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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럭키 스트라이크 03

by 토페 posted Sep 21,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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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볼빨간 사춘기- 심술>












 정국은 아침을 한숨으로 시작했다. 등에 달라붙어있는 온기는 지난 밤과 똑같았다. 언제부터인지 허리에 손까지 당당하게 올려놓고 자고 있다. 정국이 짜증난 얼굴로 지민을 옆으로 밀자 지민이 데굴 반대쪽으로 굴러갔다. 그러더니 어미 찾는 새끼강아지마냥 실눈만 뜨고선 끄응거렸다.


"허리 아파…."


 침대생활만 하다 방바닥에서 자니 영 몸이 배겼다. 정국은 거기서도 얼척이 없었다. 누가 허리 아프라고 했냔 말이다. 척 보기에도 지민은 부잣집 아들이었다. 티비도 없고 심지어 폰 마저 폴더폰인 정국이 봐도 알 수 있을 수준이었다. 저런 철면피라면 졸부 수준은 되겠지.
 바닥에 누워 연신 허리가 아프다 찡찡거리던 지민은 마지못해 일어나 화장실로 절뚝절뚝 걸어 들어갔다. 정국은 평소 습관대로 밥을 차리다 고민에 빠졌다. 마트 마감시간에 쓸어온 즉석밥을 하나 더 깔 것인가, 말 것인가. 정국이 즉석밥을 먹는 것은 주말뿐이었다. 알바장소에서 끼니를 해결하다 보니 밥은 좀체 집에서 챙겨먹질 않았다. 원래라면 알바 도중 주어지는 우유 한 팩으로 떼우겠지만, 오늘은 사정이 달랐다. 불청객에게 밥을 대접해 내놔야 하는 게 퍽 마음에 안 들었지만, 사람 놔두고 혼자 먹자니 무안했다.


"부잣집 아들인데 숙박비 정도는 나중에 청구해도 되겠지 뭐."


 정국은 즉석밥 두 개를 냄비에 넣고 끓였다. 씻고 나온 지민은 의외로 차려진 밥상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옷투정은 그리하면서 신기하게 반찬투정은 잘 하지 않았다. 남준이 꼽는 유일한 지민의 장점이었다. 지민은 앞에서 따끈따끈 김 나는 즉석밥을 멀뚱멀뚱 바라보다, 흘금 정국이 즉석밥 껍질을 벗기는 것을 보곤 따라했다. 쉽네. 지민이 혼자 뿌듯하게 웃었다.


"그쪽, 진짜 안 나갈 거예요?"
"응. 너랑 결혼할거야."


 답도 없다. 온갖 불행한 사건사고에 높아진 정국의 인내심이 흔들렸다. 밥맛이 뚝 떨어지더라도 정국은 숟가락을 들었다. 당이라도 보충하지 않으면 뒷골이 당길 것 같았다.


"근데 그쪽 왜 반말해요?"
"응?"
"왜 반말하냐구요."


 딱히 너한테만 한 건 아니고 항상 반말했는데. 평소 생활습관 그대로였다. 이름을 부르는 것보다 야, 하고 부르는 게 익숙했고, 아버지뻘의 나이사람에게도 스스럼없이 말을 놨다. 막 나가도 아무도 뭐라 못했다. 지민이 사람같이 대우해주는 건 피가 섞인 가족들과 책 잡히면 짖어댈 귀찮은 사람들뿐이었다. 지민은 정국에게 사실을 숨기기로 했다. 어쩐지 정국에게 제대로 털어놓으면 안 그래도 골칫덩이라는 눈으로 쳐다보는 눈빛이 한층 더 깊어질 듯했다.


"너 스물넷이잖아. 나 스물여섯이야. 그러니까 당연히 반말하지."
"뻥 치지 마요."
"진짜야!"
"가출에, 거짓말에, 부모님이 이러는 거 알고는 계세요?"
"야! 진짜라니까!"


 완전히 가출청소년 취급이었다. 지민은 숟가락까지 탁 놓고는 강력하게 스물여섯임을 주장했다. 나 진짜 스물여섯이라니까? 내가 아무리 잘생겼다지만 그렇게 안 믿으면 곤란하거든? 불신의 눈초리만 보내는 정국에 지민은 와 미치겠네, 하며 주섬주섬 가방을 뒤져 지갑을 꺼냈다. 하얀 손에는 주민등록증이 들려있었다.


"자! 됐지!"


 정국은 의기양양해하는 지민에 말을 잃었다. 진짜였네. 놀람과 동시에 다른 생각이 반사적으로 떠올랐다. 스물여섯 먹고 남의 집에 찾아와서 눌러 붙고 있는 거야? 눈치 따위는 다 팔아먹은 지민의 굵은 신경줄이 놀라웠다.


"…어쨌든, 오늘 나가요. 내가 분명히 말했어요."
"질리지도 않아? 그 얘기. 싫어."
"오늘 중간에 집 들려서 확인할 거예요. 그때도 있으면 힘으로라도 쫓아낼 테니까 그렇게 알아요."


 정국은 일방적으로 통보하고 집을 나섰다. 진상 중의 진상 지민은 그러거나 말거나 태연하게 잘 다녀와, 하고 손까지 흔들었다. 


 정국은 일하는 내내 집에 신경이 쏠렸다. 벽돌을 위로 나르다 엉뚱한 층에 내려 동료들이 별일이라며 신기한 표정을 지었다. 젊은 나이로 공사판 알바를 뛰는 정국은 공사판의 에이스였고, 실수는 거의 전무했다. 일꾼들은 우리 정국이도 사람이었다며 허허 웃었다. 어설프게 따라 웃었으나 정국은 머릿속이 바빴다. 집이 부디 비어있기를 비나이다, 비나이다. 그러다 정국은 문득 허탈했다. 건물주가 월세 밀린 하숙인 방 빼라는 심정이 이럴까. 십평 남짓한 집만 덜렁 가지고 있는 자신이 왜 이런 심정을 느껴야 하는지 모르겠다.
 일을 마치고 샤워장에서 나오기 무섭게 정국은 집으로 직진했다. 저녁 아르바이트까지 남은 시간은 고작해야 한 시간 반이다. 집의 상태를 점검하고, 아니 보나마나 지민은 달라붙어 있을 것이다. 남은 시간 동안 정국은 지민을 쫓아내기로 마음 먹었다.


"어! 빨리 왔네!"


 후드티 차림으로 뒹굴거리던 지민이 일어났다. 활짝 피는 얼굴이 꼬리치는 강아지를 닮았다. 심심해 죽으려는 찰나였는데, 밤에나 올 것이라 생각했던 정국이 들어오자 기뻤다.


"내가 말했죠. 쫓아낸다고."
"나 환자인데?"


 지민이 붕대 감긴 제 다리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정국은 고개를 휘휘 저었다. 여기서 말려들면 안 된다. 지민과 말을 섞으면 섞을수록 답이 사라져갔다. 정국은 지민을 들쳐 업고 짐가방까지 손에 들었다.


"야, 야! 전정국!"


 불청객을 쫓아내기 위해 없던 힘도 솟았다. 집을 사수해야 한다는 강렬한 의지로 정국은 단숨에 계단을 내려와 버스정류장까지 지민을 날랐다. 가는 동안 지민이 몸을 틀며 내려달라 발악했지만, 정국은 코웃음 쳤다. 더 커질지 모르는 불행을 이만 떨쳐내야 했다. 안녕하고 각자 갈 길로 가는 게 상책이었다.


"씨, 너…!"
"숙박비는 안 물게요. 그냥 가세요. 더 이상 그쪽 뒤치다꺼리 못합니다."


 툭 정국이 짐가방을 지민의 발밑에 내려놨다. 정국은 어서 지민을 떨궈내고 싶었다. 안 좋은 일이 발생하면 이젠 그러려니, 하고 납득하던 정국도 무단침입에는 참지 못했다. 쌀값이 얼마고, 물값이 얼마인가. 한 사람 몫에 들어가는 생활비를 벌려면 알바를 늘려야 했다. 냉큼 지민을 버스정류장에 버려두고 정국이 돌아섰다. 껌딱지 지민이 금방이라도 달라붙을 것 같았다.


"전정국…! 앗!"


 지민은 정국을 쫓아가려다 아릿한 발목에 멈춰 섰다. 고장 난 발목으로 힘 좋은 정국을 따라잡는 건 무리였다. 저를 가뿐히 업고 계단까지 순식간에 돌파한 정국을 상대로 지민은 게임이 되지 못했다. 쟤는 대체 왜 내가 결혼하자는 데 싫대. 지민이 모양 좋은 입술을 잘근 씹었다. 내밀 무기가 마땅히 없었다. 몰래 나온 것이라 한울그룹이라는 이름도 빌리지 못하고, 정국이 베타라 페로몬도 통하지 않았다.
 계획에 없는 일이었다. 정국이 자신을 거부하는 건. 더불어 더 자존심상하는 건 정국이 저렇게나 자신을 거부하는데, 생각보다 정국이 지민의 마음에 들었다는 점이다. 아무리 급하다 해도 김태형보다 후진 놈과 결혼할 생각은 없었다. 만나본 정국이 형편없으면 돌아갈 의향도 없지 않아 있긴 했다. 하지만 정국은 하루 만에 지민이 정한 합격선을 웃돌았다. 업혔을 때 넓은 품도 좋았고, 붕대를 감아주는 섬세함도 좋았다. 정국을 조금 더 지켜보고 싶었다.
 초조한 지민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버스정류장에는 사람이 많았다. 후진 동네에는 버스정류장이 몇 없었고, 언제나 사람들로 복닥거렸다.


"아!"


 위급상황에 강한 지민의 머릿속으로 반짝이는 아이디어가 스쳤다. 이래도 너가 안 올 수 있나 보자. 지민은 단단히 작정했다.


"혀엉! 내가 잘할게! 나 버리지마 형! 혀엉!"


 지민이 유감없이 연기력을 발휘했다. 무료하게 버스정류장에 서있던 사람들은 터진 울음에 관심을 모았다. 이어폰을 끼고 있던 사람도, 의자에 앉아 기다리던 노인들도 서있던 대학생들도 지민을 쳐다봤다. 그건 정국도 마찬가지였다. 놀란 것이 아니고, 그 당당하고 오만한 목소리가 외치는 말 때문이었다. 형? 누가 형이야. 지민은 오늘아침 당당히 제게 민증까지 들이밀며 자신이 스물여섯이라 증명했다.


"형, 나 이제 앞으로 형 귀찮게 안 할게. 지민이가, 지민이가 이제 밥두 조금 먹구, 설거지도 잘 하구, 다 잘 할 테니까. 난 형 밖에 없단 말이야. 형 없으면 갈대두 없어."


 박사장 앞에서 갈고 닦은 연기력이 빛을 발했다. 울먹거리는 눈동자에 쭈그려 앉기까지 하니 금상천화였다. 의상도 하필 정국마저 어려 보인다 인정한 후드티였다. 사람들은 지민을 놀란 얼굴로 바라보다, 자연스럽게 지민이 바라보고 있는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 끝에 정국이 있었다. 정국은 쏠린 시선에 당황해 팔을 휘저었다.


"아, 아니에요. 저."
"정국이 형. 미안해. 지민이가 잘할게요. 허엉, 형. 히트사이클 와도 참을게요. 약 사달라고 안 할게요."
"아니, 저 진짜…바, 박지민씨?"
"정국이 혀엉."


 정국이 경악으로 입을 떡 벌렸다. 미치고 팔짝 뛸 일이었다. 형? 혀엉? 어린 취급에 발끈하던 게 불과 아침 일이었다. 시간이 지나니 정국이 아무리 부정해도 사람들의 의심의 눈초리는 깊어만 갔다. 정국은 억울했다. 왜 내 말은 안 믿는 거야. 아르바이트 현장에서 성실함이 무기인 정국은 정직함으로 밀린 적은 처음이라 가슴을 팍팍 쳤다. 아 몰라. 정국은 주머니에 손을 푹 꽂고 걸음을 빨리 했다.


"형! 가지마!"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목소리가 애달프기 그지없었다. 지민이 급하게 일어나 정국을 따라잡으려 했다.


"아윽!"


 비틀거리며 지민이 휘청거렸다. 세상에. 지켜보던 사람들의 인상이 무섭게 굳어갔다. 버스정류장에 머물던 사람들의 머릿속에 공통적으로 한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동생이 아프니까 버리는 거구만. 삼류드라마 안의 출연주인공은 정국과 지민이었다. 이미 정국은 동생을 내다버린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이고, 지민은 다친 불쌍한 동생이었다. 보다 못한 사람 중 한 명이 지민이 짠 드라마에 끼어들었다.


"진짜 너무하네! 이봐요!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지민은 속으로 씨익 웃었다. 정확히 대본대로 읊어주었다. 정국이 움찔 걸음을 멈췄다. 한 사람이 나서자, 다른 사람들까지 동참했다. 용감한 대학생 한 명은 정국의 어깨까지 붙잡고 돌려세웠다. 장바구니를 들고 있는 덩치 좋은 여성도 거들었다.


"이보세요!"
"…네?"
"아무리 사정이 어렵다고 해도 가족을 버리는 게 어디 있어요? 게다가 오메가면 길에서 더 위험한 거 몰라요?"
"아니, 전 저 사람과 가족이 아니…."
"정국이 형, 흑 내가 미안해."


 대학생이 부정하는 정국을 험악하게 눈짓했다. 현장을 지켜보던 노인들도 요즘 세상이 어찌 돌아가는지 모르겠다며 혀를 쯧쯧 찼다. 울상인 지민. 아우성치는 사람들. 정국은 제가 외치고 싶은 말이었다. 세상이 대체 어찌 돌아가는 건지 모르겠다. 순간적으로 지민의 뒤로 꼬리 아홉 개가 보이는 듯했다. 거봐, 나는 안 돌아갈 거라고 했지? 사악하게 웃으며 속삭이는 지민의 환청까지 들린다.


"세상 사는 게 힘들어도 후회할 짓 하지 맙시다, 우리."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아니, 저는, 그. 정국이 입만 떼면 지민의 울음소리가 심해져 갔다. 모조리 지민에게 속아넘어갔다. 정국은 사극에서 모함 받아 사약 한 사발 들이키라는 명을 받은 사람처럼 허한 표정을 지었다. 지민은 절뚝이며 가방까지 들고 정국에게 다가와 손을 잡아왔다. 쿨쩍이며 지민이 웃는 표정을 짜냈다. 사람들은 못난 형을 위해 동생이 최선을 다해 웃는다 생각했다.


"형, 집 가자."


 졌다. 지민의 완판승이었다. 정국은 제 손으로 다시 지민을 집에 데려다 놓고, 저녁 아르바이트를 가야만 했다. 아르바이트는 아직 가지도 않았는데 기가 몽땅 빨린 느낌이었다.






***








"왔어?"


 유달리 퀭한 얼굴로 집에 들어온 정국은 현관으로 쪼르르 달려 나오는 지민에 한숨을 쉬었다. 사실 현관이라고 할 것도 없고, 일어나 열 발자국 정도 걸으면 신발장이었다. 정국이 피곤한 안색으로 옷을 벗고 있는 동안 지민이 쫄랑쫄랑 절뚝이며 따라 붙었다.


"일 다녀온 거야? 으, 술 냄새."
"……."
"담배냄새도 완전 많이 나. 너두 담배 피워? 일 할 때 힘들지 않아?"
"……."
"너는 집에 있을 때 뭐해? 아무것도 할 거 없어서 심심해 죽는 줄 알았어. 근데 오늘 낮에 먹은 그…그 이상한 밥그릇에 담긴 건 어떻게 요리하는 거야? 찬장 뒤져보니까 나왔는데 아침이랑 다르게 안 따지더라. 차가웠어."


 집까지 뒤졌다 술술 실토한다. 싸우자는 거냐. 지민이 옆에서 종알거렸지만, 정국은 기운이 빠져 응수할 목소리마저 내지 못했다. 정국이 침묵하는 가운데, 지민은 어딘지 마음이 불안했다. 정국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심장이 쿡 쑤셨다. 박지민을 불안하게 하는 건 흔한 일이 아니었다. 가지고 싶은 것은 다 가졌고, 뜻대로 안 되는 일은 세상에 없었다. 거지같은 결혼은 어른들이 정한 일이니 그렇다 치고, 사람 하나에 불안해진 건 처음이었다. 뭐라도 한 마디라도 해줬으면 싶다. 따라붙어 아무리 말을 걸어도 잠잠하다. 지민을 완전히 무시한 정국이 이부자리를 필 때였다.


"화 났어?"


 이제 알았니. 정국은 단순하디 단순한 답을 기어코 묻는 지민에 무시작전을 실패했다. 지민은 진짜 모르는 목소리였다.


"당신이라면 안 나겠어요?"
"…넌 내가 싫어?"
"네."


 아주 단칼이었다. 지민은 인상을 찡그렸다. 아까보다 더 큰 게 가슴팍을 쿡쿡 들쑤셨다. 저 싫다는 소리를 한두 번 들어본 게 아닌데, 유난히 반응하는 심장이 이상했다. 우성오메가라는 이유만으로도 여타 다른 오메가들은 지민을 싫어하곤 했다. 그때마다 인생의 패자들이 열등감에 차 내뱉는 헛소리라 생각하고 무시했지, 이런 알싸한 감정을 느낀 적은 없었다. 오늘 너무 꼴사나운 모습을 보여서 그런가. 지민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럼 넌 뭐 좋아하는데. 그거 내가 줄게."
"…준다고요?"
"응. 너 가지고 싶은 거 다 줄 수 있어."


 지민은 박사장의 가르침을 떠올렸다. 지민아, 자고로 일이 안 풀릴 땐 미리 하나를 주는 게 중요하단다. 그리고 나중에 세 배로 뜯어오면 되는 거야. 그때를 위한 한 보 후퇴인 거지. 머리를 쓰다듬으며 박사장은 강조했다. 꼭 준 거보다 더 뜯어야만 한다, 알았지 우리 강아지. 지민은 하나를 내주고 정국을 아예 통째로 받아갈 작전이었다.
 정국은 지민의 꿍꿍이를 파악하려 눈을 가늘게 떴다. 사기인가. 애초 정국의 관점으로 지민이 꾸준히 주장하는 결혼은 얼토당토 않는 말이었다. 연기까지 하며 눌러 붙은 지민에게 의심마저 들고 있었다. 잘 사는 집이 아니라, 망해가지고 집이 없어 자신의 집을 찾은 건 아닌지. 생각해보니 짐가방도 저리 클 이유가 없었다. 정국이 제발 좀 나가라 하는 심정으로 툭 뱉었다.


"돈이요."
"돈?"
"알고 있잖아요. 저 빚 있는 거. 돈 좋아해요. 그것도 아주 많이. 그리고 양심적으로 남의 집에 묶고 있으면 생활비 보탤 돈 내는 건 당연한 거 아니에요?"
"좋아. 줄게, 돈. 그까짓 돈쯤이야."


 지민은 흔쾌히 수락했다. 뭐지, 망한 집 자식이 아닌가. 정국이 살짝 놀라 바라보는데, 지민이 주섬주섬 종이를 찾아왔다. 정국이 나간 동안 온 집을 이 쑤시듯 돌아다닌 터였다. 어차피 나랑 결혼하면 이까짓 거 발에 채일 텐데. 궁시렁거리며 지민은 또박또박 종이에 뭔가를 쓰고는 싸인까지 휘갈겨 넣었다.


"자. 하룻밤에 한 개. 어때?"
"…이게 뭐예요?"
"돈."
"지금 장난 쳐요?"


 정국이 종이를 바닥에 패대기 쳤다. 망한 집 자식이 맞았다. 지민이 돈이라고 내민 종이는 수표도 아닌, 그저 말 그대로 종이였다. 천이라는 글씨와 박지민 이름, 그리고 싸인. 그게 전부였다. 어디 소꿉장난이라도 하자는 줄 아나. 게다가 종이로 내민 돈조차 지민의 입장에선 천 만원이었지만, 정국의 눈엔 천원으로 보였다. 내 혈압 다 올리고서 천원? 빡친 정국이 종이를 날리자 지민이 바락 마주 외쳤다.


"뭐야! 왜 버려! 돈 줬잖아!"
"이봐요, 박지민씨. 당신 눈에는 이게 밖에 나가서 쓸 수 있는 돈으로 보여요? 거지한테도 이런 거 주면 화내요."
"진짜 돈 맞거든? 나중에 우리 집에 가져가면 바꿔줄 거야. 김비서한테 내가 말해놓을게."
"전 나중 필요 없어요. 약속 같은 거 못 믿어요. 지금 당장 쓸 수 있는 돈으로 주세요."
"지, 지금은 안돼."


 카드는 쓸 수 없다. 썼다간 위치를 발각되고 말 것이다. 준비성 없는 지민은 옷만 덜렁 들고 왔고, 현금을 뽑아온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못했다. 애초 받들어지는 거에 익숙해 도착하면 정국이 알아 모실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정국의 눈초리가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변했다. 지민은 억울해 강력하게 주장했다.


"진짜야! 진짜라니까! 전화 한 통 하면 이 집 가득 채우고도 남을 돈 가져올 수 있어! 나 진짜 돈 많아!"
"그 거짓말 누가 믿어요."


 지민이 길길이 날뛰었다. 와 나 억울해! 억울해! 날 때부터 돈으로 깔린 방석에서 자란 금수저 지민은 처음 받는 취급이었다. 지민이 또 온 동네를 깨울 듯 설치자, 위기감을 느낀 정국은 지는 척 넘어갔다.


"그럼 전화해 봐요. 김비서인지 뭔지한테 시켜서 가지고 오라 해요. 보면 믿어줄게요."
"핸드폰 놓고 왔어."
"내 꺼 빌려줄게요."


 정국이 폰을 내밀었다. 요즘 시대에는 찾아보기도 힘든 폴더폰이었다. 공장주인이 자신이 폰을 바꾸면서 선물해준 폰이었다. 알뜰살뜰 정국은 기스 하나 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폰을 사용하고 있었다. 통화비가 아까워 절대 남에게 전화는 걸지 않았다. 아르바이트에서 긴급한 일이 있을 때 받는 용이었다. 전기세가 아까워 배터리 충전도 일주일에 세 번만 했다. 지민은 정국의 폰을 받아들고 당당하게 폴더를 젖혔다.


"나 거짓말 같은 거 절대 안 치거든!"


 버스정류장에서 대형 거짓말을 친 건 생각도 하지 않았다. 제트기라도 살 기세로 지민이 숫자판을 눌렀다. 010.


"공일공! 공일공…! 공일…공…."


 뭐, 뭐였지. 남준의 번호가 뭐인지 기억이 안 난다. 지민이 알고 있는 번호는 가족들의 번호와 김태형의 번호뿐이었다. 남준은 늘 곁에 있어 외울 필요가 없었고, 김태형은 하도 철거머리같이 들러붙어 전화를 씹기 위해 외운 것이었다. 그리고 외우고 있는 사람 모두 제 위치를 알리면 안 되는 사람들이었다.


"삼이었나…삼…."
"……."
"사…?"


 폴더폰을 쥔 지민이 흘끔 정국을 올려다봤다. 자신이 생각해도 어이없어 지민을 절로 정국의 눈치를 살폈다. 망했다. 지민의 예상대로 정국은 확신했다. 이 자식은 망한 집 자식이 분명하다.


"…내놔요."
"씨이…나 진짜 돈 많은데…."
"저 내일 일 가야 되거든요? 돈 없으면 잠이라도 편하게 자게 해주실래요?"
"난 억울해."


 정국이 대꾸도 하지 않고 누웠다. 진짜 많은데, 진짜 많은데. 꿍얼거리면서도 지민은 증명할 방도가 없어 시무룩하게 잘 준비를 했다. 시간이 늦긴 했다.


"나중에 네 계좌에 다 보내놓을 거니까 그때는 인정해야 할 걸."
"거지한테 알려줄 계좌 없어요."
"네 계좌 이미 알고 있는데? 내가 네 주민번호까지 알고 있다는 거 잊지마."
"…잡시다."
"근데 나는 어디서 자?"


 어제는 지민이 먼저 베개를 선수쳤지만 오늘은 정국이 누워있었다. 아무리 둘러봐도 이 집에 베개는 하나뿐이었다. 지민이 빤히 쳐다보자 정국이 냉정하게 답했다. 불청객이 찾을 건 다 찾는다.


"바닥에서 자요."
"뭐? 나 베개 없으면 못 자."
"저도 못 자는데요."
"너 어제는 잘 잤잖아."


 정국은 눈을 감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지민은 칫, 하더니 정국의 품으로 꾸물꾸물 기어들어왔다. 정국이 소스라치게 놀라 벌떡 일어나 앉았다. 스물넷 외길 전정국 인생에서 생명체가 가슴팍 안으로 꼼지락거리며 들어오는 게 여간 낯설었다.


"뭐, 뭐하는 거예요!"
"팔베개 해줘. 베개 내가 양보해줄 테니까. 그 정도도 못 해줘?"


 가지가지 한다. 얘는 대체 뭘 먹고 이렇게 뻔뻔한 걸까. 정국은 또 말싸움을 택하느니 차라리 포기했다. 시간이 늦기도 늦었고, 오늘 박지민과 소모한 정신적 에너지낭비는 여태 한 달간 아르바이트에서 스트레스 받은 것보다 더 컸다. 정국은 짐덩이 지민에게 팔베개를 하느니 바닥에서 자는 쪽을 택했다. 지민이 짜증나 우겼지만 실상은 베개가 없어도 아무렇지도 않았다.


"됐죠? 이제 진짜 자요."


 베개를 내민 정국이 지민과 등지고 눈을 감았다. 어쩐지 아쉬웠지만, 더는 얘기할게 없는 지민도 따라 누웠다. 그러다 한 가지가 불쑥 떠올랐다. 가만 생각해보니 오늘도 섹스 못 했네. 정국을 두드려 깨울까 고민하던 지민은 고개를 저었다. 정국이 진정으로 피곤해 보인 탓이었다. 대신 어제처럼 정국의 등에 찰싹 달라붙어 눈을 감았다. 붙은 온기가 따뜻했다. 그다지 졸린 것도 아니고, 심지어 바닥이었지만 잠이 솔솔 쏟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