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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럭키 스트라이크 09

by 토페 posted Feb 26,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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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CHEEZE - 망고 (Mango)>










 정국은 버스정류장에서 내린 순간부터 카트에 동전을 넣을 때까지 자동응답기처럼 같은 말만 반복했다. 박지민씨 제가 말했어요. 여기 적혀있는 거 말고 다른 건 안 산다고요. 알아들었죠? 이봐요, 박지민씨. 제 말 듣고 있어요? 지민은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건성으로 답했다. 알았어, 알았어. 시선은 완전히 다른 곳에 팔려 있다. 마트에 처음 온다더니 놀이공원에 놀러 와 정신 못 차리는 꼬마나 다름없었다. 정국은 체념했다. 박지민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고 있었다.



“헐, 정국아 저거 봐! 저거 킹크랩 아냐? 이런 것도 팔아? 화면으로 보는 거랑 딴판이네. 나 이거 살아있는 거 처음 봐. 이거 진짜 맛있어, 정국아.”



 지민은 집게가 끈으로 묶인 가재를 가리키며 방방 뛰었다. 아주 신났다. 다 큰 남자가 옆 일곱 살짜리 아이들과 똑같은 반응을 보이고 있으니, 자연스럽게 시선이 몰렸다. 남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는 정국이라도 그것은 좀 창피했다. 정국은 지민의 손을 잡고 강제로 이끌었다. 끌려간 지민은 아쉬운 눈길을 해산물 코너에 던지더니 금세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어! 나 이거 좋아해!”



 초콜릿이었다. 정국은 지민을 카트에 넣어 놓을까 진심으로 고민했다. 지민이 관심을 보이는 대로, 판매원들은 눈을 번뜩이고 지민과 정국을 낚아챘다. 평소와 달리 헬렐레 풀린 얼굴로 돌아다니는 지민은 누가 봐도 호구로 보였다. 저것은 봉이다. 판매원들은 친절한 웃음을 매달고 지민을 꿰어냈다.



“고객님, 보는 눈이 있으시네요. 이 제품 지금 제일 잘 나가는 상품이거든요. 맛있어서 우리 아이 간식으로도 좋아요. 영양성분도 고르고요. 하루에 하나씩 드시면 건강에도 전혀 문제없답니다. 그리고 지금 이벤트기간이라 하나 사시면 하나를 더 드려요.”

“진짜?”



 지민은 들으면 듣는 대로 낚였다. 건강에도 문제없으면 괜찮을 거 같은데. 반면 화려한 상술을 꿰뚫고 있는 정국은 날카롭게 부정적인 면만 꼬집었다. 안 팔리니까 하나 더 끼워 파는 거고, 하루에 두 개 먹으면 건강에 안 좋다는 거네. 지민이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정국을 돌아봤다. 손에는 초콜릿 한 봉다리가 쥐어있었다.



“이거 어때, 정국아?”

“하나 하세요, 고객님.”



 정국이 최고로 냉정해지는 순간은 돈을 쓰는 순간이었다.



“안되니까 내려놓으세요, 박지민씨. 동네 슈퍼가면 그거보다 맛있는 거 깔렸어요.”



 기껏 영업했더니 안 넘어간다. 친절한 판매원의 미소가 무너질 뻔했다. 정국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지민의 팔을 잡고 질질 끌었다.



“슈퍼에서 네가 안 사주니까 그렇, 정국아 이거 봐. 옷걸이래. 우리 옷걸이 필요하지 않아? 옷 구겨지잖아.”

“필요 없어요. 똑바로 개어 놓으면 되거든요.”

“정국아 저건 어때, 이불. 잘 때마다 허리 아프….”

“박지민씨.”



 정국이 결국 카트를 멈췄다. 솜이불 코너로 직진하던 지민은 정국이 따라오지 않자 멈칫했다.



“왜.”

“이리와 보세요. 자, 이거 들어요.”



 정국이 지민의 손에 적어온 쇼핑리스트를 넘겼다. 지민이 어리둥절한 눈을 했다. 정국은 지민을 묶어두기 위해 극단적인 수를 썼다. 말 안 듣는 애는 일을 시키면 된다.



“옆에서 다른 말 하지 말고, 여기 적혀있는 거 어디 있는지 찾아요. 알았어요?”

“그거 별로 재미없어 보이는데.”

“재미없어도 해요.”



 지민은 뚱한 얼굴로 종이를 받아 들었다. 한창 신나고 있었는데. 전정국은 역시 분위기를 잘 모른다. 덮치라고 할 때도 못 덮치는 고자더니만. 성에 차지 않았지만 지민은 제가 참아 주기로 했다. 나름대로 첫 번째 데이트 아닌가. 비록 마트에 발을 들이는 순간, 눈길을 끄는 물건들 탓에 목적과는 백팔십도 틀어졌지만 이제라도 연인 같은 분위기가 내고 싶어졌다.



“알았어. 이제 뭐 사야 하는데.”

“당근이요.”

“너 진짜 토끼 같단 말이야…저쪽이야."



 지민은 정국의 곁에 서 이것저것 훈수를 놓았다.



“할머니가 그랬는데 오이는 꼭지가 예쁜 걸 골라야 한다고 했어. 할머니가 지난번에 이걸로 오이무침 해줬었는데 엄청 맛있더라. 할머니 요리실력 대박이야. 아, 할머니한테 내가 만드는 방법 배워올까? 너 해줄게!”

“박지민씨 오이 어떻게 씻는지 알아요?”

“내가 그런 것도 모를까봐? 비누로 씻으면 되잖아! 그럼 깨끗이 씻어지지!”



 쫑알거리며 지민이 오이를 골라들고 카트에 담았다. 정국은 마지못해 웃는 표정으로 그래요, 하고 중얼거렸다.


 정국은 그나마 이것이 아까보다 낫다 느꼈다. 지민은 포기한 건지 곧잘 정국을 따라붙어 다녔다. 다만 당근을 골라올 땐 덥석 한 박스가 넘게 집어오고, 파를 살 땐 그 옆 비싼 송이버섯까지 한번에 집어오긴 했다. 들고 오자마자 빳빳해지는 정국의 표정을 감지하고 얌전히 정국에게 메뉴 선택권을 맡겼다. 정국은 한시름 놓고 멀리 보이는 시금치 코너로 이동했다.



“노인정 재미있어요?”

“응, 엄청. 친구들이랑 노는데 당연히 재미있지.”

“친구…역시 사람 사귀는 데엔 나이 없죠.”

“응, 그러더라고. 그래서 내가 너 만나잖아. 내가 연상인데도.”

“허, 우리가 왜 만나는 사이인데요? 우리 안 사귀거든요?”



 지민은 팔짱을 끼어오며 흥, 했다.



“뭐 니가 그렇게 말하면 알았다고 해줄게. 우리 사귀는 거 안하고 결혼부터 할 거니까.”



 정국은 픽 웃으며 카트를 끄는 한 손을 떼 지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왕왕거리는 강아지를 진정시키는 듯한 손길이었다. 지민이 어이없다는 듯 손을 뿌리치자 정국은 킥킥 웃으며 몇 번 더 손을 뻗어왔다.



“아씨, 머리 망가져!”

“뭐 어때. 망가져도 괜찮아요.”

“내가 안 괜찮아.”



 정국이 그럼 정리해주겠다며 지민의 머리를 매만졌다. 지민은 금세 정국의 세심한 손길이 좋아 옆에 딱 붙어다녔다. 다음에 뭐 살 꺼있어? 내가 봐줄게. 선심 쓰듯 리스트를 가져가기까지 했다.



“그래도 대단하네요. 박지민씨가 이런 것도 다 기억하고. 오이도 그렇고, 당근도 그렇고. 다음에는 제가 도와줄 테니까 요리라도 해보는 게 어때요? 맨날 얻어먹고 다니면 좀 그렇잖아요. 해서 노인정에도 돌리고, 그럼 다들 좋아하실 걸요. 예를 들면 어른들 입맛에는 부침개라던가 그런 쪽으로도 괜찮고.”



 주방데이트 신청이냐 물으려던 지민은 말을 잊고 홀리듯 멈춰 섰다. 우연히 지나치는 와인코너 앞이었다. 술을 그리 자주 즐진 않지만, 향을 맡는 것은 좋아했다. 맛있겠다. 지민은 근 한달만에 보는 와인 코너를 향해 저도 모르게 걸어 들어갔다. 미끼에 꿰이는 물고기처럼 지민은 와인코너로 이끌려갔다.



“부침개는…박지민씨가 하기에는 좀 어려울 수도 있겠네요. 난이도를 낮춰서 고구마 삶기라던가, 삶은 달걀이라던가. 딱히 박지민씨가 요리 못한다고 무시하는 건 아닌데, 처음부터 차근차근 배우면 좋잖아요? 절대 집 태워먹을까 집부터 걱정하는 건 아니…박지민씨?”



 이상하게 조용했다. 이쯤이면 너는 나를 너무 무시한다고 태클을 걸어야 했다. 정국은 등줄기가 서늘했다. 한기가 머리를 훑고 지나간다.



“박지민씨?”



 뒤를 돌았을 때 지민은 곁에 없었다.





 정국은 기가 막혔다. 일곱 살 먹은 애도 아니고, 스물다섯 먹은 지민을 잃어버렸다. 방송도 쪽팔려서 띄울 수 없다. 박지민씨를 찾습니다. 머리는 검은색, 키는 백칠십 초반 남자. 오메가이며, 현재 검은 티를 입고 있습니다. 나이는 스물다섯입니다. 정국은 급한 마음이 들지 않았다. 어차피 마트 안에 있을 것이다. 길 한복판에서 잃어버린 것도 아니고, 설마 성인씩이나 되는데 이딴 곳에서 생이별을 할까 싶었다.



“박지민씨! 박지민씨!”



 엄마, 저 형아 누구 잃어버렸나 봐! 어린아이가 지나가며 정국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정국은 철면피를 깔고 연신 지민의 이름을 외쳤다. 관계자 직원들이 달려와 혹시 조카라도 잃어버리셨냐 물었지만, 절대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말라 일렀다. 만약 관계인들을 줄줄 데리고 지민을 찾았을 때, 그 상황이 얼마나 쪽팔리겠는가. 무작정 찾아다니던 정국은 지민이 갈만한 곳을 추렸다. 단순한 지민이 갈 곳이라면 뻔했다. 지민은 마트에 들어온 순간부터 당장 불편한 것들에 눈을 빼앗겼다.



“박지민이 불만 있는 거라면….”



 아무래도 옷이려나? 정국은 옷 코너로 카트를 움직였다. 그러다 문득 멈칫했다. 잠깐만, 나 얘 왜 찾고 있지? 이대로 가면 가장 깔끔한 이별방법이었다. 양심의 가책을 느낄 필요도 없다. 단순한 사고였고, 심지어 한눈을 판 지민의 잘못이다. 자신은 지민에게 떨어지라거나, 일부러 떨어지길 바란 적도 없다. 깔끔하고 쿨한 이별이었다. 심지어 지민이 집에 남긴 건 옷 두 개뿐이다. 그 정도라면 여태까지 돌봐준 방값과 식대라 치고 보내면 간단했다.


 지민과 붙어있으면 전처럼 짜증만 나는 게 아니었지만, 현실적으로 지민은 마이너스적인 존재였다. 안 그래도 좁은 집에 들러붙는 식충이였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다. 현실적인 앞날을 살펴봤을 때 떨쳐내는 게 당연했다. 전정국은 혼자 버텨 살아남기도 힘든 인생이었다. 카트를 쥔 정국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여태까지 정국을 살아오게 만든 냉정한 현실감각이 속삭인다. 전정국, 이대로 놔둬. 찾지마.



“…….”



 나 예뻐해줘. 나 버리지 마. 나는 네가 예뻐해주는 게 가장 좋단 말이야. 왜 하필 이 순간 눈물 짜던 박지민 얼굴이 보이는 건지. 싫다고 말하면서 힘주어 옷자락을 잡던 손이 생각나는 건지. 하나가 떠오르니 동시다발적으로 떠올랐다. 품에 안겨 달달 떨던 감촉도, 할머니한테 네 것도 받아왔다며 떡을 내밀던 모습도, 밤마다 끌어안고 종알종알 나 언제쯤 좋아해줄 거냐 속삭이던 목소리도. 아침에 일어나면 품에서 고롱고롱 잠들어 있는 검은색 머리도. 드문드문 풍기던 박지민을 닮은 사랑스러운 향도.


 그와 반대로 이성은 더 찐덕하게 달라붙어 속삭였다. 언제까지 끌어안고 있으려고? 얼마나 네가 더 버틸 거 같아? 미래도 희망도 없는 네 인생에 박지민을 끌어들이고 싶어? 걘 이 불행을 버티지 못해.



“…몰라, 시발.”



 전정국은 현실을 살고, 박지민은 꿈에 산다. 지민은 정국이 상상도 할 수 없는 행동을 저지른다. 사랑만 먹고 자라서, 사랑을 받는 것에 익숙하다. 불행과 외로움만 먹고자란 정국에게 너무나도 먼 존재였다. 때문에 이해할 수 없었고, 한 편으로는 엉겨붙어오는 애정에 물들여지고 싶었다. 그런 솜사탕처럼 순수한 애정이 있다면 조금은 행복해지지 않을까. 조금은 사막같이 퍽퍽한 인생이 달콤해지진 않을까.

 

 꿈 좀 꿔볼 수 있지. 현실에 찾아온 꿈인데, 불행한 인생에서 꿈 정도는 괜찮잖아. 박지민이 떠나더라도 상관 없다. 잠깐 정도는 꿈을 꿔볼 수 있는 것이다.



“박지민!”



 정국은 더 목청을 높여 지민의 이름을 불렀다.








 정국을 잃어버린 지민은 스스로에게 경악했다. 내, 내가 이렇게 멍청한 짓을 하다니. 천하의 박지민 체면이 말이 아니다. 고작, 고작 와인 따위에. 지민은 땅이라도 치며 자책하고 싶었다. 하 역시 이 잘난 유전자는 멍청한 짓도 수준급으로 하는 구나. 이런 건 별로 필요 없는데. 난 왜 다 모든 걸 수준 높게 하는 거지. 생각하며 지민은 와인 코너 구석에 주저앉았다. 코찔찔이 어린아이나 할 법한, 한 눈을 팔다 같이 온 사람을 잃어버렸단 어마어마한 충격 앞에 사람들이 보는 곳에서 쭈그려 앉아있다는 사실쯤은 가볍게 넘겼다.



“납치당하기만 해봤지….”



 박사장과 문여사와 나들이를 갈 때도 길은 잃어버리지 않았다. 가만 주저앉아 있던 지민은 불현듯 아, 했다.



“왜 내가 잃어버린 거야? 아니지. 내가 아니라 전정국이 날 잃어버린 거지.”



 뻔뻔함도 국가대표급이었다. 지민은 자리에서 털고 일어나 도도한 미소로 표정을 장식했다. 전정국이 길을 잃어버린거지! 그래, 내가 가는 길에 전정국이 잘 따라왔어야지. 이건 내 잘못이 아니라 전정국 잘못이야. 오면 단단히 일러둬야지. 길 좀 잘 따라오라고. 우월한 유전자가 이런 하찮은 실수 따위 할 리 없다며 지민은 금방 활기를 되찾았다.



“전정국은 언제 오는 거야.”



 쭈그려 앉아있다 보니 서서히 다리가 아팠다. 지민은 무릎을 콩콩 두들기며 지루해 하품했다. 근데 고작 이 마트에서 나 찾는데 그렇게 오래 걸리나. 그때, 앉아있는 지민의 앞으로 어떤 아이가 엉엉 울며 지나갔다.



“너 어디 있었어! 엄마가 걱정했잖아!”

“나 장난가암….”

“떼쓰긴! 안 된다고 했지! 다음에 또 그러면 그냥 버리고 갈 줄 알아!”



 아이가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엄마를 따라 나섰다. 그리고 그 순간, 잊고 있던 사실이 지민의 뒤통수를 강하게 후려쳤다. 혼난 것은 아이인데, 정작 지민이 쩍 굳어버렸다. 버리고 갈 줄 알아, 그 문장이 지민을 일깨웠다.


 잊고 있었다. 까먹고 있었다. 전정국은, 자신을 떨쳐내고 싶어 한다는 것을. 일부러 정국이 자신을 찾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물밀 듯 쓸려 들어왔다. 정국은 늘 자신을 버리려고 노력했다. 버스정류장에 떼어놓기도 했고, 무시도 했다. 그때 들었던 감정과 지금 드는 감정이 달랐다. 짜증과 함께 무시당한 자존심이 아팠지 이리 감정이 들쑤시진 않았다. 무언가 더 깊은 감정이었다. 그때보다 묵직하고 썼다. 가슴속이 한 겨울 눈밭에 쫓겨난 것마냥 아리고 시렸다.


 지민은 처음과 같이 정국이 떠난다 생각하니 억울하고 슬퍼졌다. 처음은 그렇다 쳐. 날 모르니까. 그런데 지금은 아니잖아. 날 버린 거야? 여태까지 손잡고, 이름 불러주고, 안아준 건 아무 의미 없던 거야? 나는 아무것도 아닌 거야? 스스로가 전정국에게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도 않는다는 사실에 가슴팍이 꽉 막힌 것처럼 답답해져왔다.



“…뭐…별로 새삼스러운…그런 것도 아닌데….”



 왜이렇게 섭섭한 거지. 지민은 혼란스러웠다. 또 달라붙으면 되는 것이다. 전정국을 찾아서, 가서 결혼해달라고 조르면 된다. 원래부터 자신은 전정국과의 결혼이 필요할 뿐이었다. 원하지 않는 결혼을 막기 위해서. 그 청혼은 일반적인 결혼의 의미가 아닌 사업상 맺는 계약과 비슷한 맥락이었다. 내가 원하는 게 있고, 너도 나한테 원하는 것이 있으니 우리 서로 돕자.



“박지민!”



 지민이 벌떡 일어났다. 정국의 목소리다. 정국은 인상을 벅벅 쓴 얼굴로 지민을 부르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카트는 어디다 버린 것인지 혼자 뛰어다닌다. 정국을 발견한 순간, 지민은 가슴팍 안쪽에서 시큰한 것이 팍 터졌다. 그것은 가까이 있으면서도, 정작 답안지를 들춰보지도 않고 외면하던 지민을 자각시켰다. 한 가지 사실이 지민의 머릿속을 벼락처럼 관통했다. 지민은 아, 하고 작게 탄성을 내쉬었다. 허술하게 종이 한 장으로 감추어져있던 감정이 기지개를 키고 일어났다. 바깥으로 드러난 감정은 이름을 붙일 때즈음 이미 너무나도 커져있었다.



“박지민? 박지민! 멍청하게 왜 거기 혼자…! 하 진짜 당신은 하루라도 사고를 안치면…내가 한눈팔지 말라고 했잖아요!”



 지민을 발견하자마자 달려온 정국이 낚아채듯 지민을 끌어안았다. 으븝, 다급하고 거센 포옹에 지민이 비틀거리며 정국의 품에 쏙 안겼다. 마주 안고 있자 쿵쿵 뛰는 정국의 심장소리가 느껴진다. 지민은 처음 정국을 다시 만나면 네가 길을 잃은 거라 주장하려던 생각을 까먹었다. 잠깐 사이 밀려들어온 자각의 파도는 모든 것을 다 잊게 만들었다. 지민이 정국의 등에 팔을 두르고 자그맣게 이름을 불렀다.



“전정국.”

“왜요. 사람 걱정이란 걱정은 다 시키고. 민증 위조한 거 아니에요? 기가 막혀서…뭐예요. 박지민씨 표정 왜 그래요. 그 잠시 동안 무슨 일 있었어요?”



 전혀 생각지도 못한 와인코너에 있느라 찾느라 시간이 더 걸렸다. 정국은 넋이 빠진 지민을 보고 구석구석 상태를 살피기 시작했다. 없는 사이 사고라도 치고 이상한 말이라도 들었나. 발에 땀나도록 뛰어다니고 초조해하고 불안해한 건 자신이 크면 더 컸을 것이라 자부할 수 있다. 왜 이러냐며 정국이 걱정 어린 낯빛을 해오자, 지민은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정국아.”

“…박지민씨?”

“내가 너 좋아하나 봐.”



 정국은 필요한 게 아니다. 단순히 결혼을 피하기 위해 마련된 도피처가 아니었다. 무수히 많은 상대 속에서 조건이 맞아 얼결에 필요한 게 아니라, 전정국이어야만 했다. 그 조건을 채운 다른 누군가가 나타나도 바꾸지 못한다. 전정국 자체가 필수조건으로 변해버렸다.



“내가 너 좋아해….”



 힘이 쫙 빠진 목소리가 다시 한번 중얼거렸다. 순간, 심장에 꽝 돌이 주저앉았다. 멈칫한 정국은 눈을 맞춰오는 밤색눈동자에 덩달아 얼이 빠져버렸다. 뜀박질에 터질 듯 뛰던 심장이 다른 의미로 더 뛴다. 지민을 찾느라 땀이 송글송글 맺힌 뒷목이 붉게 달아오른다.



“바, 박지민씨 많이 놀란 거 같은데, 괜찮아요?”

“응…너무 놀라서….”



 지민은 순순히 끄덕거렸다.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아 너무 놀랐다. 정국은 반대로 지민이 길을 잃어버린 사건 자체에 놀랐다는 의미로 납득했다. 자신이 황당했던 만큼 지민도 놀랐을 것이다. 때문에 지금 본인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못하는 것이다. 정국은 머리를 흔들어 깃털로 살랑이는 것만 같은 마음을 진정시키며 지민의 손을 잡았다.



“집에 가요.”

“…물건은?”

“필요한 건 다 샀어요.”



 정국은 계산을 마치고 박스에 물건을 가득 담았다. 버스를 타고 다시 집으로 가는 길 지민은 본의 아니게 침묵을 유지했고, 정국은 말 없는 지민을 쳐다보고 덩달아 침묵했다. 그러다보니 머릿속에는 말 하나가 계속 재방송되고 있었다. 내가 너 좋아하나 봐. 내가 너 좋아해. 지민이 활기차게 말을 걸어왔어도 정국은 아마 자신이 대답하지 못했을 것이라 생각했다. 침묵이 이어지는 가운데에도 짧고 똥똥한 손을 정국은 꽉 쥐고 있었다. 다시는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라 다짐하듯 아주 꽉.









***









 남준은 울리는 전화를 질린다는 듯 바라봤다. 독한놈. 질리지도 않나. 벌써 일주일이었다. 일주일동안 태형은 남준의 배터리를 다 태워버릴 요량으로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합치면 천 통은 넘을 것 같았다. 남준은 이번에도 혀를 차며 무시했다. 하긴. 이렇게 질기지 않았다면 처음부터 지민을 그렇게 끈덕지게 쫓아다녔을 리가 없다.



“크으…이게 얼마 만에 맛보는 천국이야!”



 남준은 소원하던 대로 반신욕을 즐기며 맥주캔을 땄다. 물론 집이 아닌 호텔이었다. 월급을 다 털어버릴 요량으로 비싸게 잡은 5성급 호텔. 지민을 내려주고, 우울하게 집에서 사직서를 작성하던 남준은 생각하니 억울했다. 그간 고생이란 고생은 다하고 이딴 결말이라니. 두 알파 오메가 사이에서 팔자에도 없는 개고생이 어언 몇 년이란 말인가.


 태형은 지민과 연락이 안 되면 안 될수록 자신을 들들 볶았다. 우리 지민이 어디 아픈 거 아니지? 연락이 안 되는데, 지금 어디 있어? 내가 그쪽으로 갈게. 매달려오는 태형의 말은 거부하기 힘들었다. 대부분 지민의 선에서 잘리는 어중간한 알파들과도 달랐고, 유독 끈질기게 지민을 따라다니는 다른 거머리들처럼 자금줄을 틀어막거나 현실적으로 위협을 가하기 애매했다. 거기다 거절을 하면서도 적절한 예의는 지켜야 했다. 김사장이 박사장과 친한 만큼 태형은 함부로 다루어선 안 되는 관계였다.


 전화에서 태형이 우리 지민이 보고 싶다며 떼를 쓰고 있으면, 전화를 받는 남준 앞에 눈썹을 찌푸린 지민이 버티고 있었다. 목소리는 죽인 채 입모양으로 끊으라 성화였다. 나 죽었다고 해. 꺼져버리라 해. 차사고 나서 병원에 링겔 맞고 있어서 너 같은 거 절대 못 본다고 해. 하나같이 지민이 말하라 시키는 것들은 절대 거짓으로라도 해서는 안 되는 것들이었다. 만약 지민의 말대로 병원에 입원했다 전하면 해외에 있는 태형은 전용기라도 띄워 올 것이 분명했다.


 남준은 그럴싸한 변명을 둘러댔다. 아 저 도련님이 주무시고 계셔서요…네, 지금은 좀 곤란합니다…. 지민은 그 변명이 약하다며, 김비서는 간이 콩알만하다고 흉을 봤다. 전화에선 태형이 그럼 사진이라도 찍어 보내주면 안 돼? 나 진짜 지민이 보고 싶은데, 하고 자신의 짝사랑이 얼마다 애달픈지 줄줄 늘어놨다. 자신의 직업은 대기업 도련님의 비서지, 연애상담원이 아닌건만 태형은 자신을 붙잡고 지민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왜 자신이 헤어 나올 수 없는지 한 시간은 너끈히 수다를 떨었다. 오죽하면 전화를 끊고 난 남준이 박지민 찬양설을 눈 감고도 줄줄 읊을 수 있었다. 그런 역경과 고난을 거쳐왔다. 그런데, 이딴 거지같은 결말이라니. 개나 주라지. 이미 달려갈 대로 달려간 막장 드라마를 구제할 방법은 찾을 수 없다.


 남준은 지민이 시킨 대로 열심히 놀았다. 엄연히 서울을 빼고 아무데나 가서 휴가를 즐기라 한 건 지민의 명령이었다.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말라는 말을 따라 태형의 전화도 찰지게 씹었다.



“저 정도 정성이면 한번쯤 돌아보기라도 할 만 한데.”



 진동이 끊기는 전화를 보며 남준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집착하는 남자는 매력이 없는 법이지. 남준은 남은 휴가를 열심히 즐기기로 마음먹었다. 집착 알파의 연애상담소는 휴무였다.








 집착 알파, 태형의 낯빛은 심각했다. 태형은 참다 참다 지민이 보고 싶어 침대에 드러눕는 지경에 이르렀다. 결혼식이 몇 달 남았는데 신부 얼굴 못 보는 신랑이 어디 있어. 행복한 신혼 생활을 꿈 꾸기도 잠깐이다. 몇 달만 버티자 스스로를 다잡으려고 해도, 워낙 제멋대로 살아온지라 그 결심은 일주일을 가지 못했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시름시름 누워있던 태형은 벌떡 일어나 결국 지민을 찾아가기로 결심했다. 내 신부 내가 본다는데. 맹렬히 불타오르는 태형을 막을 것은 세상에 없었다. 박노인이 마음에 조금 걸리긴 했지만, 어차피 결혼 소식이 전파된 마당에 지난 번처럼 빗자루로 두들겨 팰 순 없을 것이다. 태형은 내려갈 때만 해도 불안했지만, 지민의 얼굴을 볼 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었다. 다소 구박은 좀 당하겠지만 끝까지 모질지 못한 지민은 자신을 안으로 들일 것이다. 지민은 매번 끝이 무뎠다. 우성오메가와 한울그룹이란 장신구만을 보고 달려드는 사람을 쳐내다보니 먼저 경계의 날부터 세웠지만, 천성은 독하지 못했다. 자신이 정한 테두리 안에 들어온 사람에게는 한없이 약하다. 그러니 박사장을 위해 자신과의 약혼도 끝마치지 못하는 것이다.


 태형은 박노인의 기왓집 대문을 두드리기 전 큼큼 헛기침을 했다. 탈색한 머리를 얌전히 빗어넘기고 수트까지 찾아입었다. 꽃바구니까지 한다발 샀다.



“어르신, 저 태형입니다! 지민아! 나 왔어!”



 태형은 쩌렁쩌렁 외치며 문을 두들겼다. 고급 문양이 새겨진 나무문이 끼이익 열린다. 태형은 침을 꼴깍 삼켰다. 그러나 기대한 지민의 부루퉁한 표정 대신 박노인이 험악하게 인상을 구기고 있었다. 태형은 박노인에 대한 안부보다 문 안쪽을 들여다보기 위해 까치발을 들었다.



“지민이는요? 어디 나갔어요?”



 박노인은 인사 대신 목적부터 찾는 태형을 보자마자 혀를 쯧쯧 찼다. 태형은 눈을 깜빡거리다 급히 허리를 접어 공손히 인사했다.



“잘 지내셨습니까. 할아버지.”

“머리 모양새 하고는.”



 꼬장꼬장한 박노인은 태형이 문 안쪽을 보지 못하도록 문을 닫았다. 태형이 아쉬운 눈길을 보내며 박노인을 향해 머쓱하게 웃었다. 예쁜 신부를 얻기 위한 하나의 관문 쯤으로 여겼다.



“하하 그런데 할아버지, 지민이는요? 어디 나갔어요?”

“내가 네놈한테 알려줄 거 같더냐. 내 아들놈 눈이 형편없지 내 눈이 형편없는 건 아니다.”



 박노인은 썩 꺼지라며 태형을 향해 면박을 주었다. 태형은 그럼에도 박노인을 붙잡고 매달렸다. 에잉, 우리 지민이 여기 있잖아요. 제 신부 제가 좀 본다는데 왜 안 됩니까. 한참을 실랑이를 벌인 끝에 박노인은 결국 집 안에서 빗자루를 들고 성난 소처럼 돌진해 휘둘렀다.



“우리 강아지 건들지 말고 돌아가!”



 태형은 빗자루질만 흠씬 두들겨 맞고 대기하고 있는 차로 도망쳤다. 방패로 쓴 꽃바구니는 엉망으로 망가져 꽃이 후두둑 떨어졌다. 태형은 맞은 허리며 엉덩이를 주무르다 잠깐 들여다보았던 기왓집 안쪽을 곰곰이 떠올려보았다.


“좀 이상한데….”



 지나치게 조용했다. 동물적인 감각이 이곳에 지민이 없다 외친다. 더군다나 지민이 박노인 뒤에 숨어있다면 오메가 페로몬이 조금은 풍겨야 정상인데, 아무 냄새도 나지 않는다.


 태형은 다시 남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역시나 받지 않는 남준의 폰에 입안 살을 잘근 씹었다. 박지민의 위치추적은 여전히 박노인의 집. 진심으로 전국투어라도 할 셈인지 남준은 이번에는 제주도에 있었다. 불안해진 태형은 손톱을 물어뜯었다. 박지민, 박지민. 도망간 거야? 결혼을 하기로 마음 먹은 게 아니라 아예 도망친 거야? 지민의 뜻을 알 수 없어 더욱 헷갈리고 혼란스럽다. 남준을 두고 지민이 행동할 수 있을리 없다 굳게 믿는데, 자꾸만 감은 아니라 했다. 원하는 오메가를 찾는 알파에게서 위험한 페로몬이 나왔다.

 

 태형은 운전석에 앉아있는 제 비서에게 폰을 던지며 명령했다.



“이 번호 추적해서 내 앞에 데려와.”



남준의 번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