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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짐] 야담 08

by 토페 posted Sep 29,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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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100 Days Memory>











 노비의 신분으로 박대감 집에서 생활한지 몇 해가 지났다. 그 사이 윤기는 발끝만 세우면 담벼락너머가 보일 만큼 쑥쑥 자랐다. 모든 것이 커졌다. 키는 한 뼘 넘게 자랐고, 손은 덕대와 비교해도 될 만큼 커졌으며, 힘 역시 쌀 한 가마니는 거뜬히 나를 만큼 세졌다. 이제는 커다래진 몸집에 방까지 혼자 쓰도록 하사 받았다. 희한하게 그에 윤기보다 지민이 눈을 반짝거리며 좋아했다. 그래야겠네. 윤기가 부쩍 컸으니 덕대와는 이제 같이 쓸 수 없겠어. 그러더니 종종 몰래 윤기의 방으로 건너와 쏙 숨어있었다. 비단이불 깔린 자기 방 놔두고 반절도 되지 않는 노비 방에 들어와 간식을 잔뜩 풀어놓고 가곤 했다.


 이렇게 윤기가 자란 만큼 지민도 어엿이 성장했다. 마냥 동그란 이목구비로 여기저기 뛰어다니던 아이는 학당에 갈 나이가 되었다. 선이 다부지게 굵어진 윤기와 달리 아직도 동그란 얼굴이 남아있었다. 여전히 코끝이 올망졸망했고 눈이 맑았으며 눈밭마냥 살이 하얬다. 그럼에도 이제는 입을 다물고 얌전히 서있으면 제법 성장한 태가 났다. 환히 웃을 때면 이제 막 흐드러지게 피어난 연꽃 같았다.



“우리 도련님 조만간 장가 가셔도 되겄어. 그지 않아? 동네 처자들이 우리 도련님만 지나가면 눈을 떼지 못한다니까.”



 향소가 지민을 보며 호들갑을 떨었다. 윤기가 코웃음을 쳤다.



“이제 막 걸음마 떼게 생기셨는데 장가는 무슨.”

“얘가 진짜 모르는 이야기를 하네! 너 시덕이라고 알지? 저짝 마을 유씨 대감집 노비. 거기 집에서 우리 도련님을 벌써부터 사윗감으로 따악 점 찍어두었다고 하더라니까. 그짝 마을까지 우리 도련님 반듯한 게 소문이 다 났어. 얼마나 품행이 바르고 멋지신지!”

“가서 밥이나 지어라.”

“참말이라니, 얘! 너 어디 가!”

“도련님 뫼시러 간다.”



 혼인이라니. 가당찮다. 실로 지민을 볼 때마다 윤기는 그리 생각했다. 태어난 지도 얼마 안 된 젖먹이같구만. 크긴커녕 오히려 지민은 하루가 지나면 다르게 어려져 있었다. 윤기야, 윤기야. 여전히 절 찾을 때면 제 이름 부르며 쫑쫑 뒤따라 다니는 게 영락없이 눈밭 처음 뛰어 댕기는 새끼 강아지다. 평생 내가 모시고 신까지 다 신겨드려야 할 판인데 혼인을 어찌 해.


 윤기는 향소의 이야기는 머릿속에서 빠르게 지워내고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겼다. 지민이 다니는 학당이 곧 마치는 시간이 된다. 학당에 도달하니 그 근처에는 이미 다른 양반가 노비들이 저마다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저마다 삼삼오오 모여 떠들던 노비들이 윤기를 보고는 눈치를 준다.



“백정놈이 왔네.”



 윤기는 다 들리는 목소리를 못 들은 체 했다. 백정이라는 말도 맞고. 구태여 다른 노비들과 분란을 만들어 지민을 난처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혹여 싸움이라도 붙어 반쯤 죽여놓으면 피곤해진다. 노비들은 어찌되었든 양반의 사유재산이었으므로. 노비들은 무시하는 윤기를 보고는 저들끼리 다시금 대화를 이어갔다.



“나 주인어른께서 조만간 짝을 지어준다고 하셨다.”

“시상에. 누가 짝이냐 그럼. 덕순이? 아니면 윤영이?”

“덕순이 그 아야.”

“잘됐네, 잘됐어. 너 즈그 지난번에 덕순이 걔 아니면 안 된다고 걔만 연모한다고 그으으렇게 울고불고싸고 아주 그날 마을 시끄러워서 내 환장할….”

“허잇! 참말 조용히 해라 좀.”

“그럼, 그럼 뭐 벌써 입맞춤까지 한 거여?”



 노비들이 저들끼리 시시덕거렸다. 윤기에게는 머나먼, 관심이라고는 단 한 개도 가지 않은 이야기였다. 어차피 제 혼인에는 관심 없었다. 박대감이 짝 지어주는 노비와 혼인하겠지. 여태 누군가와 입 맞추고 싶다고 바란 적도, 안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없다. 혼인하여 도련님 곁에 계속 있어 챙겨드려야지. 그런 생각뿐이었다.



“아이구, 도련님!”

“왜이리 더운 게냐. 빨리 받지 못해?”

“예, 예.”



 학당이 끝나고 양반가 자제들이 하나 둘 나온다. 짜증을 부리며 나온 양반이 책이 담긴 보자기를 노비에게 내팽개치듯 넘긴다. 윤기는 학당 문을 넘어오는 자제들 사이에서 유독 말간 얼굴 하나를 발견했다. 지민은 다른 이들보다도 유달리 많은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여있었다. 그리 할까? 내 한번 생각해볼게. 말하며 웃는 모양새가 곱다.


 윤기는 그런 지민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다른 양반자제들과 어울리는 지민은 정말로 고귀한 사람 같았다. 산을 뛰어다니고, 윤기 너는 일이 왜이리 많으냐며 나무까지 대신 팬다고 나서던 천방지축 대신 기품 넘치는 고고한 학 같았다. 산수도화에나 나올 법했다. 마침내 윤기를 발견한 지민이 환히 입 벌리더니 다른 이들과 작별인사를 하고 이리 쪼르르 따가온다.



“윤기야! 많이 기다렸어?”

“아닙니다. 이리 주세요.”



 윤기가 지민의 짐 보따리를 빼앗듯 안았다. 지민이 윤기를 물끄러미 올려다본다.



“윤기 너 키가 더 컸어?”

“그대로입니다.”

“나는 분명 컸는데 왜 그대루지.”



 지민이 손을 들어 높이를 재본다. 딱 반 뼘만큼 차이가 난다. 아닌데. 윤기 네가 더 큰 거 같다.



“어서 내가 부지런히 커야겠다. 그래야 윤기 너랑 어깨를 마주하고 걷지.”

“언제든 맞춰 걸어드릴 텐데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내가 맞춰서 걷고 싶어 그러지. 두고 보아라. 내 너보다 더 커질 거야.”

“그러십시오.”



 무던한 윤기와 달리 지민이 열정적으로 말했다. 그러더니 헤실헤실 웃으며 윤기에게 점점 꼭 붙어온다.



“윤기야 내 생각해 보았는데 우리 내일 모레 오랜만에 산을 갈까? 이번에는 우리 둘만 놀자. 계곡에 가는 게 어때? 물놀이를 하자.”

“불가합니다. 대감어른께서 사냥을 간다 했습니다.”

“아버지가? 또?”



 지민의 통통한 입술이 삐죽 튀어나온다. 아버지는 요새 왜 너를 자꾸 사냥터에 데리고 가는 거야. 윤기 너를 볼 시간이 점점 줄어든다. 윤기는 서운해하는 지민을 보면서도 입을 얌전히 꾹 다물고 있었다. 지민은 몰라야만 하는 비밀이 있는 탓이다.


 비를 맞고 돌아와 윤기의 종아리가 부르터지도록 맞은 그 다음날. 지민은 우려대로 단단히 고뿔에 걸려 앓아 누웠다. 회초리를 맞은 윤기보다도 열이 심하게 올라 이부자리바깥으로 나오지 못했다. 윤기는 그 소식을 듣자마자 절뚝거리면서도 밖으로 나와 지민의 처소인 작은 사랑채 근처 바깥을 서성거렸다. 그러다 마침 지민을 보고 작은 사랑채 안에서 나오는 지민의 어머니와 딱 마주쳤다. 대감마님은 그대로 나와 주변을 물리고 윤기에게 약조했다.


 네가 그 아이의 검이 되어다오. 주인을 위해 무릎을 꿇는 너의 충정을 보았다. 그리 한다면 내 부군께 청해 너에게 검을 알려주마. 민윤기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조건 그리 하겠노라 넙죽 엎드렸다. 지민을 지킬 수 있다면야 그 어떤 짓이든 할 수 있었다.


 그 이후부터 사냥을 가는 박대감을 따라가며, 따로 빠져 나와 박대감이 붙여준 사람에게 무예를 배우기 시작했다. 지민에겐 비밀로 부쳤다. 대감마님과 언제든 목숨을 버릴 수 있다고 약조한 걸 알았다간 난리가 날 게 자명했으므로.



“그럼 그 다음날은?”

“그날은 일이 많습니다.”

“왜?!”

“도련님 탄일*을 준비해야 하니까요.”

“그거 윤기 너는 굳이 하지 않아도 된다!”

“그럼 일은 누가 합니까.”

“…내가 할까? 나 나무도 잘 팰 수 있을 거 같아!” 

“힘도 없는 팔로 무슨. 얌전히 앉아 책이나 보십시오.”



 지민이 풀 죽은 강아지마냥 축 처진다. 윤기는 그런 지민을 흘끔 보고는 아무것도 아닌 척, 지나가는 투로 말했다.



“…잔치 시작 전에 잠깐 보든지요.”

“참말이지?”



 금방 윤기는 지민의 꼬리가 다시금 살랑이는 걸 본다. 윤기도 가볍게 입매를 말아 올리며 미소 지었다. 예. 제가 언제 농이라도 한 적 있습니까. 답하며 생각했다. 역시 이 도련님은 평생 자기가 곁에서 챙겨주어야 한다고.







 


지민의 탄일은 급박하게 다가왔다. 모든 집안 사람들이 분주하게 잔치를 준비했다. 열다섯이 되어 학당에 가고 처음 맞이하는 탄일이라 그런지 그 어느 때보다 성대했다. 박대감은 이런 축하할 일에 무언가를 아끼는 사람이 아니었다. 윤기 역시 마찬가지로 분주했다.



“그게 뭐냐?”



 덕대가 단도로 나무를 깎고 있는 윤기를 보며 의문을 표했다.



“형님은 알 거 없습니다.”



 뭘 만드는 거 같은디. 덕대는 아직 나무토막에 지나지 않는 윤기의 작품을 보며 눈을 가늘게 뜨고 이런저런 답을 내놓았다.



“알았다. 수저인 게지? 너 욘석, 밥 많이 먹으려고.”

“집중 해야 하니 말 붙이지 마십시오.”

“이놈 말하는 투 보게.”



 에잉 쯧. 뭐 윤기 네가 재수 없던 적이 하루 이틀도 아니고. 되었다. 관심을 가져도 지랄이여. 너 혼자 지지고 볶고 다 해라. 덕대가 자리를 옮겨 멀어진다. 윤기는 덕대가 떠난 뒤에도 돌처럼 앉아 나무를 깎는 일에만 집중했다. 중천에 떠있던 해가 기울어져 땅거미가 깔릴 때까지도. 마침내 윤기가 쥐고 있던 나무토막이 슬슬 형체를 갖추기 시작했다. 두 귀가 튀어나와있고 동그란 몸체가 얼추 보인다. 토끼였다.



“이 정도면….”



 윤기가 겨우 형체만 갖춘 토끼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민이 좋아하는 짐승이다. 산에 올라 토끼굴 앞을 데려가 한 마리 잡아주니 그리 좋아했다. 형님! 이거 보세요. 무척이나 보드라워요. 토끼의 하얀 털에 눈을 반짝거리는 지민에 윤기는 그대로 다시 토끼를 놓아주었다. 토끼를 잡아 가죽을 벗기거나 고기를 먹은 윤기로서는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선택이었다.


 윤기는 며칠을 그 작은 나무토막에 매달려 있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손에 경련이 날 때 즈음 완성되었다. 매끈한 두 귀와 몸통은 누가 보아도 토끼다.


 윤기는 나름대로 만족스러웠다. 이번 탄일 선물은 학당도 들어간 기념으로 조금 더 특별한 것을 해주고 싶었다. 예전에 얼기설기 만들어 주었던 꽃다발 같은 것보다는 이것이 지민도 더욱 기뻐할 듯싶었다. 받으면 활짝 웃어주겠지. 자연스레 지민이 보일 반응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이게 무엇입니까? 토끼 아닙니까? 형님! 너무너무 작고 소중합니다. 반짝거리는 눈으로 신기해할 거다. 그것을 떠올리니 만들면서 까진 손의 생채기들쯤이야 아무런 통증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침내 기다리고 기다리던 지민의 탄일이 다가왔다.



“윤기야 저잣거리에 가서 맡겨놓은 옷 좀 받아와라. 도련님 탄일 선물로 대감마님께서 특별히 준비한 것이니 반드시, 반드시! 조심하여 가져와야 된다. 알겄제? 영순 어멈댁 알지? 그리로 가면 된다.”



 향소가 신신당부를 했다. 네 목숨보다 귀한 거니 잘 가져와야 된다! 당연히 백정새끼 목숨보다 비쌀 비단이다. 윤기는 부정하지 않고 저잣거리로 향했다. 포목상에 도착하니 열 살 즈음이나 되었을 계집아이가 손가락을 쪽쪽 빨며 윤기를 올려다보았다.



“객이어요?”

“그래.”

“어무니! 누가 왔어요!”

“누구, 아아 박 대감 댁이지? 영순이 너는 저리 들어가 있어라.”



 영순 어멈은 윤기를 보자마자 알아차리곤 잘 포장된 보따리를 내밀었다.



“이번 비단이 어찌나 고운지, 내 옷 만들다 눈이 멀어버리는 줄 알았지 뭐람. 곱디고운 꽃 분홍색이라 도련님께 아주 딱이야, 딱! 이번에도 수놓는데, 아휴, 영순아! 너 또 어디를 가! 내가 가만 있으라고 했지!”



 영순 어멈이 후다닥 점포 안으로 딸을 쫓아 들어간다. 윤기는 묵직한 보따리를 손에 쥐고 발걸음을 돌렸다. 저잣거리에서 심부름 외에 윤기의 관심을 잡아 끄는 건 그 어느 것도 없다. 귀한 패물도, 풍물 놀이도 전부 다 관심 밖이었다.


 그러나 이 날만은 예외다. 거침없이 걷던 윤기의 발걸음이 어느 혜전* 앞에서 우뚝 멈췄다. 값비싼 천으로 만들어져 우아한 문양이 새겨진 비단신이 눈에 확 들어왔다. 이제 막 열 다섯이 된 사내아이가 신기 딱 좋은 모양새였다. 꼭 대감 어른의 방에서 본, 고운 모양이 새겨진 도자기 같다. 수많은 신 사이에서도 제일 돋보였다.


 지민에게 무척이나 잘 어울릴 것 같았다. 윤기는 신을 신은 지민을 떠올려보았다. 매일같이 이리저리 바쁘게 돌아다니니 지민의 신은 자주 망가지곤 하였다. 제 손으로 벗겨진 신을 도로 신겨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러나 윤기는 곧 시선을 떼었다. 어차피 꿈꿀 수 없는 것이다. 노비에게는 아무것도 쥐어지지 않는다. 짐승의 가죽을 몰래 팔아 돈을 마련한다 하더라도 수백 개는 팔아야 살 수 있을 가격일 터였다. 처음부터 꿈을 펼칠 수 없는 삶으로 태어나다 보니 안 되는 일은 빠르게 포기하곤 했다.


 박대감의 집에 도착하니 이미 잔치의 준비가 모두 끝나있었다. 윤기는 향소에게 재빠르게 보따리를 넘기고 학당으로 향했다. 언제나 학당에서 지민을 기다려 데리고 돌아오는 건 윤기였으므로. 학당 밖으로 나온 지민을 보자마자 곁으로 다가갔다. 돌아가는 길에 선물을 건네주어야지. 그리 생각했다.



“박 도령덕분에 내가 그 화려한 집엘 다 가보네. 이런 운이 세상에 또 어디 있어. 기대 잔뜩 해라. 내 아주 대단한 걸 준비해놨으니!”

“선물은 됐으니 와서 축하인사나 가득 해줘라. 아, 윤기야!”



 지민은 다른 양반 자제들과 같이 걸어왔다.



“오늘 같이 집에 가게 됐다. 하도 같이 간다고 하여서….”

“예, 알겠습니다.”



 매번 둘이서만 같이 걷던 길이 무척이나 시끄러워졌다. 박 도령 집안 대문 넘는 게 내 일생 자랑거리가 될 일이지. 아잇, 무슨 소리야. 농은 그만 해라. 농이 아닌데? 양반들이 떠드는 대화에 노비는 감히 참여할 수 없다. 윤기는 품에 넣어둔 조각을 결국 꺼내지 못했다. 이따 집에 가서 둘만 슬쩍 남았을 때, 그때 주어야지.


 그러나 집에 도착하고 난 이후 지민은 더욱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다. 박 대감 부부에게 인사를 올리며 낳아주셔서 감사하다고 인사와 함께 선물을 올렸고, 놀러 온 박 대감의 친우들에게 안부인사를 했으며, 양반가 자제들과 가벼운 담소를 나누었다. 감히 노비인 민윤기 따위는 말도 붙일 수 없었다. 윤기는 그저 다른 노비들과 같이 곁에서 음식과 술을 날랐다.



“나 술은 익숙지 않은데….”

“박 도령! 아 이 좋은 날 안 마시면 언제 마신다고. 어서 들이켜, 쭉쭉. 옳지!”

“너무 쓰단 말이야.”

“아 술맛을 모르면 진정한 사내라 할 수 없지.”



 지민의 주변으로 왁자지껄한 목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시조를 읊고 농을 주고 받더니 몇몇이 준비해 온 선물을 꺼낸다. 갓끈, 주머니. 골고루 있었다. 다들 박 대감댁 자제인 지민에게 잘 보이고 싶어 안 달이 나있었다. 윤기는 지민의 한 켠에 점점 쌓여가는 선물들을 보았다. 그 중 김 대감 댁 도령이 어깨를 으쓱해 하며 선물을 자랑했다.



“자! 보아라. 지민이 너한테 아주 잘 어울릴 거 같아서 내 마련했다.”

“이게 무어냐.”

“바로 태사혜다! 아주 어여쁘지.”



 신이다. 윤기가 저잣거리에서 오늘 본 신. 지민에게 꼭 잘 어울릴 것 같다고 생각한 신. 비단신을 본 지민의 눈이 함지박하게 열리더니 환히 웃는다.



“우와아, 너무 곱다! 어떻게 이런 걸 다 준비했어.”

“내 열심히 준비했지. 어떠냐, 제일 마음에 들지?”

“너무 마음에 든다. 안 그래도 나 새로운 신이 가지고 싶었어.”



 김 도령이 지민의 반응을 보곤 뿌듯해했다. 내 보는 눈이 있지. 지민의 광대가 봉긋하게 올라간 모습을 확인한 윤기는 다시금 향소가 저를 찾는 목소리에 뒤로 향했다.


 이상하게 다른 이를 향해 맑은 소리를 내며 웃는 지민의 모습이 머릿속을 내리 맴돌았다. 술 궤짝을 나르면서도, 가득 차려진 상을 심부름으로 옮기면서도 내내 그 생각만 났다. 학당 안에서 양반들과 어울리는 모습은 보지 못하니 이번이 처음이다. 지민이 저리 맑게 웃는 건 자신과 있을 때뿐이었는데.


 가슴팍에 처음으로 느끼는 언짢은 감정들이 쌓인다. 그러나 그것들을 윤기는 구겨 넣었다. 정확하게 그것들이 어떤 종류인지 몰랐으므로.



“윤기 너 어디다 정신을 빼. 이거 빈 술통 좀 치워라. 곧 양반 나으리들이 가실 테니 우리도 이제 밥 먹어야지. 오늘은 육전을 많이 남기셨네. 이게 웬 횡재야.”



 정신 없이 향소가 윤기를 툭툭 친다. 어서 상 펴라. 오늘 내일 끼니까지 전부 먹어두어야 된다. 알았지.


 그러거나 말거나 윤기는 멀리서 지민을 바라보았다. 술을 마셔서인지 유난히 볼이 발개진 지민이 보인다. 마침내 잔치가 끝이 난 건지 하나 둘 일어나는 양반들이 보인다. 지민이 그들을 마중하더니 고개를 두리번거린다. 꼭 무언가를 찾는 듯했다. 그러더니 비틀거리며 휘청였다. 윤기가 냉큼 쏘듯 지민을 향해 뛰쳐나갔다.



“으, 어! 윤기야!”

“방으로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윤기는 지민을 부축하여 작은 사랑채로 향했다. 술 냄새가 진동하는 지민을 비단요에 눕히며 윤기가 인상을 찡그렸다.



“잘하지도 못하면서 술을 왜이리 마셨습니까.”

“으응…못 마시면 사내가 아니라고 하여서….”

“못 마시면 사내가 계집이 된답니까? 전부 헛소리입니다. 앞으로는 그런 말에 어울려주지 마세요.”

“형님이 나 대신 걔네들과 술을 마셔주세요….”

“…잠이나 자십시오.”



 윤기가 헤롱거리는 지민을 두고 일어난다. 그런데 지민이 돌연 떠나려는 윤기의 소매를 꼭 붙들었다.



“헌데 오늘 잔치 전에 나랑 만나준다고 하였으면서…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까…내 진짜 많이 찾았는데….”

“….…..”

“일부러 아버지랑 어머니한테 간다고도 하고 찾아갔는데 왜 날 마주보지 않았어…..”



 지민이 잔치 내내 자신을 곁눈질로 찾았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자신이 죄다 무시했다. 감히 양반 나으리들과 어울리는 지민의 곁에 함부로 다가갈 수 없었으므로. 윤기는 지민과 눈을 마주했다. 술에 반쯤 취하여 어룽거리는 눈빛이 살짝 물에 잠겨있는 듯도 하다.



“형님 저한테 할 말이 있지 않습니까…?”



 지금이 선물을 주기에는 가장 좋은 기회다. 둘만 있으니. 윤기는 품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며칠 내내 붙잡아 완성한 나무조각이 느껴진다. 그러나 움켜쥐고 건네주기 직전. 오늘 지민이 선물들이 윤기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값나가고 고운 선물들. 바닥에 굴러다니는 나무토막으로 만든 제 선물은 그에 비하면 너무나도 보잘 것 없고 하찮다. 비교조차 무례해 보인다. 지민한테 어울리는 건 다른 도령들이 준 선물일 테다.


 더불어 환하게 다른 이에게 웃어주던 지민의 모습까지 다시 스치고 지나간다. 윤기는 조각을 잡았던 손에서 힘을 푼다. 품에서 나온 건 빈 손이다. 대신 꾸벅 인사를 올렸다.



“탄일 축하 드립니다.”



 윤기는 지민의 손을 털어내고 도망치듯 작은 사랑채에서 빠져 나왔다. 무작정 빠른 걸음으로 도망치듯 마당으로 나왔다. 마침 향소가 윤기를 발견하고 크게 소리친다. 너 뭐해! 안 오면 밥 없어진다! 이때만큼은 향소의 목소리가 커서 다행이다. 여전히 이상한 감정들을 꾹 씹어 누른 채 윤기가 마당을 벗어났다.









 잔칫상을 치우고 마무리하니 어느덧 밤이 깊었다. 밥숟갈을 뜨는 둥 마는 둥 하던 윤기는 제 방으로 향하는 길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스스로도 무척이나 혼란스러웠다. 아무 죄 없는 도련님한테 이 무슨 짓이란 말인가. 내일 학당을 가는 길에 다시 설명해야지. 상심할 지민을 생각하니 또 마음이 복잡하다. 윤기 역시 복잡한 기분으로 행랑채로 들어와 제 방문을 열었다.



“…….”



 윤기의 이불이 볼록하다. 꼭 누군가 들어있는 것처럼. 저런 일을 벌일 사람은 하나뿐인데. 다행스럽게도 민윤기의 도련님은 상심하지 않았나 보다. 방문을 닫은 윤기가 다가가 이불을 확 들추었다.



“윽까악! 읍!”

“그렇게 소리를 지르면 모든 이들이 달려나옵니다.”



 지민의 입을 텁 손으로 막은 윤기가 주의를 주니 지민이 고개를 끄덕거린다. 알겠다는 듯 손을 탁탁 치길래 놔주었다.



“형님 참 너무합니다. 이렇게 놀라게 하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는 너야말로. 놀라게 하려고 여기 있던 게 아니냐.”



 지민이 합 입을 다문다. 눈알을 도르륵 굴린다. 볼은 여전히 발갛다. 아직도 술 기운이 남아있는 듯했다. 윤기는 자리옷으로 몰래 행랑채에 들어온 지민을 보고 남몰래 한숨을 쉬었다. 눕혀놨더니 그 사이 맹랑하게 쪼르르 들어와 숨은 모양이다.



“왜 여기 있는 거냐.”

“정말 오늘 저한테 할 말이 그거밖에 없습니까?”



 이내 윤기를 보더니 아직 살이 통통한 볼을 우물거리며 할 말을 늘어놓는다.



“오늘 귀 빠진 날인데…진짜루 할 말이 그게 전부입니까? 우리 약조는요? 같이 놀러 간다고 하였는데.”

“달리 할 게 뭐가 있어. 탄일 축하한다고 하지 않았냐. 놀러 가는 건 그대로 놀러 가는 거고.”

“…….”

“나와라. 잘 거다. 어서 네 방으로 가라.”



 점점 윤기의 말이 이어질수록 지민의 뽀얀 얼굴에 불만이 서린다. 윤기는 여전히 가슴 한 구석에 남아있는 이상한 감정 때문에 지민을 똑바로 마주보기 힘들었다. 아무래도 밤이라 그런가. 지민의 탄일이라 그런가. 싱숭생숭하다.



“싫습니다! 여기 있을 겁니다.”



 지민이 윤기의 이불을 냅다 뒤집어 쓰더니 제 몸을 꽁꽁 싸맨다. 비단금침 두고 얼기설기 만든 요로 이런다. 윤기 역시 쉽사리 당하진 않았다.



“그럼 말아라.”



 윤기는 바깥 이부자리에 풀썩 눕는다. 지민이 당황하더니 말을 잇는다. 오히려 뺏어놓고는 안절부절 못한다.



“그리자면 고뿔에 걸립니다”

“도련님이 주지 않는데 어찌 뺏으라고. 고뿔이야 뭐. 걸리면 그만이지.”



 지민이 갈등하듯 윤기의 넓은 등을 본다. 까만 눈을 데굴데굴 굴린다. 그러더니 이내 슬그머니 이가 드러나게 웃으며 조심조심 다가가 윤기의 등에 찰싹 들러붙는다. 이불을 넓게 펼치더니 그대로 윤기까지 감았다. 지민이 윤기의 등에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그럼 이리하면 되지요.”

“이게 뭔. 나와라.”

“싫습니다.”

“나오래도.”

“싫어요.”



 윤기는 난데없이 달라붙은 온기에 화들짝 놀랐다. 지민이 학당에 간 뒤로 이리 붙은 적이 많지 않았다. 윤기 역시 사냥터를 전전하며 칼을 쥐는 훈련을 하다 보니 이리 둘만 남은 시간이 많이 사라진 터였다. 결국 윤기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지민이 지지 않고 또 윤기의 허리에 매달린다. 술에 취해 그런지 끈기가 아주 대단했다.



“내 나오라 하였지.”



 윤기는 손을 들어 지민의 팔을 잡아 바닥에 눌렀다. 윤기에게 꼼짝없이 잡힌 지민이 몸을 바동거린다. 양반의 몸에 손을 대지 못한다는 법도쯤은 이미 둘 사이에서 오래 전 파괴된 것이다.


 그런데 그때, 난리를 치면서 윤기의 품 안에 있던 조각이 툭 바닥으로 떨어졌다. 데구르르 토끼가 굴러간다. 두 사람의 시선이 그리로 향한다. 윤기의 눈빛에는 낭패라는 기색이 섞였고 지민은 영문을 모른 채 본다.



“아무것도 아니다.”



 윤기가 다시금 나무조각을 쥐어 감춘다. 그러나 지민이 냉큼 따라붙더니 윤기의 손 안을 빤히 쳐다본다.



“이게 무엇입니까? 방금 토끼 아니었습니까? 동글동글 했습니다.”

“…….”

“저잣거리에서도 이런 모양은 본 적이 없는데! 혹여 형님이 직접 만든 겁니까?”

“…….”

“이거 저 주려고 만든 거 아닙니까?”



 지민의 눈빛에 별빛이 깃든다. 제 손과 눈을 번갈아 보며 조른다. 윤기는 결국 감추었던 손을 펼쳐 지민의 손 위에 토끼 조각을 올려주었다. 자포자기였다. 하찮은 나무조각 하나가 유달리 통통하고 고운 손 위에 올라온다. 윤기의 손엔 한 손이면 쏙 들어오던 게, 지민의 손에 올라오니 양손에 꼭 알맞게 찼다.



“정말 제 것입니까?”

“…그래. 가지든가 버리든가. 너 좋을 대로 해라.”

“아니 이 귀한 걸 왜 버려요. 형님이 직접 만든 게 맞지요?”

“그래.”



 지민은 토끼를 보더니 눈을 사르르 휘었다. 비단신을 받았을 때보다 훨씬 밝게. 달빛이 타고 흘러내린다는 폭포가 저럴까. 윤기는 그 어떤 풍경보다 어여쁘다고 생각했다. 지민이 좋아 죽겠다는 듯 조금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한다.



“어찌 이런 걸 만드실 생각을 다 하였습니까? 너무너무 작고 귀엽습니다. 이번 탄일에 받은 선물 중 가장 마음에 듭니다. 너무 고와요. 형님이 주는 것은 다 좋은데, 이거는 특히 더 좋습니다!”

“…그럼 다행이고.”

“소중히 제 방에 보관할 겁니다.”



 큼.윤기가 헛기침을 한다. 그런데 문득 지민의 시선이 윤기의 손에 닿는다.



“헌데 그래서 요즘 형님 손이 이렇게 된 겁니까?”



 칼을 쥐고 작은 조각을 파느라 커다란 손이 상처투성이다. 윤기는 생채기가 난 손이 머쓱하여 뒤로 옮겼다.



“별 거 아니다. 나무하다 이리, 억.”



 물끄러미 윤기를 보던 지민이 튀어 올라 윤기의 품으로 뛰어 내린다. 아예 팔을 윤기의 목에 둘러 꼭 끌어안았다. 윤기는 갑작스러운 무게감에 손을 뒤로해 바닥을 짚어 버텼다. 지민의 윤기의 어깨에 얼굴을 포옥 묻었다. 가느다란 숨결이 윤기의 목께에 쏟아진다.



“형님밖에 없습니다. 너무 소중한 선물이어요.”

“…….”

“전 형님이 진짜루 세상에서 제일 좋습니다.”



 쾅. 다시금 윤기의 가슴이 돌팔매질이라도 맞듯 벌렁거린다. 뜨거운 화염을 목안에 머금은 것도 같다. 검술 훈련을 할 때, 진검이 제 목에 들이닥쳤을 때도 이런 비슷한 감각을 느낀 적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그것보다도 조금 더 가슴이 빨리 뛰고, 뱃속이 간지럽고, 귓가가 빠르게 달아오른다. 인두로 가슴 속을 지진 것만 같다.


 지민이 조금 몸을 떼고 윤기와 눈을 마주본다.



“형님도 그리하지요? 제가 제일 좋은 거지요?”



 장지문을 통해 들어온 달빛이 지민의 얼굴을 반쪽만 비춘다. 술기운이 남아 눈가와 입술이 붉다.  자신만이 꽉 담긴 검은 눈을 본다. 윤기는 제 위에 올라온 묵직한 온기를 느낀다. 붙든 지민의 허리가 무척이나 얇다.


 뱃속이 더욱 뜨거워진다. 그리고 문득 윤기는 지민에게 입 맞추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



 그리했구나. 이 마음이 연모구나. 연심이다. 단순한 충심이 아니라, 형제간의 우애가 아니라. 사내로서 지민을 마음에 품었다.


 지민은 그 대답이 만족스러운지 환히 웃더니 이젠 졸리운 지 눈에 잠 기운이 고였다. 그러더니 윤기가 옮겨줄 걸 아는지 윤기의 품 안에서 힘을 뺀다. 윤기는 손을 질끈 쥐며 지민이 쏟아지지 않도록 잘 붙잡아 안았다. 품 안에서 좋은 향내가 난다. 지민으로부터 나는 것이다.


 윤기는 잠시 눈을 내리 감았다. 도련님의 탄일, 민윤기는 제 첫 연심까지 선물로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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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일: 생일

*혜전: 신발가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