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가 으스러지는 것 같다. 지민이 일어난 시간은 해가 중천에 떠있을 때였다.
"…으…빌어처먹을…."
지민은 머리를 부여잡고 괴로워했다. 속도 쓰려. 머리도 울려. 전정국은 나갔나. 집이 조용한 걸 보니 나간 모양이다. 아니, 얘는 나랑 있으면 말 안 하니까 항상 조용했지. 내가 어디서부터 기억이 끊겨있는 거지. 울렁이는 속을 뒤로하고 고민하니 막걸리를 네 사발째 들이킨 순간부터 기억이 흐릿하다. 집은 어떻게 들어온 건지도 기억도 나지 않는다. 자신이 길을 못 찾는다는 것은 지민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혹시…. 설마, 하던 지민은 이내 코웃음을 쳤다.
"치, 그럴 리가 없지. 전정국은 내가 나가면 박수를 칠 텐데 뭐. 역시 잘난 유전자는 술 취해도 변하질 않아. 다음부터는 마음 놓고 마셔도 되겠네. 김비서 없어도 되겠어."
아으 골이야. 덧붙이며 몸을 일으킨 지민은 식탁에서 계란찜을 찾고 환호했다. 뜨끈하진 않았지만 울리는 머리를 진정시키기에는 충분했다. 그 술집사장은 예쁜 짓만 한다니까. 히죽 웃고 순식간에 계란찜을 해치운 지민은 뒹굴거리다 어슬렁어슬렁 짐가방을 찾았다. 옷에 술냄새가 짖게 베어있었다. 그리고는 집안을 한 바퀴 돌고서야 불과 어제 자신의 손으로 사랑스러운 옷들을 팔라 던진 것이 떠올랐다.
"몇 벌만 빼고 던질걸."
후회하며 지민은 남은 옷을 셌다. 가방을 던질 때 빨래통에 들어가있던 후드티 하나와 지금 입은 맨투맨티 하나. 총 두 개만 생존했다. 지민은 머리를 긁적이며 고민했다. 빨래도 안 된 옷을 입을 순 없고, 술냄새 나는 옷도 싫다. 방을 서성이던 지민의 눈에 문득 정국의 옷장이 들어왔다.
"…뭐…좀 입는다? 내가 입어주는 걸 영광으로 생각해야지, 암."
지민은 정국의 옷장에서 검은 티 하나를 꺼내들었다. 거진 다 검은색이라 고를 필요도 없었다. 지난번에 뭐랬더라. 빨래하기가 편하다나 뭐라 했던 거 같은데. 같이 살면 옷부터 쫙 골라줘야겠어. 혀를 차며 지민은 정국의 옷을 입고 한 바퀴 빙글 돌았다. 컸다. 과장을 보태자면 어린애가 아빠옷 입은 꼴이었다. 어깨선은 안 맞아서 흘러내리고, 허리는 한참 남아돌았다. 평소라면 보자마자 눈 돌렸을 옷인데, 지민은 옷이 꽤 마음에 들었다.
"전정국이 알파면 어떤 향일까."
이런 느낌인가? 비누향도 나는 것 같고, 깨끗한 세탁물을 걷은 향 같기도 했다. 전정국이 알파면 나랑 바로 결혼했을까. 아니야, 걘 알파여도 까탈스러웠을 거야. 싸가지 없는 것도 똑같았을 거야. 생각하며 지민은 눈꼬리를 접어 푸흐 웃었다. 은은히 베어있는 정국의 향에 꼭 정국에게 안겨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이런 것도 좋은데, 진짜 안기면 더 좋겠지. 잘생긴 정국의 얼굴을 떠올리며 지민은 곧 다짐하듯 주먹을 높이 치켜들었다.
"반드시 나를 좋아하게 만들어주마!"
의지를 불태우며 지민은 나무평상 모임을 나갈 준비를 했다. 달동네 노인정 꽃의 외출시간이었다.
평소처럼 나무평상을 찾은 지민은 조금 다른 상황을 감지했다. 이쯤 가까이가면 맛있는 냄새가 풍겨야 하는데,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는다. 고개를 갸웃하며 다가간 지민은 나무평상을 차지한 다른 사람을 발견했다. 노인들이 아닌 사십 대쯤 되어 보이는 배 나온 남자였다. 이게 뭐야. 지민은 남자를 건드렸다.
"야."
"뭐야."
"할머니 할아버지들 못 봤어?"
남자는 낮잠을 자다 일어났는지 짜증난 얼굴이었다.
"그 시끄러운 영감탱이들 다 집으로 꺼지라 했지. 맨날 죽치고 앉아서 시끄럽게 싸질러대기나 하고. 죽을 날 받아놨으면 가만 조용히 집에서 발 닦고 잠이나 잘 것이지, 원."
"뭐?"
"왜, 불만이라도 있냐 아그야?"
지민의 눈꼬리가 뾰족하게 올라갔다. 지민은 자신의 사람이라 정한 대상이 무시당하는 것을 죽도록 싫어했다. 자신을 무시하는 것보다 더 혐오했다. 건들 용기는 없고 약자를 건드는 찌질한 짓. 예전 남준의 경우가 대표적인 예였다. 우성오메가에 한울그룹 아들인 지민을 직접 어찌할 수는 없고, 그 오만한 태도가 마음에 안든 상류층 자제들이 남준을 건드렸을 때, 지민은 파티에 찾아가 미친 듯 개지랄을 떨었다. 인정사정 없이 발길질부터 날렸으며, 술병을 깨 얼굴에 들이밀고 남준에게 손찌검 한 것을 사과하라 난리를 피웠다. 오히려 당한 남준이 말릴 정도였다. 씩씩거리며 파티장에서 나가 그대로 박사장에게 전화해 그 집안의 돈줄도 틀어막아버렸다.
지민이 팔짱을 끼고 기 막히다는 듯 하, 했다.
"야 너 다시 말해봐."
"쫓아냈다고. 내가. 근데 시방 니 반말 지껄이고 있냐?"
"죽을 날 어쩌고 다시 말해보라고."
일촉즉발이다. 뒤로 물러났던 노인들은 벽 뒤에서 초조해 하고 있었다. 남자는 동네에서 진상을 부리는 백수였다. 과거 조직폭력배에 들어갔다가, 징역을 살고 쫓겨난 것으로 유명했다. 종종 동네를 나와 자기 것마냥 구는 남자는 평상을 빼앗곤 했다. 힘이 없는 노인들은 남자의 으름장에 물러날 뿐이었고, 이번에도 그러려니 하고 있었다. 그런데 조금 뒤에 튀어나온 지민이 남자와 상대하고 있다. 큰일이라도 날 것 같았다. 그러나 아무도 남자를 막을 수 있는 힘은 없었다. 이를 어째, 이를 어째. 다들 앓는 소리만 내며 발만 동동 굴렀다.
"허참, 죽을 날 받아놨다는 거? 아 왜 더 직접적으로 말해줘? 곧 무덤 팔 새끼들이 쫑알쫑알 모여서 시끄럽게 떠드는 게 좆같다 했다."
"어, 그래 그거. 이 개만도 못한 새끼야. 네 살 날이 더 짧은 거 알려주려고 했다."
지민이 그대로 남자의 배를 발로 걷어찼다. 억, 남자가 신음을 내지르고 평상에서 떨어졌다. 남자는 곧 벌떡 일어났다. 평상에 누워있을 때와 달리 거진 키가 지민과 팔 하나만큼이나 차이 나는 거구였다. 그러나 지민은 쪼는 기색 하나 없이 도도하게 팔짱을 꼈다.
"이 씨발새끼가…!"
"어디 쳐봐, 씨발. 치고 넌 그대로 내 손에 뒤질 줄 알아라."
"하 이 좆만한 새끼가. 너 뭐 믿고 그렇게 당당하냐? 오냐, 쳐죽여주마."
남자가 손을 들은 순간이었다. 벽 뒤에서 발만 구르던 노인들이 우루루 튀어나왔다. 손주 같은 지민을 지켜야 한다는 결심이었다.
"아이고, 아이고. 김총각, 미안허이 미안해. 아가 생각이 짧아서 그랬어. 말로 하지, 응?"
"댁들은 비켜, 저 새끼 절대 그냥 못 넘어간다."
"아가 얼마나 착한디, 이번만 실수한 거네. 김총각! 이번 한번만 봐주게!"
"아 비키쇼!"
"어이쿠!"
노인이 남자의 팔질 하나에 떨어져나갔다. 할아버지! 눈을 크게 뜬 지민이 튀어나가 쓰러진 노인을 부축했다.
"할아버지, 괜찮아? 다쳤어? 다친 거야?"
"지민아, 도망가라. 도망가."
지민은 주먹을 쥐고 부들부들 떨었다. 그리고는 물러나긴커녕 바리케이트처럼 지민의 앞을 둘러싼 노인들을 헤집고 남자의 앞으로 나섰다.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차라리 개처럼 맞고, 김태형이라도 부를 작정이었다.
"비겁한 새끼. 노약자는 보호해야 한다는 것도 모르냐!"
"그 뚫린 주둥아리부터 털어주지."
남자가 다시 주먹을 들어올렸다. 지민은 눈 하나 꿈쩍 안하고 남자를 노려봤다. 그리고 주먹이 내려오는 그 순간, 앞으로 커다란 등이 끼어들었다. 퍽 거친 타격음이 울려퍼지고 눈 앞의 끼어든 남자가 나뒹굴었다. 모든 게 순식간이었다. 지민은 쓰러진 남자를 보고 비명을 지르듯 이름을 불렀다.
"전정국?!"
"으…."
"너, 너 왜 여기…아니 괜찮아?!"
"괜찮아요."
전혀 괜찮지 않아 보였다. 정국의 입술 한쪽이 터져 피가 맺혔다. 저, 저 씨발놈이 지금. 지금 내 정국이를. 저 개새끼가, 지금 우리 정국이 얼굴에 상처를. 지민은 난생 처음 혈압이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올라오는 게 뭔지 경험했다. 결혼이고 뭐고 치고 박고 싸운 다음 당장 박사장에게 전화할 것이라 결심했다. 튀어나가려는 지민을 말린 것은 정국이었다.
"제가 해결 할게요."
"저 새끼는 내가…!"
"박지민씨가 어떻게 하려구요? 가서 싸우게요? 주먹 한방이면 박지민씨 머리통 부숴져요. 나한테 맡기고 뒤에 가만히 있어요."
정국은 숨기듯 지민을 뒤로 밀며 일어났다. 흐르는 피를 닦고는, 다혈질인 지민과 달리 서글서글한 웃음을 머금었다.
"김윤봉씨 맞으시죠?"
"그런데? 저 좆만한 새끼랑 아는 사이냐?"
"어쩌다 보니 같이 살거든요. 이왕 말로 좋게 넘어가시죠? 이미 한대 치셨으니."
"지랄하고 계시구마잉? 한대가 아니라 무덤에 눕혀 버릴라니까."
남자가 재차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나 정국은 남자의 주먹을 피했다. 뒤에서 지켜보던 지민의 눈이 휘둥그렇게 떠졌다. 정국은 한번도 싸움을 배워본 적이 없다. 그건 지민이 정국을 뒷조사하며 얻은 사실이었다. 정국은 실제로 주먹을 쓰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다만 오랜 세월 빚쟁이들에게 쫓기며 피하는 방법을 조금 터득했을 뿐이다. 어디를 맞으면 아픈지, 주먹을 어떻게 피해야 하는지.
"어쭈? 주먹 꽤나 쓰는 구만?"
"말로 안 하시겠단 겁니까?"
남자가 바닥에 침을 퉤 뱉었다. 정국은 물끄러미 남자를 바라보다 한숨을 쉬고는 조곤조곤 말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요. 사실 저는 싸움을 잘 못합니다. 김윤봉씨랑 붙으면 제가 져요."
"이 새끼 봐라?"
"그래서 제 빽을 좀 쓰겠습니다."
"뭐?"
"혹시 백호파라고 들어보셨어요? 저랑 친한 형님들이신데."
남자가 눈에 뛰게 당황했다. 백호파는 이 근방에서 가장 유명한 조직이었다. 그 세력이 아주 커, 조직계에서는 제법 높은 서열을 차지하고 있었다. 남자가 몸 담고 있던 조직도 백호파에게 무너졌다.
"지, 지랄마! 백호파에서 너 같은 애새끼 뒤를 봐줄 리가 없…."
"그럼 제 형님이랑 전화 좀 해보실래요?"
정국은 곧장 폰을 꺼내 태연하게 전화번호를 눌렀다. 정국의 화면에는 빚쟁이라 떠있었지만, 남자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정국은, 당당하게 뻥을 치는 중이었다. 아닌 척 했지만 긴장감으로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제발, 제발. 단순한 채무관계일 뿐 뒤를 봐주는 형님은 아니지만 나름 성실한 납부인이니 전화는 당연히 받을 것이고, 남자에게는 목소리만 확인시켜주면 됐다.
[어, 정국아.]
됐다. 남자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남자에게 그 목소리는 꿈에서도 잊을 수 없는 것이었다. 자신의 등에 커다란 칼자국을 새긴 백호파 당사자였다.
"형님, 지금 바쁘십니까?"
[응? 뭐…수금 하고 있었지. 왜 또 때 됐냐?]
때는 돈이 모인 것을 묻는 것이다. 정국은 아닌 척 하하 웃었다.
"곧 다 되어서요. 확인 안부차 전화 드렸습니다."
[그래? 그럼 곧 가야겠구만. 몸 잘 챙겨라. 너 같은 애 구하기 힘들어. 알겄냐.]
돈을 성실하게 갚는 사람을 구하기 힘들다는 뜻이었다. 다른 때 같으면 손으로 엿 날리는 모양이라도 취했겠지만, 정국은 때를 알았다. 예, 형님. 네, 쉬세요. 깍듯하게 인사한 정국은 전화를 끊고 사색이 된 남자에게 여유롭게 말을 걸었다.
"말로 할까요? 어쩔까요?"
"이, 이 씨발. 백호파도 할 일 더럽게 없나 보네! 썅!"
남자는 외치고 뒤 돌아 사라졌다. 노인들은 가슴을 쓸어 내렸다. 저마다 지민을 붙잡고 큰일날 뻔 했다며 한 소리씩 했다. 그러더니 정국의 양손을 꼭 붙잡고는 고맙다 연신 인사했다.
"정국총각, 고마우이. 덕분에 한시름 놓았어. 매번 저리 소란을 피워싸니."
"뭘요. 괜찮습니다. 혹시라도 문제 있을 수 있으니 병원 꼭 가세요."
"난 괜찮아. 정국총각이 맞아서 글치…집에 약은 있구?"
"네, 이런 거쯤이야 괜찮아요."
"할아버지, 걱정 마. 정국이 내가 잘 챙길게. 어서 집에 가. 다치면 안돼. 혼자 갈 수 있어? 집에 데려다 줄까?"
"이 할애비는 괜찮으니 가서 정국총각 챙겨."
노인은 손짓하며 멀어졌다. 지민은 연신 걱정이 되는 건지 뒤를 돌아보며 신경이 쓰이는 표정을 떠올렸다. 괜찮을까. 아 진짜 개새끼, 왜 죄 없는 할아버지를 때려. 지민은 분을 못 이기고 씨근덕거리다 정국에게 달라붙었다.
"너 괜찮아? 잘생긴 얼굴에 이게 뭐야. 많이 아파? 병원 가자."
"괜찮아요. 별로 아프지도 않아요."
"내가 맞았어야 하는 건데, 씨이."
정국이 걸음을 우뚝 멈췄다. 지민이 의아한 듯 올려다보자, 정국은 굳어진 얼굴로 내뱉었다.
"진짜 큰일날 뻔했던 상황인 건 알아요?"
"야 갑자기 왜 그…."
"그때 나 없었으면 박지민씨 병원 실려 갔어요. 병원으로 끝나지 않았을 수도 있어요. 그 사람, 사람 반 죽을 때까지 패고 교도소도 다녀온 사람이에요. 그건 알고 있었어요? 왜 그렇게 겁이 없어요? 대체 왜 그렇게 앞뒤 분간을 못해요? 자기 몸 좀 신경 써요. 주제파악을 하라구요. 힘도 없으면서, 왜 나서요 나서길!"
정국은 화가 났다. 오전 공사판에서 모처럼만에 일이 일찍 끝나 집에 갔더니, 계단에서 뛰듯 내려온 노인이 허겁지겁 불러 젖혔다. 김총각이 지민을 죽이게 생겼다며 어서 빨리 오라 말을 전했다. 집에 도착하면 지민과 정식으로 화해하려 했다. 큰맘 먹고 무려 2만원이 넘는 케잌도 샀다. 말을 듣는 순간 모든 꿈이 부숴지고 심장이 쿵 내려앉은 기분이라, 정국은 이례 없이 빨리 달렸다. 케잌마저도 바닥에 버렸다. 도착해 맞기 직전 자세인 지민을 봤을 때는, 둘도 생각할 것 없이 몸이 먼저 나갔다.
"하지만 그 새끼가 먼저 욕했다구!"
"욕하면 어때서요. 욕 좀 먹으면 어때서요. 위험했잖아요! 다칠 수도 있는데! 박지민씨는 안 맞아봐서 모르는 거예요. 얼마나 그 고통이 오래가는지 아세요? 상처 볼 때마다 그때 처참했던 상황이 얼마나 생생하게 떠오르는지는 아세요?"
"난…."
"박지민씨의 이런 점이 싫은 거라구요. 왜 생각을 안 해요? 조금만 생각해도 알 수 있는 문제잖아요."
지민은 슬슬 열이 받았다. 기껏 오랜만에 말 섞는 정국은 화를 내는 전정국이었다. 이런 것은 바라지 않았다.
"그래! 나 몰라! 나는 곱게 커서 그런 거 하나도 몰라! 그런데 화나잖아! 욕하잖아! 나는 잘못한 거 없어! 그 새끼가 욕을 했고, 나는 그거에 화가 나서 화를 냈어! 뭐가 틀려서 넌 나한테 화를 내는 건데!"
"박지민씨가 위험했잖아요! 내가 없었으면, 내가 없었으면 박지민씨는…!"
"내가 생각이 없어? 맞아, 나 생각 없어. 생각만 없는 줄 알아? 개념도 없고 염치도 없고 양심도 없어. 잘 봤네. 나는 지금도 엄청 화나. 다시 그 새끼한테 찾아가서 주먹 한대 때리고 병원에 실려가도 괜찮을 정도야. 너 그렇게 만든 거 화나서!"
"그래도!"
"왜 참아야 해? 화가 나서 화를 내는 게 왜 잘못이야? 난 이해 못해. 그게 내 방식이야. 지고는 못 살고, 가지고 싶은 건 가져야겠고, 화내야 할 건 화내야겠어. 그리고 지금도 너무 걱정돼. 네 얼굴에 자국이라도 남을 까봐, 나 때문에 흉이라도 질까 봐. 그래서 너랑 왜 여기서 싸워야 하는 지도 모르겠어."
지민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이게 아닌데. 애써 구해준 정국에게 화를 내고 싶었던 것이 아닌데, 꼬여버렸다. 당장 상처를 치료하기도 모자라건만 분노한 바람에 쓸데 없이 시간을 낭비했다. 지민은 힘없이 고개를 떨궜다. 따지고 보면 자신이 잘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옷자락만 꾹 쥐었다.
가만 있던 정국이 하아 한숨을 내쉬었다.
"…맞네요."
"……?"
"박지민씨 말이 맞아요. 부당한 일에는 부당하다 목소리 내고, 화를 내야 할 일에는 화를 내야 해요. 근데 내 삶은 그렇지 않았어요. 부당한 일이 있어도 조용히 침묵하고 받아들여야 했어요. 나는 화내는 법을 몰라요. 흘려 보내고, 놓아주는 법만 알아요."
"전정국…."
"미안해요. 화내서. 그런데, 다음부터는 위험한 상황에서는 그러지 말아요. 대신 맞겠다는 말도 하지 말아요."
"……."
"가요. 집에."
정국이 지민의 손을 잡았다. 작은 손은 손에 쏙 들어왔다. 감정에 더없이 솔직한 지민으로서는 당연한 반응인 것이다. 남의 눈치보고 사는 사람이었다면, 아마 지민은 진작 자신의 방에서 나갔을 것이다. 지민은 조용히 정국을 따르다 물었다.
"많이 아파…?"
"이 정도면 모기에 물린 거죠. 아까 그 자식이 쪼는 거 봤죠? 그 자식이 쪼는 사람한테 몇 년씩이나 맞아서 단련된 몸이에요."
이번에는 지민이 발을 멈췄다.
"뭐! 너 때린 사람이라구?!"
"뭐…지금은 제법 잘 지내요. 아까 봤잖아요."
"야! 당장 연락 끊어!"
"이 사람도 한대 치고 싶어요?"
"당연하지! 너 때린 사람은 내가 다 부숴버릴 거야!"
"우와…그거 진짜 엄청 든든하네요."
영혼 없는 반응이었다. 지민은 벅벅 우기고 싶었지만, 정국의 상처가 신경 쓰여 말을 아끼고 집으로 가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정국이 스스로 치료하는 것을 말리고 엉성한 솜씨로 응급처치를 할 때는 욕을 아끼지 않았다. 그 개새끼 처음에 칠 때 한대 더 쳤어야 하는 건데. 괜찮아? 진짜 돌아가기만 하면 내가 반드시 그 새끼 조질 거야. 지민이 얼굴 가까이에서 분한 듯 이를 벅벅 가는데, 정작 정국은 태연히 웃었다.
"왜 웃어."
"아니, 너무 든든해서요."
"웃지마. 진심이거든?"
"아 저도 진심인데요?"
"넌 내 말을 너무 안 믿어."
지민은 투덜거렸다. 열려있는 구급 상자를 정리하고 나서야 왜 정국이 지금 여기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근데, 너 여기 왜 있어?"
"여기는 제 집이…."
"아 알아. 네 집인 거. 일 있잖아. 설마, 사장이 또 쉬래?"
지민이 눈을 반짝거렸다. 정국은 단칼에 부정했다.
"아니요. 오늘 출근해요. 잠깐 일이 일찍 끝나서 집에 들린 거예요."
"뭐야…오늘 쉰다고 해버려. 다쳤잖아!"
"그럼 박지민씨 먹는 건 누가 벌어와요. 안 그래도 더 빡세게 벌어야 할 판에. 그런데 박지민씨 그 옷…제 꺼 아니에요?"
"어?"
지민은 자신이 정국의 옷을 입고 있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맞다. 정국의 옷이다. 정국의 옷을 입고 오늘 그 난리를 피웠다. 또 화내려나. 전정국 성격에 왜 또 멋대로 입냐 화낼 가능성이 컸다. 지민은 냉큼 먼저 선수를 쳤다.
"뭐! 내 옷 팔라고 줬으니까 입을 옷이 없어서 입었지!"
"사실 아직 박지민씨 옷 안 팔았거든요. 아무도 사가려는 사람이 없어서."
"뭐, 뭐? 사람이 없다고? 와 다 눈이 발가락에 달렸네. 그게 다 얼마나 예쁜 옷들인데!"
"그래서 다시 돌려드릴까 하는데…."
"진짜…!
화색이 돌던 지민은 잠시 멈칫했다. 지민은 옷을 좋아하긴 했지만, 한 가지에 집착하지 않았다. 어차피 돈은 많았으며 다시 다 살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런 것보다는 현재 힘든 정국에게 보탬이 되는 것이 나았다. 그리고 맨날 떨어지는 식충이 소리와 구박소리도 줄게 만드는 것이, 옷 쪼가리보다 훨씬 쓸모 있었다.
"아냐, 팔아. 속옷만 빼구."
"진짜요?"
"응. 대신 나 네 옷 입는다? 근데 왜 아무도 안 사가지? 다 예쁜데."
"뭐…박지민씨 취향이 독특한 건가 보죠."
지민은 아닌데, 아닌데 하며 부정했지만 현실이 대는 증거에 입술을 쭉 내밀었다. 다들 눈이 없어. 자신 빼고 다 눈뜬 장님이라며 한탄도 했다. 정국은 너무 화려하지 않냐며 지민에게 말했다가 오히려 구박을 먹었다. 되려 옷장 꼴이 그게 뭐냐며 다음에 뒤집겠다 지민은 선전포고했다. 정국은 낄낄 웃다가 시간을 확인했다.
"아 저 일 갈 시간이에요."
"쉬라니까."
"안돼요."
정국이 몸을 일으키자 지민은 아쉬움이 뚜욱뚜욱 묻어나는 눈길로 정국을 쫓았다. 가지마, 가지마. 온 얼굴에 말이 쓰여있었다. 정국은 어쩐지 진짜 지민의 말처럼 가고 싶지 않아져 발걸음을 더디 했다. 느릿느릿 신발을 신는 정국의 옆에 따라선 지민이 가만 지켜보다 입을 뗐다. 그런데, 하고.
"너 나 걱정했어?"
"뭐, 뭐라구요?"
"나 맞고 죽을 까봐? 응? 그 새끼한테? 나 걱정한 거야?"
정국은 기대감 어린 지민의 눈에 당황을 집어먹었다. 분명 사실이다. 지민이 맞으려는 순간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고, 달려들었다. 정국은 새삼 스스로에게 놀랐다. 내가 저 식충이를 이렇게 걱정했나. 그러다 머리를 털며 생각을 치웠다. 여전히 지민은 정국에게 짐덩이였다. 한시가 빨리 돈을 갚아야 하는 이때에 돈을 까먹는 식충이. 재난. 불행. 그것이 지민이었다.
"지나가는 생판 모르는 사람이라도 죽을 위기에 처하면 도와주기 마련이에요."
"에이씨, 걱정했다고 하면 어디 덧나?"
"네, 걱정했어요. 아주 많이."
"너 가. 빨리 가."
"아 왜요? 걱정한다고 해줬잖아요. 그리고 여기 제 집이거든요? 박지민씨가 쫓아낼 권리 없어요."
"마음에 안 드는 인사란 말이야. 그리구…."
지민이 뜸을 들였다. 머뭇머뭇 입술을 달싹이며 망설였다. 그러다 팩 등을 뒤로 돌리고는 말했다. 쪽 팔리긴 했지만 유야무야 넘어가는 것은 지민의 스타일이 아니었다. 거기다 이 문제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만 할 부분이었다. 이번 전정국의 박지민 개무시 사태에 대한 원인. 다만 말하기 쪽팔리니 뒤를 도는 것을 선택한 것뿐이다.
"그때 키스한 거."
"……."
"다음에는 네 허락 받고 할 테니까. 걱정 안 해도 된다구. 나 그렇게 매너 없는 사람 아니야."
이미 집에 쳐들어와 결혼하자 진상을 부린 것부터가 개매너였지만, 지민은 짐작도 하지 않았다. 실상 이 정도면 모든 것은 다 제 뜻대로 이루어진다 생각하는 지민이 많이 양보한 것이었다. 무려 남의 허락을 받다니. 지민은 늘상 허락을 내리는 입장에서 받은 입장으로 바뀌니 생소했다. 가만 답을 기다리는데, 정국이 말이 없다.
"아무 말이라도 해봐. 왜 대답 안 해. 내가 너무 매너 있어서 놀란 거야?"
"……."
"전정국?"
"…아니, 그런 것도 키스라고 치나 놀라서요."
"야! 너!"
"그래도 다음부터 제 의사를 반영해준다니 고맙네요. 그래요. 박지민씨 리드로 두 번 다시 하지 맙시다, 우리. 다녀올게요."
지민이 날뛰기 전에 정국이 문을 열고 나섰다. 지민은 붉어진 얼굴로 발끈했다. 이미 현관은 텅 비어 있었지만 상관 없다. 너무도 쪽팔린 탓이었다. 키스를 더럽게 못하는 건 자신도 인정하고 있었다. 너는! 그러는 너는 얼마나 잘하길래! 김태형과 키스를 해야 했다며 지민은 한동안 붉어진 얼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첫키스인데 그럼 누가 잘하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