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 Bill Withers - Ain't No Sunshine>
엘리 하트만이 집으로 돌아온 어느 날, 하트만 저택 안에서 숨을 쉬는 모든 이는 소녀의 고운 얼굴을 보자마자 경악했다. 뽀얀 피부에 손톱으로 긁힌듯 커다란 생채기가 나있었다. 딸이면 껌뻑 죽는 로빈츠 하트만은 물론이고, 우아한 자세를 잃는 법이 없는 페트리아 하트만, 그 외에 집사와 정원사, 운전기사까지 놀랐다. 두 다리로 걷는 생물 모두, 아니 덩치 커다란 말라뮤트까지 달려와 컹컹거렸다. 로빈츠 하트만은 길길이 날뛰었다.
“감히 누가! 내 딸의 얼굴에!”
켈링턴 아트스쿨을 갈아버리겠다고 분노하며 비서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엘리 하트만이 로빈츠 하트만을 막았다. 별 거 아니에요. 그냥 조금 말싸움이 있었어요. 학교에서 큰 소란 만들기 싫어요. 페트리아 하트만도 놀라 그녀의 딸에게 원인을 물었지만 엘리 하트만은 입을 꾹 다물었다. 이 정도는 금방 나아요. 걱정 마세요. 얼버무리며 웃어넘겼다.
엘리 하트만은 불쑥불쑥 윤기의 방문을 뚫고 들어왔다. 윤기! 공부를 하던 윤기는 익숙하게 펜을 내려놓고 엘리를 바라보았다.
“얼굴 어떻게 하려고.”
생채기는 꽤나 오래갈 거 같았다.
“괜찮아. 포스터는 찍어놨거든.”
이거 봐, 잘 나왔지? 그녀는 윤기의 앞으로 포스터 한 장을 내밀었다. 윤기는 이 포스터 한 장을 위해 엘리 하트만이 얼마나 많은 각고의 노력을 쏟아 부었는지 알고 있었다. 잠을 줄여가며 대본을 외웠고 억양까지도 오드리 헵번과 비슷하게 바꾼다고 볼펜을 물고 연습했다. 오죽하면 무식한 로봇 연기를 뽐내는 윤기마저도 상대 역할의 대사를 다 외워버렸다. 윤기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포스터 속 그녀는 완벽한 주인공이었다. 맨해튼 낡은 빌라에서 사는 찬란한 삶을 꿈꾸는 예쁜 아가씨 홀리였다.
“그런데 왜 싸웠어?”
윤기는 대단한 일을 작게 말하는 재주를 타고 났다. 잔디밭에 꽃 폈더라. 그런 어투로 말했다. 엘리 역시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덤덤했다.
“내가 배역을 돈으로 땄대.”
“누가?”
“열까지 세다 못 셌어.”
“…많나보네.”
“응. 때리기도 힘들어.”
엘리는 아무렇지 않은 듯 이야기했다.
“상관없어. 질투 나서 그런 거겠지 뭐. 우리 부모님이 그럴 분들이 아닌데.”
윤기는 그래?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그녀의 자존은 높고 견고했다. 윤기는 엘리 하트만만큼 곧게 자란 사람을 보지 못했다. 어거스트에서 귀하게 자란 아가씨는 애정도 부족함 없이 받았으니, 그만큼 단단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고아원에 구석에 처박혀있던 동양인 꼬마까지도 데려올 수 있던 거다.
엘리 하트만은 멀쩡한 생활을 유지했다. 학교를 다녀왔고, 연기연습을 했고, 대본을 외웠다. 행복한 하트만 가문의 저녁식탁도 늘 유지되었다. 피곤하긴 한 건지 얼굴에 자주 그늘이 지긴 했어도 모두들 연습이 피곤해서라는 엘리의 말을 믿었다.
당시 윤기의 가장 큰 관심사는 성적이었다. 에이가 깔린 완벽한 성적표를 바치면 페트리아 하트만이 좋아했기 때문이다. 엘리도 이런 성적표를 받아다주면 참 좋을 텐데 말이다. 이번에도 잘 받았구나, 축하한다. 쑥스럽게 웃으며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닌걸요, 하고 살짝 미소를 보인 윤기는 서재로 갔다. 로빈츠 하트만에게도 성적표를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그 문 앞에 엘리 하트만이 서있었다. 다가오는 인기척을 느꼈을 텐데도 엘리 하트만의 표정은 어쩐지 멍하고 넋이 빠져있었다. 윤기는 엘리의 어깨를 툭툭 쳤다.
“왜 그래?”
“…….”
“엘리?”
동공이 풀려있었다. 윤기를 봤으나 그 시선은 윤기를 향하지 않았다. 죽은 생선의 눈을 한 그녀는 유령처럼 슬리퍼를 끌고 윤기의 곁을 지나쳤다.
아마 그때, 그녀의 안에서 무언가가 크게 산산조각이 났을 터였다. 윤기는 알지 못했다. 그건 당연했다. 이번에야말로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생겼다는 사실이 마냥 좋은 어린 소년은 사람의 깊은 감정까지 판단할 수 없었다.
뭔가 좀 이상한데. 한 번도 엘리 하트만의 그런 모습을 본 적이 없는 윤기는 고개를 갸웃하며 엘리 하트만과 똑같이 방 앞에서 소리를 죽이고 서보았다. 로빈츠 하트만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만큼 돈을 받고도 못해? 건물이라도 세워주길 바라는 건가? 고작 배역 하나에. 기가 차군. 케일론이랑 약속 잡, 밖에 누구니?”
“…저예요.”
“오, 슈가.”
로빈츠 하트만은 급하게 전화를 끊었다. 윤기는 로빈츠 하트만을 가만 응시했다. 가족을 사랑하는 다정한 아버지. 쉽게 무너지는 가짜사랑만 여러 번 받아봐서 구분은 쉬웠다. 엘리가 왜 그랬을까. 로빈츠 하트만이 말했다.
“무슨 일이니?”
윤기는 성적표를 내밀었다. 이번에도 실망시키지 않았구나. 로빈츠 하트만은 칭찬을 아끼지 않으며 내일 다 같이 밖에서 식사를 하자고 했다.
그러나 그는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아침부터 켈링턴 아트스쿨의 자살사건으로 뉴욕이 떠들썩해졌다.
왜 이렇게 됐을까? 벌을 받는 건가? 아니면 잠자는 숲속의 미녀 이야기처럼 나쁜 마법사가 저주라도 건걸까? 어거스트를 부러워하는 누군가가 망쳐놓길 바라며 계획적으로 괴롭힌 걸지도 모른다. 윤기는 소리를 죽여 통조림을 땄다. 벌써 일주일째 같은 메뉴라 질리는 맛이지만 상관없었다. 밖으로 나가 식사를 요청해봤자 편하게 테이블에 앉아 칼질은 하지 못한다. 하트만가의 행복한 저녁식사는 그날 이후로 단 한 번도 지켜지지 못했다. 아래층에서 고래고래 귀를 날카롭게 찢는 비명이 들렸다.
“꺄아아악! 고양아! 고양아 어디 있니!”
‘티파니에서 아침을’ 영화에 나오는 대사. 콩 통조림을 숟가락으로 푹 펐다. 윤기는 느리게 우물우물 씹었다.
연극은 취소됐다. 엘리 하트만은 시뻘건 눈으로 집에 돌아왔다. 산발이 된 머리와 싸구려 향수와 술 냄새를 풀풀 풍기는 그녀의 몸에선 마리화나의 냄새도 났다. 깔깔 웃으며 그녀는 용케 고용인들의 손을 다 뿌리치고 윤기의 방으로 올라왔다.
“슈가, 나 기분이 너무 좋은 거 있지.”
“…그래?”
“어. 너무, 너어어무 좋아. 아 이렇게 좋아도 되는 건가.”
“…….”
“사람을 죽였는데 말이야….”
그녀는 킬킬 웃으며 담배연기를 윤기의 얼굴에 뿜었다. 그리고 로빈츠 하트만이 나타나 약에 취한 그녀를 끌고 갔다. 내 몸에 손대지마! 손대지 말라고! 아아악! 슈가, 슈가 살려줘! 비명을 지르면서 그녀가 끌려간 길엔 깨진 꽃병 조각이 널려있었다. 연극이 취소돼서, 상심해서 그랬겠지. 모두들 그리 생각했으나 그것은 안일한 판단이었다. 엘리 하트만은 미쳐가기 시작했다. 마리화나, 코카인, 헤로인 온갖 찌든 냄새가 그녀의 몸에서 났다. 마약에 취해있지 않은 날을 세는 게 더 빨랐다. 아니, 윤기는 그녀가 마약에 취한 건지 아닌지도 구분이 불가능해졌다. 보석 같던 눈을 눈가 주위가 벌겋게 변했다.
“아가씨!”
쨍! 유리잔이 깨졌다. 고용인들이 놀라 비명을 지르며 일어났다. 엘리 하트만은 깔깔거리며 그 위로 올라섰다. 하얀 발이 자근자근 유리조각 위를 누볐다. 붉은 피가 둥그렇게 퍼져 나온다. 하얀 잠옷을 입은 그녀는 그 위에서 왈츠를 추듯 스탭을 밟으며 흥얼거렸다. 달빛이 흐르는 강, 그리고 나. 세상 밖에 있는 두 표류자. 우리는 무지개의 끝에 서있어요. 나의 친구가 저 끝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집사가 그 광경을 발견하고 허겁지겁 주치의를 불렀고, 페트리아 하트만과 로빈츠 하트만이 집으로 귀환했다.
“또 마약인가요?”
페트리아가 피곤한 안색으로 물었다. 엘리 하트만의 몸에서 찌든 약의 냄새가 나지 않은 적이 없다. 치사량으로 죽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주치의는 난감하다는 듯 머뭇거렸다. 큼큼, 헛기침 후 말했다. 따님은 현재 어떤 마약 반응도 검증되지 않습니다. 로빈츠 하트만은 모든 체면도 잊고 일그러진 얼굴로 주치의의 멱살을 붙들었다.
“지금 내 딸이 미쳤다고 하는 거요?”
주치의는 억울했을 터였다. 미쳤다는 말이 아니면 그녀를 설명할 수 없었다. 로빈츠 하트만이 씩씩거렸다. 며칠 후 주치의의 의사면허는 누군가에 의해 정지됐다. 로빈츠 하트만은 피곤에 찌든 얼굴로 엘리 하트만의 손을 잡았다.
“얘야, 허니, 대체 왜 이러는 거니?”
“내가 뭘요?”
“너는 원래 이런 애가 아니었잖니. 뭐가 문제야.”
“없어요, 문제. 그냥 이러는 게 좋아서 이러는 거예요.”
로빈츠 하트만은 그녀를 방에 가뒀다. 페트리아 하트만이 이런 몰상식한 방법은 심한 거 같다 말렸지만, 그녀도 엘리 하트만이 나체로 온 집안을 활보하다 밖으로 나가려는 광경을 목격하고 마음을 바꿨다. 엘리 하트만의 방문은 유리문으로 개조됐다. 로빈츠 하트만은 누구라도 그 문을 열어주는 순간 모가지를 날려버리겠다고 선포했다. 그녀는 그 안에 갇혀 매일같이 목에서 피가 나올 때까지 악을 쓰고 열어달라며 비명을 질렀다. 그러다 다음날은 비극 속 주인공처럼 흑흑거리며 눈물을 흘렸다.
“내가 왜 갇혀있어야 해, 답답해 꺼내줘. 누가 날 이렇게 가둬놓은 거야. 죽여 버릴 거야!”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졌다. 역시 버림받은 자신의 인생이 순탄하게 계속 흘러갈리 없었다. 민윤기라 이름 붙은 불행한 동화의 끝은 마지막까지도 가엾고 불행한 모양이다.
윤기는 그녀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랐다. 간혹 엘리 하트만이 있는 방문을 지나다니며 흘끔거리는 게 전부였다. 그러다 언젠가부터 비명이 끊겼다. 엘리 하트만은 중얼거리는 버릇도 끊었으며 조용히 밥을 먹고 아래 구명으로 그릇을 내놓았다. 로빈츠 하트만과 페트리아 하트만이 대화를 시도하려 했으나 그녀는 입을 꾹 다물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윤기는 유리문 앞으로 다가갈지 말지 망설였다. 모든 이가 한번쯤은 그녀에게 시선을 두고 갔지만 윤기만은 조심스러웠다. 일주일이나 침묵을 유지하던 엘리 하트만이 처음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슈가.”
“…….”
“이리와 봐.”
윤기는 갈등했다. 그녀는 정말 평범한 사람과 똑같아보였다. 늘 벌건 눈가가 그날은 멀쩡했다. 결국 소년은 자신을 이곳으로 데려와준 소녀의 말을 따라 조심스럽게 유리문 앞에 앉았다. 착하네. 읊조리며 엘리 하트만이 옅게 웃었다.
“넌 진짜 착해, 슈가. 내가 아는 사람 중 가장 착하고 예쁜 아이가 너야.”
“…….”
“그 고아원으로 들어갔는데 구석에 있는 너만 보이는 거야. 다른 아이들이 다 자기를 데려가 달라고 했는데 뚱하니 이쪽은 보지도 않는 게 참 귀여웠어. 물론 지금도 귀여워. 가끔 얄미울 때도 있지만.”
“…….”
“날 따라와줘서 고마워.”
“…….”
“넌 이제 내가 싫니?”
“…아니.”
“아 그래? 이상하네. 난 이제 내가 싫은데.”
엘리 하트만은 힘 빠진 웃음을 지었다. 그녀의 표정은 울면서 웃는 기괴한 얼굴이었다. 참 좋다. 너라도 날 좋아해줘서. 이미 다 흘릴 만큼 흘려버린 건지, 더는 뽑아낼 눈물이 없는 건지 슬픈 표정으로도 눈물은 흘리지 않았다. 그녀는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있잖아, 나는 사랑 받고 싶었어. 연기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날 사랑해주는 게 좋았던 거 같아. 연기를 하면 많은 사람들이 그 시간동안 날 사랑해주잖아. 잘한다고 예쁘다고. 내가 그 배역을 하는 게 너무 좋았어.”
“…….”
“아무도 나한테 어거스트라는 말을 안 꺼내. 그냥 있는 대로 날 바라봐줘.”
“…….”
“걔도 그러고 싶었겠지?”
“…….”
“그래서 내가 너무 미웠을 거야. 뺏어갔으니까.”
윤기는 엘리 하트만이 매번 말하는 ‘걔’가 누군지 몰랐다. ‘걔’가 도대체 누구인데. 속 시원하게 물어보고 싶었으나 어쩐지 물으면 그녀가 금방이라도 울어버릴 것만 같았다.
“난 아빠가 날 사랑해서 그랬다는 걸 알아.”
“…….”
“그래서 미워하지도 못해.”
“…….”
“해보려고 했는데 아직도 너무 사랑해. 아빠도, 엄마도.”
진짜 사랑해. 윤기는 그 순간 사랑에 대한 정의를 잃어버렸다. 사랑하면 다 행복하고 예쁜 게 아니었나. 울면서 기괴하게 웃는 엘리 하트만의 얼굴은 사랑 같지 않았으나, 그녀는 사랑이라고 했다. 짧게 웃은 엘리 하트만이 이내 기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좀 씻고 싶어.”
“…….”
“슈가, 이거 좀 열어줄래?”
“…….”
“바로 씻고만 다시 들어갈게. 짧을 거야. 오래있으면 네가 혼날 테니까.”
윤기는 머뭇거렸다. 종종 그녀의 상태를 확인하고 떠나는 의사도 정신이 불안정하다는 판결을 내려놓았다. 그런데….
“한번만 부탁할게.”
정말로 그녀는 평소의 우아한 그녀와 똑같아보였다. 비명을 지르지도 않았고 말투는 다정했으며 말간 얼굴 속 눈동자는 투명하게 빛났다. 누가 봐도 사람들이 아는 그 ‘엘리 하트만’이었다. 깊은 갈등 사이에서 고민하던 윤기는 마지못해 한 가지 조건을 붙이고 열쇠를 찾아 문을 열었다.
“대신 내가 그 앞에 서있을게. 빨리 나와.”
“고마워.”
첨벙거리는 물소리는 파도를 닮아있었다. 문 리버 노래를 너무 많이 들어서 그런가. 무지개와 달빛이 쏟아지는 강가가 생각났다. 윤기는 시간을 확인했다. 약 15분. 슬슬 나오라는 말을 해야하나, 고민하고 있던 그때 사람들이 몰려왔다. 열린 방문을 확인한 고용인이 불러 모은 듯 했다. 페트리아 하트만이 다급하게 말했다.
“엘리, 엘리 여기 있니?”
“네. 씻는다고 했어요.”
페트리아 하트만이 문을 열었다. 엘리? 그녀의 목소리엔 자신의 딸이 원래대로 돌아오길 비는 약간의 기대감, 그리고 걱정이 어우러져있었다. 그러나 뒤이어 욕실의 상황을 확인한 그녀의 끔찍한 비명소리가 하트만 저택을 뒤흔들었다.
“아가, 아가! 엘리! 눈 좀 떠보렴, 엘리!”
다른 고용인들이 욕실 안으로 뛰쳐 들어가는 동안, 윤기는 멍하니 서있을 수밖에 없었다. 물소리가 계속 찰박거렸다. 어디선가 허밍이 들렸다. 슈가, 이거 좀 들어봐. 소녀가 싱그럽게 웃었다. 달빛이 흐르는 강, 그리고 나. 세상 밖에 있는 두 표류자. 우리는 무지개의 끝에 서있어요. 나의 친구가 저 끝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
3일간 하트만 저택에 머무르며 윤기는 조용한 생활을 보냈다. 폭풍도 모자라 지진, 해일, 화산에 휩싸인 어거스트 바깥 상황과는 정 반대였다. 따지자면 태풍의 눈, 그 정도 호칭이 적당했다.
왜 이 끔찍한 곳에 다시 돌아왔을까. 왜 나는 핸들을 이쪽으로 꺾었을까. 자동차의 인공지능 센서로 자동운전이라는 변명도 만들 수 없는 윤기는 계속해서 고민해도 답을 찾을 수 없었다. 보고 싶은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립지도 않고. 그는 대신 집안 곳곳을 돌아보았다.
윤기는 마지막으로 그곳을 찾았다. 유리문 대신 나무문으로 바뀐 방. 달빛이 흐르는 강가의 노래가 나왔던. 엘리 하트만의 죽음을 심장마비라 바꿔 알리고, 페트리아 하트만은 쓰러지기 전 말을 걸어왔다.
왜, 왜 열어준 거니?
대답하지 못했다. 할 수가 없었다. 잠시 씻는다고 했어요. 멀쩡해보였어요. 어린 소년이 대답할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이었지만, 그 답은 자식을 잃고 누군가의 탓을 찾는 부모의 마음을 만족시킬 수 없었다. 꿀 먹은 벙어리처럼 눈만 깜빡거리는 윤기를 보고 페트리아 하트만은 질문을 바꿨다.
마지막에 무슨 대화를 했니?
그때 사랑한다는 말을 남겼다고 솔직하게 말했다면 페트리아 하트만은 쓰러지지 않았을까? 우리를 사랑한다고 했어요. 그래서 더 괴로워했어요.
“…….”
윤기는 아린 한숨을 내쉬고 발길을 돌려 내려왔다. 그리고 그때, 저 멀리서부터 컹컹거리며 덩치 커다란 말라뮤트 한 마리가 뛰어왔다. 천방지축으로 뛰어온 개는 윤기를 보고 반가움을 감추지 못해 날뛰었다.
“잘 있었어?”
엘리 하트만이 데려온 말라뮤트는 여덟 마리의 새끼를 낳았다. 비극이 하트만 가문을 덮치며 집사가 새끼를 모두 내보냈지만, 그중 유일하게 입양을 가지 못한 아이였다. 윤기는 홀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기분이 좋은지 혀를 빼고 헥헥거린다. 속도 없지. 뭐가 좋다고 반겨. 그런데 너도 많이 외로웠겠다. 어쩌다 나 같은 주인만 남아버려서.
덩치 커다란 말라뮤트는 돌연 윤기가 들고 있던 모자에 코를 박고 킁킁거리더니 꼬리를 팔랑팔랑 흔들었다. 익숙하고 반가운 사람을 찾은 것처럼. 윤기는 불과 몇 달 전 끙끙거리며 짐을 가득 들고 돌아온 지민에게 심술을 부려 홀리의 산책을 맡겼던 사실을 기억해냈다.
“얘가 좋아?”
컹! 알아듣는 건지 홀리는 그저 좋은 듯 반갑게 짖었다. 윤기는 살짝 어이가 없기도 했다. 넌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도 날 따뜻하게 만들어. 여기서도 존재감을 드러내. 가볍게 웃은 윤기는 다리를 굽혀 앉아 홀리를 품에 끌어와 안았다. 털이 푹신푹신했다.
“나도 좋아.”
윤기는 털뭉치에 얼굴을 묻었다. 따뜻한 냄새가 났다. 지금 이 순간 그의 머릿속엔 그저 한 가지 생각만 가득했다. 행복해지고 싶다, 하는 동화 같은 그런 생각. 한번 고개를 처든 생각은 바이러스처럼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매일 밤을 수면유도제와 아스피린 없이 잠들고 싶고, 문자를 보고 실실 웃는 멍청한 짓도 계속 하고 싶고, 같이 있으면 좋다고 서슴없이 말하고 싶고. 윤기는 행복을 같이 논하고 싶은 한 사람을 떠올렸다.
그러나 우리의 성을 세우고 싶어도 내가 가진 땅이 너무 척박하다. 가진 게 없는 줄 알았더니, 그나마 가지고 있는 게 널 괴롭힌다. 파파라치한테 사생활을 팔게 하는 것도 모자라서 살인협박까지 받게 했다. 자신이 사라지면 파파라치 같은 것도, 이딴 말도 안 되는 위협도 지민의 곁에서 사라질 것이다. 지민이 제일 잘 살 수 있는 장소는 여느 사람들과 같은 평범한 일상이라는 걸 윤기는 알고 있었다. 영화도 보고, 휴가도 편하게 계획하고, 좋아하는 펍에 앉아 맥주잔을 기울일 수 있는 일상.
나랑 엮이지 않으면 넌 계속 행복하겠지.
윤기는 홀리를 놓아주고 폰을 꺼냈다. 쌓여있는 번호 중 하나를 클릭해 전화를 걸었다. 연결음이 채 두 번이 가기도 전에 냅다 받은 레이첼은 감격스러워했다. 미쳐서 이제 전화하니? 그런 속생각도 들지 않을 만큼 현재 상황이 급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아침 증권시장이 열리자마자 어거스트, 슈가 스튜디오 관련 주식이 공격적으로 매각되었다. 로빈츠 하트만 회장이 사망하고 윤기가 취임한 이후 처음 있는 주가폭락이었다. 미스터 윤, 상황이 많이 좋지 않습니다. 장소를 알려주시면 사람을 보내겠…. 윤기는 레이첼의 말을 끊고 명령했다.
“기자회견 잡아.”
[…네. 내일 바로 진행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운전기사 네가 뽑은 사람 잘랐으니까 다시 뽑아. 니가 아예 처음부터 타보고 골라와. 뽑는 족족 머리 어지러워서 토할 거 같으니까.”
급한 상황을 아는 건가. 아니면 멋대로 일을 빼먹더니 정말 머리가 돌아버린 건가. 주가가 폭락하고 임원들이 반발하고, 우호관계를 가지고 있는 주주들이 등을 돌리고 있는 심각한 상황에서 운전기사 해고여부라니. 레이첼은 잠시 말을 잃었지만 곧장 준비해놓겠다는 대답을 했다. 그리고 윤기가 마저 말을 이었다.
“박지민 계약 연장했던 거.”
[네?]
“지금 끝내.”
윤기는 제 할 말만 내뱉고 전화를 끊었다. 이제야 그녀가 부모에게 잘못을 묻지 않고 혼자 곪아가던 이유를 어렴풋이 이해했다. 사랑하는 상대가 상처를 받지 않길 바라는 마음. 나보다는 남을 위하는 마음.
내가 널 사랑해서 그랬다면, 너도 날 미워하지 못할까?
***
초호화부자의 삶을 상상해보자. 내가 어거스트 회장이라면 일단 지중해를 유람하는 초호화 유람선을 하나 사고, 한국에 있는 부모님 집을 거대한 정원이 딸린 대주택으로 바꾸고, 민윤기를 찾는다는 광고를 띄워서 찾는 사람에게 백억 달러를 주고…. 지민은 진지하게 자신의 인내심에 감탄했다. 입사 초 그 악마라고 소문난 민윤기 밑에서 버틸 수 있는 이유가 역시 있었던 거다. 이러다가 공자가 되는 건 아닐까. 지민은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아직까지도 연락이 없는 폰을 바라보았다.
아니, 연락이 오긴 왔다. 지민은 마우스 클릭 몇 번만 할 수 있는 뉴스 포털사이트에서 여느 대중들과 마찬가지로 윤기의 소식을 접했다. 어거스트 기자회견 개최. 준비하느라 바빠서 연락을 못하는 거면 괜찮은데.
지민은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엎어졌다. 이상하게 불안했다. 아니야. 무슨 생각이 있는 거겠지, 다 자기한테 맡기라고 했잖아. 민윤기가 쉽게 당할 사람인 거 같아? 절대 아니지. 믿고 일 다 끝나면 전화해보면 되지. 괜찮을 거야.
정국은 걱정으로 꽉 찬 지민의 머리꼭지를 뒤에서 팔짱을 끼고 구경했다. 저쯤이면 화를 낼 만도 한데. 지민이 화를 내는 광경은 희귀하다. 언제 지민이 화를 냈더라. 정국은 고심하며 모든 지민과 만난 순간을 다 떠올려보았다. 그나마 지민이 화냈던 건 지민의 노트북을 빌려서 레포트를 실수로 삭제해버렸을 때. 같이 밤을 새주고 안마를 해주며 애교를 연기했더니 지민은 금방 풀려 헤실헤실 웃었다. 아휴, 우리 정국이 다음부터 그러면 안 돼. 이번만 봐준다. 그 외에 지민의 지갑을 잃어버렸을 때, 지민이 좋아하는 뷔의 포스터에 물을 튀겼을 때. 사소하게 또는 크게 많은 일이 있었지만 지민은 허허 웃으며 넘겼다. 괜찮아, 네가 일부러 그런 거 아니니까! 그런 박지민 상태가 저런다는 건.
지민은 하루 종일 폰을 붙들고 전화를 걸었다. 민윤기가 안 받으면 진, 진이 안 받으면 레이첼, 레이첼이 안 받으면 다시 또 민윤기.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된 지민의 전화 퍼레이드를 보면서 정국이 혀를 차며 말했다.
“연락 안 돼요?”
“응.”
“민윤기 계속 만날 거예요?”
“지금 못 만나고 있는데 뭔 소리야.”
지민이 시무룩하게 대꾸했다. 이 전화를 받는다는 기대도 없다. 진이나 레이첼의 전화는 말 그대로 벼락 친 듯 불이 났을 터였다. 아마 윤기의 스캔들이 터졌을 때나, 어거스트의 경제적 이슈가 떠올랐을 때보다 더 열이 났겠지. 어지간하면 지민도 그 사정을 이해하고 불타는 어거스트 전화선에 일을 추가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하지만 정말 이렇게 전화를 거는 것 말고는 도무지 윤기와 관련된 부스러기 소식조차 찾을 수가 없었다.
제발, 아 또 안 받는구나. 체념하며 지민이 수화음이 들리는 전화를 끊으려는데.
[지민?]
연결됐다. 정작 전화를 건 지민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퍼덕거리며 폰을 고쳐 쥐었다.
“여보세요!? 진! 지금 통화 가능해요!?”
[아 지민 지금 바빠서 길게는 힘들어요. 하하….]
피곤이 물씬 느껴지는 목소리는 찌들어있었다. 어지간하면 진을 괴롭히고 싶지 않지만. 생명줄이라도 쥔 양 지민이 다급하게 물었다.
“미스터 윤 어디 있는지 알아요, 진?”
[그건 우리도 몰라요. 늘 그렇잖아요. 기자회견도 오늘 아침에나 전화 걸어서 지시하고 끊었어요.]
“아 그럼, 그럼, 전화를 몇 시쯤 했어요?”
[레이첼이 받아서 정확한 건 알 수 없어요.]
지민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가장 궁금한 질문을 했다.
“그럼! 미스터 윤 목소리는 괜찮았대요?”
진은 잠시 침묵했다. 진? 그는 나지막한 한숨을 쉬었다.
[지민, 사실 지민한테 전할 말이 있어요.]
이번 뼈아픈 통보의 담당은 진이었다. 알려줄 사실이 있는데…놀라지 말고 들어줬으면 좋겠어요.
[지민 부서 바뀌었어요.]
“…네?”
[어거스트 일렉트릭 개발부서 쪽이에요. 혹시 캘리포니아가 부담스럽다면 다른 쪽을 레이첼이 알아봐 줄 거예요.]
“잠, 잠깐만요, 선배님. 부서이동이요?”
[…당황스럽겠지만, 진짜예요.]
“아니, 제가 갑자기 왜….”
민윤기한테 잘라달라고 사표를 한 다발 가지고 가긴 했지만, 이 사태에서? 앞뒤가 하나도 맞지 않는다. 때문에 답을 훤히 알면서도 질문했다.
“누가요?”
[…미스터 윤이 지시했어요.]
진은 흔한 위로도 덧붙이지 못했다. 어떤 말이든 이미 상처받았을 거다.
[지민, 진짜 미안한데 전화 이만 끊어야 될 거 같아요. 사무실 전화선이 터질 거 같거든요. 자세한 이야기 못해서 미안해요.]
전화는 곧 끊겼다. 뭐래요? 정국이 물었지만 지민은 넋이 빠져 대답하지 못했다. 3일간 콜센터를 차려 얻은 첫 수확에 정신이 얼얼했다. 방금 내가 무슨 소식을 들은 거지? 제 생명의 안위보다 민윤기를 걱정하고 얻은 답이 고작 ‘부서이동’이다.
지민은 니가 어떻게 날 한 순간에 쓰레기 버리듯 치워버리냐는 배신감이나 억울함보다는 다른 감정을 제일 먼저 느꼈다. 황당함. 정말 황당했다. 기승전결의 맥락에서 기 다음 곧장 결로 건너뛴 것도 아니고. 타이타닉에서 주인공들이 서로 만나기도 전 배에 물이 찬 것만 같은.
“왜요, 뭔데요?”
“나가야겠다.”
“어디로요?”
지민은 저도 모르게 정국에게 되물어 볼 뻔했다. 그러게. 어디로 가야되지? 어거스트는 갈 수 없고, 민윤기의 행방은 하나도 모르는 지금 나가봤자 미아가 될 게 뻔했다. 파파라치들한테 사진이나 퍼줄 수 있는 행동일지도 모른다. 갈 수 있는 곳이 어디…아.
“민윤기 집.”
“갑자기? 아직 기자들 깔려있는데?”
“그렇지.”
팔짱을 낀 채 지민이 고민에 빠졌다. 진지하게 말했다.
“나 차로 좀 약하게 쳐줄 수 있어? 그거면 앰뷸런스 불러도 되지 않을까?”
정국은 지민이 용납할 수 있는 화가 한계에 도달했다고 생각했다. 화가 미친 듯이 나서 결국 민윤기를 차로 치고 싶은 걸지도 모른다. 아니지. 고작 차로 쳐서 되겠어. 갈아버려야지. 언젠가 지민이 정국에게 칼을 내려놓으라며 심호흡을 가르쳤던 때처럼, 정국이 침착하게 말했다. 전적으로 박지민만 진지하게 걱정했다.
“치이면 엄청 아플걸요. 골절 확실하다.”
“역시 그렇지?”
그럼 그냥 찍혀야지 뭐. 칼처럼 꽂히는 플래시 몇 방 쯤이야. 민윤기를 만날 수 있는데 그게 문제야. 지민은 모자를 푹 눌러썼다.
“형 다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