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cannot see this page without javascript.

[슈짐] 아스팔트정글 10

by 토페 posted Dec 14, 2016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BGM Peggy Suave - Route 66>










 심장이 철렁했다. 그 큰 레스토랑에서, 고상한 재즈클래식이 흘러나오는 공간에서 묻혀야 할 목소리가 들릴 리 없는 게 정상이다. 그러나 지민은 똑똑히 느꼈다. 민윤기가 그 특유의 서늘하고 저승사자 같은 음성으로 제 이름을 부른 게 확실했다. 평소 뛰어나다 느껴본 적 없는 시력이 이순간만큼은 원망스럽게 뛰어나 입모양을 정확히 구별했다. 내 이름 까먹은 거 아니었어? 매번 헷갈리게 레이첼이라 했으면서 왜 지금은 박지민이냐고.

 지민은 둔해 빠진 제 반응속도를 탓했다. 왜 민윤기가 들어오는 걸 멍청히 바라보고만 있었을까. 눈만큼은 마주치지 말았어야 했는데. 아니 차라리 눈이 마주치기 전에 지구가 멸망했으면 좋았을 텐데. 잠시 윤기를 못 본 척 지나가는 상황을 상상했다. 이대로 아무 일도 없는 척 돌아앉아 밥을 먹는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리지. 내가 그걸 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소심한 자신은 결코 자연스러운 연기를 하지 못할 것이며, 설령 행동으로 옮겼다 해도 등 뒤를 쏘아보는 무시무시한 시선에 접시와 같이 태워질 것이다. 오 날 못 본 모양이야. 그 기능도 못하는 눈, 무겁게 들고 다닐 필요 없이 시원하게 뽑아버리는 건 어때? 독설을 날리는 윤기를 떠올린 지민은 너무도 무서운 광경이라 냉큼 상상을 내쫓았다.

 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에서 날뛰었다. 구름이 갈라지고 그 사이로 도와줄 신의 목소리라도 들렸으면 싶었다. 지민은 몇 초 동안 선채로 눈동자만 흔들다 결국 어색한 미소를 띠우는 것으로 마무리 지었다.



"하하…오, 오셨어요? 미스터 윤…."



 나 진짜 왜 살까…. 그 많은 인사 중 기다렸다는 느낌이 나는 인사라니. 다행이라면 작은 목소리라 인사는 윤기에게까지 들리지 않았을 터였다. 테이블에서 식사를 하던 손님들은 경호원을 줄줄이 이끌고 들어온 남자와 평범해 보이는 남자의 관계성을 찾으려는 듯 두리번거렸다.

 정국은 뱀을 만난 토끼마냥 안절부절하는 지민을 보다 살짝 미간을 좁히고 윤기를 살폈다. 실제로 보니 까칠한 얼음 싸이코라 칭하며 치를 떨던 지민의 말이 이해가 간다. 검은 코트에 다소 창백한 무표정은 척 봐도 성격이 유순해 보이진 않았다.



"형, 앉아요."

"어, 어?"



 정국이 지민의 손을 끌어 다시 의자에 앉혔다. 윤기는 지민과 눈을 맞추다 정국에게 잠깐 시선을 두었다. 무표정한 얼굴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 누구도 알아챌 수 없을 만큼 견고했다. 이끌리듯 의자에 주저앉은 지민이 큰일났다는 식으로 목소리를 죽여 속삭였다.



"야 이게 무슨 짓이야…!"

"여기가 회사도 아니잖아요. 인사했으면 됐죠."



 민윤기가 그런 상식이 통할 사람 같니 넌. 만약 적당히 거지 같은 상사였으면 내가 이렇게 덜덜 떨지도 않았겠지. 지민은 제 손을 잡은 정국의 손을 털어내고 다시 벌떡 일어났다. 저절로 사무실에 있을 때처럼 공손하게 양손을 모아 잡았다. 자세를 원상복귀 했을 땐, 가만히 서있는 윤기를 어리둥절하게 쳐다보던 지배인이 다른 방향으로 손을 뻗으며 윤기를 안내하고 있었다. 지민은 온 힘을 다해 속으로 지배인을 응원했다. 야구도, 축구도 어느 스포츠도 그렇게 크게 응원해본 적이 없었다. 제발요, 어서 민윤기가 저를 무시하게 해주세요.



"조용한 곳으로 안내해…."



 윤기가 짧게 손을 들어 저지했다. 그러더니 지민이 서있는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고는,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궁금한 듯한 윤기 옆의 흑발의 미녀도 함께였다. 맙소사. 기절초풍할 뻔한 지민은 비틀거리며 무너지려는 제 다리를 가까스로 막아냈다. 윤기가 테이블까지 한걸음만을 남겨놓은 시점에서 아 하고 짧게 불퉁한 음성을 뱉은 정국 또한 일어났다.



"내 비서를 식당에서 볼 줄은 몰랐는걸."

"그게요, 미스터 윤."



 지민은 변명부터 주워섬겼다. 죄송하다고 하고 빨리 나가자. 아직은 신경을 거슬리기 전이다. 애인과 만드시는 완벽한 밤을 제가 주제넘게 방해했습니다.



"죄…."

"이쪽은 제 비서의 일행이신가 보군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민윤기입니다."



 윤기가 그린듯한 미소를 걸치고 정국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지민은 경악했다. 뭐지? 방금 그러니까, 민윤기가, 민윤기가…. 말도 채 나오질 못한다. 저 미소는 사업에서 윤기가 사람을 구워삶아먹을 때 내비치는 미소였다. 까칠하고 성질 더러운 본 모습에서 천재경영인 민윤기로 탈바꿈할 때 쓰는 가면. 왜 저 가식적 미소를 여기서 쓰는 거지. 어버버거리며 지민이 정신을 차리고 있지 못하는데, 정국은 태연히 윤기의 손을 맞잡았다.



"전정국이라고 합니다. 말씀 많이 들었어요."

"그렇군요. 이쪽은 제 애인인 줄리아입니다."

"반가워요."



 흑발의 미녀는 정국과 악수한 다음 얼이 빠져있는 지민에게도 손을 내밀어 악수했다.



"우리 자기 비서 중 이런 귀여운 동양인 남성분이 있다는 건 처음 알았어요."

"아, 박지민이라고 합니다."



 불과 5일전만해도 윤기의 애인자리에 있던 여성의 이름이 줄리아가 아닌 로타나라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지민은 악수를 하고서야 얼이 나간 정신을 조금이나마 붙잡았다. 어서 나가자. 더 있다 무슨 꼴을 보려고. 어떤 일이 벌어지든 결코 좋은 쪽은 아니라는 것에 지민은 제 월셋집도 걸 수 있었다. 당연히 VIP룸으로 모셔졌어야 할 윤기가 이쪽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앞날을 상상하기 끔찍했다. 윤기가 비즈니스용 미소를 건채 말했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같이 합석하는 건 어떻습니까?"



 절대 안 될 말이다. 지민의 안색이 푸르죽죽하게 죽어갔다. 밥 한끼 같이 먹은 적도 없었으며, 먹었다간 필시 체하게 될 것이다. 차라리 밥을 다 먹고 나간 척 연기를 하자. 어떻게든 빠져나가려 지민이 시동을 거는데, 그때까지 가만 서있던 웨이터가 또 상냥하게 타이밍을 빼앗았다.



"네 분이 앉으실 수 있는 테이블로 옮겨드리겠습니다. 주문은 그 후에 도와드리겠습니다."



 저 말이 나오기 전에 식당이 망해버리면 좋았을걸. 일순 지민은 안내하며 팔을 뻗고 있는 웨이터와 어디서 싸움이 있던 건 아닌지 떠올려봤다. 망했다. 윤기의 미소가 진해진다. 이대로 꼼짝없이 끌려갈 운명인 듯 하다. 더 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포기한 지민이 급기야 제발 중간에 아파서 실려나갔으면 좋겠다는 실없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놀랍게도 정국이 나서 저지했다.



"아름다운 레이디께서 실망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연인이 보내는 밤에 끼어드는 무례를 범하고 싶진 않아서요."



 윤기 못지않게 정국 역시 적당히 예의 차린 미소로 응수했다. 그때 잠시 웃고 있던 윤기의 눈에 이것 봐라, 하고 말하듯 이채가 감돌았다 사라졌다. 찰나인 그 순간을 잡은 사람은 레스토랑에서 아무도 없었다. 지민은 삐걱삐걱 기름칠 안된 로봇처럼 고개를 돌려 당당하게 윤기의 제안을 거절한 정국을 돌아봤다. 저, 정국아?



"이제 보니 내 비서가 좋은 후배를 두었군요. 처음 만난 자리에서 그런 부분까지 세심하게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쉽게 만날 수 없는 인연도 마찬가지로 소중한 법이죠. 언제 또 내 비서의 후배를 만나보겠습니까. 줄리아, 오늘 양해를 구해도 괜찮을까?"

"물론이야, 허니."



 줄리아는 썩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으나 윤기의 말 하나에 태도를 바꿨다. 정국은 그에도 무너지지 않았다.



"괜찮습니다, 미스터 윤. 연인이라 해도 기회가 언제까지고 있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이런, 그 말은 제가 굉장히 나쁜 남자라 들리는 군요. 하하 하지만 사실이지요. 저도 제가 좋은 연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줄리아에게 고마워하고 있습니다. 저같이 모자란 사람을 연인으로 맞아줘서 말입니다."



 지민은 오가는 말들이 믿기지 않아 입만 벌린 채 서있었다. 줄리아가 웃으며 기분 좋게 윤기에게 팔짱을 끼었다. 청산유수로 말을 흘린 윤기의 화법은 대단했다. 그 이유가 먹혀 들지 않을 것이라 못박으며, 연인을 칭찬하기까지 했다. 웃는 낯으로 윤기가 물었다.



"아 그만 아는 사람을 만났다는 거에 흥분해 눈치 없이 굴었나 보군요. 혹시 제가 불편한가요, 미스터 전?"

"그럴 리가요. 오히려 어거스트의 대표님과 식사를 같이 할 수 있는 기회를 누린다면 제게는 영광이죠. 거기다 가장 친한 사람의 상사 분이시니 둘도 없는 기회입니다. 제게는 좋은 기회지만, 금요일 저녁까지 직장상사와 한 테이블을 쓰는 건 직장인한테 너무한 일이죠. 아무래도 오늘은…."



 꺼지라는 말을 순화한 정국이 아쉽다는 듯 말을 흐렸다. 대놓고 퇴짜였다. 윤기는 겉과 속이 다른 월가의 능구렁이들과 밥 먹듯 입씨름한 경력답게 표정하나 움찔하지 않았다. 정글보다 더 물고 뜯는 경제사회에서 표정관리는 기본이었다. 아아 서운한걸.



"내 비서를 위해 식사 한끼 대접하고 싶은데 말이야…불편하다면 어쩔 수 없네. 내가 그렇게 불편한가? 식사 한끼도 같이 못할 만큼?"



 지민에게로 모든 시선의 화살이 꽂혀 들었다. 놀라 딸꾹질까지 할뻔한 지민은 차분히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민윤기가 묻고 있다. 자기가 불편하냐고. 진심으로 치자면 같은 공기 마시고 숨 쉬는 것조차 불편하다 답했겠지만, 그 속마음을 꺼낼 수 있는 대담한 박지민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사탕발린 미소를 걸친 윤기를 상대로 이미 제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정국이 빨리 말하라 손을 툭 친다.

 저 미소로 날 보면, 나한테 불편하냐고 하면 난. 내 대답은.



"아니요! 불편할 리가요. 감사합니다, 미스터 윤. 같이 먹자, 정국아. 내가 뭘 불편해 해. 전혀 아니야. 너무 좋아요. 어서 자리로 가서 앉을까요?"



 지민이 속세에 찌든 일개 월급쟁이의 해사한 연기미소를 선보였다. 정국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작게 미간을 좁힌다. 윤기가 차분하게 웃으며 말했다.



"다행이군요."

"…그렇네요."

"그럼 일단 자리를 옮길까?"



 이미 웅성거린 손님들은 민트색 머리카락의 남자가 누군지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어거스트 아냐? 그 탕아? 인생역전 한 고아? 수군거리는 대화들 사이에서 윤기를 지칭하는 호칭들이 나타난다. 한 발 떨어져서 대기하고 있던 지배인이 자리를 옮겨준다. 이쪽으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지민은 피눈물을 흘리며 정국이 못마땅하다는 듯 보내는 시선을 애써 무시했다. 나도 살고 싶어서 한 거야, 자식아….



"주문 도와드리겠습니다."



 윤기는 천 달러가 넘는 주문을 아무렇지 않게 했다. 거기에 정국이 웃으며 끼어들었다. 이렇게 된 이상 어디 한번 해보자는 투였다.



"와인도 한잔 하는 건 어떨까요? 역사적인 밤을 보낼 때는 술만큼 좋은 친구가 없으니까요."

"아주 좋은 생각이군."



 지민은 윤기가 삼천 달러가 넘는 와인을 시킬 때부터 가격에 대한 생각을 포기했다. 이미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도 모를 음식의 종류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인형을 열 개 만들라고 해줘. 앉은 자리도 원망스러웠다. 왜 하필 내가 민윤기 앞인 거야. 눈 마주칠 때마다 수명이 주는 기분이라고. 옆에 앉은 정국에게 지금이라도 바꿔달라 말하고 싶었다.



"학교는 졸업했어요?"

"아니요, 이제 곧 졸업합니다."

"잘됐군요. 줄곧 궁금했어요. 대학생들 사이에서 어거스트는 어떤 평판을 받고 있습니까?"



 윤기가 솜씨 좋게 대화의 화제를 텄다.



"어거스트라면 뭐…두말 할 것도 없죠. 모두 다 들어가고 싶어하는 걸요."



 초반 대화는 무난하게 흘러갔다. 윤기가 물으면 정국은 거슬리지 않는 선에서 답했다. 줄리아가 중간중간 밝은 농담을 넣으며 분위기를 환기시켰고, 지민은 딱히 웃기다 볼 수 없는 농담에도 부러 크게 웃으며 분위기를 유순하게 만들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대로만 흘러간다면 안락하게 끝날 식사였다. 두 시간 사이에 무슨 큰 일이야 있겠어. 혼자 염려하던 지민이 안심하려는 순간이었다. 정국이 불행의 시작이 될 운을 띄웠다.



“그러고 보니 최근에 그 기사 봤어요. 철도 개발권 놓쳤다는 거.”



 에피타이저를 입에 가져가던 지민이 멈칫했다. 정부에서 실시한 철도 시스템 개발을 책임질 기업을 선정하는 과정에서 어거스트가 물 먹은 사실은 유명했다. 지난주 어거스트의 탈락 소식이 전파를 타고 신문에 실렸을 때, 지민은 윤기의 발 아래서 처참하게 뭉개지는 디올 선글라스를 실시간으로 목격했다. 불처럼 화내며 책임자 새끼 우주선에 실어 터뜨려버리라 했을 때는 그야말로 사무실이 폭발하는 줄 알았다. 왜 그 이야기를 꺼내냐 정국의 발을 제 신발로 툭 쳤지만 정국은 멈추지 않았다.



“많이 아쉬우셨겠어요.”

“그때 나온 재미있는 기사들을 많이 보신 모양이군요. 유명인은 언제나 소문에 시달리기 마련이죠.”



 뉴스는 신나게 떠들었다. 어거스트의 추락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물어뜯기 바빴다. 특히나 몇몇 언론사는 윤기의 회장직 자질논란까지 끌고 들어왔다. 분별 못하는 어린 회장이 일을 크게 쳤다며, 슈가 스튜디오를 지금이라도 접어야 한다 비판했다. 신문을 보자마자 코웃음 친 윤기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면전에 대고 저 말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정국이 눈치 없는 척 가장하며 말했다.



“그럼 거기서 나왔던 슈가 스튜….”

“나 거기 냅킨 좀 줄래?”



 지민이 냅다 정국의 말을 끊었다. 머뭇거린 정국이 말을 멈추고 휴지를 건넸다. 그 때를 틈타 지민이 화제를 돌렸다.



“음식이 아주 맛있어요. 처음 먹어보는데 이건 키위인가요?”



 샤베트에 조각조각 잘라진 초록색 덩어리를 가리키며 지민이 아무것도 모르는 척 웃었다. 그러게요, 상큼하네요. 경영 이야기에 관심이 없던 줄리아가 드디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이야기에 공감해왔다. 시한폭탄을 제거한 지민이 한시름 놓기도 전에 정국은 또 일을 쳤다.



“문화사업은 하나의 모험이나 마찬가지죠. 어떻게 시작을 하든 결말이 원하는 대로 나오기란 매우 힘….”

“아 수저 떨어뜨렸다.”



 웨이터에게 다른 수저를 부탁하며 지민은 쓸데없는 이야기를 꺼냈다. 줄리아, 좋아하는 음식은 뭐예요? 상황은 계속 반복이었다. 정국이 입만 열라치면 지민이 치고 들어와 주제를 뭉갰다. 윤기는 무슨 생각인지 도통 모를 태도로 입이 부르트도록 화제를 이끄는 지민을 응시했다. 슬슬 더 추워질 텐데 걱정이에요. 프랑스요리는 프랑스어를 하며 먹어야 할 거 같은 기분이에요. 정국은 온 힘을 다해 방해하는 지민의 옆모습을 눈을 가늘게 뜨고 보다, 지민이 음식을 씹는 틈을 타 막아볼 테면 또 막아보라는 식으로 대화를 열었다.



“효율적으로 부품을 배치해야 오래 쓰고 잘 쓸 수 있는 법이잖아요.”

“맞는 말입니다.”

“저는 사람도 그렇다고 봅니다. 모두 자기 위치에서 할 일이 있죠. 어울리는 자리가 있고, 아닌 자리가 있고.”

“정국…윽.”



 지민이 말을 가로채려는 순간, 테이블 아래로 정국이 지민의 발을 꽉 밟았다. 지민은 얌전히 있으라는 정국의 신호를 무시하고 싶었지만, 발에 힘을 주고 누르는 힘이 장난 아니었다. 무슨 일 있냐는 듯 시선을 던져오는 윤기와 줄리아에 지민이 팔을 내저었다. 하하, 혀를 씹어서요. 정국은 말의 흐름이 끊기기 전 재빨리 화제를 이었다.



“모든 일의 기본에는 적합한 위치에 좋은 능력을 가진 사람을 두는 거죠. 철도 같은 경우도 그 자리에 뛰어난 인재를 보내면 되지 않을까요?”

“누구 좋은 실력자라도 알고 있나 봅니다.”

“네, 알고 있습니다.”



 윤기는 어디 한번 말해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정국이 말에 텀을 두었다. 그리고는, 저질렀다.



“여기 있는 미스터 윤 비서 박지민은 실력이 좋은 개발자거든요. 비서로는 아무래도 아깝죠?”



 정국이 지민을 눈짓했다. 야 이 미친 자식아. 지민은 정국을 향해 튀어나오려는 욕을 꼭꼭 씹어 넘겼다. 윤기가 와인을 한 모금 들이켰다. 이거야 말로 큰일이었다. 윤기의 손에 있는 와인잔이 허공을 갈라 정국의 머리에 안착할 것 같았다. 끝장이다. 지민이 어떻게든 말을 가로채려 안절부절하고 있는데, 윤기가 틈도 주지 않고 입을 뗐다.



"그건 곤란하군요."



 싱긋 웃는 미소가 근사했다. 따사로운 캘리포니아의 햇살을 옮겨놓은 것처럼.



"필요해서요, 제가."



 …네? 뭐라구요? 방금 뭐라고 하셨나요? 지민은 일순 손에 힘이 빠져 포크와 나이프를 떨어뜨릴 뻔했다. 음식을 입에 물고 있지 않은 게 천만 다행이었다. 이건 잘 짜여진 영화 같았다. 앞에 앉아 아낀다는 말을 스스럼없이 내뱉는 사람은 민윤기를 연기하는 다른 배우임이 분명하다. 차라리 고래가 하늘을 헤엄친다는 말이 더 현실성 있었다. 윤기는 약 먹은 것 같은 소리를 술술 던졌다.



"여러모로 도움을 많이 받고 있죠. 내 취향을 이보다 잘 아는 비서는 여태 없었으니까요."



 지그시 뱉은 한 단어 한 단어가 소유권을 주장하듯 욕심이 듬뿍 발려있었다. 귀를 의심한 지민은 다시 한번 단어를 되새겼다. 방금, 뭐? 도움? 도움을 받아? 뭐, 뭐? 먹고 있는 푸아그라를 FBI에 의뢰하면 코카인 양성반응이 나올 것이 확실했다. 아니면 반대로 말하는 마법의 주문이라던가.



"그래서."



 다리를 꼬고 거만하게 미소 짓는 그 모습은 지독히도 윤기에게 잘 어울렸다. 싸우듯 빙긋빙긋 웃으며 대꾸하던 정국도 차마 중간에 말을 끊지 못했다. 윤기가 마지막 한 방을 날렸다.



"굉장히 아끼고 있습니다."



 뿜을 뻔했다. 분명 정교한 거짓말일 그 말을 민윤기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당당하게 쳤다. 지민은 기함했다. 지금 귀로 좀, 엄청 무서운 말이 흘러 들어갔다 나간 거 같은데. 너무도 현실성이 없어 심장이 벌렁거린다. 아낀단다. 민윤기가 자신을. 기묘한 기운이 척추를 기어올라 목까지 훑고 지나갔다. 외계어라도 들은 것처럼 지민이 혼란스러워하는 사이 정국은 떫은 감을 씹은 얼굴로 말했다.



"…소문과는 정말 다르시네요."

"그렇게 보입니까?"



 소문은 소문일 뿐이죠. 윤기가 별 거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옅은 정적이 감돈 테이블을 환기시킨 건 눈치가 둔한 줄리아였다.



"우리 자기가 마음에 들어 하는 비서 분이시라니 저도 잘 보여야겠는걸요. 어떤 걸로 환심을 사면 좋을까요?"



 지민은 하얗게 탈색되는 머릿속을 필사적으로 붙들며 답했다. 아직은 정신을 놓을 때가 아니다. 민윤기가 앞에 있었다.



"제, 제가 오히려 잘 보여야죠! 미스터 윤의 피앙세 되시는 분께! 편하게 대해주세요. 아무거나 시켜주셔도 돼요."

"성격 너무 좋은 거 아니에요, 지민? 여자들한테 인기 많겠어요."

"아하하 많긴요, 전 오늘 줄리아처럼 제게 상냥하신 분은 처음 봤어요."



 지민은 스스로 지어보일 수 있는 미소 중 가장 싹싹한 미소를 뽑아냈다. 거짓말은 아니다. 여태 만나본 윤기의 애인 중 무시하지 않고 제 이름을 불러준 것만으로도 가장 상냥하긴 했다.

 정국은 윤기가 친 홈런샷을 쉽게 넘기질 못하겠는지, 말이 없는 상태였다. 나이프를 꽉 쥐고 인상만 구기고 있는 게 이러다 딱 일 나겠지 싶었다. 지민은 테이블아래로 정국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정국아, 그거 사람한테 쓰라고 준 거 아니야. 움찔 반응하며 왜 찌르냐는 듯 쳐다보는 정국을 무시하고, 앞만을 바라보며 미소를 유지했다.



"저 잠깐 화장실 좀 다녀와도 될까요?"

"그래."



 윤기가 와인잔을 휘휘 돌리며 말했다. 어쩐지 승자의 여유가 가득한 그 동작에 정국이 한번 더 미간을 꿈틀했다. 지민은 정국이 나이프를 쥔 주먹에 말리듯 덥석 제 손을 올렸다.



"참 정국아, 너 중요하게 전화 올 곳 있다고 했었잖아. 지금 올 때 되지 않았어? 나가서 한번 봐봐. 놓치면 안 되잖아."



 모두 거짓말이었다. 닥치고 따라 나와. 우리는 대화가 좀 필요한 거 같다. 지민은 정국의 손을 잡고 재촉했다. 응? 전화 하나 있었잖아. 정국은 이게 무슨 말인가 하고 말하듯 뚱한 표정을 하다 테이블을 흘끔 바라보고는, 정확히 잔을 기울이고 있는 윤기를 스치듯 본 후 얼추 장단을 맞춰주었다.



"…응, 하나 있었지. 잠시 자리를 좀 비워야 할 거 같습니다. 식사하고 계세요."

"천천히 와도 좋아요."



 줄리아가 둘만 남는 게 좋은 듯 가장 밝은 혈색으로 손을 흔들었다. 지민은 마주 손을 흔들며 반대로 발걸음은 빨리 했다. 뒤에 딸려가는 정국이 천천히 가라 속삭일 만큼 빠르게. 작은 손은 밖으로 나오고서야 정국의 손을 놓아주었다. 지민은 주어진 짧은 시간에 어떤 말부터 해야 할지 골랐다. 너무 많다. 민윤기한테 싸움 걸려고 작정했냐, 너 미쳤냐, 나 잘리게 하려고 작정했냐. 그 사이 정국이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뱉으며, 진지하게 윤기를 만난 소감을 말했다.



"한대 치면 안돼요?"



 그럼 형이 곤란한가. 눈에 작은 살기가 스치는 걸 보면 진심이다. 정국은 마음 같아선 그 오만함이 꽉 들어찬 얼굴을 열대도 더 때려버리고 싶었다. 별에 소원 비는 아이처럼 진중한 그 눈을 보고 지민이 기겁하며 도리질을 쳤다. 전정국은 한다면 진짜 할 놈이었다.



"안돼! 참아! 그 한대에 네 인생이 날아갈 수도 있다고!"

"세상에 저렇게 재수없는 새끼가 어떻게 28살까지 살 수 있는 거예요? 용케 총알 피해서 살아있네. 사람들 다 참나? 이런 거 보면 세상 아직 따뜻하고 배려심 많아."

"…정국아 지금 너 많이 흥분한 거 같은데, 우리 좀 진정을 해볼까?"



 심호흡을 해보는 거야. 지민이 정국의 가슴팍에 손을 올리고 따라 하라 시범을 보였다. 이렇게 깊게 들이마시고, 이렇게 내뱉는 거야. 그리고 생각을 해. 내가 민윤기를 때리면 지민이 형 목숨이 위험하고, 내가 감옥에 갈 수 있겠다. 세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가장 불행한 일들 있잖아. 이런 거 떠올려 보라고. 정국이 투덜거렸다.



"왜 세상에 법 같은 게 있어선. 법 사라지면 나한테 가장 먼저 연락해요. 내가 제일 먼저 저 새끼 처리해줄 테니까."

"…너 아니어도 많으니까 걱정 마."

"와 너무하네. 살인도 부지런해야 할 수 있고. 그럼 형이 일단 한발 쏴서 찜 해놔요. 도망 못 가게 다리가 좋겠다."

"내가 무슨 총을 쏴! 그리고 법 없어지면 제일 좋은 게 민윤,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지민이 답답하다는 듯 제 가슴팍을 두들겼다. 그리고는 차분히 목소리를 톤다운 시키며 물었다.



"너 나 잘리게 하려고 작정했어?"

"뭐가요."



 지민이 미치겠다는 듯 자신의 머리카락을 쥐어뜯듯 잡아당겼다. 뭐가? 뭐가요? 너 지금 그 말이 나와? 정국은 지민과 다르게 아주 평온했다. 불쾌한 기색이 없지 않아 남아 있었지만.



"너 저 사람 누군지 몰라서 그래? 어거스트 회장이야!"

"알아요. 방금 전까지 그래서 어거스트 이야기하고 나온 거 아니에요?"

"나 진짜 너 기억상실증이라도 걸린 줄 알았다. 그러면 내가 모시는 상사라는 것도 알고 있는 거 맞지?"

"그래서 같이 테이블에 참고 앉아있는 거잖아요."

"야! 아는 자식이! 아는 자식이 왜 민윤기한테 싸움을 걸고 있어?"



 지민이 씩씩거렸다. 무슨 바람이 분 건지 윤기가 유연하게 넘어가고 있지만, 평소 그의 성질을 생각해볼 때 지금쯤이면 벌써 다섯 번도 넘게 테이블이 뒤집어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지배인은 달려와 허리가 부러져라 사과하고 있을 것이며, 자신은 다시 회사로 돌아가 뒷일을 처리하고 있을 것이다. 윤기의 심한 변덕이 오늘만큼은 다행이었다. 멱살이라도 붙들려는 지민을 두고 정국은 쫄긴커녕 시원하게 답했다.



"저 새끼가 빡치게 하잖아요."

"…그건 인정하긴 인정하는데."



 나도 일하다 보면 하루에 가끔씩 엄청 화가 쌓이긴 하거든? 지민은 그 화를 참고 사는 궁극적 이유를 늘어놨다.



"그래도 먹고 살아야지."

"왜요. 저 사람이 나한테 월급 주는 것도 아닌데, 내가 굽혀야 할 이유가 어디 있어요?"

"나한테는 줘, 월급."

"알아요. 그래서 민윤기 편 들었잖아요."



 싫다는 말 하는 게 뭐가 어렵다고. 정국이 심통 난 아이처럼 대꾸했다. 원래 그 정도까지 시비 걸듯 이야기할 생각은 없었으나, 끼어들어 윤기를 보호하는 지민이 마음에 안 들었다. 그걸 가만히 받고 있는 민윤기는 더더욱 마음에 안 들었다. 재수없고도, 갑자기 끼어들어선 오늘 계획을 망친 것도 모자라 권리 행세까지 하고 있다. 지민은 살려달라며 정국의 어깨를 안마하듯 주물거렸다.



"그럼 나 좀 살려줘. 싸움 걸지 말아줘. 응?"

"싫어요. 월급, 그거야 형 사정이고."

"야!"



 정국은 어른스럽지만 한번 엇나가면 대책이 없었다. 이것저것 지민을 어린애 취급하며 가끔씩 반말도 툭툭 던지다, 가끔씩 고집을 부렸다. 잘리면 네가 다른 회사 꽂아줄 거냐며 화를 내려던 지민은 삐진 듯한 큰눈을 보고 달래기로 노선을 틀었다. 그게 더 잘 먹힐 것 같았다.



"…알았어, 뭐 원해. 뭐 해줄까. 뭐 하면 내 직장생명 안 끝내줄래…?"

"다음에 만날 때 형이 다 쏴요."



 다 뜯어먹을 거야. 틱틱거리는 정국을 지민은 레스토랑 안쪽을 바라보고는 열심히 달랬다. 그래, 다 벗겨 먹어라. 영화? 뮤지컬? 술? 밥? 내가 집도 사주마.



"그거면 돼?"

"네."

"좋아. 우리 이제 깔끔하게 약속한 거다."



 지민은 평화의 협정을 상징하는 의미로 포옹을 했다. 저보다 훌쩍 큰 등을 끌어안고 도닥거리며 빌었다. 민윤기 심기 더 이상 그만 건드리고, 적당히 맞장구 쳐주고, 데리고 온 애인이 재미 없는 이야기 해도 재미있다고 하는 거야. 내 월급이 끊기지 않도록. 정국이 그럴 거면 인형을 데려다 놓으라 궁시렁거렸지만, 지민은 흘려 넘기며 나올 때와 똑같이 정국의 손목을 잡고 이끌며 자리로 귀환했다. 줄리아가 왔어요, 하고 묻자마자 정국이 너스레를 떨었다.



"이거 너무 오래 있다가 들어와 버렸네요. 죄송해요. 이왕 들어오는 김에 같이 들어오려고 했는데, 형이 화장실에서 나오질 않아서 말이에요."

"지민, 속이 안 좋아요?"



 아니면 여기 요리가 입에 안 맞아요? 줄리아가 염려 된다는 듯 물었다. 말과는 반대로 이제 방해꾼이 사라진다는 기쁨에 입꼬리가 조금씩 들썩거렸다. 어서 꺼져라, 눈빛이 하는 말이 귀로 잘 들렸다.



"어…아니 그건 아닌데…조, 좀 그런 거 같기도…."



 지민이 엉성하게 대답하며 이제 괜찮다는 식으로 웃음을 띄웠다. 식기를 내려놓은 윤기가 저런, 하며 거들었다.



"안색이 별로 안 좋군."



 그건 당신 때문인데요. 지민은 차오르는 말을 꾸역꾸역 밀어 넣고 다시 한번 괜찮다 대답했다. 그날은 웬일인지 두 번 묻지 않는 윤기가 또 한번 변덕을 부렸다.



"하얗게 질린 게 안 괜찮아 보이는데, 정 상태 안 좋으면 먼저 가. 괜찮지, 줄리아?"

"그럼요. 아프다는데. 식사는 다음에 또 해도 괜찮죠."



 윤기가 한 말 중 퇴근하라는 말 다음으로 좋았다. 지민은 어어, 하며 곤란한 듯 눈을 굴렸다. 이대로 순식간에 잘 됐다는 듯 나가는 건 좀 그런 거 같은데. 왜 난 나가라도 해도 쉽게 못 나가는 걸까. 정국은 망설이는 지민을 두고 보다 이대로는 또 자리에 주저앉게 생겼는지 몸소 나섰다.



"가요. 내가 데려다 줄게요."

"그, 그럴까…?"



 정국이 어깨를 부축하며 일으키자, 지민은 엉거주춤 딸려 올라가며 마지막까지 윤기의 눈치를 살폈다. 가도 돼? 진짜 가도 되는 거야? 이 지옥에서 나가도 되는 거야? 우물쭈물하던 지민은 기회를 붙잡기로 했다. 지옥의 마왕이 나가라는데, 나가도 되겠지.



"월요일 날 보지."



 팔짱을 낀 윤기가 인사를 던졌다. 지민은 그 순간 비행기 티켓을 예약하고 싶다 생각했다. 여기 월요일이 오지 않는 나라로 한 장이요.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다시 보자 말하는 민윤기는 사형선고를 때리는 판사로 보였다.



“다음에도 식사 자리 같이 해요.”



 마음에도 없는 아쉽다는 소리를 하는 줄리아와 윤기에게 양해를 구한 지민은 레스토랑을 나오자마자 아직 끝나지 않은 하루의 불행을 마주쳤다. 진짜로 배가 살살 아프다.



“정국아 나 어떡하지.”

“왜요.”

“체한 거 같아….”



 지민이 끄응거리며 배를 부여잡았다. 긴장이 풀리자 통증이 거세게 온다. 형은 어떤 부분에서 보면 진짜 대단해요. 골치 아프다는 듯 바라봐오는 정국의 옷자락을 한 손으로 붙들며 부탁했다. 이왕 구해준 김에 집에 데려다 주는 거 진짜로 해주면 안 될까.















----


슬럼프에 걸려서 글 상태가 말이 아닌데 예쁘다 해주시는 피드백 주신분들 정말 감사드립니다 흑흑ㅠ♡ㅠ 저도 사랑해요ㅠㅠㅠㅠㅠㅠ덕분에 일주일 넘기지 않고 가져올 수 있었습니다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