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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짐] 잭팟 01

by 토페 posted Aug 07,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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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You Don't Mess Around with Jim>











 하와이의 태양은 뜨거워도 황홀하다. 시원한 에메랄드 바다를 안주 삼아 달콤한 샴페인을 홀짝거리면 완벽한 휴양이었다. 5성급 호텔 썬베드에 누워 선글라스를 착 낀 지민은 블루투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리듬에 발을 까딱였다. 기타 베이스의 펑크락이 흥겨웠다. 마찬가지로 옆 썬베드에 자리 잡은 태형은 미간을 쓰며 아이패드를 탁탁 치고 있었다.



 “아 왜 와이파이 안 잡히지.”

 “이런 곳에 와서도 핸드폰을 만져야겠냐. 너 그거 중독이다, 중독.”

 “중독이 아니라 다음 작업 후보 보는 거거든. 너 내가 말한 거 벌써 까먹었지?”



 지민은 볼을 긁적거렸다. 거품목욕 하느라 흘려 들었을 가능성이 높다. 어차피 들었어도 금방 까먹었을 테지만. 단 하나도 기억 못하면서 지민은 뻔뻔하게 말했다. 그래 우리 오늘 바다가재 먹으러 가기로 했잖아. 그냥 기억 안 난다고 해. 왜 너가 먹고 싶은 걸 말하냐. 태형이 기대도 안 했다는 듯 대충 대꾸하며 아이패드를 계속 탁탁 쳤다. 지민이 성의 없이 반박했다.



 “어차피 지난 번에 턴 것도 많이 남았잖아.”



 아직도 뉴욕에 빌딩 한 채는 바로 살 수 있을 정도로 남아있었다. 실상 평생 먹고 살 정도로 남아있다는 소리였다.



 “그냥 이렇게 사는 건 재미없잖아.”

 “…너도 또라이다.”

 “너한테 들을 말은 아니거든? 아 왜 안, 어 됐다!”



 태형이 환하게 웃었다. 검은색이던 아이패드 화면에 환한 불이 들어온다. 다음 예쁜이 구경 좀 해보자. 싱글벙글 해맑게 보석을 기다리던 와중이었다. 일순 태형의 표정이 굳었다. 어…? 귀신이라도 본 것마냥 눈을 비비적거린다. 의아한 지민이 샴페인 잔을 쥐며 묻는다.



 “뭐야. 왜 그래? 그렇게 예뻐?”

 “…윤기형이 왜 여기 있지?”



 순간적으로 지민이 샴페인을 뿜었다. 켁켁거리다 단박에 분개하며 태형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너 내가 그 이름 말하면 죽여버린다고 했지?”

 “아니, 지민아 그게 아니고….”



 태형이 진땀을 흘렸다. 둘 사이에서 그 이름은 금기된 단어였다. 윤기형. 민윤기. 그 형. 고양이 닮은 그 형. 민윤기를 지칭하는 모든 단어 등등. 김태형 죽여버릴 거야. 지민이 태형의 목을 쥐고 짤짤 흔들었다. 있는 대로 흔들리던 태형이 꽥 외쳤다.



 “아니 여기 나오잖아!”

 “주의 돌리고 튀려는 거 다 알아.”

 “봐봐!”

 “괘씸죄도 추가야 너.”



 사기치고 도망갈 거 누가 모르냐. 사과 안 해? 지민이 손에 더 힘을 준 그 순간, 태형이 허겁지겁 지민의 눈 앞으로 아이패드를 들이밀었다. 그리고 화면 안으로 보이는 하얗고 익숙한 그 얼굴.



 “뭐야….”



 거봐, 진짜라고 했잖아! 태형이 억울하다는 듯 외쳤다. 그러나 이미 태형의 존재는 지민의 머릿속에서 지워지고 아이패드 화면 안 한 사람밖에 남지 않았다. 지민의 손에서 힘이 천천히 빠진다. 다시 봐도 거꾸로 봐도 눈을 여러 번 깜빡였다 떠도 그 얼굴이 화면 속에 동동 떠있었다. 뭐야, 시발 이게. 지민이 태형의 아이패드를 낚아챘다. 화면 안에 갇힌 민윤기가 마이크 앞에서 말을 하고 있었다. 이 익숙한 얼굴과 목소리는 진짜로 민윤기였다.



「이 자리에 와주신 모든 분들을 환영합니다.」



 민윤기가 가득 찬 화면 아래로 커다란 타이틀의 영어가 지나가고 있었다. 호텔 볼레타의 새로운 젊은 마스터. 이거 진짜야? 진짜냐고. 지민은 믿기지 않는 얼굴로 선글라스까지 훽 벗어버렸다. 차라리 눈 앞이 까만 게 더 나았다. 벗고 보니 빼도 박도 말고 민윤기였다. 지민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이 새끼 왜 여기 있어? 태태 너 이거 혹시 몰래 카메라야? 합성했어? 동영상 재생한 거지?”



 다 알아. 지민이 태형의 아이패드를 부술 듯 탈탈 흔들며 화면을 팼다. 태형이 기겁하며 지민의 손에서 아이패드를 뺏어간다. 안돼! 산지 일주일도 안 됐단 말이야! 다시 아이패드를 뺏으려던 지민은 태형으로부터 뉴스라는 사실을 인증 받고서야 손을 거뒀다.


 시발. 진짜 민윤기였다.


 그 얼굴을 보자마자 지민은 순간적으로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봐서 놀랐고, 몰랐던 정체를 알아서 놀랐고. 현실인지 믿기지 않아 얼이 빠진 얼굴로 눈만 멍청히 감았다 떴다 할 뿐이었다. 고작 사람 한 명 찾은 거에 이런 반응이면 유난 떤다고 누군가는 말할 수 있겠지만, 아마 그 누구라도 놀랄 거다. 왜냐하면.



 “와 이 형 정체가 이거였어? 미쳤다. 존나 쩌네. 상상도 못했다. 얼굴 좋아진 거봐. 부내 난다.”

 “…….”

 “그래서 예전에도 그렇게 존나 있는 척 했던 거구나. 시발 이제야 이유를 알겠네. 난 이 형이 개털이면서 허세만 엄청 부린다고 생각했었는데.”

 “…….”

 “넌 알고 있었어? 예전에 사귀었잖아.”



 민윤기는 박지민의 구남친이었다. 그것도 지독한 엑스.


 지민은 입술을 짓씹었다. 이 새끼 뭐야. 에메랄드 바다처럼 청량했던 머릿속이 순식간에 복잡해졌다. 볼레타 호텔의 후계자? 이게 다 무슨 소리지? 라스베가스에서 손 꼽히는 호텔의 새로운 주인? 민윤기가? 전혀 몰랐던 사실이었다. 반대로 태형은 충격에 익숙해진 건지 더욱 목소리를 높여 말을 걸어왔다.



 “아닌가? 모를 수도 있겠다. 너 이 형이랑 진짜 더럽게 헤어졌잖아. 잠수이별 당하고.”

 “…….”

 “그래서 그때 너 엄청 울고 바다에 빠져서 자살한다고 하고 차에 치여서 자살한다고 하고 그러다가 진짜 자전거에 치여서 병원에 입원하고.”

 “…….”

 “맨날 울어서 눈이 하도 팅팅 부어가지고 앞이 안 보인다고 나한테 부축해달라고….”



 태형이 서서히 뒷말을 음소거 처리했다. 지민이 진짜로 죽여버린다는 듯 태형을 노려보고 있었다. 눈에서 살기가 느껴진다. 깨갱. 태형이 알아서 발을 빼며 지민에게 조용히 아이패드를 내밀었다. 마음껏 보시옵소서…. 지민은 금방 다시 보이는 구남친의 얼굴에 집중했다.



 「호텔 볼레타는 새로운 방향점을 맞이할 겁니다. 제가 그렇게 이끌테니까요.」



 헤어진지 5년.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사이에 민윤기는 많이 바뀌어있었다. 아니, 아예 처음 보는 민윤기였다. 지민아 내 행복은 너야. 후드티를 입고 순한 미소를 짓던 민윤기가 아니었다. 현재 그는 잘 빠진 명품 수트를 입고 고급스러운 발음으로 신뢰감을 주는 미소를 띠고 있었다. 폭죽처럼 터져 나오는 카메라 플래시 세례에 눈 하나 깜짝 안 했으며, 이런 기자회견은 백 번이고 해본 사람 같았다. 지민이 알던 착한 두부 같은 민윤기의 모습은 단 한 개도 녹아있지 않았다. 기자가 윤기에게 질문한다.



 「마스터, 볼레타에서 어떤 점이 새로워지는 거죠?」

 「전 볼레타에서는 열지 않았던 쇼들이 열릴 겁니다. 이를 테면 사자의 눈물이 공개되는 자리라던가요.」



 순간적으로 플래시들이 더 열렬히 터진다. 태형이 오오, 하며 감탄했다. 개씹인 줄 알았는데.



 “정보가 진짜였네. 볼레타에서 가져갔다더니.”



 사자의 눈물은 이집트 지하바닥에서 꺼낸 보석이었다. 고대 황제의 피를 보석에 박아 넣은, 다이아는 우습게 여길 정도의 몸값을 자랑했다. 학자들의 측정에 의하면 한 나라의 재정을 1년동안 운영할 수 있는 금액이란다. 러시아의 어느 거부가 꽁꽁 숨겼기에 실제 그 모습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한다. 정리하자면 눈 돌아가게 몹시 귀하고 비싼 놈이라는 말이다.


 태형이 사자의 눈물과 관련된 정보를 줄줄 늘어놨으나 지민은 단 한 글자도 듣지 못했다. 민윤기 얼굴에 정신이 팔려서. 얘 또 하나도 안 듣네. 다른 때라면 한 마디 얹었을 태형이지만, 오늘만큼은 살짝 이해가 됐다. 개같이 이별 당한 엑스의 갑작스러운 출연인데, 게다가 정체를 꼭꼭 숨기고 있던. 아이패드 속 민윤기는 슬슬 멘트를 정리하고 있었다.



 「볼레타는 라스베가스에서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겁니다.」



 태형이 지민의 눈치를 살폈다. 원래대로라면 우리 신나게 보석 훔치고 놀자고 했겠지만. 전남친과 얽히는 건 조금 그렇지.



 “어…지민이 네 말대로 우리 아직 저번에 털었던 돈도 남았고…저녁에 랍스타 먹을래?”



 인사를 마친 민윤기는 사라지고 앵커가 화면에 등장했다. 사자의 눈물은 단 하루 볼레타에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초대 받은 브이아이피분들은 최고의 하루를 보내겠군요. 지민은 그럼에도 아이패드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제대로 충격 받았나 봐. 어떡하지. 태형은 아픈 실연의 상처를 헤집고 있을 제일 친한 친구를 위해 말을 골랐다. 영화라도 보자고 할까.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던 지민이 말했다.



 “털자.”

 “그래 힘들겠지만 우리 같이 영화도…어? 뭐?”

 “털자고.”



 태형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털면 나야 좋긴 한데, 그런데….



 “괜찮아? 너 이거…민윤기….”

 “안될 게 뭐가 있어.”



 그건 그렇긴 한데. 태형이 머뭇거리는 사이 지민이 다시 선글라스를 착 꼈다. 선베드에서 일어나 수건을 몸에 두른다.



 “판 짜는데 얼마나 걸려?”

 “일주일이면 충분하지.”

 “그래? 딱 좋네. 당장 내일부터 시작하자.”



 손을 한번 흔든 지민이 서서히 멀어진다. 태형은 침을 한번 꿀꺽 삼키곤 이내 만면에 실실 장난스러운 웃음을 걸쳤다. 역대급으로 재밌겠는데. 그 어느 때보다 완벽한 판이 될 터였다.







***






 호텔밭이라는 라스베가스에서도 볼레타는 특급호텔로 손꼽히는 곳이었다. 벨라지오에 세계 3대 분수쇼가 있다면 볼레타는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로얄 카지노장이 있었다. 객실룸 아래 수많은 층을 카지노 층으로 바꿔 초대 받은 손님만이 그 층을 이용할 수 있었다. 남의 시선을 신경 쓸 필요 없는 부자들이 그 층을 발에 불이 나게 드나들었고, 개방된 외간 층을 다녀가는 사람들은 볼레타의 사치스러운 외관에 입을 떡 벌리고 갔다. 대형 호텔 사이에 낀 볼레타는 어중간한 호텔로 무너질 거란 잡지사의 평가와 달리 우뚝 선 호텔로 자리잡았다.


 때문에 경비도 아주 살벌했다. 지민과 태형 같은 밤손님들에게 좋지 않은 구조였다. 태형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자 서로 구면인 사이들도 있지? 아는 척하자.”



 지민과 태형이 묶던 스위트룸은 여러 사람으로 가득 찼다. 태형이 부른 사람은 총 3명이었다. 첫 번째는 보석을 훔치는 동안 사건을 일으켜 경비들의 주의를 끌어줄 타이퍼, 두 번째는 직원으로 변장해 씨씨티피를 태형의 노트북과 연결할 헬퍼,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민과 함께 입장해 정신을 분산시킬 연기자. 타이퍼와 헬퍼는 이미 지민과 태형이 함께 작업한 전적이 있었다. 지민의 입장 파트너가 될 여성이 웃으며 지민에게 손을 건넸다.



 “뷔랑은 예전에 봐서 아는 사이인데, 제이와는 처음이네요. 반가워요. 샤라라고 해요. 내일이면 우리 결혼이니까 잘 부탁해요.”



 샤라가 시원시원한 미소를 지었다. 호의적인 말투지만 저 이름은 물론 거짓이다. 참여하는 사람 전부 가명을 썼다. 그건 이 세계에서 적용되는 일종의 룰이었다. 지민은 호감 가는 미소로 답하며 손을 잡았다.



 “저야말로 잘 부탁해요. 다정한 남편이 될게요.”

 “와우 제이가 진짜 내 남편이었으면 좋겠는데요?”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샤라가 타이퍼와 헬퍼와도 인사를 나눴다. 태형이 벨로타의 지도를 펼쳐놓고 작전을 소개했다. 전체적으로 간단했다. 지민과 샤라가 입장하고, 헬퍼가 씨씨티비를 뺏고, 태형이 해킹한 다음 타이퍼가 이목을 집중시킬 사고를 치고 그 사이 지민은 보석을 훔치고. 간단하면서도 세밀한 주의력을 요하는 작전이었다. 태형이 말했다.



 “설명 두 번은 필요 없죠? 우린 모두 프로니까.”

 “잠깐. 배당금은 어떻게 됩니까?”



 타이퍼가 말했다. 태형이 씨익 웃으며 말한다. 왜이래 아마추어처럼.



 “정확히 각자 오분의 일씩.”



 오분의 일이라 하더라도 사자의 눈물의 몸값이라면 각자 충분히 만족할만한 몫이었다. 모두 다 납득하는 눈치였다. 주위를 살핀 태형이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Happy holiday.






***






 벨로타는 입구부터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레드카펫이 깔린 길로 기자들이 셔터를 눌러댔고 초대받은 귀빈들이 하나 둘씩 초대장을 보여주고 입장하고 있었다. 화려한 벨로타의 외관도 오늘따라 더욱 화려했다. 지구본 황금상 옆으로 세로로 떨어지는 분수대가 장식되어 있었으며 벨로타를 축소시켜놓은 거대한 얼음조각상이 그 앞을 버티고 서있었다. 슈퍼카 하나가 지나갈 때마다 명품으로 치장한 사람들이 하나둘 내린다. 세련된 벤츠가 멈추고 그 안에서 머리를 시원하게 넘긴 중년 남성과 붉은 드레스를 입은 젊은 여성이 내렸다. 그들은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있었다.



 “미스터 쉐브론 앤 미스 쉐브론, 참석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초대장을 확인한 호텔리어가 정중한 인사를 보낸다. 참여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중년 남성이 웃으며 인사하고 들어간다. 미스 쉐브론, 샤라가 중년 남성의 귓가로만 들릴 만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제이 꽤 연기를 잘하는데? 못한다더니 순 엄살이었잖아.”

 “내 이름은 쉐브론이라구. 남편 이름도 까먹다니 너무한데?”



 지민이 마저 속삭이자 샤라가 키득거렸다. 지민도 잔잔히 미소를 머금었다. 이번 얼굴가죽은 손꼽히게 잘 만들어진 편이었다. 아무도 이 얼굴에서 이십대 남성이 그 뒤에 숨어있으리라곤 예상하지 못할 거다. 한쪽 귓가에 낀 초소형 이어폰에서 태형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신사숙녀 여러분 이제 집중해주세요~」



 지민은 대리석이 깔린 로비를 밟았다. 벨로타는 내부도 눈이 멀어버릴 만큼 화려했다. 돈이 썩어난다고 광고라도 하듯 입장하면 바로 보이는 샹들리에부터 좌중을 압도했다. 저건 진짜다. 지민은 재빨리 눈으로 스캔하고 견적을 냈다. 저것만 훔쳐도 되겠는데? 뿐만 아니라 1층의 카지노층은 간단한 오락거리를 즐길 수 있는 기계들이 수 백대는 널려있었다.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지민은 안내인의 뒤를 따랐다. 진짜 브이아이피는 벨로타의 3층 프라이빗룸부터 사용하게 된다. 프라이빗룸은 초대 받은 브이아이피들이 랜덤하게 배정받아 들어간다. 그곳은 일반인들이 상상할 수 없는 단위의 금액이 오고 갔다. 말 그대로 차 한 대가, 건물 한 채가, 유명 브랜드의 지분권이 카드 몇 장에 따라 테이블 위를 왔다 갔다 했다.



 “즐거운 시간 보내시기 바랍니다.”



 고풍스러운 바로크 양식의 내부는 커다란 원형 테이블이 정중앙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에 선 딜러가 카드를 나눠준다. 앉아있는 사람들은 이미 지민이 어딘가 티비에서 한번쯤은 본 사람들이었다. 한 명은 하이틴 드라마에서 유명해진 요즘 급부상하는 연예인이었고, 다른 한 명은 뉴욕 은행의 지부장이었으며, 또 다른 한 명은 전직 화이트 하우스 출신 비서관이었다.



 “오 쉐브론 오랜만입니다.”

 “반갑습니다, 미스터 로만. 따님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해 유감입니다.”

 “하하 병실에 누워있는 쉐브론을 내가 꺼내올 순 없죠. 괜찮습니다. 그보다…최근 논문이 표절로 골치를 썩고 있다고 들었는데 그건 잘 해결됐나요?”

 “물론입니다.”

 “다행입니다. 정말 골치 아프셨겠습니다. 다시는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이군요.”



 지민이 신분을 빌린 쉐브론은 저명한 물리학 교수였다. 진짜 쉐브론은 불륜으로 와이프와 이혼 당할 위기에 처해 프랑스로 가서 싹싹 빌고 있는 중이었다. 샤라가 고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런 시시한 화제는 치우고 카드놀이부터 시작할까요?”

 “미스 쉐브론의 말이 맞네요.”



 연예인이 웃으며 동조했다. 자연스럽게 게임이 시작됐다. 지민도 웃으면서 카드를 받았다. 이쯤이면 이제 슬슬 다음 단계로 넘어갈 때가 됐는데. 생각을 떠올리기 무섭게 태형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씨씨티비 확보 완료. 이제 움직여야 돼.」



 헬퍼가 관리실에서 임무를 완료한 모양이다. 지민이 아차, 하는 얼굴로 자연스럽게 카드를 내려놨다. 샤라가 냉큼 호들갑을 떨었다.



 “어머, 허니 왜 그래? 안색이 안 좋은데. 창백해. 아까 저녁을 급하게 먹어서 그런가? 괜찮아? 제가 게임을 빨리 하고 싶다고 재촉했거든요.”



 게임을 진행하려던 사람들이 지민에게 시선을 모은다. 사실 잘 만들어진 고무가죽이 티가 날 리 없다. 그러나 샤라는 꿋꿋이 지민의 손까지 꽉 잡는 열연을 펼쳤다. 괜찮아? 허니 몸이 너무 안 좋으면 화장실이라도 한번 가보는 건 어때. 주변에서도 서서히 동조한다. 그러게요, 미스터 쉐브론. 의무실이라도 들려야 하는 건 아닙니까? 지민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카드를 내려놓았다.



 “아 이거 참…죄송합니다. 잠시 자리를 비켜야 할 거 같은데….”

 “괜찮습니다. 다녀오시죠.”



 어서 게임을 하고 싶은지 연예인이 급히 말했다. 그럼 전 잠시…. 말끝을 흐리며 지민은 연신 미안한 안색으로 프라이빗룸을 빠져 나왔다. 안내인이 바로 따라붙는다.



 “미스터 쉐브론 의무실로 안내를 해드릴까요?”

 “아 괜찮습니다. 화장실을 아무래도 먼저 들려야 할 거 같습니다.”



 지민은 신사적인 얼굴로 정중히 거절했다. 안내인이 동의하며 그대로 제자리에 서있는다. 꾸벅 눈인사를 한 뒤 천천한 발걸음으로 코너를 돌았다. 아무리 아파도 품위는 챙기려는 상위층 중년처럼. 마침내 안내인이 보이지 않게 됐을 때 지민은 고개를 좌우로 꺾어가며 가볍게 스트레칭 했다.



 “…후.”



 됐다. 이제부터 진짜 작업 시작이다. 지민이 씨씨티비를 향해 슬쩍 눈짓했다. 태형이 보고 있을 것이다.



 「와 샤라 연기 정말 잘한다. 도둑 말고 배우 해도 되겠는데? 엘리베이터 바로 내려줄게. 그 끝 복도로 쭉 걸어가서 바로 왼쪽 엘리베이터야. 크리스랑 알은 스탠바이해주고.」



 곧 타이퍼와 헬퍼가 1층에서 사건을 일으킬 거다. 사자의 눈물은 2층. 남은 시간은 약 30분. 지민은 발걸음의 속도를 조금 높였다. 엘리베이터까지 약 10미터즈음 남은 그때.



 [3층입니다.]



 돌연 반대쪽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한 남자가 내렸다. 다소 급한 발걸음으로 타려던 지민과 남자의 어깨가 맞부딪혔다.



 “아!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빠르게 남자를 통과하려던 지민은 일순 멈칫했다. 이 미묘한 저음의 목소리. 세월이 아무리 변해도 잊기 힘든 목소리였다. 한때는 지민의 귓가에 이름을 속삭여주던 그 목소리. 지민아, 박지민. 지민은 저도 모르게 뒤로 돌았다. 잘 빠진 검은 수트를 입은 남자는 허리를 굽혀 바닥에 떨어진 무언가를 줍고 있었다.



 “가셨을 줄 알았는데 다행이네요.”

 “…….”

 “이거 떨어뜨리셨습니다.”



 남자의 손에서 지민의 수트에 달려있었던 커프스 버튼이 반짝거렸다. 손은 하얗고 뼈마디가 툭툭 튀어나왔으며, 핏줄이 도드라져있었다. 한때는 박지민이 환장했던 손. 바로 그 손. 친절하게 주워준 사람은 이 호텔의 오너이자 5년만에 만나는 구남친 민윤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