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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8 03:34

[슈짐] 야담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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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0815 >









 뱃길을 따라 며칠을 내려갔다. 나룻배라 속도가 빠르지는 아니했다. 흘러내려가는 동안 밤은 대부분 고요했으나, 동향을 보기 위해 땅에 가까이 붙어 가니 괴물들의 울음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그륵. 크르륵. 키르륵…. 세 사람은 숨을 죽인 채 땅에서부터 떨어지고 몸을 낮췄다. 담언은 벌벌 떨며 머리와 귀를 꼭 막고 아예 땅바닥에 얼굴을 처박았다. 지민은 양손을 꼭 쥐었다. 손에서 자꾸만 땀이 났다. 차가워지는 손을 꼭 쥐고만 있는데, 돌연 큰 손이 나타나더니 지민의 손을 꽉 잡았다. 윤기는 지민 쪽을 바라보고 있지도 않았다.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땅을 주시하고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괜찮아졌다.


 낮이 되어 나루터를 발견하고 배를 정박했다. 나루터에는 역시나 사람이 없었다. 윤기는 담언과 지민을 나룻배에 두었다. 넌 여기 있고 넌 도련님을 지켜라. 지민이 따라가겠다고 했으나 다친 다리로는 푹 쉬어야 한다는 담언의 말 때문에 무산되었다. 윤기는 홀로 마을을 돌아다니며 쓸모가 있어 보이는 것들을 가져왔다. 물과 몇 가지 없는 식량, 그리고 모포를 챙겨왔다. 배는 다시 그렇게 강 위를 흘렀다. 우선 사람이 있는 곳까지. 그것이 목표였다.


 이제 밤이 되면 담언은 코를 골며 가장 먼저 잠에 들었다. 돌아가며 번을 섰는데, 윤기가 새벽녘을 담당하고 담언이 새벽부터 이른 아침까지 사위를 살폈다. 지민은 한밤 중을 맡았는데 윤기가 계속하여 곁을 지켰다.



“날이 차다.”



 지민의 등 뒤로 모포가 둘러진다. 지민은 윤기를 보고는 작게 미소 지었다. 형님. 윤기가 지민의 반대편에 마주 앉는다.



“저 자를 믿느냐.”

“믿는 수 밖에 없지요. 담언이 도와준 덕분에 다리도 거의 나은 걸요.”

“사람은 본디 믿을 수 없는 존재다. 모두 믿어선 안 된다.”

“그럼 형님도요?”



 그 말에 윤기의 입이 다물린다. 밤만 되면 강에 쏟아지는 달빛 때문일까. 도련님의 얼굴이 유난히 말갛다. 이미 잔뜩 신뢰감 가득한 눈빛을 건네는 지민을 보면서, 윤기는 마주친 시선을 피했다.



“…나도 믿지 마라.”



 지민이 푸스스 웃는다. 깃털이 흩날리는 것처럼 가볍다.



“형님을 안 믿으면 제가 그 누구를 믿을 수 있습니까.”

“아니. 믿지마.”

“제 마음대로 할 겁니다.”

“도련님이라고는 하나 있는 게 아주 어렸을 때나 말 잘 들었지. 커서는 말도 안 들어먹고.”



 지민이 헤실헤실 웃는다. 웃기는. 윤기가 뒷목을 긁적거렸다. 무어라 타박했지만 효과는 가장 컸다. 민윤기의 입이 다물린다. 고작 한 떨기 미소에 민윤기의 마음이 다시 심란해진다. 당장이라도 제 품에 감싸 안아 가두고 싶은 음험한 마음 품고 있는 놈한테 믿음이라니. 이런 걸 알면 믿는다 할 수 있으려나.



“형님 있잖습니까. 아무래도 세상이 이리 된 건 제 탓 같습니다. 원망하고 또 원망했더니 이리 된 것 같습니다….”



 지민이 물끄러미 강가를 응시한다. 눈빛이 어둡다.



“뭘 원망했길래 그러냐.”

“전부…전부 다요. 아버지 어머니의 뜻대로 얌전히 공부하고 시험에 합격하여 궁으로 갔다면 이런 일이 없었을 거 같습니다.”

“양반이라 그러냐? 대단한 자부심이 있네. 네가 무슨 무당이라도 되는 줄 아느냐. 바란다고 다 이루어지게.”



 윤기가 코웃음을 쳤다.



“네 뜻대로 모든 게 이루어졌다면 그리 기방 문지방 닳도록 놀러 다녔어도 이미 시험에 급제했겠지.”

“아 형님.”



 지민이 샐쭉 윤기를 노려본다. 왜. 틀리느냐. 그리 많이 취해 노비들 등에 업혀 돌아온 게 어디 한두 번이어야지. 윤기가 심드렁하니 말한다. 지민이 입술을 작게 샐쭉였다.



“문지방이 닳는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그랬나.”



 바닥에 떨어지는 지민의 눈을 보며 윤기는 가벼이 넘어가준다. 학당에 다녀 도령들과 어울려 다니며 지민은 기방에도 종종 출입했다. 그리하면 매번 어찌나 술을 마시는지 덕대의 등에 업혀 돌아오곤 했다. 매번 곁을 지키는 윤기가 가길 몇 번, 박 대감이 직접 윤기 대신 덕대에게 지민을 조용히 데리고 오라 일렀다. 박 대감은 총명하다 소문난 아들이 고주망태로 취해 돌아오는 것을 영 마땅찮아 했다. 혼인 전까지 지민을 꽤나 냉랭한 태도로 대하기도 했다.


 지민이 흘끔 윤기의 눈치를 본다. 그러더니 조심스레 말했다.



“…비록 상황이 이리 됐지만 저는 형님이 제 곁에 있어 기쁩니다.”

“…….”

“안아주시면 아니 됩니까?”



 날이 추운데…. 아프기도 하고…. 지민이 흘끔흘끔 윤기를 보며 뒷말을 흐린다. 이만 화해하자는 의미인가 보다. 저 말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제게 저리 쓰지. 윤기는 올라오는 속을 누르며 지민에게 모포를 던졌다.



“추우냐? 이것도 걸쳐라.”

“동굴에서는 잘만 안아주셨으면서….”

“지금은 싫다.”

“어찌하여요? 형님도 많이 변했습니다. 하나 있는 형님이 어렸을 적에는 매번 업히라 안기라 했으면서 컸다고 아우를 이리 내박치고.”

“네가 워낙 천둥벌거숭이였어야지. 양반 체통이란 체통은 다 팔아먹고.”

“지금도 팔아먹었습니다.”

“마음에 없는 말 하지 말고 자라.”

“참말인데. 그리고 진짜로 춥습니다.”



 윤기는 저 말이 뻔히 거짓임을 안다. 지민은 원체 사람의 온기를 좋아했다. 기방에 그리 들락거린 이유가 있겠지. 지민이 꼭 길 잃은 새끼 강아지마냥 윤기를 아롱거리는 눈으로 본다. 하늘에 떠 있는 모든 별들이 지민의 눈 속으로 빨려 들어가서, 그곳에서 빛이 난다. 조금 고민 끝에 윤기는 결국 팔을 벌리려 한다. 지민이 방싯 웃으며 윤기에게 다가가려던 찰나였다.



“으으, 허리가 왜 이리 아픈…으음?”



 담언이 팔을 두들기며 일어난다. 흔들리는 배에서 계속하여 구겨져 잤더니 몸이 버티질 못하는 듯했다. 부시시한 얼굴로 앞을 보는데, 박 도령이 파드득 놀라며 넘어지듯 민 도령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앉는다. 늘 곧은 자세로 얌전히 앉아있던 박 도령이 왜…. 담언은 비몽사몽 잠이 덜 깬 순간에도 의문을 품었다. 한양 그 어떤 양반보다도 바른 자세를 유지하는 이인데.



“역시 박 도령도 허리가 아픈 건가 보오. 허어, 이 배가 참. 어서 다른 나루터에서 좋은 배를 찾아야 할 텐데. 어구구…. 아니 민 도령 왜 날 또 그리 죽일 듯 보는 거요. 많이 피곤하오? 아! 허허. 내 오해했소. 민 도령은 평소와 다름 없구려. 그런데 좀 피곤하지 않소? 민 도령도 잠을 충분히 자두시오.”

“너나 어서 다시 자라.”

“걱정해주어 고맙소. 아니 근데 민 도령, 다른 때보다 더 산적 같은 얼굴인 거 같기도…큼. 나는 조금 뒤 일어나야 하니 다시 자보겠소. 부탁하오.”



 담언은 바닥에 머리를 대자마자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잠에 빠진다. 지민은 담언의 숨소리가 일정해질 때까지 기다리더니 꼬물꼬물 돌아누워 윤기를 올려다본다. 다 끝난 겁니까? 그리 묻는 눈이다. 다 큰 사내가 안기는 게 창피한 줄은 아는 모양이다. 윤기는 지민의 눈을 손바닥으로 가려주었다. 달빛도 완전히 사라지고 어둠이 지민의 주변에 눌러앉는다.



“잡생각은 그만하고 이만 자라. 그 조그만 머리통에 대체 무슨 생각이 그리 많냐.”



 지민은 제 얼굴을 덮은 윤기의 손에 살을 부비적거린다. 윤기는 말랑한 살에 저도 모르게 들어갈 뻔한 힘을 꾹 눌러 참았다. 지민은 연이어 제 손을 윤기의 손 위로 올려 덮어 포갰다. 눈이 가려진 지민이 입을 열다.



“형님도 제가 곁에 있어 기쁜 게 맞지요?”

“…그래.”

“참 다행입니다. 서로가 있을 수 있어서.”

“…….”

“해가 뜨면 바로 깨워주세요. 제가 형님 대신 할게요.”



 다정한 목소리는 늘 윤기의 마음을 울리는 어여쁜 말만 한다. 윤기는 애써 먼 강가를 보며 울렁거리는 마음을 내리 눌렀다. 기쁘기만 하겠느냐. 지민아 나는 사실 이리 세상이 멸해 좋다. 너와 둘만 있을 수 있게 되어 좋다. 네가 혼인을 하지 않아 좋다. 여인을 품지 않아 좋다. 튀어나가려는 말들을 목구멍 안에 묶어두었다.


 머지않아 지민의 고른 숨결이 퍼진다. 윤기는 처음으로 담언을 배에 들이길 잘했다고 생각한다. 둘만 남아있다면 넘치는 마음이 밖으로 새어 나왔을 테니.








 사람 마음이라는 게 이토록 간사하다. 윤기는 지민과 거리를 두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지민이 혼인을 한다고 했을 때만 해도 곁에 머무르기만 해도 좋다 여겼는데, 저만 바라보는 해말간 얼굴이 다가오고 손을 잡아오니 같이 붙잡고 싶어졌다. 그리하여 마음이 흔들린다. 감히 하늘 같은 도련님을 제 옆에 주저앉히고 싶게 된다. 스스로의 모습이 웃겼다. 기만이지 않는가. 이미 그 하늘을 한 번 탐했다가 비참하게 내쳐졌음에도 또 원하다니.



“박 도령 회복력이 아주 좋소! 뛰지만 않는다면 걸어도 될 것 같소.”

“다 담언이 잘 도와준 덕분입니다. 훌륭한 의술이어요.”

“허어. 참말로 신기하단 말이오. 박 도령은 입만 열면 이리 꽃 같은 말이 나오고 같이 다니는데 민 도령은 입만 열면 칼을 꽂고. 이리 같이 붙어있는데 서로를 닮지 않는 사람은 처음 보오.”

“네 눈치도 신기하다. 배에서 내내 붙어있었음에도 단 하나도 늘지 않았다는 게.”

“허허허. 내 자기 주장이 좀 강한 편이오.”



 담언은 목이 졸려 죽을 뻔한 위기를 그새 까먹기라도 한 건지, 아니면 원래부터 배포가 큰 건지 허허실실 웃으며 윤기를 긁어대는 말을 자주했다. 허어. 민 도령의 표현은 매우 상스럽소. 박 도령에게 교정을 받아보는 건 어떻소? 하고 싶은 말이란 말은 모조리 따박따박 잘 떠들었다. 낚시도 한다고 설쳤다가 제 정신이냐며 널 미끼로 쓰겠다고 다시 목덜미를 잡아채는 윤기에게 잘못 생각했다고 빈 뒤에도 그랬다. 지민은 그 모습을 보며 담언이 어찌 생명력이 긴 지 알 것 같다고 말했다. 왕께서 보시는 눈이 있구나. 밀사로 아주 적합한 인재로다….


 서서히 식량이 다시금 떨어지고 있었다. 다음 나루터에서 배를 멈춰 세우고 필요한 것들을 가져오기로 했다. 이번에도 윤기가 홀로 휙 뛰어 올라간다. 지민이 그 뒤를 잽싸게 쫓았다.



“저도 같이 가요.”

“가만히 배에 있어라.”

“아, 박 도령! 걷는 게 오히려 굳어진 근육을 풀어주기에는 좋소. 대신 천천히 다녀야 하오!”

“들었지요?”



 윤기는 제 편을 들어주지 않는 담언을 노려보았다. 담언은 전혀 움츠러들지 않고 지민에게 눈을 찡긋거렸다. 지민 역시 마주치며 미소를 짓고 고개를 끄덕여준다. 서역은 어떤 곳이냐 묻는 지민에게 이것저것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알려주더니 꽤 많이 친해진 듯했다. 윤기는 미간을 야트막하게 구겼다. 어쩔 수 없다.



“놓치지 말고 잘 따라와라.”

“그거는 제가 참 잘하는 부분 아니옵니까? 염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윤기는 먼저 앞장 서서 마을의 동태를 확인했다. 다행히도 핏자국은 많이 보이지 않았다. 괴물에게 피해를 입은 사람보다 피난을 떠난 사람들이 많은 듯했다. 저잣거리였을 곳은 마찬가지로 폐허였다. 그 사이를 뒤져 식량을 구하고 우물가에서 물을 확보했다. 텅 비어있던 자루가 어느덧 두둑하게 찼다. 윤기가 식량을 확인하는 사이, 지민은 기와집의 안채를 확인했다. 나온 손에는 붓과 먹이 들려있었다.



“형님! 여기가 어디인지 알아냈습니다. 경상좌도의 끝자락입니다. 조만간 배에서 내려 문경 새재를 통해 한양으로 올라가면 될 것 같사옵니다.”

“그래. 그럼 필요한 건 다 챙긴 거냐. 이만 배로 돌아가자.”



 지민이 지도를 구해왔다. 꽤나 잘 사는 양반이었던 모양이다. 윤기는 바로 자루를 어깨에 짊어지고 먼저 앞으로 향했다. 지민과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지민이 재빨리 윤기의 옆으로 후다닥 따라붙는다.



“형님 만약에 말입니다. 한양에 가면 무얼 하고 싶습니까?”

“아무런 생각 없다.”

“왜요? 처음 가는 한양이 아닙니까. 비록 상황이 이렇지만…. 괴물들이 사라지면 무얼 가장 먼저 하고 싶습니까? 한양을 구경하고 온 도령들이 그랬는데, 한양에는 신기한 것들이 아주 가득하답니다. 서적도 많고 등 축제도 어마어마하게 크게 열린다 했어요. 여러 가지 할 수 있는 일들이 많을 겁니다. 형님은 글도 곧잘 배우셨으니 글 공부를 더 해도, 아니면 또 다른 배워보고 싶은 게 있습니까?”

“종놈이 무슨 꿈이냐. 네가 하고 싶은 거 해라. 따라갈 테니.”

“아닙니다. 한양에 도착하고부터는 형님은 제 종이 아닙니다.”



 윤기가 발걸음을 멈춘다. 지민 역시 윤기를 따라 멈춘다. 윤기를 바라보는 눈이 당당했다. 어딘가 기대에 물들어 있기도 했다.



“그게 무슨 소리냐.”

“담언이 밀사라 그랬지요. 왕께서 포상을 내리실 거라고 했습니다. 그럼 면천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우리 마을에서 본 괴물들과 괴물들이 어떤 것에 약한지, 어찌 상대했는지 소상히 고하면 괴물들을 해치우는데 공을 세우는 게 아닙니까?”



 단 한 번도 백정에서 벗어난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더 이상은 지민의 노비가 아니게 된다는 건 정말로,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상상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라. 가자.”

“왜 말이 안 됩니까? 받을 수 있습니다. 형님이 자유롭게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살 수 있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담언과 한양을 가는 겁니다.”

“너….”



 한양을 가는 이유가 이 때문이라고? 모든 위험을 무릎 쓰고 고작 자신 때문에? 윤기가 미간을 구긴다. 그러나 지민은 되려 문제가 될 게 뭐가 있냐는 듯 당당하다. 그리고 나라에 큰 일이 터졌는데 가만히 손을 놓고 있을 수도 없지 않습니까. 윤기는 지민이 고집을 접지 않을 것을 알기에 입을 다무는 쪽을 택했다. 다시 앞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지민이 쫄랑쫄랑 따라오며 종알거린다.



“형님 무얼 하고 싶습니까? 저는 형님이 무예를 배워도 참 잘할 것 같습니다. 그 동안 형님도 하고 싶은 게 많으셨을 것 아닙니까. 숨길 필요 없습니다. 저한테만 먼저 알려주시어요. 이제는 제가 형님이 원하는 게 뭐든지 도와드리겠습니다.”

“…생각해본 적 없다. 난 됐으니 네가 하고픈 거 해라. 따를 테니.”

“그건 이제 아니 됩니다. 면천을 받으면 형님은 이제 제 종이 아닌데, 하기 싫은 일은 할 필요 없습니다.”

“이미 말했지 않아. 네가 원하는 게 내가 가는 길이라고. 됐다. 더는 묻지 마라.”

“그런 말이 어디 있습니까? 형님도 원하는 걸 가져봐야지요. 언제까지고 형님이 저만 돌보며 살 순 없는 것 아닙니까. 제 곁에만 머무를 필요 없습니다. 형님은 자유인 겁니다.”



 지민이 단호하게 말한다. 말을 아끼며 넘어가려던 윤기가 결국 지민을 돌아본다.



“너는 내가 네 곁을 떠난다고 해도 상관 없는 거냐?”

“그건….”



 지민이 머뭇거린다. 그러나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형님이 원한다면…저는 형님이 행복한 게 가장 좋습니다.”



 갉작거리며 긁히던 속이 이번엔 아예 화살로 푹 꿰뚫린다. 윤기의 얼굴이 무참히 일그러진다. 나는 네가 없으면 안 되는데. 자유라고 풀어주어 봤자 결국 네 곁인데. 너는 이리 날 쉽게 포기할 수 있는 거냐. 내가 곁에 있어 기쁘다 하였으면서. 내가 남은 전부라고 하였으면서. 지민의 마음이 자신과 다른 걸 알고 있으면서 이리 들으니 비참하고 또 비참했다. 이미 너덜거리는 연심이 또 날카롭게 베어 비명을 지른다.



“자유라 했느냐? 내가 바라는 게 무어냐 물었느냐? 그래. 있다.”



 백정으로 태어난 삶을 원망했지만 결국 민윤기는 그를 순응했다. 이제는 그것이 지민의 곁에 유일하게 남을 수 있는 방법이었으므로. 노비로 남아, 종으로 남으면 평생 지민의 곁에 붙어 살 수 있을 테니. 제 마음 부수며, 자라나는 연심을 쥐어뜯고 베어내고 또 베어내며 남으려고 결심했다. 그런데 이제는 그마저도 빼앗긴다. 무던히 참아냈던 마음이 끝내 터져버리고 말았다.



“내가 탐하는 건 너다. 줄 테냐?”



 늘 맑은 지민의 눈이 크게 벌어진다. 윤기는 여전히 일그러진 표정이었다가 한쪽 입매만 비틀어 올렸다. 자루가 바닥으로 툭 떨어진다.



“아. 뭐든 도와준다 하였지.”



 윤기는 그대로 지민의 뺨을 붙잡아 성급하게 입을 맞댔다. 무척이나 성급하고 거칠었다. 놀란 지민이 파드득 떤다. 그럼에도 윤기는 놔주는 법 없었다. 오히려 더 단단히 붙잡아 혀를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숨마저, 모든 생마저 다 앗아가 버릴 것 같은 접문이었다. 실제로 윤기는 그리 생각했다. 차라리 내가 괴물이어서 지민을 삼키고 함께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면. 그리한다면 이토록 참담하고도 비참한 연심도 사라질 텐데. 몸을 굳힌 지민이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윤기의 가슴팍을 민다.



“혀, 형, 으, 으음.”



 윤기는 잠시 입을 뗐다가 다시금 유달리 통통한 입술을 감쳐 물었다. 도련님. 하늘 같은 내 도련님. 저 밑 구석에 오래 처박아뒀던 연심은 한 번 밖으로 튀어나오니 주체할 수 없었다. 부드럽고 향긋했다. 윤기가 입에 담은 그 어떤 것보다 달았다. 평생 이리 붙어 있고 싶을 만큼.


 지민이 바동거리며 윤기의 가슴팍을 밀쳤지만 윤기는 밀려나지 않고 몇 번이나 고개를 틀어가며 다시금 달라붙었다. 힘의 차이가 크게 나서 꼼짝할 수 없다. 지민의 숨이 완전히 빨려버린다. 한참 만에야 입술이 떼어진다. 지민의 입술이 투명한 물기에 젖어 번들거렸다. 놀란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는 걸 윤기는 발견했다. 그를 못 본 척 말했다.



“봤느냐. 내가 믿지 말라고 했지 않아.”

“…….”

“이제부턴 내게 자꾸 하늘을 올려다보라고 하지 말아라.”



 지민은 여전히 지금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윤기는 그를 외면하고 다시금 자루를 주워 들었다. 그리고 난생 처음으로 도련님으로부터 일언반구 없이 먼저 등을 돌리고 발걸음을 옮겨 자리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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