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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럭키 스트라이크 11

by 토페 posted Mar 11,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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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나의 사랑 나의 신부 OST-그들만의 여행>













 고민 끝에 정국은 옷을 선물하기로 결정했다. 지민이 좋아하기도 했고, 어차피 선물을 해주기로도 마음먹은 참이었다. 정국은 평소 자신이 이용하는 시장에 방문했다. 반팔티 세장 구천구백원을 산 곳이었다. 무려 저녁식사시간까지 빼먹으며 정국은 생필품이 아닌, 사치라면 치를 떠는 쇼핑을 제 발로 걸어나왔다.



"남 옷으로 고민하기는 또 처음이네."



 정국은 볼을 긁적였다. 정국이 고민 어린 선물을 준비한 건 유치원시절 어버이날이 마지막이었다. 것도 카네이션에 쓸 멘트를 고심한게 고작이었다. 커서 남의 옷을 사려니 여간 애매했다. 박지민은 하얀 편이니까, 검은 옷이 잘 받으려나. 아닌가. 검은 옷만 입는다고 매번 타박하는 거 보면 검은 색 싫어하나. 무슨 옷을 좋아하지. 셔츠? 반팔티? 이럴 줄 알았다면 차라리 지민에게 원하는 것을 말하라 할 걸 그랬다.



"아따, 우리 잘생긴 정국총각 아냐? 옷 사러 왔어?"

"아 예, 어머니. 오늘은 제 옷이 아니라 선물할 옷이에요."

"참말이야? 여자친구?"

"아 그건 아니에요."



 정국이 하하 웃었다. 애인 단계도 넘어서서 곧장 결혼부터 하자 들이밀어도, 어쨌든 아직 지민과 정국은 아무관계도 아니었다. 정리하자면 이제야 서로 인정한 룸메이트관계였다. 가게 주인이 이런저런 옷을 들이밀자 정국은 정중하게 손을 저었다.



"천천히 구경해보고 살게요."

"그래그래. 정국총각 주변으로 빛이 난다니까. 다음에 시간 괜찮으면 우리 딸래미랑 인사 한번 해."

"하하 기회가 닿으면요."



 적당히 대답하며 정국은 지민에게 어울릴만한 옷을 골랐다. 하얀 셔츠? 너무 무난한가. 지난번 지민이 입었던 하얀 셔츠는 꽤나 잘 어울렸다. 그림으로 그렸던 하늘색 셔츠도. 평소 입고다닌는 검은 후드티도 괜찮다. 정국은 노란 후드티를 들고 고민했다. 이 노란색 옷도 괜찮을 거 같은데. 박지민은 동안이니 여러모로 잘 어울릴 것이다. 정국은 천천히 여지껏 지민이 입었던 옷들을 떠올렸다.



"……."



 문득 손 안에 든 만원짜리 티가 너무 초라해 보였다. 지민이 자신의 옷도 잘 입고 돌아다닌 건 안다. 처음만난 사람조차 내리 깔아보는 지민은 기이하게도 먹는 것과 입는 것으로 투정부리지 않았다. 모두 박노인의 작품이었다. 지민아, 주어진 거에 감사하며 살아야 한다. 근엄한 모습으로 박노인은 박사장과 문여사가 빠뜨린 가정교육을 채워넣었다. 인자하게 어린 지민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다가도, 반찬을 남기거나 옷을 가리면 엄하게 회초리를 들었다.


 정국은 갈등했다. 지민을 지켜봤을 때, 지금 하는 고민은 필요없는 고민이다. 친구라 칭하며 노인정을 잘 들락날락 거리는 거나, 어떤 음식도 맛있다며 먹는 거나, 정국의 옷장에서 서슴없이 꺼내입는다 거나. 분명 사다주면 지민이 잘 입을 거란 확신이 있었다. 노란 후드티를 만지작거리던 정국은 민망한 듯 웃으며 말했다.



"어머니, 저 다음에 다시 올게요."



 정국은 시장을 나와 난생처음으로 옷을 사기 위해 시내로 나섰다.










 샵의 아침은 바쁘다. 중상층이 아닌, 완전히 최상류층을 상대로 하는 곳인 만큼 준비는 늘상 철저해야했다. 먼지 하나, 흠 하나 용납되지 않는다. 최상류층 가게는 단순히 쇼핑뿐만이 아니라 접대도 하나의 판매목록이었다. 무조건 친절하게, 어떤 진상짓에도 활짝 웃는 얼굴로. 이름만 들어도 억 소리가 나는 거물들이 들락거리는 가게는 그에 어울리는 품위를 갖춰야했다.


 여직원은 가게에 일한지 2년차였다. 그녀는 가게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다. 다른 명품샵들과 달리 시골구석에 처박혀있지만, 그 덕에 조용한 삶을 원하는 최상류층 고객들이 옷을 보고 갔다. 하루에 손님은 두 세명정도밖에 오지 않으며, 심지어 해가 짱짱하게 떠있는 오전보다 늦은 오후가 그들의 쇼핑시간이다. 이를 테면 틈새시장 공략의 성공이었다. 딸랑, 종소리가 울렸다. 여직원은 상쾌한 미소를 만면에 장식했다.



"어서 오세요."



 누구냐. 어디 그룹이야. 오늘의 대주주는 누구지? 여직원은 기대에 부풀었다.



"아 안녕하세요."

"네, 고객님."



 예의 한번 참 바르다. 보통 들어오는 사람들은 인사도 없이 쇼파에 앉는 게 대부분이다. 여직원은 알고 있는 최상류층의 가계도를 탈탈 털었다. 얼굴은 합격점이다. 부티가 난다. 언뜻 보기에도 잘생겼고, 자세히 보니 더 잘생겼다. 이정도 얼굴이면 내가 기억 못할 리가 없는데. 여직원은 점심을 먹으러 간 샵의 매니저를 호출하기를 머뭇거렸다. 남자가 말했다.



"저 옷 좀 보려고 하는데요."

"네?"

"옷이요."



 주요 고객층은 들어와 옷을 보여 달라고 하지 않는다. 쇼파에 앉으면, 직원들이 알아서 모셔 날랐다. 여직원은 정국을 쭉 스캔했다. 가만 보니 수행원도 없고. 차분히 옷을 들여다보니 질이 좋은 것도 아니다. 잘생긴 얼굴에는 '여기 처음 와봄'이라 써붙여져 있었다. 여직원은 단번에 인상을 구겼다. 매장 수익을 올려줄 정국의 점수란에 0점을 매겼다. 거지다.



"아 손님, 여기는 손님 생각보다 가격대가 높으실 수도 있는데…."

"괜찮습니다. 그보다 옷 좀 추천해주실 수 있을까요? 선물할 용이거든요."

"아 네…."



 잘생겼으니까 참는다. 여직원은 영 탐탁찮은 눈초리로 정국을 상대했다.



"어떤 스타일을 원하시는 지 설명해주시겠어요?"

"선물할 사람의 생김새를 말해도 되나요? 사실 다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서요."

"아 네 그러셔도 됩니다."



 여직원은 허리가 부러져라 인사하던 태도를 뒤바꿔 설렁설렁 대답했다. 어차피 가격만 듣고도 달아날 것이다. 시간낭비일 뿐이다. 정국은 떠올리는 듯 시선을 잠시 허공에 머무르더니 차분히 입을 열었다.



"일단 눈꼬리가 쳐졌구요. 순한 인상이에요. 웃으면 아주 예쁘고. 입술은 통통하고요. 얼굴은 하얀 편이고, 말랐어요. 어…그렇다고 볼품없게 마른 게 아니고 선이 얇아요. 무슨 옷이든 다 잘 소화하더라구요."

"남성분이신가요?"

"네."



 오메가 남친한테 하나보네. 말하면서 조금씩 미소 짓는 게 백퍼센트다. 여직원은 정국이 말한 스타일을 머릿속에 그렸다. 살짝 한울그룹 박지민 닮은 타입인데. 샵에 들렀다하면 네 시간동안 죽치고 있는 지민은, 블랙리스트 1순위의 영예를 안고 있음과 동시에 가게 한달 매출은 눈 깜짝할 사이에 찍고 가는 최고의 고객이었다. 비록 이 구석에 처박혀있는 샵에 온 적은 없어 실제로 보진 못했지만, 다른 서울에 있는 샵을 다니는 친구에게 건너건너 들었다. 선글라스를 끼고 쇼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 머리를 쓸어넘기면 그게 그렇게 환상이라고 한다. 건방져보이는 태도가 하나의 화보란다. 현 샵의 매니저도 박지민이라는 이름만 나오면 모셔보면 영광이지, 하고 넋두리처럼 중얼거렸다.



"이 옷은 어떠…어머, 이 옷은 손님께 조금 부담되실 수도…."



 무례한 언사였다. 여직원은 스스로 말하고도 너무 과했나, 생각했다. 그러나 정국의 표정에는 아무것도 드러나지 않았다. 못 들었나 보네. 태연하게 생각하며 흘려넘긴 여직원은 옷걸이에 걸린 옷을 들고 설명했다. 어떤 브랜드의 어떤 디자이너가 만들었는지, 옷이 담고 있는 의미는 무엇인지 하나하나 세세히 설명하는 평소의 설명보다 훨씬 간략했고 성의없었다.



"선물하실 용이라면 아마 받는 분도 만족하실 거예요."



 확실히 시장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나았다. 깔끔한 문양이 새겨진 하얀 반팔 셔츠는 상상만으로도 꽤나 지민에게 잘 어울렸다. 정국은 옷을 받고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뜰 지민을 머릿속에 그렸다. 네가? 네가 이걸 샀다구? 날 위해서? 아마 오두방정을 떨 것이다. 지민을 상상하며 정국은 웃음을 머금었다.



"이 옷으로 결제해주세요."



 여직원은 카드를 내민 정국에 내심 놀랐다. 거지인 줄 알았는데, 산다. 여직원은 마지막까지 덧붙였다.



"일주일 이내 환불 아니면 곤란해요, 손님."



 여직원이 2년간 가게에 출근하며 처음 뱉는 멘트였다.










 지민은 정국의 예상과 한치도 다르지 않게 놀랐다. 떨어질 듯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떡 벌렸다. 정국이 내미는 쇼핑백을 보고 뺨까지 양손으로 부여잡고 단단히 놀랐다.



"너…! 너…!"

"그렇게 고마워 할 필요 없어요. 어차피 박지민씨한테 옷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그러니까 앞으로는 밥이나 잘 먹어요. 걱정시키지 말고."

"누, 누구야? 전정국 맞아? 내가 좋아하는 전정국 아닌 거 같은데."



 지민은 정국의 볼을 양 손가락으로 꼬집었다. 옷장이 왜 맨날 저승사자처럼 검은 색이냐 물으면 정국은 옷 고르기 귀찮다며 가릴 것만 가리면 된다, 하는 지극히 원시인 같은 주장으로 반박했다. 고기도 못 먹고 있는데 만원이 넘는 옷은 사치라고도 덧붙였다. 색상은 무조건 검은색 아니면 가끔가다 흰색. 지민이 본 정국은 통 옷에 관심이 없었다. 지민이 믿기 힘들다는 듯 정국의 볼을 꼬집은 손을 약하게 흔들었다.



"내가 아는 전정국은 이런 거 사오는 사람 아니란 말이야. 우리 정국이는 돈 엄청 좋아한다구!"

"노으시즈. 븍즈믄쓰."



 놓으시죠, 박지민씨. 짜증난 얼굴로 정국은 지민의 손을 쳐냈다. 지민이 눈을 멀뚱멀뚱 뜨고는 그제서야 가슴을 쓸어 내렸다.



"하아…진짜 전정국 맞네. 이렇게 나 막대하는 거 보면."



 왜 전정국의 판단기준이 지민을 막 대하는 것인지 정국은 기가 막혔다. 누가 들으면 아주 몹쓸 짓만 골라한 줄 알겠다. 내가 뭐 했는데. 집에 거둬줘, 밥도 챙겨줘, 옷도 사줘. 식모살이란 식모살이는 다 하고 있는데, 정국은 감당 안 되는 지민의 논리에 뭐라고요 하고 받아치려다 관두었다. 박지민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게 대역죄인의 명목인가 보다. 지민은 정국이 내밀고 있는 쇼핑백을 받아 들고 안에 들어있는 옷을 꺼냈다. 정국은 살짝 긴장하며 지민이 내보일 반응을 기다렸다. 처음 지민이 가져왔던 옷들과 비교했을 때 다소 평범한 느낌이 없지않아 있었다. 지민은 옷을 양손으로 펼쳐 가만 바라보더니, 정국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이거 네가 고른 거야?"

"네 뭐…."



 여직원의 추천이었지만 끝에 선택은 자신이 한 것이다. 결제를 한 사람이 왕인 법이다.



"완전 예뻐!"



 지민이 옷을 끌어안고 붕붕 뛰듯 폴짝거렸다. 너무 예뻐! 진짜 마음에 들어. 정국의 긴장이 무색하게 칭찬을 퍼부으며 싱그럽게 웃었다. 너무나도 자기 취향이라며 행복하다 외쳤다. 최근 잠잠하다 싶던 달콤한 페로몬이 때를 기다렸다는 듯 무럭무럭 샘솟아 정국의 코끝에 스며들었다.



"맨날 검은 옷만 사더니. 난 네가 옷 고를 때는 색 몽땅 까먹은 줄 알았는데! 나 갈아입고 올게. 기다려."



 외치며 함박 웃은 지민은 옷을 들고 화장실로 팔랑팔랑 달려갔다. 정국은 솔직하게 좋아하는 반응을 드러내는 지민이 퍽 귀여웠다. 더럽게도 비싼 옷값이 아깝지 않은 느낌이었다. 가게에서 그런 무시를 받은 것쯤이야 행복해하는 지민의 반응에 그쯤이야, 하는 여유가 생겼다. 직원의 은근슬쩍 시작된 무시를 눈치 빠른 정국은 진작에 알고 있었다. 중간중간 가격이 부담 될 수 있다는 둥, 한 건너 골목에 다른 가게들도 많이 있다는 둥 무례한 발언들을 듣지 못한 것이 아니라 듣지 못한 척이었다. 참은 거다. 어차피 무시가 특별한 것도 아니다. 정국은 이미 가게 문 앞에서 스스로가 가게와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다 먼저 판단하고 있었다. 박지민이 아니라면 평생 한번도 들릴 일 없는 가게였다.



"전정국! 나 어때?"



 지민이 냉큼 옷을 갈아입고 튀어나왔다. 옷은 지민에게 꼭 맞춘 것처럼 어울렸다. 헐렁한 옷으로 가려졌던 날씬한 허리선이 오랜만에 강조되어 돋보였고, 단추를 두어개 풀은 셔츠깃 사이로 곧은 목선이 덩달아 눈에 밟혔다. 어떠냐며 지민이 움직일 때마다 쇄골이 은근슬쩍 나왔다가 다시 숨는다. 일순간 멍하니 시선을 빼앗긴 정국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흙 묻은 진주를 털어 원래 자리에 놓은 것만 같다. 적응이 안 될 정도로 순식간에 사람의 분위기가 바뀌어버렸다. 진작 입혀놓을 걸 그랬나. 아무튼, 다행이다. 쌩쌩한 상태로 돌아와서. 정국은 그 사실 하나면 충분했다. 지민이 제대로 보라며 한바퀴 빙그르르 돌았다. 얇은 허리선이 살랑거린다.



"어때? 잘 어울려?"

"잘 어울려요. 제가 보는 눈이 있네요."

"네 마음에 들어?"

"…네?"



 옷은 자신이 선물했는데, 역으로 물어본다. 선물을 받은 사람이 준 사람한테 마음에 드냐는 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이해하지 못한 정국이 답이 없자 지민은 구체적으로 한 번 더 물었다.



"이거 입은 내가 네 마음에 드냐구."



 지민은 직접적이었다. 말하며 자세히 보라 눈을 맞춰온다. 정국은 저도 모르게 귓불이 뜨끈거렸다. 무슨 사람이 저렇게 창피함이 없어. 일부러 외면하며 정국이 말했다.



"뭐…봐 줄만 해요."

"헤에, 그래?"



 지민이 베싯 웃었다. 아침 초죽음에 가까워 가던 상태와는 백팔십도 달랐다 옷 자체만 두고 본다면, 괜찮긴 했지만 수없이 많은 옷이 있는 지민에게 그저 그런 물건이었다. 흔하디 흔한 브랜드 옷 중 하나다. 다만 사온 사람이 정국이라는 점에서 모든 게 달라졌다. 전정국이 나를 생각하며 사온 거라는 거지? 고기 좋아하면서 풀떼기만 먹고 사는 정국이 자신을 위해 산 것이다. 옷보다 그 의미가 기분을 들뜨게 만들었다.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선물이다. 이런 기분 좋은 선물을 처음이었다. 가슴이 빠듯하게 달아오른다.



"정국아."

"…왜 그렇게 봐요."

"내가 볼 때 너도 나를 좀 좋아하는 거 같아."

"하?"

"네가 나를 위해 돈을 썼잖아? 넌 세상에서 돈이 제일 좋다며. 그런데 날 위해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걸 쓴 거잖아."



 정국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단순한 말인데, 정곡을 찔린 것처럼 차마 아무 반박도 하지 못했다. 어린 애들이나 생각할 부등호 놀이가 은근히 논리적이라 내심 당황했다. 맞다. 그건 사실이다. 현재 가장 필요한 걸 박지민을 위해 썼다. 단순히 더 좋은 걸 선물해주고 싶어서. 정국이 무어라 대답해야 하나 흔들리는 머릿속을 붙잡고 있는데, 지민은 히히 웃으며 완전히 부활했다. 아무렇지 않게 성인비디오를 뽑아오는 그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박지민이었다.



"그럼 그렇지! 내가 좋지? 그렇지?"

"안 좋아하거든요?"

"빼긴. 너 은근히 부끄러움 많구나? 귀엽다."

"박지민씨 너무 오바하시네요. 그냥 레벨업 좀 시켜드린 거예요. 좋아하지는 않지만 싫어하는 건 아닌 걸로. 그, 그리고 박지민씨 옷 그거 팔려서, 돈 들어와서 산거나 마찬가지거든요?"

"어, 진짜? 내 옷 팔렸어?"



 지민은 포인트를 잘못 짚었다. 옷이 팔리지 않는다는 사실도 나름 지민에게 중요한 문제였다. 하도 안 팔리니 정국의 말처럼 정말 원래 자신이 옷을 보는 눈썰미가 없나 하는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물론 그런 의심이 들라치면 곧장 절대 그럴 리가 없다며 부정하긴 했지만.



"거봐, 내 옷 다 예쁘다고 했잖아. 내 패션센스는 인정해줘야 한다니까."

"…그렇다고 칠게요."

"그럼 우리 이제 밖에서 데이트 할 수 있는 거야? 돈 생겼으니까?"



 지민이 기대에 찬 눈빛을 쏘아 보냈다. 정국은 차마 흔쾌히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 선물에 몽땅 들이부었다. 옷값이 하늘을 찌를 듯 비싸서, 여유분이라고는 얼마 남지 않았다. 지민은 너랑 하고 싶은 게 아주 많다 들떠 말하며 정국의 가슴팍을 두드렸다.



"뭐야, 표정이 왜 그래."

"별로 가격이 높게 안 나와서 놀러 갈 수준은 못 돼요."

"에, 그래? 생각보다 옷들이 쌌나 보네."



 지민은 가격을 묻진 않았다. 애초 산 가격도 모른다. 샵에 들러 마음에 드는 옷을 걸치고 챙기라 말하면, 가격은 전부 남준이 카드를 내밀어 계산했다. 청구서는 들여다보지도 않았다. 지민은 카페에 들러 커피를 사 마신 것과 옷값을 동등히 여겼다. 십분의 일도 안 되는 가격에 처분한 사실을 모르는 지민은 아쉬운 얼굴을 했다.


 지민은 돈에 대한 개념을 조금씩 깨달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정국의 집으로 오기 전까지 박사장이 쥐어 준 카드 덕분에 결코 돈이 마를 일이 없었다. 때문에 돈이란 언제든 쉽게 손에 쥘 수 있는 건 줄 알았는데, 매번 일을 하고 돌아와 기절하듯 곯아떨어지는 정국을 보면 그게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돈이 없으니 여러모로 불편하다. 정국과 보낼 시간도 줄고, 정국이 좋아하는 음식도 가져올 수 없다.



"저거 짐가방두 팔까…."



 지민은 먹음직스러운 먹이를 노리듯 단칸방 구석에 자리한 짐가방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저게 없음 불편하긴 한데. 그러다 지민이 불현듯 헉, 했다. 분명 스스로의 위대함에 감탄하는 표정이었다.



"와 나 방금 좀 소름 돋았어. 엄청 대박인 생각 떠올랐다."

"뭔데요?"

"우리 이거 팔고 데이트 가자!"



 지민이 자신이 입은 옷을 펄럭거렸다. 정국은 은근히 기분이 상했다. 뒷목 잡고 넘어갈 가격을 물리치고 사온 옷인데, 지민이 쉽게 되팔자 말하니 맥이 빠졌다. 옷 한 벌에 좋아하면서 눈웃음이란 눈웃음은 다 치고 웃은 사람이 어디 사는 누구더라. 퉁명스레 정국이 답했다.



"와 저도 소름 돋았어요. 너무 별로인 생각이라."

"뭐! 왜!"

"아니 옷 마음에 든다면서요. 근데 왜 팔아요?"

"이거 내 선물 아니야?"



 더 답답했다. 선물인 걸 안다면 판다는 건 조심스럽게 말하던가. 무슨 목적으로 말하더라도 기분이 나쁜 발언이었다.



"아 그러니까 그 생각 별로라고요. 그냥 입어요."

"싫어."

"박지민씨."



 언성이 높아질 즈음이었다.



"난 다른 선물 받을래. 나랑 데이트 하자. 그걸로 내 선물 할래. 선물이니까 내가 가지고 싶은 거 골라도 되는 거 아니야? 난 이런 옷 백 벌보다 너랑 데이트하는 게 좋은데. 응? 안 돼?"



 맙소사. 이건 뭘까. 정국은 답답했던 가슴이 다른 쪽으로 콱 막혀왔다. 박지민은 의도하지 않고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하는 걸 잘했다. 좀 전 귓불에 달아오른 열이 뒷목까지 옮겨간다. 대책없는 고백을 휙휙 던지는 박지민도 그렇고, 그거에 기분이 풀리는 자신도 이상하다. 정국은 괜시리 헛기침을 두어번 흘렸다.



"…뭐…그럼 데이트 하면 밥도 잘 먹고 할 거예요?"

"어! 나 토할 만큼 먹을 수도 있어! 많이 먹을게!"

"그건 바라지 않거든요. 그거 옷 환불 일주일 이내라고 했으니까…데이트로 바꿔줄게요."

"아자!"



 지민이 두 팔을 번쩍 들어올리며 눈꼬리를 휘어접었다. 그리고는 그대로 정국의 목에 팔을 감아 폴짝 안겨왔다. 정국이 당황해 버벅거렸다.



"뭐, 뭐하는 거예요!"

"데이트 한다며! 우리 데이트 연습."

"데이트는 원래 연습같은 거 없거든요?"

"없으면 만들면 되지. 해보자. 내 허리에 팔 좀 감아 봐."

"아 놔봐요. 잠깐만 놔봐. 박지민씨, 잠, 윽!"

"으응? 한번만 해봐. 어? 너가 선물해준 옷도 잘 어울린다며. 나 지금 입고 있잖아."



 정국이 어깨를 잡고 떼어놓을라 치면 지민이 답삭 더 달라붙어 부비적거렸다. 정국이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리면 지민이 같이 고개를 돌려 시선을 맞추어왔다. 피하기 위해 다른 쪽을 쳐다보면 지민이 또 따라온다. 완전히 밀착되어 과도하게 엉겨붙는 바람에 한 발자국 뒤로 밀린다.



"아니이, 너 나 좋아하게 될 거라니까? 쪼금 미리 앞당겨서 한다고 생각하구 지금 해봐봐."

"뭘 앞당겨서 해요. 누가 들으면 스킨십 나한테 맡겨놓은 줄 알겠네. 빨리 팔 풀어요. 아 쓰읍, 풀라 했어요. 셋 셀 동안 안 떼면 밀 거예요. 하나."

"싫은데? 안 풀건데? 너랑 평생 붙어있을 건데!"



 쩔쩔매는 정국이 재미있어 지민이 허리를 감은 팔에 더 힘을 꽉 주고 장난을 쳤다. 경고가 먹히긴 커녕 프스스 웃으며 신나 한다. 정국이 그런 지민을 바라보다 결국 실소를 터뜨렸다. 이미 숫자를 세는 목소리가 풀려있었다.



"둘."

"아 전정국 좋다."

"셋."

"전정국 짱 좋아."



 밀어내려던 정국은 끝끝내 지민을 떼어내지 못하고 계속 픽픽 흐르는 실소를 막지 못했다. 이상하게 웃음이 계속 나왔다. 항복이다.



"대체 그런 말투는 어디서 배웠어요?"

"넌 이 상황에서 그게 중요해? 내가 이렇게 안겨있는데? 좀 날 덮치고 싶은 기분은 안 들어?"

"안 드는데요."

"이 고자자식."

"고자라면서 왜 안고 있어요? 팔 좀 풀어봐요."

"그건 싫어. 조금만 더 이러고 있자. 기분 좋단 말이야."



 지민이 히히거리며 가슴팍에 딱 달라붙어 옹알거렸다. 정국은 풍선 바람 빠지듯 픽픽 웃으며 거진 떼는 시늉만을 했다. 제대로 힘을 써 떼어내면 지민이 떨어져나갈 것이 틀림없었지만, 오랜만에 솔솔 풍기는 단 향이 싫지 않았다. 그래, 그렇다. 거짓말이다. 솔직히 정국은 막상 지민이 좋으면 아쉬울 것 같았다.



"아 놓으라니까요? 놔봐요. 일 가야 돼요."

"그럼 뽀뽀만 한방하고 놔줄게. 괜찮지? 이 정돈 괜찮잖아. 빨리 허락해. 키스도 아니고 뽀뽀잖아. 응?"



 지민이 고개를 반짝 들어올렸다. 지난번 얻은 교훈으로 섣부른 도전은 불행만을 부른다는 걸 깨달은 참이다. 지민이 허리를 감싸던 팔에 살짝 힘을 빼고는 얼굴을 팍 들이밀었다. 입술과 입술 사이에 손가락 한 마디만 틈만 남겨놓았다. 딱 한번만 해보자.



"진짜 쪼금만 붙이고 있다가 떨어질게. 입술 스친지도 모르게 할…악! 야! 미는 게 어디있어! 아 저거 진짜 고자…!"



 정국은 도망치듯 아르바이트 장소로 뛰어갔다. 더 보다간 얼굴까지 붉어질 것만 같았다.









***







 성질 급한 지민은 다음날 바로 정국을 쪼았다. 스스로 환불하고 오겠다며 야단법석을 피웠다. 하루라도 빨리 데이트 선물을 받아야겠다는 것이 이유였다. 정국은 하루 종일 환불이야기만 하는 지민에 지고 말았다. 집 오는 길도 못 찾으면서 시내에 나간다니. 탓에 물가에 내놓은 애 타이르듯 지민을 앉혀놓고 강의를 시작했다. 여기는 이렇게 가고요. 거기 가면 그렇게 생긴 거 나오거든요? 아 그냥 다음에 저랑 같이…알았어요, 알았어. 이 골목으로 돌아서 들어가면 되요. 절대, 그리고 절대 가서 깽판 치고 오면 안 되는 거 알죠? 정국은 불안해하며 얌전히 다녀오겠다 약속을 받아내었다. 지민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내가 무슨 망나니인 줄 아냐며 툴툴거리다 새끼손가락을 내밀어 약속을 완료했다. 세 번씩이나 더 당부한 정국에게 지민은 걱정 말라며 찰떡같이 알겠다 고개를 끄덕였다.



"어서 오세요."



 지민은 주의에 또 주의를 주는 정국에 나름 긴장했으나 가게를 보고 긴장을 풀었다. 집처럼 드나드는 종류의 옷가게였다. 앞마당이나 다름 없다. 다른 때라면 쇼파에 앉아 다리부터 꼬았겠지만, 오늘 지민은 바빴다. 한시라도 빨리 정국을 꼬셔야 하는 막중한 의무가 있었다. 지민은 다짜고짜 카운터에 달려가 옷을 턱 내려놨다.



"이거 환불."



 웃는 얼굴로 손님을 맞은 여직원은 파사삭 인상이 굳어졌다. 환불. 바로 엊그저께 꺼낸 이야기였다. 얼굴이 달라 다른 사람인 줄 알았는데, 옷을 보니 역시나 엊그제 옷과 똑같다. 진짜 환불을 할 줄은 몰랐다.



"환불…이요?"

"응."



 지민은 여직원에게 시선하나 안 주고 가까운 미래를 상상하고 있었다. 데이트. 이게 시작이다. 이렇게 한발 한발 나아가면 되는 것이다. 어서 전정국이랑 뽀뽀하고 싶다. 전정국이랑 하고 싶은 거 진짜 많은데. 손도 잡아야하고. 키스도 하고, 섹스도 하고, 결혼도 하고. 노인정에 이 기쁜 소식을 알리고 싶다. 연애경험이 많은 유씨 노인은 자고로 결혼생활에서도 밀고 당기는 게 중요하다 너무 좋아하는 티를 내지 말라했지만, 지민은 상관없었다. 좋아죽겠는데 어떻게 티를 안내? 당기기만도 바쁘다.


 한참 지민이 행복의 나래를 펼치고 있는데, 여직원은 정국을 스캔했을 때처럼 지민을 스캔했다. 얼굴은 어디서 많이 봤는데. 엊그제 잘 생긴 남자가 말한 특징과 똑같다. 한울그룹 박지민상. 진짜 닮긴 했다. 거의 복제 수준이다. 여직원은 지민이 그 박지민일 것이라고는 꿈도 안 꿨다. 사이즈 안 맞는 옷에, 눈웃음? 많은 소문을 달고 다니는 박지민은 샵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도도하기 이를 데 없는 표정으로 명령부터 내렸다. 구린 거 알아서 제외 해. 지금 순해 보이는 이 남자가 그 박지민일 수가 없다. 게다가 박지민은 유성그룹과의 결혼을 준비하고 있으니 결코 이런 시골에 처박힌 곳에 올 리가 없었다. 여직원은 지민에게도 점수를 매겼다. 0점.


 슬슬 지민이 지루해졌을 때였다. 여직원은 작게 중얼거렸다. 정국을 무시했던 태도 그대로였다. 아니, 더 대놓고 무시했다.



"하…귀찮게…능력이 없으면 사질 말던가."



 방금 어떤, 굉장히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스쳤다. 지민은 멀뚱멀뚱 여직원을 쳐다보았다. 가게에 와서 이런 인사를 처음 듣는 탓이었다. 똑똑히 들었는데, 아무말도 하지 않은 척 카드를 긁는다. 지민이 어이가 없는 웃음을 걸치고 물었다.



"야."

"네?"

"너 나한테 말한 거야?"



 뜨끔한 여직원은 카드를 지민에게 돌려주며 시치미를 잡아뗐다.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손님."

"내 귀가 호구인 줄 알아?"



 지민이 태세를 바꿔 눈꼬리를 치켜 올리고 으르렁거렸다. 여직원은 움찔했다. 포스가 장난 아니다. 저러니 진짜 박지민 같았다. 여직원은 애써 침착한 표정을 유지했다.



"손님, 오해십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지민이 눈을 가늘게 떴다. 가늠하듯 여직원을 살피고는 한쪽 입꼬리만 비틀어 올렸다. 정국의 집에 들어오기 전, 지민이 가장 익숙하게 짓는 얼굴이었다. 거만하고, 아랫사람보듯 깔아보며 비웃는 표정.



"아 그래? 생각 바꿨어. 옷 가져와. 쇼핑하게."

"네?"

"그리고 매니저 불러와. 가게 상태가 개판이네. 내가 왔는데, 매니저가 얼굴 코빼기도 안 비추고?"



 지민은 쇼파로 걸어가 도도하게 다리를 꼬고 앉았다. 사이즈도 안 맞는 옷에, 꾸미지도 않은 모습인데 남달랐다. 여직원은 이게 뭔 일인가 싶었다. 거지가 상류층 행세 한번 정말 똑같이 냈다. 일이 잘못 돌아간다는 생각이 문득 덮쳐, 여직원은 설마, 했다. 에이 설마. 설마 진짜 그 박지민이려고. 옷을 사러 온 잘생긴 남자도 혹시나 했지만 결론적으로 조용히 마무리 되었고 아무것도 없었다. 여직원은 부러 매니저를 부르지 않았다. 박지민을 복사한 남자는 사이즈도 안 맞는 옷을 입은 거지일 뿐이었다.



"셔츠부터."



 지민이 명령하자 여직원은 행거를 가져와 날랐다. 지민은 쇼파에 앉아 손가락만 까딱했다. 마음에 들지 않으니 넘기라는 뜻이다. 설명이 이어지자 심드렁하게 듣고 영 별로라는 듯 고개를 모로 살짝 꺾는다. 저, 저 거지가 어떻게 저런 행동을 아는 거지. 여직원은 점차 당황스러웠다. 뭔가 일이 잘못 돌아가고 있다. 여직원은 그제야 잠시만 기다려달라는 말을 부탁을 하고 전화로 매니저를 호출했다. 옆 가게로 마실을 나간 매니저는 10분은 더 뒤에 돌아올 것이다. 점차 등골이 오싹하게 저려왔다.



"방금 그거 가져와."

"네, 손님."

"그리고 아까 봤던 두 번째랑 여섯 번째도."



 지민의 옆 행거에 옷이 하나둘 쌓였다. 지민은 감흥 없는 표정으로 옷을 다 보더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골라놓은 행거로 다가가 옷을 집어 들었다.



"야 아까 한말 다시 해봐."

"네, 네?"

"안 해?"



 지민이 들고 있던 옷을 찢었다. 디올 셔츠가 맥도 못 추리고 단추가 다 뜯겨나갔다. 지민은 바닥에 셔츠를 툭 떨어뜨리고 짓밟았다. 얌전히 환불만 하고 돌아오겠다 정국과 했던 약속은 하늘로 날려버렸다. 그리고는 다음 옷을 꺼내 들었다. 여직원은 경악으로 입을 떡 벌렸다.



"해."

"소, 손님 그게…."



 이번엔 발렌티노 셔츠였다. 지민은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 않은 표정으로 패악을 떨었다. 샤넬, 버버리, 루이비통. 지민의 손에 의해 희생된 옷이 하나 둘 바닥에 쌓였다. 벌써 찢어진 옷의 가격이 천 단위는 가볍게 훌쩍 넘었다. 여직원은 거의 울 지경이었다. 가진 것도 쥐뿔 없어 보이는데, 더럽게 무섭다. 여직원이 벌벌 떨며 입술만 꾹 물고 있을 때였다. 문이 열리고 매니저가 뛰어 들어왔다. 매니저는 가관인 매장 꼴에 눈이 튀어나올 만큼 크게 떴다.



"이, 이게 대체…!"

"네가 매니저야?"

"바, 바, 바, 박지민 도련님?!"

"너는 그나마 낫네 좀. 얘 입 좀 떼게 해봐. 아까 나한테 한 소리 했는데, 다시 말하라니까 도무지 입을 안 여네? 본드라도 붙였어? 야 아깐 잘 나불거렸잖아. 말해보라니까? 어? 왜 안 말해?"



 매니저는 천둥이라도 맞은 얼굴이었다. 박지민이, 그것도 한울그룹 외동아들이 제 가게에서 단단히 화가 났다. 뽑아놓은 직원은 울기 직전이었고, 가게 옷은 처참하게 망가져 있다. 매니저는 허겁지겁 달려가 여직원을 채근했다. 일단 한울그룹 외동아들 박지민의 화를 푸는 게 우선이었다.



"유, 유미양? 천, 천천히 말해 봐요. 지민 도련님께서 말씀하시잖아요?"



 더 이상 사고 그만 치자. 매니저는 제가 울고 싶었다. 그나마 아는 얼굴인 매니저의 요구에 여직원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느, 능력 없으, 흑, 면 사지 마, 마시라…고…."

"이렇게 잘 말하면서 왜 아까는 안 말했어? 그리고 내가 들은 건 그게 전부가 아닌데?"

"귀, 귀, 귀찮…죄, 죄송합니다."



 하늘이시여. 매니저는 약이라도 먹고 혼절하고 싶었다. 이 가게 전체를 사고도 남을 사람한테 한 말이 그런 망언이라니. 사태파악이 빠른 매니저는 허리가 부러져라 지민에게 머리를 숙였다.



"도련님, 정말 죄송합니다. 저희 매장 직원이 아직 신입이라 눈이 어두워서 그만…! 정말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한 건 알아?"

"정말 죄송합니다. 도련님 화가 풀리실 일이라면 뭐든 하겠습니다!"



 지민은 눈을 좁혔다. 여전히 매장 카운터 위에 올려져 있는, 정국이 선물로 사온 셔츠와 행거 끝자락에 걸린 옷을 눈에 담았다. 정국에 대한 취급이 어땠을지는 손쉽게 예상이 갔다. 생각 같아서는 질질 끌고가 무릎이라도 꿇리고 싶지만, 어차피 큰 소란은 피우지 못한다. 소문은 늘 빨리 퍼진다. 어떤 방식으로든 위치를 들켜봐야 좋을 것이 없다. 이미 깨져버렸지만 정국과 얌전히 다녀오겠다는 약속을 하기도 했다.



"그래? 그렇다면야…좋아, 봐줄 테니까 시키는 거 몇 가지만 해."



 지민이 싱긋 웃었다. 매니저의 눈에 지민의 등 뒤로 펄럭거리는 악마의 날개가 보였다. 샵을 나오는 지민의 손에는 커다란 쇼핑백이 들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