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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짐] 아스팔트정글 26

by 토페 posted Jan 07,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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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Mambo Stars - Havana Swing>









 지민은 브루클린의 어느 한 병원 앞에 서있었다. 튼튼한 몸이 자랑인 지민은 병원과 연이 깊지 않았고, 윤기의 많은 차량 브레이크 검사 테스트를 하다 오게 될 거라 생각해본 적만 있었다. 브루클린 6번가에…여기 맞는 거 같은데. 전화로 촬영장소를 설명해주던 스태프로부터 받아 적은 주소와 병원의 이름이 일치했다. 제목은 아스팔트정글인데 왜 병원에서 촬영을 하는 거지. 대충 총기가 난사하는 마피아 영화를 연상하던 지민은 아무렴 상관없다는 결론을 냈다. 뷔가 나오는 영화는 한 번도 지민을 실망시킨 적이 없었다.


 네, 여기 방금 도착했는데요. 로비에서 스태프에게 전화를 거니 갈 테니 조금만 기다려달라는 답이 왔다. 촬영현장까지 감시를 나오는 유난인 영화사라니. 감독의 입장에선 돈만 아니면 당장에라도 면상을 치고 싶었을 거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라면 양심이 없는 민윤기의 업무진행방식에 같이 혀를 찼을 테지만, 덕분에 뷔의 촬영현장을 엿볼 수 있으므로 지민은 그의 편이 되기로 했다.



“혹시 어거스트에서 오신…?”

“네, 맞아요. 지민이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샘이라고 합니다. 촬영팀에 속해있어요.”



 촬영팀이면 현장에서 제일 바쁜 사람 아닌가. 지민이 고개를 갸웃하자 그 의미를 파악했는지 샘은 헬쓱한 얼굴로 멋쩍게 웃었다. 아직은 견습이라 직접 카메라는 잡고 있지 않아요. 지민은 샘으로부터 익숙한 냄새를 맡았다. 아직 자신한테서도 떠나지 못한 사회초년생의 냄새. 지민이 공감어린 동정의 눈빛을 발사했다.



“아…많이 고생하시겠어요.”

“괜찮아요. 듣기로는 지민에 비하면 이정도야 뭐…안내해드릴게요. 이쪽으로 따라와 주세요!”



 병원 특유의 냄새가 났다. 촬영은 병원 한층 전체를 빌려서 진행한다 했다. 유난히 텅텅 비어있는 층에 도착하니 어느 한 구석에만 사람들이 몰려있었다. 카메라와 조명기기가 언뜻 보인다. 샘이 한 곳을 손가락으로 콕 찍었다.



“감독님은 저쪽에 계시거든요.”

“저분이신가요?”

“네, 컷 외치면 가서 인사하시면 될 거예요. 혹시 저 찾으시면 화장실 좀 다녀온다 이야기 부탁드릴게요.”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한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민은 조심조심 사람장벽 안쪽을 파고들었다. 발뒤꿈치를 들어 올리자 한참 연기하고 있는 뷔가 보인다. 불과 3일전 지민이 본 영화 속 광기어린 웃음을 선보이던 매력적인 악당은 없고 피가 군데군데 묻은 캐주얼차림의 평범한 청년이 있었다. 뷔, 아니 영화 속으로 들어간 주인공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이게 가능해?”



 침착해, 침착하자. 뷔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큰 한숨을 쉬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허리춤에 팔을 올리고 천장을 바라보더니 질끈 눈을 감았다 뜨고, 침대 쪽으로 상체를 확 기울인다. 섬세하게 허공을 긋는 손가락은 꼭 침상 위에 없는 누군가를 만지는 것만 같았다.



“젠장, 차 따위는 훔치지 말고 뛰어내려서 죽었어야했는데!”



 비명처럼 외친 뷔가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러더니 이내 허겁지겁 아무렇게나 병실침대에 걸려있던 코트에서 지갑을 꺼내 내용물을 확인하고는 입으로 읊조렸다. 래리 웰터…? 웰터 컴퍼니? 뷔가 다시 침상을 바라본다. 복잡한 눈빛이었다. 숨죽이던 촬영장의 침묵 속에서 감독이 외쳤다.



“훌륭해. 음, 그런데 쉬면서 부족한 부분을 한번 찾아보는 게 괜찮을 거 같은데.”

“아뇨. 바로 한 번 더 가요.”



 뷔가 머리를 쓸어 넘기며 단호하게 말했다. 한쪽 눈을 섹시하게 찡그리고는 빈 침상을 눈짓했다.



“아무래도 누가 누워있어야 더 집중이 잘 될 거 같아요. 어떠세요?”

“나쁘지 않은 생각이지. 누가…샘?”



 샘 어디 있어? 감독은 맡겨놓기라도 한 것처럼 사회초년생부터 찾았다. 아니 배우겠다는 놈이 어디 간 거야. 짜증을 부리는 감독에 지민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사람 틈을 헤집고 감독 곁으로 허겁지겁 다가갔다. 지민은 사람 좋은 미소부터 걸치며 웃었다.



“안녕하세요, 감독님이신가요?”



 감독은 대뜸 튀어나온 지민을 위아래로 훑었다. 기껏해야 스물 중반이나 됐을 얼굴이며 직장인용 수트는 촬영현장과 아무리 잘 봐도 연관이 없었다. 그분은 아까 잠시 화장실을 가신다고 하셨어요. 의심의 눈초리를 가득 받던 지민이 윤기의 수행원이라는 신분을 밝혔을 때, 감독은 더없이 밝은 얼굴로 지민을 맞이했다.



“아 오셨군요. 반갑습니다.”

“어, 지민!”



 감독과 악수를 나누는 와중 뷔가 반갑게 외쳤다. 피가 범벅된 옷을 입고 환하게 웃는 모습이 조금은 현실성이 없었다. 그러다 어, 하고는 재듯 눈을 가늘게 뜨고 지민을 쳐다보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샅샅이 훑어보더니 만족스럽게 눈을 반짝 빛냈다.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나 좀 도와줘.



“여기 잠깐만 누워있으면 돼.”

“…나?”

“두 분 아는 사이세요?”

“친구거든요. 그치, 지민?”



 어리둥절한 감독이 묻자 지민은 어, 어? 하다 얼결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만난 시간을 모두 합쳐도 1시간이 안 되는 사이라는 건 뷔에게 중요하지 않은 듯 보였다. 감독의 미소가 조금더 비굴해졌다. 제 모가지를 쥐고 있는 어거스트의 비서에 헐리우드 스타의 친구라는 타이틀이 덧씌워진 순간이었다. 감독이 친절히 설명했다.



“어차피 작업 따로 할 거라 화면에는 나오지 않을 겁니다.”

“네? 저는 한다고 한 적이….”

“자자, 빨리 와.”



 함박미소를 지은 뷔는 손수 다가와 지민의 손을 잡아 끌고 갔다. 우리 빨리 하자. 강제로 침대에 눕혀진 지민은 당황하여 눈만 깜빡거렸다. 뷔, 잠깐만요, 나는. 퍼덕거리며 이건 무리라고 말하려는 찰나, 조명과 카메라에 불이 들어왔다. 늦었다. 뷔는 사랑스럽고도 짓궂게 활짝 웃었다.



“응, 왜? 반갑다는 인사는 조금 있다 해.”

“…어떻게 하면 되는 거예요?”

“그냥 가만히만 누워있으면 돼. 쉽지? 영화에선 내가 전에 찍어놓은 게 들어갈 거야. 재밌어.”



 어린이연극에서 주인공으로부터 격려 받는 엑스트라 나무3 역할을 맡은 기분이었다. 네, 최선을 다해 볼게요. 지민은 벌써부터 보고서가 걱정이었다. 처음부터 어떤 현장보고를 가리키는 건지 친절한 설명은 당연히도 없었지만, 촬영을 하고 오라는 뜻은 아니었을 것이다. 가끔씩 속이 울렁거리는 말을 툭툭 던져댄다 해서 윤기가 아예 공과 사를 구분 못하는 건 아니었다. 대단한 일을 하고 왔군. 식은 눈빛과 예상 가능한 말로 볼 때 오늘로 현장보고는 끝일 듯하다. 촬영이 다시 시작되었다.



“래리 웰터…? 웰터 컴퍼니?”



 다른 사람이었다. 순식간에 몰입한 뷔는 지민이 모르는 누군가였다. 같은 대사를 반복한 뷔가 상체를 기울인다. 화려하게 잘생긴 이목구비가 바짝 붙자 지민은 저도 모르게 시트를 꼭 쥐었다.



“컷! 완벽해, 완벽! 수고했어!”

“수고하셨습니다!”



 잠시 쉬었다 이어가겠습니다. 완전히 만족한 감독이 환한 모습으로 다가왔다. 영화는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 하하. 완벽하게 찍고 있으니까요. 어떻게든 잘 보이려는 감독의 선한 웃음은 이제야 들어온 샘을 보고 멎었다. 자네는 나랑 이야기 좀 하지. 잠깐 두 얼굴을 가진 감독을 찾은 지민은 아련하게 멀어지는 촬영장의 박지민 역할을 바라보았다. 다시금 뷔가 반짝거리는 눈으로 천진하게 말을 걸어왔다.



“나랑 놀자.”



 쉴 때 친구랑 노는 건 처음이야. 들떠 해사하게 말하는 뷔 앞에서 보고서를 위해 병원이라도 좀 둘러본다는 말은 쏙 들어갔다. 어…그럴까요? 뷔는 매니저로부터 음료수를 건네받고 아무도 없는 옆 병실로 지민을 끌고 들어갔다. 침대에 뛰어들 듯 앉은 뷔가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이제 솔직하게 말해도 돼. 잘려서 온 거야?”

“뷔는 여전히 농담도 잘 하시네요.”

“응? 농담 아닌데. 잘린 거 아니야?”

“…저 일 잘하거든요?”



 지민이 작게 항변했다. 그래? 일 잘해? 오렌지주스를 기울이며 고개를 끄덕거려주는 뷔의 위로 필터가 하나 빠져나가는 거 같다. 아까는 분명 엄청 멋있었는데. 카리스마 넘치는 배우의 모습은 날려버리고 천진난만한 어린아이처럼 뷔가 이를 드러내며 히 웃었다. 다음에 꼭 잘리면 나한테 와, 응? 알았지? 지민은 눈을 샐쭉하게 만들며 발끈했다. 아니, 잘릴 일 없거든요?



“근데, 뷔 아까는 무슨 장면이었던 거예요? 막 옷도 그러고….”

“아 이거.”



 뷔는 피범벅이 된 티를 잡고 손으로 흔들었다.



“차로 친 사람 끌어안고 달려와서 그래.”

“그거 굉장히 무서운 말인 거 알아요? 영화에서라고 뒤에 붙여주세요.”

“괜찮아. 너는 알아듣잖아.”

“그래도 인터뷰 같은 거 하실 때는 조심하시는 게 좋잖아요.”

“지금 가서 영화 스토리 말하면 고소당할걸. 위대하신 어거스트 회장한테.”



 나는 감옥 가기 싫다고. 뷔가 너스레를 떨었다. 지민은 윤기의 뒤에 버티고 있는 변호사들을 떠올리다 수긍했다. 언젠가 레이첼이 언급한 그들은 살인도 무죄로 만들어줄 언변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지민은 뷔의 옷을 흘끔거렸다. 윤기의 너무 높은 참여도로 작가가 우는 소리를 했다는 스토리가 궁금하지 않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주인공이 혼수상태 빠진 사람 대신 연기하면서 사는 거야. 주인공은 고아에다가 오디션 수백 번 떨어진 가난한 인생. 차에 치인 남자는 돈 많은 신생회사 대표. 놀랍게도 둘이 얼굴이 똑같거든.”



 한 시간이 훌쩍 넘는 영화 스토리를 한 문장으로 깔끔하게 정리해 노출시킨 뷔는 위기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얼굴로 오렌지주스를 마셨다. 시나리오 보안을 위해 이리저리 뛴 레이첼이 알면 뒷목을 잡을 자세였다.



“…이렇게 다 말해도 되는 거예요?”

“왜? 넌 어거스트 사람이니까 괜찮아.”



 하긴, 인터뷰로 이거 내용 팔아먹고 돈 받으면 그걸로 먹고 살아도 되긴 하겠다. 진지하게 뷔가 중얼거린다. 그때였다. 문이 벌컥 열렸다. 응? 돌아본 뷔는 들이닥친 여성과 눈이 마주치자 밝게 손을 흔들었다. 오, 왔어?



“한참 찾았네. 왜 이렇게 꽁꽁 숨어있는 거야. 뭐 좋은 거라도 하고 있었어?”

“어. 짠, 여기 내 친구.”



 장신의 여성은 보석 같은 에메랄드빛 눈을 가지고 있었다. 지민은 몇 모금 마시지도 못한 오렌지주스를 그대로 쏟을 뻔했다. 작은 얼굴에 오목조목 담긴 이목구비는 놀랄 만큼 섬세했다. 활짝 열린 눈을 윤기가 봤다면 아직도 촌스럽게 하나하나 다 놀라는 거냐 빈정거릴지도 모른다. 그녀는 놀란 지민을 발견하고 우아하면서도 시원시원한 미소를 걸며 손을 내밀었다.



“반가워요, 로렌 테슬러에요. 들어본 적 없어도 민망하니까 들어봤다고 해줘요.”

“이렇게 만나 뵙게 될 줄은 몰랐는데…영화 정말 잘 봤어요. 팬이에요. 지민입니다.”

“매너가 좋은 신사분이군요. 기분 좋네요. 뷔 친구라면 내 친구기도 하죠. 친하게 지내요.”



 로렌이 생긋 입꼬리를 올렸다. 무릇 유명한 헐리우드의 배우라면 출연한 작품명 하나쯤은 업고 다니기 마련이다. 하이틴 스타로 데뷔한 뷔와 다르게 로렌 테슬러는 판타지 영화 시리즈로 스크린에 데뷔했으며, 그녀가 작년 출연한 판타지 영화 시리즈의 마지막은 잡지에서도 종종 최고의 수익을 거둬들였다 소개되고는 했다. 데뷔영화를 제외하고 출연한 작품이 다소 부진한 성적을 냈다 해도 그녀는 명실상부 손꼽히는 헐리우드의 별이었다.



“다음에 제 트레일러에 놀러 와도 좋아요.”

“그건 힘들걸? 하면 어마어마하게 싫어할 사람이 한 명 있거든.”



 뷔가 끼어들었다. 안 그래도 악마인데 대악마로 변할지도 모른다고. 머리 위로 솟은 뿔을 만드는 시늉을 하자 로렌은 어깨를 으쓱했다.



“괜찮아, 원래 미남은 쟁취하는 거잖아.”

“지민은 어거스트 회장 비서야.”

“…그건 생각보다 큰 악마네. 지민, 괜찮아요?”

“아하하 물론이죠. 좋은 분이세요.”



 지구에 발을 붙이고 사는 사람이라면 전부 민윤기의 악명을 아는 듯하다. 로렌은 딱히 대변하는 지민의 말을 믿지 않는 얼굴이었다. 거짓말은 하지 않아도 돼요. 난 캐스팅 때만 생각하면 아직도 이불을 차는 걸요, 하고 몸서리를 쳤다. 뷔가 옆에서 거든다.



“그치, 지민이 좀 세뇌를 많이 당했어. 착한 친구야.”

“아니에요, 정말로 생각만큼 힘들지 않고….”

“다음 촬영 이어가겠습니다!”



 문을 노크한 스태프가 크게 외쳤다. 지민은 시계를 확인했다. 서서히 어거스트 타워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두 분 촬영 열심히 하세요. 저는 이만 심부름이 있어서 가봐야 해요.”

“아 내 친구가 신데렐라였다니.”



 뷔가 아쉽다는 듯 지민을 꽉 끌어안았다. 다음에 또 와, 알았지? 내가 유리구두 사줄게.








 감독과 짧은 인사를 마지막으로 밖을 향하던 지민은 발걸음을 머뭇거렸다. 흘린 오렌지주스 탓에 손이 끈적거렸다. 씻어야겠다. 이 손으로 윤기가 찾아오라 시킨 파텍필립 시계를 만지는 건 범죄다. 병원을 두리번거리던 지민은 마침 화장실을 발견하고 직행했다. 물을 틀어놓고 한참 손을 씻고 있는데, 바로 이어 들어온 누군가가 지민의 옆에 서 물을 틀었다.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어 얼굴을 확인한 지민이 헉, 했다. 갈색 머리카락에 푸른 눈망울을 지닌 천사 같은 남자.



“혹시 케일론 베닌 아니세요?”

“아, 네. 안녕하세요.”



 지민과 눈이 마주친 케일론이 차분하게 인사한다. 조금 전에는 뷔와 로렌 테슬러와 주스를 마시고, 화장실에서는 케일론 베닌을 만나고. 이런 식이면 집 침대에선 아인슈타인이라도 만날 것만 같다. 얼떨떨해하면서도 지민은 반가운 기색을 어김없이 드러냈다.



“와, 오랜만이에요! 저번에 만났었는데, 혹시 기억 하시나요?”

“우리가 만났었나요? 음.”



 순간적으로 케일론의 얼굴에 싸늘한 빛이 스친다. 자칫 스토커로 몰릴 위기라 지민은 아, 하며 급하게 덧붙였다.



“그 리셉션에서요. 미스터 윤 수행원으로 있었는데…아 물론 너무 짧게 봐서 기억 못 하시는 게 당연해요.”

“아아 기억났습니다. 그때 그 비서분이시군요. 제가 다 와인 공포증이 생기는 건 아닐까 걱정했었는데.”

“아하하…그때는 좀 상황이 그랬죠….”



 지민은 민망하게 웃었다. 그 거리에서 저를 발견한 윤기가 다가왔으니 같이 있던 케일론도 똑똑히 봤을 것이다. 와인세례나 받는 한심한 비서로 기억되고 싶진 않았으나 변명해봤자 소용없는 일이다. 지금 와서야 사실은 구해준 거거든요, 하고 장황하게 설명할 수도 없고. 스토커라는 의심을 지워낸 건지 케일론은 다정하게 말했다.



“다행이군요.”

“네. 다행히 일이 잘 해결됐어요.”

“그보다 대단한 인연이군요. 이런 곳에서 또 만나는 걸 보면. 아니면 또 심부름이라도 받은 건가요?”

“아마 생각하신 게 맞을 거예요. 그래도 가기 전에 이렇게 또 만나서 너무 좋아요.”



 지민은 다 씻은 손을 털었다. 케일론은 고개를 끄덕여주다가 거울을 통해 지민을 바라보더니 작게 웃었다.



“지민이라고 했었죠? 감시자 역할을 담당하는 거 치곤 지민은 너무 착한 거 같은데. 미스터 윤답진 않는 선택이군요.”

“어음….”

“다들 영화에 대한 열정은 가득하니 안심해도 좋다고 전해주셨으면 좋겠군요.”



 신사적인 어조였다. 아무래도 감시당한다고 생각하면 기분이 나쁠 수 있지. 수긍하며 지민은 걱정 말라는 신뢰감 가는 미소를 선보였다. 빤히 거울 속으로 지민과 눈을 마주치던 케일론이 흐음, 하고는 물을 잠갔다.



“의외군요.”

“네?”

“똑똑한 사람들은 보통 그런 힘든 일을 잘 안하니까요.”



 지민은 간신히 적당한 말을 찾아냈다. 그래도 요즘은 힘들지 않아요. 변명 아닌 변명을 몇 개 만들어내니 케일론은 지민의 이야기를 듣다 오, 하고는 신기하다는 듯 한마디 첨가했다.



“그런데 영어를 잘 하시네요. 동양에서 오셨을 텐데.”



 너무나도 부드러운 어조라 지민은 자연스럽게 흘려 넘길 뻔했다. 안녕, 내일 봐, 잘 지내 그런 인사 같은 어조라서. 케일론이 생긋 미소 짓는다. 예의 그 천사라 칭송받는 웃음이었다.



“전 먼저 가보도록 하죠. 다음에 만나면 더 많은 대화를 해도 좋을 거 같군요.”



 사라지는 케일론의 뒷모습을 보면서 지민은 얼이 빠져버리고 말았다. 아무리 사람이 겉과 속은 다르다는 기본적인 상식은 알고 있었지만 야구배트로 가격당한 것처럼 뒷골이 얼얼했다. 뭐야…천사가 인종차별을 하잖아. 당황스러운 감정은 곧 떨떠름하고도 불쾌한 감정으로 변했다. 이쯤 되면 진짜로 돌아가는 길에 아인슈타인은 물론 프랑켄슈타인까지도 만날 거 같다.


 지민은 곧 불쾌한 감정을 삼켜냈다. 화를 내고 방금 당신이 한 말이 인종차별이라는 인식은 있는 거냐 물고 늘어지면 끝이 없다. 그런 논쟁을 벌이기엔 지민의 시간이 제한되어 있었다. 병원 로비를 나서면서 현실적인 다른 생각이 뭉게뭉게 떠올랐다. 인종차별, 엑스트라 연기, 오렌지주스 따위를 쓸 수 없는 현장보고서의 안위였다.








***






 주말이 삭제된 지 오래인 지민은 라스베가스를 다녀와서도 마찬가지로 영화를 예매했다. 이 짓도 오래하니 요령이 생겼다. 새벽바람을 뚫고 후드를 푹 눌러쓴 채 가장 첫 번째로 상영하는 영화를 예매해 반은 졸고 반은 보는 식이었다. 자칫 몽땅 숙면을 취하고 다시 한 번 표를 예매하는 경우가 발생하는 때를 빼고는 주말을 사수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잭 블랙이 나온 코미디 영화를 예매한 금요일, 윤기는 뜬금없이 예매한 영화를 묻더니 예매를 취소시켰다.



“영화 보는 눈이 너무 없는 거 아니야? 구피가 봐도 졸려서 하품하겠군.”



 그는 지민의 안목에 신뢰할 수 없다는 평을 남겼다. 예예, 그러시군요. 지민은 흘려듣는 기지를 발휘하며 그럼 어떤 영화로 볼까요? 하고 차분히 물었다. 윤기는 서류에 싸인을 갈기며 지민은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레이첼한테 물어. 그리고 진 불러와.”

“네.”



 지민은 후다닥 문을 닫고 나갔다. 윤기가 이상한 분위기를 잡기 전 도망가기로는 1인자가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낯설고 어딘가 민망한 분위기는 같이 맞붙고 싶은 쪽보다는 여전히 피하고 싶었다. 윤기는 서류만 보던 고개를 잠깐 들어 그의 비서가 빠져나간 문을 잠깐 바라봤을 뿐이었다.



“레이첼, 혹시 영화 관련해서 무슨 이야기 못….”

“여기. 표 받아요.”



 레이첼은 기다렸다는 듯 표를 내밀었다. 그녀는 평소와 같은 표정으로 표를 보는 지민을 바라보았다. 고마워요! 배시시 웃은 지민이 자리로 돌아간다. 레이첼은 아무도 모르게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영화평론가들도 나보단 영화 덜 보겠다. 예매된 표는 마블의 액션영화였고, 취소하는 작업도 번거로워 지민은 그날 주말일정을 영화 관람으로 굳혔다. 한숨을 푹푹 쉬며 청바지에 후드티를 캐주얼하게 입은 지민은 아직도 대학생 티가 물씬 났다. 캠퍼스를 갓 입학한 학생이라 말해도 순순히 고개가 끄덕여질 만큼 앳돼보였다. 영화관에 도착하니 다른 날보다 사람이 많았다.



“어…? 12시 20분인데.”



 포스터까지 챙긴 지민은 표와 입장안내가 뜨는 화면을 비교하며 바라보았다. 뭔가 이상했다. 12시 15분인 지금 입장안내문이 떠야하는데, 안내판엔 지민이 처음 예매했던 코미디 영화만 입장안내문이 떠있었다. 일에 차질이 있는 건 아닌지 안내원을 찾으려는 그때, 툭 어깨에 손이 올라왔다. 핏줄이 툭툭 불거져 나와 있는 하얀 손이었다.



“으아악! 누구…!”



 펄떡거리며 소스라치게 놀라 뒤를 돌아본 지민은 차마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수많은 사람 속에서도 민트색 머리카락으로 존재감을 위풍당당하게 드러내는 사람. 선글라스에 돌체가바나 가죽재킷을 걸친 인물은 지민이 익히 아는 자였다. 한번 큰 소리가 나서인지 시선이 모인다. 손의 주인은 신경 쓰지 않고 태평하게 입을 열었다.



“안녕.”

“미, 미스터 윤!?”

“좀비는 아니니까 그렇게 놀랄 필요는 없어. 이러다 튀어나온 네 눈을 들고 병원에 가야할 거 같으니까.”

“여기, 여기는 왜…영화 보러 오신 거…는 아니신 거 같은데.”

“잘 아네.”



 지민은 아직도 눈앞의 인물이 믿기지 않아 입만 벙긋거렸다. 대체 그럼 왜…? 윤기는 당연하다는 듯 평범한 어조로 답했다.



“너랑 데이트하러.”

“…….”

“아 그리고 그건 버려. 가짜 표니까.”



 지민의 손에서 표가 힘없이 팔랑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