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 검정치마-나랑 아니면>
모든 기억의 순간에 박혀있는 박지민은 표정이 있었다. 웃는 표정, 우는 표정, 짜증난 표정, 귀찮아하는 표정. 애정이라는 보너스가 덧붙여져 정국이 지민을 떠올리는 건 쉬웠다. 보고 싶은 날이면 언제나 꺼낼 수 있었다. 오늘은 맛있는 걸 먹고 좋아하는 박지민. 오늘은 손을 붙잡고 신나서 웃는 박지민. 그런데 창피할 만큼 솔직하게 모든 걸 토해놓은 그 밤 이후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샤워가운을 입고 서럽게 멀어지던 등. 흔들거리는 발걸음으로도 꼿꼿이 뒤를 돌아보지 않고 멀어지던 등.
한 번 병실에서 멈추었던 시간은, 두 번째로 고급호텔에서 멈추었다. 장면이 반복되면 반복될수록 정국은 초조해졌다. 여기까지는 모두 이성이 이끌었다. 이성은 곧게 아직도 잘해오고 있으며, 조금만 더 참고 노력하면 원래 계획대로 모든 게 이루어질 거라 말하고 있었다. 노팅이든, 각인이든 뭐든 생물학적으로 뭐든 자신이 줄 수 없는 건 김태형이 가져가도록 두고 박지민 마음만 자신이 가지면 된다 생각했다. 그런데 말라빠진 지민의 등이 눈앞에서 계속 아른거렸다. 정국은 자꾸만 흔들리는 다짐을 굳건하게 다잡았다. 더 아파할 거야. 박지민은 자신이 줄 수 없는 걸 결국 갈구할 것이다. 희망 없는 미래 속에서 나중에 박지민은 이거보다 더 아파하고, 끝내는 감당하지 못할 게 뻔했다. 정국은 자신이 없었다. 정말 박지민 말대로 같이 아파하자 할 만큼 자신은 대단한 사람도, 가지고 있는 것도 없어서 무서웠다.
정국은 마취제라도 찾는 것처럼 일에 매진했다. 지민을 당장에라도 마주하면 모든 게 폭삭 무너질 거 같아 부러 찾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밤이 새도록 일을 하다 기절이라 붙이는 수준으로 선잠이 들고 일어나는 일이 빈번했다.
"안에 계시나요? 보고서 가져왔는데."
여비서는 핏발 선 눈의 정국을 보고 흠칫했다. 일터보다는 병원을 추천해줘야 할 몰골을 보고 선뜻 말이 나오질 않았다.
"아 네…안에 아드님과 같이 계세요. 잠시 기다려주세요."
정국은 삐걱거리는 목을 돌려 닫혀있는 사장실 문을 돌아보았다. 부러 거리를 멀리 유지하고 있을 땐 원하는 대로 쪼그라들어있던 그리움이 발목을 잡아당겼다. 박지민. 열 발자국도 남지 않은 거리에 있는 박지민. 그 밤 이후 박지민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함과 두려움이 섞여 쉽사리 발을 뗄 수 없었다. 대담하게 문을 열고 들어갈까, 하는 생각까지 뻗칠 무렵, 덜컥 문이 열렸다.
"언제든 우리 강아지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해."
"아직은 무리라서 없을 거야."
하얀 얼굴로 웃고 있는 지민은 박사장의 팔짱을 끼고 있었다. 정국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지민을 응시했다.
"아빠 이제 그만 가…."
순간적으로 눈이 마주쳤다. 눈에 띄게 지민의 표정이 멈칫하고 경련이 일어났다. 정국과 등돌리고 있던 박사장이 갑자기 왜 그러냐 물으며 뒤를 돌아보려는 찰나, 지민은 다시 아무 일 없는 것처럼 헤헤 웃었다.
"마중 안 나와도 돼."
방금, 박지민이 눈을 피했다. 정국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살짝 모으고 계속해서 지민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피해? 설마, 아닐 것이다. 항상 먼저 애정을 가져오던 박지민이다. 그럴 리가 없다 생각하며 정국은 지민이 의식할 때까지 시선을 보냈다.
"회의실까지는 가야 하니까 엘리베이터까지는 같이 탈 수 있겠다."
"잘됐다!"
"미팅은 김비서랑 같이 가고."
"알았어."
지민은 정국을 투명인간 취급하며 끝까지 시선을 받지 않았다. 거기서 정국의 심장이 한 번 추락했다. 쿵, 묵직하게 떨어지는 게 감정인지 뭔지 머리가 댕 울린다. 박사장과 함께 지민이 엘리베이터에 올라탄다. 지민은 엘리베이터 문이 닫힐 때가 되어서야 앞을 보았다. 눈이 마주친다. 그 잠깐 동안, 정국은 눈 속에 남은 감정을 알아차렸다. 슬픔. 정국은 저도 모르게 지민이 올라탄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 뜻과 다르게 엘리베이터 문은 스르르 닫힌다. 마주친 시선을 철창 같은 문이 완전히 단절시켜 버렸다.
"정국씨, 보고서 이제 올…."
"조금 있다 다시 올게요."
정국은 종이가 구겨지는지조차 모르고 내려가는 층수를 초조하게 올려다보았다. 점점 낮아지는 숫자만큼이나 인내심도 줄어들어버렸다. 정국은 세뇌시키듯 뇌까렸다. 예상과 달라서 그래. 박지민이 날 무시한다는 건 계획에 없어서, 잘 정해놓은 일이 틀어져서. 엘리베이터 버튼을 초조하게 누르며 올라타 내려가는 동안 정국은 마음이 급했다. 다시 잘 설득해보자. 그러면 이 끝 모를 초조함과 불안감도 사라질 것이다. 회사 로비를 빠져나가 차에 올라타려는 지민이 보인다. 정국은 회사 로비를 미끄러지듯 달려 지민의 손목을 낚아챘다.
"뭐…."
"잠깐 얘기 좀 해요."
눈을 잠깐 마주치자 지민은 시선을 회피해버렸다. 잠깐이라도 참기 힘든 것처럼.
"할 얘기 없어."
정국은 입술이 바짝 말라왔다. 그런 방식으로 말하지 말았어야 했다. 화내고 못난 모습을 보이는 게 아니라 차분히 설득했어야 한다. 달래자. 정국은 지민에게 보이는 자신의 얼굴이 가능한 한 멀쩡하기를 바랐다. 아니라면 그간 숨겨왔던 불안함이 모두 밀려 터져 나와 들킬 테니까.
"그땐 감정적이어서 말이 좀, 그니까 좀 엇나갔…."
"니가 이겼어."
말을 자르고 들어온 목소리는 이례 없이 단단했다. 정국이 반문했다.
"…내가요?"
"결혼할게."
정국은 커다란 둔기로 뒤통수를 후려맞은 기분이었다. 뒷골이 찡했다. 원하던 대로 박지민이 들어준다고 했는데, 기꺼이 박지민이 금고 안으로 들어가 준다고 하는데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대외적으로 세울 알파라는 보험을 들어준다는데. 잠깐만. 호텔에서 상처받은 박지민의 눈빛을 본 순간 처음 찾아왔던 불안한 직감이 파도처럼 몰려왔다. 이게 아닌가. 이 방향이 아닌가.
"해요?"
"어."
"결혼을요?"
"…어."
"그 알파랑요?"
"…그래! 개자식아! 그만 물어! 빡치니까!"
지민이 순간적으로 바락 외쳤다. 니가 시켰잖아! 왜 자꾸 묻고 있어! 엘리베이터에서부터 참고 억눌렀던 감정이 울컥 터져버렸다.
"너! 너! 너 진짜 이, 이 눈물 같은 새끼! 말도 안 들어처먹고! 착각하지 마, 너! 내가 못할 거 같아? 너 못 놓을 거 같냐고!"
"……."
"끝…!"
막상 뱉으려니 단어가 목구멍에 반절이 걸려 안 나온다. 지민은 입안 살을 살짝 씹고 다시 뱉으려했다. 이게 왜 안 되는 거야.
"끝…! 끝이…!"
이거 뱉는 게 뭐가 어렵다고. 큰 눈을 마주한 지민은 몇 번이나 뱉어야한다 다짐했던 단어를 건드렸다. 정국이 손목을 쥔 손에 힘을 준다. 손목에 감긴 손이 신경이 쓰이는 걸 지민은 간신히 막았다. 하려고 했는데. 입에 거미줄이 걸린 것도 아닌데, 이거 왜 안 나와. 지민은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입술을 억세게 씹고 꽥 질렀다.
"에이씹! 끝은, 그래! 끝! 그거 못 내겠다! 끝 안 내!"
"박지민씨 잠시만 내 말을 다시 들어봐요. 그땐 내가 말하는 게…."
"파혼하라는 말 아니면 뱉지 마."
종이 한 장만큼 남은 이성이 정국의 입을 틀어막았다. 지민은 붙잡힌 손목을 비틀어 빼내며 시선을 피했다. 거 봐. 너 무서워하고 있잖아. 완전히 정국에게서 빗겨나지 못한 얼굴은 쓴 약이라도 삼킨 어린아이 같았다.
"근데 너랑 바람은 못 피겠다. 우린 이제 보류야."
너한테 기둥서방 그딴 딱지 붙는 거 싫어. 이 와중에도 너 걱정하는 내가 너무 등신 같다. 뒷말은 꺼내면 빼도 박도 못하게 등신처럼 보일 거 같아서 잘랐다. 지민은 두 눈을 내리깔고 울적하게 중얼거렸다.
"…내가 이해해서 너 말 따르는 거 아니야."
"……."
"니가 아파하는 거 싫어."
정국은 입도 벙긋할 수 없었다. 내가 만든 건데. 내가 원했던 건데. 내가 박지민을 변하게 했다. 지키기 위해서, 예쁘게 반짝거리도록 놔두기 위해서 했던 건데. 박지민이 아파한다. 상처받은 눈에 가슴속이 끊어질 것처럼 아프게 조여 온다. 물릴 정도로 맞아서, 안 두들겨 맞아본 곳이 없건만 지금 통증은 억 소리가 날 만큼 지독하게 아팠다. 지민이 한 자 한 자 힘겹게 끊어 뱉을수록 정도가 더해갔다.
"연락하지 마. 연락하면 죽을 줄 알아."
"바, 박지민씨, 잠깐만요."
정국이 다급하게 지민의 어깨를 잡았다.
"하지마."
"……."
"…힘들어."
이런 상황에서두 왜 니가 미운데 좋냐…. 지민이 정국의 팔을 털어내고 터덜터덜 걸어 나갔다. 늘 당당히 쫙 펴져있던 어깨와 발걸음에 힘이 없었다. 정국은 지민이 차문을 열고 올라타는 장면이 슬로우모션처럼 느리게 보였다. 아니야, 잠깐만. 지민을 잡으러 가고 싶은데, 커다란 족쇄에 묶인 것처럼 발이 움직이질 않았다. 잠깐만 가지 말아 봐. 정국은 말 대신 목구멍에서 치밀어 오르는 처절한 무언가를 꾸역꾸역 삼켜냈다. 혀끝을 깨물었다. 멀어지는 고급세단이 뒷모습조차 보이지 않게 사라졌을 때 삼킨 것들이 도로 식도를 넘어왔다. 지민이 뱉은 말이 뇌리를 웅웅 울렸다. 니가 아파하는 게 싫어서. 니가 아파하는 게 싫어서.
정국은 이성 밑에서 끊임없이 속삭이던 감정의 말을 들어주었다. 박지민이 아픈 게 싫다. 박지민의 마음속에서 밀려 나가는 거보다 그게 더, 박지민이 아파하는 게 더 무섭다. 사랑은 그렇게 주는 게 아닌 거 같다. 이런 식으로 받는 것도 아닌 거 같다. 내가 틀렸다.
***
결혼식이 다가오면서 바쁜 건 당사자인 지민이 아니라 남준이었다. 남준은 눈코 뜰 새 없이 결혼식 준비에 매진했다. 해외출장을 갔다 와 바로 청첩장을 돌릴 상류층 사교계 명단을 구성했다. 워낙 지민이 사교적인 활동을 나가지 않아 사람을 고르는 일이 가장 어려웠다. 권력이 있으면서도 적당히 지저분한 사람만. 즉, 적당한 쓰레기들을 골라 결혼식장에 초대하는 작업이었다. 마지막까지 청첩장의 디자인을 고르던 남준은 문득 마지막으로 떠오르는 인물들에 대해 고민했다.
"흐음…."
도련님의 친구. 3개월 가출한 동안 맺은 인연들도 불러야 하나. 하지만 도련님이 따로 초대하라는 말은 없었기도 하고. 그리고 헤어진 사이에 뭔. 남준은 이탈리아로 돌아오는 전용기 안 딱딱하다 못해 찬바람이 쌩쌩 불던 정국과 지민의 사이를 기억해냈다. 갈 때만 해도 언제 불꽃이 튈지 모르게 스파크가 튀더니, 이번에는 모든 걸 다 얼려버릴 것처럼 차가웠다. 그 냉기에 말도 통하지 않는 기장이 눈치를 살필 정도였으니 사이는 이미 끝날 대로 끝난 것이라 봐도 무방할 것 같았다.
이런 사이인데 왜 붙어있냔 말이지. 이제 그만 헤어지는 게 좋을 사이 같은데, 남준마저도 보기 껄끄러운 정국은 박사장에게 일을 배우는 터라 얽힐 일이 제법 있었다. 결혼식 관련으로 인력이 부족하다는 소리를 몇 번 흘리듯 보고했더니, 기가 막히게도 그 인원보충으로 정국이 오고 말았다. 사랑하는 이를 보내는 결혼식을 제 손으로 준비하라니 박사장이 너무하다 싶었다. 한숨을 되풀이하면서도 남준은 정국이 있는 사무실의 문을 노크했다.
"정국아."
없나. 문을 열고 들어선 남준은 사무실 안의 광경에 입을 떡 벌렸다. 방이야, 서점이야. 좋게 포장하면 폭탄 맞은 서점 같았다. 잠까지 여기서 다 해결한다고 들었는데, 과장이 아니라 보인 그대로 책과 서류가 쉴만한 자리를 모두 차지하고 있었다. 책상은 물론 쇼파까지 책과 노트의 향연이었다. 사람이 살 수 있는 공간인지 의심하던 남준은 쇼파에 구겨져 자는 정국을 발견했다.
"정국, 아니다."
눈 밑이 거뭇한 정국은 보는 것만으로도 딱해 보여 남준은 명단이 정리된 서류를 정국의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사랑이 얼마나 대단하길래 이러나 싶다. 며칠간 잠도 못자고 충혈된 눈으로 돌아다니는 정국은 잠조차 쉽게 못 자는 듯했다. 기계처럼 일하고, 금방이라도 쓰러질 거 같은데도 입에 괜찮다는 말을 달고 사는 꼴은, 지민이 고생하는 꼴을 보고 정국에게 원망 아닌 원망을 품고 있던 남준마저 제발 좀 쉬라 매달리고 싶을 지경이었다. 일을 못하면 그 핑계로라도 쉬게 하겠는데, 해오는 일마저 모두 완벽했다.
이번엔 지민이 잘못한 건가. 심각한 정국의 상태를 보고 있으면 그런 추측도 들지만 막상 집으로 가 지민의 상태를 보면 그도 아니다. 마찬가지로 햇볕을 못 쬔 식물처럼 푸석푸석한 지민은 길 잃은 아이 같았다. 행복하게 결혼을 준비하는 오메가는커녕 하루하루가 다르게 말라갔다. 방황하는 정국과 지민을 보면 남준은 평생 사랑의 역설에 관해 논해도 모자라다 생각했다.
남준은 어질러진 책더미에서 예산보고서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시간이 없다. 대관한 결혼식장에 깔 카펫종류를 확인해야 하는 참이었다. 한참을 뒤적거리다 결국 비슷해 보이는 책 몇 권을 챙겨들었다. 뭐 잘못 가져간 건 다시 돌려주면 되겠지. 남준은 조용히 문을 닫고 돌아 나왔다.
달칵,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자마자 정국은 눈을 떴다. 쇼파에서 벌떡 일어나 남준이 찾았던 보고서가 있는 위치를 뒤졌다. 예상대로 세 가지가 없다. 예산보고서, 기획서, 그리고 그리움과 질척한 욕망과 모든 감정의 부산물이 담겨있는, 절대 지민에게 보이지 않으려했던 그림노트. 정국은 서랍장을 열었다. 몇 년 동안 길러진 참을성은 어디 가버렸는지 입이 바짝바짝 탔다. 더 늦어버리기 전에. 돌이킬 수 없기 전에. 오랜만에 단칸방 열쇠를 꺼낸 손이 주먹을 말아쥐었다.
***
김태형 대단하다. 실연박물관에 동상으로 세워놔야 한다. 지민은 씹은 과거도 미안했다. 제일 생각 없이 돌아다닌다 생각했는데, 지민이 본 사람 중 가장 현명하게 이별을 이겨냈다. 오십이 넘은 나이에도 애정이 가득한 눈으로 문여사를 쳐다보는 박사장은 해당사항이 없다. 은근슬쩍 문여사가 호호 웃으며 흘리는 연애시절 이야기를 보면 알 수 있었다. 만나주지 않으면 만나줄 때까지 눈물을 펑펑 짜며 빌러올 거라는 알파가 불쌍해서 만났고, 만나다보니 좋아져서 결혼했다한다. 아마 내 피는 아빠 쪽이 더 강한 게 아닐까. 그래서 구차하고 구질구질하고 매달리고. 아니면 전정국이랑은 한 번 만나서 도대체 몇 번이나 차이는 건데. 침대에 멍하니 누워있노라면 지민은 생물학적 요소까지 쓸데없는 생각을 뻗다 지워내곤 했다.
원망, 배신감. 정국이 돌아오고 줄기차게 느끼던 감정들은 이제 언급하는 것도 시시하다. 서로가 서로를 상처 입히고 끝난 그 밤 이후로 지민은 낯선 감정을 접했다. 무력함. 무엇보다 서글픈 점은 그것이었다. 아파하는 정국을 위로해줄 수 있는 게 자신이 아니란 점. 사랑으로만 채워지지 않는 걸지도 모른다. 사랑이란 건 처음이라서 전정국한테 실수를 했는지도 모른다.
저 좋을 대로 행동하고 돌아다니던 지민은 그 누구보다 사랑에 순종적이었다. 실연이 이만큼이나 쌓이면 잊을 만도 한데, 좋아하는 마음은 터무니없게도 굳건했다. 아직도 얼마나 좋은지 다른 사람이랑 나눠가지겠다는 나쁜 주장을 펼치는 정국에게 끝을 고하지 못할 정도로 좋았다. 아무래도 사람 마음에는 리셋버튼이 있어서, 깔끔하게 그걸 눌러 잊지 않는 이상 전정국을 잊을 날이 올 거 같지 않다. 그래도 별 수 있나. 잠시 쉬었다가 또 정국에게 사랑을 쏟기로 결심했다. 지민은 그 방법밖에는 알지 못했다.
지민은 안 그래도 기운 없는 몸을 힘겹게 일으켜 남준을 찾았다. 히트사이클이 오려고 하는지 몸이 뜨끈뜨끈하다. 거기서도 지민은 헛웃음이 나왔다. 딱 슬퍼한지 3개월이 되는구나, 싶었다. 행복도 3개월짜리고 슬픔도 3개월짜리인데 왜 슬픔이 무게가 더 나가는 거 같을까.
"김비서, 있어?"
방은 비어있었다. 요즘 김비서 바빠 보이긴 하던데. 지민은 남준에게 소홀했던 관심을 떠올리고 입맛을 쩝 다셨다. 억제제 달라고 해야 하는데. 다른 고용인에게 달라해야겠다 생각하며 지민이 나가려는 때였다. 남준의 책상 위로 익숙한 물건이 하나 보였다. 노트다.
"이게 왜…."
지민은 홀린 듯 노트로 손을 뻗었다. 전정국꺼잖아. 노트는 정국의 것이기도 했고, 지민의 것이기도 했다. 정국이 일하러 나가면 심심한 방안에서 종종 낙서를 해 보여주었다. 무의식적으로 노트를 펼치려던 지민은 멈칫했다. 얼굴 마주하는 것도 힘든데 이건 봐서 뭐하려고. 어차피 행복한 추억을 들여다보면 그로 돌아가지 못하는 과거를 그리며 버텨야 할 슬픔의 무게만 늘어갈 뿐이다. 개자식. 물건 간수 어쩌고 하면서 지는 다 뿌리고 다니네. 신경질적으로 노트를 남준의 책상에 던지듯 올려놓은 지민은 등을 돌렸다.
…아 나도 답 없다. 아빠한테 고맙다고 해야지. 아빠가 엄마한테 맨날 기어서, 나는 그걸 닮은 거뿐이야. 지민은 짜증이 담긴 거친 손길로 노트를 가지고 방으로 돌아왔다. 훔치듯 가져온 노트는 한 번에 보고 바로 돌려주리라 생각한 것과 달리, 첫 페이지를 피는 것조차 많은 힘이 들었다. 웃기네, 전정국이 여기 감시 카메라 달아놓은 것도 아닌데 왜 못 펴.
"하, 그래 혼자 얼마나 잘 먹고 잘 놀았냐 전정국."
중얼거린 지민은 퉁명스러운 손으로 노트를 열어젖혔다. 그러나 고작 한 페이지를 넘기고 손은 멈추어버렸다.
"……."
온통 박지민이었다. 지민은 떨리는 손으로 종이를 넘겼다. 잠든 박지민. 그 페이지를 시작으로 무수한 박지민들이 그 속에 있었다. 불꽃놀이가 수놓은 하늘 아래의 박지민, 버스정류장에서 웃고 있는 박지민, 내려보는 각도에서 보이는 박지민, 젓가락을 들고 뭘 먹을까 고민하는 박지민, 술집에서 쓰는 앞치마를 맨 박지민. 왈칵 쏟아지는 전정국 안의 자신을 마주한 지민은 속에서 포기했던 감정이 치받는 느낌이었다.
니 눈에 내가 이렇게 예뻤어? 이러면서 어떻게 보내려고 한 거야. 지민은 참지 못하고 노트를 끌어안고 말기 암이라도 판정받은 사람처럼 엉엉 울었다. 제 어떤 점이 정국에게 신뢰를 주지 못했던 건가, 밀려왔던 그간의 자기혐오가 흩어져버렸다. 다만, 얼마나 넌 그 말을 뱉으면서 속이 찢어졌을까. 얼마나 아팠을까. 너 이렇게까지 아팠었어. 꺽꺽 울던 지민은 노트에 흐르지 않도록 눈물을 소매로 훔쳐냈다. 조심조심 마지막 페이지를 펼쳤다. 그 페이지엔 그림 대신 글이 적혀있었다.
「사실 거짓말이야」
휘갈겨놓은 글씨체는 급한 티가 팍팍 났다. 지민은 뻑뻑한 눈을 느리게 깜빡거렸다. 손동작처럼 뇌는 느리게 굴러 천천히 답을 내놓았다. 생각보다 빠른 건 멈추었던 눈물이었다. 툭툭 떨어진 눈물이 노트 위로 번졌다.
"…아 진짜."
전정국 무시하는 건 진짜 잘해.
"연락하지 말라니까."
토끼주제에 왜 다른 건 다 느린 거야. 손등으로 눈물을 거칠게 밀어 닦은 지민은 옷을 갈아입고 뛰었다. 집을 나가기 전 유달리 춥게 느껴지는 바깥 온도를 느끼고 잠깐 머뭇거렸다. 몸을 감싸는 열기. 미간을 찌푸리다, 이내 폰을 꺼냈다.
「야 나 히트사이클」
정국에게 보낸 첫 문자였다. 폰을 집어넣으려다 하나 더 보냈다. 늦게 오면 죽어.
***
정국은 올라가는 계단이 천개쯤 되는 것 같았다. 닭장같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판자촌 같은 동네는 몇 년을 넘게 살았고, 매일같이 올라다닌 계단은 익숙하고 또 익숙한데 지금은 너무나도 길어보였다. 문자를 받고 같이 식의 진행구조를 검토하고 있던 남준에게 차키를 빌려 미친놈처럼 밟아왔는데, 그 길보다 지금 뛰는 이 계단이 더욱 정국의 참을성을 문드러지게 했다. 두 칸 세 칸씩 밟아 올라 두드려 패듯 대문을 활짝 젖히고 들어갔다. 현관문 앞에선 헉헉거리는 숨소리를 몰아쉬며 정국은 문손잡이를 잡는 대신 목소리를 냈다.
"저 왔어요."
인기척이 없다.
"박지민!"
정국은 문을 쾅쾅 두들겼다. 처음 지민이 찾아와 문을 부술 기세로 두드리던 때처럼. 그리고 정말 정국이 낯선 불청객에 삐딱하게 문을 열었을 때처럼, 문이 빼꼼 열리고 그 사이로 나타난 지민이 얼굴을 반만 보여주었다. 삐죽 튀어나온 입술은 선명히 보였다.
"왜 왔냐."
"…열어줘요."
"흥, 얼굴 보니까 딱히 절박한 빛이 아니다?"
지민은 불퉁하게 중얼거리고는 잘 가, 하고 얼굴을 쏙 집어넣었다. 문까지 같이 닫힌다. 정국은 더 볼 것도 없이 문틈으로 손을 끼워 넣었다.
"윽!"
"야, 야! 미쳤어!? 손을 넣으면 어떡해!"
지민은 허겁지겁 문을 열어젖혔다. 문에 끼인 정국의 손을 양손으로 잡고 앞뒤로 돌려가며 살펴왔다. 아니, 넌 왜 이렇게 생각이 짧아? 여기다가 손을 넣으면 어떡해! 정국은 걱정스레 손을 쳐다봐 오는 지민을 내려보다, 참을 수 없는 감정이 밀려들어와 남은 손으로 지민의 뒤통수를 감싸쥐었다.
"뭐야."
정국은 고개를 비스듬히 꺾어 입술을 맞붙였다. 말캉하고 부드러운 입술에 닿자마자 조심스레 혀를 섞었다. 지민이 당황한 듯 살짝 움찔하자 정국은 이미 잡고 있던 한손으로 지민의 양손을 한꺼번에 잡아왔다. 이미 여러 차례 했던 키스는 늘 처음 같았다. 달큰한 페로몬도. 얌전히 응하던 지민은 일순간 정국에게 잡힌 손을 빼내 어깨를 퍽퍽 두들겼다. 정국이 한숨 같은 아쉬움을 내쉬었다.
"아, 왜요."
"순서 틀렸거든? 너 나한테 잘못했잖아."
"……."
"아직도 잘못하는 중이고."
지민은 정국을 눈을 가늘게 뜨고 째려보다 먼저 등을 돌려 집 안으로 들어갔다.
"따라 들어와."
혼날 시간이다. 정국은 상황과 따로 노는 벅차오르는 가슴을 내리누를 수 없었다.
단칸방은 여전했다. 둘이 앉으면 꽉 차는 앉은뱅이 식탁도, 한 번 쓰고 다시는 켜지 않았던 티비도, 방에서 가장 큰 옷장도. 병원으로 정국이 지민을 감싸 가져갔던 이불만 사라져있었다. 곧잘 말을 쏟아내던 지민은 예상과 달리 방에 가만히 팔짱을 끼고 선 채 아무 말이 없었다. 정국은 어쩐지 말라오는 침을 삼켰다. 심판관처럼 지민의 입술이 떨어지기만을 바라보았다.
"말해봐. 이제 어떡할 건지. 초대한 거 너고, 그거 들어보고 용서할지 말지 결정할 거야."
"……."
"빌려면 빨리 빌고."
"…빌면 용서해줘요?"
"아니."
정국도 인정하고 있었다. 이미 심한 잘못을 했다. 비겁하게 떠나기도 했고, 버리기도 했고, 떠밀기도 했다. 상처를 주고도 모른 척 계속 아프길 강요했다. 헐떡거리는 환자한테 바이러스를 쏟아 넣은 것과 같아서, 아마 빌어서 용서될 거라면 손발이 닳을 때까지 빌어야하지 않을까. 정말로 죄책감은 가득했다. 지민이 너가 강에 뛰어들어 화가 풀릴 거 같다면 뛰어들 준비는 되어있었다. 제정신이라면 뻔뻔하게 이 집으로 다시 부를 생각 같은 건 하지 않았겠지. 침묵을 유지하던 정국이 말을 꺼내놓았다.
"히트사이클이라면서요."
"어. 오늘쯤 올 거야. 시간 없으니까 빨리 말해."
"자요."
정국은 코트 주머니에서 하얀 약통을 꺼내놓았다. 히트사이클 억제제. 평생을 입에 달고 살아온 약이 보여 지민은 헛웃음을 지었다. 약을 건네는 정국의 표정이 무덤덤하기 짝이 없어서, 화가 난다기보단 황당했다. 얘 진짜 심각하네.
"니 답이야 이게? 꼴랑 이거 먹으라고 나 여기까지 불렀냐? 뭐 여기가 히트사이클 억제제 맛집이야?"
"오면서 약 다 버렸어요."
"뭐?"
"한 알만 남기고."
정국은 확인이라도 시켜주듯 약통을 흔들어보였다. 문자를 받고 급하게 나오다 남준에게 혹시 억제제가 있냐 물어 훔치다시피 가져온 약통이었다. 약통에서 하나뿐인 알약이 흔들리는 소리가 난다. 지민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인상을 찡그렸다.
"그래서 뭐하자는 건데."
"내말 듣고 박지민씨가 선택해요. 구제불능이라고 생각되면 먹고 나가고, 괜찮으면 버리고. 그거에 토 안 달게요."
지민은 정국이 하려는 말을 예측할 수 없었다. 말로는 단언했지만 잘못했다, 미안하다 뻔한 말들을 들으면 용서할 자신을 알고 있었다. 허술하고 진심이 담기지 않은 사과를 대충 건네도 용서했을 것이다. 그깟 용서를 못할까. 지민은 어디 할 테면 해보라는 태도로 앞머리를 쓸어넘기고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박지민씨한테는 이미 밑바닥까지 다 보였고…돌려서 안 말할게요. 솔직히 박지민씨랑 많이 싸울 거 같아요."
"……."
"그래도 같이 아파해줘요."
진저리가 날 만큼 아파도 함께하고.
"같이 괴로워하고."
다 때려치우고 싶을 만큼 괴로워도 함께하고. 정국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절망도 같이하고, 슬픔도 같이 하고, 눈물도, 행복도, 기쁨도. 말로 꺼낼 수 있는 감정은 다 꺼낸 거 같다. 마지막으로 나열된 감정은 가장 크게 느끼고 있으면서도 한 번도 입 밖으로 서로를 향해 꺼내보지 않은 말이었다. 사랑도 하고. 다 말했다. 정국은 약통의 뚜껑을 열어 남은 한 알을 손바닥에 부어 지민의 앞으로 들이밀었다.
"선택해요."
지민은 손바닥 위 놓인 억제제를 내려다보았다. 천천히 지민이 억제제를 향해 손을 뻗은 찰나였다. 지민의 손끝이 닿기 전 정국은 주먹을 쥐어 억제제를 가져가지 못하도록 막았다. 그대로 알약을 입안에 털어 넣었다. 적막한 단칸방 속에서 으득으득 알약 씹는 소리만 울렸다.
"사실 줄 생각 없어서."
"……."
"원하면 키스해서 가져가던가…."
한 번 놓았었던 이성, 두 번은 놓지 못할까 봐. 정국은 그 말을 끝으로 손을 잡아왔다. 닿은 온도가 뜨겁다. 정국이 덧붙였다.
"뭐 키스하면 히트사이클 오겠지만."
그때도 그랬으니까. 지민은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올 것만 같은 기분이 되었다. 사과보다 먼저 듣고 싶었던 건 확신이었던 거 같다. 또는 다시는 널 보내지 않을 거라는, 두 번 다시 연결되어있는 손을 놓지 않을 거라는 니가 나를 원한다는 욕심. 지민은 잡고 있는 손을 당겨 정국의 등을 감싸 안았다.
"내가 너 떠날 수 있을 거 같냐."
널 이미 만났는데 어떻게 떠나. 지민은 정국을 안은 채 토닥토닥 두드려주었다. 같이 아파해줄게. 이게 무섭지 않고 좋은 거라고 알려줄게.
"떨어지지 말고 이제 나랑 있자."
정국은 지민을 마주 끌어안았다. 저보다 반 뼘은 작은 몸을 끌어안으니 드디어 괜찮아졌다. 한참을 더 돌아갈 뻔한 길에서 뒤늦게라도 발을 뺐다는 안도와 이제야 완전히 도달했다는 안도가 섞여 복받치는 뭉텅이를 속에서 끄집어냈다. 정국은 어깨를 떨어가며 눈물을 흘려냈다. 지민은 넓은 등을 연신 토닥거리며 같이 눈물을 떨궜다. 우리 꽤 많이 돌아왔다, 그치. 그래도 더 안 돌아가서 다행이다.
다음으로 이어진 건 3개월의 행복에 종지부를 찍었던, 그 장면과 똑같았다. 정국은 지민의 허리를 꽉 잡고 키스해왔다. 달척하게 혀가 섞이고 오메가 페로몬이 향기롭게 흐드러졌다. 지민은 쉽게 할딱이며 정국의 목에 팔을 감아왔다. 화인이라도 맞은 것마냥 닿은 모든 부분이 뜨거웠다. 그때 했으면 좋았을 말이 지민의 귓가로 흘러들어왔다.
"가질래요. 가질 거야."
입술이 닿았다.
단칸방은 질식시킬 듯 피어난 오메가 페로몬으로 어지러웠다. 애달프고 천천했던 처음과 달리 히트사이클이 시작되고 나선 밤낮도 구분하지 않았다. 마지막 생명줄처럼 서로의 이름을 불렀고 재기라도 하듯 애정을 퍼부었다. 좋아해. 박지민 니가 너무 좋아. 정국은 밑에서 매달려오는, 이미 몇 번이나 탐한 하얀 어깨에 자국을 새겼다. 입맞춤을 아무리 해도 안을 아무리 파고들어도 갈증이 일고 달았다.
박지민. 누구도 가져가지 못하는 내 오메가.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나의 두려움, 나의 사랑. 정국은 길게 신음했다.
"하아, 박지민."
몇 번인지 모를 이름을 또 부르는 어느 순간, 동났던 마음이 마침내 가득 채워졌다.
***
겨울 해는 늦게 뜬다. 지민은 햇빛이 단칸방을 파고들기도 전에 끙끙거리며 허리를 짚고 눈을 떴다. 아릿한 격통은 고급 라텍스 침대에서 자다 땅바닥에서 잤을 때 찾아오는 통증과는 조금 달랐다. 아 이건 파스로 해결될 게 아닌 거 같은데. 반절만 눈을 뜬 지민은 낑낑거리며 허리를 잡고 있다 옆에 보이는 품으로 파고들었다. 허리가 나아진 게 아닌데도 프스스 미소가 나왔다. 이렇게 좋은데. 지민은 정국의 품에 얼굴을 부비적거리다 잠든 정국의 볼을 쿡 찔렀다. 뜨겁다.
"…빨리 일어났으면 좋겠다…."
말똥말똥해진 눈으로 지민은 정국의 곁에 붙어 언제 일어날까 관찰했다. 히트사이클에 언뜻 스치는 기억만으로도 볼이 발갛게 달아오른다. 고자라고 붙인 거 취소해야겠다. 히히거리며 지민이 잠든 정국의 목에 쪽 뽀뽀를 했다. 전정국도 그래서 그런가, 볼이 빨갛네. 그런데 그런 거치고는 좀 많이 빨간 거 같은데. 자세히 보니 땀도 흐른다. 원래 사람이 섹스하고 나면 다음날 이렇게 생긴 건가. 지민은 아무래도 수상한 감이 있어 일어나 앉아 정국을 흔들었다.
"정국아, 일어나봐. 전정국."
정국은 아무리 흔들어도 반응이 없었다. 등골이 묘하게 쎄한 게, 가만 보니까 이거.
"야 전정국!"
거의 정국의 뇌가 흔들릴 만큼 거세게 흔들던 지민은 정국의 뺨까지 탁탁 두들겼다. 뺨에 손바닥이 찍힐 정도였다.
"정국아! 정신차려 봐!"
"…으…."
"괘, 괜찮아? 정국아? 정신이 들어? 너 아파?"
"머리…울…."
정국은 시끄럽다는 듯 미간을 모았다. 다시 눈이 감기려는 걸 보고 지민이 꽥 비명을 질렀다.
"야! 안 돼! 눈 떠! 너 아프지?"
"시끄러…."
잇새로 작게 뱉은 정국은 지민을 잡아당겼다. 어어, 하고 딸려간 지민은 잠깐, 하고 외치다 얌전히 안기는 쪽을 택했다. 정말 아프면 이런 힘도 안 났겠지. 그런데 너무 뜨거운데. 전정국이 괜찮다고 대답을 했나. 가슴팍에 얼굴을 붙이고 쿵쿵거리는 정국의 심장소리를 듣던 지민이 벌떡 일어났다.
"정국아, 너 좀 이상해."
"……."
"정국아?"
"……."
"전정국!"
속았다. 아픈 거다. 지민은 허겁지겁 다시 정국의 뺨을 찰싹찰싹 때렸다. 전정구욱! 물씬 걱정이 올라오는 한편, 황당함을 감출 수 없었다. 대체 얘랑 나랑은 왜 뭐만 해보려고 하거나, 하면 누가 상태가 메롱인 거야. 히트사이클로 맛이 간 상태거나, 아파서 몸져눕거나.
"안 되겠다. 병원가자."
지민은 허겁지겁 정국의 옷장에서 옷을 꺼내 입고 폰을 찾았다. 재수가 없는 것도 한 번에 몰려서 오는 걸까. 하필 배터리가 나가있다. 충전기 있는 위치를 찾아 달려갔으나, 지민은 에이씨 하고 돌아 나와야만 했다. 폴더폰 충전기다.
"그, 그래! 물수건!"
그리고, 그리고 또 뭐가 있지. 지민이 허둥지둥 화장실로 달려가 수건을 가져오려는 때였다.
"도련니이임! 여기 있죠! 계시는 거 압니다!"
쾅쾅 문이 부서져라 두들기는 탁음이 울려 퍼졌다. 지민은 눈을 반짝 빛냈다. 마냥 운이 나쁜 건 아닌 거 같다. 문밖에서는 외치는 목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사장님께서 화 많이 나셨습니다! 진짜 잘리게 생겼…."
"김비서! 빨리 차! 빨리!"
"예, 예?"
문을 활짝 연 지민이 남준의 손을 잡고 안으로 이끌어 정국의 상태를 보여주었다. 얘 아파.
남준은 올 때만큼이나 미친 속도로 차를 몰아 병원으로 직행했다. 차에서 계속 조금만 더 빨리 갈 수 없냐 재촉하는 지민 탓에 속도는 제한속도를 아슬아슬하게 웃돌았다. 남준은 정국을 업으려 끙끙거리는 지민을 보고 속이 터져 정국을 둘러업는 작업까지 끝마쳤다. 말대답하던 방금과 달리 정국은 깊은 신음소리만 내뱉고 있었다. 정국을 응급실 침대에 뉘이자 마자 지민은 무섭게 의사를 닦달했다. 해가 뜨기 전부터 찾아온 진상손님을 상대로 의사는 쩔쩔맸다.
"얘 왜이래? 많이 아파? 갑자기 아침에 일어나니까 아팠어."
"보호자분 진정하세요. 지금 검사를 하면 알 수 있을 겁니다."
"척보면 몰라? 뭐야. 의사 맞아? 여기 병원장 누구야."
의사는 대체 이 사람이 누구길래 이런 말을 하고 있냐는 듯 당황하며 같이 온 일행인 남준을 바라보았다. 남준은 본격적으로 진상을 부리려는 지민을 보고 발을 동동 굴렀다. 정국이 급하게 차키를 빌려달라고 할 때부터 무언가 낌새가 좋지 않다고 느끼긴 했지만, 설마 말도 없이 둘만 홀랑 떠나있을 줄은 몰랐다. 연락이라도 좀 하던가. 자식새끼 걱정하는 박사장의 불호령을 온몸으로 후들겨 맞은 비서들이 이놈의 도련님은 대체 또 어디로 튄 거냐는 하소연을 듣던 남준은, 더 이상 참기 힘들 정도로 양심이 괴로워져 직접 지민을 찾았다.
아니나 다를까 정국과 콕 틀어박혀 있었고, 단칸방에서 지민을 쉽게 발견한 부분까지는 좋았다. 남준은 딱 죽을 맛이었다. 이럴 거면 약병은 뭐하러…! 억제제를 가져가길래 먹였을 줄 알았더니만. 콘돔 쓰셨나. 아니, 사용법은 아시려나. 지민을 앉혀놓고 성교육을 단단히 시켰어야 했다며 속마음으로 땅을 쳤다. 남준은 이내 정국이 베타라는 사실을 떠올리고 천만다행이라 안심했다.
"큼, 저기 도련님."
"왜. 아니 병원장이 왜 출근을 안 해? 지금 7시인데!"
"사장님께서 도련님을 찾고 계십니다. 많이 걱정하고 계셔요. 여기는 제가 있을 테니 도련님은 사장님한테 가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아, 맞다."
지민은 그제서야 퍼뜩 깨달았다. 무작정 뛰어나왔다. 전정국 아픈데. 옆이 있어줘야 하는데. 갈등하는 지민을 본 남준이 한 번 더 재촉했다.
"만약 도련님이 안 오시면 사장님이 이쪽으로 오실 거 같습니다만."
"아빠가? 그럼 기자들도 올 거 아냐."
"예, 그러니까 그 전에…."
지민은 머뭇거리다 정국의 손을 꽉 잡았다가 놓았다. 발걸음 진짜 안 떨어지려고 한다. 이대로 눈뜰 때까지 버티고 싶다 생떼를 부리는 대신 남준에게 돌아와서 꼭 정국이 일어나면 곁에 있어달라는 부탁을 했다.
"가자."
집으로 돌아온 지민은 혼이 났다. 박사장과 문여사는 난생처음으로 지민을 보고 집이 쩌렁쩌렁 울릴 만큼 언성을 높였다. 히트사이클이 다가온 기간에 겁도 없이 혼자 돌아다닌 점이 그 첫 번째 이유였고, 말도 없이 사라졌다 나타난 점이 두 번째 이유였다. 박사장과 문여사는 혼나며 눈치를 보던 지민이 조심스럽게 해오는 말에 분노의 최고치를 찍었다. 히트사이클 같이 보낸 상대가 있는데…일단 태형이는 아니구….
"자, 잘못했어! 아빠 한 번만 봐주면 안될까? 으응? 걔 많이 아픈데, 내가 옆에서 봐줘야하는데…!"
조금만 애교를 부리면 봐줄 줄 알았던 계획과 다르게 지민은 방에 갇혀 자숙하라는 벌을 받았다. 박사장은 호랑이 같은 고함을 치며 혹시라도 문을 열어주는 사람이 있으면 그날로 모가지라는 명령까지 남겼다. 아니, 그니까아 내가 잘못하긴 했는데에. 잘못은 했는데에, 봐주는 건 엄마랑 아빠만 할 수 있는데에. 말꼬리를 늘인 애교에도 소용없었다. 끼잉, 주인 보고픈 강아지가 문을 박박 긁듯 문 앞에서 안절부절못하던 지민은 포기하고 침대에 주저앉았다.
전정국이 보고 싶긴 하지만. 일단 할 일이 있었다. 지민은 폰을 꺼내들었다. 발이 좁은 지민의 전화번호부 목록은 인스턴트처럼 간단했다. 엄마, 아빠, 김비서, 김태형. 그리고 최근에서야 추가된 전정국. 지민은 정국을 지나쳐 태형의 번호에서 손가락을 멈추었다. 가만 폰을 바라보던 지민은 '피해'에 등록되어 있던 태형의 카테고리를 가만 들여다보았다. 설정버튼을 눌러 변경했다. 진작 해야했는데 전정국 때문에 넋 빠져있어서 못했었네.
"됐다."
'친구' 카테고리가 두 명으로 늘었다. 원래 있던 김비서, 두 번째는 김태형. 만족한 지민은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끊은 태형은 차 시트에 등을 깊게 묻었다. 오랫동안 어질러져있던, 때문에 미적거리고 미뤄두었던 방청소를 끝낸 기분이었다. 차는 서울 중심의 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햇빛이 요동치는 한강을 바라보았다. 짧은 통화는 차가 다리를 채 다 건너기도 전에 끊겼다. 아무리 복잡하고 엇갈리고 헤매는 여정을 지나왔어도 그 길의 끝은 단순한 법이었다. 모든 엔딩이 그러하듯. 진동이 울리는 폰의 발신자를 확인한 순간 머리보다 직감이 먼저 알아차렸다. 전화를 받을까 받지 말까 잠깐 고민을 하긴 했다. 사람은 익숙함에 안주하려는 습관이 있다. 그게 통화를 망설이게 만든 원인이었다.
전화를 받은 태형은 늘 먼저 연락을 했었을 때와 달리 입을 다물고 있었다. 조용한 침묵이 오갔다. 끝에 들려오는 목소리는 살짝은 망설이기도, 그래서 더 진심이 느껴지기도 했다.
미안해.
그 한마디에는 여러 가지가 섞여있었다. 감회가 새로웠다. 박지민한테 차이는 건 이미 열 손가락을 넘게 꼽는데, 그때만큼 깔끔하게 차인 적이 없다. 김태형 너는 필요 없다 틱틱거리듯 뱉는 게 아닌 진지한 사과라서 그럴까. 지민은 미안하다고만 소리 낼 수 있는 곰 인형처럼 또 미안하다고 해왔다.
미안해, 태형아.
태형은 듣고만 있었다. 각 사과는 저마다 의미가 달랐다. 몰라줘서 미안. 이용하려고 해서 미안.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끝은 진작 나있었다는 걸. 훤히 보이지만 보고 싶지 않았던 거뿐이다. 끝이 나지 않은 척 했던 건 남은 미련 때문이다. 조금만 더 빨리 일찍 깨닫고 우리 사이를 원래 궤도로 되돌리기 위해 손을 뻗었다면 달라졌을 텐데. 전정국이란 베타로부터 힌트를 얻고 베끼는 게 아니라 내가 먼저 떠올렸다면 끝은 오지 않았을 텐데. 듣기만 하던 태형이 질문했다.
행복해졌어?
응.
찝찝함의 정체가 드러났다. 단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하는 지민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복잡하게 묶여있던 매듭이 탁 풀렸다. 기분은 시원섭섭했으며, 싱숭생숭하기도 했다. 알파로 원하는 오메가를 뺏겼다는 건 둘도 없이 자존심 상하는 일이고, 머리가 터질 만큼 열이 받아야 하는 게 분명한데, 마음속은 오랜 항해를 끝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온 선원이라도 된 듯 홀가분해졌다. 다행이라는 생각이 먼저였나.
지민이 빠진 사람이 베타라는 사실에 한방 맞고부터 눈을 감으면 과거가 둥둥 떠다녔다. 매번 똑같은 추억에서 새로운 측면을 발견했다. 같은 기억임에도 너무 많이 달랐다. 얼결에 아버지의 힘을 믿고 처들어간 침실에서 자고 있는 박지민이 눈을 부스스 뜨고 자신을 박사장으로 착각해 손에 얼굴을 부비적거려왔을 때. 처음 교복을 입고 쑥스러워하는 박지민을 봤을 때. 경영책을 받아들고 난감해하던 박지민이 이건 뭐냐 질문했을 때. 하나둘 덜어내고나니 반한 순간에는 약혼이라는 것도, 알파와 오메가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설렘으로 팔딱거리는 박동이 전부였다.
만약이라는 가정은 불필요하지만 태형은 정의해보았다. 만약 약혼을 먼저 하지 않고 만났더라면. 만약 내 오메가라는 생각을 먼저 하지 않았더라면. 부질없는 만약 속에서는 조금 다른 신기루가 보였다. 태형은 작게 웃으며 먼저 인사했다.
우리 파혼할까? 메리 파혼.
…태형이 너도 행복해졌으면 좋겠어.
응, 행복해질 거야. 너도 행복만 해, 지민아.
태형은 먼저 전화를 끊었다. 질질 끌던 미련을 접기로 결심한건 내 옆에서 시들어갈 너를 보는 것보다 행복하게 웃는 모습이 좋으니까. 무섭고 찐득한 욕망이 올라오더라도 잘라낸 건 반짝반짝 빛이 나는 너가 좋으니까. 나를 설레게 한 니 모습이 좋으니까.
"아버지한테 그거 다시 말해놔. 장기 출장 다녀온다고."
"헛, 도련님 잘 생각하셨습니다. 사장님께서 좋아하실 겁니다. 식 전으로 일정 다시 체크해놓겠습니다."
"아니 그건 필요 없어. 더 뒤로 빼."
"예?"
"질문이 너무 많은 거 같은데."
비서는 입을 다물었다. 태형은 다리를 꼬고 창문을 내렸다. 해가 밝다. 그래도 당분간은 배 아플 거 같거든.
길고 길었던 짝사랑의 터널을 통과했다. 빛은 생각보다 밝았다.
***
정국은 새 배터리를 장착한 로봇처럼 번떡 눈을 열었다. 삐삐 울리는 기계소리들이 들린다. 병원이다. 설마…. 정국은 쎄한 기분이 들어 제 손목을 내려보았으나, 다행히 기계소리는 옆 침대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는데, 옆에서 꾸벅꾸벅 팔짱을 끼고 고개를 떨군 채 졸고 있는 남준이 보인다. 정국은 피곤해 보이는 남준을 깨우는 것보다는 마른세수를 했다.
이런 기분이었겠구나. 다시 한번 박지민을 안다. 앉아있는 남준을 보고 대충 무슨 상황인지 한방에 이해가 가면서도, 가슴속에 은은히 아쉬움이 깔린다. 몹쓸 생각으로 널 보냈을 때, 너 혼자 병실에서 눈떴을 때 말도 하지 못할 만큼 아쉬웠겠다. 정국은 슬리퍼를 신고 침대에서 일어나 커튼을 젖혔다.
"앗, 환자분!"
간호사가 정국을 발견하고 놀란 기색을 표했다.
"이렇게 막 움직이시면 안 됩니다."
"몸 상태는 멀쩡한데요?"
"아무리 그래도 환자시니까, 가서 선생님 불러드릴게요."
정국은 됐으니까 퇴원이나 시켜 달라 할 걸, 하는 생각을 하며 스트레칭을 했다. 가뿐하다. 기절해서 깨어난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으리만치 가볍고 에너지가 넘쳤다. 환자복 따위는 바로 벗고 공사장으로 가 철근까지 나를 수 있는 몸상태였다. 팔굽혀펴기까지 해볼까 고민하는 때였다.
"전정국 환자분?"
"네."
"잠깐 간단히 상태 좀 볼게요."
"그런데 퇴원 수속은 언제 밟죠? 얼마나 걸리나요?"
간호사가 친절하게 수속을 밟으면 곧장 가능하다는 정보를 알려주는 사이, 눈 상태를 확인하고 청진기로 맥박까지 들은 의사는 정국의 예상과 엇나가게 점점 미묘한 표정이 되어갔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예? 어…잠시만요."
의사는 고개를 갸웃하며 간호사를 향해 질문했다.
"이 환자분 입원시 체질 베타에 체크되어있던 거 맞지?"
"네, 맞습니다. 선생님."
의사의 표정은 점점 더 미묘해졌다. 그러더니 결국 심각하게 안색을 굳혔다. 눈을 깜빡거리고만 있는 정국을 향해 무겁게 말해왔다.
"환자분, 잠깐 세밀한 진료가 필요할 거 같습니다."
"으음…음?"
꾸벅거리며 졸던 남준이 시끄러운지 눈썹을 꿈틀거리며 한쪽 눈을 떴다. 붕붕 주변을 둘러보다 심각한 낯빛의 의사와 어리둥절해 보이는 정국을 보고 잠이 번쩍 날아갔다. 남준은 급히 명석한 비서의 옷을 입고 상황을 분석했다.
"선생님, 심각한 겁니까?"
심각하면 우리 도련님 뒷목 잡고 넘어가실 텐데. 의사가 손을 내저었다.
"아니 심각한 건 아니고 잠시 검사를 해봐야 할 문제가…금방이면 됩니다."
"형님, 갔다 올게요."
정국은 잘 거면 침대를 이용하라는 말과 함께 병실을 나섰다. 여러 기계에 들어가 검사를 받았다. 검사를 받으면 받을수록 의사가 이상한데, 하고 중얼거리며 재검사를 요구했다. 마지막에는 의사 여럿이 정국의 결과를 두고 머리를 맞대고 토론을 벌였다. 정국은 큰 문제야 있을까 싶었다. 끽해야 몸살이겠지 싶다. 한참만에야 의사가 검사 결과가 적힌 종이를 여러 번 들척이다 큼큼, 헛기침을 하고 말을 꺼내왔다. 정작 남준이 못내 더 긴장한 안생으로 귀를 기울였다.
"환자분께서는 현재 알파로 발현하셨습니다."
정국은 되묻는 것도 곧장 반응할 수 없었다. 남준도 같이 얼이 빠져버렸다. 정국은 처음 지민이 쳐들어와 결혼하자는 말을 들었을 때만큼이나 뜬금없다는 어조로 되물었다.
"…예? 알파요?"
알파란다. 정국은 귀를 의심했다. 알파? 내가? 베타 판정을 받고 살아온 날이 평생이었다. 혹시 돌팔이 아닌가. 어쩐지 복잡한 기계들 사이에 들어가고, 같은 검사도 여러 차례나 반복한 거다. 정국이 의심하며 눈을 가늘게 좁히자, 의사는 자신도 잘 믿기지 않는다는 목소리로 허겁지겁 말했다.
"환자분도 알고 계시겠지만, 보통 알파나 오메가로 발현하는 건 일곱 살에서 열 살 사이입니다. 혹시 그때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예."
웃으면서 다녀온다 말하고 나갔다 다시 돌아오지 않았던 부모님. 고아원으로 손을 붙잡고 들어가 변변찮은 정신적 치료도 제대로 못 받았다. 너는 꼭 괜찮아야만 한다는 정신적 자기최면이 시작된 날이기도 했다.
"학회에서 극심한 정신적 스트레스에 시달리면 발현이 안 되는 케이스가 있다는 논문이 올라온 적이 있었는데, 실제로 볼 줄은 몰랐군요. 저희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그 가설이 맞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뭔 그런 말도 안 되는…."
"최근 오메가 페로몬과 가까이 접촉하신 적 있으십니까?"
그 질문에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남준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정국을 돌아보았다. 정국은 단편적인 몇몇 장면들을 떠올렸다. 뭐 이딴 사람이 다 있나 생각했던 첫 만남부터 뜨겁게 숨을 섞었던 히트사이클까지. 특히나 히트사이클 내내 물고 빨고 이성을 잃은 것처럼 몸을 겹쳤다.
"예, 가까이 있었습니다."
"대략 어느 정도…?"
"약 3개월 정도 같이 있었고 최근에는 히트사이클을 같이 보냈습니다."
정국은 서슴없이 말했다. 남준은 저도 모르게 마냥 어린 줄 알았던 자식의 방 서랍에서 콘돔이라도 발견한 부모처럼 끙, 했다.
"역시! 오메가 페로몬에 계속 노출되다보니 발현되지 않았던 알파 체질이 자극받아 나온 거 같습니다. 그간 증세들이 꽤나 있어왔을 텐데, 병원에 와서 진료 안 해보셨습니까? 비정상적인 알파 발현이라 많이 힘들었을 텐데요."
오메가 페로몬을 맡을 수 있던 것도, 아무 자극 없이 얼굴이 붉어지던 것도, 평소에는 멀쩡하던 몸이 갑자기 픽픽 쓰러지던 이유도. 지금 보면 모두 이상한 증상들이었다. 정국을 얼얼한 표정으로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니까, 지금, 알파? 급속도로 허탈감이 찾아왔다. 그동안 대체 뭐 때문에. 박지민한테 저지른 상처들이 얼마인데. 욕이 나오려다 문득 박지민이 한 말이 생각났다. 난 그냥 니가 좋은 거란 말이야.
감정이 밑바닥까지 드러나는 과정에서 지름길이란 없다. 알파였어도 쉽게 돌아오진 않았을 거다. 상처받아 있었고, 익숙해져 상처가 난 지 조차 잊어먹고 있었다. 무난하게 알파로 박지민을 만났다면 행복이 쌓여가면 쌓여갈수록 불안도 깊어졌을 것이다. 끝내는 작은 자극만으로도 상처는 헤집어져 박지민을 다치게 만들었겠지. 남준은 조바심이 담긴 어조로 질문했다.
"그럼…혹시, 히트사이클을 같이 보낸 오메가가 임신할 가능성은…?"
"그건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 히트사이클 기간에 영향받아 발현이 됐으니. 베타가 같이 히트사이클을 보낸다는 건 쉽지 않은데 말입니다."
"하하! 그거 정말 다행이군요!"
남준이 염려가 놓인 얼굴로 그제야 환하게 웃었다. 정국에게 축하의 악수를 건넸다.
"축하해. 기적이네, 기적이야."
정국은 가만 떠올렸다. 신기하게도 대단한 모든 일은 흔하게 퍼져있는 것들로부터 시작된다. 이런 일이 가능하게 만든 박지민이 내게 준건. 아니, 박지민이 주기 전 박지민을 만난 일이. 이름을 부를 수 있고 눈을 마주칠 수 있는 일 그 자체가. 기적이라 부르고, 또는 어마어마한 행운이라 칭해지는 일에 붙일 수 있는 또 다른 이름은. 행운의 또 다른 이름을 찾아냈다. 찾았다. 사랑이다.
의사는 퇴원한 정국의 검사기록을 닫지 못하고 계속 읽은 부분을 읽고 또 읽었다.
"살다보니 이런 일도 다 봐."
가설이 들어맞은 사실조차 신기한데, 심지어 오메가인 상대방은 범상치 않은 부류의 사람 같다. 환자 입원 전 버럭버럭 외치던 얼굴이 어딘지 묘하게 낯이 익다. 분명 무표정하게 노려볼 때는 어디서 본 거 같은데. 간호사들이 혹시 최근에 우성알파랑 혼인 깬 걔 아니냐는 말을 웅성거렸지만 설마, 싶었다. 우성알파랑 혼인을 깨고 베타와? 의사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정국의 차트를 탁 덮기 전 턱을 긁적거렸다.
"각인했다는 것도 알려줘야 했나."
에이. 오메가랑 둘이 알아서 알 텐데 뭘. 의사는 소중한 자료를 제공해준 차트를 빙긋 웃으며 쓰다듬었다.
***
세기의 결혼식은 일주일을 남기고 엎질러졌다. 원인은 그 흔한 성격차이와 더불어 납치후유증. 박사장은 잔뜩 긴장하며 파혼이란 말을 꺼내놓은 지민이 어리둥절할 정도로 쉽게 파혼을 진행했다. 언론은 입장 발표 후 특종 타이틀을 달고 자극적인 루머와 기사를 마구 생성해냈다. 다른 알파나 오메가가 생겨 벌어진 외도라는 둥, 아무래도 흔하지 않은 우성오메가 쪽에서 이제 와 아까워진 게 틀림없다는 둥, 사생활적인 추측도 난무했지만 한울그룹과 유성그룹의 사이가 갈라선 게 분명하며 그 파동이 정치와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대부분이었다. 지민은 언론에서 무어라 떠들든 상관하지 않았다. 원래도 개 짖는 소리라 치부하고 관심이 없긴 하지만, 마침내 박사장이 방에서 근신하라는 벌을 끝냈고, 정국으로부터 다 와 간다는 연락을 받은 지금이 훨씬 더 소중했다.
지민은 방을 왔다갔다거리며 부산스럽게 정국을 기다리다 문자로 다그쳤다. 온다고 한지가 언젠데.
「언제와」
「다왔다며」
「또 구라야?」
「거짓말쟁이」
「어디인데 내가 나가있을게」
문자를 탁탁탁 두들기던 지민은 열이 받아 허공에 발길질을 날렸다. 아니 전정국 이 자식은 내가 문자를 20번 보낼 동안 고작 한통만 띡 보내고 말아? 그것도 언제 오냐고 물으니까 한참이나 지나서 곧이란 한 글자 온 게 전부다. 내가 보내나 봐라. 입술을 삐죽 내밀고 지민은 폰을 내던졌다. 애써 외면하고 침대 위를 뒹굴거리고 있는 와중, 폰이 붕 울린다.
「도착」
지민은 언제 토라졌냐는 듯 방문을 열고 와다다 쏟아지듯 현관으로 돌진했다. 고용인들은 기운을 찾다 못해 팔팔 넘치는 지민을 보고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뭐야…없잖아."
지민은 현관에서 불퉁하게 중얼거렸다. 저보다 덩치가 훨씬 큰 전정국이 숨었을 리도 없고. 서성거리다 짜증이 나 폰을 다시 잡았다.
「너 안 보이는데?」
문자를 보내자마자 지민은 누군가 이쪽으로 다가온다는 기척을 감지했다. 정국인가, 했으나 알파 페로몬이 달려든다. 전정국 아니네. 생각하며 실망한 지민이 건성으로 얼굴을 들어 올린 그때, 머리 위로 그늘이 졌다. 지민은 손에서 폰을 툭 떨어뜨리고 말았다. 정국이 서있었다.
"너…!"
"박지민씨 눈 이렇게 크게 뜰 줄도 알았어요?"
"너, 너!"
경악한 지민은 입을 손으로 가리고 뒷걸음질 치며 정국을 손가락질했다. 고장 난 것처럼 너, 너라는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니, 니, 니, 니가 어떻게 알파 페로몬이 있어!?"
"놀란 건 알겠는데, 그거 좀 기분 나쁘거든요?"
정국은 지민의 손을 잡아 내리고 폰을 주웠다. 지민은 패닉상태였다. 얼이 나가 치직거리는 무전기처럼 몇몇 단어만 끊어 말했다. 전정국이, 알파, 진짜 알파, 비누향, 세상에, 전정국.
"그럼, 그럼 그때 알파 페로몬이 착각이 아니었던 거야…?"
"언제요."
"그때 내가 너한테 찌질하게 매달…아니, 너 진짜 알파야? 왜 알파야? 내가 이상해진 건가?"
정국은 계속해서 놀라 정신 못 차리는 지민이 귀여워 작게 웃음을 흘렸다. 머리를 쓰다듬고는 먼저 지민의 손목을 잡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가요."
"어, 어딜?"
"박지민씨 집. 옷을 왜 이렇게 입고 왔겠어요."
지민은 그제서야 정국의 옷차림을 훑어보았다. 늘 입는 검은색 티셔츠도 아니고, 회사원용 수트도 아니고, 깔끔하고 핏 좋은 수트였다. 얘 뭐지. 완전히 정신이 돌아오지 않은 지민은 멍한 눈으로 이게 뭐, 하는 뜻을 보냈다. 정국이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할 때 되니까 하기 싫은 거예요?"
"…뭐하는데?"
"애인하고 결혼."
"뭐, 뭐? 누구랑?"
"그딴 것도 질문이라고 하는 거면 재미없는데."
결혼? 나랑? 이렇게 당장? 만난 지 5분도 지나지 않아 정국이 안겨준 놀라운 사실들 덕분에 지민은 다리까지 풀리는 기분이었다. 정국은 멍하니 눈만 껌뻑거리고 있는 지민을 끌고 본격적으로 전진했다.
"가요. 허락받으러."
"누, 누구한테?"
"누구겠어요. 박지민씨 부모님이죠."
지민은 목줄 차고 딸려가는 강아지마냥 정국에게 이끌려 다녔다. 손을 잡은 내내 정국으로부터 흘러오는 알파 페로몬은 맡으면 맡을수록 놀라워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묘하게 낯설었다. 영화에서 튀어나온 최첨단 기술로 만들어진 사람로봇은 아닌지 계속되던 의심은 힘차게 전진하던 정국이 발걸음을 멈출 때가 되어서야 끝이 났다. 지민은 저도 모르게 흠칫하고 말았다.
"어디계세요?"
"없는데…."
"뭐요?"
"백수냐. 당연히 아침이니까 일하러 가셨지."
"아 진작 말해주지."
"야 내가, 니가, 어? 갑자기 결혼하자고 할지 어떻게 미리 알아."
"박지민씨도 갑자기 결혼하자고 했잖아요."
지민은 뻔뻔하게 쳐다봐오는 정국의 시선을 마주하니 낯설던 경계심이 팍 풀려버렸다. 전정국은 전정국이다.
"와아 너 그거 진짜 우려먹는다. 이제 그만 말할 때도 되지 않았어?"
"그런 엉망진창 프러포즈 받은 걸 어떻게 까먹어요."
더럭 찔린 지민이 말을 더듬었다.
"어, 엉망? 내가 그건 작정하고 안 해서 그런 거거든?"
"작정하면 어떻게 하려고 했는데요?"
"지금은 별로 하고 싶은 기분 아니라 생각 안 할 거야."
"또 왜요."
지민은 대화가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심통이 났다. 보고 싶었단 말이라도 먼저 해주는 게 로맨스 아닌가. 기절하고 일어나서 사람 걱정이란 걱정은 다 시켜놓고. 지민이 못마땅하게 정국을 쳐다보다 고개를 툭 돌려버렸다. 그리고는 어리광 아닌 어리광을 부렸다.
"나만 너 보고 싶어하구, 너도 나 좋아한다고 했으면서."
"……."
"억제제도 뺏어놓구."
불공평해. 덧붙이는 지민은 투정도 사랑스러워 보이는 방법을 알고 있는 게 틀림없다. 정국은 입술을 삐죽 내밀고 가슴팍을 툭툭 치는 지민을 보다 볼을 양손으로 꽉 잡아왔다.
"아씨, 예뻐죽겠네."
정국은 그대로 입술을 붙여 쪽쪽거렸다. 가볍게 쪽, 지민이 뭐하냐며 볼을 빼려고 하면 또 붙잡아와서 쪽, 이런 걸로 안 넘어갈 거라는 목소리가 웅얼거려도 쪽. 새부리로 쪼듯 쪽쪽거리는 입술에 지민이 결국 흐물흐물 풀린 얼굴로 안겨왔다. 내가 넘어갈 줄 알지이. 넘어갈 대로 넘어간 목소리로 섭섭했다며 애교를 부려온다. 정국이 저절로 올라가는 광대를 막지 못하고 다시 한번 입술을 붙이려고 할 때였다.
"도련, 어머!"
화들짝 놀란 고용인이 황급히 마주친 눈을 피했다. 아빠한테 걸리면 별로 안 좋은데. 지민은 냉큼 차 필요 없어, 한 문장만 남긴 채 정국의 손을 잡고 방으로 이끌었다. 정국이 의아해하며 말했다.
"왜 도망가요."
"아직 아빠한테 너 점수가 안 좋거든."
"아 사장님이요? 괜찮은데."
"뭐? 왜?"
"대충 알고 계세요. 하루아침에 나타나서 자식 뺏은 얌체 같은 부하직원 위치는 아니니까 걱정 마요."
지민이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정국은 간단하게 설명했다.
"그러니까 내가 박지민씨랑 3개월동안 살았던 거 아신다고요."
"…어?"
"이탈리아에 쫓아갈 수 있었던 이유가 뭔데요."
박사장에게 불려갔던 그날. 정국은 무릎을 꿇고 말했다. 속여서 죄송합니다. 박사장은 복잡한 심경이 그대로 드러나는 얼굴이었다. 제대로 말 못하고 끙끙거렸을 지민을 생각하니 안쓰럽기도 했고, 박노인이 던진 자식새끼 마음 하나 이해 못하냐는 말도 부정할 수 없어 창피했다. 박사장은 미안하게 됐다며 포상금은 원하는 만큼 줄 수 있다 제안을 걸어왔다. 정국은 지민이 가져온 하얀 봉투를 다시 박사장 앞에 내놓고 포상금 대신 일을 배우고 싶다는 쪽으로 조건을 바꾸었다. 박사장은 지민이 스스로 찾아가지고 온 사랑을 품어주었다. 물론 한달은 멀찍이 떨어뜨려놓고 여러가지 일을 시키며 시험했지만.
정국은 화제를 전환했다.
"박지민씨 방 좋네요. 어떻게 거기서 세 달이나 버텼어요."
알쏭달쏭 물음표를 띄우고 무슨 소리냐 조르던 지민은 금방 잊고 능청맞게 히히 웃어왔다. 사랑이 좀 더 급했다.
"그거야…사랑의 힘?"
정국은 픽 웃으며 지민을 끌어당겼다. 지민이 쫑알쫑알 대화를 붙여왔다. 알파 페로몬 냄새나니까 신기하다. 너랑 내 방에 같이 들어올 줄은 상상도 못했어. 지민이 불현듯 아, 하고는 진지하게 물어왔다.
"그럼 너 이제 또 막 픽 쓰러지고 그런 거 아니지?"
"뭘요."
"아 섹스 말이야. 고자가 아닌 건 알았지만…하고나서 그렇게 계속 쓰러지면 어떡해. 멀쩡한 거지?"
인상을 팍 구긴 정국은 지민을 어깨에 둘러업었다. 으악! 비명을 외친 지민이 높다며 내려달라고 허우적거린다. 정국은 코웃음 치고 그대로 지민을 침대 위로 던지듯 내려놓았다. 내가 짐짝인 줄 아냐며 지민이 반항하기 전 잽싸게 그 옆으로 누웠다.
"박지민씨보다 천만 배 억만 배는 괜찮고 오래가요. 그런 걱정 제발 치워요."
지민은 피이, 하고는 프시시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는 꼬물꼬물 정국의 품으로 기어들어가 소곤거렸다.
"…나 보고 싶었어?"
병원에서 일어났을 때. 정국은 말 대신 지민을 마주 끌어안는 동작으로 답했다. 단단하게 안아오는 팔. 따뜻한 체온은 말보다 충분히 의미를 전달해주었다. 지민은 정국을 끌어안고 계속해서 속닥거렸다.
"이러면서 어떻게 보내려고 했어, 다른 사람한테."
"그래서 못 보냈잖아."
"보냈으면 너 내 손에 끝장 났어."
가볍게 웃은 정국은 지민과 똑바로 눈을 맞추었다. 박지민씨 손에서 끝장나는 거면 괜찮아요. 장난스럽게 중얼거리다 눈빛은 더없이 진지해졌다. 눈을 뜨고 지민을 만난 순간부터 하고 싶었던 말이 있다. 정국은 오래도록 나무 밑에 묻어두었던 혼자만의 일기를 꺼내놓는 것처럼 나직하게 말했다.
"솔직히 여전히 겁은 나요. 이렇게 행복한데, 난 이제 박지민씨 없으면 살 수가 없는데. 잃을까 봐, 떠나갈까 봐."
"……."
"그런데 무언가를 잃을 수 있다는 지금이 너무 소중해."
그 불신을 이길 수 있는 이유는 현재가 더없이 소중하기 때문에. 미리 겁먹고 도망가는 것보다, 같이 아파하고 행복해할 미래가 기대되기 때문에. 지민은 한 자 한 자 꾹꾹 진심을 담아 뱉어오는 정국을 보다 손에 깍지를 엮어왔다. 지민이 말했다.
"사랑해."
박지민은 답답한 소리를 종일 던지는 것만큼 정국에게 가장 필요한 말을 던질 줄도 알고 있었다. 일렁이는 눈동자를 지켜보던 지민은 샐샐 눈웃음을 만들어가며 우리 정국이 크려면 한참 멀었네, 하고는 엉덩이를 토닥거려왔다.
"내가 진짜 많이 사랑해줄게."
아파도 같이 아픈 게 좋은 거라는 거 알려줄게. 나랑 있는 게 제일 좋은 거란 거 알려줄게. 정국은 쏟아지는 애정에 한껏 취하다가, 이런 거 하지 말라며 어린 취급을 해오는 지민의 손을 떼어냈다.
"아 맞다. 근데 언제까지 박지민씨, 박지민씨 할 거야. 우리가 남도 아니구."
"입에 익어서…뭐라고 부를까요? 지민아?"
"어쭈? 맞먹지?"
지민이 밉지 않게 눈을 흘겼다. 정국은 멈추지 않았다.
"박지민. 지민아."
"어."
"지민아."
"말해."
웃음기가 맺혀있던 목소리는 이름을 부를수록 깊어지고 애틋해졌다. 정국은 잠깐 뜸을 들이다 입을 뗐다.
"사랑해."
더도 없이. 속으로만 품고 있던 걸 꺼내니 말의 무게는 대단했다. 묵직하게 가슴을 눌러온다.
"사랑해, 정말로."
누가 먼저라 잴 수도 없이 진득하게 두 입술이 맞물렸다. 부드러운 키스는 한참이나 계속되었다. 달았다. 둘의 마음처럼.
기적은 지금 이 순간이 확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