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꽃놀이 시간이 끝나자 사람들은 하나둘 앉아있던 자리를 정리했다. 돗자리를 접고 질서를 유지해달라는 안내직원의 말에 따라 천천히 이동했다. 정국은 한 손으로는 솜이불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지민과 손을 잡고 있었다. 지민이 신나게 정국과 잡은 손을 흔들며 걷다 가로등이 설치된 천막길을 지날 때였다.
"어, 이거 묻었다…."
옷에 케첩이 떨어져 있었다. 정국의 이마에 깊은 주름이 졌다. 바로 지우지 않으면 빨래하기 힘들다. 그 망할 놈의 오뎅. 끝까지 말썽이다. 정국이 솜이불을 지민의 앞에 내려놓았다.
"잠시 여기 있어요. 물티슈 가지고 올게요."
"응."
정국은 순식간에 멀어졌다. 빠른 걸음과 긴 다리로 얼마 지나지 않아 뒷모습이 사라진다. 지민 바로 옆 정리하던 천막도 자리를 접었다. 천막에 달려있던 전등이 꺼지자 주변은 컴컴해졌다. 솜이불 위에 앉은 지민은 오늘의 데이트를 총 평가했다. 맛있는 것도 먹고, 예쁜 하늘도 보고, 이불도 얻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키스 약속을 얻은 점이었다. 일부터 백까지 점수를 매기면 구십구 점이었다. 아까 당장 키스했으면 백 점이었을 텐데. 그래도 뭐 나중에 하기로 했으니까. 지민은 손도장을 찍은 손바닥을 내려 보며 헤실헤실 웃었다.
저절로 행복한 오메가의 페로몬이 생글생글 퍼져 나왔다. 몽실몽실 퍼져나간 페로몬은 멀리 간 정국을 찾듯 넓게 흩어나갔다. 그리고 그게 지민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실수였다. 오메가와 알파가 멀어진 정국의 단칸방에서 생활하니 까먹고 있었다.
"야 여기 오메가 있는 거 같은데?"
지민이 멈칫했다. 지척에서 들리는 목소리였다. 알파의 페로몬이다. 지민은 절로 몸을 굳혔다. 오랜만에 노출되는 알파의 페로몬은 낯설었다. 낯설다 못해 피부를 찌르는 게 공격적으로 느껴졌다. 페로몬은 점차 가까이 다가왔다. 서서히 가게들이 정리를 시작하고 어두워진 터라 주변이 잘 보이지 않는다. 지민이 두리번거리는 사이 알파의 페로몬은 지민의 뒤에서 나타났다.
"와 씨발 나 처음 봐. 우성오메가."
흠칫한 지민은 놀라지 않은 척 눈꼬리를 치켜 올렸다. 두 명의 알파였다.
"꺼져."
"와 성깔 있네. 오빠들이랑 놀래? 이쁜아?"
"웃기는 소리 하고 있네. 그만 지껄이고 꺼져."
지민은 데이트의 마지막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달라붙은 알파 무리는 쉽게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우성오메가가 드문 만큼 귀한 대접을 받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회적인 위치였다. 생물학적인 관점으로 우성오메가는 가장 구미당기는 알파들의 먹잇감이었다. 더불어 세상 모든 알파가 전부 사회적인 통념을 따르는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오메가를 하찮은 존재라 여기며 무시하는 알파들은 존재하고 있었다. 알파들은 지민을 두고 낄낄거렸다.
"우성오메가는 따먹으면 무슨 맛이냐?"
"모르지. 지금 먹어보면 알지 않겠냐. 가자, 이쁜아."
"익! 이거 놔! 안 놔?! 이 미친…."
"튕기긴. 알파만 보면 환장을 하는 주제에."
알파들이 강제로 지민의 손목을 잡고 끌었다. 지민은 발을 땅바닥에 붙이고 악을 썼다. 솜이불이 바닥에 엎어져 나뒹군다. 껄렁껄렁해 보이는 알파들은 유일하게 지민을 방어할 수 있는 이름인, 한울그룹 외동아들이라는 타이틀이 먹히지 않는 상대였다. 지민은 난생처음 알파 앞에서 무력함을 체감했다. 지민의 목에 코를 박고 킁킁거리며 알파가 말했다.
"곧 히트사이클 올 거 같은데, 이거. 와 존나 따먹어달라고 광고하고 다니는 거야?"
"닥쳐! 놔! 안 놔? 죽여 버릴 거야!"
몸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다. 알파의 말이 맞았다. 곧 히트사이클의 주기가 찾아온다. 본능은 벌써 알파의 페로몬에 무릎 꿇고 있었다. 베타 정국의 곁에서 보호받던 지민은 갑작스레 덮쳐오는 알파의 페로몬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손목을 잡은 손을 떨쳐버리고 싶은데, 마음과 달리 몸이 늘어진다. 상대가 알파라면 거부하지 못하는 몸.
"개새끼들아, 놓으라고…!"
"아 이쁜아 페로몬 좀 더 뿜어봐. 존나 좋네. 우성이라 그런가."
지민은 도리질을 쳤다. 알파가 처음으로 두려웠다. 꺼져, 꺼지라고! 외치던 목소리에서도 힘이 빠진다. 눈물이 눈앞을 가리기 시작한다. 많이 빠져나갔지만 여전히 축제현장 안에 있는 사람들이 지민 쪽을 힐끔거렸다. 슬쩍 관심이 몰리는 것을 느끼자 알파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웃으며 친한 척 지민의 어깨를 감아 짓눌렀다. 그러자 반항도 할 수 없었다. 으, 거리는 얕은 신음만 내뱉을 수 있었다. 알파들은 억센 힘으로 지민을 얽어 외진 곳으로 끌고 갔다.
"싫, 전, 전정국! 전정국…!"
"아 알파도 있어?"
알파들은 더욱 비웃었다. 수풀에 가려진 공간에 도착해 지민을 나무에 기대게 만들어 힘으로 고정했다. 눈물이 줄줄 나왔다. 지민은 페로몬에 풀리려는 다리를 버티고 서있는 것만도 고작이었다. 한 알파가 지민의 양팔을 잡고, 다른 알파가 지민의 셔츠에 손을 댄 순간이었다.
"박지민!"
눈앞의 알파가 바닥에 넘어갔다. 날라차기를 선보인 정국은 순식간에 달려들어 알파의 배를 발로 짓밟았다. 컥, 목 졸린 소리가 어두운 공기를 가로질렀다. 정국은 짓밟은 걸로 모자라 알파의 머리를 발로 깠다. 울컥 피가 바닥으로 쏟아졌다. 하얀 이까지 섞여있었다. 모두 눈을 한 번 감았다 떴을 때 일어난 일이었다.
"크윽, 퉤, 이 새끼 뭐…컥!"
정국은 알파가 고개를 드는 순간 다시 발로 알파의 머리를 땅에 처박았다. 알파는 배 뒤집힌 바퀴벌레처럼 발버둥을 치더니, 기절한 듯 곧 잠잠해졌다. 야차 같은 얼굴의 정국이 다른 남은 알파를 응시했다. 서슬 퍼런 시선은 갈기갈기 상대를 씹어먹을 것 같았다. 남은 다른 한명의 알파의 안색이 표백제라도 마신 것처럼 하얗게 질렸다. 알파는 기에 눌려 한발 두발 뒷걸음질을 쳤다.
"씨, 씨발 무슨 오메가가 베타랑 붙어먹어…!"
알파가 도망갔다. 둔탁음이 사라진 자리에는 고요함만이 남았다. 기절한 알파를 확인한 정국은 재빨리 주저앉아있는 지민에게 다가갔다. 정국이 나타나 상황을 정리할 동안 놀랐는지 빳빳이 어깨가 굳어있었다.
"괜찮아요? 괜찮은 거예요?"
"정국아…."
눈물이 글썽거렸다. 긴급한 상황에서 나타난 사랑하는 이의 얼굴을 보자 안심이 밀려들었다. 지민은 무너지듯 스르르 정국의 품으로 찾아들었다. 옷자락을 꾹 잡는 하얀 손이 보여 이를 악문 정국은 지민을 강하게 끌어안았다.
"미안해요."
"그, 그 개새끼들, 기분 너무 좆같았어."
"미안해요. 혼자 두고 가는 게 아니었는데."
지민은 꾸역꾸역 터지려는 울음을 참았다. 그런 인간 말종의 새끼들을 상대로 흘리는 것이 아까웠다. 신체적으로 반항할 수 없던, 그래서 더욱 절망스럽고 오메가라는 존재 자체가 원망스러웠다. 지민은 울음을 목 안으로 넘겼다.
"내가,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 난 싫은데, 진짜 죽여 버리고 싶을 만큼 싫은데 몸이 말을 안 들었어."
"알아요. 알고 있어요. 말 안해도 돼요."
"너무 싫었어."
"미안해요. 늦게 와서."
지민은 오히려 정국의 다독임을 받으면서 더욱 크게 울고 싶어졌다. 이딴 건 싫다. 오메가로 발현하고 싶지 않았다. 처음부터 박지민이라는 사람으로서 대하기보다 우성오메가를 먼저 따지는 세상이 미웠다. 그럼에도 입안 살을 깨물어 참았다. 차마 울음기가 배어있는 목소리까지는 숨기지 못했다.
"…사과하지 마. 너가 왜 사과해."
"……."
"고마워. 살려줘서."
한참을 정국의 품에 얼굴을 묻고 있던 지민은 코를 훌쩍이며 얼굴을 떼어냈다. 살짝 부은 눈을 정국은 모른 척했다. 지민이 울음을 참으려 악을 쓰고 있는 게 훤히 보였다.
"집에 가요."
조용히 속삭이듯 말을 건넨 정국은 지민의 손을 잡고 일으켜주었다. 눈물 자국도 아까워 손으로 눈덩이를 거칠게 비빈 지민은 바닥에 기절해있는 알파를 발로 팍팍 밟았다.
"개새끼, 뒤져버려!"
기절한 알파가 다시금 피를 토해낼 만큼 거친 발길질이었다. 알파를 경찰에 신고한 뒤 정국은 지민의 손을 꽉 붙잡았다. 멀쩡한 척 정국의 손을 잡은 손은 떨림까지 숨기진 못했다. 정국은 가만히 지민의 손을 꽉 잡아주었다. 도착한 경찰은 알파를 연행하고 신고자인 정국과 지민에게 다가와 사건발생상황을 물어보고 몇 마디 걱정 섞인 말을 건넸다.
"많이 놀라셨을 테니까 알파 분께서 페로몬 샤워로 안정시켜주세요. 병원에 가거나 약을 먹는 거보다 효과가 훨씬 좋으니까요."
경찰이 정국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 페로몬 샤워…. 멈칫한 정국이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있자 지민이 불쑥 튀어나왔다.
"저 새끼들 이제 어떻게 돼?"
"미수라도 처벌은 나올 겁니다. 안심하세요."
"그냥 바로 여기서 해결하고 싶은데. 좆 잘라. 그럼 될 거 같아."
"예? 그, 그건 아무래도 법률상 어려울 듯싶습니다만…."
"내가 피해자인데 왜 법을 따라야 해."
날카롭게 지적한 지민은 알파가 탄 경찰차를 태워버릴 듯 노려보았다. 경찰은 난감해하다 정국을 향해 아무튼 잘 돌봐주라는 말을 남기며 도망치듯 차에 올라탔다. 아빠한테는 엎드리기 바빴으면서. 박사장을 찾아와 거의 로봇처럼 웃으며 비위를 맞추던 정부고위층 인사들을 떠올린 지민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가자, 정국아."
축제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적막했다. 도착할 때가 되어서야 떨리는 지민의 손이 차츰 멎어 들었다. 지민은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잠깐이라도 쐬었던 알파 페로몬을 떼어낼 기세로 샤워했다.정국은 가능한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해도 분노가 치솟아 나왔다. 혼자 넘치는 분노를 다스리고 있을 때 지민이 토끼눈이 되어 욕실에서 나왔다. 일부러 보지 못한 척 지민을 달래듯 허리를 감싸 안았다.
"피곤하니까 자요. 다트도 던지고 맛있는 것도 많이 먹었잖아요."
"…응…근데 우리 이불 어떡하지? 못 가져왔어."
"사면되죠 뭐. 누워요, 어서."
정국은 지민을 안고 잘 때까지 토닥거려주었다. 금방 잠이 든 지민의 가슴팍이 일정하게 오르락내리락했다. 정국은 지민이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켜 욕실로 들어가 찬물을 머리에 뿌렸다.
"하…."
베타와 오메가. 눈을 감았다. 물티슈를 들고 도착했을 때 덩그러니 남은 솜이불만 보고 발밑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지민을 마트에서 잃어버렸을 때보다 더한 끔찍함이었다. 알파였다면 지민을 더욱 제대로 지켜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페로몬이라는 게 그렇게 중요한가. 알파는 오메가와. 오메가는 알파와. 정국은 머리를 흔들어 잡생각을 털어내었다. 오메가면 어떻고, 베타면 어떤가. 박지민은 박지민이고, 전정국은 전정국인 것이다.
미세한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
태형은 눈을 깜빡거렸다. 발이 땅에 닿지 않는다. 뭐지. 몸이 검은 공간 속에 붕 떠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는 순간, 검은 공간은 색채를 입었다. 햇볕이 내리쬐는 여름이었다. 장소는 저택 같은 지민의 집이었다. 두 명이 등장했다. 지금 지민의 축소판인 모습과, 태형의 축소판인 모습이었다. 어린 박지민과 김태형이었다. 한 초등학교 고학년쯤으로 보인다. 태형은 깨달았다. 아 이거 꿈이구나. 태형은 푼수처럼 흐흐 웃었다. 꿈에 지민이가 나오다니. 비록 침대 위에서 벌어지는 음탕한 꿈이 아니라, 순수한 꿈이지만 괜찮았다. 등장인물이 박지민이라는 게 가장 중요한 사실이었다.
"태형 도련님, 지민 도련님 간식 드시겠어요?"
"간식? 간식 좋아!"
퍼즐을 맞추고 놀던 지민이 먼저 일어나 튀어갔다. 지민의 옆에 낑겨 붙어 지루한 표정이 역력한 어린 태형도 일어났다. 고용인은 아이들이 귀여운지 호호 웃었다.
"오늘 간식은 과자랍니다."
"이게 무슨 과자야?"
"프랑스에서 특별히 지민 도련님을 위해 박사장님께서 가져오셨습니다."
"아빠가?"
지민이 환하게 웃었다. 쭐래쭐래 따라와 지민 곁에 선 태형은 과자를 물끄러미 내려봤다. 바로 과자에 손부터 뻗는 지민과 달리 곰곰이 생각하는 얼굴이었다. 내가 저때 뭘 한 거지. 어른 태형은 가만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았다. 지민이 과자를 합 베어 물은 찰나, 어린 태형이 과자가 들린 지민의 손을 꼬집었다. 과자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아야! 야 김태형 너 왜 그래!"
"안 돼. 이거 먹지 마."
"…왜?"
오동통한 하얀 손은 금방 붉게 달아올랐다. 어른 태형은 당황했다. 태, 태형아 뭐해. 우리 색시가 먹으려고 했는데! 어린 태형을 뜯어말리기 위해 손을 뻗었으나 형체는 잡히지 않았다.
"왜 먹으면 안 되는데?"
어린 지민은 과자가 먹고 싶은 눈치였다. 어린 태형이 걱정스럽다는 어조로 말했다.
"너 이런 거 많이 먹으면 나중에 우리 아기한테 안 좋아."
"…뭐?"
"너랑 나랑 결혼할 건데, 네가 이런 거 많이 먹으면 애기한테 안 좋다구. 나는 건강한 아기가 좋아."
지민의 인상이 파삭 구겨진다. 야단났다. 어려서도 한 성깔 하는 지민은 매섭게 태형을 노려보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다. 지민은 자신이 오메가라는 점을 싫어했다. 어른 태형은 안절부절못했다. 저, 저때 저러고 뭔 일이 있던 거 같은데. 뭐였지.
"나 오늘부터 김태형이랑 같은 집에서 안 놀 거야."
폭탄선언을 내뱉은 지민은 과자가 담긴 그릇을 안고 방을 빠져나갔다. 아. 어른 태형은 깨달았다. 맞다. 저 때부터 지민은 자신을 향해 축객령을 내리기 시작했다.
"지민아아! 지민아 왜 그래!"
어린 태형은 영문을 몰라 지민을 졸졸 따라갔고, 지민은 저리 가라고 외치며 태형을 피해 도망 다녔다.
하하 좋, 좋은 추억이네. 태형은 합리화했다. 어쨌든, 과거 추억의 꿈을 꾼다는 게 중요한 거지. 그나저나 우리 지민이는 어렸을 때도 너무 씹덕 터진다. 깨물어주고 싶게 귀엽잖아. 으윽, 내 심장. 말랑말랑해 보이는 어린 지민의 볼을 되새기며 태형은 박지민 찬양가에 한 구절을 더 추가했다. 공간이 다시 한번 어질러진다. 다른 장면이다. 이번 장소는 학교였다. 박지민과 김태형은 중학교 시절 교복을 입고 있었다. 둘은 상류층 자제들이 많이 다닌다는 사립 중학교를 다녔다. 어른 태형은 감탄했다. 크, 우리 지민이 교복 죽여줬지. 한 책상에 모여 소란스러운 것을 보니 점심시간인 모양이었다.
"오늘 축구 한판?"
"콜!"
"어, 나도 할래!"
혼자 책상에 엎어져 있던 중딩 지민이 손을 들고 끼어들었다. 책상에 몰린 무리는 지민에게 시선을 한 번 준 뒤, 무리 가운데에 자리 잡은 태형을 쳐다봤다. 말한 건 박지민인데, 다 김태형을 쳐다본다. 저 때는 이미 약혼이 발표되어있던 시기다. 저 때도 뭔 일이 있었던 거 같은데. 분명 무슨 일이 있었긴 한데 기억이 흐릿하다. 스물여섯 어른 태형에게 중학교는 꽤나 먼 과거였다. 기억나는 거라곤 학교에 압력을 행사해 지민과 삼년 내내 같은 반이었다는 것뿐이었다. 그럼에도 어쩐지 등골이 싸했다. 중딩 태형이 단호하게 잘랐다.
"안 돼."
"네가 뭔데!"
"너랑 결혼할 사이지."
주변에서 오오 김태형 박력 개쩔어, 하며 책상을 두들긴다. 어른 태형은 중딩 태형을 말리고 싶어 손을 뻗었다. 드디어 중딩 태형이 던질 다음 말이 머릿속을 스친 탓이었다. 그것만은 안 돼! 저 말을 뱉고 태형은 지민에게 학교에서마저 개찬밥 신세가 되었다. 꿈은 잔인하게도 흘러갔다.
"혹시라도 넘어지면 나중에 임신하는 데 문제 생길 수 있어."
주변에서 지민에게 한마디씩 거들었다. 야 그래 알파가 말하잖아. 말 들어 박지민. 그래, 오메가는 알파 말 들어야지. 어른 태형은 중딩 태형의 머리를 한 대 까고 싶은 것을 주먹을 쥐며 참았다. 저 시기는 한창 예민할 사춘기 나이였다. 더군다나 지민은 남들보다 유달리 심한 질풍노도의 사춘기를 겪고 있었다. 우성오메가는 아무리 노력해도 우성알파처럼 스스로의 노력을 인정받기 힘들다는 세상을 조금씩 깨닫는 중이었다. 박사장도 알파고, 김사장도 알파며, 유명한 운동선수 등 어지간한 사회의 성공한 유명인들은 알파다. 오메가도 끼어있긴 하지만 알파보다 그 수가 현저히 적었다. 게다가 증명이라도 하듯 어떤 일이든 태형이 관여했다. 약혼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태형의 주장이 제 주장보다 강했다.
"안 해! 축구 실컷 하다 자빠져서 코나 깨져라!"
중딩 지민은 씩씩거리며 교실을 빠져나갔다.
"야, 야 박지민? 박지민 왜 화내!"
중딩 태형이 당황하며 따라나선다. 공간이 다시 시커멓게 변한다. 태형은 꿈을 고소라도 하고 싶었다. 아니 시발 왜 이딴 꿈만 보여주는 건데. 좀 좋은 추억거리를 꺼내주던가. 검은 공간에서 난리를 치던 태형은 가운뎃손가락을 치켜 올리며 엿을 날렸다. 동시에, 공간이 또 한 번 뒤틀렸다. 장소는 문란한 파티가 벌어지는 클럽이었다. 태형은 풍경을 보자마자 털퍽 주저앉았다. 시발, 고소한다고 해서 화났냐. 여태껏 잊을 수 없는 사건이다. 인생에서 한 부분을 자르라면 이 부분을 선택할 만큼 태형은 지금 보여주는 과거를 후회했다.
꿈속에서 고딩 태형은 벌어질 일도 모르고 교복을 입은 채 당당하게 술을 퍼마시는 중이었다. 룸 안에서 지민을 닮은 오메가와 키스도 하고 있었다. 성욕이 혈기왕성할 나이, 지민은 태형이 진도라도 나갈라치면 기를 쓰고 으르렁거렸고 태형은 풀지 못한 성욕을 들고 자연스럽게 클럽을 찾았다. 돈 많은 상류층 자체의 흔한 루트였다. 아아. 어른 태형은 보고 싶지 않은 장면에 고개를 숙였다.
"누가 사모님이래! 나는 김태형이랑 결혼 안 해!"
"에이, 사모님. 빼지 마시고. 자자 안에 들어가서 놀으십쇼!"
저 때 지민은 박사장이 한 부탁으로 자신을 찾은 것이었다. 고딩 태형이 김사장에게 지민이를 못 봐 슬프다고 넋두리한 것이 먹혀, 그것이 박사장에게 전해지고 박사장의 부탁이라면 따르는 지민에게까지 먹힌 것이다. 고딩 지민은 고딩 태형에게 얼굴도장만 대충 찍고 가려는 생각이었을 터였다. 고딩 태형은 당황했다. 왜? 왜 하필 지금? 지민에게 자신의 외도를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태형은 풀어진 셔츠부터 잠갔다. 바지를 끌어올리려는데, 지민이 문을 활짝 열고 들어섰다. 반은 발가벗은 오메가와 바지를 추스르지도 못한 알파. 룸의 꼴을 본 지민의 표정은 딱 한 문장으로 정의할 수 있었다. 김태형 너 진짜 가지가지 한다.
"지, 지민아. 이건 그러니까…."
"뭐. 하던 거 계속해. 상관없어. 그리고 아저씨한테 다시 한번만 더 내 애기하면 죽는다, 너."
지민은 차갑게 등을 돌렸다. 고딩 태형은 지민을 따라나섰다. 어른 태형은 고딩 지민에게 달라붙어 귀를 막았다. 안타깝게도 유령처럼 손이 통과된다. 듣지 마, 지민아. 안 돼! 고딩 태형은 파국으로 치닫는 말을 던졌다.
"그, 그래도 안에는 안 쌌어."
"뭐?"
"난 너랑 결혼해야 하니까, 내 애는 너한테서만 볼 거란 말이야."
지민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이내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머리끝까지 열이 받았다는 증거다. 머지않아 고딩 태형의 얼굴에 주먹이 꽂혀 들어왔다.
"악!"
고딩 태형이 나자빠진다. 얼굴을 부여잡은 태형을 향해 고딩 지민이 사납게 외쳤다.
"넌, 시발 내가 애 낳는 기계로 보이냐?!"
"지, 지민아!"
"닥치고 가서 섹스나 해!"
어른 태형은 나라 잃은 사람처럼 허망한 얼굴을 했다. 돌이킬 수 없는 과거를 바꾸는 건 무리라는 걸 안다. 성인이 되면 지민과 결혼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고, 알파와 오메가를 잇는 가장 큰 매개체 아기가 생긴다면 지민과의 관계가 원만해질 것이라 믿었다. 그래, 일단 헤어질 수 없게 연결된 다음 어긋난 걸 고쳐보자.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누군가 등을 두드린다. 돌아보니 자신의 비서였다. 비서는 입모양만 뻐끔거렸다. 도…님, 일어…찾…. 뭐라고? 찾, 뭐? 태형이 미간을 찌푸린 순간이었다.
"도련님, 일어…."
"헉!"
검은 공간 따위는 없다. 자신의 방 의자 위였다. 허우적거리며 깨어난 태형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김사장으로부터 내일까지 시켜놓은 서류를 처리하지 않으면 가지고 있는 차를 모두 뺏어버릴 거라는 협박을 받고 밤을 새우고 있었다. 그러다 잠들고 악몽을 꾼 것이다. 손바닥은 땀으로 흥건했다. 비서가 다소 걱정스럽게 질문했다.
"도련님 무슨 악몽이라도 꾸셨습니까? 계속 신음을 내면서 안색이 나쁘시길래…."
"존나 나쁜 꿈이었어…."
다른 게 자학이 아니라 이런 게 자학이다. 뇌가 신체부분만 아니라면 뽑아 내릴 만큼 괘씸했다. 쓸모없는 새끼. 욕을 내뱉으며 스스로 이마를 가볍게 친 태형은 흐트러진 넥타이를 똑바로 매며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그, 그러셨습니까? 도련님, 다름 아니라 찾았습니다. 지난번에 시키신 일 처리했습니다."
"한울그룹 건?"
"예. 원하시면 호출해오겠습니다."
태형은 자세를 똑바로 했다. 이제라도 품위를 찾으며 다리를 꼬고 머리를 쓸어넘겨 정리했다. 눈빛이 변하자 허술해 보이던 인상이 날렵한 사업가처럼 변한다. 이러니저러니 망나니 도련님이라 뒷말이 수군수군 나와도 엄연히 후계자 수업을 거치고 있는 후계자였고, 원하는 오메가를 집요하게 탐하는 우성알파였다.
과거는 과거일 뿐이다. 모쪼록 현재가 중요하다. 어차피 지민은 자신과 맺어진 짝이니 하나둘 나아지면 된다. 태형은 목전에 둔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눈을 날카롭게 뜨고 명령했다.
"데려와."
박사장은 느닷없이 박노인에게 까였다. 너는 애비란 놈이 퍽이나 잘하고 있다. 지 자식새끼 마음 하나 몰라? 오밤중 자다 일어나 정신없이 말로 두들겨 맞았다. 이유도 모른 채 시달린 다음에서야 간신히 이유를 물으니 닥치고 끊으라 욕이란 욕은 모두 얻어먹었다. 박사장은 어리벙벙하게 까이고 무슨 일 있냐는 졸음 어린 문여사의 목소리에 다시 자라는 답을 하고 서재로 향했다.
뭔 일이래, 이게. 우리 강아지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박사장은 철썩 같이 지민이 박노인의 집에 머무르고 있다 믿었다. 거진 두 달이 넘어가는 시간 동안 보지 못해도 꾹 참았다. 박노인은 아직도 너무나도 정정해, 박사장쯤은 빗자루로 가볍게 두들겨 팼다.
박노인은 지민이 박사장에게 연락하는 것도 싫어했다. 때문에 전화도 하지 못해, 박사장은 자식새끼 보고 싶어 태형과 똑같이 시름시름 앓았다. 금이야 옥이야 키워놔 결혼도 얼마 남겨두지 않았는데, 얼굴조차 못 보니 박지민 열혈팬 박사장은 박노인과 전투를 벌이더라도 내려가 볼까 하는 생각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박노인이 오밤중에 전화해 욕을 퍼붓고는, 덜컥 끊었다.
박사장은 새벽 4시에 수행원들을 불러들였다. 비몽사몽 끌려 나온 수행원들은 몇 년이나 일한 수족답게 금방 이유를 물어다 바쳤다. 박노인의 집에 자신의 사위가 다녀갔단다. 그래서 화가 나셨군. 박노인이 태형을 썩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박사장은 동질감마저 느껴졌다. 그 험한 곳에 제 발로 들어갔다 오다니. 박사장은 태형이 기특한 한편, 어서 지민의 영접후기를 듣고 싶었다. 우리 강아지 밥은 잘 먹고 있나. 아빠가 보고 싶어 울지는 않을까. 박노인은 여태 지민이 잘못하면 사랑의 매라며 회초리로 종아리를 사정없이 내리쳤다. 역시 서울로 다시 올라오라고 하는 게 좋겠다. 물론 이 설득은 본인이 직접 내려가 박노인과 얼굴을 붉히긴 싫었고, 사위에게 떠밀 요량이었다. 박사장은 영악한 능구렁이 사업가였다.
박사장은 다음날 바로 김사장의 집을 방문했다. 태형의 방문을 덜컥 열었고, 박사장은 의외의 인물을 마주했다. 지민이 성인이 되자마자 붙여주었던 비서다. 뛰어난 일처리와 명석한 머리는 박사장도 익히 알고 있는 바였다.
"김비서, 자네가 왜 여기 있는가?"
"아, 아버님!"
태형이 벌떡 일어났다. 태형 앞에 서서 손을 모으고 있던 남준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산 넘어 산이다.
한참 서점에서 책을 사고 카페에서 읽고 있는데, 들이닥친 태형의 비서들에게 끌려 여기까지 왔다. 정중히 도련님이 만나 뵙자 말했다지만 거절하면 두들겨 패서라도 끌고 갈 기세였다. 차에 올라타며 무수히 많은 고민을 했지만, 훌륭한 지민의 사람인 남준은 역시 감히 지민을 배신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김태형 하나라면 말로 어찌해보겠는데, 박사장까지 나서면 무리다. 남준은 최대한 지민을 보호할 방법을 짧은 시간동안 모색했다. 결혼이 싫어 쌩하니 내뺐다는 사실만이라도 숨기는 게 최선이다.
"그, 그게 지민 도련님이 사라지셨…바, 박사장님!"
박사장은 뒷목을 잡고 쓰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