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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짐] 아스팔트정글 20

by 토페 posted Oct 02,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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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모차르트 - 피아노 소나타 8번>











“이거 오랜만에 뵙는군요. 잘 지내셨습니까?”

“나야 물론 잘 지냈지. 자네야말로 잘 지냈나? 뉴욕에서 가장 바쁜 사람이 바로 자네일텐데.”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미스터 로버트. 미스터 로버트야 말로 회담에 참석하셨다 오늘 낮에 귀국했다 들었습니다. 뉴욕 안에서만 간신히 버티고 있는 제게 바쁘다는 칭호는 삼가주시지요.”

“하하 뉴욕에서 전세계를 주무르고 있질 않나?”

“철강왕이라 칭송받는 분께 그런 과찬을 받으니 입꼬리가 자꾸 올라가는군요.”



 흰 백발의 노신사가 껄껄 웃었다. 윤기는 여유로운 대화를 이어나갔다. 능숙했고, 부드러운 미소와 어우러진 목소리는 호화로운 파티의 주인답게 품위 있었다. 한 발짝 윤기의 뒤편으로 물러선 지민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이름도 몰랐으면서 말을 어떻게 저렇게 잘하지. 모든 사업가는 거짓말을 인사보다 많이 말하는 게 틀림없다. 불과 1분전 노신사가 윤기를 발견하고 다가올 때, 머릿속 초대손님사전을 뒤적거려 재빠르게 정보를 알려준 건 자신이었다. 철강왕, 칸트 로버트, 개발권회담 후 오늘 낮 귀국, 최근 손자가 결혼함. 귓가에 웅얼거린 몇 가지 정보로 오래 알고 있던 사이처럼 대화를 이어나가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였다.



“아 그리고 최근 보낸 선물은 잘 받았네. 어떻게 그런 선물을 보낼 생각을 했나?”

“마음에 들으셨다니 다행이군요. 심혈을 기울인 보람이 있습니다.”

“특히 편지에 쓴 문구가 아주 좋았네.”

“그렇습니까.”



 이것 역시 거짓말이다. 지민은 확신할 수 있었다. 당연하다는 듯 인사를 받으며 싱긋 웃고 있는 민윤기는 칸트 로버트의 손자가 남자인지 여자인지조차 모른다. 그 결혼이 로버트 손자의 외도로 파경을 맞은 결혼을 잇는 두 번째 결혼이라는 사실도 필시 모를 터였다. 제 손으로 선물을 보내고 편지까지 쓴 지민은 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내가 얼마나 책을 뒤져가면서 좋은 문구를 찾으려고 애썼는데. 주말 내내 어거스트의 격에 어울리는 선물을 찾고, 윤기의 필체를 모방한 편지까지 써 보내느라 버린 종이만 수 십장이었다.


 껄껄 웃으며 노신사가 떠나고 윤기를 찾은 사람은 문화부장관이었다. 윤기의 뒤를 강아지처럼 졸졸 따라다니며 지민은 속으로 입을 떡 벌렸다. 레이첼의 말대로였다. 영화관의 스크린에서, 불과 2주전 지민이 윤기의 심부름으로 보고 온 영화 속 유명한 배우가 웃으며 윤기와 악수를 나눴고, 이름만 들으면 눈이 휘둥그레질 기업의 관계자들과 정치인들이 윤기를 스쳐지나갔다. 


 거대한 파티의 위용에 눌려 기가 죽어있던 지민은 천천히 적응해나갔다. 간혹 윤기에게 다가온 사람들이 새로운 얼굴이라며 아는 척을 해올 때 웃어주는 여유도 보였다. 선배님 말이랑 달리 생각보다 큰일은 없는 거 같은데. 물론 뇌세포가 터질 만큼 정보를 와르르 밀어 넣는 시련이 존재하긴 했지만 리셉션은 무난하게 흘러갔다. 윤기의 뒤에만 붙어있다 보니 위기가 닥칠 겨를도 없었다.



“다행이군. 돌아갈 때도 비행기에 타는 인원수에는 변동이 없겠어.”



 윤기가 슬쩍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지민은 빠르게 윤기의 말을 분석하고 작게 분노했다. 실수하면 캘리포니아에 버리고 갈 속셈이었어? 어쩜 저렇게 못됐을 수가! 지민은 작게 억지미소를 만들었다. 그거 참, 하하 다행이네요…. 레이첼은 은근히 부루퉁하게 튀어나온 지민의 입술을 힐끔 바라볼 뿐이었다.



“앞으로도 이렇게만 해. 아 거기.”

“한잔 드리겠습니다.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윤기가 트레이에 올려진 잔을 집었다. 그와 동시에 주름이 진 선한 인상의 남성이 윤기를 발견하고 웃는 인상을 만들었다. 다가온다. 바로바로 윤기에게 상대의 신상정보를 읊던 지민이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에스티젠 회장, 10대 학생 성추행 파문. 딸뻘의 학생을 상대로 범죄를 저지른 천하의 파렴치한이다. 지민이 머뭇거리는 사이 레이첼이 흘긋 지민의 상태를 확인하고 윤기의 귓가에 정보를 전했다.



“축하하네, 어거스트가 문화사업에 뛰어들었으니 다들 몸 사려야겠어.”

“과찬이십니다. 조촐한 파티를 즐겨주시고 있는 거 같아 기쁘군요.”

“아주 훌륭한 파티야. 최근 엮인 귀찮은 일을 까먹을 만큼 환상적이구만. 눈도 즐겁고, 음식도 훌륭해.”



 에스티젠이 와인을 한 모금 삼키며 인자한 미소를 선보였다. 지민은 저도 모르게 인상을 구겼다. CCTV에 찍힌 영상의 흐릿함을 증거로 강력하게 침을 튀기며 부인하던 모습이 전파를 타고 흐른 게 불과 일주일 전이었다. 귀찮은 일? 착각일 뿐이라며 십대 소녀를 매섭게 공격하던 회장의 변호인 무리도 떠올랐다. 인지하지 못하고 점점 미간을 찌푸리는 지민을 레이첼이 툭 건드렸다.



“아.”



 옆을 돌아보자 레이첼이 고개를 흔들어 보인다. 그렇다. 여기는 뉴스가 흘러나오는 자신의 방이 아닌 리셉션 홀 한복판이다. 지민은 제 앞에 선 등이 누구의 것인지 자각했다. 자신은 윤기의 비서로, 어거스트라는 상품명을 붙이고 진열장에 전시된 상품이나 마찬가지다. 작은 행동, 표정 하나하나가 어거스트를 대표하며 하나의 평가 대상이었다. 윤기는 전과 마찬가지로 젠틀한 어조와 미소로 대화를 이어갔다.



“그럼 다음에도 파티에 걸음해주시는 겁니까?”

“이런 훌륭한 파티라면 언제든지 환영일세. 그나저나 언제 식사 한 끼 하면서 지난번에 못 끝낸 이야기를 끝내야 하지 않겠나?”

“물론입니다. 비서를 통해 스케줄을 조정해보도록 하죠.”

“일 정리되면 바로 연력하지. 정리까지 얼마 걸리지 않을 거라 생각하네. 자, 어거스트의 미래를 위해.”



 에스티젠이 잔을 살짝 치켜들며 호탕하게 웃고 자리를 떴다. 지민은 애써 굳은 표정을 다잡는데, 윤기로부터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딱 지민과 레이첼만이 들을 수 있는 거리였다.



“에스티젠 쪽에서 오는 연락 전부 쓰레기통에 처박아.”



 사업이란 뭘까. 아마 최고의 거짓말쟁이가 되는 길이 아닐까, 지민은 잠깐 생각했다. 아니 잠깐 이건 옳은 말인 거 같은데. 쓰레기가 보자고 하면 쓰레기통에 넣어주는 게 당연한 거긴 하니까. 곧장 또 다른 유명인사가 윤기를 찾았다. 캘리포니아 주지사, 라힘 문델. 속삭인 지민이 금방 뒤로 한발 물러났다. 금세 또 사업가의 가면을 쓴 윤기를 보는데, 레이첼이 다시 한 번 어깨를 건드려왔다.



“지민.”

“네, 레이첼.”

“아무래도 작은 문제가 생긴 거 같아요.”

“네?”



 레이첼이 홀 한 켠을 눈짓했다. 경호원들이 티 나지 않을 만큼 부산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체크해야 할 거 같아요. 다녀올 테니 여기 있어요.”

“그, 그럼 여기 저 혼자…?”

“미스터 윤과 같이 있는 거죠.”



 그게 더 문제인데요. 지민은 어깨에 바위가 한 덩이 더 추가되는 것만 같았다. 마음 같아선 이 전쟁터에 혼자 버려두지 말라 발목이라도 붙잡고 싶은 심정이다. 명심해요, 여기 지민을 보고 있는 눈이 수백이라는 걸. 레이첼이 마지막 당부를 끝으로 지민의 눈길을 미련 없이 털어냈다. 아 안돼. 선배님 말처럼 월급 반절 깎고 안 온다고 했어야 했는데. 멀어지는 정신줄을 간신히 다잡고 있는데, 윤기가 그새 대화를 끝내고 레이첼의 위치를 확인했다.



“뭐야.”

“작은 문제가 생긴 거 같아 확인하고 온다 하셨어요.”

“쯧, 고작 이 파티 하나 제대로 진행시키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인가? 내가 하늘에 별을 따오라고 한 것도 아닌데 말이야.”

“하하…그래도 제가 있으니 걱정마세요!”

“니가 있어서 더 걱정 돼. 그리고 떨면서 그런 말은 안 어울리지 않나?”

“네?”



 윤기가 시선을 내린 곳은 지민의 손이었다. 몸은 솔직했다. 하하 이게 왜, 왜 떨리지. 민망함으로 지민이 손에 힘을 꽉 주어 주먹을 말았다. 멋쩍게 지민이 웃는 도중 유달리 반가움이 가득한 목소리가 등장했다. 오오 어거스트! 지민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헙, 놀랐다. 윤기는 여태 지었던 미소를 삭제하고 시큰둥한 표정을 유지했다. 정의하자면 귀찮다는 쪽에 가까웠다.



“이게 얼마 만에 보는 비싼 얼굴이야!”



 뷔. 뷔다. 맙소사, 다시 만났어. 지민은 금세 모든 풍경을 지우고 뷔만 남겨버렸다. 캐주얼한 검은 수트를 입은 몸의 비율은 일반인과 차원이 달랐다. 이쪽으로 뷔가 다가오고 있어! 하느님 살아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뷔를 볼 수 있는 눈을 주셔서 감사해요. 양팔을 활짝 벌리고 다가온 뷔가 환하게 웃었다. 지민은 그 순간 윤기를 밀치고 자신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싶었다. 아 뷔랑 포옹할 기회를 눈앞에서 보기만 해야 하다니…. 윤기를 밀쳤다간 자신의 인생이 밀쳐질 거란 사실을 되새기며 지민이 간신히 발을 땅에 붙이고 있는데, 벌린 양팔이 무색하도록 윤기는 가만히 서있기만 했다. 지민은 탄식했다. 뷔랑 포옹하기는 세상에서 누구보다 내가 잘 할 수 있는데…! 뷔는 상관없다는 듯 아무반응 없는 윤기에게 얕은 포옹을 하고 떨어졌다. 그리고는 웃는 낯으로 흐뭇하게 덧붙였다.



“역시 이렇게 재수 없는 걸 보니 건강하네!”

“네 입도 잘 터져있는 걸 보니 넌 쓸데없이 심각하게 건강한 거 같군.”

“인기스타의 필수조건은 자기관리지. 내가 기침 하나라도 하면 울 사람이 몇 명이나 되는 줄 알아?”

“그래. 아프지 마. 촬영 도중 기침으로 일정 방해하면 네 눈에서도 눈물 나게 만들어 줄 테니까.”



 지민은 몽롱하게 뷔를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고 눈을 댕그랗게 떴다. 한 번도 친할 거라 생각해 본적 없던 두 인물의 접점은 예상외였다. 말도 안 돼. 민윤기 같은 악마랑 내 우상이 대체 어떻게. 흡사 천사와 악마의 조합으로 보였다. 뷔는 진지한 표정으로 협박을 남겨놓은 윤기를 두고 킬킬거렸다.



개런티 값은 할 테니까 걱정 마.”

“당연히 그래야 할 거야. 받은 개런티 값도 못하면 고소할 거야.”

“고소만?”

“킬러도 고용해주지.”



 뷔가 킥킥 웃었다. 내 목숨값 처리하려면 개런티값보다 많이 나올걸? 윤기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촬영 상황은.”

“연기 쪽이 궁금한 거야 아니면 다른 쪽이 궁금한 거야.”



 뷔가 한쪽 입꼬리만 들어올려 장난스럽게 웃었다. 다른 쪽? 의미심장한 어조에 스크린 보는 기분으로 뷔를 감상하던 지민이 의문을 가지려는 찰나, 윤기가 차갑게 일렀다.



“적당히 해.”

“살벌하기는. 아직 잘 몰라. 이제 막 슛 들어가는데 어떻게 알아. 오디션도 비공개로 하고선 물어보는 게 욕심이지.”



 뷔가 어깨를 으쓱했다. 비밀리에 캐스팅을 완료한 아스팔트정글은 리셉션이 끝나고 촬영을 시작한다. 지민도 레이첼의 어깨 너머로 일정의 순서만 들었을 뿐이다. 뷔가 나온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영화 디비디를 다섯 개는 사기로 마음먹은 지민에게 사실상 영화 자체가 가지는 의미는 크지 않았다. 뷔가 덧붙였다.



“영화 흥행 걱정하는 거라면…설마 걱정해? 내가 있는데? 아직도 내가 십달라 받아가며 엑스트라 출연하던 시절이라 생각하는, 어.”



 넋 놓고 뷔를 관람하던 지민은 난데없이 마주친 눈동자에 파득 놀랐다. 윤기는 뷔의 시선이 닿는 뒤쪽을 확인했다.



“여기는 내 새로운 비서.”

“알아.”

“뭐?”

“아까 만났거든. 도로에서.”



 뷔가 한발 더 앞으로 튀어나왔다. 지민은 가까워진 얼굴에 감탄하기도 전에 뷔가 손을 쑥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지민은 평생 끌어 모은 행운 중 두 개를 썼다 생각했다. 세상에, 뷔를 하루에 두 번이나 만나는 기적이 일어났어.



“세 시간만인가?”

“네, 네. 아, 아까는 잘 들어가셨어요?”

“아 음 뭐 나름? 리셉션 오고부터 계속 보고 싶었어. 아까보다 훨씬 멋있어져서 찾기 힘들었나봐. 옷 예쁘다.”



 이게 꿈이라면 영원히 박제하게 해주세요. 지민은 홀을 다섯 바퀴 돌며 기쁨의 환호를 지르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다잡고 감사합니다, 하고 작게 답했다.



“뷔도 오늘 멋있으세요.”

“오늘만?”

“아뇨! 늘, 항상 진짜 매번 새롭게 멋있으셨어요!”



 지민이 황급히 부정하며 팬심을 드러냈다. 뷔가 순간 멈칫하더니 특유의 눈웃음을 선보이며 지민의 어깨를 두들겨왔다. 아무래도 귀엽다는 뜻이 담겨있는 듯 했다.



“재미있다, 너.”



 지민은 작은 칭찬에 볼을 붉게 상기시켰다. 오늘 집에 가서 귀는 안 씻을 거야. 어깨도. 주먹을 물고 눈물을 한 바가지 쏟고 싶은 감격에 감격을 거듭하며 목구멍까지 치솟은 말을 마침내 건넸다.



“진짜 팬이에요. 스카이가든 때부터 팬이었어요.”

“스카이가든? 그걸 아직도 기억하고 있단 말이야?”

“그 명작을 어떻게 까먹을 수가 있어요. 보고 울기까지 했는걸요.”

“어…그래?”



 스카이 가든은 전형적인 하이틴 드라마였다. 스토리 보다는 캐릭터 매력이 돋보이는 작품이었으며, 뷔 역시 촬영당시 대본을 받고 감동으로 운적은 없었다. 울기보단 어떻게든 성공해야한다는 의지를 가득 담으면 담았지.



“끝나고 사진 찍을까?”

“사진이요!?”

“별로야?”

“너무 좋아요! 너무 좋아서 심장 터져버릴 거 같아요.”



 이번으로 마지막 행운을 썼다. 좋아하는 배우와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기적같은 기회를 얻은 지민은 솔직하게 좋아했다. 진짜 너무 좋아해요. 연기 너무 잘하세요. 제가 정말 좋아해요. 로봇처럼 같은 말만 반복하는 지민을 두고 뷔는 알아요, 알아요 하고 꼬박꼬박 답하며 부정하지 않았다. 지민은 작은 용기를 냈다.



“저 혹시 그럼 싸, 싸인도…!”

“끝나고 그런 시간은 어디서 만들었어?”



 답은 엉뚱한 인물로부터 나왔다. 윤기가 평소와 다름없는 무심한 표정으로 훼방을 놓았다.



“파티 끝나고 오늘 일어난 문제 정리해서 보고해.”



 아…. 지민은 누가 나타나서 지금 당장 윤기의 입을 막아주길 바랐다. 사진 찍는데 얼마나 걸린다고. 대단한 분이시니 1분도 기다리는 걸 못 참으시겠지. 부풀은 풍선 쪼그라들 듯 지민은 아쉬움이 역력한 표정을 드러냈다. 뷔랑 직접 말해본 게 어디야. 얼굴을 가까이서 보는 것만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그리고 지금 네 얼굴 못 봐주겠으니까 알아서 원래대로 돌려놓고 와.”



 지민은 그제야 제 얼굴이 상기되어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얼굴이 뜨끈한게 스스로도 느껴지긴 했다만. 그, 그 정도인가. 지민은 볼을 한번 더듬거리고 생각보다 더 뜨거운 볼에 속으로 얕은 욕을 씹었다. 윤기의 차갑고 무신경한 말보다 좋아하는 배우 앞에서 이런 몰골을 보였다는 게 창피했다. 눈 씻어드리지도 못하는데! 눈물을 삼키며 지민이 대답했다. 다녀올게요…. 그때였다.



“오랜만에 만나는 군요, 어거스트.”



 훤칠한 키의 남성이 다가왔다. 자리를 뜨려던 지민은 머뭇거렸다. 갈색머리에 유난히 푸른 눈망울이 돋보였다. 선하고 부드러운 인상의 미남이었다. 뷔 말곤 다른 배우에게 관심 없는 지민이 알 정도로 어마어마한 인지도를 소유한 스타였다. 케일론 베닌. 뷔가 하이틴 드라마를 발판으로 한방에 인기를 휩쓸어담았다면, 케일론은 연기력을 통해 차근차근 인정받은, 헐리우드에 몇 없는 진정성 있는 배우라는 평가를 쓸어 담고 다녔다.



“파티가 훌륭합니다.”

“칭찬 고맙습니다, 케일론. 이런 작은 파티에도 아낌없는 칭찬이라니.”



 크림같이 부드럽게 웃는 인상은 개미 한 마리 못 죽일 만큼 선했다. 지민은 속으로 작은 탄성을 질렀다. 천사다, 천사. 땅으로 강림한 대천사가 날개만 차곡차곡 집에 정리해두고 나온 듯하다. 뷔가 먼저 오래 만난 친구에게 인사하듯 케일론을 불렀다.



“케일론 오랜만이야.”

“우리 3일 전에 만났던 거 아니었어?”

“맞아. 앞으로는 하루종일 붙어있을 사이인데 3일이면 어마어마한 시간이지.”

“그것도 그렇네.”



 케일론이 상냥하게 눈웃음을 흘렸다. 한쪽엔 뷔, 한쪽엔 케일론. 헐리우드에서 가장 비싼 몸값을 구사하는 배우 둘을 코앞 거리에서 본 기적을 누린 지민이 저도 모르게 멍하니 케일론을 바라보았다. 내가 사실 아까 도로에서 죽었던 건 아니겠지. 그러던 와중 따끔한 윤기의 시선이 닿는다. 동시에, 케일론이 음? 하고는 지민을 같이 쳐다보았다.



“아 새로운 비서분이신가요?”



 웃는 거마저 최고다. 케일론이 손을 내민다. 단순히 악수를 청하는 행동마저 젠틀하다. 홀을 함박 채우고 있는 오케스트라의 연주와도 그림처럼 어울렸다.



“네, 박지민이라고 합니다. 잠시 자리를 비워도 괜찮을까요?” 

“물론입니다.”



 지민은 그 순간 케일론의 뒤로 날개가 펄럭거리는 환상이 보였다. 그런 발걸음으로 언제 갈 거지? 웃는 낯으로 눈으로는 빨리 꺼지라는 명령을 쏘아내는 엄청난 능력을 부리고 있는 윤기에게 밀린 지민은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발걸음으로 자리를 옮겼다.







 하여간 내가 행복한 꼴을 못 본다니까. 심술은 맨날 있는 대로 부리지. 사람이 어쩜 그렇게 꼬인 거야. 툴툴거리며 은근히 윤기의 흉을 본 지민은 웨이터에게 부탁한 물 한잔을 말끔히 비웠다. 슬슬 대화가 끝나가는 세 명 쪽으로 다시 걸음을 옮기려는 때였다.



“자네, 어거스트의 새 비서인가?”



 지민은 흠칫하며 돌아보았다. 백발이 희끗한 노인이 웃고 있었다. 조금 전 윤기와 대화를 했던 인물이다. 테레스덴 로엔, 스마트픽처스의 수장, 최근 어거스트의 슈가 스튜디오를 매우 불쾌해함. 윤기가 싫어하는 인물이기도 했다. 15세기에 사는 시대 구별 못하는 치졸한 노인이라며 신랄한 비난을 퍼부은 적이 있었다. 그 한심한 감각으로 스마트픽처스는 분명 3년 안에 망할것이라고도.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윤기가 사무실에서 편지를 구기며 내뱉은 이야기고. 지민은 예의를 갖춰 인사를 받아주었다.



“네, 맞습니다. 조금 전 어거스트와 대화하실 때 뒤에 있었습니다, 미스터 로엔.”

“원래 어거스트는 항상 금발 아가씨를 데리고 다녀서 의아했었네.”

“아 온지 얼마 안됐습니다. 이제 막 3개월쯤 지났습니다.”

“저런, 우리 신입사원들 이야기 들어보면 그때가 가장 힘들 시기라던데. 물이 아니라 술이 필요한 게 아닌가?”

“하하 아닙니다.”



 적당한 농담으로 분위기를 푼 로엔은 옆집에 거주하는 노인만큼이나 인자해보였다. 신입사원만이요? 회사에 있는 모두가 다 힘들다고 할 걸요. 속의 진실과 달리 지민은 거짓을 나름 예쁘게 포장했다. 아마 윤기를 보며 사업가의 재능을 조금은 배운 거 같다.



“다들 만족하며 잘 다니고 있는걸요.”

“그런가? 퍼진 소문과는 다르구만.”

“네?”

“그리 모르는 척 하지 말게나. 뉴욕에 사는 사람이라면 모두 다 알고 있는 사실 아닌가.”



 로엔이 껄껄 웃었다.



“어거스트는 독단으로 행동하는 게 유명하지. 주변 사람의 의견은 듣지 않고 말이야. 아 물론 어거스트가 뛰어난 사업가라는 건 인정하네. 덕분에 어거스트가 더욱 튼튼하게 자라난다는 것도.”

“아 그런 소문이….”



 지민은 어물쩡 반응했다. 누가 그런 진실을 마구 퍼뜨린 거지. 부정도 못하게. 이번에도 지민은 솔직하게 답하지 못하고 어설프게 웃었다. 처음 듣는 소문이라서요, 라고 덧붙이는 것도 빼먹지 않았다. 로엔은 푸근한 인상으로 지민의 말문이 막히는 말들만 골라 뱉었다. 꼭 노리기라도 한 것처럼.



“자네가 많이 힘들겠어. 듣자하니 매일 아침 신문 앞면이 조용할 날이 없지? 그래도 최근에는 꽤나 사업에 집중하는지 새로운 아가씨와 등장하지 않는 거 같다만.”



 스캔들로 타블로이드를 먹여 살린다는 속설이 나올 만큼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윤기의 사생활을 지칭하는 거다. 로엔은 이때만을 노린 사수라도 되는 듯 말을 멈추지 않았다. 어거스트의 다른 인사들도 대단하다 생각하네. 그 어린 회장에게 모든 걸 맡기다니. 다들 훌륭한 인내심과 인품을 가진 모양이야. 아, 물론 거기에 자네도 포함된다네. 로엔은 연신 웃는 낯이었다.



“하긴 남의 밥그릇에 숟가락을 끼얹으려면 심혈을 기울여야겠지. 아 오해하지 말게나. 현명한 창업가의 자세라는 뜻일세.”



 지민은 윤기의 평가에 지금에서야 동의했다. 치졸하다. 너무도 치졸해서 대기업을 이끄는 회장에 대한 예의로 응답을 해야 한다는 의무감마저 시들었다. 오늘 파티를 연 주인에 관한 험담 아닌 험담을 주인의 가장 측근에게 하는 행동이란. 한시라도 빨리 윤기가 있는 쪽으로 사라지는 게 해답인 듯하다. 이만 미스터 윤에게 돌아가봐야 할 거 같습니다, 하고 정중하게 돌려 말하려는 시점이었다.



“예전부터 그게 신기했어. 하트만과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는데 그 뱀 같은 감각은 똑같단 말이지.”



 어거스트의 전 회장. 윤기의 양아버지를 언급한 로엔은 천연덕스럽게 웃었다. 미소는 여전히 푸근했다.



“못 배운 걸 데려와 어떻게 가르치면 그런 능력까지 복제를 한 걸까 궁금하지 않나? 하트만이 살아있었더라면 한번 물어보고 싶군. 태생까지는 하트만이 바꾸지 못했는지 이 세상에 더 이상의 하트만은 없는 게 너무나도 아쉬워.”



 귀를 의심했다. 웃으면서 로엔이 던진 폭탄이 너무나도 강력해 지민은 하마터면 되물을 뻔 했다. 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신 겁니까? 세상에. 완전한 모욕이었다. 윤기가 하트만 가문에 완전히 입적되지 못한 사실을 비난한 것이다. 지민은 더는 웃는 표정조차 유지하지 못했다. 손에 빈 물컵이 들려있다는 게 천만다행이었다. 얌전히 넘어가는 게 자신이 할 일이고, 여기서 보이는 모든 행동이 어거스트를 대표하는 행동이라는 걸 알고 있었음에도 속이 불편하게 요동친다. 순간 윤기의 침실에 놓여있던 작은 액자가 떠올랐다. 행복하게 웃던 윤기와 그의 가족.



“아 자네도 그와 같은 나라에서 왔나?”

“미스터 로엔.”



 지민은 처음 선택한 길과는 정반대쪽으로 걸어나갔다. 로엔이 자신을 욕하기라도 한 것마냥 속이 껄끄럽고 까끌거렸으며 분노가 뜨끈하게 올라왔다. 왜 그때 윤기의 침실에 놓인 액자가 머릿속을 계속해서 파고들었는지는 모르겠다. 당차게 한 마디 뱉은 지민을, 로엔은 노련하게 덫을 파놓고 기다리는 사냥꾼이 먹잇감 보듯 눈을 빛냈다. 달아오른 감정에 눈이 어두워진 지민은 그 기미를 눈치 채지 못했다.



“말씀도중 끊어서 죄송하지만 저는 미스터 윤의 비서입니다. 방금 하신 그런 말씀들은…아!”

“이런, 괜찮나?”



 윤기의 손에 들린 잔의 와인이 지민의 어깨를 적시고 있었다. 조금 큰 지민의 외마디 비명에 사람들의 시선이 모인다. 윤기가 별일 아니라는 듯 손을 흔들어보이자 다시 흩어진다. 갑자기 이게 뭔. 난데없는 와인벼락을 맞은 지민이 어벙벙한 얼굴로 눈만 깜빡거렸다. 윤기는 자연스럽게 지민의 반대쪽 어깨에 손을 올리고 제 쪽으로 잡아당겼다. 더불어 웨이터가 내민 손수건으로 젖은 어깨를 꾹 눌렀다.



“죄송하게 됐군요, 미스터 로엔. 모처럼 즐겁게 대화중이신거처럼 보였는데.”



 지민의 어깨를 감은 손에 작게 힘이 들어간다. 꼭 우리 밖으로 탈출한 양을 다시 제 울타리 안으로 밀어 넣어 보호하는 것처럼. 윤기는 능청스럽게 말을 이었다. 아아 이거 안타깝게 됐습니다.



“제 비서가 이런 상태가 되어버렸으니 부족하게나마 저와 대화를 계속 하시는 건 어떨까요.”

“…크흠, 자네답지 않게 성급하게 왔군.”

“심부름을 부탁한 비서가 한참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길래 말입니다. 찾아와봤더니 미스터 로엔의 표정이 무척이나 즐거워 보여 저도 한시라도 대화에 끼고 싶은 마음에 제 발이 실수를 저질러버린 거지요. 앞으로는 주의하겠습니다.”



 괜찮나? 윤기가 물었다. 와인세례를 맞은 지민은 얼결에 기계적으로 작게 답했다. 네, 네 괜찮…아요. 윤기는 다소 과장스럽게 와인이 번진 지민의 어깨를 털어냈다. 생각보다 아주 많이 흘렀군.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려고. 더없이 다정한 어조로 털어주는 손동작에 지민이 와인세례를 맞았을 때보다 더 크게 눈을 깜빡이는 횟수를 증가시켰다. 또 민윤기의 다른 인격이 등장한 건가 싶은 눈이었다.



“옷 갈아입어.”



 윤기가 문 쪽을 턱짓했다. 지민이 황급히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확인한 윤기가 연이어 로엔을 똑바로 마주보며 말했다. 상냥하고 젠틀한 미소를 걸친 채로.



“미스터 로엔도 조심하시죠. 제 손이 미끄러져 또 와인을 쏟을지도 모르니까 말입니다.”



 우아한 협박에 로엔이 미간을 굳혔다가 힘겹게 폈다.



“그거, 아주 큰일이구만.”

“예. 아주 큰일이 될 겁니다.”



 윤기는 마지막으로 지민을 향해 덧붙였다. 뭐해, 빨리 가.






***







 떨어지는 샤워기의 물줄기를 맞으며 지민은 넋을 놓고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더라. 리셉션이 열리고, 윤기의 그림자 역할을 하다 잠깐 혼자 떨어진 사이. 살살 긁는 언사를 견딜 수 없어 발끈했다. 속사정을 다 제외하고 겉만 두고 본다면 일개 비서가 대기업을 이끄는 회장에게 맞먹은 거다. 힐긋거리는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홀을 빠져나왔다. 레이첼은 핵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이라도 들은 사람마냥 질린 안색으로 달려왔다. 어떻게 된 일이에요? 아니, 설명할 필요 없어요. 부디 하지 말아줘요. 이마를 짚은 그녀는 재빨리 기사를 부르고 다시 돌아오지 말란 충고까지 덧붙이며 완벽한 뒷수습을 했다.


 윤기는 실수를 하지 않는다. 하물며 어이없게 모두가 보고 있는 장소에서 칠칠맞게 와인을 흘리는 실수 따위는. 철저한 완벽주의자인 윤기는 지민이 매일 아침마다 사다 받친 커피조차 한 번도 흘린 적이 없다. 애초 리셉션에서 다급하게 움직일 필요는 없다. 레이첼 역시 머리가 지끈거리는 모양새로 돌아가라 말했다. 모두 지민이 커다란 사고라도 친 거처럼 대처한다. 늘어놓은 정황들로 지민은 현상황을 정리했다.



“…일 냈다….”



 걸린 것일 뿐이다. 어거스트를 조금이라도 흠집을 내고 싶어 안달하는 사람한테.


 만약 윤기가 등장하지 않았더라면? 로엔은 인자한 미소를 지우고 무례한 일을 당했다 언성을 높일 것이다. 모든 일은 교과서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아무리 좋은 상황으로 굴러가봐야 사람들에게 전의 상황을 설명하는 게 고작이다. 하지만 그럼 누가 믿어준다고? 심지어 대화하는 소리가 높았던 것도 아니었으며, 회장은 연신 선한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대기업 회장의 발언과 고작 취직한지 3개월 된 비서. 사람들이 어떤 이의 손을 들어줄지는 훤했다.



“…….”



 난 왜 다 이 모양인거지. 최악의 최악이다. 레이첼이 얼마나 신신당부를 했는데 그걸 못 참고. 내가 어거스트를 망칠뻔 한 거야. 지민을 울상을 지으며 손으로 얼굴을 푹 가렸다. 떨어지는 게 물줄기인가 아니면 내 눈물인가. 자책하던 지민은 늘 후회를 할 때마다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하는 고민을 이번엔 접어두었다. 어쩐지 같은 상황이 반복된다면 자신은 똑같이 로엔의 말을 끊고 덤볐을 것 같았다. 환하게 웃고 있던 액자 속 윤기가 머릿속에 남아있는 한은.



“일단은…그래.”



 벌어진 일은 이미 벌어진 일이고 다음을 생각해야 한다. 자기혐오를 고이 접은 지민은 샤워를 빠르게 끝마치고 샤워가운을 둘러맸다. 끈을 단단히 여미고 쇼파에 앉아 일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고민했다. 신데렐라의 백마 탄 왕자와 같은 심정으로 윤기가 등장했을 리는 결코 없을 터였다. 죄송하다 하는 건 당연하고. 그리고 또…또 뭘 해야 되지? 텅 빈 뇌는 자동으로 윤기의 반응을 예측했다. 갈 때도 사람 수는 같을 줄 알았는데 말이야. 지민은 한심하다는 평이 깃든 윤기의 명령 하나로 내버려진 짐과 터덜터덜 공항으로 자신의 캐리어를 끌고 가는 상상까지 순식간에 끝냈다. 아아 이렇게 피해만 잔뜩 입히고 쫓겨나기 전에 먼저 사표를 냈어야 했는데. 


 시무룩해진 눈매로 앉아있는 지민의 모습은 땅이 꺼질 듯 우울해보였다. 무릎을 끌어안고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난지도 인식 못하고 앉아있을 때였다. 지이잉 호텔 초인종 벨이 울린다. 레이첼인가. 죄송하다 해야지. 작별인사도. 유령처럼 스스슥 일어난 지민이 느릿한 발걸음으로 다가가 문을 땄다. 그리고 거기엔.



“뭐 이렇게 늦게 열어? 목이라도 멘 줄 알고 앰뷸런스라도 부를 뻔 했잖아.”



 늦은 초대에 다소 짜증난 얼굴의 윤기가 팔짱을 낀 채 서있었다. 화려한 민트색 머리카락에 바로 리셉션이 끝나고 온 건지 근사한 수트를 입은 채로. 지민은 문꼬리를 잡은 채 멀뚱멀뚱 서있었다. 퇴사명령에 이어 상상은 발전해 두 번 다시 윤기의 얼굴조차 못 볼 줄 알고 있었다. 윤기는 샤워가운을 꽉 여민 지민을 위아래로 슥 훑어보고는 무심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세워둘 거야?”

“아, 아니요. 들어오세요.”



 지민이 한걸음 비켜섰다. 호텔룸은 두 명을 꿀꺽 삼키고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다시 잠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