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cannot see this page without javascript.

[슈짐] 아스팔트정글 09

by 토페 posted Dec 09, 2016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BGM Jeff Bernat - If you wonder>











"이거 만들어."



 윤기가 책상 한 켠에 놓인 상자를 고갯짓했다. 총총 다가가 순순히 상자를 떠안은 지민은 네, 하고 답하려다 멈칫했다. 만들라고? 천상 공대생인 지민은 만들다, 라는 단어와는 인연이 없었다. 음식은 고모할머니가 돌아가신 뒤부터 간신히, 정말 간신히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수준으로만 만들 수 있었고, 흔히 만드는 크리스마스카드도 축하카드가 아니라 결투장처럼 만들었다. 자신 있게 만들었다 말할 수 있는 것은 전공에서 배운 백신뿐이었다. 이거 좀 쎄한데. 불안함에 상자를 끌어안고 있던 지민은 윤기의 한 소리를 끄집어내고야 말았다.



"그렇게 가만히 끌어안고 있으면 상자 안에 있는 요정들이 만들어주기라도 하나 보네."

"아, 죄송합니다."



 윤기가 사과 받는 것도 귀찮다는 듯 나가라는 손짓을 했다. 말 예쁘게 하면 입에 가시라도 돋나. 입술을 작게 삐죽거린 지민은 집무실을 나와 책상에 상자를 내려놓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뭐가 들어있을까…. 어림잡아 축구공만한 크기의 상자 안에 얼마나 기상천외한 것이 들어있을지 예측도 가지 않으며, 알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는다. 뭐든 제발 오늘 집에까지 가져가서 만들지 않는 걸로 해주세요. 빌며 지민은 긴장된 손으로 상자를 열었다.



"…이게 뭐야?"



 눈을 깜빡거리며 내용물을 보던 지민이 상자 속에 들은 재료들을 꺼냈다. 실, 바늘, 솜, 천. 그리고 반짝거리는 장식품들이었다. 설마 지금 인형 만들어오라는 거야? 상자밑바닥까지 뒤지니 곰 인형 만드는 방법이 적힌 종이가 추측을 확인사살 시켜준다. 제 상사는 경영논문을 쓰라고도 명하고, 영화감상문을 쓰라고도 명하더니 이번에는 예술력을 상승시켜줄 모양인 듯했다. 말도 안돼. 내가 무슨 인형을 만들어. 현실을 부정하며 지민이 널부러져 있는데, 마침 기획실에 다녀온 석진이 지민을 발견하고는 다가왔다.



"어, 이거."



 석진이 반갑다는 듯 곰인형 솜을 손가락으로 찔렀다. 이야, 일년 만인가. 벌써 일년이나 됐네요. 스쳐 지나가는 아릿한 기억에 석진이 허허 웃었다. 회사에서 하루는 엄청 안 가는데 이렇게 보니까 시간이 또 빠르네요.



"선배님 이게 뭔지 아세요?"

"왜 몰라요. 작년에 내가 만들었는데."

"진짜요? 그럼 뭐에 쓰는지도 아세요? 이 인형 왜 만들어야 해요? 꼭 만들어야 해요? 만들라고는 했으니까 만들어야겠지만…사면 안돼요? 저쪽 도로만 가도 아이들 선물가게에 인형 많은데. 우리 회사 돈 많잖아요."



 그 인형공장도 살수 있을 텐데. 차마 윤기 앞에선 질문 할 수 없었던, 이딴 인형 쓸 데가 어디있다고요 하는 질문을 돌려 말했다. 윤기에게 조카나 어린 혈육이 있다면 이해를 하겠다. 그러나 민윤기는 만인이 알다시피 고아인 몸이고, 남은 친가족도 없다. 석진은 꽤나 억울해 보이는 지민의 동그란 머리를 슥슥 달래듯 쓰다듬었다. 우리 막내비서, 이게 그렇게 억울했어요?



"고아원에 보내는 거거든요."

"고아원이요?"



 예상 밖의 답에 지민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거스트가 고아원에도 후원하는 건 지민도 알고 있죠? 가장 크게 후원하는 곳이 하나 있는데, 거기서 매년 보내줘요. 아이들한테 고마운 사람이라고 하면서 소개한다 했었나? 아무튼 아이들이 쓴 편지랑 함께 와요."

"어거스트가 후원하는 건 알고 있었는데 이런 일까지 할 줄은 몰랐어요."

"아마 미스터 윤부터 하는 걸걸요?"

"어 전대표님부터가 아니라요?"

"나도 레이첼한테 들었는데, 그땐 없었다고 했어요. 참…기분 좋은 일이지만 바쁠 때오면 힘들긴 해요."



 석진이 난감하다는 듯한 눈빛으로 곰인형의 눈이 될 단추를 만지다 내려놓았다. 지민은 반대로 석진의 이야기에 의욕을 얻었다. 콘돔을 사오라는 것보다 훨씬 생산적이고 보람된 일이다. 민윤기 커피 사오는 거보다 뜻 깊은 일이잖아.



"아이들한테 가는 거면 예쁘게 만들어야겠어요!"

"바느질 잘해요?"

"어…처음 해봐요."



 자신 없는 목소리로 웅얼거린 지민이 이내 눈꼬리를 해사하게 접으며 석진의 손을 답싹 잡았다.



"헤헤, 선배님 많이 바쁘세요?"

"…알았어요, 알려줄게요."



 석진이 기획부 안건을 잠시 내려놓고 실과 바늘을 집었다. 역시 선배님! 지민은 열정적인 학생의 자세로 석진을 따라했다.



"이렇게 시작해서 이렇게 바늘을 통과시키고, 이렇게 하면 돼요."

"이렇…아!"



 처음부터 바늘에 손가락이 찔렸다. 지민이 손을 파닥거리며 천을 놓쳤다. 석진은 놀라기보다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뭐 했다고 벌써 다치는가. 어려운 부분도 아니다. 바늘을 넣자마자 찔릴 수도 있어…? 얘 이거 다 할 수 있을까. 석진이 찔린 손가락을 물고 있는 지민을 걱정스레 바라보다 한마디 하려는 때였다.



"기획부 서류 들고 오다 죽은 거야? 아니면 누구한테 일 못하는 병이 옮기라도 한 건가? 개발팀? 기획팀? 어느 쪽?"



 집무실 안쪽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석진이 부랴부랴 파일을 챙겼다. 지민, 수고해요. 사무실에 천과 함께 남은 지민은 책상에 놓인, 어쩐지 반짝거리는 기대를 품은 것처럼 보이는 곰인형의 눈단추를 뒤집어 놓았다. 미안해, 네 기대대로는 할 수 없을 거 같아.



"그래도 내가 할 때 까지는 해볼게."



 본격적으로 바늘을 집어 든 지민은 기합을 넣었다. 그리고 일을 시작하기 직전, 잠시 폰을 들고 외근을 나간 레이첼에게 문자를 넣었다. 레이첼, 올 때 밴드 한 박스만 사다 줄 수 있어요?




 

 민윤기가 내리는 기상천외한 심부름들을 하나하나 노트에 다 적었다면, 난 그걸 책으로 내서 인세로 충분히 먹고 살수 있지 않았을까. 장르는 호러판타지고, 제목은 죽은 비서의 사회. 딴 생각을 하던 지민은 손가락을 찌르는 따끔한 감촉에 작게 악! 했다. 맞은편 책상에서 일하던 석진이 놀라 지민을 쳐다봤다. 전 괜찮아요, 신경 쓰지 마세요. 엄지 손가락을 입에 문 지민은 작게 웃으며 멀쩡하다는 신호를 보내 석진을 안심시킨 뒤, 제 손에 쥐어진 일거리를 막막하게 주물럭거렸다. 한쪽 팔의 연결만 남은 곰인형이었다.



"쫌 어렵네."



 으으, 고통스레 머리를 쥐어뜯고 싶은 심정을 누르며 지민은 밴드를 또 하나 꺼내 손에 붙였다. 그래, 좋게 좋게 생각하자. 민윤기가 그래도 그런 건 안 시키잖아. 제우스 신전에서 횃불 뺏어오기, 스카이다이빙 하면서 태평양 면적재기 같은 거. 아니 필요하다면 시킬 인간이긴 한데…. 제 허리에 스카이다이빙 밧줄을 묶는 상상을 하다 지민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난 그럼 진짜 사표 던질 거야.

 지민은 다시 실을 엮으며 감상에 빠져들었다. 그래도 이런 부탁 거절하지 않는 거 보면 그렇게까지 나쁜 사람은 아닌 거 같긴 한데. 이 인형은 어린 날의 자신한테 보내고 싶었던 게 아닐까. 전대표는 하지 않았던 일을, 현재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윤기가 진행한다는 걸 들으니 아직도 과거에 묶여있을 수도 있단 생각이 어렴풋이 들었다. 성격은 그렇게 까칠하면서 이런 일에는 무시하지 못하고 왜 관대해지는지, 그 아프다는 말조차 쉽게 하지 않는 건지.



"아!"



 또 찔리고서야 지민은 상념을 끊었다. 아씨, 멍하니 같은 행동만 하다 보니까 이상한 생각만 하게 되네. 세상에서 제일 쓸 데 없는 게 민윤기 걱정일 텐데. 지민은 가능한 머릿속을 비우며 팔을 연결하는 작업에 열을 올렸다.

 피와 땀을 받쳐 곰인형이 완성되었을 때, 지민은 자식새끼마냥 곰인형을 끌어안았다. 예쁘다, 예뻐. 다소 처음이라 엉성한 바느질 솜씨가 돋보였지만 제 눈에는 예쁘기만 했다. 눈에 실밥이 조금 튀어나와있고, 솜이 몰린 부분이 드문드문 보였지만 이 정도면 지민의 입장에서 합격점이었다. 무엇보다 더 이상 쓸 밴드도 남아있지 않았다. 신이 난 지민이 곰인형을 들어올려 레이첼에게 선보였다.



"레이첼, 이 인형 어때요?"

"…설마 그거 완성본?"

"네!"



 어때요? 예쁘죠? 아이들이 좋아하겠죠? 자신만만한 지민의 앞에서 레이첼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고, 석진은 어설프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예쁘긴 한데, 음, 그니까. 어떻게 잘 말을 돌려 정정해줘야 할지 모르는 석진 대신 레이첼이 나섰다. 기대를 부시는 일에 전문가는 바로 곁에 놓고, 상처를 줄 역할을 담당할 의무는 없다.



"미스터 윤한테 가져가서 검사 맡아요."

"그래야겠어요. 다녀올게요!"



 레이첼은 신이 나 사라지는 지민을 보고 깔끔하게 한 마디로 정리했다.



"오늘도 셋이 야근하겠네요."

"오늘 야근 안 한다면서 지민이 얼마나 신나 했었는데…."



 석진이 안타깝다는 듯 지민의 책상에 널려있는 밴드박스를 쳐다보았다. 너무 안타까워서 말이 안나온다.



"역시 알려줘야 했을까요? 눈 단추랑 옷 단추랑 바꿔서 했다고?"

"그냥 밴드나 한 박스 더 사다 줘요. 일해요, 진."

"미안해요, 지민. 내가 좀 더 시간이 많았더라면…."



 석진은 풀이 죽어 나올 막내비서를 위해 짧은 애도를 표했다.





 정중히 노크하고 들어온 지민은 나름 자신감이 넘치는 손으로 인형을 윤기에게 내밀었다. 윤기는 인형보다 먼저 밴드가 덕지덕지 둘러져 있는 작은 손에 시선을 빼앗겼다. 못해도 수없이 많이 찔린 듯한 손은 차라리 붕대를 감는 게 이상적일 듯했다. 인형을 받고 보기 전 윤기가 스치듯 말했다.



"오래 걸린 이유가 있었군."

"아 이거요? 처음이어서…그래도 괜찮아요.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지민이 멀쩡함을 증명하듯 양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러다 뒤늦게 말이 잘못 나간 게 아닐까 고민했다. 민윤기가 날 걱정해?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날 걱정할 리가 없을 테니, 이건 인형을 걱정한 건가? 시키신 일에 피해가 가지 않았다고 답했어야 하는데. 윤기는 걱정과 달리 지민의 답을 흘려 넘기며 인형에 시선을 박았다.



"……."



 지민이 긴장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 인형을 손에 들고 가만 보던 윤기가 검지 손가락으로 인형의 눈을 꾹 눌렀다. 누르고는 곰인형의 배에 달린 단추를 누르고 얼척 없다는 듯 하, 했다.



"넌 이게 맞다 생각해?"

"네?"

"내가 언제 새로운 거 만들어 오라고 했어? 시키는 대로 설명서 따라 만들어오라는 게 그렇게 어려운 요청이었나?"

"설명서대로 했는…어어, 이게 왜…!"



 눈치채고 혼란스러워하는 지민을 윤기가 한심하게 쳐다보았다. 지민은 변명거리도 찾아 나서지 못했다. 빼도 박도 못하게 틀려버렸다. 나 진짜 허리에 끈 안 묶고 뛰어내려야 하는 거 아냐. 자랑스러웠던 기분이 자학으로 바뀌어 우울해진다. 지민이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입술을 꾹 물었다.



"…죄송합니다. 다시 만들어 올게요."



 지민이 곰인형을 달라는 뜻을 담아 윤기에게 양손을 뻗었다. 윤기는 제 앞에 모인 작은 손을 눈동자만 굴려 바라봤다. 대체 이 작은 인형 하나를 만들면서 얼마나 찔린 건지, 많이도 붙였다. 과장을 보태 살이 보이는 부분보다 밴드로 덮인 부분이 더 많았다. 지민은 빤히 쳐다보는 윤기에 민망해져 손을 쥐었다 폈다 했다. 그렇게 보시는 거 이해하겠는데요. 일단 저도 제가 못 미덥긴 한데 말이죠.



"그…피 안 묻게 조심할게요."

"누가 보면 나 대신 죽으라 등 떠미는 줄 알겠네. 그 꼴로 손이 움직이긴 해?"

"이번엔 잘 할 수 있어요. 아까는 처음이라 헷갈리고 서툴러…."

"네 변명엔 관심 없어."



 윤기가 칼같이 말을 끊었다. 탐탁지 않은 눈으로 손을 보고, 지민의 얼굴을 한번 보더니 깊은 한숨을 내쉬곤 양팔의 소매부분을 걷어 올렸다. 설마…. 아무리 일을 못해도 윤기가 손을 올린 적은 없었다. 이 곰인형이 그렇게 화날 부분이었나? 지민이 절로 움찔하며 윤기의 눈치를 살피는데, 윤기가 곰인형을 내려보며 손을 내밀었다.



"실이랑 바늘."

"여, 여기요."



 상자를 뒤져 꺼낸 지민이 실을 꿰 윤기의 손에 올려놓았다. 혹시라도 윤기가 성질 내며 바늘을 던져버릴까 걱정하던 지민은, 그 다음 이어진 윤기의 행동에 믿지 못하고 눈을 크게 떴다. 평생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장난감 따위 시선도 주지 않을 것 같은 남자가 친히 곰인형 눈 단추를 떼고 있었다. 정말 인형을 던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고치고 있었다. 나 자르려고 하는 건가. 지민이 안절부절하며 어찌할 줄 몰라 발만 동동 굴렀다.



"미, 미스터 윤 지금…어…."

"왜."

"제가 할게요. 다시 완벽하게 해올 수 있…네…가만히 있겠습니다."



 깨갱, 지민은 윤기가 차게 노려보는 시선에 꼬리를 말았다. 눈 단추를 다 떼고, 옷 단추까지 다 떼었다. 무표정으로 윤기가 바늘을 잡은 순간, 윤기의 손끝만을 바라보던 지민이 앞으로 튀어나왔다. 책상 가까이 다가와 허리를 굽혀 윤기의 손을 잡았다.



"어, 안돼요. 이렇게 하시면 찔릴 수도 있어요!"

"……."

"이건 이쪽으로 이렇게 하는 게 좋아요."



 섬세한 손을 잡은 작은 손이 꼬물꼬물 움직였다. 이쪽은 이렇게 고정시키고, 이 손으로 움직이면 편하구요. 양손으로 바늘을 잡고 있는 윤기의 오른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오늘 수도 없이 찔려 얻은 노하우를 알렸다. 짧은 손가락으로 바쁘게도 돌아다니며 왼손의 자세를 바로잡고, 오른손의 자세를 고쳤다. 손만을 바라보며 설명을 마친 지민이 고정된 손의 자세에 흐뭇하게 헤헤 웃으며 눈을 휘었다.



"됐다, 이제 괜찮으실 거예요. 해보세요."



 평소 내리는 이상하고 터무니없는 심부름을 따질 때, 찔려 고소하다 코웃음을 쳐도 모자라지만 자연스럽게 몸이 튀어나갔다. 어쨌든, 민윤기도 아플 수 있는 사람이잖아. 손을 겹치고 있던 지민은 그제서야 얼굴을 쿡쿡 찌르는 시선을 눈치챘다. 잠자코 손을 내준 윤기였다.



"어어…저는 손이 다치실 거 같아서…."



 빤히 쳐다보는 눈길에 지민이 주춤주춤 숙였던 허리를 일으켰다. 쳐다보는 시선은 손이 떨어지고도 꽤나 오래 머물러있었다. 설마 잡았다고 화내는 건가. 인상을 구긴 것도, 미간을 찡그린 것도 아닌 무표정에조차 괜스레 쫄은 지민은 사과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다. 아니야, 지난 번처럼 또 감상문이나 써오라는 이상한 일을 시킬 수도 있어. 지민이 입술을 달싹거리다 자그맣게 말했다.



"제 얼굴에 뭐 묻었나요…?"

"아니."



 윤기가 곰인형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 왜 이렇게 불안하지. 밴드도 없는데 찔리면 어떡해. 지민은 마지막까지 걱정을 담아 말했다.



"손 조심하세요."



 윤기는 잠깐 멈칫하더니 언제 멈췄냐는 듯 거침없이 단추를 꿰기 시작했다. 지민은 그때 알았다. 나쁜 놈은 돈 말고 재능도 남보다 남다르게 많이 가진다는 것을. 순식간에 단추를 달은 윤기가 인형을 지민에게 던졌다.



"고아원에 보내고 퇴근해."

"…네."



 인형을 받아 든 지민은 밀려오는 창피함을 숨길 수 없었다. 젠장, 나보다 잘하잖아. 괜히 아는 척 했다. 얼마나 하찮아 보였을까. 홧홧하게 귓등이 달아오른 지민을 석진이 위로했다. 많이 까였어요? 지민은 괜찮다 답하면서 책상에 뜨거워진 얼굴을 묻었다. 묻지 말아주세요, 잠시 제 자존심을 위로할 시간이 필요해요….









***









 형, 금요일날 시간 돼요? 정국으로부터 문자를 받자마자 지민은 윤기의 스케줄러부터 뒤졌다. 제 스케줄러는 볼 필요도 없다. 윤기의 스케줄이 곧 제 스케줄이었고, 명령 하나로 야근이 정해지는 판이다. 금요일. 애인과 있을 가능성 높음. 정시퇴근예상. 지민은 단숨에 정국의 제안을 수락했다. 제발 오늘은 예상대로 흘러갔으면 좋겠는데. 윤기가 변덕으로 스케줄을 뒤틀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다.

 코트를 벗어 던진 윤기가 오늘만큼은 지민의 바람을 이루어주었다.



"호텔 예약해놔. 레스토랑도 예약하고. 프랑스 요리로."



 럭키! 지민은 행복하게 퇴근만을 기다렸다. 그날 하루는 어쩐지 일이 술술 풀려나갔다. 윤기가 시킨 일도 깔끔하게 완료했고, 점심시간도 15분 모두 즐길 수 있었다. 퇴근시간이 가까워 윤기의 차를 문 앞에 대기시킬 때까지도, 심지어 정국을 만날 때까지만 해도 완벽했다.



"형, 타요."

"야 어디 가는 건데, 말 좀 해줘 봐."

"어디를 가긴요. 밥 먹으러 가죠."



 정국이 타고 있던 택시에 올라탄 지민은 별일이라 생각했다. 보통 정국과 약속을 잡으면 소소하게 노는 편이었다. 펍을 가고, 괜찮은 음식점을 가고, 영화를 보고. 전날 할 일을 짜는 편이건만, 이번 약속은 다른 때와 달리 정국이 주도했다. 밥 먹을 장소도 정국이 알아서 예약해놨다 알리고, 심지어 밥까지 산다는 말에 지민은 입을 떡 벌리며 감탄했다. 종종 밥을 자주 사던 지민과 달리 정국은 밥도 잘 사는 편이 아니었다. 이 정도까지 잘하면 무언가 수상하단 말이지.



"너 말해봐. 오늘 뭐 있어? 잘못한 거 있으면 지금 말해. 용서해줄 테니까."

"없어요."

"수상한데…."

"아 뭘 수상해 또. 계속 수상하대. 그냥 중요하게 할 말이 있다고요."

"아니, 그니까 그 할말이 뭐냔 말이지. 너랑 나 사이에 장소를 잡고 예의 차리면서 정식으로 말할게 어디 있어. 너 설마 혹시 결혼이라도 한다거나…그런 거 아니지?"



 지민은 제법 진지하게 어깨동무를 해왔다. 정국이 얼척 없단 시선으로 지민을 바라보고는 어깨에 둘러진 팔을 툭 쳐냈다.



"하면 어쩌게요."

"나한테 소개도 안 시켜줬는데 결혼을 한다고? 나 그럼 진짜 서운하다…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섭섭할 거야. 지민이 상처받았다는 듯 가슴팍을 부여잡고 있자, 정국이 한쪽 입꼬리만 올리며 같잖다는 듯 픽 비웃었다.



"나보다 작으면서 키우긴."

"아 키 얘기 하지 말라고 했어, 안 했어?"

"그냥 좀 조용히 하면서 가면 안돼요? 도착하기 전에 귀 멀겠네."



 정국이 날파리 쫓아내듯 귀를 후볐다. 지민은 뭐냐며 끈질기게 정국을 재촉했지만 정국은 입을 다무는 것으로 방어했다. 그리고 마침내, 택시가 정국이 예약한 곳에 도착해 내렸을 때 지민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너 진짜 결혼하는 거 아니지?"

"아 아니라고요. 빨리 와요."

"아무래도 우리 잘못 내린 거 같은데. 기사님한테 너 장소 잘못 말한 거 아냐?"

"아니에요."

"여기 딱 봐도 비싼 곳인데?"

"맞아요, 잘 아네요. 엄청 비싸요. 그리고 정확히 왔어요."



 이쯤이면 진심으로 찝찝하다.



"나한테 돈 훔치기라도 했어? 아니 너 전정국 맞아? 가면이라도 쓴 거 아니지."



 눈을 가늘게 뜨고 의심까지 한다. 정국은 대꾸하는 대신 미간을 작게 찡그렸다. 그러더니 시끄럽다는 듯 무시하고 쉽게 발을 떼지 못하는 지민을 질질 끌다시피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갔다. 지민은 테이블에 앉고서도 믿지 못하는 태도였다. 아픈 건가? 취업 스트레스 때문에 미친 건 아닐 테고. 아무래도 한끼에 백 달러도 넘어가는 밥을 사는 건 대학생에게 무리다. 진지하게 지민이 말을 걸어보려는데, 웨이터가 다가와 타이밍을 가로챘다.



"다니엘리프입니다. 주문하시겠습니까?"

"아 잠시만요, 주문은 나중에 할…."



 지민은 뇌를 빠져나가는 웨이터의 문장에서 한 단어가 턱 걸렸다. 잠깐, 지금 어디라고? 지민은 치밀어 오르는 불안감을 누를 수 없었다. 내가 그 이름을 오늘 어디서 들어봤는데.



"여기 식당 이름이 어떻게 되죠?"

"다니엘리프입니다, 손님."

"왜요, 형."



 정국이 무슨 일 있냐는 듯 묻는다. 미친. 지민은 하마터면 욕을 외치며 혀를 깨물 뻔 했다. 왜 가게 이름을 안 보고 들어왔을까. 불과 몇 시간 전, 오늘 제 손으로 예약한 식당의 이름이었다. 맨해튼 65번가 스트릿에 있는 이 식당, 현재 지민이 앉아있는 이 식당으로 윤기가 걸어 들어올 것이다. 그것도 오늘밤을 함께할 애인을 곁에 데리고서. 비상사태였다. 지민은 말도 필요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정국의 손목을 잡았다.



"야 빨리 일어나."

"뭔 일인데요. 돈 때문이라면 걱정하지 마요."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니까 일단 일어나 봐."

"설명을 해줘야 일어나든 말든 하죠."



 지민이 막무가내로 손에 힘을 주고 정국을 일으키려 낑낑거렸다. 그러나 야속한 체급차이 탓에 정국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또 지민이 자리를 빠져나가려는 수작이라 생각하던 정국은 다급해 보이는 지민의 표정에 생각을 돌렸다. 하얗게 질린 것이, 꼭 귀신을 만나기 직전인 사람 꼴이었다. 지민이 빌다시피 말했다.



"지금 큰일났으니까 빨리 일어나, 일단, 그래 일단 나가서 이야기 하자. 응? 제발 일단 나가자 우리."



 내 직장상사가 이쪽으로 오고 있다고! 목구멍 아래까지 차온 비명을 지민은 초인적인 힘으로 내리눌렀다. 침착하게, 그래 침착하자. 난 지성인이고, 여기는 고급 레스토랑이야. 아직 민윤기는 여기 안 왔고, 나가는 시간엔 1분도 채 걸리지 않을 거야. 여기서 만날 리가 없어.



"그러니까 민윤기가 오늘 식당을 하나 예약하라고 했는데 그게 이 식…."



 그때였다. 환영합니다. 유독 반갑고도 큰 목소리로 지배인이 인사했다. 기사와 경호를 주르륵 달고 들어온 무리는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 중 화려한 민트색 머리카락이 가장 눈에 튀었다. 지민은 아까 목구멍으로 말아 넣었던 욕이 다시 삐죽 올라왔다. 아 이런 젠장…. 정국도 고개를 빼 그 무리를 확인하더니 안 그래도 큰 눈을 확장시켰다.



"어, 저 사람."



 그래, 맞아. 그 사람. 나라 망한 심정으로 정신을 놓을 뻔한 지민은 이렇게 된 이상 눈이라도 피해야겠다 다짐했다. 그러나 다짐보다 더 빠른 것은 시선이었다. 눈이 마주친다. 별로 크지도 않은 그 눈을 마주치고, 딱딱히 굳어버린 지민은 그날 처음 들었다. 평범하게 상사 입에서 나오는 제 이름을.



"박지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