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 오 나의 귀신님 OST - 밀당>
"박지민씨, 밥 좀 먹어요."
"됐어."
정국은 시름시름 앓는 뒷모습에 답답한 숨을 내쉬었다. 뭐가 문제인 건지, 지민은 마트를 다녀와서 한동안 저 상태였다. 밥숟가락도 내려놓고 끙끙 앓았다. 식음을 전폐하고 한 가지 문제에 대해서만 고민했다. 내가 전정국을 좋아하다니. 전정국을 좋아하다니. 당사자를 앞에 놓고 낯 뜨거운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지껄이며 유난을 떨었다. 정국은 얼척이 없었다. 결혼하자며 들러붙을 때는 언제고, 이제는 좋아하는 게 큰일이라며 혼자 시무룩해한다. 마트에서는 기이하게도 심장이 터질 듯 두근거렸는데, 하도 듣다보니 정국은 지민이 혼잣말하는 소리에도 면역이 생겼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야. 내가 어떻게 널 좋아할 수 있지.
"아니, 대체 저를 좋아하는 게 무슨 큰일이라도 되는 거예요? 뭐 죽을병이라도 몰고 온대요? 나보고는 박지민씨 좋아하라면서요."
"그건 당연한 거지."
"뭐가요. 제가 박지민씨 좋아하는 거요?"
"응."
"그러니까."
정국은 느릿하게 지민이 한 말을 정리했다. 기운 빠진 병아리마냥 지민은 무거운 한숨을 되풀이했다.
"지금 제가 박지민씨를 짝사랑했어야 한다는 거예요?"
"그래! 그게 정답이지!"
지민이 벌떡 튀어올랐다.
"네가 나를 짝사랑해야 하는데, 내가 너를 짝사랑하고 있잖아. 이건 말도 안 돼.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내가 전정국을 좋아하다니!"
지민이 머리를 쥐어뜯더니 흐잉, 하는 괴상한 신음과 함께 이불로 몸을 던졌다. 이불을 벅벅 긁으며 베개를 끌어안고 데굴데굴 굴러 옷장에 퍽 부딪힌다. 애벌레처럼 이불 사이에 끼어 몸을 만 지민은 울적하게 중얼거렸다.
"이럴 리가 없어…내가 전정국을 좋아해…."
정국은 들으면 들을수록 기분이 묘했다. 뭐 자신이 좋아하지 못할 대상이라도 되는 듯 하는 어투다. 꼭 내가 이 소시지를 사랑한다고? 내가 이 애벌레를 사랑한다고? 하는 것만 같았다. 위대한 존재가 상종 못할 하찮은 인간이 벌인 실수 탓에 고민하는 듯도 했다. 흐물렁거리던 지민은 돌연 무슨 생각이 든 것처럼 고개를 번쩍 처들었다. 그러더니 이불을 날래게 빠져나와 무릎걸음으로 정국에게 다가와 물었다.
"너 아직도 나 안 좋아해?"
얼굴이 코앞까지 훅 다가온다.
"응? 나 좋지 않아? 잘 생각해봐. 나 좋을 거야."
최면이라도 걸 듯 지민이 정국의 손을 붙잡고 주문을 외웠다. 너는 날 좋아해, 너는 날 좋아해. 정국은 손을 빼내며 무감정하기 이를 데 없는 얼굴로 대꾸했다.
"…박지민씨 그러고 있는 거 보니 그나마 있는 정도 떨어지려고 해요."
"매정한 자식."
"아 됐고, 밥이나 먹어요. 진짜 안 먹을 거예요? 노인정분들도 다 박지민씨 걱정해요. 무슨 일 있는 거 아니냐고 저 퇴근 할 때마다 와서 물으시잖아요. 그만 털고 일어나요. 저 좋아하면 좋아하는 거지 뭘 그렇게 식음을 전폐해요."
정국이 다가온 얼굴을 피하듯 지민의 어깨를 밀었다. 밀리자 섭섭하다는 눈빛을 팍팍 보내던 지민은 이내 진리를 깨달아가는 철학자처럼 고뇌의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넌 사랑을 몰라…."
정국은 어이가 통째로 뽑혀나갔다. 참신한 고백방법을 찾는 것이라면 대성공이었다. 자신을 좋아한다는 상대와 이런 대화를 나누는 상황 자체가 웃겼다. 진짜 좋아하는 거 맞긴 해? 의심마저 든다. 생각하니 억울하기도 했다. 누가보면 내가 무슨 짓 한 줄 알겠네.
정국은 혀를 차며 지민의 입에 밥숟가락을 한술 떠 들이밀었다.
"됐고, 먹어요."
"…으아!"
지민이 후다닥 정국에게서 떨어졌다. 뭐야. 놀란 정국이 바라보는데, 지민은 가슴팍을 부여잡고서는 눈을 처음 밟은 강아지마냥 꼬리를 말았다.
"전정국 니, 니가 그렇게 갑자기 잘해주면 심장이 뛰잖아!"
"……."
"아, 앞으로 나한테 잘해줄 때는 말하고 해줘. 내 심장이 놀라니까.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지? 아니라면 내가 심장마비에 걸릴 수도 있어."
스스로 진정시키듯 심장 부근을 토닥토닥 거린 지민은 팔을 엑스자로 교차해 가슴을 감싸 안고 다시 꾸물꾸물 이불로 기어들어갔다. 정국을 외면한 등이 쓸쓸해한다. 내가 사랑을 하고 있어…. 의미없는 혼잣말까지 쑥덕거린다. 순간적으로 욱한 정국이 시비를 걸 듯 말했다.
"그럼, 어떻게 할까요? 무시해요? 박지민씨 무시할까요?"
동그란 검은 뒤통수가 움찔한다. 차라리 지민이 화를 내며 달려드는 게 낫다. 정국은 공처럼 튀어오를 지민의 반응을 기대했다. 그러나 지민은 일어나긴 커녕 이불 안에서 고개만 살짝 내밀어 정국을 쳐다보았다.
"진짜? 나 무시할 거야?"
"……."
"진짜로? 그럼 나 입원할지도 몰라…슬퍼서…."
정국은 차마 그럴 것이라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
"…안 해요. 저 일 갈게요."
"그래 잘 생각했어. 다녀와…."
지민은 정국이 일어나도 이불에 파묻혀 손만 짧게 흔들었다. 다른 때처럼 정국이 일어서기 무섭게 따라 일어나, 신발장까지 쫑쫑 쫓아오지 않는다. 더불어 뒤에서 끌어안으며 응? 조금만 더 놀다가, 지각하면 안돼? 하는 종류의 말도 없었다. 종종 풍겨오던 달큰한 향도 쏙 숨어버렸다.
"저 진짜 가요?"
"응, 가."
"간다니까요."
"응. 갔다 와."
대답은 성가시다는 듯 건성건성 흘러나왔다. 정국은 이불 애벌레를 힐끔힐끔 돌아보며 신발을 신었다. 문을 닫고 나와도 떠나지 못하고 앞을 서성거렸다.
"하…엄청 신경 쓰이네."
그 웃기는 고백이 박지민과 합쳐지니 엄청 걸린다. 박지민이 혈압 올리는 소리 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고, 이상한 관념으로 막 사는 것도 다 알고 있는데 자꾸 신경이 쓰였다. 정국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간신히 뗐다. 뭣 모르고 섹스하자 덤비는 과거가 차라리 편하다. 정국은 지민이 신경쓰이는 원인을 단순하게 매듭지었다. 집에서 키우던 금붕어가 어느날 밥도 잘 못 먹고 시름시름하게 헤엄치면 이런 기분일 것이다. 그래, 그런 것이다. 매번 히히덕 웃으면서 돌아다니는 지민이 답지 않게 축 쳐저 있으니 신경이 쓰이는 건 당연한 일이다.
무언가 대책이 필요했다.
***
정국은 여러 가지를 고민했다. 박지민을 예전으로 돌려놓으려면 뭐가 제일 좋을까. 공사현장을 가니 표정이 좋지 않다며 동료 일꾼들이 무슨 심각한 고민이 있냐 물어봐온다. 정국은 아무일도 없는 듯 웃으며 괜찮다 답하고 시멘트칠을 했다.
지민은 일꾼들의 머릿속에 꽤나 좋은 이미지로 남아있었다. 지민이 다녀간 뒤 공사현장에선 종종 정국을 향해 지민에 관한 질문을 날렸다. 그 엄청 귀여운 정국군 룸메이트는 요즘 바쁘나? 그때 감기는 안 걸려서 다행인데. 안 그래도 은근슬쩍 건너오는 안부가 박지민이 아프다 답하면 우수수 쏟아지는 걱정으로 변할 것만 같았다. 어디가 아픈지 꼬치꼬치 캐묻고 집에라도 찾아오지 않을까 싶다.
정국은 술집에서도 테이블을 닦으며 한가지 생각만을 되풀이했다. 박지민이 좋아하는 음식이 뭐가 있더라. 그러다 이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한심해졌다. 날 좋아하는게 대체 왜 문제가 된다는 거야. 왜 고백은 박지민이 하고 전전긍긍하는 건 나야?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세요?"
반대쪽 테이블을 닦던 채윤이 말을 붙여왔다. 정국은 또 표정에 티가 난 모양이라 생각하며 말을 에둘렀다.
"괜찮아요. 곧 있으면 해결될 거 같아요."
"잘 풀리셨으면 좋겠어요."
"감사해요."
정국은 적당히 선을 그어 대답하며 마저 테이블을 닦았다. 그릇을 정리하기 위해 채윤이 다가오자 술냄새가 아닌 좋은 냄새가 미약하게 풍긴다. 정국은 냄새를 맡아도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표정으로 나머지 그릇을 정리해 채윤이 가지고 온 쟁반에 얹어주었다.
처음 채윤이 들어왔을 때와 달리 정국은 채윤에게 현재 한 톨의 관심도 없었다. 모든 오메가가 박지민과 비슷한가, 하는 생각을 가지고 궁금해하던 것도 아주 잠깐이다. 오메가에 관해 물어볼 필요도 없이 채윤에게서 나는 향을 몇 번 느끼고 의문을 접었다. 박지민과 다르다. 달달하고 상쾌한 지민의 향과 달리 채윤의 향은 차분했다. 다른 오메가의 향을 맡은 소감은 짧다. 그냥 그랬다. 맡으면 맡을수록 기분이 좋아지는 지민과 달리 잘 만들어진 방향제같은 느낌이었다. 그마저도 지민만큼 강하지 않아, 손님이 없는 시간에만 간혹 느껴질 뿐이다.
"이리주세요. 제가 가져갈게요. 채윤씨는 여기 마무리 해주세요."
정국이 식기가 가득 올려진 쟁반을 들었다. 채윤은 자신이 들겠다 주장하다 얼굴을 살짝 붉히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말을 할까 말까 우물쭈물거리다 저, 저기 하고 정국을 붙잡았다.
"저…요새 며칠 계속 표정이 안 좋으신 걸 봐서…고민이란 게 혼자 하다보면 더 힘들고…괜찮으시다면 제가…."
"아 신경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괜찮아요."
"그, 그런가요? 제가 괜히 주제 넘게 나섰다면 죄송해요…."
"아뇨, 괜찮아요."
정국은 예의 바른 체면상의 미소를 띄우고 마저 그릇을 챙겼다. 채윤은 약간은 실망한 눈으로 앞치마를 꼭 쥐었다가 놓았다. 그대로 무심하게 자리를 떠나려던 정국은 불현 듯 한가지 의문증이 떠올랐다. 혹시, 같은 오메가끼리는 무언가 통하는 게 있지 않을까.
"아 그럼 저기, 하나만 질문해도 될까요?"
채윤은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기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정국이 먼저 자발적으로 말을 걸어온 적은 처음이었다. 그것도 일이 아닌 개인적인 문제로. 정국은 다소 진지한 어조로 물어왔다.
"베타를 좋아하는 건 오메가에게 그렇게 큰 문제인가요?"
"네?"
"다음날 밥도 못 먹고 시름시름 앓을 정도로 안 좋은, 그런 느낌인가요?"
정국은 지민이 던졌던 헛소리들을 다시금 생각했다. 혹시 내가 잠자는 사이 외계인들한테 납치됐던 건 아닐까? 이렇게 내가 갑작스럽게 널 좋아할 리가 없잖아. 너는 아직도 내가 안 예뻐보여? 이상한데. 헉, 나 알았어. 우린 그렇게 된 거야. 서로 몸이 바뀐 거지. 내가 너를 좋아하고, 너는 나를 안 좋아하니까 이건 바뀐 게 분명해. 채윤은 예상밖의 질문에 놀랐으나 가능한 티를 내지 않도록 노력했다.
"어음…조금 놀랄 수 있는 일이긴 하죠. 보통 오메가는 알파한테 마음이 끌리기 마련이니까요."
"그럼 기분이 불쾌하거나 몸에 이상이 생기거나하지는 않는다는 거네요."
"네, 일방적 각인이 아닌 이상 평범한 연애감정과 같아요."
"일방적…각인이요?"
처음 듣는다. 정국이 어리둥절한 어조로 되묻자 채윤은 친절하게 설명을 늘어놓았다. 각인. 알파와 오메가가 주고 받는 사랑이자 구속의 증표. 각인을 하면 상대가 느끼는 감정에 더욱 예민해지고, 상대방을 끝도 없이 갈구하게 된다. 결코 상대를 벗어나지 못하고 돌아서지 못하며, 묶이게 된다. 쌍방각인이라면 최고의 선물이 될 각인은, 일방적 각인이 시작되는 순간 지독히 쓰라린, 차라리 병이라 부르는 게 어울릴 각인통으로 뒤바뀌게 되는 것이다. 간략한 설명을 들은 정국은 미묘하게 미간을 찡그렸다. 채윤은 더욱 심각해진 정국의 표정에 무마하듯 덧붙였다.
"그래도 서로 각인을 할 수 있는건 알파와 오메가니까요. 베타라면 상관없어요. 시간이 지나면 나을 거예요."
"…그렇군요."
정국은 어쩐지 종종 지민이 짜증스레 언급했던 우성알파에 관한 이야기가 기억났다. 질색하며 싫어하는 지민은 각인은 하물며, 이름을 꺼내는 것조차 싫어했다. 그러나 알파는 지민을 좋아하고, 각인이라는 것 안에는 일방적 각인 역시 존재한다고 한다.
"누구 아는 오메가라도 있으신 건가요?"
채윤이 다소 초조한 목소리로 질문했다. 정국은 퍼뜩 깊어지려던 생각에서 깨어났다.
"아 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채윤씨 덕분에 고민이 한결 가벼워졌네요."
정국이 깔끔하게 대화를 끝내고 쟁반을 옮긴다는 핑계로 자리를 떠났다. 채윤은 손 안에 쥔 걸레를 구겼다. 마킹하듯 정국에게 둘러진 우성오메가의 페로몬을 피부로 느끼는 것보다, 정국의 입에서 다른 오메가가 언급되는 것이 더욱 절망스럽게 느껴졌다. 반쯤 정국을 체념하고 있었지만 채윤은 씁쓸함을 감추지 못했다. 우성오메가의 페로몬은 누구도 정국을 넘보지 말라 주장하고 있었다. 평범한 오메가는 감히 우성오메가를 이길 힘이 없다. 애초 처음 정국에게 관심이 간 것도 그 오메가 페로몬 때문이다. 신기하게 베타로부터 풍기는 우성오메가의 페로몬이 궁금했고, 조금씩 관심을 가지고 정국을 지켜보다보니 멋대로 사랑에 빠져버린 것이다.
채윤은 소원했다. 말하지도 못할 사랑을 가능한 빨리 정리할 수 있기를.
정국은 부지런한 몸놀림으로 술집의 뒷정리를 마쳤다. 술집 사장이 포장해준 계란말이를 들고 발걸음을 재게 놀려 집에 도착했다.
"저 왔어요."
"빨리 왔네…."
엎드려있던 지민이 까딱 고개를 들어 정국을 쳐다본 뒤 기운 빠진 연 마냥 툭 꺾었다. 아침보다 기운이 더 없어보인다. 후드티를 입고 달린 모자를 푹 눌러쓴 채 퍼져있다.
종이인형이 친구먹자 하겠네. 더욱 심각해진 상태를 확인한 정국이 앉은뱅이 식탁을 펴고 계란말이 포장지를 풀었다.
"밥 먹었어요? 사장님이 계란말이 주셨는데."
"…계란말이?"
지민이 솔깃한지 정국을 쳐다보았다. 빨리 뛰어온 덕분에 계란말이는 아직 뜨끈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고 있었다. 케찹과 머스타드가 고르게 뿌려진 계란말이는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지민은 침을 꿀꺽 삼키더니 홀린 듯 일어나 식탁으로 다가왔다.
"맛있어요?"
"응! 너도 먹어봐."
크게 고개를 끄덕인 지민이 계란말이를 집어 정국의 입에도 들이밀었다. 계란말이를 받아먹은 정국은 맛있네요, 하고 짧게 반응했다. 지민이 한입씩 나눠먹으며 기분이 나아진 듯 히히 웃자, 정국은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새끼동물을 돌보는 사육사 같이 지민을 흐뭇하게 쳐다보았다. 계란말이가 반절로 줄을 즈음, 때를 재던 정국은 슬쩍 운을 떼었다.
"큼, 박지민씨 각인이라고 알아요?"
"응, 알아."
지민이 계란말이를 입에 넣고 우물거리며 대답했다. 음식을 입에 물려놓고 나니 한술 다루기 쉽다. 정국은 오늘 내내 머릿속에 머물렀던 질문을 꺼냈다. 조금 긴장된 목소리였다.
"…해본 적 있어요?"
"아니, 없어."
시원하게 대답한 지민은 목이 막히는지 물을 찾았다. 지민이 물컵을 찾아 가져오는 사이, 정국은 어쩐지 안심되는 기분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행이다. 없다. 채윤에게 말을 들은 뒤부터 갑갑하게 속을 조여오던 것이 지민의 대답을 듣자마자 쑥 내려갔다.
"각인 당해본 적은요?"
"없는데?"
"예전에 따라다니는 알파 있다면서요. 그 알파가 안 했어요?"
지민이 젓가락질을 멈추고 어이없다는 듯 정국을 쳐다보았다.
"당연하지. 걔가 어떻게 해.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랑 잘 거 같아?"
정국이 순간 사레가 들려 콜록거렸다. 채윤에게 앞부분만 들은 정국은 상상도 못한 단어였다. 거칠게 터지는 기침은 지민이 내민 물을 마시고서야 진정되었다. 커진 두 눈을 본 지민은 아무렇지 않게 젓가락으로 계란말이를 집어먹었다.
"뭐라고요? 잔다고요?"
"각인 하려면 당연한 거 아냐? 각인은 원래 섹스할 때 하는 거야."
"……."
"뭐…그냥도 할 수 있다고 듣긴 했는데 대부분 섹스할 때 한 대."
"…어떻게 하는데요?"
"몰라. 안해봐서. 하면 하게 된다고 했어. 그런데 너가 그걸 왜 궁금해하는 거야? 너 베타잖아."
지민이 순수하게 반대로 질문했다. 베타인 정국은 평생 몰라도 되는 영역이었다. 베타인 사람들의 궁금증은 한정적이었다. 느껴지지 않는 페로몬이 대체 어떤건지, 단순히 알파와 오메가라는 관계만으로도 끌린다는 게 어떤건지, 정신적으로 깊게 맺어지는 각인을 하면 어떻게 되는 건지. 마치 하늘을 나는 새가 바다를 관찰하는 것처럼, 자신이 가지지 못한 특성에 대해 궁금해했다.
"그, 그냥 갑자기 궁금했어요."
"별일이다, 너. 나도 이제 할 일 없어서 안 궁금한데."
지민은 정국이 자신과 관련된 사실에 대해 관심을 주는 게 좋았다. 울적한 기분이 조금은 풀린다. 지민이 헤에, 웃으며 정국을 가만 쳐다보다 눈웃음을 지었다. 그리고는 한결 더 가벼워진 손놀림으로 마지막 계란말이를 집어 정국의 입에 넣어주었다. 맛있으니까 많이 먹어. 자신이 만든 것마냥 서슴없이 권하는 젓가락질에 유쾌함이 담겨있었다.
"왜 박지민씨가 할 일이 없는데요?"
"베타한테는 못하잖아. 너한테 못하니까 할 일 없지. 나는 너 좋아하잖아."
갑작스레 또 튀어나온 고백에 정국은 씹고있던 계란말이를 뿜을 뻔 했다. 컥, 하고 다급하게 계란말이를 삼켰다. 적응 되었다 생각했는데, 귀가 화끈하게 달아오른다. 정국이 물을 벌컥벌컥 마시자 지민은 젓가락을 내려놓고 멀뚱멀뚱 정국을 구경했다.
"왜? 하고 싶어?"
"절대요."
"할까? 할까?"
"아니라니까요."
지민이 눈을 가늘게 뜨고 정국을 보더니, 히죽 웃으면서 꽃받침을 만들 듯 양손으로 볼을 감쌌다.
"흐응, 나중에 베타도 그런 거 할 수 있게 되면 나랑…아…."
지민은 순간 멈칫하더니 눈매를 추욱 늘어뜨렸다. 그러더니 깊은 사연이라도 있는 것처럼 심각하게 한숨을 포옥 내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시에, 세상이 무너지기라도 한 것처럼 허망하게 낮게 중얼거린다.
"내가 김태형 기분을 이해하는 날이 오다니…."
모처럼 괜찮아졌나 했더니 도로묵이다. 정국이 또 다시 이불 속으로 사라지려는 지민을 붙들었다.
"벌써 자게요?"
"왜 벌써야. 너 잘 시간이잖아."
지민이 의아하다는 듯 시계를 가리켰다. 바늘이 1시를 조금 넘어가 있다. 정국은 술집에서 퇴근하고 잘 준비를 하기 무섭게 잤다. 할말이 없어진 정국은 착각했다는 말로 무마하며 식탁을 정리했다. 네가 착각도 하냐며 신기해 한 지민은 먼저 이불을 깔고 누웠고, 씻은 정국이 다가오자 슬금 옆으로 꾸물럭 비키며 자리를 내어주었다. 정국은 누워 지민 쪽으로 몸을 돌렸다. 매일같이 끌어안고 잤고, 이제는 지민이 말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돌렸다. 그런데, 답삭 안기려던 지민이 정국의 품으로 들어가려다 일순 머뭇거렸다. 정국과 눈을 맞추고 가만 바라보더니 한숨을 내쉬고 후드를 푹 뒤집어쓴다. 안겨오지 않고 그 자세 그대로 눈을 감는다. 정국은 내심 당황하며 물었다.
"왜요?"
"뭐가."
왜 안 끌어안아요. 정국은 튀어나오려는 질문을 꼭꼭 씹어삼켰다. 왜 평소에 집이 좁다면서 안고 자야한다고 안 해요? 오늘은 꿈에 악몽이 안 나올 거 같아요? 지민이 주장하던 말도 안 되는 이유들을 제 입으로 꺼내기 민망했다.
"…아니 뭐…까먹었어요. 자요."
"너 오늘 이상해."
"일이 힘들어서 그런 거예요."
"뭐! 누가 너 힘들게했어? 술집?"
지민이 언제 힘이 빠졌냐는 듯 앙칼지게 눈꼬리를 올렸다. 몽땅 잡아 죽여버리겠다는 기세다. 누가 너 힘들게 하면 나한테 데려와. 내가 다 부숴줄게. 자신만만하게 선언한 지민은 정국이 원래 일은 힘든 거라 말하자 몇 번 더 캐묻다 시무룩해했다.
"그럼 빨리 자. 자는 게 남는 거라며. 말 안 걸게."
"박지민씨도 자요."
정국은 천장으로 시선을 옮겼다. 군데군데 누렇게 물든 벽지를 본다. 원래 이렇게 잤지. 10여년동안 혼자 잠들었다. 정국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박지민한테 누차 말했던 말이 맞다. 자는 게 이득이다.
…왜 잠이 안 올까. 정국은 몸을 뒤척거리다 괜히 손을 쥐었다 폈다 했다. 최근 들어 계속 좋은 향을 맡으며 잔 탓일까. 아니면 따끈하게 붙어있던 온기 탓일까. 억지로 잠을 자려 해봐도 무언가 불편하다. 혼자 자는 순간이 제일 편하다 느꼈는데, 지금은 이상하게 편하지 않다. 정국은 슬쩍 지민이 자는 쪽을 쳐다보았다. 신나게 잔다. 푸우푸우 고르게 가슴팍을 오르락내리락하며 평온 그 자체다. 허, 매번 안겨올 때는 언제고. 괜스레 지는 기분이 든 정국은 대놓고 지민쪽으로 방향을 틀고 지켜보았다.
"…으응…."
지민이 코에 걸린 잠소리를 내며 뒹굴 정국과 반대 방향으로 굴러간다. 아예 등까지 돌렸다. 박지민이 매번 쳐다보는 기분이 이랬나. 이상한 공감이 불러일으켜진다. 그런데 어이없네. 내가 왜 이런 걸 신경 쓰고 있지? 박지민이 안 달라붙으면 좋은 거지. 정국은 스스로를 다그친 뒤 지민을 보지 않기 위해 등을 돌렸다.
"……."
신경 쓰인다. 신경 쓰여 죽겠다. 미치겠네. 진짜 미치겠다. 정국은 결국 한참을 더 뒤척거린 뒤 벌떡 일어나 앉았다. 머리를 거칠게 긁으며 오만 인상을 구기다 얌전히 자고 있는 지민을 노려보듯 눈을 가늘게 뜨고 응시했다. 한바퀴 구르면서 후드티가 들려 하얗고 말랑한 배가 드러나있다. 적막한 새벽 단칸방에 울리는 건 똑딱거리는 시계소리 뿐이다.
새근새근 내쉬는 지민의 숨소리가 유독 가까이 들린다. 정국은 슬쩍 몸을 뉘였다. 졸려 비몽사몽하고 있는 지민의 어깨를 약하게 툭툭 치며 작게 말했다.
"박지민씨 잡니까?"
"……."
"자요? 저 목이 좀 결려서 그런데…."
전정국 너 이게 뭐하는 짓이냐. 정국은 스스로 뱉고도 민망함으로 귓불이 달아올랐다. 잠에 취한 지민이 대답할리는 결코 없을 것 같다. 자고 있는 지민의 등을 쳐다보며 갈등하던 정국은 머뭇거리며 등 돌리고 있는 지민 쪽으로 천천히 몸을 붙였다. 기다렸다는 듯 좋은 향이 난다.
이건 그런 거다. 술집에서 아르바이트 생들이 종종 언급하던, 요즘 인터넷에서 유행한다는 수면유도 향초. 이 향초는 다른 향초에 비해 크고, 향이 유독 정국이 딱 원하는 종류고, 따끈한 온기를 가지고 있을 뿐이다. 다른 의미는 없어. 스스로를 세뇌시키며 정국은 뻔뻔하게 나갔다. 정국이 끌어안자 얼마 지나지 않아 안긴 지민이 꿈틀거리더니 정국 쪽으로 몸의 방향을 튼다.
"응…."
지민이 잠소리를 내며 편한 자세를 잡고 다시 곤히 잔다. 처음 정국이 당연하게 머릿속에 그렸던 자세였다. 은근히 허전했던 부분이 채워진다. 정국은 만족스러운 손길로 지민의 머리카락을 한번 쓰다듬고 그제서야 잠에 들었다.
단칸방의 아침을 먼저 시작하는 건 정국이다. 불을 키고 움직이고 있으면 지민은 달게 하품하며 일어나는 게 보통이다. 정국은 이미 씻고 외출용 옷을 입고 있었다. 지민은 눈을 부비며 정국의 곁으로 갔다. 어젯밤 자신이 가득 뿌려놓은 페로몬이 느껴진다. 다른 때라면 뿌듯해했을 그 흔적이 이번은 싫었다. 아 또 어제 전정국한테 굴러갔나보네. 나 얘 너무 좋아하잖아. 아니 무의식 중에도 좋아하면 어쩌라는 거야. 지민은 투덜거리며 힐끔 정국을 살폈다. 안하무인 살던 지민은 피섞인 사람을 제외하고 남의 눈치를 본 적이 처음이었다. 괜찮나? 전정국은 상관 없어하나?
난 김태형이 달라붙으면 더 싫었었는데. 지민은 입술을 삐죽거렸다. 좋아한다며 쫓아다니는 태형에게 바란 것은 멀리 떨어져주는 것 뿐이었다. 아니면 좀 상식적인 말을 건네온다거나. 매번 입만 열면 알파와 오메가의 관계를 단단하게 맺어준다는 이유로 꺼내는 가족 계획 이야기는 학을 뗀지 오래였다. 그런데 한참을 방에 틀어박혀 생각해본 결과, 지금 자신이 태형의 처지와 같다. 만약 이러다 나처럼 도망이라도 가면 큰일인데. 그렇다고 내가 못 잡을 것도 아니긴 하지만. 재력으로 보나 마음으로 보나 결코 정국을 순순히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루에도 수백번씩 생각이 왔다갔다 한다. 지금 정국이 너무 좋은데, 이대로 무작정 사랑하자 연애하자 들이밀면 자신이 태형에게 느낀 감정처럼 마이너스적인 요소로 굳어질 것만 같았다. 지민은 우습잖은 후회도 했다. 차라리 조금 더 늦게 알아챌걸! 나중에 정국이 자신을 좋아하게 됐을 때 알아차리는 게 나은 듯도 했다. 그때는 이딴 소모적인 고민따위 없었겠지. 이런 웃기는 고민은 던져버리고 데이트나 했을 텐데.
너가 너무 좋은데. 너도 나를 좋아했으면 좋겠는데. 마음은 그대로여도 인식하고 말고의 차이는 대단했다. 아쉬울 것 없는 철부지 오메가 도련님에게 사랑은 처음이라, 조금은 두려움이란 게 생겼다.
정국이 신발을 신고 인사했다.
"박지민씨 저 갈게요."
"응…갔다 와…일찍 오구."
"갔다 올게요."
"응."
제법 시간이 지나도 문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왜 안 나가. 시간은 확실히 정국이 아르바이트를 나갈 시간이다. 지민이 집을 둘러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왜? 뭐 놓고 간 거 있어?"
"아뇨, 없어요."
정국이 그제서야 문을 열고 나간다. 지민은 푸우 짙은 고민의 한숨을 뱉었다. 사랑은 어려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