 피투성이가 된 영순 어멈에게 다가갔다.



 “영순댁! 정신차려, 영순댁! 영순댁! 피, 피를 멎게….”

 “…컥, 컥…!”

 “영순댁 정신이 드나?”



 축 늘어졌던 영순 어멈의 몸이 영순 아범과 마찬가지로 기괴하게 꺾인다. 윤기의 심장이 쿵쿵 뛰었다. 눈을 까뒤집고 크륵거리는 짐송소리가 영순 어멈의 입에서 나왔다. 의원도 무언가 이상한 감각을 느꼈는지 말을 더듬었다.



 “여, 영순…커헉!”



 목이 덜렁거렸던 영순 어멈이 의원을 덮쳤다. 의원의 피가 바닥을 적셨다. 윤기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좋지 않다. 곰을 만났을 때나 느꼈던 공포가 발끝에서부터 올라왔다. 영순 아범을 제지하려던 장정 무리에서도 비명이 울렸다.



 “이, 이게 무슨, 나, 나야! 강매, 으아아!”



 사방에서 피가 튀었다. 윤기는 한 걸음, 두 걸음 뒷걸음질을 쳤다. 사람들도 심상찮은 기운을 느꼈는지 주춤거리며 말리길 포기했다. 끄어어어. 괴상한 울음소리를 낸 영순 아범이 또 다른 이에게 달려들었다. 팔을 물어뜯고 배를 뜯어 얼굴을 밀어 넣는다. 시뻘건 내장이 주르륵 쏟아졌다. 배가 텅 빈 사람도 다시 벌떡 일어났다. 걷는 것조차 힘겨워 하던 의원이 사람 위에 올라타 목을 물었다. 사람이 사람을 물어뜯고 있었다.


 이것은 사람이 아니다. 얼굴빛이 사색이 된 윤기가 크게 외쳤다.



 “모두 도망치시오!”



 윤기는 아수라장에서 먼저 뛰어나왔다. 다른 사람들 역시 비명을 지르며 뛰쳐나왔다. 무슨 일인지 바라보던 저잣거리의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인다.



 “무슨 일인데 그리들 호들갑들, 으응?”

 “사람이 사람을 먹는다! 도, 도망가시오!”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이야기요?”

 ”참말이오! 모두 도망, 으아악!”



 그어어. 쇠를 돌로 긁는 듯한 울음을 내며 죽었던 자들이 뛰쳐나와 저잣거리의 사람들에게로 달려들었다. 저잣거리의 가판대에 어지러이 피가 튀었다. 죽은 사람들이 다시 벌떡 일어나 또 다른 사람을 덮쳤다. 가족, 친우, 상관없이 닥치는 대로 물어뜯어 먹는다. 세상이 멸했다.


 윤기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었다. 이 상황을 모르고 있을 하얀 얼굴이 떠올랐다. 지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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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s 2019.08.04 06:08 SECR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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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cimcim마녀 2019.08.16 18:22 SECRET

    "비밀글입니다."

  • ?
    융기해 2019.09.10 01:32 SECRET

    "비밀글입니다."

  • ?
    김아무개 2023.05.25 09:28
    허어어어ㅓㅓㅓㅓㅓㅓㅓㅓㅓ 진짜 토페 님 글 너무 맛있게 쓰셔요...... 진심 재미있습니다 후우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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