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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럭키 스트라이크 05

by 토페 posted Sep 25,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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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박경 보통연애 INST>










 뜬 눈으로 정국을 기다리던 지민은 동이 터올 때쯤에야 현관 앞에서 앉은 채로 졸았다. 점심때쯤 일어나 확인해도 집에 누군가 들어온 기척은 없었다. 단단히 화났나 보다. 지민은 어느 것도 하지 못했다. 화난 정국의 얼굴이 머릿속에 동동 떠다녔다. 감정이 복잡했다. 가장 먼저 찾아온 것은 후회였다. 먼저 하지 말고 넘어올 때까지 참을걸. 왜 갑자기 해가지구. 시계바늘이 다시 되돌아가라 빌다가, 지민은 가만 생각하니 분했다.



"사내새끼가! 어! 그까짓 입술 한번 부딪혔다고! 집을 안 들어와!"



 태형이 키스하려는 순간 미쳤냐고 괄괄히 날뛴 과거는 새카맣게 잊은 채 지민은 씩씩거렸다. 집 엄청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왜 집에 안 돌아오냐구. 집에서 기다리는 사람은 생각도 안하고. 그럴 거면 몇 시에 들어온다고 말이라도 해주던가. 아니, 내가 왜 전정국 걱정을 해야 해. 차인 건 난데! 허공에 분노의 주먹질을 하던 지민은 곧 바닥에 풀썩 엎어졌다.



"잠은 잘 잤겠지…일 힘들어 하는 거 같던데…."



 지민은 애꿎은 바닥을 손톱으로 긁었다. 차라리 아빠한테 전화해서 정국이가 일하는 곳을 사면 어떨까. 아씨, 그러면 집으로 끌려갈 텐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 따지고 보면 이건 다 아빠 엄마 탓 아냐. 왜 날 김태형이랑 결혼 시켜. 아니 이건 김태형 탓이지. 조금이라도 정상이면 눈 딱 감고 결혼했을 텐데. 아냐, 이건 다 속 좁은 전정국 탓이야. 나를 좋아하면 됐잖아. 아니야, 이건.



"…다 내 탓이지. 으아!"



 합리화에 실패한 지민이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뇌했다. 전정국, 전정국. 이순간마저 왜 이름조차 짜증나게 잘 생긴 거야. 지민은 한참이나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난리 치다 제 풀에 지쳐 잠들고 말았다.




 지민은 날이 지날수록 사태가 심각함을 깨달았다. 전정국이 무시했다. 박지민을. 그것도 아주 철저하게. 정국은 말 한마디 섞지 않았다. 식탁에서도 지민의 즉석밥이 사라졌다. 투명인간 취급이었다. 정국이 집에 돌아올 때 품에 답삭 안기거나 해도 정국은 정중히 지민을 떼어낼 뿐, 전처럼 투박하거나 떨어지라는 말도 없었다. 지민은 기꺼이 인정할 수 있었다. 자신을 쫓아내려는 방법이라면, 정국이 시도한 방법 중 최고였다. 벽을 두고 혼자 외치는 것만 같은 기분은 지민을 지치게 만들었다.



"정국아 휴가 또 없어?"

"……."

"나 그림 실력 쪼끔 는 거 같아. 내가 다시 그려줄게!"

"……."

"정국아, 자?"



 제대로 가슴 안쪽이 시큰했다. 발목을 다쳤을 때보다 더 아팠다. 바늘이 돌아가면서 심장을 쿡쿡 찔렀다. 그러면서도, 정국이 돌아오는 시간만큼은 정신 못 차리고 두근거렸다. 오늘은 말해주지 않을까. 기대를 걸고 주인 기다리는 강아지마냥 하염없이 정국을 기다렸다. 돌아오는 답은 무시뿐이었지만.

 감정이 상하는 만큼, 지민은 의지를 독하게 다졌다. 내가 이런다고 이 집에서 제 발로 나갈 거 같아. 지민은 정국이 제 밥숟갈을 놓고 오면 내 꺼 빼먹었잖아, 하고 스스로 가져와 반찬을 쓸어먹는 뻔뻔함을 자랑했다. 정국에게 호감을 살 행동을 곰곰이 고민하기도 했다. 워낙 선행을 해본 적이 없어 어려웠다. 크게 추려진 것은 다섯 가지였다. 밥, 빨래, 청소, 설거지, 이불 개기.

 첫 번째 항목. 밥. 지민은 대번에 엑스자를 과감히 쳤다. 가스 불을 키는 법조차 모르는 자신이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요리를 해낼 가능성은 영에 가까웠다. 혹여라도 정국이 자신의 음식을 먹고 실려가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좋아, 빨래부터 하는 거야."



 지민은 집에 보이는 모든 옷을 빨래통에 집어넣었다. 제 옷과 정국의 옷을 모두 모으니 양이 제법 많았다. 물에 넣어놓으라고 했었나. 그 많은 옷을 지민은 한 통에 같이 집어넣었다. 그리고 나른하게 낮잠을 즐기고 화장실로 귀환했을 때 비명을 지를 수 밖에 없었다. 어째서인지 정국의 흰 티셔츠가 얼룩덜룩했다. 가슴팍은 파란색, 등은 노란색. 미술대회라도 나간 꼴이었다. 지민은 무지개티로 변한 흰 티를 정국의 앞에 두고 눈치를 살피며 방안을 제시했다.



"정국아, 그…옷이…내가 빨래하려고 했는데…이게 이렇게 됐거든…그…내 꺼 같이 입을래…?"



 사이즈가 안 맞는 건 지민도 알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구실을 보태고 싶어서 덧붙이기만 한 것이다. 당연하게도, 정국은 인상을 구기고 못 쓰게 된 옷을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빨래 항목에 엑스를 친 지민은 난생처음 옷을 찢어버리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였다.

 세 번째 항목, 청소. 지민은 빗자루를 들고 집안을 돌아다녔다. 허리가 끊기는 것 같았다. 이렇게 힘든 걸 전정국은 매일 한단 말이야? 헬스장 2시간보다 더 힘들다. 마침내 헥헥거리며 몸을 일으킨 순간이었다. 허리근육은 지민의 예상만큼 튼튼하지 않았고, 비틀거린 지민은 쓰레받기를 들고 그대로 이불에 쓰러졌다. 죽어라 돌아다니며 모은 먼지가 이불에 고대로 문양을 수놓았다. 정국 앞에서 이불을 뒤로 숨기며 지민은 웅얼거렸다.



"정국아 이불한테 사정이 생겨서 그런데, 우리 오늘만 바닥에서 자면 안될까?"



 정국은 인상을 찌푸리곤 나직이 한숨을 흘렸다. 지민은 세 번째 항목에 아주 크게 엑스자를 쳤다. 덧붙여 '사람이 할 짓이 못 됨'이라 구석에 작게 써넣었다.

 네 번째 항목, 설거지는 시작조차 못했다. 정국이 집에서 밥을 먹지 않는 탓이었다. 아침 설거지는 정국이 처리했고, 지민은 스스로 밥을 차려먹지 않으니 무리였다. 냉장고 안에 든 반찬을 몇 개 주워먹는 게 저녁의 전부였으며, 정국이 가져오는 음식은 일회용 용기라 설거지를 할 필요가 없었다. 지민은 설거지 항목에 물음표를 그려 넣었다.

 지민은 마지막 항목인 이불 개기만 간신히 어설프게 해냈다. 됐다, 드디어 됐다. 지민은 기대감에 차 정국을 똘망똘망한 눈으로 쳐다봤다. 화 풀 거지? 그러나 정국은 무슨 상관이냐는 듯 관심 한 톨 주지 않았다. 이름 한번 불러주지 않고 이불을 피고 잠만 잤다. 뒤에 남은 지민이 이를 부득 갈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어떻게든 키스 말고 더 진도 뺄걸! 네가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두고 보자. 이불 개기 항목은 놔두고, 지민은 종이에 정국의 이름만 줄기차게 써내려 갔다.

 쪼잔한 전정국, 재수없는 전정국, 나를 좋아하지 않는 희귀종 전정국. 전정국이 박지민을 좋아하게 해주세요.








***









 태형은 요즘 구름이라도 밟고 다니는 느낌이었다. 밥을 먹을 때도 헤실, 잠을 자기 전에도 헤실, 운전을 하다가도 헤실. 나사라도 풀린 것처럼 하루 종일 실실 웃고 다녔다. 드디어 결혼이다. 우리 지민이, 우리 지민이 노래를 부르던 태형은 호칭도 바꿨다. 우리 색시로.



"우리 색시 보고 싶다."



 태형은 결혼 소식을 듣자마자 지민부터 찾았다. 정식으로 프러포즈도 할 생각이었다. 반지와 꽃다발까지 한아름 안고 간 자리에서 태형을 기다리는 것은 쏠랑 내뺀 지민의 행방이었다. 박사장조차 접근하기 힘들어하는 할아버지 집으로 내려갔단다. 막무가내 태형은 지민을 따라가려다, 지난 번 흠씬 두들겨 맞은 빗자루자리가 저려오는 것만 같아 차마 내려가지 못했다. 지민의 할아버지, 박노인은 태형을 못마땅해 했다. 검은색 아닌 머리카락은 자신의 집에 들일 수 없다며 눈에 불을 켰다. 뿐 아니라 어쩜 저리 복 없게 먹냐며 혀를 끌끌 찼다. 태형은 그럼에도 처갓댁에 잘 보이겠다 싹싹하게 굴었지만 박노인의 심지는 아주 꼿꼿해, 마지막 떠나는 순간까지도 태형의 인사를 받아주지 않았다.



"우리 지민이 못 본지가 벌써 2주라니!"



 아무래도 못 참겠다. 결혼하면 매일 본다 해도,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다. 약혼 대상을 상대로 상사병이 난다면 얼마나 쪽 팔린 일인가. 태형은 자연스럽게 지민의 폰으로 위치추적에 들어갔다. 몰래 지민의 폰에 설치해놓은 파렴치한 짓이었지만 태형은 크게 상관하지 않았다. 내 색시인데, 뭐.



"흐음, 이상한데…."



 빨간 점이 떠있는 장소는 2주째 변함이 없었다. 지민이 코를 풀고 있어도 귀엽다고 할 만큼 콩깍지가 심하게 낀 태형이라도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있었다. 지민은 예민했다. 침대도 없으며, 벌레도 우수수 튀어나오는 공간에서 오래 버틸 리가 없다. 우리 색시 인내심이 뛰어난 편이 아닌데. 태형은 이번에 다른 폰을 위치추적했다. 남준의 폰이었다. 이건 또 왜 부산이야.

남준은 지민의 그림자였다. 거진 매번 연락을 씹는 지민 대신 태형은 다른 방법을 터득했다. 남준을 쪼으면 지민이 나온다. 작작하라며 성질을 부리긴 했지만, 남준이 있는 곳엔 지민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 남준은 부산에 있었고, 지민은 전라도에 있었다. 일주일 전엔 강원도고, 이제는 부산? 전국투어라도 할 셈인가.



"뭐, 심부름이라도 갔나 보지."



 고민하던 태형은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태형은 지민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누구의 시중 없이 지민은 살아남기 힘들다. 아 우리 색시 보고싶다, 헝헝. 태형은 지민이 잘 때 찍어놓은 사진을 꺼내보며 액정에 쪽 뽀뽀했다.







***








 다리가 다 나았다. 발목을 몇 번 돌려보며 상태를 확인한 지민은 모처럼만에 밖에 나왔다. 좀이 좀 쑤셔야지. 정국은 무시로 일관했고, 집에서 할 것이라곤 그림이 전부다. 집에서 가만히 정국을 기다리면 정국에 관한 생각으로 머릿속은 복잡해지기만 한다. 역시 문을 열고 바깥공기를 쐬니 조금 낫다. 그러나 지민은 얼마 안가 콧잔등을 찡그렸다.



"여긴 어디야."



 무슨 집이 다 똑같이 생겼어. 분명 다른 쪽으로 돌아갔는데 처음 나왔던 곳과 같은 곳이었다. 아씨. 머리를 헤집으며 지민은 아까와 똑같이 직진했다. 길을 모를 땐 직진만이 답이라는 것이 지민의 사상이었다.



"아 진짜."



 또 같은 곳이다. 미로야? 무슨 미로냐고. 최근 유행한 영화라도 찍는 기분이었다. 미로에서 탈출하는 내용이라는데, 지금 자신이 그 짝이다. 다리도 아파오고 짜증이 머리끝까지 치민 때였다. 어디선가 음식냄새가 났다. 킁킁 냄새 맡은 지민은 벌떡 일어나 냄새를 쫓아갔다.



"윤씨 왔누? 여 옥시시 좀 잡숴."

"자 여 고구마도 가져왔네."

"아따 고거 참 달게 생겼구마. 근데 윤씨 며늘아기 온다고 하지 않았어?"

"혼자 있는 늙은이 뭣하러 찾아오겄어. 또 못 온다고 하더만."



 나무평상에서 노인들이 모여 수다를 떨고 있었다. 그 가운데에 노릇노릇 김이 올라오는 고구마와 옥수수가 지민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고구마는 지민이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하도 걸어 배도 고팠다. 고구마…. 지민이 침을 꼴깍 삼켰다. 그러나 자존심이 하늘을 찌르는 지민은 벽 뒤에서 침만 삼키고 나서지 않았다. 거지처럼 구걸하거나 친한 척하는 것은 지민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못했다.



"자식새끼라고 낳으면 뭘 하누. 찾아오지도 않는데."

"아 그런 말 말어. 요즘 젊은이들이 얼마나 바쁜데."

"왜 내가 틀린 말 했남?"



 갈라진 고구마의 노란 속이 보인다. 넋을 빼고 바라보던 지민은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았다. 아냐, 박지민. 너 뭐 하는 거야? 정신차려, 너 박지민이야. 박지민. 고작 저런 음식 하나 때문에 못 가고 있는 거야? 미쳤어? 고구마 따위….



"잉? 거 누구요?"



 들켰다. 지민은 벽 뒤로 급히 몸을 숨겼다.



"왜 누구 있어?"

"왠 아가 하나 있는 거 같은디?"

"아가? 이 동네에 아는 거기 정국 총각 한 명 살고 있지 않어?"

"아야, 나와서 여 고구마 좀 먹어라."

"아무도 없나벼. 안 오는구마."

"아 있었다니께, 아야 나와보라, 응?"



 지민은 갈등했다. 고구마 하나 때문에 움직인다는 게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잘못 봤나보구먼."

"참말 있었는디…정국총각 오고 나서 또 온 줄 알았제."



 지민은 쫑긋 귀를 세웠다. 노인들은 정국과 알고 있는 사이 같았다. 잠깐, 저 사람들한테 전정국이 뭐 좋아하는 지 물어보면 되는 거잖아. 지민은 조금 고개를 빼고 평상을 살폈다. 여전히 고구마는 황금색 속살을 드러내고 있다. 이건 전정국이 날 좋아하게 만드는 일에 도움 되는 일이야. 결코 고구마 따위에 홀려서가 아니라고. 속으로 되새기며 지민은 지나가는 사람인척 당당하게 걸어 나왔다.



"어라, 참말이구마! 아야, 와서 고구마 묵으라."

"그, 그렇게 말한다면야…! 어쩔 수 없지."



 지민은 끌려오는 척 평상에 올라 호호 불며 고구마를 깠다. 노인들은 나이 어린 지민이 신기했다. 달동네에 젊은 사람은 정국 혼자뿐이었다. 젊은 세대는 다 서울로 빠져나가고 빈집과 노인들만이 남아 있었다. 허겁지겁 고구마를 먹는 지민은 딱 노인들의 손자 뻘이었다. 볼이 터지도록 고구마를 집어 넣는 지민을 흐뭇한 미소로 보던 노인들이 말을 붙였다.



"아가 어디서 왔누? 차암 곱게두 생겼네."

"여기는, 음, 사정 있어서."

"이름은?"

"박지민. 고구마 완전 맛있다. 이거 할머니가 만든 거야? 이렇게 맛있는 고구마 처음 먹어봐!"



 처음 계획 따위는 다 잊고 지민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물었다. 노인들은 연신 맛있다, 맛있다 외치는 지민이 귀여워 허허 웃었다. 고구마나 옥수수 같은 간식을 내어와도 피자나 치킨을 시켜 달라 조르는 손주들과 달리 예쁘게 먹으니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복스럽게도 잘 먹네."

"참, 할머니 전정국이라고 알아?"

"정국총각? 알다마다. 얼마나 인물도 훤하고 착헌지. 지난번 정국총각이 우리집 불 나간 것도 갈아줬지."



 노인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덧붙였다. 정국이 쌀을 날라줬다, 정국이 고장 난 라디오를 고쳐줬다, 정국이 얼은 수도관을 고쳐줬다. 모조리 칭찬이었다. 지민은 정국에 관한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서 들으니 새삼 신기했다. 종이에 쓰여있는 글씨를 보는 것과 사람에게 듣는 것은 달랐다. 전정국한테 그런 부분도 있었어? 나한테는 엄청 틱틱대던데. 무슨 비결이라도 있는 거야? 쫑알쫑알 말을 거는 지민을 노인들은 연신 귀엽다며 박수를 쳤다. 지민은 그날 만족스럽게 부른 배를 두들기며 집에 돌아갔다.









***








 지민은 나무평상에 꼬박꼬박 출석도장을 찍었다. 정국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노인들의 이야기는 재미있었다. 어린 시절 돌아가신 할머니가 옛날 동화를 들려주는 것 같았다. 어머어머 하며 수다 떠는 여인처럼 지민은 맞장구도 잘 쳤다. 더불어 눈 하나 꿈쩍 안하고 정국의 신부라 말해놨다. 오메가라 소개하며 얘기하자 노인들은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 칭했고, 지민은 히히 웃으며 그치? 그치? 하고 오두방정을 떨었다. 현실은 찬바람 나다 못해 북극 못지 않았지만, 지민은 뻔뻔했다.



"그래서,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할머니?"

"고때 나 좋다고 줄 서는 사람이 어찌나 많았는지 그 중에서 하나 골라잡아서 결혼했지. 그라고 고놈 아가 바람 핀 거 잘못했다고 싹싹 빌던데 발로 뻥 차줬지."

"잘했어! 아 진짜 내가 다 화나네. 바람 피는 것들은 다 천벌 받아야 돼."

"오구, 우리 지민이는 걱정 없겄네. 정국총각은 그런 거 꿈도 못 꾸지."

"헤, 내가 좀 잘 골라잡았지."



 지민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다 문득 오늘 아침 일이 떠올라 속상했다. 밥이 떨어졌다 일렀더니 정국은 어쩌라고, 하는 식으로 쳐다봤다. 지민은 웃기게도, 섭섭했다. 자신이 저지른 일이고, 강제로 쳐들어와 사는 것도 자신인데 쌀쌀한 정국에 화가 났다. 분을 이기지 못하고 짐가방을 정국 앞에 던졌다. 돈 때문에 그래? 그럼 팔아! 이거 이 후진 집보다 더 비쌀걸? 정국은 그 말에 잠시 지민을 바라보다 군말 없이 가방을 들고 나섰다.



"씨이, 그런데 할머니 전정국이 나한테 너무 관심이 없는 거 같아."

"아가한테?"

"응. 내가 뭘 잘못했다고. 어? 내가 그렇게 미우면 그럼 한대 치던가. 남자가 속 좁게."



 지민은 속상함을 토로했다. 어쩜 그럴 수 있냐며 한을 풀 듯 새색시처럼 미주알 고주알 다 털어놨다. 윤씨 노인은 지민은 위로했다.



"원래 부부는 다 글케 사는 기지. 싸우고, 화해하고.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말그라."

"그래도…!"



 싸우고 화해를 하고 싶어도 말을 해야 할 것이 아닌가. 지민은 신나게 밤을 까먹던 숟가락까지 멈추고 우울해했다. 윤씨는 강아지처럼 재롱을 피우던 지민이 속상해하니 어떻게든 달래주고 싶었다. 축 처진 어깨가 진심으로 속상해 하는 듯 했다.



"아가, 혹시 막걸리 좋아하누? 할미 집에 가서 한잔 할래?"

"나 그래도 돼?"

"아 아서. 애 술 먹이면 못 써. 정국총각한테 무슨 소리를 들으려구."

"이렇게 속상할 땐 한잔씩 하는 건 괜찮지, 고럼. 이 할미랑 가자."



 다른 노인들이 말렸지만 지민은 윤씨를 따라 나섰다. 윤씨 집은 정국의 집과 비슷했다. 윤씨는 직접 담근 막걸리를 꺼내왔고, 지민은 조심스럽게 첫잔을 들이켰다. 막상 술이란 말에 따라왔지만, 고급 와인만 마시던 지민은 처음 접하는 술이었다. 제법 입에 맞았다. 아니, 고급와인보다 더 목구멍을 술술 넘어갔다. 한 얼굴만 떠올리면 답답해지는 속 때문인 것도 같았다. 지민은 윤씨 집에 붙어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거나하게 술을 펐다. 해가 질 즈음 시작된 술판은 밤이 깊어질 때까지 계속됐다.



"애가, 애가 싸가지가 없어. 싸가지가아…응?"

"정국총각 그렇게 안 봤는디, 참…그건 정국총각이 잘못했네!"

"그지? 그지! 내가 싫어? 싫어어어? 나두 싫다고 해! 흥, 돈만 좋아하는 쫌생이!"

"아가 많이 속상했겄네."

"할무이 정구기가 너무했지? 그지이? 나는 잘못한 거 하안개두 없는데에!"



 지민은 책상에 엎어져 책상을 손바닥으로 쾅쾅 내리쳤다. 한참 정국을 씹다가 술을 마시고, 씹고 마시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시계를 흘긋 보고는 풀린 발음으로 웅얼거렸다.



"정구기, 도라올 시간이다아!"



 베싯 웃은 지민은 손을 흔들었다.



"할무이, 나 갈게."

"아가 잘 갈 수 있겄어? 정국총각 불러올까?"

"아냐아냐, 괜차나. 그 나아쁜자식 얼굴도 안 보고 싶어."



 한사코 괜찮다며 지민은 비틀거리는 발걸음으로 윤씨 집을 나섰다.







 정국은 크게 깨달았다. 간밤 입맞춤 하나가 정국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박지민은 오메가다. 입술을 붙여왔을 때, 솔직한 심정으로 동할 뻔 했다. 그리 식충이라 구박하고 헛소리라 무시했지만 좋은 향과 부드러운 입술이 붙어오자 처음부터 거칠게 떼어낼 수 없었다. 입안으로 파고든 혀가 단 것만 같아서, 얼굴을 붙잡은 손이 작고 뜨거워서. 떨쳐내고 나간 밤에 쿵쾅거리는 심장이 동네를 다 깨울 것만 같았다. 정국은 그 모든 것이 지민이 오메가라 그런 것이라 결론을 맺었다.

 정국은 자신이 생각보다 지민을 싫어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정국은 약했다. 갈구하는 애정 어린 눈빛과 쏟아지는 애정에 약했다. 어렸을 적 가졌다가 강제로 떼어내진 애정은, 십년이 넘게 지나도 은연중에 그리워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민은 온몸으로 사랑 받고 자란 티를 냈다. 나한테 아직도 넘어왔어? 이상하네. 날 안 좋아할 수가 없는데. 자신만만하게 말하며 고개를 갸웃하는 게 진심이라 웃기면서도 한 편으로는 재미있었다. 지민은 어디 다른 행성에서 떨어진 사람 같았다. 부러우면서도 정국은 그런 지민을 통해 대리만족이라도 하려는 자신을 깨닫고 혐오감이 밀려왔다. 아직도 펼쳐진 현실에 적응하지 못한 건가 싶어서 기가 막혔다.

 정국은 지민을 강하게 떼어놓기로 마음 먹었다. 그간 지민이 무시에 취약하다는 것을 대강 눈치로 살펴 알았고, 그를 실천했다. 이번 무시작전을 진행하는 것도 힘들었다. 빨래라고 해놓은 것도, 청소라고 해놓은 것도. 눈치 빠른 정국은 곧장 미안함의 표시란 것을 알아챘다. 그럼에도 모른 척 했다. 어서 빨리 지민을 내보내는 것이 답인 듯싶었다.



"내일 보자, 정국아."

"네, 사장님. 들어가세요."



 퇴근하고 나온 정국은 손에 들린 계란찜을 내려봤다. 집에 가져왔던 음식 중 지민의 반응이 가장 뜨거운 음식이었다. 입이 짧아 다른 음식은 다 남겨도 계란찜은 다 먹었다. 그런데 밥이 없다 했나. 정국은 오늘 아침 일을 떠올렸다. 일단 지민이 팔라 던진 가방을 들고 나오긴 했는데, 영 내키지가 않아 일터에 두고 왔다. 한아름 담긴 옷에 같은 아르바이트생들이 던지는 질문에 두루뭉술 둘러댔지만, 별일이라는 듯 바라보는 눈은 그대로인 것을 보니 금방 처리해야 할 성 싶었다.

 정국은 문 손잡이를 잡은 순간 의아함을 느꼈다. 문 앞에만 서도 먼저 튀어나오던 지민이 잠잠했다. 뭐지? 문을 열자 반기는 것은 컴컴한 방이었다.



"……."



 허전했다. 정국은 그렇게 바라던 상황인데, 어쩐지 기운이 빠졌다. 갔나 보네. 정국은 계란찜을 내려놓고 한 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잘됐네."



 이게 원래 제 방이다. 혼자 쓰는 방. 누구도 반겨주는 이 없이 들어오는 게 맞았다. 원래 그런 인생이다. 불행이란 불행은 다 끌어안은 전정국 인생인 것이다. 그런데, 어색했다. 전정국! 왜 이렇게 늦게 왔어! 기다리다 목 빠지는 줄 알았네. 반기며 따라 나오는 목소리에 그새 적응이라도 했나 보다. 든 사람 자리는 몰라도 빠진 사람 자리는 티 난다더니. 어차피 금방 적응될 것이다. 파티라도 해야 하나. 드디어 식충이가 나간 기념으로. 픽 웃은 정국은 계란찜을 뜯다 하아, 한숨 쉬고는 덮었다. 식욕이 돌지 않는다.

 그 순간, 쾅쾅 문이 요란하게 울렸다.



"뭔 집이, 어, 거지같이 다 똑같이 생겼네에. 뭐야아, 왜 또 문이 안 열려. 이씨, 전정국이 무시한다고 너도 나 무시하는 거야? 너도 똑같이 재수없을래? 엉? 내가 봐줄 때 조요옹히 열려라. 집이라고 해서 주인 따라가면 돼요, 안 돼요? 어라…문이 왜 두 개지. 이 집 아닌가? 으응? 열렸다!"



 문을 연 정국은 얼이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너는 전정국과 좀 다르다며 베실베실 지민이 웃고 있었다. 지민보다 먼저 술 냄새부터가 정국을 반겼다. 게슴츠레 눈을 뜬 지민은 집에 들어오려다 정국의 가슴팍에 얼굴을 박고는 인상을 구겼다.



"아니이! 넌 날 개무시하는 전정구욱?"

"하 술은 또 어디서 주워먹고 온 거예요?"

"에이, 시끄러. 내가 술을 먹든 뭘 하든! 나 싫어한다며! 비켜!"



 지민이 정국을 밀치고 들어섰다. 정국은 이번에 지민을 무시할 수 없었다. 술에 취해도 보통 취한 것이 아니다. 돈도 없는 지민이 밖에 나가 술을 얻어먹은 거 자체가 따져 물어야 할 상황이었다.



"박지민씨. 당신 오메가라면서요? 무슨 생각으로 이 늦은 시간까지 술을 먹고…."

"내 마음이다, 흥. 너가 무슨 상관이야!"



 지민의 말이 맞긴 했다. 정국이 지민에게 잔소리할 권리는 없었다. 정국은 진득하게 한숨을 쉬고 다짜고짜 현관에 드러눕는 지민을 들어 안았다.



"으앗! 높아! 전, 전정국!"

"왜 불러요."

"다, 다행이다. 너…너 나랑 같이 있어주는 거야? 나 높은 거 완전 싫어한단 말이야."

"…같이 있어주는 게 아니고, 이 집 내 집이거든요."



 지민은 완전히 퓨즈가 나간 상태였다. 술을 잘 하는 편도 아니면서 저녁부터 밤까지 마시니 떡이 되는 것은 당연했다. 정국이 이불에 지민을 내려놓으려는 순간, 지민은 붙었던 체온이 떨어지자 정국의 목에 팔을 걸어 매달렸다.



"너 또 가려구 그러지? 나 놔두고?"

"박지민씨."

"가지마. 흑, 나 무시하지 마."



 지민이 갑작스레 눈물을 터뜨렸다. 술 취한 지민은 평소보다 배는 더 솔직했다. 그간 서운함이 몰려 터져 나왔다. 한 방울씩 한 방울씩 뚝뚝 떨어뜨리며 정국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그러다 얼굴을 떼고선 방구석으로 기어가 노트를 들고 다가왔다. 노트에 대짝만하게 쓴 글씨는 '돈'이었다.



"내가 줄게에, 너 이거 좋아하잖아. 나랑 있자. 나 싫어하지도 말고 버리지도 마."

"하아…."

"더 줄까?"



 코를 훌쩍이며 지민은 다음 장에 돈을 썼다.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 정국은 그간 지민이 낙서해놓은 흔적을 발견했다. 빨래, 청소, 이불 개기. 정국은 탄식했다. 이런 사람을 데리고 내가 무슨. 잘 보이겠다고 써놓은 거 하며,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성질부터 내는 거 하며, 적당히 가식 좀 떨면서 사람 대하는 법도 모르는 거 하며. 지민은 단순한데 자신만 깊이 들어간 듯했다. 술 취한 사람 데리고 뭘 하겠냐. 어휴, 몇 번인지 모를 한숨을 또 쉬며 정국이 지민의 손에서 노트를 뺏었다.



"됐으니까 이제 그만 자요."

"나 예뻐해줘. 허엉, 미워하지 마. 싫어하지, 히끅, 마."

"하아…."

"흐윽, 전정국 이 나쁜 새끼야…."

"예뻐해달라면서 욕 하는 건 무슨 심보인지. 이봐요 박지민씨."

"나한테, 허엉, 말 걸지마. 너 미워. 꺼져버려!"



 말은 꺼지라는데, 지민의 손은 여전히 정국을 잡고 있었다. 우는 사람을 달래는 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 난감해하던 정국은 머뭇거리다 훌쩍이는 지민을 가만 끌어안았다. 냉큼 기다렸다는 듯 끌어안긴 지민은 금새 말을 바꾸었다.



"흑, 아니야, 가지마. 손도 잡아주구, 아침마다 이름도 불러주구. 예뻐해줘. 챙겨줘."

"…박지민씨 저 아니어도 예뻐해주는 사람들 많을 거 아니에요."

"히끅, 많아. 엄청 많아. 나 좋다는 사람 너가 상상도 못할 만큼 많아."



 정국은 황당했다. 이럴 때는 아니라고 하는 게 보통적인 답안 아닌가.



"그럼 됐네요. 그 사람들한테 가서 예뻐해달라고 하세요."

"그런데…."

"……?"

"그런데 난 너가 예뻐해주는 게 제일 좋단 말이야, 흐엉!"



 눈물 뚝뚝 흘리는 지민을 품에 두고 정국은 픽 웃어버렸다. 애다, 애. 정국은 끌어안은 지민의 등을 커다란 손으로 토닥거렸다.



"박지민씨 안 무시할게요."

"하면 너, 크흥, 죽을 줄 알아."

"알았어요."



 정국은 지민이 잠들 때까지 달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처음으로 지민은 등이 아닌 정국과 마주보며 잠들었다. 포개진 심장 박동이 나란히 쿵쿵 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