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 나비의 춤>
야담夜談
노란빛의 고운 동복을 입은 지민이 팔랑거리며 뛰어다닌다. 흡사 나비 같았다. 지민이 그리하여 퐁당 뛰어들어온 곳은 나무를 패는 뒷마당이다. 왜냐하면, 그곳에 윤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뒷마당으로 들어온 지민이 고개를 두리번거리더니 윤기를 발견하고는 한달음에 냉큼 뛰어 달려왔다. 양반의 체통은 개나 준 모습이다.
“윤기 형님! 여기 있으셨습니까! 아이 참. 덕대한테 형님한테는 이런 일 시키지 말라 하였는데.”
“그럼 노비가 이런 일을 안 하면 무슨 일을 하냐.”
“저랑 놀면 됩니다!”
지민이 당당하게 배를 내밀었다. 윤기는 대충 기울어진 그림자의 위치를 확인하고 알만하다는 듯 말했다.
“글공부는 어쩌고.”
“그거? 없습니다! 스승님이 오늘은 몸이 좀 좋지 않으시다 하여….”
“도련니임! 어디 계십니까! 지민 도련니이이임!”
덕대가 목청껏 지민을 부르는 소리가 이곳까지 들려온다. 힉! 지민이 움찔 놀라더니 그대로 발을 동동 구른다. 그러더니 덥석 윤기의 손을 붙잡았다. 울망한 얼굴로 부탁한다.
“형님 나를 숨겨주.”
여기서 숨겨줬다간 민윤기만 혼나게 된다. 숨겨달라고 한 건 도련님이지만 모든 죗값은 노비가 치러야 한다. 물끄러미 지민을 바라보던 윤기는 덥석 손목을 잡고 잔뜩 쌓인 나무 뒤로 밀어 넣고 장작을 하나하나 올려놓았다. 잠깐 이렇게 있어. 지민이 믿음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힘차게 끄덕끄덕거린다.
지민을 숨겨주고 머지않아 덕대가 윤기가 있는 곳을 향해 뛰어왔다.
“거기! 윤기 너 도련님 못 봤나?”
“못 봤는데요.”
“참말로? 너한테 안 왔다고?”
“예.”
덕대가 윤기를 믿지 못하는지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장작과 어린 백정놈뿐이다. 진짜 없다. 덕대가 한탄했다.
“여기도 아니면 대체 어디로 가신 거여. 너, 혹시라도 도련님이 여기로 오면 나한테 바로 알려야 한다. 알겄제?”
“그러지요.”
“지민 도련니임!”
덕대가 다시 분주하게 지민을 찾아 나선다. 윤기는 덕대가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지민이 숨어있는 장작 뭉치를 향해 다가갔다. 하나를 톡 쳐 떨어뜨리니 그 안에 말간 얼굴이 톡 튀어나온다. 일이 다 끝난 거냐고 묻는 눈에 윤기가 끄덕거렸다. 이제 나와도 된다. 지민이 튀어나오듯 나오니 장작이 우수수 무너져 내린다.
“형님이 최고야!”
“최고는 뭔.”
지민은 함뿍 웃으며 윤기를 추켜세워주었다. 뒷목을 벅벅 긁으며 윤기가 괜히 헛기침을 했다. 큼. 지민이 다시 한 번 윤기의 손을 덥석 잡는다. 벌써부터 커다란 윤기의 손과 달리 지민은 자그마하여 양 손으로 고작 한 손을 꼭 쥔다.
“산에 가요, 형님. 가서 개구리도 잡고 놀아요!”
윤기가 머뭇거린다. 이유가 있었다. 노비로 이 집에 들어오고 난 이후. 따로 박대감, 그러니까 지민의 아버지로부터 불려간 적이 있다.
네가 그 아이더냐. 박대감은 지민과 굉장히 달랐다. 말갛고 유순해 내내 잘 웃는 지민과는 달리 보기만해도 호랑이 같은 기백을 가진 사내였다. 괜히 왕의 곁에서 권력 중심에 있다 내려온 인물이 아니었다. 왜 아비가 그리 박대감 찬양을 늘어놓았는지 윤기는 조금 알 것 같았다. 예. 절을 하며 머리를 아예 땅바닥에 박은 윤기에게 박대감은 일어나라고 했다. 윤기의 얼굴을 유심히 뜯어본다.
내 네 아비를 기억하고 있다. 인품이 좋은 자였지. 네 덕분에 폭동을 막을 수 있었다. 네 아비를 해친 그 자들과 그 일에 가담한 자들은 모두 엄히 벌로 다스릴 거다. 그리고는 친히 윤기에게 다가와 어깨를 툭툭 두들겨주었다. 지민이가 널 무척이나 따르나 보더구나. 나는 널 이 집안의 식구로 받아들였다. 내 아들을 잘 부탁한다.
보통의 ‘잘 부탁한다’라는 말은 아마도 도련님이 글공부 수업을 받도록 해라, 이 쪽으로 이어질 거다.
“응? 형니임.”
지민이 별이 박힌 것만 같은 눈망울로 윤기를 조른다. 애달프기 짝이 없다. 결국 윤기는 이번에도 지민의 뜻을 꺾지 못했다.
“해가 지기 전에 빨리 가야 하니 잘 따라와라.”
“응!”
지민이 단숨에 해사하게 웃는다. 윤기는 도끼를 내려놓고 그대로 지민과 함께 몰래 뒷마당을 빠져나갔다. 어차피 노비의 일로 주어진 몫은 애저녁에 다 한 참이다.
***
어느덧 윤기는 박대감의 집에서 노비로써 일하는 것에 적응했다. 나무를 패는 일이며, 물을 길러오는 일이며 척척 해내니 여기저기서 윤기를 불러다 썼다. 윤기는 군말하지 않고 모든 일을 깔끔하고 완벽하게 해냈다. 천한 백정놈이 무슨 놈의 노비냐고 무시하던 노비들은 윤기가 일을 떠밀어도 묵묵히 떠안으니 결국 받아들이게 됐다. 물론 이 집안에서 유일하게 생기 넘치는 도련님이 윤기를 그리 찾아대니 더는 괴롭힐 수 없었다.
“형님!”
지민이 쪼르르 윤기의 처소 앞으로 달려왔다. 윤기와 같이 방을 쓰는 덕대는 박대감의 부름으로 다른 곳에 가고 없는 참이었다. 윤기는 지민을 기다린 것처럼 장지문을 활짝 열었다. 지민이 윤기의 얼굴을 보자마자 헤실거리며 웃더니 품에서 밀과를 하나 꺼내 내밀었다. 노비는 물론, 양반이 아니면 쉽게 먹을 수 없는 간식이다.
“제가 형님 주려고 가져왔습니다.”
“됐다. 너 먹어라.”
“아이참. 그래도 형님 주려고 몰래 가져온 성의가 있는데! 드셔보시어요.”
윤기는 재촉하는 지민에 못 이겨 입을 벌렸다.
“맛있지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겁니다.”
윤기가 끄덕인다. 세상에서 이리 맛있는 건 처음 먹는다. 그러나 종놈이 이런 맛에 길들여지면 뭐에 쓴다고. 지민이 줄 때마다 거절하곤 했다. 지민이 참, 하더니 말을 덧붙인다.
“아 물론 형님 다음입니다! 형님이 제일루 좋아요.”
“…켁, 켁….”
“형님! 괜찮으시어요?”
지민이 화들짝 놀라 윤기를 살핀다. 됐다, 됐어. 윤기가 손을 내젓는다. 참말요? 고개까지 끄덕여주니 그제야 안심하고 멀어진다.
“그보다 왜 찾아온 거냐.”
“아 참! 제가 밤에 곰곰이 생각한 게 있습니다.”
지민이 품에서 꾸물꾸물 또 무언가를 꺼낸다. 서책이다. 천자문. 책의 쓰여진 한자를 모르는 윤기가 가만히 본다. 뭐 어쩌라고. 지민은 이 생각을 스스로 떠올린 제 자신이 기특한 듯 들떠 말한다.
“형님도 같이 글공부를 하는 거여요!”
“…노비가 글은 배워 어디 쓴다고 배우라는 거냐.”
“아버지가 글을 배워야 무시 받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다른 노비 애들이 매일 형님만 따돌리는 거 다 알고 있습니다.”
지민은 제 부탁으로 이곳에 온 윤기가 다른 노비들로부터 무시 당하는 것이 속이 상했다. 윤기가 신 없이 마당을 돌아다니는 걸 봤을 때 얼추 알아차렸다. 다른 노비 아이를 불러 물으니 밥그릇에는 모래까지 들어간단다. 다른 노비 아이들을 불러 꾸짖었지만, 여전히 윤기를 대하는 태도는 썩 좋지 못했다. 양반댁 안에서야 지민이 해결할 수 있지만 만약 밖이라면? 그를 생각하니 지민은 잠을 뒤척일 정도로 마음이 심란했다.
윤기는 지민이 내민 서책을 받지 않고 심드렁하니 말했다.
“난 머리가 돌이라 배워도 영 소용 없다. 쓸데없는 짓이야.”
“그럴 리가 없습니다! 형님은 산도 잘 돌아다니시고 약초도 많이 알고….”
“그런 건 별 것 아니다. 글이 어렵지. 양반 나리들이나 하는 걸 내가 어찌 해.”
“제가 알려주면 되지요.”
지민이 윤기의 가슴팍에 서책을 떠넘기듯 밀어 넘겼다. 그리고는 꽁지깃을 자랑하는 참새마냥 제 가슴을 부풀린다.
“스승이 뛰어나면 제자도 뛰어나게 되어있습니다. 오늘부터 제가 형님의 글 스승입니다. 알겠지요?”
윤기는 얼떨결에 수락했다. 지민이 물러나지 않을 것 같기도 했고 뭐 조금만 하다 보면 금방 포기하리라 여겼다. 배운 것이라곤 가축이나 잡던 백정놈이 얼마나 멍청한지 지민도 곧 깨달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민윤기만의 착각이었다. 지민은 끈덕지게 산도 가지 않고 틈만 나면 윤기에게 천자문을 읊어주고 알려주었다. 과제까지 냈다. 이 다섯 글자들을 오늘은 20번씩 써와야 합니다. 아시겠지요. 윤기는 순순히 지민이 시키는 대로 했다. 그리고 결말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지민이 화들짝 놀라며 윤기를 바라보았다.
“…형님 이걸 벌써 다 외우신 겁니까?”
“그런데.”
어린 애들이 배우는 거라며. 무덤덤하게 대꾸하는 윤기를 보고 지민이 입을 떡 벌렸다.
“형님…형님이랑 제 머리가 바뀌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무슨 말도 안 될 소리냐.”
“그렇다면 제 스승님이 무척이나 좋아하셨을 거여요.”
지민이 얼마나 똑똑한지는 윤기도 노비들이 떠드는 말들을 들어 알고 있었다. 글을 가르쳐주는 스승의 칭찬이 자자하다 못해 담벼락 너머까지 낫단다. 지민은 윤기를 특유의 반짝거리는 빛으로 바라보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늘 그랬듯. 나중에 크면 형님이 책을 읽고 저와 토의해주시어요. 윤기는 그것도 지민의 부탁이라 얼결에 끄덕였다. 그러지 뭐. 지민이 들떠 말했다.
“책을 다 뗐으니 내일은 산에 가요! 책걸이를 해야 합니다.”
“그게 뭔데.”
“맛있는 것도 먹고 재미있게 노는 날이어요.”
“좋은 날이네.”
정말 좋은 날이다. 지민과 계속 같이 있을 수 있을 테니. 윤기는 그리 생각했다.
처음 만났을 때 작약이 한 가득 피었던 산에는 어느덧 국화가 수놓아져 있었다. 봄에서 가을이 되었다. 지민은 오랜만에 오는 산에 기쁜지 책을 끝낸 윤기보다 더욱 신이 나 했다. 평소처럼 계곡에서 개구리도 잡고 다람쥐도 보고 윤기와 바쁘게 산을 올랐다. 윤기가 잡아주는 물고기가 신기하여 여러 번 시도했으나 모두 놓치고 말았다. 그래도 좋았다. 둘이 있었으므로. 실컷 놀다 슬슬 내려갈 즈음이었다.
“어…?”
투명한 물방울이 머리 위로 톡톡 쏟아진다. 비다. 윤기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날은 맑다. 아무래도 짧게 지나가는 소나기인 듯했다. 잠깐 기다렸다 내려가도 될 듯 하지만. 비가 오는 산은 쉽게 어두워진다.
“산은 어두워지면 위험해. 내려가자.”
“응!”
그러나 막상 윤기의 뒤를 쫓아 내려가려던 지민이 머뭇거린다. 조심해서 내가 밟는 돌 보고 밟아. 그리 말하며 앞장 서서 내려가던 윤기는 뒤에서 오지 않는 인기척에 돌아본다. 지민이 주춤거리고 있었다. 윤기가 무슨 일이라도 있냐는 듯 다시금 올라왔다.
“왜. 양반은 비 맞으면 안 된다는 법도도 있냐?”
“나…슈룹* 없이는 가본 적이 없고…어머니가 비가 올 땐 절대 맞으면 아니 된다고 했는데…고뿔에 걸려 앓아 누울 거라고….”
지민이 조금 주저하며 말했다. 윤기를 따라 천둥벌거숭이처럼 산을 뛰어다니고 체통 머리 없이 굴어도 지민은 아직 해보지 않은 게 많은, 아직 어린 양반이었다. 심지어 산이다. 안 그래도 내려갈 때마다 불안한데 미끄러운 길이라니. 주춤거리는 것도 당연했다.
“무서우냐?”
양반의 체통을 지켜야 하는 거랬다. 양반은 무서우면 안 된다. 그리 말하곤 했던 지민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인다. 윤기가 냉큼 손을 내민다. 지민이 윤기를 물끄러미 올려다본다. 윤기가 박대감의 집으로 들어온 이후 쑥쑥 자라며 이전보다 조금 키 차이가 난 터였다.
“무서울 게 뭐가 있냐. 내 널 평생 지켜주기로 이미 결심했는데.”
“…….”
“내 곁에 있는 한 너는 무조건 괜찮다. 내 손 잡아라.”
후두둑 쏟아지는 비가 윤기의 뺨을 타고 내려온다. 점점 젖어가는 옷에도 윤기는 아랑곳 안 했다. 지민이 저도 모르게 홀린 것처럼 윤기의 손 위로 제 손을 올린다. 윤기가 그 작은 손을 꽉 쥐어 잡았다. 천천히 가면 돼. 윤기가 다시 앞장 선다.
지민은 제 앞에 보이는 윤기의 등을 본다. 세상에서 가장 큰 사내는 아버지라고 생각했는데, 자신과 터울도 얼마 나지 않는 그 등이 세상에서 가장 커 보였다.
“땅을 잘 봐.”
그 말이 들리고서야 지민은 산을 내려가는 데에 집중했다. 돌을 밟고, 나무 뿌리를 밟고 천천히 산을 내려갔다. 두 손을 꼭 마주잡은 채. 그러다 보니 정말로, 산의 길목 입구까지 내려왔을 때에는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사내아이 둘은 완전히 산을 내려오고 나서도, 꽤나 오랜 시간 동안 손을 마주잡고 걸었다.
그리하여 집으로 돌아왔을 때 즈음엔 어느덧 해가 거의 지기 직전이었다. 윤기와 지민은 평상시처럼 슬그머니 뒷문을 통해 들어와 사라지려 했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
“매번 이리 몰래 빠져나간 것이더냐.”
“…어, 어머니….”
지민이 놀라 굳는다. 마저 담벼락 구멍을 통해 들어온 윤기도 그 순간에는 굳지 않을 수 없었다. 지민 어머니의 서늘한 시선이 지민과 윤기에게 닿는다. 흙 바닥에 뒹굴기라도 한 건지 온통 바짓단이 더럽기 짝이 없으며, 비 맞은 쥐마냥 쫄딱 젖어있었다. 지민이 작은 양손을 꼭 쥐어 앞으로 모은다. 지민의 어머니 곁으로 쭉 서있는 다른 노비들이 안절부절 했다.
“마님 도련님께서 고뿔에 걸리실지도 모릅니다요. 우선 안으로 들어 옷을 갈아입고 난 후에….”
“되었다. 둘 모두 따라 들어오너라.”
노비들이 야단났다며 한데 입을 모았다. 마님께서 저렇게까지 화나신 적이 없는데…. 지민은 입을 꾹 닫고 죄인처럼 그 뒤를 이었다. 윤기는 흘끔 숙여지는 지민의 고개를 확인하며 그 곁을 조용히 따랐다. 그리고 안채에 도착하자마자 지민의 어머니가 바닥으로 서책 하나를 던졌다. 바닥에 책이 형편없이 구른다. 지민이 윤기에게 준 것이다.
“윤기 네 처소에서 나온 거다. 지민이 네가 가르쳤느냐?”
“예….”
“그래서 저 주제 넘는 노비에게 네가 형님이라 부르며 따르는 것이냐?”
“어, 어머니…!”
지민의 눈이 커진다. 둘만 있는 곳에서만 그리 말하고 다른 때엔 조심을 한다고 생각하였는데, 결국 어머니의 귀에 들어갔다. 작은 고개가 더욱 푹 숙여진다. 윤기는 그를 또 흘끔 확인했다. 어머니의 엄한 꾸중이 계속하여 이어진다.
“오늘 몰래 집을 빠져나간 건 네 머릿속에서 나온 게냐?”
“제가 도련님께 청했습니다.”
윤기가 냉큼 말하며 무릎을 꿇었다. 쿵. 이마를 찧듯 바닥에 박았다. 지민 어머니의 시선이 윤기로 향한다.
“내 너에게 입 열라고 한 적 없다.”
“…송구합니다.”
“그래. 네가 했다고?”
지민의 눈이 커진다. 황급히 지민이 손을 휘젓는다. 지민 역시 무릎을 꿇었다.
“아니옵니다! 어머니 제가 졸라 가자고 한 것이옵니다! 윤기는 잘못이 없사옵니다!”
“윤기 네가 계속 말해보거라.”
지민 어머니의 시선은 여전히 윤기에게 닿아있다. 윤기가 마저 입을 뗀다.
“글 역시 제가 가르쳐달라 하였습니다. 백정으로 태어난 주제에 노비가 되어 잠시 머리가 어찌 됐었습니다. 도련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에 만족하지 못하고 천한 것이 감히 주제 넘게 청했습니다. 노비 말고 다른 것을 꿈꿨습니다. 주제도 모르고 그랬습니다. 도련님은 죄가 없습니다. 전부 다 제가 저지른 것입니다.”
“아니옵니다! 전부 아니옵니다!”
“주원댁. 회초리를 가져오게.”
“예, 마님.”
어머니를 곁에서 모시는 노비가 회초리를 가져왔다.
“윤기 너는 와서 옷을 걷으라.”
“예.”
“어머니!”
지민의 외침을 뒤로하고 어머니가 회초리를 휘두른다. 매섭게 바람 가르는 소리와 함께 윤기의 종아리에 붉은 자국들이 하나 둘 새겨진다. 지민의 어머니는 지민을 똑똑히 보며 말한다.
“이 아이가 맞는 건 지민이 네가 이 아이를 데려온 잘못이다. 윤기 너는 세라. 100대를 때릴 터이니.”
“예, 알겠습니다.”
“어머니, 아니옵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윤기는 죄가 없습니다….”
지민의 얼굴에서 눈물이 뚝뚝 흐른다. 하나, 둘. 윤기의 낮은 목소리가 안채를 울린다. 온 힘을 다해 때리니 붉은 줄이 윤기의 종아리에 새겨지다 못해 피가 터지기 시작했다. 민윤기는 이를 악 물고 신음소리를 참아내며 숫자만 세었다. 지민이 계속하여 힘없이 말을 반복한다.
“아니옵니다…차라리 저를 때리시옵소서…윤기는 잘못한 게 하나도 없단 말입니다….”
마침내 백이라는 숫자가 나왔을 때. 신음 한 조각 흘리지 않던 윤기도 결국은 비틀거리며 무릎이 무너졌다. 지민이 황급히 윤기의 곁으로 온다. 닭똥 같은 눈물이 줄줄 흘러 앞도 잘 안 보일 텐데도 윤기부터 걱정한다.
“형님, 형님…괜찮습니까?”
에그머니나. 그 호칭에 또 다른 노비가 놀란다. 지민의 어머니는 앞에서 대놓고 보이는 하극상에 커다란 숨을 들이마시었다가, 내뱉었다. 그리고는 지민을 향해 말했다.
“지민이 네가 정신을 아직 못 차렸구나. 이 아이가 더 맞았으면 싶은 게냐?”
“…소자가, 소자가 잘못했습니다. 더는 때리지 마시옵소서. 아니됩니다….”
“너 때문에 그 아이가 이리 된 것이다. 네가 져버린 양반의 도리로 혼나는 게 누구일성 싶으냐. 바로 그 아이다. 지금은 회초리로 끝나지만 나중에는 어찌될 것 같으냐? 그것이 아이의 목숨을 거둬가게 될 거다. 그 아이는 아무리 네가 희망을 주어도 결국 노비로 살아야 한다. 주제를 모르는 노비가 어찌되는 지는 지민이 너도 잘 알고 있지 않으냐. 이 어미는 생명을 중히 여기라 했지 도리를 져버리라 하지 않았다.”
지민의 입이 꾹 다물린다. 알겠느냐. 어머니의 말에 지민이 울음을 꾸역꾸역 삼켜가며 대답했다. 예, 알겠사옵니다. 앞으로 그리하지 않겠습니다. 그 말까지 듣고 나서야 지민의 어머니는 또 다른 노비를 시켜 윤기를 처소로 옮기게끔 하였다. 걷지 못할 만큼 맞았으니 당분간은 일을 시키지 말라는 말도 덧붙이며.
“지민이 너는 네 방으로 가거라.”
덕대에게 업혀 들려나가는 윤기를 보며 지민은 눈물을 소매로 훔쳤다. 예, 알겠습니다. 윤기는 업히는 와중에도 지민의 뺨에서 끝도 없이 떨어지는 말간 눈물을 지켜보았다. 아까 비 맞을 때처럼 운다. 조금 전이었으면, 그때였다면 눈물을 닦아줄 수 있었을 터인데. 생각하며 윤기는 주먹을 말아 쥐었다. 대감마님의 말이 맞다. 점차 주제 넘는 생각들을 품게 되는 듯하다.
달이 어스름하게 뜬 밤. 윤기는 인기척에 눈을 떴다. 덕대야, 대감어르신께서 부르신다. 다른 노비가 덕대를 부른다. 어르신께서? 그리고는 미동도 없이 누워있는 윤기를 보고는 방밖으로 나간다. 걷지도 못하는 놈이 무슨 일을 하려고.
윤기 역시 덕대의 생각대로 아무런 의지도 없었다. 낫는데 얼마나 걸릴까. 지민이 신경 쓸 텐데. 어서 빨리 나가서 괜찮다고, 이런 것쯤은 별 것 아니라고. 천 대도 더 맞을 수 있다고. 울지 말라고 그리 말해주고 싶었다.
“윤기야.”
누군가 작게 부른다. 문 방향을 바라보니 장지문 사이로 누군가 날래게 뛰어들어와 문을 닫는다. 윤기가 흠칫 놀랐다. 지민이었다. 그것도 이미 자리옷*을 입고 있었다. 윤기의 입이 떡 벌어진다. 지민이 처소를 찾은 적은 여럿 있지만 이런 밤은 처음이었다.
“네가 여기 어찌….”
“도무지 네가 신경이 쓰여 잘 수 없었다.”
윤기는 지민의 말씨가 변한 것을 눈치챘다. 오늘 들은 말 때문이겠지. 크게 중요하진 않았다. 어찌되었거나 박지민이라는 것 자체가 윤기에겐 중요했다. 지민은 품에서 작은 무언가를 하나 꺼낸다.
“상처를 보여주겠니.”
“이게 뭡니까.”
“약이다. 상처에 아주 좋다고 했어. 아버지한테 예전에 받은 것인데 윤기 너한테 주려고.”
지민의 윤기의 바짓단을 잡는다. 윤기가 지민의 손을 딱 붙잡아 막았다. 이미 울퉁불퉁 터진 종아리는 시퍼런 멍까지 올라오고 있었다. 이 꼴을 지민에게 보여주고 싶진 않았다. 보면 또 마음 여린 도련님은 눈물을 한 바탕 쏟을 테지. 그것이 윤기에게는 종아리가 터지는 것보다 더 신경 쓰이는 일이었다.
“괜찮습니다. 하나도 아프지 않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도련님이나 고뿔에 들지 않게 조심하시지요. 정 걱정되면 낮에 제가 직접 바르겠습니다. 어차피 어두워서 잘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리 할래?”
약을 윤기에게 전해준 지민은 그럼에도 나가지 않고 머뭇거린다. 그러더니 풀이 잔뜩 죽어 말한다.
“내 정말 미안해.”
“…괜찮다고 했습니다.”
“미안해.”
지민의 고개가 점점 숙여진다. 윤기는 혀를 차고는 머뭇거리다가, 결국 지민의 머리칼 사이로 제 손을 넣어 흩뜨린다.
“이까짓 거, 백정으로 밖에 살았을 때에 비하면 아픈 축에도 끼지 못합니다.”
“윤기야.”
검은 어둠 속에서도 맑고 빛나는 지민의 눈은 어찌 그리도 잘 보이는 건지. 지민이 제 머리를 헤집는 윤기의 손을 꼭 붙잡는다.
“앞으로 내 너를 이리 되지 않게 꼭 지켜주겠다.”
“…….”
“네가 그랬지. 날 지켜줄 거라고. 나도 그럴 거다. 나도 널 지킬 거야.”
지민 역시 어둠 속에서도 곧장 윤기의 눈을 마주한다. 어린 아이 역시 그 까만 눈에 맹세했다.
“내가 널 꼭 지켜줄 거다. 어엿한 어른이 되어 커서도.”
윤기는 그 때, 가슴에 묵직한 돌이 굴러 떨어진 것만 같았다. 꼭 잡은 손에 제 맥박이 거기 달려있는 것만 같았다. 묵직한 가슴에 윤기가 느리게 숨을 쉰다. 아무래도 아까 맞은 게 이제야 반응이 오나. 작은 손이 따뜻해서 그랬던가. 아니면 어둠 속에서도 유달리 선명한 지민의 부리 같은 입술과 별 같은 눈동자 때문이었나.
어찌되었거나 가장 중요한 건 좋다는 거다. 그저 좋다. 지민이 제 손을 잡아주는 게. 왜 그렇게 둘만 이렇게 있는 게 좋은지, 지민의 그 말에 들뜨는지 그때는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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