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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een - Sleeping On the Sidewalk>










 세상에 있는 대부분의 사건은 이 말로 시작된다. 어느 날. 8살 박지민의 어느 날. 김태형이 찾아왔다.



“지민아 여기는 태형학생. 많이 들었지? 아빠가 가르치는 학생 있다고 했었잖아. 오늘 악기 구경하고 싶다고 해서 잠깐 왔어. 태형아 이쪽은 내 아들인 지민이, 박지민. 둘이 인사할까?”



 저명한 음대교수이자 지휘자인 지민의 아버지는 태형의 선생님이었다. 지민은 방에서 책을 읽다 나왔다. 손에는 아직 놓지 못한 책이 들려있었다. 안녕. 어색하게 지민이 먼저 웃으며 인사했다. 지민을 빤히 바라보던 태형은 같이 인사하는 대신 지민의 손에 들려있던 책을 바라보았다. 어, 나도 그 책 아는데. 나루토. 그날 악기를 구경한다던 태형은 악기 대신 지민을 실컷 구경했다. 방을 구경하고, 얼굴을 구경하고, 취미를 구경하고. 눈이 반짝거렸다. 제일 재미있는 장난감이라도 발견한 듯했다. 지민도 마찬가지로 태형이 신기했다. 어디 그룹 자제라고, 도련님이라고 들었는데 똑같이 평범했다. 심지어 취미도 잘 맞고 말도 잘 통했다. 그 이후 태형은 지민의 집에 밥 먹듯 드나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김태형이 드나들기 시작하더니, 아버지의 또 다른 과외생도 지민의 집으로 찾아왔다. 이름이 전정국이었다. 셋 중 수업을 꼬박꼬박 듣는 이는 오직 전정국 한 명이었다. 지민은 아버지를 위해 대충 시늉만 했고, 태형은 하고 싶어서 한다더니 지민과 장난 치는 쪽을 더 좋아했다. 지민도 태형과 장난 치는 시간이 더 재미있었다. 우리 전쟁놀이 하자. 내가 대장. 지민이 당당히 가슴을 펴고 말하면 태형이 신이 나 따라왔다. 난 부대장. 두 살 어린 정국은 끌려와 강제로 쫄병 역할을 해야만 했다.


 박지민과 김태형 둘간의 관계에서 또 다른 사건이 생겨났다. 중학교 2학년의 어느 날이었다. 박지민의 꿈에 김태형이 나타났다. 그것도 옷을 홀딱 벗고. 맨몸으로 김태형과 침대를 한바탕 굴러다녔다. 아침에 일어나 축축한 속옷을 확인한 지민은 머리를 쥐어뜯었다. 씨발, 미친, 돌았냐. 미친 일이었다. 내가 남자를? 내가 친구를? 그것도 김태형을? 오 신이시여. 하늘에서 거대한 망치가 내려와 대가리를 쳐줬으면 싶었다.


 게이? 거기까진 쿨하게 납득할 수 있다. 태생이 게이였구나. 그렇구나. 댓츠 오케이. 부모님한테 손자는 못 안겨드리겠구나. 그런데 김태형이 꿈에 나왔단 사실은 납득이 안됐다. 이미 김태형이랑은 볼 거 못 볼 거 다 본 사이였다. 게다가 반드시 안 되는 이유가 한 가지 더 있었다. 불과 3일전. 지민아 얘 어때? 예쁘네. 태형이 내민 화면 속 귀엽게 생긴 여자아이가 윙크를 하고 있었다. 그 아이는 그날 김태형의 첫 여자친구 자리로 등극했다.


 지민은 합리화했다. 김태형이 좀 잘생겼잖아. 여태 박지민이 본 살아 숨쉬는 인간 중에서 제일 잘생긴 건 김태형이었다. 그래서 착각 하는 거다. 내가 게이니까 은연 중에 잘생긴 사람이랑 섹스를 하고 싶었던 거야. 내일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랑 섹스 할 거고 다다음날은 톰크루즈가 꿈에 나올 거야. 그러나 바람이 무색하게도 또 김태형이 나왔다. 질펀하게 침대를 뒹굴었다. 태태 너무 좋아. 지민은 꿈속 김태형의 머리를 감싸 안고 키스를 퍼부어댔다. 일어나고는 줄줄 울면서 속옷을 빨았다. 이 새끼는 내 꿈이 지네 집이냐고. 왜 자꾸 나오냐고. 생각해보니 원래도 김태형은 지민의 방을 제 집 드나들 듯 드나들었다. 정말 좆같았다.


 참담한 현실에 내팽개쳐진 박지민은 살기 위한 방안을 모색했다. 일단, 가장 먼저 정신과 상담을 받았다. 마스크를 쓰고 모자를 푹 눌러 쓴 지민은 좀비 같은 몰골로 상담실을 기어들어갔다. 나이답지 않게 인생의 모든 고통을 맛 본 목소리로 골골거렸다. 여기 상담 예약한 박지민이라고 하는데요. 선생님, 제 이야기를 한번 들어보실래요?


 저한테 친구가 있어요. 걔는 남자고 저랑 8살때부터 친구였어요. 걔가 누구냐면…그냥 태태라고 부를게요. 태태는 잘생겼어요. 여자애들한테 인기 제일 많아요. 여자애들 말로는 아이돌 같대요. 빠지는 게 없어요. 성격도 좋고 심지어 돈도 많아요. 태태 아빠가 대한민국에서 제일 부자일 거에요. 태태랑 저는 서로 평생 가자고 약속했어요. 베스트 프렌드 그거 하기로요. 그런데 며칠 전에 제 꿈에 태태가 나왔어요. 그…모, 모, 몽정 그거였는데요. 지금 한 세 번 정도 나왔어요. 선생님, 이게 혹시 좋아해서 그러는 건가요? 분노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 꿈 꾸기 한 일주일 전쯤에 걔가 제 이어폰 박살냈거든요. 그 이어폰 진짜 비쌌어요. 두 달 용돈 꼬박 모아서 산 거예요. 그날 너무 화나서 태태한테 이어폰 한쪽 부숴졌으니까 니 팔도 한 쪽 부숴버린다고 했거든요. 걔를 보면 심장이 뛰는 이유는 역시 분노인가요? 분노겠죠? 원래 너무 화가 나면 심장이 팔딱거리잖아요. 아 잠시만요. 방금 태태한테 연락이 와서…아 죄송해요. 저 가봐도 될까요? 얘가 자전거랑 부딪혔대요.


 의사는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지민 학생, 지금 혼란스러운 나이라 그럴 수 있어요. 남들과 다르다는 게 조금 힘들 수 있죠. 서로 같은 성별을 사랑한다는 게 납득하기 힘든 결과일 수도 있어요. 지민은 정신과에 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게이인 건 괜찮아요. 근데 그 상대가 가장 친한 친구라는 게 저는 쪼끔. 그렇게 말하려는 찰나, 의사는 검사지를 꺼내 지민 앞으로 내밀었다.



“우리 한번 열심히 치료해봅시다. 동성애는 치료하면 나을 수 있어요.”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웃는 의사를 빤히 바라보던 지민은 그대로 뒤돌아 나왔다. 너무 화가 나면 진짜 심장이 팔딱거리긴 하더라. 그런데 김태형을 생각하면 팔딱거리는 느낌과는 조금 달랐다. 이렇게라도 알려줘서 참 고맙네요, 이 씹새끼야. 지민은 잡아놓았던 나머지 정신과 예약을 싹 다 취소했다.


 지민은 그 다음으로 신을 찾았다. 사람의 힘으로는 부정할 수 없으니 신의 힘을 빌리기로 했다. 교회는 주말마다 한번씩 나가야만 했다. 한번 나가보니 교회는 꽤 괜찮았다. 사람들은 친절했고 맛있는 간식도 줬다. 좋은 곳이구나. 지민은 다음에도 오겠냐는 목사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무언가 불만에 가득 찬 얼굴로 태형이 지민에게 퉁퉁거렸다.



“너 그거 맨날 가야 돼? 그냥 빠져. 나는 누구랑 놀라고.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냐? 나 이렇게 버릴 수 있어?”

“빠지면 안돼. 그리고 누가 보면 내가 1년은 그런 줄 알겠는데 2주일 나갔고, 일요일 한번만 갔거든.”

“나 심심해.”

“여자친구랑 놀아.”

“학원 갔어.”

“너도 원래 수업들을 시간 아니야? 이 사기꾼아. 너 아빠한테 아프다고 했다며.”

“어차피 그건 한두 번도 아닌데? 새삼스럽게.”



 태형이 뻔뻔하게 말했다. 실제로 그렇긴 하다. 이미 아프다고 빠진 횟수만 다 합하면 김태형은 침대에서 한 발자국도 못 움직이는 병약한 부잣집 도련님이었다. 그 증거로 7년간 배웠으면서 김태형은 아직도 트럼펫 초급 클래스에 머물러있었다. 지민은 일순 할 말이 사라져 묵묵히 가방을 쌌다. 어쨌든 난 가야 돼. 넌 알아서 놀아. 태형은 입술을 삐죽 내밀더니 지민의 가방 끈을 덥석 잡고 선언했다.



“나도 갈래.”

“뭐? 네가 왜 와.”

“어딘지 봐야겠어. 막 사이비 같은 건지 아닌지 내가 확인할 거야. 지민이 너는 그런 거 잘 구분 못하잖아.”



 김태형을 머릿속에서 퇴치하기 위해 가는 건데 본체가 따라온단다. 뭐 이런 거지같은. 지민은 태형을 뜯어말렸다. 하느님은 너 싫어해. 돈 많은 사람 싫어함. 말도 안 되는 개소리까지 던져봤으나 김태형은 부득불 우겨 따라왔다. 그러더니 예배시간 내내 대놓고 쿨쿨 잤다. 지민은 태형의 뒤통수를 꼭 노려본 다음 목사의 말에 집중했다.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동성애는 죄악, 그들은 타락한 욕망에 눈 먼 죄인입니다. 유황이 들끓는 지옥불에 떨어져 평생을 고통 받아야 마땅합니다. 더러운 짓을 일삼는 그들을 멀리합시다.”



 그 정신과 의사가 이 교회를 다녔나? 멍하니 생각하며 지민은 책상에 머리를 대고 숙면을 취하고 있는 태형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근데 하느님 이렇게 잘생긴 얼굴을 보고 어떻게 안 넘어갈 수 있어요? 이 잘생긴 얼굴이 어떻게 악이에요? 솔직히 악은 아니잖아요. 이 얼굴 가지고 태어나느라 수고했다는 말을 해줘도 모자란 판에.


 지민은 태형의 옆구리를 찔러 깨웠다. 뭐야. 끝났어? 태형이 기지개를 키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지민은 가방을 한쪽 팔에 끼고 일어났다. 별로 재미 없어서. 그냥 노래방 갈래? 그 한마디에 단번에 생기를 되찾아 신이 난 태형이 지민을 한쪽 팔에 끼고 나왔다. 어, 존나 가고 싶어. 당장 가자. 활짝 네모입을 만들어가며 시원하게 웃는다. 너무 잘생겨서 심장이 아플 지경이었다.


 일련의 부정과정을 거친 지민은 결국 수긍하고야 말았다. 박지민은 김태형을 좋아한다. 그리고 그렇게 눈을 감았다 뜨니 세월은 길게 흘러있었다. 박지민과 김태형은 성인이 됐다.





***






 고시생 지민은 눈을 질끈 감았다. 제발 하느님 저는 여기까지가 한계입니다. 더 이상 이 좆 같은 원룸에서 법전만 끌어안고 살 수 없어요. 8개월을 집 밖으로 나가지 않고 살았단 말이에요. 이건 사람이 사는 게 아니에요. 저도 사람입니다. 살려주세요. 알아들어요? 또 떨어지면, 그럴 일은 없겠지만 진짜로 떨어트리시면, 못하면 자살할 거예요, 시발. 자살할 거라고요. 하느님 알겠어요? 저 합격 안 시켜주시면 자살할거라고요.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개도 안 먹을 시리얼과 닭가슴살, 비타민 영양제를 꾸역꾸역 먹으며 사는 삶을 3개월만 더 거쳤다간 위장 벽이 다 뜯어질 거다. 그러느니 자살하지. 제발 합격. 침을 꿀꺽 삼킨 지민은 믿는 신도 없으면서 장차 30분의 합격기도를 외웠다. 엉엉 울었다가, 간절하게 빌었다가, 화도 냈다가. 그리고 마침내 간신히 사법고시 2차시험 합격자명단 파일을 열었다. 실핏줄이 다 터진 눈으로 명단을 주르륵 읽어 내려갔다.



“…….”



 지민은 볼을 꼬집고 눈을 껌뻑거리며  모니터를 두 손으로 부여잡았다.



 11136105 박지민



 진짜 박지민이라고 쓰여있었다. 앞구르기를 하면서 봐도 물구나무를 서서 봐도 눈을 백 번 감았다 뜨고 봐도 박지민이었고, 제 수험번호였다. 미친, 합격, 합격, 미친, 합격. 어느새 지민의 눈에서 주르륵 눈물이 흘러내렸다. 드디어, 흑, 드디어어. 기쁨의 눈물은 뜨거웠다. 몇 분을 훌쩍거리다 구석에 처박아놨던 수험생용 핸드폰을 꺼냈다. 어서 빨리 이 소식을 누군가에게 알리고 싶었다. 누구보다도 김태형이 먼저 떠올랐다. 짝사랑에 눈이 멀어버린 사람이란 어쩔 수 없는 생물이니.


 마침내 달칵 전화가 걸리고 여보세요, 하는 김태형 특유의 저음이 들렸다. 한 달만이었다.



“태형아 나….”

[지민아 나 결혼해.] 



 그 순간 올라가있던 지민의 입꼬리가 그대로 동상이 되어 파르르 떨렸다. 누군가 스탑워치 버튼이라도 딱 눌러놓은 것 같았다. 방금 태형의 말이 동굴 속 비명처럼 머릿속에 울려퍼진다. 결혼, 결혼, 결혼…. 사람은 원래 너무 어이가 없으면 현실 상황을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 지민이 멍청히 되물었다.



“…뭐…라고?”

[타이밍 죽이네, 박지민. 너한테 말 못하고 하는 건가 했는데. 아버지랑 타협 봤어. 태명물산 물려받는 대신 결혼하기로. 잘 됐지?]



 꿈인가? 지민은 태형의 목소리가 멀어지는 기현상을 체험했다. 흐릿해지더니 점점 안 들린다.



[근데 존나 하기 싫어. 튀고 싶다. 결혼하면 귀찮은 일 투성이잖아.]

“…….”

[야 너 전화해도 괜, 아 네 내려요. 나 지금 신부 만나야 된대. 좀 이따 연락해.]

“…….”

[지민아? 대답 안 해?]

“…….”

[야 박지, 아 네 알겠다고요. 간다고요. 연락할게.]



 짜증스러운 태형의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전화는 끊겼다. 지민은 태풍이 몰아치듯 끝난 전화를 멍하니 붙들고 서있었다. 전화 끊긴 수화음만 흘러나왔다. 지민은 한참 뒤에야 느린 움직임으로 책상에 앉았다. 여전히 모니터 화면엔 사법고시 합격명단자가 떠있었다. 존나 꿈이다. 존나 꿈인 거다. 멍청히 마우스에 손을 올리고 합격자 파일을 닫은 다음 인터넷을 열었다. 포털사이트의 메인 기사 헤드라인이 굵은 글씨로 쓰여있었다.


 태명그룹 차남, 기산그룹 갑작스러운 혼인발표


 하느님 그냥 자살하라고 하는 거예요? 합격을 했는데 짝사랑을 결혼시키면 어떻게 해요. 아니면 합격했다고 이런 거예요? 지민은 어이가 없어 하, 헛숨을 뱉고 머리를 거칠게 한 손으로 쓸어 넘겼다. 세상에 이렇게 좆 같은 경우가 또 있나 싶다. 이건 존나 말이 안 된다. 말도 안돼. 어느새 지민의 눈에서 멈췄던 눈물이 다시 흘러내렸다. 이번 눈물은 슬픔의 눈물이었다. 신실한 독자도 아닌데 벌써 오늘만 신을 네 번 찾는다. 하느님…제가 너무 생명을 함부로 대했죠. 자살 안 할게요. 우리 거래해요. 합격한 거 물릴 테니까 김태형 결혼도 물려주세요.


 훌쩍거리던 지민은 결국 크게 소리 내어 엉엉 울었다. 진짜로 저 합격하면 얘한테 고백하려고 했단 말이에요.





 합격한 고시생은 합격 후에도 방에 틀어박혀있었다. 얼마나 방에서 혼자 눈물을 짜낸 건지 앞도 잘 안 보인다. 기력이 거의 다 사라졌을 즈음 지민은 지갑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 캄캄한 밤이었다. 발길이 어디 닿는지도 모르겠고 지하철을 타고 어디서 내리는 지도 신경 쓰지 않았다. 아무런 생각도 없었다. 보이는 아무 술집이나 밀고 들어가 술을 시켰다. 여기요, 여기 술 있는 대로 다 꺼내주세요.


 미친 듯이 마셨다. 그러다 보니 어떻게 된 건지 혼자 차지하던 테이블에 다른 사람들도 생겨났다. 몇 명이 합석한지도 몰랐다. 인사불성이 된 지민은 쓰러지듯 옆사람에게 기대며 깔깔 웃었다. 아 들어보세요. 제가 오늘 합격을 했는데 짝사랑하는 애가 결혼을 한다는 거예요. 진짜 웃기지 않아요? 어떤 사람이 드라마 같다며 맞장구를 쳐줬다. 


 이상하게도 그렇게 취했는데 가슴이 갑갑했다. 밖으로 나와 찬바람을 맞이해도 속이 뻥 뚫리지 않았다. 좆같았다. 취해서 그런지 모든 게 또 김태형으로 보였다. 가로등도 김태형, 전단지 속 영어강의를 가르쳐준다는 사람도 김태형, 횡단보도의 흰 줄도 김태형. 시발 진짜 짜증나. 대체 언제 흐른 건지 볼이 축축했다. 그대로 가로등 밑에 쭈그리고 앉아 눈물인지 콧물인지 모를 물을 줄줄 흘려 보냈다. 그리고 그때 지민의 어깨를 누가 건드렸다. 뒤를 돌아보니 남자였다. 망했다. 남자도 김태형으로 보인다.



“…나랑 자요.”



 눈물과 콧물에 떡이 된 얼굴로 하는 원나잇 신청이 먹힐 가능성은 몇이나 될까? 훌쩍거리며 지민은 쭈그려 앉은 채로 남자의 하얀 운동화를 덥석 잡았다.



“나랑 안 자면 안 놔줄 거야.”



 세상에서 그렇게 찌질한 협박은 몇 없을 거다. 불쌍했는지, 단순히 신기했는지 다행히도 남자가 지민의 손을 발로 차내는 일은 없었다. 지민은 그대로 남자와 모텔로 들어갔다. 섹스 하는 내내 눈물이 줄줄 나왔다. 처음 겪는 삽입에 의한 아픔 때문에 나는 눈물이지 김태형 때문에 우는 게 아니다. 남자한테 매달려 속삭였다. 아파요. 그런데 그냥 계속 그렇게 해주세요. 흔들리고 또 흔들리며 쓴 덩어리를 목구멍으로 꾸역꾸역 삼켜냈다. 타고 넘어간 조각들이 유리처럼 날카로워 심장이 찢겨 잘려나가는 느낌이었다. 얼굴도 모르는 남자와 보낸 하룻밤은 끔찍했고 아팠다. 정신에도 몸에도 온통 해롭기만 했다. 뭐가 어떠랴. 눈만 감았다 뜨면 모든 게 김태형인데. 가장 끔찍한 현실은 변하지 않는데. 어떻게 섹스가 끝나는지도 알지 못한 채 지민은 기절하듯 잠에 빠져들었다.


 지민을 깨운 건 전화벨 소리였다. 숙취와 더불어 아래에서부터 올라오는 말도 안 나오는 둔통에 정신을 못 차린 채 눈만 반절 뜨고 낑낑거렸다. 옆을 보니 남자는 사라지고 없었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얼굴까지 봤다면 충동적으로 벌인 원나잇에 자살하고 싶었을 거다. 지민은 까치집이 된 머리로 징하게 울리는 전화를 받았다. 목소리가 쩍쩍 갈라져 나왔다. 네…전화 받았어요….



[지민씨, 혹시 도련님한테 연락 못 받으셨나요?]

“…네?”



 태명그룹 회장, 김태형 아버지의 비서였다. 지민은 눈을 비비적거리며 폰을 고쳐 잡았다. 이렇게 모든 사람이 김태형과 박지민을 한 세트로 생각하는데 어떻게 잊을지 벌써부터 막막하다. 김태형한테 차임 표지판을 정수리에 꽂아놓을 수도 없고. 뭐 별 거 있냐. 앞으로 지금까지 한 마음고생 2배만 더 하면 되지 뭐. 존나 간단하네 아주. 한숨을 푹 쉰 지민은 체념한 마인드로 폰을 뒤적거렸다. 잠시만요, 확인해볼게요. 태형으로부터 온 세 통의 부재중 전화가 있었다. 어젯밤이었다.



“전화는 왔었어요. 그런데 제가 어젠 일이 있어서 못 받았거든요. 문자는 안 왔는데…무슨 일 있으세요?”

[도련님이 사라지셨어요.]



 골치 아프다는 김비서의 진한 한숨이 들린다. 네에!? 지민이 비명을 꽥 터뜨리며 눈을 크게 떴다.



“일주일 뒤에 약혼식 아니에요?”

[그렇죠…약혼식이죠….]



 김비서가 차마 내뱉지 못한 태형을 향한 욕이 번역되어 들렸다. 저도 다시 연락하고 알려드릴게요. 말만 그렇게 대답한 지민은 태형의 연락처를 누르는 대신 폰 화면을 닫았다. 이 순간 김태형의 목소리를 들으면 다시 울 것만 같았다. 차인 사람이 왜 전화해. 미친놈이 튀고 싶다더니 진짜 튀었나 보다. 모텔 밖으로 나왔다. 바람이 찼다. 마음이 허했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싶어 돈까스와 쫄면을 시켜먹으며 어제 모텔 값은 누가 냈지 하는 생각이나 했다. 그 다음엔 백화점에 가 3차시험에 입고 갈 유명브랜드의 수트를 샀다. 수트를 입고 가족들에게도 합격소식을 알렸다. 짧은 축하파티를 했다. 안 그랬다간 그대로 김태형한테 달려가 결혼하지 말라고 매달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지민은 현실수긍이 빠른 사람이었다. 태형을 마음 속에서 떠나 보내주기로 했다. 어차피 고백해도 이뤄질 가능성은 지극히 낮았다. 낙타가 치타보다 빠를 확률 정도. 김태형은 게이도 아니었고, 여태 사귄 여자친구만 한 트럭이 넘어가는 놈이었다. 그래. 사법고시 공부하느라 미쳐서 헛마음을 먹었던 거다. 사람이 몇 개월 동안 방에만 갇혀 법전만 들여다보면 미치는 게 당연하다. 고백은 무슨. 천천히 잊는다고 생각하니 눈앞이 깜깜했지만 그래도 해보기로 했다. 일단 축하부터 해줘야겠다. 그룹을 물려받기 싫다고 찡찡대던 태형은 태명물산을 물려받길 원했다. 왜냐하면, 태명물산이 가장 작은 계열사였으니까.


 합격 통보, 그리고 결혼 통보가 있던 날 이후 3일. 지민은 태형의 연락을 기다렸다. 매번 하루가 멀게 연락하는 사람이 김태형이었다. 지민이 사법고시 준비로 원룸에 틀어박혀 핸드폰의 전원까지 꺼버린 날, 김태형은 원룸 앞에 찾아와 문을 쾅쾅 두들겼다. 지민아, 우리 이렇게 헤어져 있어야 돼? 전화만 받아줘. 어디서 술을 마시고 온 건지 엉엉거리는 태형을 간신히 달래 돌려보낸 전적도 있었다.


 그러나 상황은 지민의 생각과는 정반대로 흘러갔다. 태형은 지민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다. 심지어 받지도 않았다. 이례적인 일이었다. 자느라, 아니면 게임하느라 전화를 못 받는 경우를 제외하고 김태형이 연락을 씹은 순간은 없었다. 얘 뭐야. 결혼 도망갔으면 도망간 거지 전화는 왜 씹는 거야. 내가 지랑 결혼해? 수십 통의 문자를 보냈고, 수백 통의 전화를 했다. 일 주일이 지났을 즘엔 진지하게 김비서와 실종 신고를 해야 되는 게 아니냐는 말을 나눴다. 바짝바짝 속이 타들어갔다.


 하다못해 지민은 최후의 보루로 태형의 아버지와도 약속을 잡았다. 태형의 아버지 김정호 회장은 지민을 마땅찮게 여기는 사람이었다. 그에게 지민은 고작 과외나 하라고 부른 한낱 교수의 아들일 뿐이었다. 깔리고 깔린 재벌가 친구들과의 인맥은 쌓지 않고 태형이 지민과 어울리는 점을 못마땅하게 취급했다. 어울리지 말라는 아버지의 말을 무시한 김태형이 지민을 베스트 프렌드로 삼았을 뿐이었다.


 지민은 화려하게 대리석이 깔린 태명그룹의 로비를 가로질렀다. 수트 재킷 안쪽에 넣어놓은 폰에서 진동이 왔다.



“여보세요, 김비서님?”

[지민씨 이제 걱정 놓으셔도 될 거 같아요. 도련님 찾았어요. 지금 유럽에 계세요.]

“네?”

[그날, 상견례 하신 날 밤 비행기 탑승자 명단에서 도련님을 찾았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모든 게 탁, 풀려버린 느낌이었다. 맥도 풀렸고, 다리도 풀렸고, 며칠간 태산같이 쌓인 김태형을 향한 걱정도 풀렸고, 굳게 묶여있다고 믿었던 우정의 연결고리도 풀렸다. 지민은 그대로 태명그룹 로비에 털퍽 주저앉았다. 김태형 진짜 이 새끼. 눈물나게 서러웠다. 진짜 씹새끼였다. 지 결혼하기 싫다고 얼굴 한번 안 보고 떠났다. 전화 안 받는다고 문자 하나 안 보내고. 억울하고 서러웠다.


 이건 배신이었다. 짝사랑하는 마음이고 뭐고, 김태형은 20년 우정을 바닥으로 내팽개쳐 버렸다. 그대로 지민은 어린아이처럼 소리 내어 엉엉 울었다. 사람들이 쳐다보건 말건, 태명그룹의 입구를 지키던 경호원이 달려오건 말건. 야 이 개씹새끼야, 허엉. 죽어버려. 죽여버릴 거야. 억울해. 누가, 누가 베스트 프렌드야.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마. 개자식아. 니 진짜 내 눈에 보이기만 해봐라. 산산조각을 내버릴 거니까, 근데 한 번은 돌아와서 싹싹 빌면 용서해줄 테니까 다시 돌아, 시발, 오지마. 오면 죽여버릴 거야. 태명그룹 로비의 대리석이 김태형이라도 되는 것마냥 주먹으로 퍽퍽 내리쳤다. 어느 샌가 식겁한 김비서가 내려와 지민을 질질 끌고 밖으로 나왔다. 아마 그가 아니었다면 박지민은 밤이 새도록 그러고 있었을 거다.


 박지민의 첫사랑은 한방에 작살이 났다. 그것도 일방적인 잠수이별로. 따지자면 김태형과 사귄 사이는 아니었으나, 나름 처참하게 차인 건 맞았다. 같이 19년을 알아온 전정국도 김태형과 연락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말 그대로 잠적이었다. 태형이 이렇게 완벽한 도주 루트를 짤 수 있는 대단한 인물이라는 사실을 처음 깨달았다. 맨날 지민아, 지민아 하면서 뒤만 졸졸 쫓아오던 순진한 우리 태형이는 대체 어디로 간 거야.


 결혼은 엎어졌다. 태명그룹과 기산그룹의 불화설이 모든 유명 포털사이트를 장식했다. 공식석상의 멘트는 전부 다 거짓말이었다. 신부 신랑, 양측간의 성격차이. 전부 다 거짓말인 게 뻔했다. 김태형은 신부 얼굴도 모른 채 결혼을 한다고 했을 거다. 정확히 따지면 물려받는 태명물산이 김태형의 신부였다. 지민은 어렵지 않게 태형의 아버지, 김정호 회장이 막대한 자금을 기산그룹에게 지불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인터넷에는 두 그룹의 병합으로 벌어질 주식시장의 변동 등 사회적인 측면을 주시하는 기사들이 연관기사로 떠돌아다녔다.


 눈물의 첫사랑 김태형은 떠났다. 그래도 신기한 게 어떻게든 사람의 인생은 굴러간다는 점이다. 박지민은 사법고시 3차 면접시험을 봤다. 면접장에서 밥도 못 먹은 얼굴로 억지로 멀쩡한 척 생글생글 웃었는데, 아마 그 표정이 좀비가 사람 살 뜯어먹고 웃는 것과 비슷했을 거다. 면접시험관들이 대충 무슨 질문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대답에 김태형이라는 이름이 섞이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다. 그래도 감방에 갇혔다 나온 싸이코만 아니면 통과시켜준다는 3차시험답게 지민은 합격을 거머쥐었다.


 사법연수원으로 짐을 싸서 들어갔다. 그곳에서 2년을 또 썩었고, 온갖 선 자리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찾아가볼까 고민하던 6개월, 다시 먼저 연락을 해볼까 고민하던 1년. 기억 속에 박힌 김태형을 하나하나 꺼내 구겨버리길 또 1년. 박살 난 첫사랑을 끌어안고 어떻게 처리할지 발을 동동 구르기만 해도 시간이 술술 흘러갔다. 책에 파묻혀 눈만 뜨면 공부하는 기계가 되어 썩은 끝에, 지민은 검사를 선택했고 지방지검으로 발령받았다. 다른 대부분의 신입검사들도 마찬가지로 지방으로 발령을 받았다.


 박지민의 짝사랑이자 첫사랑은 그 누구보다 조용한 종말을 맞았다. 꼬박 3년이 걸렸다. 마른 빨래 접듯 김태형을 차곡차곡 접어 마음 속에서 내쫓았다. 다시 보면 아무렇지 않게 웃어줄 수도 있었다. 정말 둘도 없는 친구의 자리에서. 야 이 개자식아. 손가락이 부러졌냐? 연락 한번 못해? 그렇게 장난 섞인 서운함을 섞으면서 장난도 칠 수 있다. 정말로 그랬다. 야 그거 아냐? 내가 한 때 너 진짜 좋아했었다, 하는 농담까지는 조금 생각해봐야겠지만.


 그렇게 김태형은 떠났고 박지민은 남았다. 눈 감았다 뜨니 5년이 흘러있었다. 그리고 그 5년이 흐른 어느 날, 박지민과 김태형의 관계에 새로운 전환점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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