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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짐] 아스팔트정글 29

by 토페 posted Jan 16,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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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ProleteR - Throw It Back (Instrumental)>









 성인의 권장수면시간은 7시간이다. 어거스트에 입사한 이례로 지민은 그 시간을 제대로 지킨 적이 없다. 입사 초엔 빌어먹을 감상문이 내내 괴롭히더니, 지금은 어거스트의 주인이 밤잠을 삭제했다. 일요일, 지민은 미리 감상문을 써놓기 위해 틀어놓은 영화 두 편중 아무 스토리도 기억나지 않았다. 집중 좀 할라치면 그 날의 상황과 섞여 영화 속 수트를 입고 총을 겨눈 흑인 주인공이 커피는 네가 마신 게 맛있다는 대사를 읊고 갔다. 감상문을 써야했다면 단 한 문장으로 도배했을 것이다. 월요일 안 왔으면.


 이제 알게 됐다. 그는 화려하고도 커다란 성에 갇혀 누가 자신을 꺼내주길 기다리고 있었다. 성의 이름은 외로움이다. 우연히 그 앞을 지나가던 지민이 노크를 했고, 윤기는 열쇠로 잠긴 방을 따고 나왔다. 까칠하고 독선적이라는 소문이 달려있던 성의 주인은 솔직하게 많이 외롭고 더는 외롭고 싶지 않다 절절하게 말할 줄도 아는 인물이었다.


 지민은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내가 무슨 백마 탄 왕자도 아니고. 세상에서 정의해놓은 백마 탄 왕자의 자리는 아마 민윤기에게 더 어울릴 거다. 단순히 그가 처연하고 측은해 보인다 해서 무작정 원하는 걸 다 내어줄 수는 없다. 동정은 사랑이 되지 못한다. 연애에 미숙한 지민이라도 그런 기본적인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동정과 사랑은 어떻게 구분하지? 아니 그전에 민윤기도 이게 사랑인지 뭔지 모른다했다.


 유난히 상쾌한 날씨를 자랑하는 월요일, 사무실에 내린 지민은 다소 파리한 안색으로 인사했다. 좋은 아침이에요. 일간지를 들고 있던 진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지민을 발견하고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왔어요? 오늘 날씨 굉장히 좋죠?”

“네, 투명한 유리 같던 걸요?”

“참, 이거 봤어요?”



 진이 일간지를 팔락팔락 흔든다. 지민은 순진한 얼굴로 도리도리 저었다.



“아뇨, 오늘 레이첼이 일간지 사올 필요 없다 해서 바로 왔거든요. 왜요? 뭐가 실렸어요?”

“너무 말도 안 되는 기사가 실린 거 있죠.”



 진이 다시금 지면을 보고 크게 웃었다. 어서 와서 봐요, 진짜 웃겨요. 진이 기사를 보고 저리 크게 웃는 건 처음 본다. 궁금증을 가득 띄운 지민은 날래게 커피를 내려놓고 재킷을 벗어 걸었다. 뭔데요, 뭔데요. 활기차게 웃으며 달려가 진의 옆에 서서 일간지를 확인했다. 넘길 필요도 없이 일면이었다.



“아니 이걸 믿는 바보들이 존재하긴 할까요. 다들 상상력이 풍부한 게 기자가 아니라 작가네요.”

“…….”

“어쩌다 여기는 둘만 간 거예요? 안 봐도 미스터 윤 오다가 또 변덕이라도 부린 거 같은데. 비서랑 둘이 있는 거도 어쩜 이렇게 조작할 수가 있을까요.”



 현재 지민이 어떤 일을 하는지 안다면 충분히 얼굴이 안 나온 사람이 누군지 추측할 수 있는 기사였다. 하여간 이 하이에나들 먹이 하나 물면 정신을 못 차리고. 진이 혀를 쯧쯧 찼다. 일면에 실린 기사 타이틀을 확인한 지민의 입꼬리가 서서히 떨어지다 마지막에는 경련이 일었다. 진은 그런 지민을 알지 못하고 재미있지 않냐 동의를 구하듯 어깨를 두드렸다.



“살다보니까 이런 일도 다 있네요. 지민 일생일대의 한번 일어날까 말까한 일 아니에요, 이거.”

“…….”

“응? 지민?”



 진은 반응이 없는 지민을 확인했다. 지민은 동상처럼 쩍 굳어 일면지에 눈을 박고 있었다. 생각보다 놀랐나. 아마 지민은 자신의 생각보다 더 여린 감성의 소유자였나 보다. 하긴 매일 사표를 던지고 싶게 만드는 상사랑 스캔들이 났는데. 진이 이딴 허무맹랑한 소식은 아무도 믿지 않는다 위로를 해줄 참이었다. 굳어있던 지민이 진의 손에서 일면지를 팍 채갔다.



“이, 이거 진짜에요? 진짜 신문인 거예요?”

“그럼요. 레이첼이 아침에 사왔어요.”

“진짜요? 영화표 친구 아니에요? 갑판대에서 실제로 이걸 팔고 있어요?”



 영화표 친구가 뭐지. 팝콘? 콜라?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한 진은 횡설수설하는 지민의 등을 토닥거려주었다.



“괜찮아요, 지민? 많이 놀란 거 같은데.”



 몇 살 차이는 안 나더라도 인생선배의 지혜를 발휘할 때다. 어차피 여기 나온 사람이 지민인 건 여기 사무실에 들락거리는 사람만 알 거예요, 그런 멘트를 진이 장전했다. 그 순간 덜덜거리는 손으로 일간지를 쥐고 있던 지민이 최면에서 깨어났다. 잔뜩 억울해하며 외쳤다.



“이때는 안 했는데!”



 이때 진짜 분수쇼만 봤는데! 아무것도 안 했는데! 억울해죽겠다. 라스베가스에서 뭘 했다고. 해봤자 사진 찍어준 거 밖에 없는데. 그날 밤, 라스베가스에서 무슨 일이 같은 음흉한 내용 비디오의 주인공이라도 된 거 같다. 더 억울한 점은 스캔들에 실린 사진이 찍힌 시점이 정말 쇼가 진행되는 와중이라는 거다. 맹세코 지민은 분수쇼를 구경하는 동안 윤기의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 사기꾼! 지민은 일간지가 기자의 멱살이라도 되는 양 잡고 탈탈 흔들었다.



“와, 말도 안 돼. 대체 어디서 찍은 거야. 아무도 못 봤는데, 진짜.”



 지민은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뭐? 어거스트 대표가 동성의 애인과 데이트를 즐기고 있는 모습을 포착? 둘은 사랑스럽게 서로를 쳐다 봐? 즐거운 시간을 보내? 도박이 즐거운 추억이냐? 지민은 마지막 줄까지 빠르게 읽어 내린 뒤 다소 조용해진 공기를 알아차렸다. 아까까지만 해도 신나게 웃고 있던 진이 쩡 굳어있었다.



“아 선배님 죄송해요. 제가 순간적으로 막 흥분해서….”

“…….”

“…진? 괜찮으세요?”



 진은 지민의 말이 동굴 속에서 전해지는 이명 효과를 체험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때는 안 했는데…이때는…이때는…. 진은 차마 입속을 맴도는 다음 질문을 할 수 없었다. 이때는 하지 않았으면, 그럼 지금은요, 지민….



“갑자기 얼굴빛이 안 좋아지….”

“준비는 다 끝낸 거예요?”



 윤기의 집무실에서 나온 레이첼이 멀뚱히 서있는 두 명을 지적했다. 한 명은 유령이라도 만난 듯 혼이 빠져있었고, 다른 한 명은 일간지를 구기고 있었다.



“벌써 10분밖에 안 남은 거예요? 안 돼.”



 지민이 꼬리에 불붙은 당나귀처럼 일간지를 들고 집무실로 뛰어 들어갔다. 진이 버벅거리며 레이첼을 불렀다.



“…내가 잘못 들은 거겠죠?”

“뭘 들었는데요. 그 전에 몸은 움직이면서 말해요.”

“정리하자면 어려운데, 차라리 아프리카에서 이글루 발견됐다는 게 신빙성 있는 소리였어요.”

“진, 아프리카로 이직하고 싶어요? 이 서류 맡길게요.”

“설마…레이첼 알고 있었어요?”



 레이첼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서류를 떠안은 진이 경악했다.



“대체 언제부터인 거예요! 어떻게 나만 모르고 있을 수 있죠? 아니 어떻게…대체 어느 틈에? 이 직업을 유지하면서 연애를 할 수 있다니!”

“그러니 가까운 사람 찾았나 보죠.”

“아냐 거짓말일거에요. 거짓말.”



 레이첼은 친절히 윤기 도착까지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알렸다. 연애 말고 산소호흡기 뗄 시간 다가와요. 빨리 움직여요.









 하늘 높은 줄 모르는 땅값을 자랑하는 뉴욕 웨스트체트터 카운티의 부르주아 저택거리는 아침부터 남다르다. 윤기는 아침마다 집을 관리하는 고용인들로부터 짧은 보고를 받았다. 새로 바꾼 식사메뉴는 입에 맞으십니까, 그런 종류의 멘트가 반복된다. 그러나 그날은 예외였다. 차량을 관리하는 고용인이 다소 의아해하며 물건 몇 가지를 들고 윤기에게 다가왔다.



“이런 걸 찾았습니다.”



 커다란 젤리통. 초콜릿, 막대사탕, 과일맛 비타민, 포테이토 과자. 고용인은 도무지 이 주전부리들과 윤기를 연관 지을 수 없었다. 윤기가 입에 델리도 없는 간식들을 주제로도 보고를 올려도 되는 건가 고민했다. 커다란 테이블에 홀로 앉아 식사를 하던 윤기가 간식 뭉치를 보고 포크질을 멈췄다.



“…어디서 찾은 거지?”

“주말에 몰고 나가신 차의 뒷좌석에 있었습니다.”

“아아 뒷좌석.”



 그의 비서는 고작 그런 작은 사연하나에도 자신이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샐러드를 먹던 윤기는 헛웃음을 토해내며 식기를 내려놓았다. 고용인은 당연히도 윤기가 버리라는 명령을 내리리라 예측했다. 그러나 그의 고용주는 뚫어지게 물건들을 바라보더니 색다른 발언을 남겼다. 집에 잘 놔두란다. 더불어 윤기는 사탕봉지를 가리켰다.



“그건 지금 주고.”



 고용인이 기이하다는 눈길과 함께 사탕봉지를 내밀었다. 윤기는 부스럭거리는 봉지 안 막대사탕 하나를 집어 입에 밀어 넣었다. 아 끔찍하게 달다. 각종 과일 향이 섞여 달아빠진 사탕은 윤기의 입맛과 정반대였다. 온갖 악평이 차고 넘쳤다. 그러나 그는 섬세한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끝까지 다 씹어먹고 사탕을 하나 더 꺼냈다. 개인요리사가 천연재료만을 사용해 만든 조식은 고작 공장에서 진공 포장된 막대사탕에 밀려 싸늘히 식어가고 있었다.


 저는 아직 잘 모르겠어요. 고민할 시간이 필요해요. 주말 내내 윤기는 그 장면에 잡혀있었다. 달아오른 볼로 박지민은 그렇게 말했다. 기다려 달라고. 둔한 건지, 아니면 믿는 구석이라도 있는 건지 이러면서 시간을 달라는 요청 따위를 하면 퍽이나 잘도 먹혀들겠다. 그래도 어쩌겠나. 기다려준다 대답해놨는데. 윤기는 대기하고 있던 기사에게 차를 출발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기다리는 방법은 꽤나 단순하다. 평소와 같으면 된다.



“인사담당자 누구야. 일할 사람을 뽑아 놓으라고 했더니 왜 머릿속에 뇌 대신 해파리를 키우는 바이러스 감염자들을 데려온 거지? 슈가 스튜디오는 동물원이 아니라는 걸 까먹었나? 뽑은 이유 100분 동안 브리핑할 수 있으면 안 자른다고 설명해주고 올려 보내.”



 내가 사업가인지 해파리 농장 주인인지 헷갈리고 있으니까. 윤기는 몇 가지 잔소리와 심부름을 더 쏟아내고 커피를 받아 집무실로 직행하려했다. 뒤통수로 뜨겁게 닿아오는 시선만 아니었다면. 지민은 표정으로 말을 걸고 있었다. 할 말 있어요, 할 말 있어요.



“…넌 들어와.”



 지민이 그 말만을 기다렸다는 듯 냉큼 뒤를 따랐다. 코트를 받은 진은 사라지는 둘을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쳐다보았다. 맙소사, 진짜다. 잿빛으로 굳은 진을 레이첼이 이끌었다. 알았으면 이제 그만 외근 따라와요.






***






“왜.”



 윤기는 책상에 걸터앉아 커피를 입으로 가져갔다. 할 말 있으면 빨리 하라는 태도다. 지민은 재빠르게 윤기 곁으로 다가갔다. 얼굴을 보면 한 가지 생각만 오버랩 되진 않을까 염려하던 일요일의 고민은 부질없는 짓이 되었다. 정말 급했다. 지민이 침을 꼴깍 삼키고 물었다.



“괜찮으세요?”

“아침부터 괜찮지 않아야 할 이유라도 있나?”

“아, 기사 못 보셨어요?”

“뭔 기사.”



 커피만 마신다. 모르니까 저렇게 태연하지. 지민은 바쁘게 책상을 돌아가 아까 본 기사가 실린 신문을 챙겨 윤기에게 내밀었다. 여기 1면 오늘 확인했는데요. 척 보기에도 자극적인 헤드라인을 달고 실린 기사 제목을 윤기가 천천히 소리 내 읽었다.



“어거스트 대표. 동성의 애인과 은밀한 데이트 현장포착.”



 지민은 윤기의 반응을 둘로 예상했다. 하나는 용암보다 뜨겁게 분노하며 신문사를 고소하라 길길이 날뛰는 반응이고, 다른 하나는 만년설보다 차갑게 식은 목소리로 신문사의 존재를 치워버리라 명령하는 거다. 커피 쏟기 전에 미리 달라고 해야 하나.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그는 예상 밖이다. 윤기는 미동도 없이 커피만 홀짝거렸다.



“저따위로 사진을 찍고도 돈을 받는 건가? 양심이 실종됐군.”

“…….”

“나였다면 진작 감옥에 처넣었을 거야.”



 잔뜩 상기되어 윤기를 쫓아 들어온 지민은 맥이 싹 빠져버렸다. 어제 써놓은 일기라도 보듯 눈 하나 까딱 안 한다. 보는 순간 솜털까지 쭈뼛 섰던 자신과 달리 윤기에게 거짓 스캔들은 하찮은 존재인가 보다. 윤기는 한술 더 떠 기사내용까지 쭉쭉 따라 읽어 내려갔다.



“그의 새로운 연인은 평범한 일반인이다. 그들은 서로를 사랑스럽게 쳐다봤으며 행복한 시간을 가졌다, 라고.”



 마지막 문장까지 읽고 능숙하게 비아냥거렸다.



“사진도 못 찍는 주제에 글도 못 쓰다니. 재앙이군. 감옥이 아니라 킬러를 고용해야겠어.”



 혀를 찬 윤기는 신문을 바닥에 아무렇게나 내버렸다. 정신적 타격이라고는 하나도 받지 않은 듯했다. 지민은 푸쉬쉬 식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물론 속으로만. 종이 좀 아무 바닥에나 버리지 말라구요…. 지민은 조용히 떨어진 일간지를 줍고 인사했다. 혹시 시키실 일 없다면 나가봐도 될까요? 성의 없는 태도를 유지하던 윤기가 그제서야 커피를 입에서 뗐다.



“이거 때문에 온 거야?”

“네? 아 저는 미스터 윤 놀라셨을 거 같아서….”



 지민은 머쓱하게 뒷목을 문질렀다. 심장이 발끝 아래로 추락하는 것만 같던 자신 만큼은 아니더라도 놀라긴 할 줄 알았다. 아무리 윤기가 타블로이드를 먹여 살린다는 속설이 돌긴 해도 이런 종류의 스캔들은 처음이었다. 커피를 내려놓은 윤기가 말했다.



“넌 어떤데.”

“뭐가요?”

“내가 놀랐을 까봐 달려왔다며. 넌 보고 어땠냐고.”



 지극히 평범한 일생을 살다 하루아침 1면을 장식해보니 놀라기도 했고, 그런데 그 내용은 온통 거짓말투성이라 억울하고 황당하기도 했고, 괜히 지난밤이 떠올라 흠칫하기도 했고. 말이 정리되지 않은 지민은 어, 하고 눈만 굴렸다. 종합하자면 기자자식 면상 한번 보고 싶다, 정도긴 한데. 윤기는 그런 지민을 빤히 바라보더니 무슨 판단이라도 한 모양이었다.



“무서워?”

“네? 아 전 괜찮아요. 무섭거나 그런 거 아니에요. 저는 얼굴도 안 나왔는걸요. 그리고 솔직히 이때는….”



 부담스러워 죽는 줄 알았고 체할 뻔했다. 지민은 사실을 돌려 포장했다.



“쪼금, 그냥 워크샵 같은 거였잖아요.”



 카드놀이 한 거랑 분수쇼 구경한 거랑 밥 먹은 게 전부였는데. 다 거짓말이니까 억울하기도 하고. 가만 팔짱을 낀 윤기는 리액션이라고는 몰랐다. 목석처럼 가만히 있는 윤기를 상대로 지민은 하나둘 되짚어보자니 다시금 억울함이 차올랐다.



“근데 그때 진짜 아무것도 못 느꼈거든요. 사진 찍히는 지 하나도 몰랐는데. 느끼셨어요?”

“걔네 원래 그래. 투명인간 탐지기는 발명해도 파파라치 탐사기는 평생 발명 못해.”

“그런데 미스터 윤 지난번에는 발견하고….”



 파파라치한테 손으로 욕해서 기사 나셨잖아요. 그런 전적도 있었다. 호화요트 위에서 칵테일을 마시다 찍힌 사진이었다. 선글라스를 끼고 가운데 손가락을 곧게 펴 흔드는 사진 속 윤기는 얄미운 미소를 입가에 걸고 있었다. 덕분에 화난 파파라치가 푼 스캔들 때문에 한동안 사무실 전화벨이 끊이질 않았다. 차마 말할 수가 없어 지민은 아니에요, 하고 말을 마무리했다. 윤기가 미간을 찡그렸다.



“앞으로 그렇게 말할 거면 아예 말을 하지 마.”



 뭐라고 하는 건 똑같다. 네, 하고 지민이 입술을 삐죽거리려는 찰나, 윤기가 서류 가져와, 하듯 평범하게 덧붙였다.



“이제 니가 말하는 거도 다 신경 쓰여.”

“…….”

“말할 거는 끝?”

“…네.”

“나가서 레이첼 외근 끝나고 돌아오자마자 들리라 연락해.”



 지민은 집무실을 나와 제 책상으로 돌아와 앉았다. 주말에 걱정한대로 심장이 터지진 않았다. 지민은 레이첼에게 전화를 걸기 전 중얼중얼거렸다. 고작 그런 말 한 마디에 덜덜 떨 단계는 지났잖아, 대책 없이 굴지 말자. 얼굴 봐도 심장 괜찮았잖아? 나도 민윤기처럼 아무렇지 않게 굴 수 있어. 생각하며 기계적으로 번호를 찍어 눌렀다.



“레이첼 외근 다녀오셔서 미스터 윤이 집무실로 들어오라 하셨어요.”

[…어, 지민 내가 레이첼한테 전해줄까요?]

“헉, 선배님!”



 레이첼과 함께 외근을 나간 진이 너그럽게 허허 웃었다. 괜찮아요, 괜찮아. 아무래도 아침에 기사 본 게 영향이 컸죠? 내가 전해줄게요. 전화를 끊고 지민은 책상에 머리를 찧고 싶었다. 아무나 잡고 하소연이라도 해야 된다. 저기요, 누가 머릿속에서 민윤기 좀 끄집어내주세요.







***






 레이첼은 숨 돌릴 틈도 없이 윤기의 집무실을 노크했다. 들어와. 벌써 한 손가락을 다 채우고도 훌쩍 넘는 근무 경력이 민망하게도 이 유리문 앞만 서면 긴장이 된다. 서류에 대충 싸인을 휘갈기고 있는 윤기를 보자마자 그녀는 알 수 있었다. 그녀의 상사는 심기가 불편하다. 그것도 매우.



“찾으셨다 들었습니다.”

“어디서부터 나온 거야.”



 목적어가 빠져도 레이첼은 알아들었다. 오늘 지민을 하루 종일 얼이 빠져있게 만든 그 기사. 작은 언론사가 그리 대책 없이 어거스트를 공격했을 리는 없다. 믿고 있는 곳이 없다면 하루아침 어거스트의 입김에 증발할 수 있다는 건 그들도 알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레이첼이라도 당장 반나절 사이에 모든 것을 알아내는 건 무리였다. 윤기는 적이 많았으니까.



“…영화사 중 하나인 거 같습니다.”

“누가 네 추측이 궁금하대? 예언가야? 대단하군. 파라오 제사장으로 이직해보는 건 어때?”



 윤기는 신랄하게 비꽜다. 내일은 비라도 오나? 괜한 짜증이라는 걸 알아도 그 엉성한 기사가 그의 신경을 갉작갉작 긁었다. 레이첼은 묵묵히 듣기만 했다. 애초 스케줄을 다 취소하지 않았으면 이런 사진은 없었다, 라스베가스에 따라가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알고 대처하냐 따질 수는 없었다. 대신 그녀는 윤기의 짜증을 피하는 대답을 내뱉었다.



“문제없이 완벽하게 해결하겠습니다.”

“좋아.”



 윤기가 그제야 짜증으로 깊게 패였던 미간을 정리했다. 그리고 아, 하며 한 가지 미션을 더 붙였다.



“기사 낸 곳 적당히 시간 봐서 처리해.”

“…네.”



 레이첼은 생각했다. 사귀지도 않으면서 유난은. 이 정도 크기의 스캔들은 조용히 놔두면 알아서 묻힌다는 건 윤기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하물며 지민이 무슨 한두 살 먹은 아기도 아니고 얼굴도 안 나온 신문기사에 놀라 도망이라도 갈까봐. 여태 스캔들이 터질 때마다 무신경으로 일관하던 과거의 상사는 어디로 사라진 건지 모르겠다. 한낱 스캔들 신경 쓸 시간에 목장청소나 한다며 빈정거릴 때는 언제고. 윤기는 과거의 발언 따위는 생각도 나지 않는지 목적을 이루고 축객령을 내렸다. 이제 나가.


 그나마 다행인 건 여론이 잠잠한 편이라는 거다. 어느 순간부터 가십지 출연이 뚝 끊긴 윤기의 첫 근황이라 화제가 되긴 했어도, 기사 속 사진을 본 사람들은 허탈하다는 듯 욕을 한 마디씩하고 뒤로 빠져나갔다. 누가 이런 걸 보고 믿냐. 나 어제 우리 할아버지랑 같이 사진 찍혔는데 나도 사귀는 거냐? 망해라.


 어디서부터 일을 건드릴까. 레이첼은 머리가 아파왔다.



“레이첼, 나오셨어요?”



 윤기의 필체를 모방해 편지를 쓰고 있던 지민이 레이첼의 인기척을 듣고는 아는 체를 한다.



“물 한잔 드릴까요?”

“됐어요.”



 레이첼은 피곤해 보인다며 걱정해오는 사건의 원인에게 괜찮다 대꾸한 뒤 이마만 짚었다. 선하게 웃는 저 얼굴을 미워할 수도 없으니. 당장 저딴 남자는 뻥 차버려라, 자꾸만 치고 올라오는 그런 말을 간신히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