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cannot see this page without javascript.

[국민] 럭키 스트라이크 07

by 토페 posted Sep 29, 2016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BGM 박경-오글오글>









 지민은 자기 전 정국에게 수상한 소리를 했다. 일 힘들어? 얼마나 힘들어? 같이 일하는 사람들은 어때? 정국은 피곤에 쩔어있었고,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건가 싶어 대강 대답했다. 마지막 자는 순간까지도 지민은 질문을 놓지 않았다. 웅얼거리며 대답한 정국은 반짝 빛나는 지민의 눈을 놓쳤다. 그리고 다음날, 정국은 공사장 아르바이트를 하다 처음으로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크게 뜨고, 입을 떠억 벌렸다. 첫날 벽돌을 떨어뜨려 발이 찌였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공사장 출입구에서 누군가 자신을 찾는다고 하길래 정국은 별 일이라 생각했다. 빚쟁이들은 공사판까지 따라오지 않는다. 하물며 빚도 잘 갚고 있다. 찾아올 사람이 없는데, 생각하며 나간 현장에서 검은 머리통을 보고 경악했다.



"박지민씨?!"

"아는 사이야? 정국군하고?"



 공사장 문 앞에서 실랑이를 벌이던 사내가 골치라는 듯 말했다. 민간인 통제 구역이라 아무리 말해도 도통 말을 들어먹질 않아 진이 빠져버렸다. 정국과 아는 사이라 했을 때는 워낙 정국이 평소에 주변에 관해 말한 적이 없어 거짓말인 줄 알았다. 사내는 쩝 입맛을 다시고 지민에게 손을 내밀었다. 사내의 손에는 흙먼지가 가득했다.

지민은 평소라면 이런 인사 따위는 절대 받지 않았다. 위생도 좋지 못하며, 자신을 불청객 취급하고 쫓아내려는 사람이다. 한쪽 입꼬리부터 비틀어 올리려던 지민은 일순 동작을 중지했다. 잠깐, 정국이가 잘 보여야 할 사람들이잖아. 그렇다면 내조 정도야. 재빠르게 판단한 지민은 방긋 양쪽 입꼬리 모두 올렸다.



"괜찮아요. 오해할 수도 있죠. 그런 거 가지고 뭘. 신경 쓰지 마세요."



 남준이 봤다면 눈을 비볐을 광경이었다. 존댓말에, 비웃음이 아닌 웃음에, 가식에. 어디 도련님 영혼이라도 바뀐 거 아니냐며 짤짤 흔들었을 지도 몰랐다. 정국조차 사근사근한 지민의 태도에 놀라 안 그래도 커진 눈을 더 확장시켰다. 박지민 입에서 정상적인 소리가 나오다니. 사내는 호쾌하게 웃으며 지민의 등을 팡팡 내리쳤다.



"거참 인사성 밝은 청년이네!"

"헤헤 감사합니다."

"그런데 정국군하고는 무슨 사이야?"

"저요? 저는 정국이랑 결혼…으븝!"



 정국이 잽싸게 튀어나와 지민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작은 얼굴에 입은 물론 코까지 틀어막아 지민이 읍읍거리며 정국을 두들겼다. 정국은 어색하게 웃으며 대신 인사를 전했다. 공사판은 흔하디 흔한 베타만 가득한 곳이었고, 알파와 오메가가 흔하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밝히지 않는 편이 편했다. 괜한 시선 집중을 받고 여러모로 귀찮았다.



"네, 결혼! 결혼할 짝 소개시켜주는 친구예요, 하하."



 지민의 미간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찡그려졌다. 결혼할 짝 소개? 웃기고 있다. 정국이 결혼할 짝은 자신이다. 지구 멸망이 코 앞으로 다가와도 정국에게 다른 사람을 제 손으로 소개시킬 일은 없었다.



"그래? 정국군 정도면 여자걱정은 없을 거 같은데."

"그런가요? 저 잠시만 이 친구랑 이야기하다 가도 될까요?"

"그래그래. 하고 와. 난 먼저 갈 테니까."



 사내가 멀어지자마자 지민은 정국의 손에서 벗어났다. 프하! 숨을 들이키고는 눈을 빼족하게 만들어 정국을 노려봤다.



"왜! 왜 말 못하게 해!"

"전 당신이랑 결혼할 마음 죽어도 없거든요?"

"씨이…결혼 가능성이 있다고도 할 수 있지!"

"그것도 안돼요. 여기서는 결혼의 결자도 꺼내지 말아요."

"치사하게."

"이건 치사한 거 아니거든요? 박지민씨가 너무한 거예요. 아니 근데 대체, 여기는 어떻게 온 거예요?"



 지민은 척 팔짱을 끼곤 고개를 쳐들었다. 단순히 심심해서 찾아온 것이 아니다. 노인정 출석도장을 매일 찍다 보니 심심한 것도 꽤나 줄어들어 그 이유는 가장 적었다. 지민은 나름의 사상에 입각하여 온 것이었다. 애가 매일 일에 찌들어서 집에 오는데, 얼마나 직장환경이 불우한지 체크하기 위함이었다. 가장 큰 이유는 정국이 보고 싶어서였지만, 지민은 속으로 한사코 그런 사사로운 감정 때문이 아닌 막중한 임무를 띄고 있다 생각했다.



"순찰 돌러 왔지."

"뭐요?"

"너 괴롭히는 사람 있으면 내가 다 눈도장 찍어두려고 왔다."

"나 참…그런데 교통비는 어디서 났어요?"

"할머니 할아버지한테 빌렸어."

"뭐라구요? 이제는 삥도 뜯어요? 노인정에서? 남의 집에서 얹혀사는 걸로도 모자라서, 힘없는 노인 분들한테 삥까지…!"

"야! 아니거든! 빌린 거야! 집에만 돌아가면 삼백 배로 갚아드리기로 하고 왔어!"



 졸지에 노인정 깡패로 낙인 찍힌 지민은 억울함을 내세웠다. 어떻게 쫓아가야 할까 고민하는데, 무슨 고민이라도 있냐며 노인들이 말을 걸어왔다. 장소는 아는데 가는 방법이 고민이라 하니 노인들은 꾸깃꾸깃한 천 원짜리 몇 장과 함께 지도까지 써줬다. 여덟 살배기 아이가 길이라도 잃을까 걱정하는 것처럼 정류장까지 지민을 우르르 마중했다. 할머니 괜찮아 나 박지민이야, 하고 큰소리 떵떵 쳤지만, 사실 지민은 노인들이 버스를 잡아주었어도 내리는 정거장을 잃어 한정거장을 걸어온 참이었다.



"그런데 뭐야. 여기 김태형네 꺼였어?"



 지민은 유성건설이라 쓰여있는 정국의 안전모가 못마땅했다. 김태형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튀어나왔다. 우리 집도 집 짓는 거 있는데. 저기에 한울그룹이라 쓰여있으면 좋겠다. 지민은 다음에 박사장에게 건설사업의 비중을 더 늘려야 한다 주장하기로 마음먹었다. 정국은 자신의 머리를 노려보는 지민에 의아해하다 지민의 등을 떠밀었다.



"어찌 됐든, 이만 돌아가세요. 여기는 위험하고 박지민씨 있을 공간도 없어요."

"싫어."

"박지민씨!"



 지민은 냉큼 공사판 안으로 파고들었다. 정국을 요리조리 피해 일꾼들이 쉬는 임시컨테이너박스 안으로 쏙 사라졌다. 정국보다 느리지만 사람들을 장애물을 삼아 피하는 게 여간 재빨랐다.

 정국은 불안했다. 한시도 가만히 있질 못하는 지민이 무슨 거대한 사고라도 쳐올 것 같았다. 초기방어가 좋다. 임시컨테이너박스 안으로 따라 들어가려는데, 총책임자가 정국을 붙잡았다. 만능맨 정국은 술집을 비롯해 건설현장에서 우수한 일꾼이었다.



"정국군, 여기 이거 좀 날라줘야 할 거 같은데?"

"아…."

"음? 무슨 일이라도 있나?"

"아, 아닙니다. 지금 당장 가겠습니다."



 부디 아무일 없기를 빌며 정국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뗐다. 아무리 박지민이라도 한 시간도 안 되어서 대형사고를 칠 리는 없을 것이라 최면을 걸며.

 정국의 바람이 통한 모양인지 의외로 임시컨테이너박스는 잠잠했다. 지민이 사라진 순간부터 정국은 실직위기에 놓인 것과 다름 없다 생각하고 있었다. 이상한 건 조용하니 더 불안하다는 점이었다. 고함도 없고, 타격음도 없고 쥐 죽은 듯 평화로웠다. 8층에서 작업을 하는 터라 들리지 않을 수도 있다만, 소란이 인다면 8층은 물론 작업 끝층에서도 들렸다.

 정상적인 거에 위화감을 느끼기 시작하다니. 꼬여가는 사고관을 인정한 정국은 주어진 일을 빛의 스피드로 끝마쳤다. 공사판에 투입되고 나서 역대급으로 가장 빠른 손놀림이었다. 제발 아무 문제만 없어다오. 빌며 정국이 임시컨테이너로 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탔다.



"어, 정국군! 다 작업 마쳤나 봐? 일찍 끝냈네?"



 입구에서 지민을 통제하던 사내였다.



"네."

"아 근데 데려온 친구 안 보냈더라구?"

"네?"



 오 제발. 뭐지. 반말 지껄이다가 한대 맞았나. 아니면 총책임자한테 물이라도 떠오라 시켰나. 펼쳐질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은 다 유추하며 정국은 불안해했다. 사내는 정국의 예상과 전혀 다르게 유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 친구, 엄청 귀엽던데. 지민군."

"…예?"

"이 커피도 그 친구가 타준 거 아니야. 처음에 엄청 못하더니 곧잘 가르쳐주니 능숙하게 하더라구. 그런 친구가 있으니 정국군이 지루할 틈이 없겠어. 왜 여자친구가 없는 지도 이해가 가는 구만! 싹싹하고 귀여워. 그 뭐냐, 요즘에 나오는 아이돌? 그거 같더라니까!"

"박지민씨가…그 커피를 탔다구요?"

"어, 전부 다 타주더구만. 모두 지민군이 타주는 커피 얻어먹겠다고 휴게소로 가고 있어."



 정국은 어리벙벙했다. 박지민은 집에서 요리라고는 아무것도 못했다. 가스불을 키는 법조차 모른다. 벨브를 잠가놓고서 이게 열리지 않는다고, 고장 났다며 몰아붙이던 모습에 정국은 할 말을 잃었었다. 냄비에 물 올려 즉석밥 해동도 못하는 지민이 방금 커피를 탔다 했다. 진짜 박지민이 저걸 탔다고?



"그 진짜 검은 머리에…아, 아닙니다. 잠시 내려갔다 오겠습니다."

"응, 쉬다 올라와."



 마침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정국은 쏜살같이 튀어나갔다. 뒤에 남은 사내는 역시 끼리끼리 어울린다는 속담을 되새김질 했다. 인물도 좋고, 성격도 좋고. 사내가 단편적으로 본, 애교 많고 싹싹한 지민이 다소 무뚝뚝한 정국과 같이 있다 생각하니 절로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가만, 근데 내가 지민군을 어디서 봤던 거 같은데…."



 분명 낯이 익긴 했다. 처음에는 몰랐지만 임시컨테이너에서 웃고 떠들며 얼굴을 마주하니 무언가 떠오를 거 같기도 했다. 어디서 봤더라. 사내는 주변에 팍팍한 또래 사 십대들만을 동무로 두고 있었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다. 곰곰 머리를 굴리던 사내는 흠칫했다. 어제 본 뉴스에서 봤다. 한울그룹 우성오메가 외동아들 박지민, 유성그룹 우성알파 외동아들 김태형. 세기의 결혼식. 비밀리에 준비 중. 거대한 타이틀로 흘러나왔다. 사내는 이내 무게감없이 손을 내저었다.



"에이, 그런 사람이 여기 있을 턱이 있나. 이런 땀냄새나는 공사판에 한울그룹 왕자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한참 결혼 준비중인 새색시가 뭐 때문에 이런 공사판을 오겠는가. 그것도 심지어 그런 사이즈도 안 맞는 후줄근한 티셔츠를 입고. 더불어 뉴스에 나온 한울그룹 우성오메가 박지민은 죄다 싸늘한 무표정이었다. 척 보기에도 일반인들은 가격 상상도 못할 비싼 옷까지 걸치고 있었다. 임시컨테이너박스에서 활짝 웃으며 커피를 타는 귀염둥이와는 천지차이였다. 그런 유순한 얼굴과 화면 안에서 냉정해 보이는 얼굴은 극과 극이었다. 결정적으로 정국의 친구라 했다. 솔직한 말로 사내는 정국의 처지를 알고 있었고, 결코 정국이 그런 거물과 알 리가 없다 판단했다.



"그런 아들 하나 있으면 딱 좋겠구만."



 곰살맞게 웃는 지민을 보니 여우 같은 마누라는 없어도 토끼 같은 새끼는 욕심이 났다. 사내는 다소 진하게 타진 커피를 물고 허허 웃었다.






 임시컨테이너를 찾은 정국은 경악했다. 내가 아는 박지민 맞나. 누가 바꿔치기한 거 아냐? 문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흘러 나오는 목소리에 발이 딱 굳었다.



"헐, 진짜요? 완전 신기해요! 벽돌을 그렇게 만드는 거구나. 대단하세요!"

"하하 이런 걸 가지고 뭘."

"그럼그럼 나무집은 어떻게 만드는 거예요? 그게 더 힘들어요?"

"그것도 별 거 아니지, 어흠!"



 쫑알쫑알 흘러나오는 목소리와 더불어 박수소리도 들렸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상황은 흡사 재롱잔치라도 온 것만 같은 분위기였다. 지민은 커피를 타고 있었고, 지민을 중심으로 공사판 일꾼들의 시선이 몰려있었다. 지민의 옷은 난장판이었다. 물쇼라도 다녀온 듯 했다. 검은 티는 끝자락이 젖어있었고, 대체 커피를 타면 어떻게 타는 것인지 머리도 살짝 젖어있다. 지민은 문을 연 정국을 보고 환히 웃었다.



"전정국!"

"꼴이 왜…."

"응? 아 별 거 아냐. 커피 타다가 물 쏟아서 그만. 일 다 했어?"

"아 지민군이 글쎄 얼마나 커피를 못 타는지."

"아저씨!"



 지민이 장난스레 눈을 흘겼다. 일꾼들은 그게 또 귀엽다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알파도 없는 모두 평범한 베타인데, 지민한테 껌뻑 죽어나갔다. 다 식충이가 귀엽다고 난리다. 정국만 동 떨어진 세계에 있는 것 같았다. 정국은 멀어지는 정신줄을 다잡고 지민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가려 했다.



"왜."

"잠깐 얘기 좀 해요."

"얘기를 왜 밖에서 해. 그냥 여기서 해. 뭐 나 아무 짓도 안 했거든?"

"그래, 정국군. 지민군은 그냥 커피 탄 거 밖에 없어."

"그래도 여기 있으면 일 하시는 데 방해될 거 같아서요. 아무래도 집에 가게…."

"아 괜찮아! 어차피 여기는 쉬는 곳인데 뭐. 다들 그렇지 않아?"



 여기저기서 괜찮다 한다. 만난 지 몇 시간이나 지났다고 모두 지민의 편이다. 오히려 지민을 두고 먼지바람만부는 현장의 활력소라 칭했다. 정국은 엉거주춤 지민의 손을 놓았다. 반뼘 아래 있는 밤색 눈동자가 의기양양하게 말을 걸었다. 봤지? 봤지? 정국은 한숨을 쉬었다. 많은 사람이 있는 곳에서는 언제나 지민의 승리다. 그리고는 어딘가 마음에 들지 않아 뚱한 표정으로 쇼파에 앉았다.



"정국이 커피는 제일 맛있게 타줘야지!"

"지민군 너무한 거 아니야? 차별하기 있어?"

"너무 그러지 말어. 지민군은 다 맛있게 타준다 해놓고 다 맹탕커피로 만들어 놨으니까."

"아니거든요오? 완전 잘 할 수 있거든요?"



 이후에도 박지민쇼는 계속 됐다. 뭘 해서 사람들을 홀려놨나 했더니 일꾼들이 대화 시키다 물 넘치면 비명을 지르고, 투덜거리며 커피를 다시 타는 게 전부였다. 정국은 이쯤이면 지민이 요술이라도 부린 건 아닐까, 하고 고민했다. 저런 게 재미있어? 애 깜짝깜짝 놀라면서 옷 젖는 게? 삼촌이 귀여운 조카 볼 꼬집듯 우쭈쭈하는 광경이었지만, 정국은 어째서인지 모든 게 못마땅했다. 일 할 때도 텃세부리는 사람 하나 없어 좋다고 느낀 동료들이었는데, 오늘은 영 별로였다.

 가만 지켜보다 보니 놀라는 표정이 꽤 귀엽긴 했다. 머리는 어떻게 젖었나 했더니 바닥에 떨어진 컵을 줍다가 식탁에서 떨어진 물을 맞은 것이었다. 뒤에 악악거리며 머리를 터는 것도 물 싫어하는 고양이 같아 보면 볼수록 괴롭혀주고 싶게 생기긴 했다. 그래, 뭐. 박지민이 진상이긴 하지만 여기서 진상인 티는 안 냈겠지. 인정한다. 박지민은 객관적으로 놓고 봤을 때 밉상이 아니다. 

 근데, 왜 자꾸 짜증이 나는지 모르겠다. 휴게실에서 웃지 않는 사람은 정국뿐이었다.



"박지민씨, 이제 그만 가세요."

"왜? 나 너 퇴근하면 같이 갈 건데."

"정국군 우리는 괜찮다…."

"물에 젖은 옷으로 계속 있다 보면 감기 걸릴 거 같아서요."



 일꾼들은 그제야 아, 했다. 껄껄 웃으며 놀다 보니 물에 젖어가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일꾼들은 지민에게 한마디씩 거들었다.



"그래, 지민군 빨리 들어가야겠다. 감기라도 걸리면 안되지."

"괜찮은데…."



 승기가 정국에게 넘어갔다. 나는 우월한 유전자라 감기 같은 거 안 걸리는데. 엄청 튼튼한데. 툴툴거리며 지민은 어쩔 수 없이 젖은 머리를 털고 나갈 준비를 했다. 정국은 지민을 어서 집에 옮겨다 놓고 싶었다. 걱정하던 사고도 안 쳤는데, 자꾸만 신경에 거슬렸다. 따라오기는 왜 따라와서.



"참, 지민군이 정국군하고 같이 산다는데 티비도 없다며?"



 나가려는 지민을 일꾼이 붙잡았다. 지민이 앉아서 수다를 떨며 다 말했나 보다. 정국은 떨떠름한 얼굴로 수긍했다. 촉이 좋지 않다.



"네, 뭐…딱히 큰 필요가 없어서요."

"지민군이 심심해 죽겠다고 하던걸? 우리 집에 안 쓰는 티비 있는데 하나 줄까?"



 역시나다. 정국은 전기세를 잡아먹는 괴물인 티비 따위는 줘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하루에 한 시간씩만 켜도 전기세가 얼마인데. 잘 사용하지도 않으면서 공간만 차지한다. 집도 좁은 판인데 공간만 차지하는 애물단지로 전락할 게 뻔했다. 미치지 않고서야 저런 물건을 집에 들여놓을까 봐. 대형 쓰레기는 버리는 것도 돈이다. 정국이 칼날같이 답했다.



"아니요, 마음은 감사 드리지만 아무래…."

"완전 좋아요! 아저씨 짱! 대박, 진짜 주시는 거예요? 와와!"



 다 말아 먹었다. 정국은 해맑게 답하며 팔짝팔짝 뛰는 지민을 발견하고 얼굴을 쓸었다. 골칫덩이 박지민. 정국은 다음부터 절대 지민이 공사판에 오지 못하도록 막아야겠다 다짐했다.










***












 티비는 이틀 뒤에 배달됐다. 공사장 아르바이트가 모처럼만에 휴일인 날과 겹쳤다. 지민은 신이 나 방방 뛰어다녔지만, 정국의 얼굴은 무겁게 가라앉았다. 전기세 괴물을 내 집에 들이다니. 폰 배터리 충전도 일주일에 세 번만 하는 정국에게는 뒷목 잡을 일이었다. 거실에 떡하니 자리 잡은 티비를 두고 지민과 정국이 한판 붙은 것은 당연했다.



"버릴 거예요. 그런 줄 아세요."

"왜! 나 심심하단 말이야! 너는 일 나가고 나는 집에서 뭐해!"

"박지민씨도 집 나가는 거 알고 있거든요? 노인정 맨날 가서 잘 놀고 오잖아요."



 쟤가 그걸 어떻게 알지. 지민은 노인정에 꾸준히 출석도장을 찍다 못해, 노인들의 집까지 쏘다녔다. 심지어 하도 잘 얻어먹고 다녀 예전보다 살도 올랐다. 처음에는 음식을 얻어먹는 다는 게 부끄러웠지만, 지민은 할머니랑 할아버지가 밥 혼자 먹으면 적적하다잖아 하는 이유로 스스로와 합의 봤다. 반찬 몇 개만 집어먹던 때에 비해 혈색도 훨씬 좋아졌다. 맨날 정국이 일을 나가 알지 못할 거라 생각했는데 제가 너무 정국을 얕봤나 보다.



"그, 그래두 저녁에 집에 오면 심심하거든?"

"아무튼 안돼요. 제 눈에 흙이 들어가지 않는 이상 못 들여놔요."

"칫, 소금쟁이 전정국."



 지민은 아무리 우겨도 티비가 내쫓길 운명임을 감지했다. 심심하다는 것은 핑계고,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혹시라도 잘못해 박사장 귀에 소식이 들어간다면 그 날로 뒤집어지는 것이다. 아빠는 수배령이라도 내릴 지 몰라. 결혼이고 뭐고 체면이고 뭐고 박사장은 그럴 인물이었다. 지민은 큰 욕심은 없었지만 그래도 들어주지 않는 정국이 섭섭했다. 지민은 불퉁한 얼굴로 말했다.



"그럼 비디오 한번만 보고 버려. 아깝잖아."

"비디오요?"

"응, 저어쪽에 걸어나가면 비디오 빌리는 가게 있던데?"



 티비는 고가가 아니더라도 비디오 정도는 돌아가는 기능이 있었다. 정국은 비디오 빌리는 가격부터 머릿속 계산기를 두들겼다. 박지민의 진상대 피 같은 2천원 기부. 2천원이면 즉석밥이 한 개다. 박지민의 진상은 하루 이상 갈 확률이 높다. 저울질하던 정국은 돈 버리기를 선택했다.



"좋아요. 대신 단 한편이에요."

"아싸!"



 지민은 나는 듯한 걸음으로 정국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손만 잡아도 뿌리치던 정국은 쉽게 내주다 못해, 천천히 가요 하고 덧붙이기까지 했다. 계단에서 굴러 다리 하나까지 분질러먹고 잘도 뛰었다. 검은 머리통이 천진하게 뛰는 것을 본 정국은 문득 그게 산책 나온 강아지 같아 픽 웃었다. 뭘 웃어. 빨리 와! 주인을 끌고 뛰어다니는 개를 떠올리며 정국은 지민을 따라 비디오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우리 동네에 이런 곳도 있었네요."

"여기 좋지? 할머니가 알려주셨다. 예전에 할머니 아들이 여기서 살았대."

"보고 싶은 거 빌려와요."

"넌 보고 싶은 거 없어?"

"딱히 없어요."



 정국은 문화생활과 거리가 멀었다. 집에서 그림 그리는 것은 둘째치고, 정국은 대중문화생활 자체를 하지 않았다. 돈도 돈이지만 시간도 없었다. 가끔 술집 아르바이트 현장에서 요즘 어떤 연예인이 핫하더라, 요즘 무슨 영화가 재미있다더라 어깨 너머로만 들었다. 강제로 대화에 끌어당기며 너는 누가 제일 좋냐 묻는 물음에 정국은 일관적으로 돈 많이 버는 사람이요, 라고 답할 뿐이었다.



"그럼 내가 알아서 골라온다?"

"그러세요."



 지민은 팔랑팔랑 뛰듯 책장과 비디오 틈으로 들어갔다. 비디오는 오래된 가게인 만큼 오래된 것들밖에 없었다. 뭐야, 다 모르는 거뿐이잖아. 영화를 좋아하는 편인 지민은 실망했다. 나름 최신이라 들어온 영화가 2년전에나 유행한 영화였다. 지민은 그 중 인상을 구기며 영화 하나를 집어 들었다.



"이 자식은 여기 왜 있어."



 세련된 마스크의 연예인이 오토바이를 타는 포스터였다. 이 영화로 대박이 터져 승승장구 중이라 했던가. 알파에다가, 매너까지 좋아 이십대 여성들의 마음을 단단히 사로잡았단다. 지민은 포스터에 쓰인 진부한 소개멘트에 코웃음 쳤다. 나한테 작업 쳤다가 까인 새끼가 무슨. 잡기도 싫다는 듯 지민은 던지듯 디비디를 칸에 다시 끼워 넣었다.

 볼만 한 거 없나. 전정국은 진짜 한 편만 보여줄 텐데. 티비의 마지막 장례식인데 괜찮은 디비디로 보고 싶었다. 두리번거리던 지민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19세미만관람불가. 책장 위 커다랗게 써진 붉은 문구 앞에서 지민은 씨익 웃었다.



"정국아 나 골랐어!"



 정국은 앉아 영화 포스터를 구경하다 허리를 폈다. 오래된 영화들이라 어렸을 적, 집이 잘 살았을 때 본 추억의 애니메이션들이 꽤나 있었다. 지민이 손에 한아름 디비디를 들고 나왔다. 어림잡아 6개다. 정국은 대번에 어림도 없다는 듯 잘랐다.



"하나만 된다고 했죠?"

"하나만 할 거야. 내가 뽑아온 목록인데 여기서 너 골라봐."

"저 영화 보는 눈 없는데."

"응, 이건 영화 보는 눈 없어도 괜찮아. 제목 제일 마음에 드는 걸로 골라."



 정국은 순순히 지민이 내민 디비디 다발을 받아 들었다. 거대한 꿍꿍이가 숨겨진 것처럼 지민이 히죽 웃었다. 정국은 하나 둘 제목을 살피고 기가 막힌 헛웃음을 지었다. 제목 하나하나가 다 가관이었다.



"알파와 오메가의 속사정? 늦은 밤 그 오메가에게 무슨 일이? 알파 둘, 오메가 하나? 달콤한 오메…이딴 걸 빌려가겠다구요? 안돼요. 당장 가서 넣고 다른 거 빌려오세요."

"왜! 내가 보고 싶은 거 본다며!"

"저는 이런 수준 낮은 거 안 보거든요? 그리고 왜 죄다 취향이 알파오메가에요?"

"그야 내가 오메가니까. 보다가 꼴리면 너가 나한테 하자고 할 수도 있잖아. 그럼 그대로 결혼이지."



 아이고 두야. 정국은 머리가 아파오는 기분이었다. 정국은 두말할 것도 없이 책장 쪽을 가리켰다.



"좋은 말 할 때 놓고 가서 다른 거 빌려와요."

"난 이거 볼 거야."

"그럼 전 안 봐요. 박지민씨 집에 가서 혼자 보세요. 전 밖에 있다가 갈게요."

"야 너가 안 보면 무슨 소용이야."

"다른 거 빌려오던가, 아니면 보지 말던가. 둘 중 하나 선택해요."

"씨 전정국 너 나랑은 야동도 같이 보기 싫다는 거야? 내가 오메가인지 느끼지도 못하고 있으면서. 그럼 너 입장에선 나 남자 아냐? 남자 둘이 야동 보는 게 뭐 어때서. 웃기네, 이 자식. 안 꼴리면 안 하면 되는 거고, 그냥 보면 같이 보는 거지."



 정국은 저도 까먹고 있던 사실에 뜨끔했다. 남자 서넛 모이면 흔히 나오는 음담패설은 정국도 겪어봤다. 그때 정국은 빼지 않았다. 적당히 어울리며 웃고 농담했다. 이상하게 턱 걸리는 느낌도 없었고, 민망하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랬건만 현재는 박지민 손에 붉은 테이프 박힌 비디오가 들린 것만으로도 민망했다. 찔린 정국은 가능한 아무렇지 않은 척 단호하게 굴었다.



"큼! 이보세요, 박지민씨 야동을 보면서 우정을 다지는 건 친구끼리 하는 거고요."

"뭐야, 나 너한테 친구도 안돼?"

"그니까 박지민씨는…."

"난?"



 지민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올려다본다. 시선을 피하며 정국은 아무 말이나 뱉었다.



"식충이죠…박식충…."

"뭐라고? 아 안 봐, 안 봐. 전정국 이 고자새끼!"



 뿔이 난 지민이 성큼성큼 책장 안으로 사라졌다. 정국은 혀끝을 씹었다. 왜 하필 나가도 식충이란 말이 나갔을까. 적당히 룸메이트라던가 둘러댈 말이 많았는데 똑바로 쳐다봐오는 시선에 순식간에 말이 나갔다. 지민이 여기서 심술을 부리면 2천원을 버린 보람이 없다. 그럼 안 되는데. 정국은 2천원의 수확을 걷기 위해 지민을 따라갔다.



"박지민씨, 이 영화는 어때요?"

"뭔데."



 지민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정국은 사실 자신이 고른 영화가 뭔지 몰랐다. 그저 손에 잡히는 아무거나 들었을 뿐이다. 뭐지, 이게.



"컨저링? 공포영화네요. 이거 어때요? 재미있을 거 같지 않아요?"



 지민의 어깨가 움찔했다. 정국은 공포물을 잘 봤다. 사람이 잔인하게 살해당하는 스릴러며, 귀신들이 훅훅 튀어나오는 공포물도 상관 없었다. 가장 무서운 건 돈을 뜯으러 쫓아다니는 빚쟁이들과 월말정산이었다. 영화 포스터를 보느라 눈치채지 못한 정국은 지민의 눈앞에 디비디를 들이밀었다.



"이거 볼까요?"

"흐, 흥. 완전 재미 없게 생겼네. 그딴 거 난 안 봐."



 다소 목소리가 딱딱하게 굳어 있다. 정국은 설마, 했다. 천하의 박지민이, 세상에 자신을 막을 것은 없다는 식으로 사는 박지민이 공포영화를 못 본다니. 정국은 너무도 안 어울려 말도 안 된다 생각했다.



"설마 박지민씨 공포영화 못 봐요?"

"아, 아니거든! 나 공포영화 마니아야! 공포영화 그런 거 하나도 안 무섭지! 극장에서 다른 사람들 다 비명 지를 때 나 한번도 질러본 적 없어."



 극장에서 질러본 적 없긴 했다. 너무 무서워 보여, 무서운 영화 자체를 선택하지 않았다. 지민은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쫄보였다. 세상 무서울 것 없이 사는 지민이 무서워하는 게 딱 한 가지였다. 귀신. 곧 죽어도 자존심이라 허세를 부렸지만, 지민은 속으로 제발 정국이 디비디를 내려놓기를 빌었다. 무슨 놈의 포스터도 저렇게 무섭게 생겼어. 봤다간 분명 오늘 잠도 제대로 못 잘 것이다.



"진짜요? 에이, 아닌 거 같은데. 무서우면 무섭다고 해요. 괜찮아요. 공포영화 못 보는 거쯤이야…."

"야 무슨 소리야. 나 완전 잘 본다니까? 그깟 공포영화에 내가 쫄 거 같아? 하 참나. 야 나 박지민이야, 박지민."

"그래요? 마침 딱이네요. 저도 공포영화 잘 보는데. 저 이거 보고 싶어요. 우리 이거 봐요. 박지민씨도 좋아한다고 하니까."



 정국이 씨익 웃었다. 좆됐다. 생각하며 지민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정국 몰래 이게 아닌데, 하고 울상을 지었다.






 지민은 영화가 시작하기 전 내내 안절부절했다. 정국아 나 화장실 좀. 정국아 나 씻고 올게. 정국아 나 배가 고픈 거 같은데. 정국아, 정국아. 정국의 이름을 부르며 끊임없이 티비 앞에서 도망갈 궁리만 했다. 아 저 망할 놈의 티비를 왜 받아와선. 애꿎은 일꾼을 탓하며 지민은 피곤을 빙자해 자자 주장했다. 아쉽게도 정국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지민이 딴짓을 다 할 때까지 영화 버튼 한번 누르지 않고 기다렸다. 차분히 지민을 기다릴 뿐이었다. 언제 지가 나를 그렇게 챙겼다고! 자기도 모르게 표정이 씰룩거리면 정국이 날카롭게 캐치해 물었다.


"왜요, 못 봐요? 귀신 무서워해요?"

"절대 아니거든? 야 어서 틀어! 틀어!"


 이판사판 계속 우겨 지민은 결코 못 본다 말할 수 없었다. 지민은 부러 당당한 척 가슴팍을 쭉 내밀고 착석했다. 정국은 애써 덤덤한 척하는 지민이 웃겨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누르고 있는 중이었다. 영화가 시작하는 화면이 떠도 온통 지민 쪽에서 관심이 떠나질 않았다. 실제로 봐도 아무렇지 않은 영화보다 안 무서운 척, 괜찮은 척 자존심을 내세우고 있는 지민이 더 재미있었다. 정국은 대수롭지 않게 툭 던졌다.



"뭐…많이 무서우면 무섭다고 해요. 손 정도는 잡아줄게요."

"너나 나한테 무섭다고 매달려서 질질 짜지마."



 영화가 시작됐다. 어두운 화면이 깔리고 주인공이 하나 둘 나온다. 지민은 절로 자세가 공손해졌다. 벽에 기대고 있던 등도 어느덧 떼고는 뻣뻣하게 세웠고, 양손을 모아 꼼지럭거렸다. 눈을 감고 버티니 어느 정도는 버틸만했다. 나는 돌이다. 나는 돌이다.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며 지민은 눈을 감고 다른 생각을 했다. 집에 돌아가면 일단 김비서를 부르는 거야. 정국이랑 신혼여행은 어디로 가지? 나는 따뜻한 나라보다는 구경할 거 많은 게 좋은데. 세부나 괌 같은 거 말고. 유럽? 그래 유럽 좋겠네. 북유럽으로 가자고 할까? 요리는 정국이가 다 하면 되니까 됐고. 둘만 가자고 해야지. 김비서도 따라오지 말라고 할 거야.

 정국은 아예 영화는 보지도 않는 지민에 큭큭 웃었다. 그러다 놀리고 싶은 마음에 은근슬쩍 이름을 불렀다.



"박지민씨, 이제 무서운 장면 안 나와요."

"진짜?"

"네."



 지민이 살그머니 눈을 떴다. 그리고 하필 그때, 화면에서 갑작스럽게 귀신이 튀어나왔다.



"으아악!"



 지민은 둘도 생각할 것 없이 정국의 품에 뛰어들었다. 바로 옆에 앉아있던 정국은 품으로 우당탕 쏟아져 들어오는 지민에 뒤로 넘어졌다. 뒷머리가 바닥에 쪘다. 아, 약하게 신음하며 정국은 머리를 붙잡았다. 한차례 통증이 가시고 나자, 품 안의 오메가 상태가 눈에 들어왔다. 놀란 고양이처럼 품에 뛰어든 지민은, 덜덜 떨고 있었다. 정국의 가슴팍에 얼굴을 푹 묻고는 고개도 들지 못했다. 지난번 지민이 입술을 붙여왔을 때 맡았던 향이 훅 끼쳤다. 달면서도 상큼한 향. 향으로 박지민을 표현하라면 딱 알맞은 그 향.



"박지민씨?"

"아, 아직도 있어? 귀, 귀, 귀신?"

"귀신이요?"



 정국은 화면을 바라봤다. 귀신이 나오는 장면은 이미 사라졌다. 주인공들이 대화를 하는 장면일 뿐이다. 그러나 지민은 귀를 꼭 막고 정국에게 안겨있는 탓에 발견하지 못했다. 아예 돌아볼 용기도 없는 듯 했다. 정국은 눈을 한 바퀴 굴렸다. 뭐, 그러니까. 귀신이, 안 나오기는 하는데. 지민을 내려본 정국이 입을 뗐다.



"어…나와요. 아직도. 아까보다 더 무서운 귀신이네요."

"짜증나, 짜증나. 저 영화 엄청 잘 만들었어."



 발발 떠는 게 온몸으로 느껴진다. 정국은 가만 지켜보다 지민의 등에 팔을 둘러 끌어안았다. 따뜻한 체온이 품에 있는 게 나쁘지 않았다. 향이 더 깊게 콧속으로 파고든다.



"귀신 갔어?"

"아니요, 아직도 나와요. 지금이 하이라이트인거 같은데. 와 귀신 다섯 마리 나와요."

"다, 다섯?!"

"사람도 죽었어요. 피도 나온다."

"저, 저거 청불 아니야? 십오세라더니! 십오세라더니! 구라 쳤어!"

"막 톱질도 하네요. 귀신이."



 정국은 막장 공포영화 시나리오를 써내려 갔다. 지민은 거의 울기 직전이었다. 심의위원회에 신고해버릴 것이다. 저딴 무서운 영화를 십오세라 당당하게 붙여서 팔다니. 정국이 말할 때마다 오르락내리락하는 가슴팍만이 유일한 방어선이었다. 정국이 말을 하면 할수록, 지민은 반대로 말이 없어져 갔다.

 정국은 영화는 보고 있지도 않았다. 매달린 까만 머리통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좀 심했나. 진짜 무서워하는 거 같은데.



"그만 끌까요?"

"……."

"아 못 보겠다. 무슨 영화가 이렇게 무서워요? 그냥 끌래요."

"그, 그래! 꺼! 꺼버려!"



 지민이 냉큼 정국의 품에서 떨어져 화장실로 도망갔다. 정국은 입맛을 쩝 다셨다. 품에서 휙 빠져나간 온기가 어쩐지 아쉽다. 오메가가 이런 건가. 끌어안고 있으면 기분 좋은. 우성오메가를 고작 인형취급하며 정국은 지민을 다시 불러냈다.



"박지민씨, 영화 껐어요. 나오세요."



 지민은 언제 무서워했냐는 듯 웃는 얼굴로 돌아왔다. 허세도 빼먹지 않았다.



"그렇게까지는 안 무섭네. 뭐, 내가 조금 무서워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건 다 너 안 창피하게 해주려고 그랬던 거야. 너도 무서웠다며."

"그런 거 치고는 상당히 오래 매달려 있었…."

"시끄러! 난 잘 거야."



 지민이 피하듯 이불에 누웠다. 정국은 자꾸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내리누르느라 힘들었다. 아 미치겠네. 저 사람 오늘 왜 이렇게 귀여워. 생각하며 정국은 불을 끄고 지민에게서 등을 돌렸다. 지민이 술에 취했을 때는 끌어안고 잤지만, 맨정신인 지민을 끌어안고 자는 것은 무리였다. 너가 이제 드디어 날 좋아한다는 둥, 내 매력이 안 통할 리가 없다는 둥 시끄럽게 굴 것이 빤했다. 정국이 잠에 빠져들기 직전이었다.



"전정국."

"……."

"야, 전정국. 자?"



 지민은 후회했다. 왜 하필 영화도 그딴 집 관련된 영화를 빌려서. 천장에서 귀신이 떨어질 것만 같고, 저 문을 열고 귀신이 들어올 것만 같았다. 영화는 하나도 보지 않았는데, 정국이 해준 말만으로도 지민은 상상력의 무한함을 몸소 체험하고 있었다. 톱질 하는 귀신. 나뒹구는 시체. 얘 진짜 자나. 얘 진짜 자? 지민은 정국의 등을 쿡쿡 손가락으로 찔렀다.



"…안 자요. 왜요."



 지민이 헛기침을 했다. 뭔 대단한 소리를 하려고. 졸린 눈으로 정국이 지민의 쪽으로 몸을 돌렸다. 지민이 엄청난 제안이라도 하듯 속달거렸다.



"내가 끌어안아줄게. 너 아직도 무섭지?"

"…어…."

"무섭잖아."

"음…좀 무섭네요."



 지민은 냉큼 정국의 품 안으로 들어왔다. 끌어안아준다더니, 정작 품에 들어왔다. 기분 좋은 향이 난다. 정국은 가벼운 웃음을 흘렸다. 졸음이 몰려 나른한 웃음소리였다. 애물단지로 전락할 티비를 받아온 일이 나름 괜찮은 일이라 생각됐다. 티비 당장 버려. 중얼거리며 지민은 정국의 품에 안기고서야 잠들었다. 무서움에 움찔거리던 심장박동이 머지않아 설렘으로 두근거린 탓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