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 마마무 - LOVE LANE>
정국은 지민과 휴전하기로 결심했다. 지민과 합의한 것이 아니라 혼자 속으로 정했다. 작은 머리통을 도무지 따라잡을 수 없다. 아예 늘러 붙어 무슨 동물적 귀소 본능이라도 있는 것인지, 돌아오는 방법은 기막히게 잘 생각해냈다. 더불어 정국이 조금이라도 쫓아내려는 낌새라도 보이면 경계하며 착 달라붙어있다가도 방 구석으로 멀어졌다. 강제로 쫓아내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대신 정국은 기다리는 것으로 방향을 틀었다. 아직 부잣집 아들 습관이 베인 지민이 적응 못하고 그만 이 좁은 집에서 스스로 떨어져 나가기를.
지민은 실제로 사서 하는 고생에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위기에 처했다. 할아버지 집에서는 그나마 두터운 이불이라 허리가 덜 아팠는데, 얇은 이불은 맨바닥과 다름 없어 허리가 끊기는 것 같았다. 잘 때뿐만이 아니었다. 생활 모든 것이 문제였다. 처음 화장실 안으로 들어온 지민은 샤워기가 없다는 사실에 다시 튀어나와 정국을 불렀다.
"어떻게 씻어야 돼?"
정국의 화장실만한 욕조에서 거품목욕을 하는 지민은 모르는 것은 당연했다. 정국이 대야에 물을 받아줄 때는 의심 짙은 눈초리로 정국을 노려보기까지 했다. 자신을 쫓아내려 일부러 그러는 것 아니냐며, 씻는 시범을 보여달라 설치는 지민을 막는 데 정국이 꽤나 애를 먹었다.
하나하나 사소하게는 옷을 놓는 것부터 전쟁이었다. 옷은 어디다가 걸어? 순수하게 묻는 지민에게 정국은 방구석을 소개시켜줬다. 지민은 경악하며 옷을 함부로 다룰 수 없다 비명을 지르고 짐을 풀지 못했다. 지민은 옷을 직접 빨 수도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집에서는 방구석 아무렇게나 벗어놓으면 사라져 얌전히 뽀송한 상태로 옷장 안에 들어와있었으니, 지민은 생전처음 만난 손빨래라는 것에 눈을 댕그랗게 떴다. 도련님 눈에 손빨래는 제법 재미있는 놀이였다.
"우와, 물이 막 빠져. 옷에 물감이라도 있는 거 같다. 원래 이런 거야? 대박 깨끗해졌어. 이 막대기로, 이거 이렇게 패면 되는 거야?"
"…누구 싫어하는 사람 있어요?"
"응."
"누구요?"
"있어, 나 좋다고 따라다니는 우성알파. 근데, 정국아 나 손 시려. 따뜻한 물 어떻게 나오게 해?"
"지금은 안 나올 시간이에요. 좀 기다려요."
"그럼 나 손 잡아줘! 딱이네! 너도 시렵잖아!"
"됐어요. 주머니에 넣으세요. 그게 더 따뜻해요."
지민은 아슬하게 떨어져 나갈 거 같으면서도 떨어져 나가지 않았다. 정신력의 승리였다. 이대로 집을 나가면 태형과 빼도 박도 못하게 결혼으로 묶인다는 사실이 지민을 강하게 키웠다. 정국은 예상보다 오래가는 지민에 나름 놀라는 중이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제 추측에 박차를 가했다. 사업을 말아먹은 게 분명해. 지민은 정국의 안에서 거의 망한 집 자식으로 기정사실화 되고 있었다.
"화 안 낼 테니까 말해봐요. 집안 사정 힘들어요? 그래서 누가 이렇게 하라고 시켰어요? 입 하나라도 덜어내려고? 상식적으로 말이 안되잖아요. 생판 모르는 남의 집에 이러고 있으니까. 솔직히 집안 사정 힘들죠? 주식? 아니면 부동산? 뭐가 망해서…혹시 집 저당 잡혔어요? 뺏긴 거에요, 완전히?"
지민은 팔짝 뛰었다.
"우리 집 돈이면 10대가 먹고 살고도 남는 돈이거든! 우리나라 사람들한테 다 돈 돌려도 남아!"
지민이 강력하게 주장했지만 정국은 죄다 무시했다. 빼박이다. 자존심만 남은 망한 부자. 정국은 왁왁거리는 지민에게 더는 묻지 않았다. 정국도 어려서 한번 경험한 적 있었다. 고아원에 갔을 때 집이 한때 잘 살았다는 이유로 따돌림을 받았었다. 고아원 같은 지붕 아래서 자고, 같은 밥 먹어도 당시 어린 아이들은 민감하게 굴었다. 지금이야 어린 아이들의 치기이니 이해하지만, 그때 받은 서러움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확신한 정국은 그 부분에서만큼은 지민의 자존심을 지켜주기로 했다.
그 부분을 빼고도 지민을 취급할 것은 많았다. 정국은 지민을 식충이로 취급했다. 뒷백을 제외하고서라도 우성오메가를 식충이 취급한다는 것은 개그프로에서도 안 나온 코미디지만, 정국에게는 그 코미디가 통했다. 정국은 의무로 실시한 건강검진에서 베타 판정을 받았고, 지민의 페로몬은 베타 정국에게 하나도 통하지 않았다. 아예 향이 나는지조차 몰랐다. 심지어 정국은 지민이 스스로 오메가라 칭하기에 보통 오메가라 납득하는 수준이었다.
베타가 오메가의 호르몬을 완전히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지민이 작정하고 페로몬을 피어 올린다면 정국이 흠칫할 수준은 됐다. 게다가 지민은 우성이라 그 정도가 더 했다. 다만 지민은 일이 끝나고 돌아오면 자기 바쁜 정국에게 차마 섹스하자 조를 수 없었다. 집에 온 정국은 말 그대로 떡이 되어 실신하듯 잤다. 대화 몇 마디만 나누는 게 고작이었다. 피곤이 덕지덕지 붙어 정국은 시체로 의심할 만큼 곤히 잤다. 다행히 지민은 정국의 얼굴을 가만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만족하고 있었다.
***
정국은 아르바이트 고용주 입장에서 놓치기 아까운 인재였다. 시키는 일은 군말 없이 다 했으며, 자리를 비워도 딴청 부리지 않고 일한다. 힘도 좋았고, 성격도 무난하게 좋았으며, 베타라 다른 아르바이트생과 연애문제로 엮이지도 않았다. 거기다 심지어 잘생기기까지 했다. 정국이 아르바이트 면접을 보러 가게에 들어온 순간, 술집사장은 단번에 계약서부터 꺼내 들었다. 이런 월척이 굴러들어오다니. 놓치면 바보다. 때문에 술집사장은 아르바이트생 중 정국을 가장 아꼈다. 서빙만 해도 여자손님을 끌어 모으는 정국은 사장에게 복덩이였다.
"정국아, 이리와 봐."
"네, 사장님."
"자 이거. 아까 주문 잘못 들어와서 더 많이 했다가 남아서 포장한 거야."
술집사장이 포장된 소시지야채볶음을 내밀었다. 주류를 나르던 정국은 통을 내려놓고 받아 들었다. 거절은 사치였다. 만 이천원이 굴러들어온다. 안 그래도 찬거리가 마땅치 않았다. 집에 죽치고 있는 식충이, 지민 탓에 음식 주는 속도가 두 배로 가속화됐다. 정국은 올라가는 입꼬리를 간신히 내리누르고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정국이 너 요즘 얼굴 상한 거 같다. 무슨 일 있어? 우리 가게 트레이드 마크인데. 잘생긴 정국이 얼굴."
티가 나나 보다. 하긴 집에 대재앙이 들이닥쳤는데, 티가 안 나는 것이 이상한 것이다. 박지민이라는 식충이는 집안의 식량과 함께 제 정신력까지 쪽쪽 빨아먹는 게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하얀 얼굴로 그리 방긋방긋 웃을 수가 없다. 정국은 삼촌처럼 다정하게 걱정해주는 사장을 향해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당겨 웃어 보였다.
"하하, 괜찮아요. 요즘 잠을 좀 덜 자서 그런 거 같아요."
"걱정이네, 괜찮은 거 맞지?"
"네."
"그래, 힘든 일 있으면 말해."
술집사장이 정국의 등을 토닥거렸다. 정국은 일터에서 가난한 사정을 숨기지 않았다. 창피함 따위는 고아원에 끌려간 순간 잊었다. 동정의 눈길에도 무관심했다. 남의 시선 받는다고 지고 있는 무게가 옅어지거나 더해지지 않는 법이었다. 덕분에 사장은 정국이 가게에서 먹는 저녁메뉴를 업그레이드시켰고, 다른 아르바이트생들은 회식자리에서 쉽게 정국을 빼주었다.
"아 그리고 내일은 휴가야."
"휴가요?"
"어, 우리 아버지 제사거든. 푹 쉬어. 안 그래도 힘든데. 식겠다. 어서 집에 가지고 가."
"네, 사장님도 집에 조심이 들어가세요."
예의 바른 정국은 허리접어 인사했다. 술집사장은 정국의 완벽한 뒷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가게 돈줄. 돈줄이 건강해야 가게가 사는데. 술집사장은 당분간 정국에게 음식을 들려 집에 보내야겠다 다짐했다. 정국이 들었다면 참지 못하고 입꼬리가 하늘로 승천할 생각이었다.
***
지민은 정국이 아침에 나가면 혼자 집에서 시간을 때웠다. 아 지루해. 세상의 무료함이란 무료함은 다 모아놓은 듯했다. 정국과 얘기하는 시간은 한 시간이 일초 같은데, 정국이 없는 집은 일초가 한 시간이었다. 컴퓨터도 없고 티비도 없다. 할아버지 집 농 가장 깊숙한 곳에 쑤셔 박아 넣은 폰은 당연히 없었다. 다리가 다쳐 밖에 나가지도 못한다. 뒹굴거리거나, 이미 끝마친 집안살림 탐험을 반복할 뿐이었다. 더럽게 시간이 안 간다. 한밤중에서야 정국이 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아직 해도 안 떨어진 문을 자꾸 쳐다보게 된다. 전정국 소환주문을 끝없이 외며 지민이 한참 패션쇼를 펼치고 있을 무렵이었다. 해가 떨어지기 전에 정국이 도착했다.
"전정구욱?!"
"왜 귀신이라도 본 거 같은 얼굴 하고 있어요."
"아직 해 안 떨어졌는데 너 오면 안 되는 거…너 왜 왔어?"
"이제 착각까지 해요? 여기 내 집이거든요? 그쪽이 계속 발 비비고 있으니까 착각하나 본데, 똑바로 봅시다."
"너 일 안가?"
"오늘 휴가에요."
지민은 셔츠 단추를 다 잠그지도 않은 채 정국을 따라다녔다. 잠기지 못한 하늘색 셔츠가 펄럭거릴 때마다 하얀 배가 살랑살랑 드러났다 사라졌다. 좁은 단칸방 안으로 사랑스러운 페로몬이 퐁퐁 뿜어져 나왔다. 오메가가 극도로 기분이 좋으면 나오는 향이었다. 진짜? 진짜? 사장이 너 쉬래? 확인까지 하며 졸졸 따라다닌다. 뭇 알파들이 봤다면 눈 뒤집어졌을 지민을 정국은 파리 쫓듯 손을 휘저어 치워냈다.
"정신 사나우니까 가만히 좀 있으면 안돼요?"
"진짜 안 가는 거지? 중간에 나가고 그런 거 아니지?"
"안 가요, 안 간다니까요. 박지민씨랑 집에 박혀있는다구요."
확답을 받아내고서 지민은 함박웃음을 머금었다. 베실베실 눈꼬리까지 접어가며 좋아했다. 그리고는 뭐하지, 뭐하지 하면서 혼자 바빴다. 정국은 집안을 빙빙 돌며 고민하는 지민에 혀를 찼다. 왜 자기랑 같이 놀 거라고 생각하는 건지. 떡 줄 사람은 생각조차 않는데, 지민은 한 발자국 앞서나가다 못해 전국투어를 하고 있었다.
밖에 나가서 놀자고 할까. 아니면 외식? 아니야, 그건 너무 식상하잖아. 영화? 안돼, 그건 전정국 얼굴이 잘 안보이잖아. 이게 얼마 만에 얻은 기회인데. 그런 어두컴컴한 곳에 가면 말짱 꽝이지. 밝은 곳에서 놀아야 해. 전정국은 뭘 좋아하지. 나를 좋아하게 하려면 내 매력을 보여줄 수 있는 곳으로 가야 하나? 어떻게 해야 하지? 혼자 고민하며 지민은 정국 곁에 딱 붙어있었다. 그러다 정작 원대한 꿈은 밥을 차리는 정국의 뒷모습을 보면서 새카맣게 잊었다. 헤에, 정국이랑 밥 먹는다.
정국은 뒤통수를 강하게 찌르는 시선에 뒤를 돌았다 흠칫했다.
"뭐예요, 왜 그렇게 쳐다보고 있어요?"
"왜, 쳐다보면 안돼?"
"…아니에요. 밥 먹어요."
엄청 수상해서요. 정국은 목까지 차오는 대답을 밀어 넣었다. 혼자서 실실 웃고 있는 폼이 수상하긴 한데 밀어붙일 증거가 없다. 찝찝하긴 했지만 정국은 별일이야 있을까 싶었다. 실상 지민이 정국에게 해를 끼칠 가능성은 만무했다. 물리적으로 힘도 약하고, 금전적으로도 영 쓸모가 없다. 더불어 정국은 지민과 지낸 며칠 동안 지민을 조금씩 파악하고 있었다. 단순하며 솔직하다. 특히나 지나치게 솔직했다. 이런 집에서도 사람이 살 수 있구나 하는 둥 정국의 속에 몇 번이나 불을 질렀다.
"뭐 하는 거야?"
"그림이요."
상을 치운 정국은 오랜만에 종이와 펜을 꺼내 들었다. 몸을 쓰는 운동은 이미 공사판에서도 충분히 했고, 돈이 적게 드는 취미를 찾다 자연스럽게 그림을 접했다. 그리다 보니 나름 적성에도 맞았다. 피자가 먹고 싶은 날에는 종이에 피자를, 치킨이 먹고 싶은 날에는 치킨을. 성냥팔이 소녀 같은 마음으로 한 장 두 장 채우다 보니 점점 실력도 늘어가 재미를 붙였다. 지민은 정국이 들고 온 노트를 보며 입을 떡 벌렸다.
"이거 너가 그린 거였어?"
"왜요. 못 그려서요?"
"아니아니, 너 진짜 잘 그리잖아! 난 누구한테 선물 받은 건 줄 알았는데."
"와 저 지금 좀 놀랐어요."
정국이 감탄 받은 표정을 지었다.
"박지민씨가 립서비스라는 것도 할 줄 알다니…조금은 제가 집주인이라는 자각이 들어요?"
"아니, 거짓말 아니라 너 진짜 잘 그려."
지민은 진심이었다. 집안을 뒤질 때 나온 노트 속 그림은 미술관에 걸려있는 것들과 비슷했다. 점 하나 그려놓고 둘도 없는 예술작품이라며 찬탄하는 사람들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문여사가 좋아하는 탓에 미술관을 꽤나 들락거렸다. 관심이 없어도 눈에 보이니 어느 정도 판단할 수는 있었다. 지민은 온통 먹을 것만 그려져 있는 노트를 들여다보며 감탄했다. 그리고 다른 한 편으로 머릿속이 팽팽 돌아갔다. 엄마한테 정국이 소개시킬 때는 노트부터 가져가야겠다.
"오늘은 뭐 그릴 거야?"
"글쎄요. 어…뭐 먹고 싶은 거 있어요?"
"음식 말고 다른 건 안돼?"
"다른 건 그려보질 않아서 모르겠는데…어떤 거 말하려구요?"
"이거, 이거!"
지민이 스스로 가슴팍을 쳤다. 정국이 미간을 찡그렸다.
"당신 그리라고요?"
"나 말고 이거. 옷!"
올해 S/S 신상으로 나온 구찌 셔츠였다. 무난하게 입을 수 있어 지민이 좋아하는 옷이었다. 뭐 딱히 그릴 것도 없으니까. 정국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국은 집중하면 조용해지는 타입이었고, 말을 걸어도 단답으로 대꾸하는 정국에 심심해진 지민은 펜을 들고 기웃거렸다.
"나도 그려도 돼?"
"알아서 하세요."
지민은 하얀 종이를 두고 고민했다. 그림을 그리겠다 펜을 잡은 게 처음은 아니다. 문여사의 꿈 아래 미술선생을 부른 적이 있다. 미술선생이 하라는 대로 해도 움직여주지 않는 손에 금방 때려 치긴 했지만 배우긴 했다. 지민에게 미술이란 미지의 영역이었다. 선을 그으라 해서 그었고, 똑같이 따라 그렸는데 다르다니. 시간낭비다. 거기다 더해 가만히 앉아 무언가를 하는 건 지민의 성미에 안 맞았다.
뭐 그리지. 펜을 물고 고민하던 지민은 금방 또 눈 앞의 정국에 시선을 뺏겼다. 그림 그리는 것도 잘 어울리네. 잘 생겼다. 지민은 그림은 뒷전으로 미루고 정국을 구경했다. 주변에서 가장 잘 생긴 건 김태형이 전부인 줄 알았는데, 세상은 넓었다. 코도 높고 눈도 예쁘다. 비추고 있는 거라고는 형광등이 고작이건만, 눈동자는 별이 박힌 것처럼 반짝거린다. 정국은 남자답게 예뻤다. 지민은 저도 모르게 실실 웃음을 흘렸다. 2세 걱정은 안 해도 되겠네.
"아!"
문득 지민이 생각난 듯 박수를 짝 쳤다. 그리고는 펜을 들고 도화지에 그림을 슥슥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정국은 정국대로 지민을 구경하고 있는 중이었다. 옷을 그려달라 하니, 당연하게도 옷을 입고 있는 사람을 구경할 수 밖에 없었다. 스스로를 그려달라고 하면 그리는 동안 계속 눈이 마주칠 테니 거절하려 했건만, 옷이라 하니 괜찮다 느꼈다. 그리면서 정국은 새삼스러웠다. 선이 이렇게 얇았었구나. 매번 자기 전 펑퍼짐한 후드티에 가려져 몰랐다. 첫날은 잘 볼 새도 없었고, 관심도 크게 두지 않았다. 쭉 뻗은 목선을 응시하던 정국의 시선이 풀린 윗단추 쪽으로 옮겨갔다. 하얗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밭 같았다. 만지면 만지는 대로 자국이 남을 색이었다. 오메가라 그런가. 지민을 관찰하던 정국은 불현듯 흠칫하고는 머리를 휘저었다. 저 식충이에게 감상이라니! 집에서 밥만 먹고 뒹굴거리는데 혈색 좋은 건 당연하지.
화제를 전환하듯 정국이 펜을 내려놨다.
"다 그렸어요?"
"아니, 아직."
"뭐 그리는데요?"
"비이밀."
지민은 꽤나 열심히 그리는 중이었다. 미리 보여줄 수 없다며 종이도 팔로 가렸다. 정국은 가만히 집중하는 지민이 신기했다. 뭘 그리길래 떠들지도 않아. 슬쩍 목을 빼 구경하려는데 어떻게 안 것인지 지민이 파드득 몸을 더 웅크리며 종이를 가렸다.
"뭔데 그래요."
"잠깐만 기다려봐. 마무리 중이란 말이야."
"엄청 대단한 거라도 그려요?"
"이런 건 세상에 둘도 없을걸."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만만한 지민의 표정이 안 좋아졌다. 중얼중얼 혼잣말도 했다. 이게 아닌가, 아씨 왜 안 되지, 이거 맞는데. 그림과 한참이나 씨름한 지민은 결국 선언했다.
"…안 보여줄래."
"괜찮아요, 저도 어차피 못 그리는데요."
"어디 봐봐."
지민은 정국이 내민 그림을 보고 더 흙빛으로 변했다. 무슨 디자이너 지망생의 그림 같았다. 하늘색 셔츠를 사진으로 찍어놓은 듯하다. 정국의 그림 한번, 자신의 그림 한번. 번갈아 가며 쳐다 본 지민이 우울하게 말했다.
"난 안 보여줄래. 이만 끝내자."
"왜요, 봐봐요. 저도 보여줬잖아요."
"싫어."
정국은 쓸데없는 승부욕이 돋아났다. 꽁꽁 싸매며 노트를 사수하는 손을 보자니 꼭 보고 싶은 욕구가 꿈틀거렸다. 아끼는 꿀단지일수록 더 훔치고 싶어지는 법이었다. 짧은 손가락이 온 힘을 다해 가리는 걸 떼내고 싶었다.
"나 지울 거야. 지우개 어디 있어?"
"저쪽이요."
"앞으로 다시는 그림 안 그릴 거야."
"그림 안 좋아해요?"
"유치원생이 그린 것 같은 그림 그려놓고 세기의 작품이니 뭐니. 하나도 못 알아들을 말만 하…아, 안돼!"
말을 붙이고 지민이 방심한 사이 정국이 냉큼 종이를 빼앗았다. 정국이 일어나 공중에 팔을 들어올렸다. 사수하려 지민이 팔을 뻗었으나 요령 좋게 든 정국을 따라가지 못했다. 한 팔로는 지민이 다가오지 못하게 저지했다. 힘 좋은 정국은 무리 없이 가뿐하게 지민을 막았다.
"내놔! 아 보지마!"
"괜찮다니까요."
"안돼!"
밑에서 소리치던 지민은 이내 힘이 빠져 바닥에 털푸덕 주저앉았다. 이미 다 봤을 것이다. 아 쪽팔려. 지민은 창피함에 무릎 사이에 고개를 묻었다.
정국은 그림을 보고 고민에 빠졌다. 확실히 잘 그렸다고 할 수 있는 그림은 아니었다. 쭈글쭈글했고, 엉망으로 그린 그림은 중학교에서 실력이 멈춘 듯 했다. 찌그러진 눈, 직각인 코, 일자 입술. 그나마 사람의 형상이었다. 지민이 아래서 툴툴거렸다. 너는 힘으로 다 해결하는 경향이 있어. 그거 예전 같으면 폭군이야, 폭군. 정국은 사뿐하게 투정을 무시했다.
"이거 혹시…저예요?"
"…내가 보지 말라고 했잖아."
"……."
"아씨, 아 진짜 잘 그리고 싶었는데 손이 안 움직이잖아. 이건 어쩔 수 없는 거야. 그리고 나는 이런 거 그릴 필요 없다구. 안 그래도 나처럼 뛰어난 애가 그림까지 잘 그려봐. 그럼 사람들이 얼마나 질투하겠어? 이게 다 인류의 형평성을 위한 길이야."
정국은 그림과 쭈그려 앉아 얼굴도 못 드는 지민을 동시에 놓고 쳐다봤다. 부끄러워 일부러 삐죽이는 게 조금, 아니 제법 귀여웠다. 셔츠 깃 사이로 보이는 뒷목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다. 정국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풉, 박지민씨 이거, 잘, 하하, 잘 그렸어요. 아 진짜 웃기네. 세상에 둘도 없긴 하네요."
지민은 난데없는 웃음소리에 놀라 고개를 번쩍 들었다. 정국이 웃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크게 허리까지 접어가며. 정국이, 웃었다. 어이없다는 헛웃음 아니면 찡그린 무표정이었는데, 제 앞에서 웃고 있었다. 지민은 멍해지는 기분이었다. 환하게 웃는 정국의 모습이 하나하나 사진으로 찍혀 머릿속으로 들어온다. 들어오다 못해 아예 온 머릿속을 장악했다. 그리고 동시에, 콩닥콩닥 심장이 뛰었다. 지민은 떨리는 가슴을 붙잡으며 물었다.
"…잘 그렸어?"
"귀여운데요?"
그린 사람과 그려진 그림을 조합하니 귀여웠다. 큭큭거리며 정국은 기념으로 잘 간직하겠다며 종이를 노트 사이에 끼웠다. 그, 그래. 어설프게 답한 지민은 계속 떨리는 가슴을 붙잡느라 분주했다. 그림은 잊어버렸다. 기분 좋게 울리는 심장박동이 낯설면서도, 좋았다.
지민은 혼란에 빠져들었다. 나, 나 왜 뛰어? 심장 왜 뛰지? 새삼스럽게 왜 뛰는 거야. 정국을 보면 입에 웃음이 걸리고, 기분이 좋아진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다 같이 하고 싶었고, 조금 더 알고 싶긴 했다. 그러나 이리 심장이 뛴 적은 없었다. 정국이 뭐가 특별해진 건가 쳐다봐도 정국은 그대로였다. 히트사이클이 올 때가 돼서 그런가? 지금 주기 아닌데. 초등학생한테 물어도 나올 답을 지민은 내내 끙끙거리며 고민했다. 두근거림은 정국이 불을 끄는 순간까지도 계속 됐다.
"왜 또 뭐가 마음에 안 들어요?"
"그건 아닌데…."
그래요? 정국은 더 붙잡지 않았다. 지민은 곧장 정국이 관심 줬다는 사실이 좋아 고민을 까먹었다. 어차피 고민할 필요는 없다. 전정국은 자신과 결혼하게 될 것이고, 딱히 그 원인이 뭔지 몰라도 됐다. 어찌됐든 옆에 있는 것이 중요한 거 아닌가.
지민은 늘 그렇듯 정국의 등에 착 달라붙었다. 집주인을 몰아내고 베개는 지민의 차지였다. 정국은 그러려니, 했다. 집이 좁아 어차피 붙기 마련이었다. 며칠밤을 이 상태로 자다 보니 적응이 되기도 했다.
"아 맞다. 정국아."
"왜요."
"우리 섹스하자."
이 중요한 걸 그냥 넘어갈 뻔 했다. 제일 중요한데. 단어와 다르게 목소리가 너무 깔끔해서, 정국은 순간 제 귀가 잘못된 줄 알았다.
"뭐라고요?"
"첫날밤 보내야지!"
"헛소리할 시간에 잡시다."
박지민은 왜 하루라도 조용히 넘어가는 날이 없는 걸까. 정국은 다시 시작된 지민의 헛소리에 그저 눈을 감았다. 며칠 시달리고 깨달았다. 상식에 맞지 않는 소리에 반박하면 지민은 더 화르륵 불타올랐다. 대충 넘어가면 지민은 왜 말하지 않냐 아우성이지만, 무논리에서는 벗어났다. 그러나 평소와 달리 지민은 이번만큼은 쉽게 넘어갈 생각이 없었다. 지민이 정국의 위로 올라탔다.
"윽, 박지민씨 비켜, 으븝!"
정국이 몸을 트는 찰나, 지민이 그대로 입술을 박았다. 갑작스럽게 양손으로 얼굴을 부여잡고 꾹 눌렀다. 정국은 이게 무슨 상황인지 멍했다. 상황파악이 되질 않는다. 매번 하는 헛소리이려니 하고 넘겼는데, 입술이 맞붙어 있다. 거기다 그 감각이 너무 생소해서, 정국은 딱딱하게 굳었다. 스물네살 인생 동안 애인도 없었고 당연히 스킨십도 없었다. 등짝에 지민이 붙어있는 것조차 낯설었는데, 입술은 더한 것이었다. 어디서인지 달큰한 향도 나는 것 같았다. 깔끔하면서도 사랑스러운 향이었다.
패기롭게 입술을 붙인 지민은 얼마 안가 당황하고 말았다. 히트사이클은 매번 약으로 때우고 파티 한번 참여 안 한 지민이 능수능란 할 리가 없었다. 혀만 넣고 어찌할 줄 몰라 우물쭈물거렸다. 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다들 말했다. 알파랑 오메가면 본능적으로 하게 된다고. 때문에 지민은 간단할 줄 알았다. 알아서 몸이 움직이겠지, 하는 막연한 자신감이 있었다. 그런데 막상 입술을 붙이니 심장은 가빠지고 방법은 모르겠다. 지민이 하는 행위는 키스보다는, 매 밤마다 등에 찰싹 붙은 행동을 입술로 바꾼 것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차라리 김태형이 그렇게 하자 조를 때 한번만이라도 해볼걸 하는 후회 마저 밀려왔다.
지민이 방황하는 사이, 정국이 지민의 어깨를 잡아 밀쳤다.
"악!"
굴러간 지민이 벽에 등을 박았다.
"야! 아프잖…."
지민은 말을 더 이을 수 없었다. 더없이 딱딱하게 굳은 정국의 표정 탓이었다. 여지껏 본 얼굴 중 가장 화가 난 얼굴이었다. 아려오는 등은 곧장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 아까는 분명 그렇게 뛰었는데, 화난 정국을 보자마자 가슴 한쪽이 막힌 듯 텁텁해졌다. 지민은 무슨 말이라도 꺼내려 입술을 달싹거렸다.
"난, 난…."
"……."
"그러니까, 나는…."
정국은 지민을 노려보다 그대로 방을 나섰다.
"전정국!"
지민이 따라붙었지만 아직 완쾌하지 못한 다리로는 무리였다. 얼굴 앞에서 문이 쾅 닫힌다.
"전정국…."
지민은 그날 밤 처음으로 혼자 잠들었다. 정국의 집에 오기 전에는 늘상 혼자 잤었는데, 전에는 느끼지 못할 만큼 차갑다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