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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짐] 아스팔트정글 05

by 토페 posted Nov 28,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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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David Morales - Here I Am>











 박지민 인생에서 역대급으로 가장 힘든 사건은 처음 미국에 와 영어가 통하지 않은 어린 시절이었다. 유난히 언어가 더뎌 2년동안 벙어리로 살다시피 한 과거는 대학 등록금을 못 낼 때보다, 밤새워 시험성적에 목매며 공부할 때보다 더 힘들었다. 그러나 인생은 역시 살고 볼 일이다. 벙어리시절만큼 더 힘든 게 있었다. 그것은 바로 성질 더러운 상사였다.

 첫날과 마찬가지로 뉴욕 골목 곳곳을 뛰어다닌 지민은 헥헥거리며 커피와 심부름더미들을 들고 사무실로 도착했다. 눈높이까지 높게 쌓아 들은 짐을 나눠 든 석진이 감탄했다. 헉 지민, 앞은 어떻게 보면서 온 거예요? 터질 것 같은 폐를 진정시키며 지민도 진심으로 스스로에게 찬사를 보냈다. 저도 저한테 이런 능력이 숨겨져 있는 줄 몰랐어요. 생각보다 제게 숨겨진 능력이 있나 봐요. 짧은 사담은 오래가지 못했다. 슬리퍼에서 힐로 갈아 신은 레이첼이 립스틱을 다시 칠하며 비상사태를 통보했다.



"회장님 차 아래 도착했어요."



 석진이 컥 숨을 들이키고 급히 짐을 책상 아래에 처박듯 숨겼다. 지민은 급하게 뛰어 윤기의 책상 위에 유리컵을 놓고 탄산수를 따랐다. 짜기라도 한 것처럼 일을 마친 셋이 엘리베이터 앞에 서자마자 아슬아슬한 차이로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좋은 아침이에요, 미…."

"오전 식사약속 잡힌 거 취소해. 그 노인네가 요즘 눈이 어두워졌다더니 아예 글자도 못 읽을 수준으로 퇴화했나 보군. 날 등 처먹으려면 좀 그럴싸하게 준비해야지, 다 티 내고 다니면 쓰나. 변명은 알아서 만들고, 못 가서 미안하다고 선물하나 보내. 그리고 선물 몇 개 사서 로제한테 안겨놔. 깔끔하게 떨어져 나갈 만큼만. 너무 시끄러운 게 곧 헤어질 때가 됐거든."



 못 본 게 아니라 개무시였구나…. 대차게 인사를 씹힌 지민은 기분 상할 새도 없이 날아오는 지방시 코트를 받아야만 했다. 코트를 먼저 받아버린 탓에 받지 못한 선글라스가 바닥을 굴렀다. 헉, 지민이 호흡을 삼켰다. 윤기는 코트에 감싸여 끙끙거리다 선글라스를 줍기 위해 허리를 굽히는 지민을 보더니 혀를 찼다. 내가 뽑은 새 비서는 선글라스를 들 힘도 없을 정도로 연약한가 보군. 빈정거리는 말에 지민은 억울했지만 죄송합니다 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건 당신이 던져서 그런 거 아닙니까, 하는 심정을 뱉은 용기는 없었다.



"영화 감독 컨택은 어떻게 됐어?"

"어제 됐습니다. 흔쾌히 수락했고, 이번 달 내로 작업에 착수한다는 답을 받았습니다."



 석진이 뒤를 따르며 말했다. 윤기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걸쳤다.



"한 명이라도 일을 제대로 하는군."



 온갖 구박은 다 당한 지민은 억울함도 잊고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냉얼음판 같은 분위기가 사르르 녹는다. 민트색 머리카락과 그린 듯 어우러진 미소는 숲의 정령을 자연스레 떠올리게 만들었다. 신화 속에서 신들의 숲에서 사과를 따고 노는 님프, 딱 그런 게 떠올랐다. 시선이 느껴졌는지 윤기는 집무실 안으로 들어가려다 다소 멍한 표정의 지민을 발견했다. 저 입에서는 달콤하고 다정한 말만 나올 거 같았다. 윤기가 말했다.



"2일만에 잘려보고 싶어?"

"아, 아니요."

"그럼 가서 일해. 곧 잘 거 같은 얼굴로 서있지 말고."



 언제 웃었냐는 듯 입가의 미소는 사라져 있었다. 쾅 집무실 문이 닫힌다. 아무래도 요정은 아니네. 얼른 생각을 철수시킨 지민은 윤기가 내던지다시피 건네준 옷들을 정리하고 제 자리에 앉았다. 깨끗한 책상에 앉자 구박으로 구겨진 기분이 좀 나아진다. 일주일도 안된 시기는, 아무리 상사가 까고 일이 힘들어도 취업했다는 생각 자체만으로 뿌듯해지는 기간이었다.

 그런데, 나 뭐하지? 지민은 벌써 책상에 앉아 업무를 처리중인 진과 레이첼을 슬그머니 살폈다. 어제는 전화만 받다 끝이 났다. 윤기가 전용기를 탔다는 말과 함께 퇴근하라는 소식을 전화로 던져준 레이첼의 전화가 마지막 일이었다. 누구한테 물어보지. 유창한 프랑스어를 구사하며 통화를 하고 있는 레이첼. 문서를 작성하는 것 같은 진. 둘의 상황을 분석한 지민은 수월해 보이는 석진 쪽으로 방향키를 틀었다. 유순한 웃음을 잔뜩 걸고 지민이 석진의 책상으로 다가가 똑똑 손등으로 두들겼다.



"선배니임, 저 뭐하면 되죠?"

"아 내 정신 좀 봐. 그걸 이야기 안 해줬네요."



 여기쯤 있을 텐데. 석진이 파일 사이를 뒤적거렸다. 지민은 침을 목구멍으로 꼴깍 넘기며 긴장했다. 드디어 업무다운 업무를 받는다. 정국의 말에 따르면 영화 쪽 일을 하는 것이라 했다. 앞으로 감독들이랑 만나고, 배우들이랑 만나는 건가. 대체 무슨 일을 시킬까. 헐리우드도 가고 그러나. 영화에 관해 공부하기 위해 이미 인터넷으로 영화역사를 더불어 각종 서적도 시켰다. 아 여기 있네. 석진이 두근거리는 상기된 얼굴의 지민에게 종이를 내밀었다.



"일단 이거."

"…이게 뭐예요?"

"앞으로 유용할 사실들이라고 하면 설명이 될 거예요."



 이딴 게 왜 유용한 사실들이지. 지민은 제 눈이 잘못 됐나 의심하며 종이를 훑어내렸다. 콘돔은 D브랜드로, 하우스키퍼가 옷을 맡기는 위치는 A가게. 각종 정보들과 거기에 더해 여성들의 전화번호가 적혀있었다. 카트리나, 애쉬델, 로제. 어제 가십지에서 발견한, 윤기와 호텔을 들어가는 사진이 찍힌 슈퍼모델의 이름도 있었다. 이게 대체…? 지민이 종이를 들고 의아한 눈을 하자 석진이 별거 아니라는 듯 손을 휘저었다.



"미련을 놓지 못하고 사무실에까지 전화해서 진상을 부리는 전 애인들인데 무시하면 괜찮아요."

"그런데 왜 코, 코, 콘…아니 이건 왜 있는 거죠?"



 차마 신성한 일터에서 콘돔이라는 단어를 말할 수 없던 지민은 종이 위에 단어를 손가락으로 집는 것으로 말을 대신했다. 세계최대 대기업 총수의 사무실에서 이런 단어가 튀어나올 줄은 몰랐다. 석진이 놀란 토끼 같은 지민을 보고 여유롭게 웃었다. 초탈한 현자의 미소였다.



"회장님이 피임은 참 철저하게 하세요. 일이 하나 줄어드는 거죠. 애까지 달고 사무실에 들이닥치는 사람이 없다니. 얼마나 이 행복한 일이에요."



 아니, 내 말이랑 핀트가 엇나간 거 같은데. 지민이 황당해하거나 말거나 석진은 뿌듯한 얼굴로 과거를 늘어놨다. 예전 윤기의 애라며 애를 달고 진상을 부리러 온 여자를 쫓아낸 내용이었다. 그 동안 사다 나른 콘돔박스가 몇 박스인데 역시 헛되지 않았다며 자랑스러워했다. 지민은 더 듣다 보면 석진을 향한 존경심이 이틀 만에 녹아 내릴 거 같아 말을 돌렸다.



"그런데 이걸 왜 저에게…?"

"지민이 비서니까요."

"저도 제가 비서라는 건 알아요. 그런데 이건 그러니까…."



 한쪽에서 프랑스어로 유창하게 통화하는 레이첼을 가리키며 말하고 싶었다. 저런 일을 하는 게 비서 아닌가요? 일다운 일을 달라 차마 말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지민을 석진이 눈치채고는 아아, 했다. 안심하라는 듯 지민의 어깨를 툭툭 두들겼다.



"본격적인 일은 미스터 윤이 줄 거니까 그전에는 전화만 잘 받으면 돼요."

"아 그렇군요!"



 그제서야 지민의 표정이 활짝 폈다. 석진은 표정변화가 솔직한 지민이 귀여워 같이 밝은 미소를 지었다.



"이번에 새로 런칭하는 거 때문에 바쁠 테니 긴장해요."

"영화사업 말씀하시는 거죠?"

"맞아요. 슈가 스튜디오."



 어거스트가 새로 눈독 들이는 문화사업, 영화. 영화사의 브랜드 이름은 윤기가 직접 짰다 했다. 슈가 스튜디오. 취업하기 전, 기자회견장에서 발표했다는 기사를 봤을 때 지민은 솔직히 말해 커다란 감흥이 없었다. 지금 입에 바늘 백 개쯤을 품고 다니는 것 같은 윤기를 마주하고서야 그 이름에 흠칫했지만 말이다. 슈가라니. 어울리지 않게 참 간지러운 이름이었다. 아까 웃는 모습을 24시간 유지하고 있는다면 또 모를까.



"앗 제가 받을게요!"



 마침 울리는 전화벨에 지민이 책상으로 돌아가 받았다. 어거스트의 미스터 윤 사무실입니다, 말씀해주세요. 막 첫걸음을 뗀 지민은 결심을 다졌다. 윤기가 무슨 일을 시키든 완벽하게 해낼 것이다. 한다면 하는 사람이라는 걸 보여주고 말 것이다.









***









 어디서부터 잘못 되었다고 말하면 좋을까. 내가 여기 팔자에도 없는 비서로 취직한 순간부터? 아니면 내가 다른 회사에서 다 잘린 순간부터? 그것도 아니면 어릴 때 미국으로 건너온 순간부터? 하하 그래 더 오래 전으로 가서 내가 태어난 순간…아니 더 오래 뒤로 가서 이 사회가 자본주의에 물들어 돈 아니면 살 수 없는 순간부터? 망할. 왜 세상은 돈이 없으면 굴러갈 수 없게 된 거지? 지민은 이를 부득 갈며 사회구조를 탄식했다. 자본주의 사회의 최고 수혜자 중 한명이 제 상사라는 것부터 한탄할 일이었다. 왜 세상은 그런 나쁜 놈에게 돈까지 쥐어줬단 말인가. 그 순한 지민이 거진 일주일이 지날 때 즈음부터 윤기를 가열차게 씹기 시작했다. 민윤기는 정말, 상사로서 최악이었다.



"가서 홀리 좀 놀아줘."



 윤기가 결제서류에 싸인을 하는 동안 기다리고 있던 지민이 어벙한 얼굴로 질문했다. 홀리가 누군데요? 윤기는 거만하게 다리를 꼬며 저런 것도 비서라고, 하는 얼굴로 손만 까딱였다. 너랑 수준이 똑같은 친구. 질문은 나가서 홀리한테나 해. 홀리라면 착해서 네 한심한 질문에 대답해줄 수도 있을 테니. 의아해하며 홀리를 찾은 지민은 말을 잃었다.

 홀리는 개였다. 그것도 덩치가 무척이나 커다란 말라뮤트.



"홀리! 홀리 안돼! 홀리, 천천히 가! 착하, 으아악!"



 지민은 산책을 시키는 게 아니라 산책 당하며 질질 끌려다니다 간신히 벤치에서 멈췄다. 센트럴 파크에서 개한테 산책 당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을 거야. 헉헉 거친 숨을 토하고 있자니 더 뛰어 놀고 싶은지 홀리가 몸부림을 쳤다. 두발로 서면 지민의 키와 비슷한 수준인 개는 지민을 완전히 물로 봤다. 딱 주인처럼.



"홀리! 안돼! 돌아와! 이리와!"



 목줄을 놓친 지민은 처절하게 외치며 그날 센트럴 파크를 쌩쌩 돌다 위장을 토할 뻔 했다. 경비의 도움이 없었다면 홀리를 잃고 제 일자리까지 잃었을 것이다. 달리기에 녹초가 된 지민이 스타벅스 커피를 사들고 회사 로비를 밟은 찰나, 전화가 걸려왔다. 발신인은 민윤기 회장님. 배터리를 뽑아버리고 싶은 마음을 누르며 얌전하게 받았다. 제발, 제발 다시 가까운 곳으로 심부름 시켜줘. 여보세요…. 듣기만해도 피곤이 묻어나는 목소리를 상대로 윤기는 가차없이 명령했다. 올 때 서점에서 중국어 책 10권만 사와. 방금 회사 들어왔다는 반문이 통하지 않는다는 건 보지 않아도 훤해서 지민은 지나온 서점을 40분에 걸려 돌아가야만 했다.

 상상도 할 수 없는 잡일들은 몽땅 지민의 차지였다. 시장과 식사를 마치고 나온 윤기의 손에 들려있는 화분이 그 중 하나였다.



"알아서 키워놔."



 떠맡은 그 화분은 시장의 부인이 윤기에게 선물로 준 튤립이었다. 시간마다 물 주고 영양제도 줬는데 약 일주일이 지날 즈음 잎이 시들기 시작했다. 왜 이래, 식물아. 사무실에서 자라는 게 안 좋나. 아니면 너도 네 주인의 기에 눌려 이러는 거니. 당황하며 화분의 상태를 보고했더니 윤기는 대학에서는 그런 것도 가르쳐주지 않냐며 화분을 새로 갈라 했다. 대학에서 그딴 건 가르쳐주지 않는다 당당하게 반박하고 싶었지만 지민은 조용히 삽을 들고 튤립을 옮겨 담았다. 손이 흙 범벅이 되어 씻는 동안 황금 같은 15분 점심시간이 지나있었고, 결국 퇴근시간까지 쫄쫄 굶다 노랗게 뜬 얼굴로 집에 가야만했다.

 약 3주간 일한 끝에 지민은 깨달았다. 석진이 줬던 믿음이 말라갔다. 일다운 일. 바이어와 스케줄을 짜고, 슈가 스튜디오의 밑거름이 될 사람들을 인사팀에 들러 선별하고. 지민이 기대한 일은 퍼스트비서와 세컨드비서인 레이첼과 진이 도맡아 했다. 막내비서인 지민이 하는 일은 새로운 사업으로 정신이 없는 진과 레이첼이 처리하기 벅찬, 그야말로 잡다한 일이었다.

 한 가지 더 깨달은 사실은 윤기가 일의 효율성이란 것을 모른다는 점이었다. 천재경영인이라는 소문은 다 뻥인 게 틀림 없다. 코트를 던지며 윤기가 스쳐 지나가듯 말했다.



"내 수트 찾아와."



 명령은 그게 끝이었다. 수트? 어디 수트? 이 뉴욕 바닥에서 고가의 브랜드가 어디 한두 가지란 말인가. 질문이라도 하면 윤기는 살벌하게 눈을 치켜 뜨고 노려봤고, 지민은 그에 쫄아 질문하기 자체를 포기했다. 그저 윤기가 애용하는 브랜드의 편집샵에 모두 전화를 돌려 알아보는 수밖에 없었다. 지민은 평생 관심도 주지 않던 루이비통, 구찌, 샤넬, 톰 브라운 등 고가의 브랜드 이름을 쫙 꿰게 되었다. 이 얼마나 비효율적인 일인지 석진에게 슬그머니 의견을 건네보았지만, 석진은 어쩔 수 없다며 그 특유의 해탈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윤기는 입맛도 까다로웠다. 지민의 일년 연봉과 맞먹을 와인을 가져오라 해놓고는 갑자기 입맛에 맞지 않는다며 하수구에 처박으라 명했다. 뉴욕에서 제일 유명한 스테이크 집에서 두 시간을 기다려 포장해온 스테이크도 와인과 똑같이 하수구에서 운명을 달리했다. 특히나 커피는 절대 식으면 먹지 않았다. 이럴 거면 왜 영화 사업하는 거야? 커피가 그렇게 좋으면 커피가게를 회사 안에다가 하나 차리지. 이것저것 명령대로 사다 나르며 지민은 혀를 쯧쯧 찼다. 저러니 저렇게 말랐지. 아무거나 그냥 먹어라 좀.

 무수히 끔찍한 명령들이 많았지만, 그 중에서 지민이 꼽은 가장 끔찍한 명령 중 하나는 바로 애인선물사기였다. 보통 윤기의 손에 넘기면 그만이었지만, 가끔씩 직접 배달하는 선물들이 있었다. 이번 배달 상대는 피아니스트라고 했던가. 높은 건물 앞에서 망설이다 들어간 지민은 속으로 빌었다. 제발, 자리에 없어라. 놓고만 갈 수 있게 해주세요. 상류층 사람들은, 특히 윤기가 골라잡는 여성들은 어쩐지 다 기본상식이 부족했다.



"여기 미스터 윤께서 드리는 선물입니다."

"어떻게 이 시간에 문을 두드릴 수 있지? 최악이야."

"네?"



 지민은 시간을 확인했다. 저…지금은 오후 세시인데요. 새벽도 아니고, 늦은 밤도 아니고 어디로 보나 사람들이 만나기 적절한 시간이었다. 여성은 짜증난다는 눈길로 지민을 노려보고는 문을 쾅 닫았다. 그래, 월급 주는 민윤기는 그렇다 쳐. 상사도 아닌 사람이 대체 왜? 닫힌 문 앞에서 어이없음에 푸우 한숨을 쉬다 속으로 자신을 위로했다. 지난번 여자처럼 잔디 깎고 가라는 말은 안 하잖아? 이 정도면 양호한 거지.



 더욱 어이없는 일은 단순한 심부름이 끝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레이첼."



 지민은 책상에 앉아 열심히 윤기의 필체를 모방하는 연습을 하고 있었다. 자선단체에서 온 기부단체편지에 윤기의 필체로 답장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어차피 멘트는 정해져 있다. 기부를 하게 되어 기분 좋다는 그런 뻔한 이야기. T를 좀더 흘려 써야 하나.



"레이첼, 들어와."



 그냥 소문자로 쓸까. 신중하게 팔에 힘을 빼 쓰니 비슷하다. 일을 해낸 지민이 만족감에 눈을 가느다랗게 휘며 웃었다. 헤헤 됐다.



"레이첼!"



 불벼락 같은 외침에 지민은 놀란 미어캣처럼 고개를 팍 들고 레이첼을 찾았다. 레이첼은 지민을 마주보고 턱짓으로 사무실 안을 가리켰다. 나, 나요? 레이첼 부르는…. 석진도 어서 들어가라는 듯 양손으로 문 안쪽을 가리켰다. 왜 나지? 내 이름 박지민인데. 강요에 못 이겨 지민이 윤기의 집무실 안으로 허겁지겁 들어갔다.



"부르셨어요?"

"이름 부르면 오는 법도 가리켜야 하다니 나 원. 아주 비싼 발걸음이시군?"

"그…미스터 윤께서 레이첼을 부르셨거든요."



 지민이 어색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그래서 바로 못 왔어요. 윤기가 서명을 하다 턱을 괸 자세로 바꾸며 흐응? 했다. 어쭈, 하는 눈빛이었다. 윤기가 오만하게 되물었다.



"그래서. 그거에 불만이라도 있어, 레이첼?"



 지민은 눈을 깜빡깜빡거렸다. 눈치가 없다는 평을 종종 듣던 지민의 특성이 하필 거기서 발동했다. 내가 워낙 일을 못해서 내 이름을 못 외운 건가. 아니 그래도 그렇지 사람 이름을 어떻게 못 외워. 벌써 한 달이 다 되어가는데. 윤기가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한 사람이라는 것은 곁에서 지켜봐서 안다. 오죽하면 민윤기에게만 48시간이 주어졌다 착각할 정도다. 윤기의 스케줄은 그 시간을 어떻게 쪼개고 쪼개 일을 처리하고, 애인을 사귀는지 신기할 정도로 바빴다. 그 바쁜 스케줄 속에서 윤기가 기어코 맛이 갔나 생각하며 지민이 작게 언질했다.



"미스터 윤 레이첼은 퍼스트비서구요."

"……."

"제 이름은 박지민이에요."



 발표라도 하는 것처럼 또박또박한 발음이었다. 윤기가 책상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들겼다. 그 행동은 석진이 익히 설명해준 것이라 지민도 알고 있었다. 어떻게 요리해야 좋을지 고민하고 있을 때 하는 그 행동. 주로 자기 기준에 짜증나는 것들을 처리할 때 한다 들었다. 저게 왜 지금…? 나 뭐 실수한 건가. 악몽 같은 면접일을 떠올리며 지민이 불안감에 떨었다. 윤기가 느긋하게 읊조렸다.



"박지민이라…."

"……."

"부모님이 이름을 잘 지어주셨군."



 윤기가 싱긋 입꼬리를 작게 올렸다. 불안감이 높게 치솟는다. 이 인간 뭐야. 왜 웃어. 평소처럼 욕을 해. 등줄기가 오싹했다. 나 왠지 잠자는 사자를 건드린 느낌인데…. 윤기는 박지민이라는 단어가 주문이라도 이뤄주는 것마냥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박지민, 박지민. 단순히 외우는 거라지만, 그게 저주에 걸리는 기분이라 지민은 흠칫했다. 아무래도 미리 죄송하다고 말하는 게 나을 듯하다. 취업 후 입에 박혀버린 듯한 단어를 지민은 또 입에 올렸다.



"죄송합니다."

"뭐가?"

"…네?"

"뭘 죄송해서 죄송하다고 말하는 거냐고."



 이게 아닌데. 지민은 당황했다. 죄송하다는 말이면 윤기는 어지간히 넘어가는 편이었다. 그냥 넘어간다기 보단 더 욕을 할 시간이 없다는 게 적합했다. 짧게 빈정거리거나 으르렁거리는 걸로 마무리하는 게 기본이었다.



"설마 그냥 말한 거야? 지금 상황 대충 넘기려고?

"아, 아니요!"



 실상 죄송한 게 없다. 사실이었다. 나도 왜 죄송한지 모르겠거든요. 네가 내 이름만 제대로 알고 불렀으면 되는 일인데. 당신이 나한테 죄송하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요? 마음의 소리가 입에 맴돌았지만 지민이 급한 순발력으로 대처했다.



"그게요. 그러니까 제가 늦게 들어와서 미스터 윤이 기다리셨고…."



 윤기가 계속해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까칠한 말투도 살벌한 눈총도 없다. 더 하라고? 할말이 더 이상 없던 지민은 엉성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제가 걸음이 이제 보니까 엄청 느렸던 거 같아요. 뛰었어야…아, 아니 회사에서 뛰면 안 되죠. 빠른 걸음으로 걸어왔어야 하는데 그냥 걸었어요. 그게 죄송한 점이고 그리고…음…."

"또?"

"제가 미스터 윤 시간을 낭비했고 그거 때문에 일에 방해를 받으셨고…."

"흠, 그래? 또?"



 이 사람 오늘 시간 왜 이렇게 많아. 재촉에 못 이겨 지민은 설상가상 이름을 알려준 자신의 발음이 별로였다는 헛소리까지 해댔다. 윤기는 의자에 등을 묻고 감상이라도 하듯 지민의 대답을 들었다. 이쯤이면 태어나서 죄송하다는 소리를 해야 하는 건가. 쩔쩔매며 지민은 머리를 쥐어짜다 결국 포기했다.



"…그게 전부 죄송해요…."

"그렇군."



 지민은 떨어질 불호령을 기다렸다. 차라리 빨리 욕하고 날 내보내 줘. 집무실에 더 버티고 있다가는 가시방석에 찔려 죽을 것 같았다. 그러나 예상외로 윤기는 깔끔하게 끝냈다. 불호령도, 사람을 찔러죽일 것 같은 눈빛도 없었다.



"여기 이 책 작가한테 다시 돌려보내. 사람들 다 재울 셈이냐고. 내가 여관사업을 하는 게 아니라고도 똑똑히 전달해서 보내."



 무난하게 넘어간 사실이 믿기지 않아 지민은 한 박자 느리게 답했다. 윤기는 거기서도 화내지 않았다. 혹시 씻으면서 뇌까지 같이 씻어서 대답이 늦냐는 둥 대답도 제때 맞춰서 못 하면 밥 숟가락은 왜 드냐는 둥 나와야 할 말이 안 나왔다. 뭐지. 이 인간. 불안감이 급증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드디어 사람으로 대우해주기를 실천한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사항은 더 없나요?"

"없어."



 서류를 받아 든 지민은 고개를 갸웃했다. 윤기가 이제 나가라는 말 한 마디만 하면 집무실 밖으로 나간다. 진짜 뭐지? 갑자기 세상의 이치를 깨우친 것도 아닐 테고. 뭐 오늘 잘못 먹은 건 아닌지 걱정하며 지민이 대답을 기다리는데, 윤기가 크림처럼 부드러운 미소를 걸쳤다.



"네가 나에게 죄송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야. 그렇지?"

"네? 네…."

"새삼 내가 대단하군. 하늘 같은 인내심으로 그 잘못들을 다 참아주고 있잖아?"



 만약 윤기가 편한 친구라면 지민은 친절하게 병원으로 가는 길을 설명해주었을 것이다. 사람이란 무릇 자아성찰을 하고 살아야 하는 법인데, 윤기는 양심을 하늘에 판 것으로 대신했나 보다.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지민이 입만 떡 벌리고 있자 윤기는 대답을 바란 건 아닌지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모자란 너를 위해 내가 중요한 일을 하나 내려주지."



 지민이 불안함도 잠시 잊고 궁금한 얼굴을 했다. 윤기가 직접 운을 뗀 건 처음이다.



"영화 감상문 매일 한편씩 써서 올려."

"…네?"

"못 들었어? 감상문, 쓰라고."



 거절당함이라는 건 민윤기의 사전에 등재되어있지 않은 단어다. 혹시 이름과 마찬가지로 다른 것도 헷갈리는 걸까. 윤기가 시키는 모든 일은 잔심부름이었다. 영화와 관련된 이런 사업은 없었다. 혹시 정말 중요한 일일까. 지민은 우물쭈물하다 물었다.



"저…그게 왜 중요한 일이죠?"

"망할 영화를 스크린에 걸면 되겠어? 잘될 영화를 골라야지. 관객들을 끌어 모을 영화를 말이야. 그러면 일단 보는 눈이 있어야겠지. 그걸 키우기 위해 하는 거야. 인기 있는 영화들은 다 그만한 이유가 있거든. 적어도 세 장씩 상세하게 열심히 써. 매일 아침에 볼 수 있게 내 책상에 올려 놔."

"네, 미스터 윤."



 지민은 의아했지만 윤기가 말하니 정말 중요한 일인 것만 같단 생각이 들었다. 나 드디어 일다운 일을 하는 건가. 가슴이 상황도 잊고 약간 벅찼다. 커피가 식지 않기 위해 달리기속도만 빨라지는 현실에, 고작 이런 일 하려고 대학에서 코피 터져가며 공부했나 하는 허탈함이 쑥 내려갔다. 들뜬 눈망울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는 지민을 향해 윤기가 문을 가리켰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사악하게 한쪽 입꼬리만 비틀어 올렸다.



"나가봐. 레이첼."



 지민은 순식간에 눈치챘다. 중요한 일은 개뿔. 이 개자식. 설렘으로 요동친 심장이 푸슈슈 식었다. 이건 그냥 엿 먹이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