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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짐] 다마고치 아이돌 19

by 토페 posted Dec 21,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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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LVDS - Blue Skies >











 윤기는 고심했다. 지민이 제시한 새로운 방향이 이런 쪽이었나. 연애 감정이 아니라 분장을 봐달라는 것이었을까? 연예인의 모습, 그러니까 아이돌 뮤비 버전으로 팬 서비스를 하겠다는 건가? 지민의 머릿속을 해부해보고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위풍당당하게 제비처럼 가슴팍을 쭉 내밀고 있는 지민을 잠시 말없이 보던 윤기가 나름대로 추리하며 물었다.



“오페라를 보는 게 아니라 무대를 올라가는 거야? 그런 보고는 못 받았는데. 이제 조금 컸다고 보고도 안하고 하나. 네 사장이 그럴 배짱이 있을 리가.”

“제가 무대를 왜 해요. 저는 오늘 데, 데이트하러 온 건데요?”



 지민이 데이트라는 단어에서 조금 떨었으나, 금새 아무렇지 않은 척 큼큼 목을 가다듬었다. 이제 막 낯선 관계를 시작한다는 게 실감이 났다. 키스하고 싶다고 고래고래 외쳐대던 어린 애는 사라지고 데이트라는 단어 하나에도 떠는 수줍은 소년만 남았다.



“대체 데이트를 어디서 보고 배….”



 윤기가 어이없다는 듯 말하다 뚝 멈췄다.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지민을 훑는 눈동자가 마침내 설렘에 가득 찬 이목구비에 도달했다. 그는 목구멍에 일렁거리는 말을 모조리 다 집어 넣었다.



“그래, 맞지. 데이트. 처음 보는 모습이긴 하네.”

“그래서 막 긴장돼요?”

“…되긴 해.”



 윤기가 장단을 맞춰주었다. 효과가 있다! 지민이 무척이나 뿌듯하게 웃어 보였다. 늘상 만나던 츄리닝이나 걸치던 동네 친구가 갑자기 멋있게 차려 입고 나오니까 달라 보였어요. 인터넷에서 뒤져봤던 후기가 정말 맞는 말이었다.



“오페라는 네가 고른 거야?”

“네! 재미있겠죠.”



 지민이 신이 나 윤기 옆에 착 붙는다. 들떠서 쫑알쫑알 떠든다.



“윤기씨 오페라 좋아해요? 비서님한테 이거 보신 적 있냐고 여쭤봤더니 없다고 하셔서 이걸로 했는데.”



 윤기의 미간이 좁혀진다. 비서한테 따로 연락을 했다고? 그는 개인비서가 제 정보를 팔았다는 사실보다도 사적으로 연락했다는 점에 집중했다. 그러나 이내 비서가 결혼까지 한 유부남이라는 사실을 상기해내고는 관심을 흐렸다.



“그 호칭은 뭐니.”

“네? 어떤 거요? 윤기씨요?”



 지민아 슬쩍 눈치를 본다. 자연스럽게 넘어가는 줄 알았다.



“계속 부사장님이라고 부를 수는 없으니까…이렇게 부르는 거 싫으세요?”

“그런 건 아니야. 다만 듣기만해도 어색해서 소름이 끼치는데 좀 바꿔보지 그래.”

“다른 거요? 음….”



 지민이 고민하더니 이내 머리 위에 전구라도 띄운 것처럼 밝게 아! 한다.



“윤기형!”

“…….”

“윤기형이 딱 좋은 거 같아요.”



 윤기는 순간 손바닥까지 간지러운 기분이 들었다. 명랑하게 눈가를 휘어 접으며 웃으며 친밀한 호칭을 들으니 꼭 작은 전류가 흐르는 것만 같다. 괜히 지민과 마주친 시선을 피했다.



“차라리 아저씨라고 해.”

“윤기, 형, 이.”



 지민이 한 글자 한 글자 끊어가며 악센트를 주었다. 절대 따르지 않겠다는 의지가 엿보인다. 이것 봐라. 윤기가 한쪽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러나 지민도 지지 않겠다는 의지로 뚫어져라 본다.



“호칭 바꿔서 부르라고 하셨잖아요. 아저씨로 보여야 아저씨라고 하죠.”

“그래…알아서 불러라.”



 윤기가 포기했다. 분명히 지민을 보자마자 무뚝뚝하게 대하기로 했는데, 계획이 다 틀어지고 있었다. 네, 윤기형! 지민은 허락을 받았다는 게 기분이 무척이나 좋은지 눈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진한 스모키 화장과는 영 어울리지 않는데, 윤기는 그 모습이 웃기고 어이없어서, 한편으로는 못내 귀여워서 같이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크고 넓은 홀은 입구부터 사람이 가득했다. 윤기는 흥미라고는 일말도 느껴지지 않게 대충 반질반질한 바닥과 커다란 홍보 포스터를 건 천장을 봤다. 이전 자신을 사위로 맞이하고 싶어 눈이 돌아있던 시의원의 딸과 딱 한번 와본 게 전부였다. 그때도 시의원을 만나러 간 자리에서 영악한 늙은이가 강제로 딸을 불러 둘만 보내버린 거였다. 결국 지루함을 버티다 못해 공연이 끝나기도 전에 나왔었다.


 무심한 윤기와 반대로 지민은 커다란 홀에 신기하다며 흥미를 보였다.



“와아. 이렇게 큰 무대에 서면 얼마나 떨릴까요?”

“넌 더 큰 무대에 서게 될 건데 뭘.”



 윤기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지민이 배시시 웃었다.



“그럼 형 올 거예요?”

“글쎄. 초대받으면 생각해볼게.”



 그때, 그들의 옆을 스쳐 지나가는 사람이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화들짝 놀라 외쳤다. 어!



“박지민 아니야? 뉴위크?”

“뉴위크? 어제 나 직캠도 봤는데? 지민이라고?”



 대화를 하던 여성 서넛이 지민을 발견하고는 눈을 비비적거렸다. 화려하게 꾸미니 안 그래도 시선을 사로잡는데, 얼굴까지 진한 메이크업을 발라놨으니 뉴위크의 지민이라고 고래고래 떠드는 격이었다. 미친, 진짜 박지민이잖아. 친한 배우 있나? 누구 보러 왔나 봐. 와. 얼굴 개작아.


 지민은 주변에서 자신의 이름이 언급될 때마다 놀라 눈을 휘둥그레 떴다. 연예인의 반응과 일반인의 반응이 똑같았다. 이런 상황은 처음 겪어보았다. 망돌로 흙길을 걷다 화제가 된 후에는 소속사와 연습실, 그리고 촬영을 하러만 다녔었다. 윤기를 만나는 시간을 제외하고 길가를 다닌 적이 없으니, 일반 사람들의 반응을 알 길이 없었다.



“아이돌? 아이돌이 왔다고? 어디에?”



 웅성거림은 점차 커져갔다. 요새 뜨는 아이돌이래. 뉴위크라는데? 어, 나 들어본 거 같아. 말이 퍼지는 속도는 빛만큼이나 빠르다. 지민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내 얼굴을 아는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하다니. 팬싸인회에 오는 사람들이 전부일 줄 알았다. 어색하게 굳은 지민과 달리 윤기는 주변을 슥 훑었다. 그리고는 지민의 팔을 붙잡아 자신의 곁으로 이끌었다. 동시에, 몇몇 사람들이 그들에게 다가왔다.



“오빠 혹시 저 사진 좀 같이 찍어주시면 안 될까요? 저 진짜 팬이에요.”



 머지않아 카메라를 켠 사람들이 지민을 포위하듯 둘러쌌다. 찰칵거리는 셔터음이 이곳 저곳에서 들린다.



“아! 저, 저랑 사진을…, 좋아해주셔서 고마워요. 그런데 제가 그냥 공연을 보러 온 거라서요. 그게….”



 지민이 당황하여 허둥거리는 사이 팬이 카메라를 켜 내민다.



“사진 한 장만 안 될까요?”



 이런 요청 또한 처음이었다. 어떡하지? 그치만 팬이라는데. 팬에게는 한없이 잘해주고 싶었다. 지민이 갈등하다 손을 뻗은 그 순간, 낮은 저음이 파고 들었다. 윤기가 가로막듯 지민을 끌어 제 뒤로 비스듬히 보냈다.



“죄송하지만 개인 스케줄 중이라 따로 사진 촬영은 곤란합니다.”

“아 그래요…? 오빠 진짜 좋아해요. 다음에 팬싸 꼭 갈게요!”



 팬이 아쉽다는 듯 손을 흔든다. 그러자 주변에서 카메라를 켜고 대기하던 사람들이 같이 아쉬움의 탄식을 흘렸다. 촬영 안 된대. 에이, 무대 올라가나? 그럼에도 지민을 향한 셔터는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지민의 시야를 가려주는 건 윤기의 넓직한 어깨였다. 그 그늘 뒤에 서니 조금씩 안정이 되찾아진다. 지민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람이 성처럼 둘러싸고 있는 듯했다. 이러다간 저와 같이 윤기도 카메라에 찍히고 말 거였다. 어떡하지. 혹시라도 윤기는 이슈가 되면 안됐다.


 공연 시작까지는 시간이 어느 정도 남아있었다. 이렇게까지 일이 커질 것이라고는, 본인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는 추호도 몰랐다. 어디로 가지? 어떻게 해야 되지? 지민이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가자.”

“네?”

“사람 많잖아.”



 윤기가 턱짓으로 주변을 가리켰다. 지민이 머뭇거리는 사이 윤기는 보호하듯 지민을 안쪽으로 끌어 당겼다. 그리고는 미련 없이 반대쪽 출구를 향했다. 머지않아 극장에는 아이돌이 다녀갔다는 무성한 소문만이 남았다.









***








 커다란 건물을 빠져 나와 그들이 도착한 곳은 윤기의 차량이었다. 윤기는 차에 타기 전까지도 지민을 보호하듯 안쪽으로 밀며 걸었다. 그는 지민을 안전하게 태운 뒤에야 운전석에 탑승했다. 지민이 시무룩하게 말했다.



“…죄송해요….”



 모조리 망했다. 원대한 첫데이트 계획이 이렇게 한 순간에 무너지다니. 공연 볼 때 손까지 은근슬쩍 잡아보려고 했었는데, 그 흑심을 안 건지 시작도 전에 차단당했다. 같이 사진 찍혀 얼굴까지 팔리게 됐으며, 심지어는 뭘 몰라 매니저 노릇까지 하게 만들었다. 아마 윤기가 중간에 끊지 않았더라면 아직까지도 홀 중간에서 포토존 역할을 하고 있을 터였다.



“뭐가 죄송해.”

“저 때문에 시간낭비만 하시고…공연 기대하셨을 텐데….”



 풀이 죽은 지민은 윤기를 쳐다보지도 못했다. 윤기는 별일 아닌 듯 어깨를 으쓱했다.



“별로 공연은 기대 안 했어. 오히려 네가 오페라 배우처럼 하고 온 게 더 재미있는데.”

“에? 오페라 안 좋아해요?”

“좋아할 것 같다는 생각은 어디서 나온 거야.”



 이럴 수가. 이 데이트는 처음부터 잘 될 가망성이 없었다. 지민은 윤기의 비서를 원망했다. 왜 무슨 공연도 잘 보실 거라고 해주신 거예요. 윤기의 비서가 이 생각을 알았더라면 무척 억울했을 터였다. 모든 예술 문화 공연에는 지민씨를 제외하고 관심이 없습니다, 하고 그는 차마 진실의 말을 전할 수 없었으니.


 지민의 입꼬리가 점점 추락하더니 결국 턱에 호두알처럼 커다란 주름이 진다. 울망거리는 얼굴에 대놓고 쓰였다. 이건 망했다. 부사장님도 실망하셨겠지. 어떡해요. 온갖 시련을 다 겪은 얼굴로 윤기를 돌아봤을 때였다. 지민을 빤히 구경하고 있던 윤기가 돌연 실소를 흘렸다.


 그리고는 곧 운전대에 얼굴을 묻고 크게 큭큭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얼마나 웃긴지 호흡이 부정확하게 떨렸다.



“아 진짜 얘를 도대체 어떡하면 좋지.”



 윤기는 못 참겠다는 듯 지민의 얼굴을 다시 보고는 어깨까지 떨며 킥킥 웃어댔다. 그에 지민의 표정이 더욱 다채롭게 변했다. 왜지? 오페라를 엄청나게 싫어하셨나? 안 봐서 이렇게까지 기쁘신 걸까? 지민이 당황하여 바쁘게 눈을 깜빡거렸다. 윤기는 호흡을 정리하며 웃어서 뻐근해진 턱을 매만졌다.



“아 미안.”



 너무 웃었네. 영문을 모르는 지민이 계속 의아하게 쳐다보니 그는 다시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네가 그렇게 입고 우울한 표정을 하니까 어디 가서 한대 맞고 슬퍼하는 찹쌀떡 같아서.”

“뭐라고요? 하, 한대 맞고…찹쌀떡?”



 지민이 급히 차량용 거울을 내려 확인했다. 그럴 리가 없는데. 분명히 어른스럽냐고 물어봤을 때 샵에 있는 누나들이 그렇다고 해줬는데. 꾸역꾸역 스모키를 해야 한다며, 나이가 5살은 많아 보이는 메이크업으로 해달라고 필히 요청했었다. 그 노력조차 쓸모 없는 거였다. 쿠궁. 지민의 머리로 벼락이 치는 듯했다. 첫데이트 인상평이 한대 맞고 온 찹쌀떡이라니. 그에 윤기는 피실피실 웃었다.



“이제는 충격 받은 떡이 됐네.”

“…됐어요. 말하지 마세요.”

“왜? 나름 신선한 충격이었어.”

“그럼 뭐해요. 한대 맞았다는데. 멋있어 보이려고 한 거란 말이에요.”

“삐진 찹쌀떡도 멋있을 수 있지.”



 윤기가 미소 지은 채 지민의 세팅 된 머리를 퍽 귀엽다는 듯 가볍게 헤집었다. 커다란 손에 뒤로 한껏 넘긴 머리가 흐트러진다. 덕분에 그만 놀리라고 한 마디 하려던 지민이 우뚝 정지했다.



“다음부터는 평소대로 와. 내 취향 이거 아니니까.”



 이번에는 윤기가 지민의 말랑한 볼을 가볍게 매만졌다. 정말 예뻐하는 반려동물 대하는 것처럼.



“후드티에 운동화 신어.”

“…….”

“저번에 보니까 잘 어울리던데.”

“…….”

그래야 네가 하고 싶어하는 데이트도 편하게 하지. 안 그러니.”



 윤기는 저음으로 지민의 가슴에 파도가 치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했다. 순식간에 지민이 잘 익은 홍시처럼 연하게 빨개진다.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그러나 마구 좋아하는 티를 내기보다는 어른스러운 척을 택했다. 그, 그러시다면야 다음에 만날 땐 참고해볼게요. 큼큼.



“그럼 어디로 모시면 될까요, 슈퍼스타 연예인님. 공연도 취소된 마당에.”

“그, 그렇게 부르지 마세요.”



 지민이 민망하다는 듯 손을 휘저었다. 그리고는 윤기의 말대로 다음 장소를 기억해보았다. 원래대로라면 식당이 예약되어 있었다. 지민의 안색이 다시금 좋지 않게 푹 꺼진다. 윤기가 물었다.



“뭐하고 싶었는데.”

“…식당을 예약해놨었는데요. 그런데 윤기형도 별로 배가 안 고플 것 같고, 시간도…그리고 옷이….”



 가장 난감한 건 복장이었다. 극장에서와 똑같은 상황이 반복될 수도 있었다. 왜냐하면, 지민이 예약한 곳은 윤기와 같이 룸으로 된 형식의 식당이 아닌 탁 트여있는 호텔 전망대 레스토랑이었다. 연인들의 후기가 제일 높은 평점으로 남겨져 있던 곳이었다. 여기서 프러포즈했어요! 여기서 식사하고 잘 됐어요! 그런 말들이 제일 많았는데, 근처에도 가보지 못하게 생겼다. 지민이 난감하게 눈동자만 빙글빙글 굴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럼 뭐 간단하네.”



 설마 이대로 데이트 종료인가. 지민이 조마조마하게 떨었다.



“하고 싶은 거라도 있으세요?”

“집 가면 되겠군.”



 끝이다. 지민은 첫데이트가 망해버린 채 끝났다는 사실을 믿기 어려웠다. 하준의 말대로 백 번 후기를 보고 찾는 것보다 실전이 중요한 모양이다. 네…그럼 전 따로 차 타고 갈게요…. 작게 대답하려던 때.



“집에 티비도 있어. 그걸로 연극 봐. 비록 배우들이 직접 튀어나와서 노래를 해주진 않겠지만.”



 까만 눈이 휘둥그레 확장된다. 네 숙소에 있는 거보단 큰 화면이야. 윤기가 덧붙였다. 이 말은, 그러니까. 지민이 제일 바라는 마지막 꿈의 목표로 세워둔 것이었다. 홈 데이트. 데이트 중에서도 사고가 일어나기 가장 좋다는 바로 그것.



“싫으면 말….”

“좋아요! 너무너무 가고 싶어요!”



 모로 가도 목적만 달성하면 됐다. 지민은 함박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그에 윤기는 픽 웃으며 차를 출발시켰다. 값비싼 슈퍼카가 매끄럽게 오페라 극장을 빠져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