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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럭키 스트라이크 17

by 토페 posted Jul 08,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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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로꼬 - 남아있어>











 지민은 이틀 동안 방에 처박혀 있다 붕어눈으로 등장했다. 아침식탁 박사장과 문여사가 젓가락을 쉽사리 들지 못하고 바라만 보자, 지민은 무어가 문제냐는 듯 열심히 밥을 푹푹 퍼먹었다. 맛있다고도 덧붙이며 무려 순식간에 두 그릇이나 먹고 방으로 돌아왔다. 문을 단단히 잠그고 창문도 모조리 잠갔다. 그리고 목청을 드높였다.


"좋아한다고 했잖아! 키스했잖아! 좋아하는 사람이랑만 하는 거라며! 뭐? 납치? 나압치이? 웃기시네!"


 아악! 짜증나! 세상 무너진 사람처럼 엉엉 울며 2일을 보내고 나니 화가 치밀어올랐다. 상실감과 배신감에 좌절한 가슴의 빈 공간을 지민은 오기로 꾹꾹 채워 넣었다. 풀 곳 없는 성난 미련이라고 해도 좋았다. 개자식. 고자자식. 아무리 정국을 씹어도 진정되지 않았다.


"날 까? 날 깠어? 깠냐고오오! 내가 아쉬울 줄 알아? 절대 아니거든? 돌아와서 받아달라고 빌기만 해봐라. 뭉개버릴 거야! 차버릴 거라고! 재수 없는 자식! 얼굴 빼고 볼 거도 없는 주제에!"


 지민은 성난 물소처럼 침대에 돌진해 베개가 정국이라도 되는 양 온 감정을 실어 퍽퍽 팼다. 화가 나 견딜 수가 없다. 한참을 활화산처럼 터져나오는 분노에 침대를 패면서 어깨를 바들바들 떨던 지민은 실 끊긴 인형처럼 이불에 머리를 픽 묻었다.

 실연초년생 지민은 하루에도 수천 번씩 팔랑거리는 마음에 휘둘렸다. 강제로 밀려난 마음이 억울해 정국을 씹고, 10분 뒤에는 남준을 불러 단칸방으로 가고 싶은 발걸음을 꾹 붙들어매느라 이불을 감고 데굴데굴 굴렀다. 아직 믿지 못하겠다. 전정국이 자신을 밀어냈다는 사실을 머리로는 아는데, 마음은 부정했다.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화가 차오르다가도 또 어느 순간 눈물이 퐁퐁 빠져나왔다. 빌어먹을 눈물샘. 울고 싶지 않은데 계속 눈물이 나 더욱 슬펐다. 이 나쁜 새끼 뭐가 좋다고. 말도 맨날 싸가지없게 하는 새끼인데. 사람은 왜 헷갈리게 해. 왜 좋아하는 척해. 선물을 왜 해줬어? 근데 내가 잘못했던 거 같아. 잘못했어. 나도 김태형이 그러면 싫었잖아. 전정국이 싫다고 하는데 너무 매달렸어. 그래, 다시 가서 빌어볼까. 근데 그러면, 구질구질하게 매달리면 더더더 싫어하지 않을까. 영영 얼굴 안 보겠다고 하면 어떡하지. 그건 자신 없는데.

 심지어 땅굴을 파고 들어가는 지민은 자신이 뻥뻥 차냈던 알파들에도 미안해졌다. 내가 너무 심하게 굴었었어…까이는 게 이렇게 아픈 건 줄 알았으면 좋은 말로 돌려 깠을 텐데…. 이불 안으로 파고 들어간 지민은 길 잃은 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솔직하게 슬프면 슬프다고, 아프면 아프다고 외쳤다. 서글픈 오메가의 페로몬이 넘실넘실 흘렀다. 정국이 밉고 서럽고, 또 한편으로는 달려와 눈물을 닦아주고 안아주었으면 싶었다. 어떤 위로와 말보다 그 손길 하나면 눈물을 그칠 자신을 알아 더 서러웠다. 언젠가 너무 그렇게 자존심도 없이 굴면 안 된다고 말하던 노인정 노인들의 말도 떠올랐다. 어떻게 해. 전정국 앞에만 서면 자존심이고 뭐고 그냥 좋아죽겠는데. 목소리가 듣고 싶다. 전정국이 보고 싶다. 자신이 찾아가 정국을 흔들어놓았다고 생각했는데, 정국이 자신에게 찾아왔다. 하나하나 추억을 꺼내보면 그리 좋던 순간들이 지금은 하나하나 뾰족한 송곳이 되어 가슴을 후벼팠다. 화내다 울다 지친 지민은 매일을 이불을 푹 덮고 건전지를 다 쓴 로봇처럼 축 처져버렸다.



 박사장은 애가 탔다. 세상에서 가장 곱게 키워놓은 자식이 이상증세를 보인다. 트레이드마크인 예쁜 눈웃음이 증발했다. 간단한 문제가 아닌 것 같으니 스스로 말할 때까지 기다려보라는 문여사의 충고를 듣고 며칠은 참았다지만, 더 놔두다간 하나뿐인 아들이 딱 죽겠지 싶었다. 큼큼, 헛기침하고 문을 두드려도 반응이 없는 방에 조심스럽게 들어갔다.


"우리 강아지 무슨 일 있어? 왜 이렇게 울고 그래, 아빠 마음 무너지게."
"…우는 거, 흑, 아냐. 그냥, 자기 멋대로, 흐윽!"


 박사장은 이불 속에 파묻혀 모기만 한 목소리로 대답하는 지민을 토닥토닥 두드려주었다. 우리 강아지, 아빠한테 말해봐. 아빠가 다 해결해줄게. 박사장은 하나뿐이라 온 애정과 정성을 퍼부어 키운 지민이 원하는 그 어떤 것이라도 들어줄 준비가 되어있었다.


"우리 강아지 뭐 사고 싶은 거 있으면 말만 해봐."
"……."
"옷? 응? 아니면 어떤 거."
"아빠…."


 박사장은 냉큼 오냐오냐하며 귀를 기울였다. 우리 아들 뭐가 문제야. 이불을 덮어쓴 채 지민이 연이어 중얼거렸다.


"토끼가 갔어…흑…."
"토, 토끼?"
"으응, 흐…토끼가, 토끼가…흐엉…!"


 작게 섞여나온 울음은 곧 크게 변했다. 으어헝, 토끼가아…! 섧게 우는 지민은 박사장이 무어라 말해도 듣지 않았다. 몸을 동그랗게 말고 의미 모를 토끼라는 말만 반복했다. 내가 토끼 진짜 좋아했나 봐, 토끼 아직도 좋은 거 같아. 박사장은 토끼타령에도 진지하게 물어왔다.


"토끼가 뭘 어떻게 했는데 우리 강아지를 울려."
"…우는, 허엉, 우는 거 아니, 야…! 눈에서 눈물이, 흑, 자기 마음대로 나는 거야!"
"으응?"
"아빠는, 허엉, 엄마한테, 으흑, 잘해."


 평생 잘할 거라는 다짐까지 하면서 쩔쩔맨 박사장은 결국 아무 소득 없이 지민의 방에서 나왔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는 박사장의 비서가 문밖에서도 들리는 울음소리를 듣고 괜찮으십니까, 하고 효력 없는 위로를 건넸다. 박사장은 인자하던 얼굴을 거두고 가족을 지키는 숫사자 같은 기세로 눈을 치켜떴다. 뿌득 이를 갈았다. 그 토끼놈이 뭐길래 제 소중한 자식을 울리나 싶다.


"신고자 찾는 거 멀었나?"


 비서는 쩔쩔매며 고개를 숙였다. 빨리 진행하겠습니다.






***






 기절한 정국은 시연의 집으로 옮겨졌다. 건장한 알파 남동생을 부려먹어 남동생의 방까지 정국에게 내주었다. 남동생이 왜 내 방 침대를 뺏겨야 하냐 성질을 버럭버럭 냈지만, 그럼 다 큰 남자를 여자 방에서 재우냐, 하고 대가리를 한 대 갈기자 꿍얼거리면서도 수긍해왔다.

 정국은 꿈을 꿨다. 보통 꿈을 꾸지 않는 편이라 신기했다. 한창때라는 사춘기마저 일에 찌들어, 정국은 흔한 몽정조차 자주 겪지 못했다. 진심으로 영혼을 탈탈 털어 모든 기력을 일에 바치니 그런 생각은 들지 않았다. 꿈속은 침대 위였다. 깨끗하고 하얀 이불은 그날 축제에서 다트 상품으로 타온 것이었다. 정국은 이불을 덮고, 당연하다는 듯 같이 누운 사람에게 팔을 뻗었다. 보드라운 맨살이 팔에 착 감겼다. 허리를 감은 정국은 제 쪽으로 사람을 끌어당겼다. 상대는 뒷모습이었다. 가녀린 여성의 몸은 아니었다. 쪽 뒷목에 입을 맞추고 어깨에도 쪽쪽거리자 상대가 간지럽다는 듯 킥킥 웃으며 어깨를 떨었다. 그게 또 사랑스러워 정국은 귀에 달콤하게 속삭였다. 잘 잤어요? 상대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모로 봐도 꿀이 떨어지는 연인의 아침이었다.

 이미 상대의 어깨에는 지난밤의 흔적이 가득했다. 붉은 자국이 또렷하다. 아마 자신의 등 뒤에도 손톱자국이 길게 나있을 것이다. 정국은 자신이 새겨놓은 자국 위에 입술을 내리눌렀다. 상대가 흠칫했다. 또 하게? 정국은 말 대신 입매를 당겨 웃으며 손을 점차 아래로 내렸다. 허벅지 안쪽으로 손이 미끄러지려는 찰나, 상대가 정국의 손을 붙잡았다. 나 힘들단 말이야. 흘겨보는 눈이 마주친다. 맑은 밤색 눈동자. 박지민.

 깨달은 순간 정국은 벌떡 꿈에서 깼다.


"아…."


 정국은 머리를 부여잡았다. 또 열이 펄펄 끓고 있었다. 이렇게나 아픈 적은 처음이다. 정국은 헷갈렸다. 강제로 지민을 잊어야만 하는 감정이 아파 아픈 것인지, 열이 끓는 몸이 아파서 아픈 것인지 좀체 종잡을 수 없었다. 간신히 이를 악물고 주변을 둘러보자 생전 처음 보는 방이었다. 몇몇 개의 권투선수 포스터와 정리되지 않은 옷장이 보인다. 멍하니 어디인가 생각해보고 있을 때, 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들어왔다.


"어오 썅, 빨리 결혼해서 이 집을 떠나…헐, 시체 일어났다."


 남자는 정국을 보고 대박, 하더니 침대로 달려왔다.


"정신 드세요?"
"……."
"저 한시연 동생 되는 한시윤이라고 합니다. 누나가 그쪽을 데리고 왔어요. 쓰러지셨다고요."


 정국은 대화를 하면서도 머리가 윙윙거렸다. 정국이 머리를 짚자 시윤은 허둥거리더니 대야에서 수건을 짜 내밀었다.


"누나 불러올게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시윤이 잽싸게 방 밖으로 튀어나갔다. 정국은 어지러움이 가시질 않아 무너지듯 침대로 쓰러졌다. 수건을 보자 그 언젠가 물기도 짜지 않고 엉성하게 올려놓던 작은 손이 떠올라 픽 웃음이 나왔다. 정말 지독하다. 모든 게 다 너다. 꿈을 꾸는 것도 너. 일어나서도 너. 두통은 더욱더 심해져 정국은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조차도 떠올리지 못했다. 그저 꿈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지민이 있는 꿈이 그리움만 남아버린 현실보다 좋았다. 달큼한 오메가향이 퍼지는 듯한 착각이 인다. 정국은 다시 눈을 감았다. 이름의 맛이었던 것도 같다.


"정국아! 일어났어? 괜찮…야 니 지금 라면 좀 끓이라고 했다고 구라친 거냐? 처맞을래?"


 급하게 뛰어들어온 시연이 차게 식은 눈으로 시윤을 노려보았다. 시윤은 입을 떡 벌리고 황당해했다.


"아니, 미친 왜 이 사람 다시 죽어있, 악! 때리지 마! 기지배가 무슨 손이 이렇게 매워! 아 진짜 일어났었다고! 이보세요, 이봐요!"
"됐다, 걍 라면 내가 끓인다. 동생이라고 하나 있는 게 어쩜 이런 폐기물이냐."


 억울한 시윤은 뒷목이 뻐근해졌다. 와 미친. 이 시체 뭐야. 개뻔뻔. 일어나면 갈 줄 알았는데 안가. 같은 남자로서 잘생겼다 인정한 정국의 눈감은 얼굴을 보고 혀를 내두르다 문득 고개를 갸웃했다. 가만. 근데 알파 페로몬 향이 난 거 같기도 하고. 시윤이 코를 킁킁거렸다. 의문은 머지않아 시연이 외치는 목소리에 사라졌다. 야! 라면 식어!






***






 공공연히 출입금지장소로 굳어졌던 지민의 방 통제가 풀렸다. 지민은 솔직하게 마음껏 아파하고 운 다음에서야 침대 붙박이에서 벗어났다. 더는 눈물이 안 나는 게 아니라, 울어봤자 해결되는 일이 없다는 걸 깨달았을 뿐이다. 시작도 전에 떠난 사랑을 슬퍼하는 시간을 가졌으니 됐다.


"지민아! 이거 봐봐, 내가 리치 가져왔어. 맛있겠지?"
"나 이제 안 아파. 저리 가."
"우리 색시 말라서 내가 걱정돼서 갈 수가 있어야지. 내가 까줄까? 아 해봐."
"여기 니 색시 없거든?"


 지민은 과일을 들이미는 태형을 피하고 종이를 들척거렸다. 3개월간 도망다닌 탓에 후계자수업이 밀려 봐야 할 것이 가득했다. 적성에 안 맞는 사업 따위 책 한 장 쳐다보기 싫었지만 요즘 박사장과 문여사가 저 때문에 마음을 많이 썼다는 걸 알고 있었고, 그로 인해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한울그룹이 추진하는 사업, 정세, 주식. 보기만 해도 졸리던 서류들이 이별을 겪고 나니 그나마 머리를 괴롭히는 게 이런 종이뿐이 없었다. 태형은 방해된다며 비키라는 지민을 꿋꿋이 무시하고 지민의 옆으로 앉았다.


"내가 알려줄까?"
"아 너가 옆에서 떠들어서 어디까지 읽었는지 까먹었잖아."
"여기 투자하게? 좀 위험한데. 재정상태 봐. 곧 터지겠다."


 태형은 서류의 제목만 대충 보고도 지민이 고민하고 있던 문제를 순식간에 술술 풀어냈다. 지민은 필요 없다니까, 도움 안 된다니까 하면서도 태형의 말이 진행될수록 넘기지 못했던 페이지를 넘겼다. 부정하고 싶어도 부정할 수 없는 맞는 말들이다. 마냥 망나니처럼 놀다가도 동물이라 불릴 만큼 뛰어난 경영 감각을 가진 태형은 타고난 사업가였다.


"이런 재미없는 거 말고 우리 데이트하러 갈까?"
"그게 더 재미없어."
"그럼 뭐하면 재미있겠어?"
"지금 인생 자체가 재미없으니까 그냥 가."
"내가 재미있게 해줄게. 우리 인생 이제 얼마 안 있으면 하나로 합쳐지는데."
"너는 맨날 뇌 포맷해? 너랑 결혼 안 한다고 몇 번이나 말하면 알았다고 할래?"
"왜?"


 또 머리 아픈 소리만 지껄이려나 보다. 지민은 팍 인상을 구기고 서류를 신경질적으로 닫았다. 됐다, 그냥 말하지 말자. 지민은 제 방을 뺏기는 쪽을 택하며 태형에게 등을 보이고 문을 열었다. 반쯤은 상대할 기력이 없었고, 다른 반절의 이유는 말이 통하지 않을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 베타가 안 잊혀서?"


 자리에 우뚝 선 지민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커진 눈동자는 네가 그걸 어찌 알고 있냐는 뜻이 담겨있었다.


"김태형 너…."
"내 능력까지 무시하고 있었어? 그건 너무했다."
"……."
"어…어디까지 알고 있나 궁금한 표정이네. 별로 없어. 지민이 너가 납치가 아니라 결혼하기 싫어서 베타 집에 처들어 갔던 거랑, 알파 몇 명 골로 보낸 거랑, 아 그 알파새끼들 내가 다시 손 써서 조져놨고. 그리고 또 뭐가 있었더라…아! 맞아 최근 너가 다시 그 베타 집에 찾아가서 난동 피운 거 정도?"


 약 올리는 건 도사다. 나름 철저하게 숨긴다고 숨겼던 자부심이 당황으로 흔들렸다. 다 알고 있으면서 조금이라고 말하는 게 더도 없이 얄미워 지민은 인상을 와락 구겼다. 고슴도치가 가시를 세우듯 경계를 드러내며 태형을 노려보았다.


"니가 그걸 왜 알아보는데."
"너 좋아하니까."


 틈도 없이 튀어나온 대답은 지민의 말문을 틀어막았다. 태형은 연이어 담담하게 반복했다.


"너가 생각하는 거보다 내가 너 많이 좋아해."


 칼같이 잘라내던 태형의 고백이 이번은 사뭇 다르게 다가왔다. 한 번 사랑이 버려진 경험을 해봐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진지한 태형의 눈빛 때문인지 알 수 없었으나 지민은 거미줄에 얽힌 것처럼 어떤 말도 꺼낼 수 없었다. 태형은 의자에서 일어나 지민 쪽으로 천천히 발을 옮겼다.


"많이 생각해봤어. 솔직히 베타라는 건 상상도 못 했어."
"……."
"솔직하게 말해서 다른 알파새끼가 너랑 각인했다는 거 생각하면 너무 화나서, 알파새끼 죽여버리고 사고사로 위장하려고 했는데…그건 접었어. 베타라니까 맥 빠지기도 하고, 그동안 그럼 난 정말 너한테 아무것도 아니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태형이 한 걸음을 남기고 가까이 섰다. 조금 낮고 울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슬펐어."


 무표정이면 차가워 보이는 인상은 눈꼬리를 축 내리면 더없이 안쓰러워 보인다. 태형이 지민과 언성을 높일 때 상황을 무마하려 자주 써먹는 방법이었다. 우울한 알파 페로몬이 나왔다. 지민은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냐 대차게 거절하지 못했다. 자신은 한 달도 되어가지 않는 시간동안도 힘겨워 죽지 못해 사는 느낌인데, 감히 몇 년은 넘은 태형이 겪었을 감정이 짐작도 가지 않는다. 진짜라면, 너도 이렇게 슬펐다면. 갑자기 짜증만 냈던 태형에게 미안해졌다. 직접 겪으니 박탈당한 애정이란 남에게 상처를 준다는 자체만으로 죄책감이 무겁게 쌓이는 너무 고통스러운 감정이다.


"불쌍하지?"
"……."
"응, 불쌍하게 생각해줘. 그러니까 밀어내지만 말아봐. 내가 도와줄게. 너 안 아프게."
"……."
"너한테 실연 많이 당해봐서 내가 그거 잘 알아."


 화나고 억울하고. 마음 준 거 후회했다가 또 행복한 시간 떠올라서 후회 안 되고. 얼굴도 보고 싶고, 아직도 너무 좋고 예뻐 죽겠고. 그런데 갑자기 울컥하고. 지민이 한동안 느낀 감정들을 태형이 줄줄 꿰고 있었다. 한 문장 한 문장 나올 때마다 지민은 움찔움찔거렸다.


"알파 김태형 말고 그냥 김태형 할 테니까. 처음부터 시작하자."


 태형이 손을 내밀었다. 허리부터 감아오거나 어깨에 팔을 둘러오는 게 아닌, 단순히 악수를 위해 내밀어진 손이다. 관계를 정리하고 다시 인연을 쌓아보자는 의미. 지민은 손을 잡기 전 물끄러미 태형을 바라보았다. 받은 상처는 같은데 태형은 또 한 번 다가온다. 근본적인 궁금증이 일어 지민이 머뭇머뭇 입을 뗐다. 막 입학한 신입생이 어려운 선배에게 쭈뼛거리며 질문하듯.


"…많이 아팠어?"
"어?"
"이렇게 아픈데 어떻게 웃었어?"


 태형은 잠시 생각하는 듯 인상을 찡그렸다. 얼마나 괴로워하면 멀쩡해질 수 있어? 언제쯤 아무렇지 않아질 수 있어? 아니 아무렇지 않게 변하긴 하는 거야? 가득 찬 물음들을 쏟아내려다 지민은 참아냈다. 전정국 이야기만 나와도 이렇게 마음이 들썩거리는데. 태형은 볼을 긁적거리더니 담담하게 말했다.


"슬퍼만 한다고 너가 돌아오는 것도 아니잖아."
"…아."


 외면받았다. 버려졌다. 하지만 잡을 기회까지 박탈당한 건 아니다.


"지민아? 표정 왜 그래? 어지러워?"
"아니."


 지민이 손을 뻗었다. 내밀어져 있던 태형의 손을 잡고 위아래로 힘차게 흔들었다.


"고마워. 나 나갔다 올게."


 확인사살까지 받아야겠어. 이미 쪽팔린 짓이라면 전정국 앞에서 손가락을 셀 수도 없이 많이 했는데, 하나쯤이야.






***






 지민은 제 발로 술집 앞에 도착한 현실을 부정하고 있었다. 나 미쳤나봐. 진짜 왔어. 마지막으로 전정국을 돌리기 위해 만나는 변명 같지 않은 변명은 스스로 생각해도 찌질하고 민망했다. 방세 내려고. 딱 정국의 빚만큼 수표를 빼 하얀 봉투에 담아 증명이라도 하듯 봉투 위에 당당히 '방세'라 적었다. 또 차이면 이거 주려고 왔다고 할 거야. 속으로 꿍얼거리며 지민은 그 누가 자신을 보지 못하도록 후드를 더욱 눌러 썼다. 널 정말 꼭 다시 보고 싶어서 온 게 아니라 이거만 내러 온 거야. 사람들이 들락거리는 가게 입구를 목을 작게 빼 살폈다.


"안녕히 가세요!"


 종업원들이 인사를 할 때마다 귀를 쫑긋 세우고 정국의 목소리가 섞여있는지 듣기 위해 끙끙거렸다. 아씨, 너무 먼가. 안 들리는데. 가게에서 나온 손님들이 인상을 푹 구기고 있는 지민을 지나치다 흠칫했다. 어두컴컴한 골목에서 검은 후드를 눌러쓴 남자는 주머니에 있는 폰을 찾을 만큼 수상해 보였다.


"오, 오빠 우리 다른 데로 가자."


 여자가 남자의 팔을 당겨 후다닥 지민으로부터 멀어진다. 지민은 커플이 범죄자 취급을 하거나 말거나 골목보다 가게에 좀 더 가까이 있는 전봇대로 자리를 옮길까 말까 고민했다. 여기보다 몸을 숨기긴 힘들겠지만 전정국은 더 잘 볼 수 있겠지. 미어캣처럼 주변을 휙휙 둘러본 지민은 날름 전봇대로 튀어갔다. 옳은 선택이다. 가게 안이 조금 더 잘 보인다.


"전정국 얜 왜 이렇게 안 보이는 거야."


 지민은 가게 안쪽을 계속 힐끔거리다 아르바이트생 한 명과 눈이 마주쳤다. 후다닥 전봇대 뒤로 몸을 숨긴 지민은 쿵쿵거리는 심장을 잡고 누가 나올까 봐 가게를 지켜보았으나, 다행히 아무도 가게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상황은 가게가 불이 꺼지고 아르바이트생들이 하나둘 나와 흩어질 때도 동일했다. 가게가 불이 꺼진다. 안 돼, 아직 전정국 못 봤는데. 생각하며 지민이 움찔 가로등 뒤에서 튀어나왔다. 그리고 그 순간, 가게 문을 열고 나온, 아까 전부터 계속 눈이 마주치던 아르바이트생과 마주쳤다.


"아직도 안 가셨네요."


 냉큼 지민은 뒤로 돌아 듣지 못한 척 발로 땅을 쿡쿡 찔렀다. 아르바이트생, 채윤은 어정쩡하게 서 있는 뒷모습을 보고 고개를 돌려 셔터를 내렸다.


"정국씨 여기 없어요."
"없어? 왜, 왜?"


 모른척하던 지민이 채윤의 앞으로 퍼뜩 달려 나왔다. 전정국이라는 미끼에 낚여버렸다. 그러다 아, 하고는 민망한지 쭈뼛거린다.


"아, 아까부터 기다리고 있던 거 아냐."


 뱅글뱅글 변명을 돌리다 채윤이 황당하게 쳐다봐오는 시선에 민망한 헛기침을 콜록거렸다. 채윤은 열쇠를 주머니에 넣고 지민을 지나쳐 걸었다.


"그건 그쪽이 더 잘 알겠죠."


 지민은 움찔하고는 채윤의 뒤를 쫄쫄 쫓아갔다. 채윤이 돌아보자 지민은 급히 등을 돌려 딴청을 부렸다. 미간을 찌푸리고 다시 앞으로 걸어가면 또다시 쫄쫄. 채윤이 신경질적인 어조로 말했다.


"뭐하는 짓인데요, 이거 지금."
"…하나만 더 알려줘."
"내가 왜요?"


 지민은 할 말을 찾지 못했다. 맞다. 먼저 찾아가 시비를 걸었다. 비참하지만 심술을 집어넣고 정의하면 정국과 자신은 아무 사이도 아니었다. 똑같이 누군가를 짝사랑하는 입장일 뿐인 채윤을 향해 왜 내가 가지고 싶은 걸 너도 보는 거냐 화를 내는 건 불합리한 일이었다. 꼴좋다 비웃음을 보내고 가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지민은 입술을 우물거리다가 어깨를 늘어뜨렸다.


"…미안해."
"…."
"내가 그때 많이 몰랐어. 진짜 미안."


 진심을 다한 사과에 채윤은 내심 놀랐다. 제멋대로 행동하는 지민의 입에서 사과라는 단어가 나오는 건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한울그룹 도련님 납치 뉴스를 접한 채윤은 단번에 사건의 정체를 간파했다. 저 화면에 나오는 사람은 그때 그 사람이다. 때문에 지민과 더욱 현저한 차이를 절감하고, 사과를 받을 생각은커녕 조용히 속으로 체념하고 있었다.


"…괜찮다고는 안 할 거예요."
"응. 그럴만해."


 채윤은 정국과 지민 사이에서 어떤 일이 생긴 건지 모르지만 애정전선에 먹구름이 끼었다는 건 간단하게 예측할 수 있었다. 오메가와 베타만으로도 수많은 난관이 있고, 거기다가 많은 조건을 따지는 상류층에서 둘의 체질은 최악의 조합이다. 시연과 부러 마감 당번을 바꾼 것은 조금이라도 아파하는 지민을 보고 만족감을 채우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먼저 사과부터 해오는 지민을 보니 통쾌함보다는 마음이 묵직해진다. 자세히 보니 후드를 뒤집어썼어도 그때보다 확연히 마른 티가 난다.


"정국씨 일 그만뒀어요."
"정국이가? 일을? 왜? 왜 그만둬?"


 시무룩해하던 지민이 눈을 크게 뜨고 질문을 쏟아냈다. 언제부터? 왜 그만둔 거지? 다른 일 한다고 했어? 안 되는데. 안 그래도 일하고 오면 맨날 힘들어하는데, 새로운 일하면 더 힘들잖아. 채윤은 걱정부터 허겁지겁 팔고 있는 지민을 보자니 숨은그림찾기처럼 보지 못한 게 보였다. 지민이 겪고 있는 감정을 사람의 나이로 계산하면 어린아이일 뿐이다.


"자세한 건 몰라요. 오늘 일하다 어쩌다보니 시연언니 통화하는 거 들었는데 사정이 있어서 잠시 바깥에 있었대요. 아까 연락 와서 집 간다고 정국씨가 말한 거 들었어요."


 순순히 알려주는 이유는 이제와 지민이 예뻐 보이거나 화끈하게 용서할 마음이 들어서가 아니다. 알면 알수록 의문이 가져진다. 무엇이든 다 가지고 있는 사람이, 그것도 알파가 아닌 베타에게 이 정도로 마음을 쏟는 게 흔한 일이 아니란 건 오메가인 채윤이 더욱 잘 느끼고 있었다.


"집에 있단 거지? 좋아. 고마워!"


 심각하게 듣던 지민은 채윤이 부를 새도 없이 쌩 내달렸다. 채윤은 혼자 질문했다. 만약 정국이 혼자였으면 저 정도의 애정을 내가 줄 수 있었을까. 베타와의 미래. 아마 마음을 접은 이유는. 채윤은 말을 아꼈다.








 정국은 정신이 들자마자 시연의 집에서 나왔다. 시윤이 며칠이나 몸져누워 있었는지 아냐며 바로 나가면 백퍼센트 구급차행이라 말렸지만 상관없었다. 아픈 게 낫다. 박지민이 조금 더 멀어지니까. 버스를 타려다 또 지민과 관련된 소식을 보면 자신이 이번에는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몰라 도보를 선택했다.

 이사를 가야겠다. 이 동네는 전부 박지민이 담겨 있다. 무얼 해도 지민이 떠오르고, 동네에서 만든 좁은 인간관계에 있는 사람들도 모두 지민을 안다. 심지어는 모르는 사람들도 박지민을 안다. 알아서 무얼 하는지 제 앞에서 이야기할 수도 있다. 알려진 박지민의 인생에 자신은 없었다. 그럼 또 가슴은 무너지고 왜 너를 보냈나 후회하는 순간이 오겠지. 한참을 걷던 정국은 바닥에 떨어진 신문을 발견하고 멈칫하고 말았다. 퇴원이라는 헤드라인 아래로 선글라스를 낀 지민의 사진이 박혀있었다. 허리를 숙여 날짜가 제법 지난 신문을 주워들었다.


"나한테는 패션 어쩌고 맨날 하더니."


 환자복에 선글라스를 낀 지민은 짜증을 꾹꾹 눌러 참는 표정이었다. 정국은 작은 실소를 터뜨리고 신문 속 지민을 손가락으로 살살 쓸었다. 조금 마른 게 화면으로 보인다. 내가 이렇게 만들었지. 씁쓸한 생각을 곱씹은 정국은 신문을 내려놓았다가, 결국 다시 뒤로 돌아와 지민이 나온 신문을 차곡차곡 접어 품에 끼워 넣었다. 비겁하지만 어쩔 수 없다. 아직 아무렇지 않게 얼굴을 외면할 만큼 버리지 못했다.

 끝내 지민으로부터 도망가서 이 사진을 버릴 수 있냐 누군가 묻는다면 정국은 거기서도 확답을 할 수 없었다. 날씨 이야기하듯 평범하게 지민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는 건 아마 평생 불가능할 것이다. 다만 괜찮아지는 척 연기는 할 수 있다. 눈을 감고 귀를 막고 머릿속은 다른 생각을 하면 그게 연기다. 그럭저럭 지금과 같이 살아갈 수 있다. 그래, 그러니까 흔들리지만 않으면 된다. 꿋꿋이 외면하고 자꾸만 보고 싶어지는 마음을 잘라내면 무사하다. 품에서 부스럭거리는 신문소리가 마음을 불편하게 조여오면서도, 이렇게라도 소식을 알 수 있다는 점이 감사했다.

 계단을 올라 익숙한 문을 열고 들어가기 직전이었다.


"야 전정국! 방세 내려고 왔다고! 내라며! 너 보고 싶어서 온 거 아니고 이거 내려고 온 거니까 문 열어!"


 움찔한 정국은 대문손잡이를 잡기 전 자세 그대로 돌처럼 굳어버렸다. 쉬어빠진 목소리는 너무나도 현실성이 없어서, 들고 온 뉴스 사진 안의 지민이 말을 걸어오는 건가 착각이 일어날 정도였다. 쾅쾅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린다. 아야야, 손 아파. 끝이 뭉개지는 발음은 곧 체념처럼 변했다.


"다 듣고 왔는데 없는 척…! 나쁜 새끼. 그럼 거기 안에서 들어. 방음시설 하나도 안 되는 거 알고 있으니까. 대답 안 해줘도 혼자 말할 거야."


 멍청히 서있던 정국은 다소 퉁명스러운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얇게 벌어진 문틈을 엿보았다. 하, 터지려는 얕은 헛숨을 들이켰다. 진짜다. 사진이 아니다. 검은 후드티를 입고 털퍽 주저앉은 지민이 열리지 않는 문을 마주 보고 있었다.


"나 원래 끈질기니까, 한 번 잡은 거 잘 안 놓으니까 또 온 거야. 너도 나 거지같이 버렸잖아. 말 한마디도 안 하고. 그러니까 난 좀 질척하게 굴어도 돼. 자격 있어. 싫으면 직접 나와서 밀치던가, 들어서 버리던가."


 아아 이건 좋지 않다. 정국이 보는 시선에서 지민이 등을 돌리고 있는 건 천만다행이었다. 아니라면 눈이 마주치는 순간 도망이고 뭐고, 두려움이고 뭐고 그래도 발이 튀어나갔을 것이다. 정국은 이 상황을 모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발을 돌려 모른 척 자리를 뜨는 것이라 머리는 계산을 끝마쳤다. 고작 여기서 무너지면 안 된다. 가자. 더는 문 앞에 발목이 묶여버리기 전에 빨리 가야한다. 정국이 이를 질끈 물고 걸음을 뗀 순간이었다.


"…멀어지려고 했는데, 모르는 척도 해봤는데 결국 니가 너무 보고 싶어. 그래서 왔어. 마지막으로 온 거야."


 그 한 마디에 발목이 쇠사슬로 돌돌 묶여 땅에 박혀버렸다. 그 당당하고 활기찬 목소리가 형편없이 갈라졌다는 것만으로도 정국은 제대로 뛰고 있던 심장이 발아래로 처박히는 기분이었다.


"왜 그랬는지 이유는 알려주면 안 돼?"


 목소리가 그 꼴이면서, 이유 같은 건 들을 정신이 남아있어요? 이래서 지민을 실제로 만나면 안 되는 것이었다. 죄책감이, 그 빛을 다 잡아먹었다는 죄책감이 냉철한 이성을 마비시키고 감정에 무릎을 꿇린다. 벼랑 끝을 향해 달리는 뜀박질이라는 걸 알면서 함께하자 손을 뻗을 것만 같았다.


"내가 잘못 했어…."


 뭘 잘못했는데. 얕은 울음이 섞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정국은 욕이 터져나올 뻔했다. 뭘? 도망가고 버린 건 난데 그쪽이 뭘 잘못했는데? 미련한 사과 따위는 집어치우고 차라리 욕을 하고 화를 내라 윽박지르고 싶었다. 계속 밑바닥으로 같이 처박히려는 꼴을 보고 있으니 불합리하게도 화가 났다.


"사랑해달라고 안 할게…좋아해달라고 안 할게. 화났으면, 화 풀면 안 돼?"


 훌쩍훌쩍 섞여 나오는 울음소리는 기어코 엉엉 거세게 우는 오열로 변했다. 문밖에 있는 정국에게 느껴질 만큼 슬픈 오메가 페로몬이 일렁인다. 발을 땅에 묶는 거로도 모자라 아예 잡아당기는 지민을 외면하기 위해 정국은 주먹을 꽉 쥐었다. 살에 손톱이 박혀 피가 나지만 전혀 아프지 않았다. 차라리 기절했을 때 더 아팠어야 했다. 영원히 일어나지 않은 편이 좋았을 뻔했다.


"왜 그랬는지도, 허엉, 안 물을, 으, 게."


 켁켁거리는 잔기침까지 섞여 정국을 자극하는 울음은 얼마 지나지 않아 옅어졌다. 자의적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기운이 빠져 줄어든다. 적막한 공기 가운데 지민이 힘겹게 내쉬는 숨소리가 들린다. 진이 다 빠진 음성이 힘겹게 말했다.


"…그냥 나 좀 안아주라…."


 그 마지막 말은 정말 위험했다. 하마터면 정국은 그대로 뛰쳐들어가 지민을 끌어안을 뻔했다. 많이 아팠어?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이제 그만 울어. 눈물을 닦아주고 이제 괜찮다며 안심시키고 세상에 둘도 없는 따스한 온기를 건넸을 것이다. 단칸방 문을 열고 다시 우리 둘이 오순도순 살자 부탁할지도 모른다. 새벽빛이 두루뭉술하게 비춰온다. 한참을 기다려 울음소리도, 애원하는 오메가의 페로몬도 느껴지지 않을 즈음 정국은 멈춰버린 시간을 풀어 대문을 열었다. 금방이라도 흩어질 것 같은 지민이 눈을 감고 앉은 채로 땅에 쓰러져있었다. 눈물자국을 매달고 있는 두 뺨이 투명하리만큼 창백했다. 잠들었다는 말보다는 기력이 빠져 기절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


 이런 곳에 있을 사람 아닌데. 눈물 쏟게 하고 싶지 않은데. 정국은 쓰러진 지민을 안아 한층 더 마른 몸을 확인한 순간, 이미 꺼져버린 심장이 한 번 더 푹 패였다. 형용할 수 없는 감정으로 목구멍이 울컥 뜨겁게 달아올랐다. 나 같은 게 뭐라고 이만큼이나 아파해. 내가 줄 수 있는 건 없는데. 입을 떼면 쏟아질 물음을 집어넣느라 정국은 입술이 터지도록 질끈 깨물었다.

 그리고 그 순간, 격렬해진 정국의 감정을 따라 실낱같은 알파 페로몬이 고개를 처들었다. 얌전히 감겨있던 눈꺼풀이 들렸다. 두 눈이 마주친다.


"……."
"……."


 이어지는 침묵은 무미건조했다. 정국은 지민이 깨자 순간적으로 놀란 것이고, 지민은 무의식중에 알파 페로몬이 느껴지자 본능적으로 눈을 떴다. 정국을 보는 반쯤 뜨인 눈이 깜빡깜빡거린다. 정국인 걸 확인하니 다시 감긴다. 지민이 정국의 어깨 쪽으로 얼굴을 묻었다.

 지민은 꿈이라 생각했다. 은은한 비누향이 나는 페로몬은 미세하지만 확실히 알파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정국이 알파라면 이런 향이 나지 않을까, 했던 느낌과 비슷하다. 맨날 꿈에 안 나오더니 이런 식으로 나온다. 꿈결이라도 좋다. 포근하게 감싸주는 품에 안기니 더욱 잠이 쏟아진다. 좁은 단칸방에서 정국을 기다리던 그 밤 같았다. 거부하지 않고 잠결로 빨려들어가며 지민은 꿈에게 속삭였다. 그건 매번 집으로 돌아온 정국에게 하는 습관 같은 인사였다.


"전정국."
"……."
"너 진짜 보고 싶었어…."


 사람의 마음은 무모하고 믿지 못한다. 정국은 그 말을 듣는 순간 힘겹게 쌓아올린 방어막이 한방에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걸 실감했다. 단 한 번의 익숙한 말이 모두 무너뜨러버렸다. 이런 걸 어떻게 거부해. 이런 걸 어떻게 외면해. 이런 걸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어. 감길락 말락 하는 눈꺼풀을 보고 정국은 엷게 웃고 말았다. 지민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겨 주며 말했다.


"…응, 나도."


 못하겠다. 갖은 청승은 다 떨며 너를 사랑하니까 보내준다고, 나와 함께하면 불행해질 널 아니까 떠나주는 거라 흔한 삼류 드라마 주인공이 되어보려 했지만 무리다. 고아에, 빚더미에, 그 조건 하나 더 추가되는 것쯤 문제없으리라 생각했는데, 도저히 할 수 없다. 지민은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간질이는 손길에 정국의 목을 감아 끌어당겼다. 꿈이라 그런지 한 번도 안 해주던 말도 서슴없이 해준다. 입술이 살포시 닿는다. 부드럽게 물어오는 입술에 멈춰있던 정국은 적극적으로 지민을 탐해오기 시작했다. 으응, 잠결에 빠진 신음소리를 잡아먹고 또 잡아먹었다. 시작은 지민이 했으나, 정국은 끝을 낼 생각이 없는 것처럼 집요하게 굴었다. 질척하게 타액이 섞이다 지민이 벅차는지 정국의 어깨를 살짝 밀어냈다. 맞춰오는 눈이 프스스 웃고는 졸려 꿈뻑거린다.


"…자자…."


 목적을 이루고 뿌듯한 지민이 새근새근 잠에 빠져들었다. 마찬가지로 지민을 살살 쓸어주던 알파 페로몬도 사그라들었다. 지민을 내려보는 눈이 고요히 빛났다. 아침이 떠오기 전 샛별처럼 시린 욕망이 담겨있었다.

 두려움은 사랑으로부터 태어난다. 뭉그러진 두 감정은 엎치락뒤치락거리다 무너져있던 정국을 일으켜세웠다.






 밤이 머물렀던 자리에 동이 터온다. 잠든 지민을 집안으로 옮긴 정국은 도장이라도 찍듯 지민을 눈에 담았다. 발밑에 심장이 떨어진 사정이 방금인데, 멀쩡히 제자리로 돌아와 빠듯하게 뛴다. 정국은 지민의 얼굴을 스물네 시간 동안 보고 있어도 질리지 않을 것이라 확신할 수 있었다. 잘 때는 작게 도톰한 입술이 벌어지고, 새초롬하게 치켜뜨던 두 눈두덩이는 밋밋할 정도로 얌전하다. 이 얼굴이 웃을 때는 눈꼬리가 예쁘게 접히고, 입이 활짝 벌어지고.

 그때 무슨 생각이었는지는 모른다. 그저 그 장면을 남기고 싶었다. 잠자는 박지민을 가만 눈에 담기만 하는 게 너무나도 아까웠다. 정국은 펜과 노트를 들고 지민의 얼굴을 그림으로 옮겼다. 사각사각거리는 펜 소리와 잠든 박지민, 그리고 동이 터오는 새벽빛. 자신이 꿈꿀 수 있는 가장 완벽한 조합이 아니었을까. 정국은 그림을 다 그리고도 지민을 계속해서 쳐다보았다. 결국 참을성이 닳아 손을 뻗어 벌어진 입술을 꾹 눌렀다. 으응, 지민이 민감하게 반응하며 고개를 돌린다. 몇 번 더 꾹 누르자 귀찮은 듯 목을 긁고 미간을 구긴다. 아 귀여워. 비식 웃음을 흘린 정국이 다시 손가락을 뻗은 때였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정국은 도둑질하다 걸린 사람처럼 흠칫 경계했다. 누가 뺏어가기라도 할까 봐 지민에게 이불부터 덮어주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누구시죠…?"
"혹시 전정국씨 되십니까?"


 문을 열자 정장을 입은 사내는 정중히 정국을 향해 인사했다. 정국은 긴장했다. 각 잡힌 정장이며, 단정하게 맨 넥타이며 껄렁한 뒷골목의 시정잡배들과는 다른 분위기가 풍겨왔다. 정국이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있자, 남자는 시선을 살짝 움직여 단칸방 안쪽에 누워있는 인물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맞게 찾아온 거 같군요."


 정국은 남자의 시선을 막듯 냉큼 지민이 누워있는 방향 쪽으로 몸을 옮겼다. 정국이 인상을 조금 찡그렸다. 남자는 차분히 말했다.


"전정국씨를 만나고 싶어 하는 분이 계십니다. 함께 가주시겠습니까? 한울그룹의…."


 남자는 지민을 흘끔거리고 정국을 보고는 말을 정정했다.


"박지민 도련님의 부친 되십니다."


 정국은 눈을 크게 떴다. 남자는 아, 하고는 뒷말을 덧붙였다. 가는 동안 도련님은 제가 모시겠습니다.






***






 요 며칠 지민이 죽기살기로 괴롭히던 이불은 모처럼 평화롭게 주인과 잠들어 있었다. 햇살이 운동장만 한 침대에 침략한다. 지민은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에 비척비척 눈을 떴다. 푹신해…부드러워…아침…일어나기 싫어…. 오랜만에 만족스러운 잠자리였다. 폭신한 이불 안으로 더 파고들어 간 순간, 지민은 뛰어오르는 용수철처럼 퍼덕거리며 침대에서 헤어나왔다.


"왜, 왜 여기야?"


 분명 전정국 집 앞에서 진상을 부리다 잠이 들었다. 뭐야. 머리에서 나사가 하나 뽑힌 모양이다. 전정국이 알파인 꿈까지 꾸더니 미쳐서 자는 동안 집까지 걸어온 건가. 설마 그 말로만 듣던 몽유병. 그럼 큰일인데. 전정국 보고싶다고 매일같이 찾아가면 좆되는데. 지민이 심각하게 고민에 빠질 무렵, 노크소리가 들린다.


"김비서!"
"일어나셨습니까, 도련님."
"김비서, 김비서가 나 거기 있던 거 데…."


 지민은 입을 합 다물었다. 구차하리만큼 처량하게 매달리는 장면을 남준이 봤다 생각하니 낯이 뜨거워졌다. 이미 실연의 상처라는 빌미로 수많은 못 볼꼴을 보였지만, 어디까지나 방문 하나로 막혀있었다. 이번처럼 전정국 너 돌아오라 구구절절 질질 짜는 걸 대놓고 보여준 적은 없었다. 기다리던 남준이 도련님? 하고 부르자 지민은 침대에서 빠져나와 횡설수설했다.


"날씨 미친 거야? 날씨가 사람만큼 못되게 굴면 어떡해. 오늘 왜 이렇게 추워. 날씨도 뭐 새로운 마음가짐이라도 먹었대?"
"이번 주부터 본격적으로 겨울이 시작된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뉴스가?"
"예."
"그건 맨날 본격적이래. 믿질 못하겠어. 방 온도는 왜 이런 거야. 너무 춥잖아."


 남준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미 최고의 온도조절시스템이 늘 활동하기 좋은 온도로 만들어준다. 도련님이 추위를 많이 타시나. 어제는 방에서 얌전하게 주무신 거 같은데. 의아애하면서도 남준은 착실히 고용인에게 방의 보일러를 올리라 전달했다. 지민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겨울은 왜 오는 거야."


 마지막 발악에도 반전 없이 막이 내려왔다. 박수는 양손이 마주쳐야 난다. 한쪽만 안달복달하고 계속 그리워하고 보고 싶어한다 해서 이루어진다면 이 세상 슬픈 짝사랑 노래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민은 영혼까지 태워버릴 지긋지긋한 감정이 거부당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할 때가 왔음을 체감했다. 그래, 너한테 이제 민폐 그만 끼칠게.


"짜증나게 춥네."


 겨울이 찾아와서 그런가 보다. 지민은 옷을 더욱 껴입었다. 뻥 뚫린 것만 같은 허전함은 여전했다. 전정국이 빠져나간 자리에 다른 걸 채울 시기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