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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짐] 아스팔트정글 35

by 토페 posted Feb 13,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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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Wouter Hamel - Double Dutch>








 굿모닝, 뉴욕! 찰리와 패트릭의 쇼 2부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찰리 그 소식 들었어요? 그 유명한 이탈리아 식당? 그럼요, 패트릭 그 식당은 뉴욕에 살아야만 하는 이유죠. 자, 오늘의 아침을 시작할 첫 곡입니다. 가판대 주인이 틀어놓은 라디오로 상쾌한 디제이의 선곡이 흘러나왔다. 길게 늘어선 줄, 마침내 차례가 된 지민은 기계적으로 주문을 시작했다.



“여기 월스트리트저널 하나랑요, 투데이 유에스에이랑…그렇게만 주세요, 감사합니다.”



 힐끔 가십지의 일면을 살핀 지민은 경제일간지 다섯 개만을 들고 나왔다. 그의 상사가 어떤 스캔들을 터뜨렸을까 조마조마하며 가십지를 확인하는 일은 어느 샌가 꽤나 오래 전 일처럼 느껴졌다.


 불과 어젯밤, 길고도 건전한 포옹의 시간이 끝난 후 지민은 민망하게 볼을 긁적거리며 눈을 굴렸다. 가야되나. 말아야 되나. 한결 풀린 분위기는 머물러야 할 거 같고, 밖에 눈이 꽤 쌓이기도 했고, 어차피 지금 집으로 들어가 봐야 몇 시간 못 자고 직장인용 수트를 다시 걸쳐야 할 거고. 그러나 연이어 떠오르는 아침 장면이 지민의 발걸음을 재촉했다. 같이 밤을 보내고 슈퍼카 뒷자리에 탑승하는 회장과 비서를 보면 고용인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슈퍼카에서 윤기 뒤로 자신이 연이어 튀어나온다면 레이첼과 진의 반응은?


 지민은 눈빛으로 머무르라 조르는 윤기를 떼어놓고 단호하게 목도리를 둘러맸다. 제대로 보면 마음이 약해질 것만 같아 눈까지 가려버릴 작정으로 휙휙 감았다. 네! 가야죠! 제 걱정은 전혀 하실 필요 없어요. 안녕히 주무세요. 내일 아침에 뵐게요! 씩씩하게 인사한 지민은 윤기가 채 잡기도 전 겨울바람보다 더 빨리 저택에서 빠져나왔다.


 바른생활 직장인 지민은 건전한 사표생각대신 다른 고민을 했다. 출근길 고민치고는 꽤나 달달했다. 뭐라고 인사하면 좋냐. 눈밭을 뚫고 집으로 돌아간 침대 위에선 얼이 빠져보이던 그의 얼굴이 계속 맴돌았다. 한 번도 상상해보지 못한 소리를 들은 표정이었다. 하긴. 말한 자신조차 그때의 박지민은 정신이 나갔다는 쪽으로 찬성표를 던진다. 지민은 머쓱하게 코를 훌쩍거렸다. 왜 그렇게 다급하게 말했지. 그래도 사실이긴 하니까….


 잘 주무셨어요, 오늘은 어제보단 덜 춥네요. 대충 그런 인사를 하면 되겠다. 레이첼이랑 진한테는 절대 티내지 말고. 좋아, 그렇게만 하면 돼. 파닉스 떼듯 중얼거린 지민이 어거스트까지 신호등 하나만을 남겨둔 순간이었다.



“세 번이나 길거리에서 만나면 그건 운명이라던데….”

“…….”

“잘 지냈어요? 지민.”



 시몬이 티 없이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누가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했어. 지민은 들고 있는 커피를 던져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에이씨, 중얼거리며 시몬의 뒤로 보이는 어거스트 타워를 흘끔 쳐다본 다음 발걸음을 돌렸다. 미친 파파라치와 상대하느니 한 블록을 빙 돌아가는 수고를 선택한 순간이었다.



“잠시만, 억!”



 클락션이 빵 길게 울렸다. 빨간 불이 켜진 도로를 겁도 없이 질주한 시몬이 순식간에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대낮부터 교통사고 현장 목격자가 된 지민이 꽥 비명을 질렀다.



“미쳤어요!?”

“주, 죽을 뻔 했네요. 그래도 괜찮습니다. 워낙 튼튼해서. 뼈 한 두 개쯤 부러져도 괜찮더라고요. 그리고 뉴욕에서 차 사고쯤이야 아침인사 같은 거죠. 아 괜찮아요.”



 나오려는 차 주인에게 나오지 않아도 된다는 손짓을 보인 시몬이 이내 몸을 툭툭 털었다. 저, 정말 괜찮으세요? 아무렇지 않은 시몬과 달리 지민이 기겁하며 시몬의 머리를 가리켰다. 주르륵 뜨끈한 액체가 그의 머리에서 한 줄기 흘러내렸다.



“피, 피가…!”

“아.”



 시몬은 손등으로 피를 훔치더니 땀이라도 닦듯 손수건으로 얼굴을 훔쳤다. 병원 가셔야 되는 거 같은데. 애, 앰뷸런스를 빨리. 더듬더듬 지민이 폰을 들자 시몬이 말렸다. 피를 훔치며 다정하게 씩 웃는 장면은 호러였다.



“괜찮습니다. 이 정도는 까진 거죠, 그냥. 이렇게라도 다시 대화를 하게 돼서 반갑습니다. 시간 내주시면…잠시만,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스캔들 관련 인터뷰 아닙니다! 당신이랑 미스터 하트만, 아니 둘이 약혼을 한다 해도 기사 한 조각 안 냅니다! 진심이에요!”



 냉담하게 신호를 건너려는 지민의 앞길을 시몬이 가로막았다. 차에 치이면서까지 남의 사생활을 캐는 게 파파라치의 직업정신이란 말인가? 그의 눈동자는 절박했다. 머리가 심하게 다친 거 같진 않은데. 한숨을 내쉰 지민은 반쯤 포기했다. 피까지 칠칠 흘리면서 주장하는 기자의 의욕은 지민의 도망치려는 의지보다 높았다.



“…그럼 뭔데요?”

“시간이 좀 걸리는 이야기이긴 한데 여기 제 명함….”

“이게 뭐하는 짓입니까!”



 헐레벌떡 뛰어든 인물은 옆구리에 선물박스를 끼고 있었다. 명함을 받던 지민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진? 거친 숨소리를 헉헉거리며 진은 지민부터 빼앗듯 잡아당겨 뒤로 숨겼다. 노려보는 눈초리에도 시몬은 천연덕스럽게 인사했다.



“오랜만이군요, 진. 그동안 잘 지냈….”

“어서 들어가요, 지민.”



 진이 유례없이 냉담하게 잘랐다. 아니,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시몬이 다급하게 진의 팔을 붙잡았다. 선물박스를 옆구리에 가득 끼고 있는 진이 팔랑거리며 떨쳐냈으나, 단단하게 붙잡은 시몬은 감기 바이러스보다 더 끈질겼다.



“지금 이거 안 놓습니까? 어어, 안 놔요?”

“진, 오해입니다. 저는 고작 인터뷰만 요청 드렸을 뿐이라고요.”

“그 인터뷰가 문제죠! 비켜주시죠. 일이 아주 많거든요. 오전부터 당신을 신고해야 해서요. 아 놔요! 이거 박스 떨어지면 당신의 목도 떨어지는 거 알고 이러시는 겁니까?”

“물론이죠. 하지만 박스가 떨어지면 당신의 목이 떨어진다는 건 모든 뉴욕 시민이 알 겁니다.”

“뭐라고요!”



 경찰을 부르네 마네 한바탕 소란이 일어나니 수군거리는 시선이 모여들었다. 지민은 사태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피를 줄줄 흘리는 파파라치며, 처음으로 화를 내는 진이며, 차에 치인 건 시몬인데 제 머리가 핑글핑글 돌았다. 아냐, 이럴 때가 아니야. 지민은 시간을 확인하고 멀어지는 정신을 붙잡아왔다.



“선배님, 선배님 지금 5분 남았어요. 진정, 진정하세요! 일단 출근해요.”



 지민이 열을 내느라 귀가 붉어진 진을 이끌었다. 뒤에 남겨진 시몬을 향해서는 칼같이 잘랐다. 다음부터는 이렇게 찾아오지 마세요. 시몬이 무어라무어라 크게 외쳤지만 빵빵거리는 도로를 가르며 진을 이끌고 뛰느라 제대로 듣지 못했다. 아마 대충 들리는 소리를 조합하면 다음에 잘 부탁한다는 말인 거 같다. 숟가락으로라도 벽을 파서 탈옥할 것만 같은 끈질긴 정신에 지민이 혀를 내둘렀다. 진이 어림없다는 듯 코웃음 쳤다.



“오늘부로 감옥 들어갈 사람이 다음은 무슨.”

“선배님 그런데 어떻게 아는 사이인 거예요?”



 고작 파파라치 한 명의 얼굴을 진이 알고 있을 필요는 없다. 커다란 과자조각인 어거스트에 달라붙는 사람은 어떤 형태로든 많았다. 기자든, 정치가든, 같은 사업가든. 스캔들이 터질 때마다 터지도록 불이 나던 전화기를 생각하면 이해가 쉬웠다.



“예전부터 줄기차게 쫓아다니는 기자인데, 어후 아직도 이러고 있을 줄은 몰랐네요.”

“예전부터요?”

“처음 입사했을 때, 아 딱 지금 지민만큼 다녔을 때요.”



 5개월 정도 됐을 때였나. 진은 진저리를 치며 끔찍한 만남을 설명했다.



“그때 갑자기 나타나선 인터뷰 하나만 해달라고 지금처럼 부탁 받았었어요. 예술계 폐단이라나 뭐라나. 켈링턴 아트스쿨 학생 사망사건이랑 뭐, 아무튼 어거스트랑 관련 없는 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계속 하는 거예요. 그땐 슈가 스튜디오도 없었는데 용케 찾아와선. 핵전쟁이 나면 살아남는 건 바퀴벌레랑 파파라치가 분명하다니까요.”



 윤기가 취임하며 입사한 진의 경력을 계산하면 최소 3년은 쫓아다녔다는 거다. 지민이 미간을 모았다.



“뭔가…좀 복잡한 거 같아요. 사실 저는 단순한 파파라치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냥 무시해요. 안 그래도 영화 만들고 있는데 괜히 꼬리 잡히면 좋을 거 없어요. 앞으로 오면 받아주지 말고 바로 나한테 전화해요. 그때야말로 진짜 신고해버릴 테니까.”

“그래도 괜찮을까요…?”

“걱정 마요, 지민. 원래 그런 원대한 꿈 가진 언론인도 몇 명 있는 법이죠. 레이첼한테도 달라붙었다고 했어요. 지금은 레이첼 머리카락만 봐도 설설 피하지만요.”



 금세 지민이 순수하게 감탄했다. 평범한 삶을 사는 소시민에겐 기자가 쓰는 먼 어거스트 의혹보다 가까운 사람의 경험담이 흥미 있고 그런 거다.



“레이첼한테도요? 와 레이첼, 어떻게 떼어낸 걸까요?”

“음, 글쎄요. 나도 사실 레이첼이 해결해줬거든요. 타임지에 전화라도 넣었나.”

“타임지요? 지난번에 시몬은 뉴욕 글로브에 다닌다고 했는데요?”

“그건 처음 들어보는 신문사인데요?”



 그 순간 지민은 아주 조그마한 회사라며 넉살 좋게 웃던 시몬을 떠올렸고, 진은 어느 날 깔끔한 어조로 이제 됐으니 편하게 다녀요, 하고 툭 말하던 레이첼을 떠올렸다. 두 사람은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경찰을 부른다는 말에 눈 하나 꿈쩍 않던 기자를 납득했다. 그랬구나…. 지민이 헛기침을 큼큼, 하며 말했다.



“선배님 짐 나눠서 들어드릴게요.”

“아니에요. 커피 들고 있는데. 그리고 어차피 이거 작은 거 하나밖에 없는 걸요. 나는 도움이 못 돼서 미안해요, 지민.”

“무슨 말씀이에요, 선배님! 존재 자체만으로도 힘이 되는 걸요. 진이 없었다면 전 진작 캘리포니아로 건너가서 오렌지나무나 심고 있었을 거예요.”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당연하죠!”



 하트공장은 오늘도 빼먹지 않고 기계를 돌렸다. 나도 진짜 지민밖에 없어요. 진이 양팔을 넓게 벌리고 뜨거운 포옹을 권했다. 커피는 흔들리지 않는 놀라운 균형감각을 선보이며 지민은 익숙하게 펼쳐진 품에 망설임 없이 뛰어들었다. 진이 분위기에 심취해 크흑 감격의 눈물을 삼키듯 말했다.



“그때 피자집에서 어떻게든 거절했어야 하는데, 하 앞으로는 나만 믿어요. 다신 그런 일 없을 거예요. 캘리포니아 따위 이제 아무도 가지 말아요.”



 선배님 말이 다 맞다며 열심히 끄덕거리던 지민이 멈칫했다. 수상한 단어가 두 개 있었다. 피자집? 캘리포니아? 연관성 없는 두 단어는 한 가지 상황에서 유일하게 연결고리를 갖는다. 무섭도록 등을 타고 흐르는 찝찝함에 지민이 진의 어깨를 두들겨 밀어냈다. 선배님 잠깐, 잠깐만요.



“그게 무슨 소리에요? 뭘 거절해요? 피자집에서요?”



 진은 아뿔싸, 급히 입을 닫았다. 분위기에 취해 아픈 양심 밑바닥에 고이 묻어놓았던 진실까지 얼결에 꺼내버렸다. 그러나 이미 막내비서의 눈은 먹잇감을 낚아챈 한 마리의 사냥꾼처럼 끝이 올라가 있었다.



“그게 말이죠, 지민….”



 완벽한 휴가계획을 처부순 악당이 민윤기라는 사실을 대체 어떻게 순화하면 좋을까. 진의 등이 식은땀으로 젖어 들어갔다.



“그때 말이죠…음 그러니까….”

“여기서 약혼식이라도 해?”



 삐딱한 목소리가 훼방을 놓았다. 목까지 올라오는 하얀 니트에 검은 코트를 걸친 윤기였다. 진은 난생처음으로 윤기가 반가웠다. 나쁜 놈이라도 살아남을 사람은 어떻게든 살아남는가 보다. 그러나 구원자치곤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은 광경을 발견한 듯 비틀린 입매가 다소 까칠해보였다. 진이 환하게 인사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미스터 윤!



“버튼이나 눌러.”



 진은 누구보다 빠르게 버튼을 누르고 윤기의 뒤쪽으로 냉큼 숨었다. 둘의 문제에서 빠질 수 있는 기회는 바로 지금이었다. 혼란에 빠진 지민의 머릿속에 오늘 아침 준비한 인사는 남아있지 않았다. 피자집에서 뭘 거절한다는 거지…? 그러나 고민하기도 전 윤기가 무신경하게 말했다.



“가서 도넛 사와.”

“지금 바로요?”

“어.”



 보통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서부터 주문을 쏟아내는데 오늘은 예외다. 지민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거리며 네, 했다. 돌아나가려는데 윤기가 덥석 지민의 팔목을 붙잡았다.



“너 말고.”

“네?”



 윤기의 시선이 진을 향해 돌아간다.



“네가 다녀와.”

“어, 미스터 윤 그거 제가 빨리 다녀올 수 있어요. 커피도 같이 사올까요?”

“도넛 사는데 사람이 둘이나 필요해? 넌 안에서 버튼 눌러.”



 왜 또 심술이지. 뭐가 문제여서. 간밤에는 애틋하게 끌어안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까칠해졌다. 어거스트 건물 공기에 이상한 물질이 섞여있는 것도 아니고. 대체 왜 사람이 손바닥 뒤집듯 바뀌는 거야. 지민이 어이없어하며 콧잔등을 찡긋거리는 사이, 진이 눈치껏 끼어들었다.



“지민, 내가 다녀올게요.”



 제발 내가 다녀오게 해줘요. 무언가 일이 벌어질 거 같은 엘리베이터에 추호도 같이 타고 싶지 않다. 이 이상 아무 말 하지 말라는 진의 절박한 마음을 모르는 지민은 순수한 호의로 손을 뻗어왔다.



“그럼 상자는 가져다 놓을까요?”

“괜찮아요. 어차피 얼마 안 무거운 걸요. 엘리베이터 왔네요, 다녀오겠습니다.”



 스르르 엘리베이터 문 사이로 윤기와 지민이 사라질 때까지 진은 웃는 표정을 유지했다. 닫히자마자 말쑥한 얼굴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리더니 결국 무표정으로 떨어졌다. 그만두려면 역시 입사 하자마자 했어야 했다. 질투할 거리가 어디 있다고. 저러다 나중에 포크까지 질투하는 거 아니야. 피곤이 몰려온 뻐근한 뒷목을 문질렀다. 먹고 살기 힘들다.









 서로 마음을 확인한 사람 사이에선 어떤 대화가 오갈까. 너무나도 단순한 퀴즈의 정답은 누구나 알 것이다. 그러나 어정쩡하게 반만 고백한 사이라면? 지민은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마자 숨 막히는 어색함을 느꼈다. 하얀 얼굴을 보고 있자니 어젯밤 창백한 안색이 떠오르고, 둘 다 옷이 벗겨지기 직전까지 갔던 상황이 떠올라서 좀체 정리가 안 됐다. 저기요 미스터 윤 일단은 평소처럼 지내기로 할까요, 지민은 딱딱한 제안도 생각해보다 속으로 손톱을 물어뜯었다. 차라리 좋아 죽겠으니 우리 사귀자 제안하는 편이 편했을지도 모른다. 지민은 한참만에야 침을 꿀꺽 삼키고 아무렇지 않게 팔짱을 끼고 있는 윤기를 향해 인사를 건넸다.



“오늘은 몸 상태 좀 괜찮으세요?”



 휙 윤기가 뒤를 돌아본다. 시선이 닿았다. 그리고 우습게도 지민의 고민은 거기서 끝이 났다. 확 좁혀지는 거리. 순식간에 핏줄이 도드라진 손에 양볼을 잡힌 지민이 허우적거리며 다가오는 어깨를 막았다.



“잠깐, 잠깐, 잠깐만요!”

“왜.”

“무슨 키, 키스를 아무 때나 다 해요!?”

“어딜 봐서 아무 때나야. 사람도 내쫓았는데. 공간도 다 막혀있고.”



 나름 맞는 주장이다. 보는 눈은 없으며, 내쫓긴 누군가는 열심히 맨해튼 거리를 돌아다니고 있을 터였다. 근데 일단 이거는 좀 놓, 놓을까요? 허리를 뒤로 쑥 빼 윤기의 손아귀에서 탈출한 지민이 놀란 로봇처럼 삐빅거렸다. 그딴 건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반박하기엔 심장이 과하게 팔딱팔딱 뛰었다.



“엘리베이터 안이 평범한 장소는 아니잖아요!”

“그럼 어디가 평범한 장소인데. 다음부턴 참고하지.”



 윤기가 가볍게 말을 얹었다.



“뭐 원한다면 분위기 잡는 클래식이라도 틀어주고.”

“그런 건 필요 없, 아니 이게 아니라 기다려주신다고 했잖아요.”



 에러를 해결한 지민이 마침내 제대로 된 반박을 했다. 한밤중의 대답을 까먹은 건 아닌지 윤기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랬지. 그는 연이어 표정 하나 안변하고 덧붙였다.



“그렇다고 있는 기회를 그냥 날릴 수는 없잖아.”



 너랑 나랑 둘만 있는데. 지민은 사기라도 당한 것처럼 입을 떡 벌렸다. 아무리 뻔뻔하다, 뻔뻔하다 했더니 이 정도로 뻔뻔할 줄은 몰랐다. 어이가 사라진 지민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게 뭐예요. 그럼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한다는 거잖아요.”

“그렇게 들렸다면 유감이야.”

“아무튼 이런 곳에서 그런 건 안 돼요.”

“그럼 장소 다르면 가능해?”



 이제 와서 거절한다고 해봐야. 단호하게 저리 가라 외치기엔 이미 너무 긴 강을 떠내려와버렸다. 게다가 이미 한 번은 허락하고 심지어는 어깨에 매달리기도 했다. 지민은 솔직한 심정으로 몇 번이나 입술을 겹친 경험들이 싫진 않았다. 부정도 긍정도 못한 애매모호한 답만 털어놓았다. 장소가 다르면, 그렇게 되면, 어.



“글…쎄요?”

“후회되네. 진이 아니라 널 내보내고 같이 땡땡이를 쳤어야 하는 건데.”



 상사의 양심 팔아먹은 비행선언을 듣고 있는 지민의 심정은 꽤나 복잡했다. 비서의 의무로 말려야 하나, 아니면 그래도 키스할 마음은 없다 말해야 하나. 윤기가 한 발작 물러났다.



“그럼 작은 상이라도 줘. 내가 안 할 테니까.”

“…뭘요?”

“그건 니가 알아서 정해.”



 해주는 거라면. 무작정 달려드는 것보다 낫다. 개인집무실로 불리는 게 아니면 둘만 있을 시간이 없기도 하고, 언제 또 편하게 윤기를 대할 수 있을지도 모르고. 이러니저러니 해도 새벽 꾸역꾸역 눈밭을 헤집고 나가 그를 혼자 놔둔 게 마음에 걸리긴 했다. 윤기가 갈등하는 지민을 냉큼 눈치 채고는 쑥 치고 들어왔다. 언제 까칠했냐는 듯 또 연약해져있었다.



“좀 봐줘. 착하게 니 말 잘 듣고 있잖아.”

“…….”

“안 돼?”



 아, 그 앞에서 거절이 존재할 수 없다. 윤기는 지민의 약한 부분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지민은 이 감정을 뭐라 정의할 수 없었다. 동정심도 아닌 것이, 사랑도 아닌 거 같은 게 그냥 저런 윤기만 보면 홀린 것처럼 들어주고 만다.



“어, 그러면.”



 결과적으로 지민은 고민의 고민 끝에 커피를 한 손으로 들고 양팔을 벌렸다. 하, 윤기가 어이없다는 듯 팔짱을 꼈다. 무슨 뜻인지 너무 잘 알겠다. 좀 너무한다. 아무리 해달라고는 했지만.



“내가 애야?”

“왜요? 이게 꼭 그런 의미는 아니잖아요?”

“다시 1층 누르는 건 어때? 차 밖에 있어.”

“안 돼요.”



 짐짓 실망한 기색을 대놓고 드러내는 윤기는 그럼에도 가만히 있었다. 그래, 이거만도 감지덕지다. 지민은 윤기의 등에 어제처럼 느리게 팔을 둘렀다. 보송보송한 샤워가운대신 검은 코트는 아직까지 바깥의 찬 기운이 미약하게 남아있었다. 어제는 어떻게 한 거지? 그때의 박지민은 확실히 대단했다. 멀쩡한 정신에서 이루어진 어정쩡한 포옹은 어색하기 그지없어서 뛰기 싫다 울부짖는 번지점프대 위 누군가 진정시키며 안아주는 자세로 흔히 볼 수 있을 법했다. 이왕 망한 거 어쩔 수 없다 생각하며 지민이 어설프게 눈을 휜 채 윤기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줬다.



“…좀 이상하죠….”

“…….”

“근데 시간 지나면 괜찮을 거예요! 아직 우리가 한지 얼마 안 됐잖아요.”



 미래를 당연시하는, 어쩌면 지극히 평범한 대화. 윤기는 또 속이 미묘하게 울렁거리면서 뜨거워졌다. 고심하면서 망설이더니 결국에 그는 또 친절해진다. 언제부터 자신이 고작 말 한마디에 흔들렸나싶어 황당하다가도 어쩔 수 없단 결론을 내렸다. 이런 것들이 모이고 모여 끝내 그의 마음을 집어삼켰으니까. 아무 말 없는 윤기를 두고 머쓱해진 지민이 숫자판을 눈짓하며 말했다.



“어, 그, 시간이 쫌….”



 벌써 백층을 넘어가고 있었다. 안전하게 지금 떨어지면 무사히 최상층에 도착할 거다. 지민이 느리게 떨어진 그 순간, 윤기가 다시 붙어왔다. 심장과 심장이 맞닿는 게 아닌 입술과 입술이 맞닿는 방식으로. 매끄럽게 파고든 혀는 순식간에 지민을 점령했다. 입구를 덮고 있는 홀더가 아니었다면 이미 지민의 손에서 흔들린 커피가 프라다 코트 위로 몽땅 쏟아졌을 터였다.


 지금 하면 곧 도착할 텐데. 지민은 이성적으로 생각하면서도 윤기를 막을 수 없었다. 요상하게 키스만하면 끈 달린 인형으로 변한다. 당황하여 몇 번 꿈틀거리던 손은 조종이라도 당하듯 서서히 올라가 등에 안착했다. 하면 안 되는데, 지금은 안 되는데. 머리 혼자 생각하고 몸은 멈추지 못하는 게 꼭 중독 초기증상 같았다. 짧은 사이에도 각도를 바꿔 몇 번이나 달려드니 점차 밀리며 결국 구석 벽에 등이 닿았다.


 띵, 문이 열립니다. 친절한 안내음성에 지민이 어느새 감고 있던 눈을 팍 뜨고 윤기가 입술을 뗐다. 바깥의 환한 빛이 네모난 박스 안을 비췄다. 헉, 뒤늦게 정신을 차린 지민이 윤기를 팍 밀쳐냈다. 안 돼. 레이첼의 결근을 간절히 염원하며, 아니면 엘리베이터의 문이 1초라도 더 늦게 열리길 빌며 입구를 바라봤으나 안타깝게도 그곳엔 금발의 미녀가 평소와 같이 서있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미스터 윤.”



 빈틈없는 그녀의 말 앞에 짧은 공백이 맴돌았다. 윤기는 지민의 손에서 커피를 쏙 빼고 걸어나가며 평범하게 말했다.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회의 30분 앞당겨서 진행시켜.”

“네.”

“진한테 전화해서 시킨 건 사지 말고 돌아오라고 하고. 그리고 투자 관련으로 확인할 거 있으니까 따라 들어와.”



 레이첼은 마찬가지로 눈 하나 깜짝 않고 윤기를 따라 걸어갔다. 홀로 사무실에 남겨진 지민이 헝클어진 넥타이를 정리하지도 못한 채 생각했다. 상상키스였나…?








 지민은 닫힌 윤기의 집무실을 초조하게 바라보았다. 달칵 열리고 레이첼이 나오자마자 시선이 마주친다. 파드득 고개를 돌려 괜히 마우스를 딸깍거리다, 의자에 앉는 소리가 들리기 무섭게 지민이 벌떡 일어나 레이첼의 주변을 서성거렸다. 레이첼은 맴돌 건 말건 곧장 타자를 두드렸다.



“할 말 있으면 해요.”

“어…아, 아침은 잘 드셨어요?”

“다시 다이어트 시작했어요.”

“…….”

“아침 일 때문이라면 걱정 마요.”



 타자를 치는 손을 유지하는 그녀는 시원시원한 화법을 구사했다. 놀란 강아지가 깨갱거리듯 휘청거린 지민은 눈을 빙글빙글 굴리며 같잖은 연기력을 발휘했다.



“레이첼이 생각하는 그런 건 아, 아닐걸요?”

“…….”

“…봤어요?”

“굳이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으니까 말하지 말아요.”



 지민은 자동응답기처럼 변명을 시작했다. 미스터 윤이랑은 어, 오래된 건 아니구요. 그냥 어쩌다보니까 그렇게 됐는데, 아 라스베가스에선 절대 아무런 것도 없었구요. 정말 거짓말 아니었어요. 그 기사는 다 뻥이에요. 옷 가져다놓는다는 것도 얼굴 보려고 한 게 아니라 레이첼이 많이 피곤해보이기도 하고 진짜 도와드리고 싶어서. 스스로도 왜 변명을 하는지 모른 채 열심히 조잘거리는 막내비서를 긴 한숨을 쉬며 시선을 옮긴 레이첼이 머리를 쓸어 넘겼다.



“잘 됐네요. 행복하게 둘이 살아봐요. 다른 말은 필요 없죠? 있어도 이미 지민한텐 늦은 거 같지만.”

“아닌데요!? 아직 사귀는 거 아니에요!”



 키스도 하고 집도 드나들면서 사귀진 않는단다. 잠깐 타자를 치던 손가락이 멈춘다. 집착하고 도망가고 난리를 피울 줄 알았더니 생각보다 무난하게 시작하고 있는 듯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오늘 윤기가 내린 일을 처리하고 빨리 퇴근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다. 사귀는 건 아닌데, 어 좀 그냥. 여전히 쓸데없는 말을 빙빙 돌리고 있는 막내비서의 입을 레이첼은 한 마디로 다물게 했다.



“진도 알아요.”

“네에!?”

“애인이 회장이라고 월급 무노동으로 받으려는 건 아니죠? 이거 부탁해요. 기획부에 가져다줘요. 가능한 빨리 돌아와요. 진 오면 외근 나가야하니깐.”



 여기요. 레이첼이 종이뭉치를 지민의 손에 넘겼다. 레이첼 애인은 아닌데…. 지민은 아침 어색하게 웃던 진의 표정을 떠올리고 엘리베이터 벽에 머리를 콩콩 박았다. 좀 죽고 싶다. 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